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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
은유 지음, 지금여기에 기획, 오월의봄 2016.
들어가는 말
잠깐 내린 눈
우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자백>을 보던 날, 영화를 보는 내내 울던 친구는 극장을 나서며 한숨 쉬듯 말을 뱉었다. “저 억울함을 안고 어떻게 살았을까.” 사소한 억울함도 참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저토록 큰 사건에 휘말려 육신을 몰수하는 고문을 겪고 간첩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삶이라니.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억울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불공정한 일은 어째서 발생하는가.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폭군처럼 들이닥칠 때 일상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그 폐허 위에서 또 다가오는 하루를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는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힘은 무엇인가. ‘왜 하필 나일까’라는 물음의 도돌이표를 어떻게 안고 사는가. 그런 이야기를 담아냈다.
김순자(71), 이성희(90), 박순애(86), 김흥수(80), 김평강(76), 고 심진구의 처 이정미(52), 김용태(57)가 그 주인공이다. 간첩 조작 사건에 휘말린 각각의 생애 서사에는 노동, 여성, 빈곤, 노인 문제 등 한국 사회 구조적 모순이 들어 있었다. 만들어진 간첩이기 전에 그들은 딸이라서 배움의 기회를 차단당하고 모진 시집살이와 가부장의 폭력을 견대는 젠더 불평등의 희생자였고,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조건을 바꿔보고자 투쟁하던 구로 공단 노동자였다. 분단 조국의 설움에 못 이겨 통일을 위해 앞장서는 가슴 뜨거운 시민이었고, 입 하나 덜기 위해 열네 살부터 고깃배를 탄 착실한 아들이었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일요일도 없이 초침처럼 일하는 재일교포 가장이었다. 당시로는 드물게 법조인을 꿈꾸던 여대생이었고, 한글을 몰라도 고기 잡고 자식 키우고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평범한 어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간첩이 되었다. “우든 좌든 벌레처럼 기어서 어디 붙어서라도 살아야”(박완서)했던 극단적 반공이념 시대 전후에 태어나 삶의 터전을 일구던 자리에서 꼼짝없이 짓밟혔다. 모든 폭력이 발생하는 원리가 그렇듯이 가해자는 “그래도 되니까” 조작한 것이고, 피해자는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조작 대상이 됐다. 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드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조작 대상은 재일동포 유학생 혹은 교민이거나 강제 납북된 어부, 북으로 넘어간 친척이 있는 이산가족들이다. 영장도 없이 국가기관에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발길에 차이고 매질에 피를 쏟고 전기의자에 앉는 고문을 당한다. 초인적 힘으로 버티던 그들은 “가족을 데려다 똑같이 고문하겠다”는 협박에 무너지거나 고립의 공포와 밤낮없는 가혹행위에 심신이 허물어져 거짓 자술서에 손도장을 찍는다.
이 과정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 인력이 동원된다. 사람을 사람 아닌 상태로 비틀어버리고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만들어내는 고문 기술자, 그 고문으로 혼절하면 언제든지 달려와 죽지 못하게 살려두고 다시 고문받을 수 있도록 내버려둔 의사, 나는 인터뷰이의 말 속에 조연처럼 잠깐씩 등장하는 의사의 존재가 더없이 궁금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몰골이 짓이겨진 환자를 두고 빠져나오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합리화로 자신이 목도한 비참에 눈감았을까. 간첩 만들기의 주연배우는 물론 법조인이다. 삼권분립주의와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법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적용하는 헌법기관은 다르지 않을까. 법정에 가면 그래도 ‘판사님’은 내 진실을 알아주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고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 믿음은 헛되고 헛됐다.
