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장승백의 모든 사생활을 파악하고 배신감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 그가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란 것을 알았을 때 가장 충격이 컸었다. 하긴 처음부터 그런 걸 물어보거나 확인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그 문제를 따졌을 때 물어봤냐고 반격했을 때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나쁜 놈!"이라고 한 마디 하는 것 외에는. 이제 그는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여성 편력을 즐겼다. 그런 그를 제지할 방법도 없었다. 그녀가 제지한다고 그녀의 말을 들어 먹을 위인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 멋대로였다. 그리고 누구의 간섭이나 터치도 받지 않으려는 고집통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저 혼자서만 잘 나서 설치는 독불장군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임신된 것도 장승백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연 유산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성 수강생을 레슨 하는 장승백의 행동이 몹시 거슬렸다. "여보 여보, 누가 이렇게 하랬어!" 장승백이 수강생 여성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나도록 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가르쳐준 대로 수강생이 못 따라 하니까 사정없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때린 것이었다. 그런 행동에도 수강생 여성은 항의는커녕 오히려 몸을 꼬며 코맹맹 소리로 추파를 던졌다. '잘들 논다... 천박한 것들.' 백장미는 그런 행동들이 몹시 거슬렸다. 학원에서 레슨 중에 여성 수강생들과 행동 조심하라고 그렇게나 당부를 했건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특히 지금 수업을 받고 있는 정순애라는 수강생과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그들의 눈빛과 태도가 이미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수강생 여성한테 경고나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장승백한테는 말해도 먹혀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너무 앞선다고 화를 버럭 내었다. 학원의 학생이자 고객인데 그 정도 비위도 못 맞춰 주느냐고.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신경이 더 곤두섰다. 그런 그의 행동이나 변심에도 그녀가 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춤 때문이었다. 어쩌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와의 댄스는 마약중독과 같았다. 아무리 눈앞에서 수강생 여성들과 히히덕거리며 거슬리는 행동을 해도 그를 못 벗어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섹스보다 더 빨려드는 그와의 댄스.
그녀는 이제 그와 춤을 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와 춤을 출 수 없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만큼 그에게 길들여져 있었다. 그와의 섹스처럼. 눈앞에서 보이는 여성들과의 노골적인 방탕함을 참고 견뎌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헤어지든가. 그녀는 헤어질 용기는 없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댄스를 하는 동안만큼은 그녀가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수강생 여성의 레슨을 끝낸 장승백은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댄스 복을 외출복으로. 이젠 아예 백장미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았다. 눈치를 살피기는커녕 아예 무시하는 태도였다. 여성 수강생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밥 먹고 올께." 장승백이 건성으로 한 마디 하고는 여성과 둘이 나가 버렸다. '나도 안 먹었거든... 나쁜 자식.' 그녀는 야속하고 괘씸했다. 헛말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 말 한 마디조차 없어서. 하긴 둘이서 밥만 먹으러 갈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 여성 수강생 정순애와 어울린 후부터는 연습도 소홀해졌다. 가을에 국내에서 가장 큰 댄스 사교 모임인 엘리트클럽에서 그들은 단독 시범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사교 클럽은 댄스 동호회 중에서 가장 자부심이 강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부부들로 구성된 댄스 사교 모임이었다. 고위 관료 부부 교수 부부 의사 부부 같은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가진 또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부로 이루어진 댄스동호회였다. 그들은 집단적 우월감이 대단했다. 일단 그런 사회적 지위나 직업을 갖지 못한 부류들은 클럽의 가입을 제한했다.
