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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년법은 1점 1획도 성취될 율법이고 복음이므로 읽어주시고 퍼나르기 홍보(선교)를 부탁드립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로 본 재림의 준비
쉽게 구분하고, 경솔하게 판단할 수 없는 양과 염소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양과 염소의 비유는 고난주간 화요일 왕이 행한 강론 중에 마지막으로 한 강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비유 중에 마지막 비유입니다. 재림의 때에 왕이 심판의 장소에 나타나서 모든 민족을 한곳에 모아서 각자에게 양과 염소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양은 의인으로 영생의 복을 주고, 염소는 영원한 벌을 주는 내용입니다(마 25:46). 마지막 강론, 마지막 비유가 마지막 때의 엄중한 심판이 내려지는 내용입니다.
양과 염소를 나누는 기준도 양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자비를 베푼 행위이고, 염소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보지 않은 행위에 대한 징벌입니다. 여기서 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사와 함께 와서 영광의 자리인 왕의 자리에 앉아서 하는 심판입니다.
가축을 길러보면 양은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릅니다. 그러나 염소는 성질이 급하고, 사람을 따르기보다 제길만 찾습니다. 색깔도 양은 젓양의 경우 대부분 흰색이지만, 염소는 대체로 검거나 얼룩무늬가 많습니다. 아마도 양과 염소의 구분은 이런 특성을 따라 분류한 듯하지만, 그 가축의 특성 자체는 여기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의 비유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행한 자비가 영생을 얻습니다. 아니면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필자는 평소에 성경을 읽어도 양과 염소의 비유에 대해서는 의문이 컸습니다. 마지막 때에 영생과 영벌을 가리는 내용인데 그 의미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개 장소에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석을 보아도 그 내용이 본문이 강조하는 자비에 대한 내용인지, 본문에도 없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지 모호합니다.
필자가 가진 성경 중에 낡은 성경 한 권이 있는데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는 말씀의 여백에 날짜(2005년 5월 15일)와 성구(롬 16:3,4절)가 적혀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공개 장소에서 처음 들어본 날입니다. 그런데 메시지의 핵심 내용이 바울 같은 사역자를 도우는 것이 양처럼 ‘작은 자’를 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메시지가 제게는 너무 이상하고, 납득하기 어려워서 날짜와 구절을 적어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은 지금도 계속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습니다. 필자는 그런 확신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도 양과 염소의 비유가 보여주는 양처럼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 필자의 삶이 염소처럼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로 지금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양들은? ’지극히 작은 자‘가 보입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3)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마지막 때에 양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양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주가 주릴 때 먹을 것은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양(의인)들은 놀라며 “우리가 어느 때에 주에게 그렇게 대했느냐?”라고 합니다. 이에 주인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염소들은? ‘지극히 작은 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염소로 분리된 자들에게 주인은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마 25:43). 그래서 저주를 받은 자라고 악평하고 타는 불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염소들은 “우리가 언제 주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며 항변합니다. 이에 주인은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자비는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8)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혀 있는 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결핍의 상태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이므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인은 이렇게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있습니다. 이 주인이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앉으실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 비유는 남의 도움이 필요한 자, 그것도 절실하게 필요한 자에게는 우리가 먼저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먼저 달려가서 구조해야 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내가 어려움을 겪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극히 작은 자들처럼 배가 고파 죽을 지경, 타는 목마름, 엄동설한에 옷 한 벌 없이 헐벗은 신세, 죽을병에 걸리고, 나그네가 되어 외롭고, 옥에 갇혀서 고통을 당해보아야 이 말씀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려고 오셨던 구세주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신앙고백이 저절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작은 자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는 능력자를 만나야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역할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구원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내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지만,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대신하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제이고, 경제구원입니다. 경제문제의 해결 방식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경제구원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여기에 합리와 비합리, 그 행위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논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의 비유는 비유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사용한 단어나 문장은 쉽고 간결하여 해석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이 비유는 내용이 특이하여서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지,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끼워 넣은 것인지를 두고 논의를 합니다. 성경 연구가 볼트만(R. Bultmann) 과 큄멜(W.Gummel)은 “비유를 초대교회 교부(지도자)들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와 함께 마태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에 마태의 특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려면 먼저 예수님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마굿간에서 태어나십니다. 병든 자를 만나면 이유를 묻지 않고 치료하여 주었고, 배가 고픈 자에게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모두를 먹이시는 예수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가난한 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를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두고, 비유의 근원을 찾으려고 시간이 들이고, 논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구조대원이 사람을 구하지는 않고, 물에 빠진 이유를 찾고 있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비유 안에 들어있는 어려운 단어, 공궤와 공양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양들은 ‘공궤’라는 말을, 염소는 ‘공양’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한 말이지만, 여기서 베풂이나 섬김의 대상자가 다르다는 것이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가 주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양은 ‘공궤(供饋)’, 염소는 ‘공양(供養)’으로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마 25:37)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 25:44)