“모든 것이 애매합니다만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검사가 이래요. 아니 모든 게 애매한데 어떻게 사형이냐고.”(김평강) “검사가 보안사에 다시 넘어가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하라고 지들끼리 눈을 꿈쩍꿈쩍하고 그래, 우리나라 공안검사들은 인간이 아니라니까.” “변호사를 300만 원 빚내서 겨우 구했는데 대뜸 보자마자 그러는 거라. 전부 다 부인한다고 해서 판사가 알아주지도 않으니 시인할 건 시인하고 갑시다. 아니 뭘 시인해요. 다 조작인데.”(김용태) 이 일사불란한 무한 폭력의 회로에 갇혔던 김흥수는 이렇게 말했다. “배운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고 못 배운 걸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고문 기술자는 간첩 조작사건 이후 특진해서 중앙의 요직으로 가거나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공안검사 출신들은 ‘공안통’이라는 훈장을 달고 여전히 전문가 행세를 하며 TV에 얼굴을 내밀고 이 사회 주요 자리에서 일신의 영달을 누리고 있다. 말 그대로 ‘응징 없는 역사가 불러온 무간지옥’이 아닐 수 없다. 나쁜 지도자 한 사람이 국가 폭력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간첩 조작 사건에 복무한 이들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느끼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서 눈 돌리고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의 성실한 임무 의식, 그리고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프리모 레비)이 사회 곳곳에 악의 저변을 확대하고 지옥의 통로를 내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아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67쪽
듣고도 믿기 어려웠던 피해자의 말들, 보고도 의심했던 빽빽한 판결문과 사건 관련 자료들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놓고 나는 그것을 활자로 정리하는 데 1년여 시간이 걸렸다. 울릉도에 가본 적도 없는데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딨냐며 부정하고 환멸하며 덮었다가 다시 펼쳐 한줄 한줄 정독하고 파악하기를 반복했다. 끊어진 용수철처럼 자주 주저앉곤 했지만 내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세상의 악에 대한 무지는 나의 게으름일 뿐, 그 엄연한 시간을 살아낸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5년부터 17년까지, 영원 같은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피해자들은 일구월심(日久月心) 자신을 기다려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연락할 데 하나 없는 막막한 처지에 놓였다. 신호등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할 정도로 생활 감각을 상실하고 가족은 “나를 찾지 말라” 외면하는 고립무원의 처지, 관계의 끈이 끊어진 이들은 도시 빈민층이 되어 식모살이, 막노동을 전전했다. 도쿄대 박사학위보다 간첩이라는 낙인이 더 위세를 부리던 세상인 탓에 명망 높던 수의학 교수는 강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외딴 지역 양계장에서 닭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
피해는 가족들에게까지 번졌다. 김용태의 아들은 경찰시험에 합격했으나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순자의 딸은 엄마가 감옥에 들어갔던 시기에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아무 집에나 들어가 일해주고 그 돈을 받아 생리대를 샀다고 했다. 이것은 얼마 전 알려진 저소득층 여학생이 신발 깔창에 휴지를 덧대어 생리대로 사용한다는 사연과 그대로 겹친다. 영구임대아파트에서 24년째 혼자 살고 있는 박순애가 자신의 방에서 잠자는 빨간 전화기를 가리키며 “언제나 그대로여”라며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는 고령화 사회 무연고 독거노인의 얼굴이 된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의 할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오가다 마주치는 이웃이며 버스 옆자리에 앉은 동료 시민인 것이다.
지난봄 김평강을 인터뷰하러 제주도에 갔다. 세월호에 탄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왔을 제주의 선홀에 자리한 기억공간 ‘리본’에서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시작을 앞두고 어르신들이 마당에 둥글게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말했다.
“전직 간첩들, 여기 다 모였구만!”
새파란 4월의 하늘만큼이나 명쾌한 웃음이 터졌다. 간첩이란 말을 웃어넘기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까.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모질고 지난한 한 세월을 살아냈고, 살아갔고, 살아 있다. 그들 모두 30~40년 만에 무죄를 밝혔고 억울함을 씻었다.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까 싶었는데 기어이 왔고 안 죽고 살아서 맞이했다고, 최고령 어르신 이성희는 말했다. 사실 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시간 감각에 애를 먹었다. 간첩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보낸 17년, ‘나는 무죄다’라는 외침으로 버틴 40년, 그 세월의 폭과 시간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철없는 물음이 삐져나왔다. 어떻게 살았느냐고, 어찌 견디셨느냐고, 나의 우문에 김순자는 이렇게 답했다. “살긴 뭘 어떻게 살아.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산 거지.” 이성희는 “복역 기간이 10년이 지나니까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죽고 싶었다”고 도리질 쳤다. 박순애는 “선량한 사람의 운명을 뒤바꿔놓은 나라를 원망했다”며 긴 한숨을 짓다가 또 금세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도 진실은 언제고, 반드시, 밝혀진다는 거, 나 그걸 알았네.”
