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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자음과모음 2022.
Pseudoarbejde: Hvordan vi fik travlt med at lave ingenting
노동과 인간의 본질
우리는 왜 일하는가
이 장에서 우리는 시간을 해방하고 삶에 의미를 되찾는 방법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중요한 질문 하나에 답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미루던 철학적 질문이고 또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질문이기도 하다. 인류학의 철학적 질문이며 인류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에 핵심이며 아주 오래 묵은 질문이기 때문에 온갖 사람들이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이고 누구에게나 딱 떨어지는 대답은 없다.
이 문제를 먼저 다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에 아무 영향 없이 가짜 노동을 외과적으로 도려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짜 노동에 매달린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좋기 때문이거나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앞으로 더 나아갈 방법을 추천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기본 상태를 꼭 집어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노동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해, 일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왜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삶이 희화화되는지 성찰할 근거를 주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인간이 일하는 이유에 대한 여덟 가지 답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1부와 2부에서 배운 것을 기본으로 가짜 노동 없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실용적 단계를 제안하겠다.
고대 그리스와 기독교의 관점
고대 그리스에서 노동은 칭송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당시엔 노동을 해야 하는 인간만 노동을 했다. 그리스 사회는 시민과 노예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시민이 가진 많은 특권 가운데 하나는 여가였다. 그들은 여가 시간에 토론이나 강연 모임을 개최했고 이런 것들의 유일한 목적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었다. 한편 노동은 좀 더 실체적이었다. 구두장이는 고객을 위해 신발을 만들었고, 신발 제작은 신발의 본질에 복종해야 하는 활동이었다.
여가 시간에 시민은 어떤 실용적 목적도 가질 필요가 없었고 자유롭게 자아를 벗어났다. 고대 그리스인은 여가 시간을 스콜레(scholé)라고 불렀고 이런 토론회나 강연회는 학교(school)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의 토론회나 강연회는 정식 교육기관은 아니었지만 현대적 ‘형성’ 개념에 기반을 두었다. 즉, 배움은 더욱 완전한 인간, 진리에 근거한 삶을 만들었다.
역으로 노동의 하찮음은 사람을 필요에 얽매었고 부자유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평생 일해온 사람의 말은 가치가 낮다고 생각되었다. 노예나 일꾼이 덜 흥미로운 존재인 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들이 덜 고상하며 잘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 세기 동안 상황은 비슷했다. 기독교가 노동의 본질에 대해 전혀 새로운 주장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우화와 관련이 있다. 어느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세 노예에게 달란트라는 금화를 맡겼다. 첫 번째 노예에게는 5개를, 두 번째에게는 2개, 세 번째에게는 1개만 맡겼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장사하면서 각각 10개와 4개로 불렸다. 세 번째는 금화를 땅에 묻었다. 주인이 돌아오자 5개를 받은 노예가 자신이 불린 10개를 내보였고 주인은 그를 칭찬하며 더 큰 책임을 맡길 거라고 말했다. 2개를 받고 4개를 내민 두 번째 노예에게도 주인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세 번째 노예가 묻었던 금화 1개를 내밀자 주인은 화를 내며 그 금화를 첫 번째 노예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이 우화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재능(탤런트)을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발전시키며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마도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일 텐데, 그리스적 사고방식에서 기독교적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을 나타낸다. 첫 두 하인에 대한 주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원래 가진 재능의 양이 더 중요했고 기독교인에게는 재능으로 뭘 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즉, 고대와는 달리 과정에 중요한 가치가 생겼다. 그리스인에게 10개를 가진다는 건 5개를 가진 것보다 무조건 좋은 일이었다. 반면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건 양을 불리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서구 문화에서 노동이 가치를 가지게 된 근원이다.
세상과의 유기적 상호작용
성취 과정이 가치 있다는 관념은 끈기 있게 이어졌다. 서구, 특히 근대에 칭찬의 대상이 된 것은 최종 결과물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 투입된 노력 그 자체였다.
