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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변증법 스터디 자료입니다.
E. 일리옌코프: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기동/이병수 역, 책갈피 2019.
1부 변증법의 역사
1장. 논리학의 주제와 근원: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어떤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그 문제에 대해 역사적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런 역사적인 접근방법이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오늘날 소위 논리학이라는 학문 내에는 논리학의 영역을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는 이론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이론들은 저마다 논리적 사고의 발전과정에서 유일한 현대적 단계라고 주장하고, 단순히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리학의 역사를 고찰해야만 한다.(인간26)
‘논리학(logic)’이라는 용어는 사고의 체계를 지칭하기 위해 스토아(Stoa)철학자들에 의해 최초로 도입됐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실질적 가르침 중에서 그들의 견해와 일치했던 사고의 본성에 관한 부분만을 논리학으로 특징지었다. 용어 자체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 글자 그대로의 뜻은 ‘말’이다)에서 유래했고, 그 명칭은 문법과 수사학의 주제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이런 전통을 마지막으로 구체화하고 명문화한 중세 스콜라(Schola)철학자들은 논리학을 논쟁을 수행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오르가논: organon)으로, 성서를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 그리고 순수 형식적 장치로 변형시켰다. 그 결과 논리학에 대한 공인된 해석뿐 아니라 바로 그 명칭마저도 믿을 수 없는 것이 돼 버렸다.(인간26-27)
실재적 사고의 논리이고 과학적 인식의 발전 논리인 논리학이 스콜라철학자들에 의해 순수 형식적인 것으로 변형됨으로써, 그 변형의 무용성을 인식하는 것이 근대의 모든 진보적 철학자들의 주요한 과제였다.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은 “오늘날 논리학은 진리 탐구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통속적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오류를 고착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이롭다기보다 해로운 편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Decartes)는 “논리학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삼단논법이나 그 밖의 대부분의 지침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데에 (혹은 룰리(Lully)의 논술처럼 모르는 것을 판단 없이 마구 지껄이는 데에) 훨씬 더 기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로크(Locke)는 “삼단논법은 새로운 지식을 보태지 못하며 기껏해야 우리가 알고 있는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얼버무리는 기술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와 로크는 전통 논리학의 모든 문제를 수사학의 영역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논리학이 하나의 특수과학으로 유지되는 한, 논리학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사고의 과학으로서가 아니라 말⋅이름⋅기호의 올바른 사용에 관한 과학으로 취급돼 버렸다. 가령 홉스(Hobbes)는 논리학의 개념을 기호언어의 계산법으로 발전시켰다.(인간27-28)
그러나 다행히 철학은 그 수준에서 굳어지지 않았다. 그 시대의 훌륭한 사상가들은, 논리학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할지 모르지만 사고과학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세계와 사고작용에 관해 순수 기계론적 입장을 취한 대표자들은 논리학에 대해서도 기계론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들은 객관적 실재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에(즉 순수 양적 특성만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으로 볼 때 수학의 사고원리는 사고 일반의 논리적 원리와 합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홉스에서 최종적 형태를 갖춘 경향이었다.(인간28-29)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Leibniz)의 접근은 훨씬 더 신중했다. 그들도 낡고 의심스러운 논리학을 대신하는 ‘보편수학’을 창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용어체계를 엄격하고 명백하게 규정한 보편언어를 제정함으로써, 보편언어를 순수 형식적으로 조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인간29)