“사람은 삶의 주기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거나 늦게, 너무 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경험이 쌓여야 알 수 있는 문제인데 누적된 증거가 없는 탓이다.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어떤 것이 지속되리라는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 젊은이의 슬픔이 너무도 절망에 가까운 것은 젊음의 무지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위대한 성취를 꿈꾸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너무나 길어 보이고, 너무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삶에 필요한, 삶이 가져야만 하는 그 모든 간격−열망과 열망,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격, 잠을 위해 멈추는 시간들처럼 피할 수 없는 멈춤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숨 돌릴 휴지기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불행한 젊은이에게 삶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의 일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에 더 미묘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마음의 평화가 있으리라.” -엘리스 메이넬 <삶의 리듬>, 《천천히 스미는》, 84쪽.
인터뷰이 이정미는 국가폭력 피해자 고 심진구의 부인이다. 두 사람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났고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심진구가 집 앞에서 검은 승용차에 태워져 사라졌다. 왜 어디로 남편이 끌려갔는지 몰라 가슴이 졸아든 이정미는 거의 열흘 만에 안기부에서 연락을 받고 시내 호텔에서 남편을 만난다. 두 사람에게 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건물 밖 입구에서 차를 빼러 간 안기부 사람들을 기다리던 중, 1~2분이나 될까 한 짧은 순간, 심진구는 부인에게 말했다. “나를 간첩으로 몰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라.” 그 순간 첫눈 같은 게 내렸고 그 기억이 콕 박혔다고 이정미는 반복적으로 진술했다.
잠깐 내린 눈, 간첩이라는 번갯불 같은 말이 내려치는 순간 하얀 눈이 내렸다는 것. 어쩐지 몽환적인 그 상황을 나도 가만히 그려보았다. 잠깐 내린 눈, 받아들이기 벅찬 현실을 뒤로 하기 위해 하늘이 뿌린 선물이었을까.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하는 자연의 신비인가. 잠깐 내린 눈은 내가 간첩 조작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메타포가 되었다. 잠깐 내린 눈,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에 발생한 일, 손등에 눈을 맞은 사람만 아는 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믿어주지 않는 일, 그 어떤 삶의 지독한 장난도 돌이켜보면 또 잠깐 내린 눈 같은 순간의 일. 무죄판결의 기쁨도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시든다는 점에서 잠깐 내린 눈 같은 것.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환영.
“2016년 초 국가폭력 피해자를 기억하는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에서 인터뷰집 발간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난 정중히 거절했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인 존재가 너무 낯설었다. 그간 살면서 직접적으로 접점이 없었기에 아무런 상이 잡히지 않았다. 내게 간첩 조작 사건이란 군부독재 시대를 휩쓴 광풍으로, 현대사 역사책에 누워 있는 단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인터뷰 작업이 국가폭력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사는 이야기, 즉 삶의 질곡을 견디며 살아온 일상 그리고 끝내 무죄를 밝혀내고 존엄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 그리하여 몹시도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다는 기획 의도를 듣고 조심스레 용기를 냈다.
