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향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정성진 옮김, arte 2024, 179쪽.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을 통해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은 ‘어소시에이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 ‘민주적 사회’의 관계입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국가’가 아니라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이나 법적 보호를 받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NGO, NPO’는 마르크스와 사이토 고헤이의 의미에서는 ‘어소시에이션’이 아닌 셈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어소시에이션’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국가의 경제 지원과 법적 보호를 받는 ‘어소시에이션’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국가의 경제 지원과 법적 보호를 받는’ ‘어소시에이션’은 ‘어소시에이션’이 아니라고, ‘자발적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만 어소시에이션으로 인정하면 그뿐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어소시에이션’이 처한 현실이 보여주듯, 현실이란 복잡하게 얽히고 설힌 관계를 이루며, 시시각각 변하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이 가변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국가와 무관한 어소시에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고, 국가의 지배를 받든, 국가와 대립하든 국가와의 ‘관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국가 내에서 국가와 관계하면서 국가를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어소시에이션과 국가는 대립 속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과 국가는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여지를 지닐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해서, 그 양자가 처한 현실은 모순적인 관계를 지양해가는 부단한 운동 속에 존재하는 ‘과정의 현실’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소시에이션과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도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운동’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부단한 지양의 운동을 통해서 어소시에이션과 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의 결과로 주어진 현실을 다시 지양해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칼 마르크스와 사이토 고헤이를 따른다면,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공산당 선언>)이나 ‘어소시에이션’을 통해서 ‘자본주의국가’를 넘어 ‘민주적 사회’로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려는 노동자들의 자의식적인 운동만큼, 그만큼의 ‘민주적 사회’가 되어갈 것입니다. 그만큼은 ‘민주적 사회’가 된다는 것이겠습니다.
그처럼 ‘지양의 운동’ 개념을 받아들이는 반성적 사유는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과 자발적 상호부조에 기초한 ’연대‘를 강화하는 데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2024.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