데카르트는 보편언어의 용어를 정의하는 것은 원만한 동의에 의해서는 도달될 수 없고 인간의 지적 체계 전체를 형성하는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에 대한 신중한 분석의 결과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보편수학’의 정확한 언어는 ‘진정한 철학’으로부터 유래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반성 혹은 상상(그 시대의 용어로는 사변) 그리고 현실적 감각 경험에 주어진 사물에 관한 사고작용을 일종의 용어와 진술의 미적분법으로 대체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방정식의 풀이와 같이 오류 없이 추론해 정확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인간29)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이런 관점을 옹호하면서 ‘보편수학’의 적용 범위를 상상력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에만 범주적으로 제한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보편수학’을 상상력의 논리학일 뿐이라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형이상학은 보편수학의 범위에서 제외됐으며 사고⋅행동은 물론 논리적 근거를 지니는 보통의 수학 영역마저^도 마찬가지로 제외됐다.(인간29-30)
그는 사고에 관한 진정한 이론을 형이상학으로 분류했는데, 이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을 따르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법과 그의 논리학의 본질을 따른 것이다.(인간30)
중요^한 것은 사고에 관한 이론적 이해가 어느 분야에 속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명확한 접근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난점에 끊임없이 직면한다. 즉, 지식(개념, 이론적 구성, 관념 등의 총체)과 그 대상 소재를 연결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전자(지식)는 후자(대상)와 일치하는가? 어떤 사람이 믿고 있는 개념이 그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실재와 일치하는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은 검증될 수 있는가? 만약 검증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인간30-31)
‘개념’(‘관념’)과 ‘사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 둘이 비교되고 구별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공간’을 상정할 수 있는가? 직접 보이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공통적인 제3의 성질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가? 관념과 사물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공통적 실체가 없다면, 관념과 사물 사이의 본래적인 필연적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인간32-33)
관념인 것은 존재가 아니고, 존재인 것은 관념이 아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 둘은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그 둘의 상호작용의 토대는 무엇인가? 그 둘이 어떤 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인간33)
이 문제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중심문제이고, 사고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 즉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세계와 ‘사고’의 관계문제이며, 사고형식과 실재의 일치문제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문제이고, 전통적인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문제’다.(인간33)
분명히 개념은 두뇌 속에 있는 특수한 실체의 상태일 뿐이다(더구나 우리는 이런 실체를 두뇌 조직으로 혹은 심지어 두뇌 조직에 살고 있는 희미한 영혼의 에테르로 설명할 수도 있고, 또 두뇌 조직의 구조로 나아가서 두뇌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고작용의 형태를 띠는 내적 언어의 형식적 구조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상 소재는 두뇌 외부에, 두뇌를 초월한 공간 속에 있으며 더구나 사고의 내적 상태, 관념, 두뇌, 언어 등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인간33-34)
데카르트는 그런 난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물의 존재가 연장(延長: 공간의 점유)을 통해 규정되고, 사물의 공간적⋅기하학적 형식이 주관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형식이라면, 사유는 단순히 공간형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유 일반의 공간적 특징은 사유 일반의 특수한 본질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유의 본질은 공간적⋅기하학적 표상(表象)과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개념’을 통해 드러난다.^ 또 데카르트는 이런 입장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즉 사유와 연장은 실제로 다른 두 실체이고, 각각의 실체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그 자신을 통해서만 규정되고 존재하는 것이다. 사유와 연장 사이에는 특수한 정의로 표현될 수 있는 공통점이 없다. 달리 말하면 사유에 관한 일련의 정의 가운데 연장에 관한 정의의 일부분이라도 될 수 있는 속성은 하나도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통적 속성이 없다면, 사유로부터 존재를 합리적으로 연역(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연역은 ‘매개용어’, 즉 관념의 정의에 포함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의식 밖에(사유 밖에) 존재하는 사물의 정의에도 포함되는 어떤 용어를 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유와 존재는 서로 접촉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의 경계(접촉선 혹은 심지어 접촉점마저도)는 양자를 분리시킴과 동시에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인간34-35)