비유에서 “공궤(供饋)”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드레프사멘’, 원형은 “트레포”입니다. 개역 성경은 ‘공궤’로, 개역개정 성경은 ‘음식 대접’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단어는 ‘양육하다’, ‘사육하다’, ‘공급하다’ 등의 뜻을 가집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이지만, 이 말은 ‘(어린이)를 양육하다’, ‘(가축을) 사육하다’와 같이 부모가 자녀에게, 사육사가 가축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자라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배고픔도 해결하여 주지만, 정상적인 생활 또는 성인, 성체가 되도록 보살펴주는 것을 뜻합니다. 함께 살면서 부모가 자식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물질과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에서 “공양(供養)은 헬라어 ‘디아코네오’ 원형은 ‘디아코니아’입니다. 이 단어는 ‘섬기다’, ‘시중들다’, ‘봉사하다’ 등의 뜻을 가집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맞는데 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물론, 두 단어는 성경에서 구분 없이 쓰이기는 하지만, 이 비유에서 이렇게 의미상의 차이가 있고 구별되고 있습니다. 특히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주를 대하는 태도에서 두 단어는 의미가 다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에게 행한 자비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 자비가 나에게 한 것이라고 했을 때 양들은 우리가 언제 주에게 자비를 베풀었느냐고 합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음식을 주어 구제는 했어도 주께는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는 그렇게 양들이 도와주는 주린 자에게 주의 마음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에서 양들은 이미 주를 알고 있고, 믿고 있어서 주의 뜻을 따라서 그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도왔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염소들은 다릅니다. 양들은 주를 섬기는 데에만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곧 주린 자에게는 마음이 가지 않았고, 물질을 내어서 자비를 베풀지 못했습니다. 주를 섬기기 바빠서 자비를 베풀 시간이 없습니다. 주는 염소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를 섬기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이에 주는 너가 작은 자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나를 돌아보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염소들이 주를 섬긴다고 바쁜 사이에 진작 주의 마음은 이들이 외면했던 주린 자, 목마른 자, 병 든 자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염소는 '큰 자'를 섬기기에 바빠서 '작은 자'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들과 주는 큰 자보다 작은 자, 그것도 지극히 작은 자, 도움이 절실한 자에게 마음과 행동, 그리고 물질이 가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한 우리에 안에 함께 있어도 양과 염소가 가진 차이입니다.
<양> : 주의 뜻을 따라서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등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보고 돌보아 줌
주를 직접 공궤(供饋)한 사실은 없음(주에게 음식 대접을 한 사실이 없음)
<염소> : 주린 자와 목마른 자 등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보고 돌보아 주지 않음
주를 공양(供養)한 사실은 있음(주가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고 섬겼음)
<주> : 자신을 공양한 염소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마음이 있고, 이를 도운 양을 칭찬함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희년법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마 20:1)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나그네들은 경제적인 문제가 절실합니다. 병든 자는 질병으로 생업을 꾸리지 못하므로 치료비와 생활비가 필요합니다. 빚을 갚지 못해도 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마 18:30,34). 곧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지극히 작은 자는 주로 경제적으로 당하는 궁핍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경제적 궁핍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물과 빵과 같은 먹을 것을 계속 공급하여 주면 해결이 됩니까? 한번 도와주는 것은 가능할 수 있어도 지속적으로 돕기는 어렵습니다. 궁핍한 자들의 의식주를 남이 해결하여 주려면 그 재원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도 이런 문제는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신계 문제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물질계의 문제로 경제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구제부터 하는 것이 맞지만, 근본 해법은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오경에서 희년법으로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을 세워놓았습니다. 희년법은 합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틀에서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성경 희년법에서 분배받은 기업은 인간 생존의 필수재이므로 자손 대대로 상속, 경작하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도록 제도화해 놓았습니다(민 36:9, 레 25:10,23,24, 출 32:13). 그래서 마지막 때는 이런 자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마 25:34)를 기업으로 상속받습니다(히 9:15).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지키지 않았던 마태복음 23:23의 정의와 자비는 희년법과 포도원 천국 경제법의 준수로 가능합니다. 경제정의의 뿌리(根本)는 토지거래법을 지키는 것입니다(레 25:15,16). 경제생활에서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레 25:3,23), 네 것과 내 것(마 20:14,15),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눅 20:25)을 구분할 수가 있을 때, 정의가 지켜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는 자비의 정점(頂點)은 희년법이 말하는 종의 속량과 토지 무르기에 있습니다. 생활에서 해야 하는 자비(헤세드, 인애, 긍휼)는 보아스처럼 토지 무르기를 하여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도 땅과 일터를 주어야 해결이 됩니다. 사람들이 희년법을 지킨다면 양과 염소의 비유와 같이 지극히 작은 자, 곧 주린 자와 목마른 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에 생겨도 숫자가 적으며, 그때는 손을 펼쳐 도와주면 됩니다(신 15:11). 이것이 성경 희년법이 말하는 문제의 궁극적 해법이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십자가가 가르치는 구원원리입니다.