운영비용도 풍족해서 매 분기별로 유명한 댄스 강사를 초빙해서 단체강습을 받곤 했다. 그리고 개인레슨을 받으면서 강사들에게 기대 이상의 통상적인 수강료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지불했다. 댄스 강사들은 그 클럽을 지도하거나 구성원 회원들의 개인레슨을 맡는 걸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만큼 금전적인 대우가 좋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나 클럽과 관계된 단체강습이든 개별레슨을 맡을 수 없었다. 강사 초빙 조건이 무척 까다롭고 어려웠다. 실력은 물론 경력도 중요했지만 댄스계에 풍문이나 루머 같은 것도 중요시 했다. 특히 춤 선생과 수강생 제자들 간의 불미스런 스캔들이 있으면 당연히 자격에서 탈락되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지도강사도 정식으로 부부인 선생을 우선적으로 예우했다. 하지만 장승백과 백장미는 정식 부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클럽의 정규 강사로 초빙되어서 이번 학기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블랙플이며 UK대회 같은 규모가 큰 국제 대회에 출전한 경력과 더불어 영국 유학 같은 수련 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별대우를 받아서 강사로 초빙된 것이었다. 그 클럽의 정기 행사 때 그들이 단독 시범도 계획되어 있었다.
그 공연을 위해서 둘은 심혈을 기울여서 작품을 짰다. 또한 수강생들의 레슨 시간 외에는 틈틈이 연습에 열중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될까 말까인데 여자 수강생한테 정신이 팔려서 딴 짓거리만 하는 게 그녀는 속이 뒤집혔다. 무엇보다 강사와 여성 수강생간의 저런 스캔들 소문이 그 클럽의 회원이나 관계자 귀에 들어가면 초빙 강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바로 짤릴 수 있었다.
댄스계에서는 그 클럽의 강사로 초빙되는 자체가 큰 영광과 자랑거리로 여길 정도였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경제적인 실리가 매우 컸다. 그녀로서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더 큰 매력이었다. 단체강습 지도료 뿐만 아니라 클럽에서 파생되는 개인레슨 수강으로 인한 효과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게 학원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장승백이 정신을 못 차리고 여자 수강생과 눈앞에서 놀아나는 꼴에 그녀는 속이 뒤집히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들이 나간 후 백장미는 곧 남자 수강생의 레슨을 시작했다. 그가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그녀는 자신까지 흔들리면 안 된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빨간색 자동차가 바람을 가르며 도심지 외곽 도로를 쏜살같이 달리고 있었다. 지붕이 열리는 수입산 외제 쿠페였다.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신이 나서 흥분한 상태였다. 자동차는 아직 시트에 비닐도 벗기지 않았다. 이제 막 판매 영업소에서 출고해온 새 차였다.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서 쿠페의 지붕 뚜껑을 열자 시트에 감긴 비닐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람에 못 이겨 휘날렸다.
옆자리의 여성도 덩달아 기분이 들떠 있었다. 사실은 옆에 앉은 이 여성이 사내에게 사랑의 정표로 선물해준 자동차였다. 여성은 장승백의 학원에서 개인레슨을 받는 수강생 정순애였다. 그녀는 막대한 위자료를 받고 얼마 전에 이혼한 상태였다. 그녀의 이혼한 남편은 재벌가의 아들이었다. 남편이 잘 나가는 젊은 연예인과 불륜을 일으키자 그녀는 이혼 소송을 했고 승소 후 막대한 위자료를 챙길 수 있었다. 그 후 왈츠 레슨을 받다가 장승백한테 푹 빠져서 지금은 그에게 모든 걸 바치고 있었다.
한껏 속도를 내던 쿠페가 전용도로에서 빠져나와서 조금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조금 가니까 강가에 무인 텔 간판이 많이 보이는 모텔 밀집촌이 나타났다. 그때까지 여전히 두 사람은 들떠 있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쿠페는 강이 보이는 무인 텔 앞으로 다가갔다. 셔터 문에는 <문 앞으로 천천히 접근하시면 자동으로 문이 열립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쿠페가 주름진 셔터 철문 앞으로 다가서니까 셔터 문이 천천히 위로 접혀서 통로 출입구가 열렸다.
셔터문을 들어서자 일실 일 주차 공간이 나타났다. 객실마다 한 대씩 주차 공간이 독립적으로 확보되어서 고객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자동차가 주차장 안으로 빨려들자 열렸던 셔터 문이 자동으로 원위치로 닫혔다. 주차를 하자마자 동시에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면서 몇 개의 계단으로 올라서 객실 문 앞으로 다가섰다. 문 입구에서 무인 계산기에 카드로 결제를 끝내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