양자의 접촉이 불가능하다면, 사유는 연장된 사물을 규정할 수 없고, 사물도 정신적 표상을 규정할 수 없다. 말하자면 사물과 사유는 서로 관통하거나 침투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서로 만나는 경계를 가지지 못한다. 사유 자체는 연장된 사물에 영향을 줄 수 없고 사물도 사유에 영향을 줄 수 없다. 각각은 그 자체 내에서 맴돈다.(인간35)
그렇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직접적으로 제기된다. 인간 개체에서 사유와 육체적 기능이 어떻게 결합돼 있는가? 사유와 육체적 기능이 결합돼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인간은 공간적으로 한정된 자신의 육체를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즉 그의 정신적^ 충동은 공간적 운동으로 변형되고, 인간 유기체(감각)의 변화를 유발하는 육체의 운동은 정신적 상(像)으로 변형된다. 이것은 결국 사유와 연장된 육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상호작용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유와 육체는 어떻게 서로를 규정하고 제한하는가?(인간35-36)
상상의 영역에서 사고에 의해 그려진 궤도, 가령 방정식으로 기술된 하나의 곡선이 실제 공간 속에 있는 동일한 기하학적 직선과 일치함을 입증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사고 내에 존재하는 곡선의 형태(다시 말해서 방정식의 대수적 기호라는 ‘크기’의 형태)가 그것에 상응하는 실제 공간의 곡선, 즉 두뇌 밖의 공간인 종이 위에 그려진 곡선과 일치함을 의미한다. 하나는 사고 속에 존재하고 다른 하나는 실재 공간 속에 존재하는 분명히 동일한 곡선이다. 그래서 내가 사고(낱말과 기호의 의미로 이해된 것)와 일치하게 작도할 때, 그것은 동시에 사고 밖의 사물의 형태(이 경우에는 기하학적 외형)와 정확히 일치하게 작도하는 것이다.(인간36)
만약 ‘사고 속의 사물’과 ‘사고 밖의 사물’이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대립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서로 동일할 수 있을까? 절대적으로 대립적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그 둘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동일한 것도 없으며, 동시에 ‘사고 밖의 존재’라는 개념과 ‘사고 속의 존재’, 즉 ‘상상의 존재’라는 개념 사이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속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두 세계가 어떻게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 더구나 절대적으로 아무리 공통점과 동일성이 없는 두 세계가 우연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규칙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은 모든 데카르트주의자들, 즉 데카르트 자신을 비롯해 휠링크스(Geulinex),^ 말브랑슈(Malebranche) 그리고 수많은 데카르트 추종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문제다.(인간36-37)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두 세계, 즉 사고 속의 세계와 공간 속의 세계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할까? 왜 그럴까? 데카르트, 휠링크스, 말브랑슈 등은 ‘신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신만이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신은 대립되는 두 세계를 일치시킨다. 여기서 ‘신’이라는 개념은 ‘이론적’ 구성물로 나타난다. 이런 이론적 구성물을 통해, 정의(定意)상으로는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들이 결합돼 있고 일치하고 있으며 아마도 통일돼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신은 ‘연결고리’로서 사고와 존재, 정신과 육체, 개념과 대상, 그리고 기호와 낱말의 영역에서의 활동과 (두뇌 외부에 있고 기하학적으로 한정된) 실재 세계의 영역에서의 활동 등을 결합시키고 일치시키는 ‘제3의’ 것이다.(인간37)
‘사고’와 ‘사고 밖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대립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일치하고 결합돼 있으며 필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상호 연관돼 있다(그래서 동일한 어떤 상위의 법칙에 종속돼 있다)는 이 엄연한 변증법적 사실과 직접적으로 부딪혔을 때,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신학 앞에 굴복했다. 그들은 그들의 관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실을 신의 이름으로 계시하고 그것을 ‘불가사의하게’, 다시 말해서 초자연적 힘을 자연적 사건의 인과적 연쇄에 직접 개입시킴으로써 해명했다.(인간37-38)
달리 표현하면 이런 절대적 대립물(‘사유’⋅‘정신’과 ‘연장’⋅‘육체’)의 동일성은 데카르트에 의해 하나의 사실적 원리로 인식됐다. 이런 사실적 원리 없이는 분석기하학의 착상은 심지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일성을 신의 행위에 의해, 즉 사유와 존재, 정신과 육체의 상호관계에 신을 개입시킴으로써 설명했다. 더구나 데카르트주의자들의 철학, 특히 휠링크스와 말브랑슈의 철학에서 신은 천상의 성좌에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의 활동과 육체의 활동을 통합하는 전통적 가톨릭교의 정통 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인간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