‘양은 영생’, ‘염소는 영벌’,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 곧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와 병든 자를 도와주는 양들은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런데 염소처럼 주만 섬기고 작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불에 타는 영벌에 처해집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그러면 필자도 양처럼 살고 있나? 염소로처럼 살고 있나?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양은 크고, 염소는 작다는 내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필자의 사사로운 사심일 뿐, 분명히 ‘양은 영생’, ‘염소는 영벌’로 갈라지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따른 필자의 삶은 의문이 생기고 겁이 납니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함에도 삶에서는 좀 이기적이고, 재물에 대한 탐심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도우는 기부나 후원 헌금 등에는 후하기보다 인색한 편입니다. 주위에 수해나 화재를 당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는 공동체가 저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필자가 직접 현장에 달려가는 것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믿음으로는 구원받은(받을) 그리스도인이 맞기는 하지만,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의 양들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하는 실천적 행동은 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염소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양과 염소 비유에 대하여 구원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ㄱ.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ㄴ. 다른 한 편으로는 양들처럼 자비를 실천하여 구원(영생)을 받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를 이루지만(롬 1:17), 그 믿음과 의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롬 12:13), 우는 자와 함께 울며(13), 원수라도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20).
사람은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은 양처럼 작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위나 자기 의지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람은 우리의 죗값이 십자가의 보혈로 치러지는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보는 양과 염소(작은 자와 양, 그리고 이웃)
양과 염소의 비유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합니다. 이것이 새 계명이 가르쳐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눅 10:25,27). 이것이 마지막 때를 맞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가 영생의 방법을 물었을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 계명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이 누구인지,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 곧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이웃에게 양들과 같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과 염소처럼 다른 이유로 피해 가는 사람을 구분하여 보여줍니다.
여리고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상처투성이로 반죽음 상태인 사람이 있습니다(눅 10:30). 이를 본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즉시 필요한 구호 조치를 합니다. 상처는 치료하여 싸매 주고, 나귀(짐승)에 태워서 주막(여관)으로 데려와서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나을 때까지 보살펴 달라면서 필요한 비용도 미리 맡깁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을 것이니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런 후에 여행길을 다시 떠납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가더라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갑니다(눅 10:31,32).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주관하는 지도자며, 레위인도 성전관리나 두루마리 성경을 보관하는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자입니다. 이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한 이유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자기들이 하는 제사와 종교적 업무에 방해가 될까 하여 피해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분이므로 피가 묻은 사람을 보고 피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의 구제보다 중한 일로 생각합니다. 주께 드리는 제사가 긴급한 구제보다도 더 우선이라는 원칙을 고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도왔습니다. 이것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돌아본 양의 행동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필요한 이웃은 자기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긍휼)를 원하십니다(호 6:6, 마 9:13) 예수님은 작은 자에 대한 이웃 사랑의 실천을 영생의 방법으로 제시하여 강도 높은 교훈을 주거나(눅 10:25), 심지어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마 25:46).
성경에는 가난한 자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라는 규정이 유달리 많습니다. 아마도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는 공산주의의 이념보다 강도가 더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며, 네 것 내 것이 분명한 사유재산제이고, 자유시장경제 체제입니다.
특히 희년법은 인간의 생존과 자유를 기초에서 지켜주고, 경제적 불평등이 생기지(커지) 않도록 제도화해놓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면제년, 종의 해방,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권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선지자들의 외침도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주문이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빈곤 문제
이런 사고는 신약에서도 예수님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희년을 선포하였고(눅 4:16~19), 신상수훈, 주기도는 물론이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화요일 성전강론과 감람산강론에서도 가난한 자의 배려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네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경제 복음이 주류를 이룹니다. 야고보서 기자도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말며, 부자들이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약 2:13). 부자들이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고 꾸짖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겠느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합니다(요일 3:17,18).
지금도 지구촌 70억 인류 가운데 절반은 빈부격차의 양극화로 갈려져 있습니다. 기아 상태는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통계상으로 8억 명이 기아 상태이며, 하루에 1만 명 넘는 생명이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들, 지금도 시리아는 홍수로, 모로코는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다쳤습니다(2023년, 9월). 우리나라도 피해를 보고 있는 기상이변과 그에 따른 식량 위기는 이들에게 더 큰 문제로 다가옵니다. 지구촌 인류가 경제 성장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내세우지만, 이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아니, 관심만이라도 가져야 하는데 관심마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란 이들이 아닐까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관련이 없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오실 재림 주에게 맡겨야만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주인이 올 때를 생각하여 깨어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할 자신들을(마 24:45)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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