독일 철학가 헤겔과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꼭 임금노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시간제 일당 노동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노동에는 자신이 탈 보트를 만들거나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도 포함된다. 노동은 처리 활동이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환경을 처리하고 자신을 외면화, 즉 체현하는 건 노동을 통해서라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변 세계를 처리함으로써 뭔가를 보트나 식사로 바꿔놓는다. 보트와 식사는 우리 내면에 있는 존재를 외부화한다. 인간이 목재와 음식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외부 존재 역시 내면화된다. 인간은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을 원하는 존재로 형성시킨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의 내면을 외면화시키고 외부를 내면화시키는 활동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 안에서, 환경 안에서 자리를 찾는다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하곤 했다. 인간은 일할 때, 즉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자신과 호응하는 세계와 만난다. 이는 조용한 상호작용이 아니지만 조화로운 상호작용이다. 인간, 돛, 바람 같은 다양한 사물이 한데 모인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반향이 일어난다.
소속되거나 소외되거나
노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불가분으로 연결돼 있어서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적 성장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어떤 것이다. 인간이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서의 유일한 핵심은 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 비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의 문제다. 왜냐하면 노동은 인간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헤겔과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만 세계에서 소속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노동이 인간을 세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인간의 성립과 붕괴가 모두 노동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이렇게 많이 일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훨씬 본질적이다.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이나 적절한 보상 여부에 대한 의문도 어느 정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가짜 노동의 문제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질과 관계돼 있다.
만일 우리가 타임머신에 올라타 1930년대 조상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미래의 너희는 왜 그렇게 많이 일하는가? 본질적인 일을 하는 것인가? 그 노동이 너희 세계를, 내면을 외면화하는 방식으로 처리하도록 해주는가? 아니면 무의미한 활동으로 채워졌는가? 겨우 두 시간 일하러 직장에 가는가? 다른 곳에서 본질적 활동에 참여할 자유를 얻기 위해 비본질적 노동을 하는가?
여기서 달란트 우화의 첫 번째 해석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우리의 재능이 사용되고 있는가? 아니면 재능을 가짜 노동 속에 파묻고 좀비처럼 살고 있는가? 헤겔과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가짜 노동은 우리에게 생각보다 더 많은 해악을 끼칠 것이다.
가짜 노동이 끼치는 진짜 해악
노동이 우리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의미 있는 작업 과정에 참여할 때 안정감을 느끼고 비본질적 노동에 참여할 때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소외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헤겔을 따라 소외에 대해 비슷한 논지를 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맥락에서 소외 상태란, 무엇이 진짜 노동이고 무엇이 가짜 노동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사무직보다는 산업 직군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산업 노동자가 소외됐다고 보았다. 산업 노동의 과정이 더 이상 세계와의 유기적 상호작용이 아니고, 보트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보트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노동자가 외부화된 내면의 형태로 자신을 돌려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산업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이질적인 대상이 되는 듯했다. 생산물에 아무리 자신을 갈아 넣어도 결과는 늘 더 많은 산업, 자본, 주가의 등락, 오염 등 인간이 만든 여러 형태의 소외 현상을 심화시킨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의 창조자를 공격한다.
비슷하게 포스트모던 (사무적) 노동의 특성, 즉 시간 엄수, 해결책 개발, 모방, 과시성, 감사, 회의, 홍보와 규제 같은 것이 노동자를 소외시키며 노동자가 하는 일에서 더 이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경제 내 노동의 분화는 노동자를 소외시켰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긍정적인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인류는 단독 행위를 통해서는 결코 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의 분화는 노동의 직접성과 정반대지만, 이런 안티테제는 진보를 자극할 수 있다. 인류가 넘어설 수 있는 한은 말이다. 아마도 그것이 러셀, 케인스, 로이드 라이트가 타임머신을 타고 와 우리에게 물어볼 만한 내용일 것이다. 인류가 한때 견뎌야 했던 고된 노동에서 빠져나왔냐고, 그리고 빠져나왔다면 자신의 환경을 처리하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채우고 있느냐고 말이다.
