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는 마음이라도>
예비 소집일이 지나고 입학식만 앞둔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 추가 배정된 애 좀 선생님 반에 받아줄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특수 교과 B 선생님의 요청에 난감해졌다. 말을 고르는 사이 침묵이 길어지자 B 선생님은 덧붙여 말했다.
“13반이 특수 학급에서 가까워 아이가 적응하는 데 도움될 거 같아서 그래. 샘이 같은 신자이기도 해서 부탁하는 거예요.”
왼손 검지에 낀 묵주 반지를 가리키며 B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거절이 익숙지 않지만, 부드러운 거절을 위해 적절한 말을 생각해 내던 중이었다.
지혜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학급에 또 다른 특수 학생 상우가 있었다. 상우가 어떤 장애를 가진 아인지도 모른다. 담임으로서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혜에 대한 정보는 여학생이라는 것 뿐이었지만, 받아들인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힘든 일 년이 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신자라고 당당히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얕은 신앙심을 가졌지만, 종교까지 언급하는 B 선생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종교의 가르침인 자비와 이타적인 삶을 실천할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현실은 나 하나 보전하기 급급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살아가지만,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갭을 좁히지 못해 거절하지 못한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으니, 이타적인 인간이 되는 일의 어려움을 절감한다.
1학년에는 총 6명의 특수학급 학생이 들어왔다. 1명이 자폐, 5명은 지적 장애였다. 상우와 지혜는 지적 장애 학생이었고 B 선생님 말에 따르면 6명 중 가장 우수한 두 명이라고 했다. 상우와 지혜는 13반 통합 학급 내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상우는 돌발 행동이 드물었기 때문이었고, 지혜의 자리는 주인을 잃은 채 자주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상우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혜는 알고 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한 경계성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학급 아이들은 지혜가 3, 4교시 특수 학급으로 이동하거나, 목요일 마다 가는 특수 학급 체험 학습 참여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혜는 핸드폰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으며, 잔꾀를 내어 미인정 지각을 질병 지각으로 바꿀 만큼 거짓말도 능수능란하게 했다. 학급 내 친구의 고민을 듣느라 새벽 2, 3시까지 통화하다 잠 못 이루었으며, 학급 친구 몇몇 사람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고 영등포 지하상가로 쇼핑을 가거나, 천호동에 디스코 팡팡을 타러 가고, 부평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밤 11시, 12시 넘어서까지 놀고 피곤해서 학교를 못 오는 일이 잦았으니, 주객전도가 된 셈이었다.
지혜의 무단결석은 3월 2일 입학식 이후 정상 수업이 시작되는 3일부터였다. 그날 이후 조회에 들어가 지혜의 빈자리를 확인하고 지혜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등교를 독려하는 일이 매일의 일과에 추가되었다. 전화를 받고 서둘러 등교한 날도 있었지만, 잠적하듯 전화를 꺼두고 끝끝내 등교를 거부하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집에는 등교한다고 하고 교문 앞까지 왔다가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했다.
지혜를 붙잡고 ‘학교가 힘들더라도 어른이 되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사회에 나가 일을 하려면 성실은 기본이다’와 같은 훈계조의 이야기를 했지만, 지혜의 출결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학부모님께 내교통지서를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혜네 집은 아버지가 지혜 1살 때 돌아가시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이후 어머니가 오빠 둘과 지혜 세 남매를 홀로 키워오셨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비롯해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알바처럼 불규칙하게 조금 일한다고 하셨다.
현생을 즐기는 지혜를 보면서 어려운 와중에도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내서 다행이라 생각하다가도,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살아서 어쩌나 싶었다. 지혜라면 카페나 단순 사무 업무 정도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터였다. 정작 지혜와 어머니는 지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지혜의 잦은 결석으로 어머니와 여러 차례 통화하면서 느낀 것은 지혜가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거나, 집안을 일으키는 데 역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하는 큰 오빠와 고2인 작은 오빠가 지혜보다 앞선 문제였기 때문에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일 년 동안 지혜와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지혜네 가족이 매사 의욕이 없으며, 성실과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하려고 하지 않는 점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지혜 가족이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과 우울을 가난의 재생산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불성실함으로 인식한 탓이다.
책을 읽으며 가난한 아이들의 삶과 지혜를 겹쳐 보았다. 가난과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의미했다. 학부모 상담에서 지혜 어머니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임을 밝히며 도움을 요청한 것은, 그만큼 절박한 삶을 반증했다. 제한된 삶을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면서도 지혜 어머니가 자식들의 지지 기반이 되어 홀로 가정을 지켜낸 점이나, 지혜가 구김살 없이 자라난 점 역시 가족 구성원의 노력과 최선임을 헤아리지 못했다. 나의 시선은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기득권자의 짧은 생각에 불과했다.
지혜가 장애를 가진 데다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꿈을 가지고 키워나가야 학생이 아닌, 가정 내 미래 노동력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런 내게 필요한 것은 무릎을 굽혀 낮을 곳을 바라보는 태도와 노력이다.
첫댓글 들개의 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를 다시 읽어낸 것 같아요. 결핍을 경험하지 못한 기득권자의 짧은 생각, 벗어나기가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