인터뷰 작업을 마친 나는, 어르신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한 세계를 본 것에 감사한다. 폭력과 존엄 사이를 눈물, 연민, 인식, 성찰, 화해, 신의로 채운 묵직한 생애 서사는 물론이고 소소한 에피스드도 뭉클하고 재미나다. 감옥은 바깥을 기준으로 폐쇄한 공간이지만 그 자체로는 하나의 완벽한 세계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소꿉놀이하듯 김치를 담가 먹었고, 젓가락에 물을 묻혀 수학 문제를 풀었으며, 하얀 가운 입고 재소자들을 치료했고, 책을 돌려 읽었다. 밥을 거부하는 단식투쟁을 통해 더 나은 식사를 얻어냈다. 박순애는 ‘감옥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가장 많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김평강은 감옥에서 대접받고 잘 지냈다며 출소할 때 얼굴살이 통통히 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랐다고 전했다. 이는 감옥도 살 만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장소의 여건보다 관계의 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궁궐 같은 집이라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결백함을 알아주는 동료가 있고, 말이 통하는 벗과 책이 있고, 내가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때 그들은 감옥이지만 살 만하다고 느꼈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 남을 돕기에 적당한 조건, 더불어 사는 이상적 관계가 따로 있지 않음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하나씩 시도하고 배워가는 게 삶의 기술임을 ‘보안수’ 어르신들은 몸소 보여주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삶을 향해 미소를 지어. 마치 악하고 슬픈 모든 것은 거짓임을 확인하고 그 모든 걸 순전한 빛과 행복으로 바꾸어내는 어떤 마법 같은 비결을 알아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야. 그리고 줄곧 내 자신 안에서 이런 기쁨의 이유를 찾아보려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다시 스스로에게 미소를 짓는 수밖에. 스스로를 비웃기도 하고, 비결은 결국 삶 그 자체인 것 같아.” -케이트 에번스, 《레드 로자》, 177쪽.
나는 삶에서 현명한 선택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좋은 직업을 택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책을 고르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삶은 스스로 선택한 일보다 선택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좌우되곤 했다. 어느 날 닥친 느닷없는 사건들, 무작위로 날아온 화살처럼 내 마음을 후벼 파는 일들, 그 역경을 대하는 태도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할 관계가 훨씬 중요했다. 이 책에 나오는 어르신들의 긴 삶의 여정을 보면서 여실히 느꼈다. 삶에 닥친 인위적인 폭력 앞에서 그들은 침몰하지 않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했다. 힘없는 사람을 돕고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 남들의 집을 지어주는 건축가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활동가로 존재를 변신하거나 고향을 지키는 나무 같은 사람,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큰 사람이 되었다. 제아무리 각박한 세상일지라도 존재의 눈물을 알아보는 선한 인연은 어디선가 나타났고 두 손 잡아주었다.
이 책을 기획한 ‘지금여기에’ 변상철 사무국장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귀인 같은 존재였다. 여기에 나오는 인터뷰이 일곱 명은 그가 2010년 즈음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할 때 만난 피해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재심 청구에서 기각되고 거의 포기하다시피 방치된 사건을 그가 맡아 치밀한 현장 조사와 증거 획득으로 무죄판결을 이뤄냈다. 그런 그를 어르신들은 은인으로 대접하고 자식처럼 의지했다. 나는 국가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수시로 곤경에 빠졌는데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해자들 삶을 고스란히 체화한 그 덕분에 타인의 삶에 한걸음 더 들어갈 수 있었다.
“기억이란 지나가는 물고기를 모두 잡는 일은 결코 없으면서, 종종 있지도 않은 나비를 잡아버리는 그물 같은 것이었다”고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기억은 원래 누군가의 기억이다. 변형과 삭제, 왜곡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그 한계에서 이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국가폭력 피해 당사자의 기억과 증언에 충실했다.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수사기관에서 거짓 자백을 강요당하고, 판검사 앞에서도 거짓 증언을 해야 했다. 감옥을 나온 후에도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숨기고 살았다. 자신을 온전하고 활발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지 못한 그들에게, 자기 합리화이든 삶의 의미화이든 후련하게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또한 값진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들을 용기로 화답할 차례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살아온 시간이 빚어낸 말들이 잠깐 내린 눈처럼 작은 위안이 되어주길, 폭력과 존엄 사이에서 휘청이는 이들에게 하나의 균형추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2016년 11월, 첫눈을 기다리며
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