정보를 주기 위해서 말하는가, 아니면 홍보하기 위해서 말하는가? 고객을 돕기 위해 상황을 점검하는가, 아니면 정기 감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상황을 점검하는가? 환자와 학생을 잘 돕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목록을 체크하고 검사만 받게 하는가?
우리가 더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1930년대 선조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졌는지뿐만이 아니라 ‘일에 더 많은 자유’를 가졌는지 혹은 노동 생활이라는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데 어려움이 없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진실을 왜곡하는 거울의 방
여기서 우리는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소외의 본질에 대해 두 학파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학파(뒤르켐과 머튼 등)는 정상성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면 소외되는 거라고 주장한다. 사회가 칭송하며 모든 사회적 기능의 근간을 이루는 규준과 가치에 자신을 맞추지 못하면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다른 학파(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 등)는 정상성 자체가 소외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경우 정상성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으로 인간다워질 수 있다. 즉, 정상적인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의미다.
가짜 노동을 깨닫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사람이 ‘소외된 정상성’의 거울방 안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가짜 노동은 끊임없이 다시 자기 위에 반영되며 더욱 많은 가짜 노동, 허위 프로젝트, 허위 지위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차츰 소외된 것이 규범이 된다.
정말 그런 거라면, 다음과 같이 질문했을 때 어떤 대답을 들어도 믿기가 어려워진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고객, 시민, 회사, 국가, 세계에 중요합니까?’ 어쩌면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를 쓰는 데 너무 단련돼서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어느 수준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되더라도 계속 바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욕구 때문에 그 인식이 억눌린다. 게다가 가짜 노동이 바쁠 기회를 풍부히 제공하기에 개인은 이 충격적 진실로부터 보호될 뿐 아니라, 무의미한 일을 계속 지속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육감에 더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 업계의 전문용어가 맹위를 떨치는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무의미에 대한 인식을 빨리 일깨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짜 노동이 금기시되는 이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런던의 호텔 바에서 데이비드 벌처버와 나눈 대화로 돌아가보자. 그때 우리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가 말을 계속하는 한 우리는 열심히 듣고 열심히 대화에 참여했다.
우리는 여러 저녁 모임에서 가짜 노동에 대해 잡담하던 경험을 언급하며 몇몇 사람은 정말 금세 끄덕이며 동의해왔다고, 완전 무의미하고 허무한 그들 노동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밖의 대부분은 가짜 노동을 만든 다른 사람을 탓했다.
벌처버도 끄덕였다. “가끔 무슨 책을 쓰는 분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얼마나 적게 일했는지에 대한 책도 하나 썼다고 답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자기도 같은 기분이 든다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죠.” 벌처버가 몸을 기대며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
“또 한 가지 반응은 불안하게 웃으면서 그런 상황과 대화 주제가 정말 불편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분명 자기는 거기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증명하려고 서두릅니다. 열심히 일하고도 별로 바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한 비효율적 시스템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자신도 아는 거죠. 어쨌거나 모든 사람이 대외적으로는,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가 매우 바쁘며 고도로 유능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회사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 공허한 커다란 구멍이 있음을 인정해봐야 아무 위신도 서지 않으니까요. 그들이 일하는 시스템, 거대 민간기업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봐야 도발이나 일삼는 사람이라고 찍히게 될 뿐입니다. 민간기업도 공공 부문과 마찬가지로 무겁고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이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꽤 많아요. 공공 부문과 비교되는 것조차 싫어하면서 정작 본인이 그럴 때가 아주 많죠.”
가짜 노동은 동료 간에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노동이 무의미하고 허위로 가득 차 있을 뿐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한다. 벌처버가 계속 말했다.
“이렇게 금기시되는 이유는 자존감 때문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 정체성은 어디에 달려 있을까요? 종교와 국가의 중요성은 쇠퇴하고 있기에, 이제 사람들은 일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자기 인식을 받치고 있던 깔개를 누가 잡아 빼면 기분 좋을 수 없죠. 사람들은 성실한 회사에서 중요하고 대체 불가능한 직원으로서의 이미지를 보호하려 합니다.”(319-330)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