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자유 -피티궁전Pitti Palace
1457년 피티 가의 상인이자 정치가, 코사모의 친구이자 때로는 경쟁자였던 ’루카 피티‘가 ’브루넬레스미‘ 에게 의뢰해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을 건설했지만 피티가 죽고 파산, 메디치가에 넘겨져 주궁이 되었다. 그 후 코사모와 그의 아내 ’톨레도의 엘레오노라‘가 여러 번 개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현재는 메디치가의 화려한 컬랙션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내부에는 ’팔라티나 미술관‘ 등 7개의 미술관과 박물관, 이탈리아식 정원이 있다. 팔라티나 미술관은 2층으로 궁전의 방 12개를 개조해서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메디치가에서 수집한 명화 컬랙션을 전시하고 있다.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 티치아노, 라파엘, 루밴스)등 현대 미술관은 피티궁전 3층에 있었는데 이탈리아 19세기 인상파와 20세기 초반의 인상파 화가 ’폴리니오 노벨리니‘ 의 ’첫번째 생일‘ 앞에 섰을 때 나도 모르게 ’와우, 멋지네‘ 하고 감탄사가 나왔었다. 꽤 커다란 그림이었다. 작가는 시각적으로 자극받은 보라색에 대한 심리적인 인상을 점묘화 기법으로, 그림의 형태나 배경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아른거리는 추억의 이미지처럼 보인다. 이 그림은 화면에 전체적으로 퍼진 보랏빛 사이로 첫 번째 생일을 맞은 아기를 들어 올리는 엄마의 행복한 마음이 황금빛으로 밝게 빛나게 표현하였다. 사람의 눈이 주는 시각적 착시를 일깨우며, 이 공간의 행복한 마음을 적시는 그림이었다. 2차원 화면에 3차원 깊이를 표현하는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전통 화법이란다. 르네상스 미술은 이상적으로 완벽한 성모마리아를 원했다. 지,덕,체를 겸비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 신이면서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를 완벽하게 그리고자 하는 이상은 1400년대 르네상스 화가 ’베아토 안젤리코‘로 시작, 100년쯤 지나 라파엘로에 와서 완성되었다. 1507년 라파엘로가 그린 ’대공의 마리아‘ (피티궁전 팔라티니 미술관), 외부와 내부를 창으로 연결하는 규칙도 르네상스 시대 화법,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림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경의 청색과 녹색, 회색, 올리브색들이 차가운 어둠으로 채워진 이 감성적인 색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가운 인상의 색채로 가득 찬 배경은 신비스런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미술이 표현하는 언어는 다양한 은유와 다중성을 가진 감성을 표현하는 멋진 도구이다. 예술은 인간 내면에 있는 다양한 것들과 은밀하게 나누는 친밀한 대화이다.
천장의 프레스코화 하루 종일 누워서 보고 싶어
베키오 궁전. Vecchio Palace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눈에 띄게 높은 것 세 가지가 보인다, 피렌체 대성당의 쿠폴라와 그 곁에 있는 조토의 종탑, 그리고 베키오 궁전의 시계탑이다. 베키오 궁전은 원래 메데치 가문의 ’시뇨리아‘ 궁전이었다. 피렌체의 빛나는 시간이 거의 모두 이 궁전에서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직전에는 임시 정부 청사로 사용되었고, 통일된 이후로 지금까지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은 르네상스 천재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소는 500인의 방, 15세기 시정을 이끌던 500 명의 지도자들이 회의하던 방이었다. 양쪽 벽면에는 피렌체의 권력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록한 ’조르지오 바사리‘의 벽화가 있다. 그 전에 벽화를 그릴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52살에 ’앙기아르 전투‘를 그렸고, 29살 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를 그렸는데 두 사람 모두 완성하지 못했다. 바사리의 벽화 뒤에 두 거장의 작품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오백인의 홀은 르네상스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영화 ’다빈치 코드‘ 3번 ’인 페르노(거센 불= 지옥)‘ 에 등장한 장소다. 3층에는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의 집무실이 보관되어 있다. 이 방은 영화 ’전망 좋은 방’ 포스터에 등장한다. 그 외 ‘코사모 1세의 방, 로렌초 메디치의 방, 교황 레오 10세의 방,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또 한사람 ’교황 클레멘테 7세의 방도 있다. 메디치 가문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천장은 역시 화려한 장식, ‘코사모 1세의 번영의 모습을 담은 ’바사리‘ 작이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미켈란에게 도서관을 지으라 명했다. ’문명의 보고‘ 산 로렌조 수도원’ 미켈란의 천재성은 계단에서 빛을 발한다. 먼저 실내로 들어서면 어두운데, 이건 미켈란의 의도 였다. 옆엔 청문이 많이 있지만 밖을 볼 수 없다 세상과의 단절을 뜻한다, 빛을 향해 {‘조로조 바사르’의 어둠에서 시작}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의도이다. 둥근 계단은 미학적 의도로 미켈란이 처음 시작했단다, 그리고 양옆의 또 다른 계단은 항상 메디치가의 사람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도 열려있는 도서관을 만들고자 했었다. 진리의 세계로 나아 가기 위한 도서관은 동방과 서방 고대부터 비잔틴 시대의 서적 1만여졈, 고대 시대 서적 2천 점이 소장되었다. 벽면과 천장 등, 온 사방을 덮고 있는 그림들, 화려함의 극치, 빠르게 설명하고 지나치는 가이더가 야속하다. 하루 종일 누워서 그림을 감상하고 싶다. 그 많은 그림을 봐 왔는데 전혀 질리지도 않다. 예배당 지나면 베키오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합실,(Sala) 백합의 방은 푸른색으로 온통 벽을 장식하고, 황금색의 백합을 그려 넣은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푸른색과 황금색의 조화가 정말 멋지고 아름다웠다. ’지도의 방은 1.8m높이의 거대한 지구본이 있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회전 지구본이었단다. 1시간에 걸쳐 베키오 궁전을 관람하고 3층 정문으로 보이는 종탑과 베키오 다리를 보니 개미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다.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궁전이지만 겉모습은 화려하지도 않고 입구는 소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소박한 모습이 더 친근감을 더해 줬다.
안녕! 산 지미나노(SanGimignano)
비가 내리지만 산 지미나노로 향했다. 이태리 칸쇼네 ‘빠로네 (말로만 말로만)를 들으며 모두 느긋한 두근거림으로 기대에 부풀었다. 예전 이 곳은 순례자의 길로 돌 깔린 시골길을 맨발로 걸으며 로마로 향했던 길 들, 비가 와서 더욱 운치 있는 골목길, 마을을 가꾼 사람들의 정성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역시 가장 위대한 예술은 자연이 아닐까?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우스네 집이 이곳이다. 기원전 3세기 에투루리아 마을로 산 제미니아노가 훈족의 ‘아틸라’로부터 이 도시를 구해 낸 후로 ‘산 지미나노’로 이름을 바꾸웠단다. 이 곳은 해발 344m 언덕 위의 마을로 로마와 바티칸을 연결하는 카톨릭의 성지 순례지‘의 중간 지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산지미나노‘는 두오모 광장과 치스테르나 광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산 조반니’ 거리와 ‘마테오’거리가 길게 늘어 서 있다.
이 도시를 지배했던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탑들을 경쟁적으로 세우면서 ‘탑의 도시’가 되었다. 약 72채의 고층 주택을 세웠는데 이 중 몇몇은 높이가 50m에 달했다. 현재는 그 중 14 채의 건물만 보존되어 있지만 토스카니의 전원풍경과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산지미나노는 봉건시대의 분위기와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14-15세기에 이탈리아의 예술의 걸작을 다수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지미나노‘는 이곳의 성벽과 요새화된 가옥은 ’에트루리아‘ 지역 경관의 심장부에서 아름다운 스카이 라인을 형성한다. 1262년 2177m 둘래의 성벽이 이 소도시를 둘러쌓고 후에 5개의 원통형 망루가 성벽에 증설되었다. 1525년 당시엔 건축 제한 법률이 있어, 폭은 양팔 넓이의 12배, 길이는 양팔 넓이 (앞. 뒤) 24배를 넘지 않아야 했다. ’프란체시제카넬리‘ 대저택은 이같은 건축 제한 규정을 교묘하게 피하려고 대칭적인 ’파사드‘를 지었다.
길거리엔 상점이 많았지만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더 쏠쏠하였다. 마치 중세 시대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드는 곳, 그냥 길을 걷다가 벽에 기대기만 해도 멋진 사진이 연출된다. 창밖에 툭툭 걸어놓은 빨래들마저도 환영의 깃발처럼 보였다.
치스테르나의 아취형의 열린 성문과 하늘 높이 솟은 탑들은 광장만큼이나 더 돋보인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줄, 바로 그 유명한 ’월드 챔피언‘ 젤라또 가게, ’돈도리‘다. 이곳의 젤라또 맛은 ’악마의 맛. 영혼을 주고 사고 싶을 정도다(2.2유로=5유로) ‘하누스 치즈’ 한덩이 만원, 냄새는 지독한데 맛은 기가 막히단다.
베르나자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 ‘베르나자 디 산지미나노’ 광장, 거리, 주택, 궁전, 우물, 분수 등, 전형적인 도시 생활을 보여주는 모든 구조물들이 좁은 지역 안에 모여 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옛것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분위기는 참으로 멋스러웠다. 골목길은 마치 영화 속 세트장에서 들어와 있는듯한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도시는 ’치스테르나‘광장과 두오모광장, 두 주요 광장을 빙 둘러 고층 주택이 감싸고 있다. 서쪽엔 쌍둥이 탑이 남쪽엔 ’에누치스‘ 탑, 로돌피 저택, 리치궁이 있고, 북쪽엔 ’코르테스 ‘궁이 있다. 삼각형의 ’치스테르나‘광장에는 이름다운 우물이 있다. 고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의 필수는 우물이었다,
아테네의 들보와 로마의 아취는 모두 크레타(트로이 문명)에서 전래 된 것이란다. 로카 요새는 성 속의 성으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 도시 수호의 최후 보루란다. 성안엔 우물과 식량 창고가 있다. 산지미나노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노후에 꼭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단다.
두오모 광장은 농노들의 일상과 감정을 고려하여 투박하게 벽돌로 세운 로마네스크식 건물이다. 산지미역사 지구는 14, 15세기에 이탈리아 예술 걸작들이 본래 건축물에 설치되어 있었던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성당엔 ’타데오 바르텔로‘가 그린 프레스코화 벽화 ’최후의 심판‘ ’베노초 고촐리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 ‘도메니코 기틀란다요’ 의 성 피나의 장례식. 수태고지, 와 같은 훌륭한 벽화들이 남아있다.
안개 자욱한 길을 되돌아 오는길, 우린 파파로티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들으며’ 컴백, 살아 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속에 숨은 이야기들이 구불구불 우리의 인생사와 비슷하다. 행복하고 정겨운 모습들이 변함없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