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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예비평
▶ 특집:아나키즘과 생태주의
생태 아나키즘 문학의 흐름
김 경 복 (문학평론가, 부산대 강사)
1 아나키즘과 생태주의
아나키즘 사상의 뿌리는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 개념은 아나키즘의 모든 교의, 즉 권위의 거부, 정부 및 국가에 대한 혐오, 상호부조, 소박성, 분산화, 정치에의 직접참여 등의 원천이자 기초가 되고 있다. 실제 자연에 있어서 일반적인 법칙은 공정 형태의 발전을 이끌고 구조적으로 최대의 효력을 발휘시키려고 하는 균형과 조화의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원리는 국가가 강제로 만든 법보다 우수한 정의의 원리, 즉 우주의 자연적인 질서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평등과 공명의 원리가 실재하고 있다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1)
{{ 손진은, [열린 체계로서의 미학]《시와 반시》통권 5호(1993, 가을호), pp. 100-101 }}
따라서 아나키스트에게 자연은 최초에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 다음으로 도덕적 세계에 있어서 균형이 잡힌 질서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스트 고드윈이 자연을 염두에 두고 사회구성을 말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드윈은 어느 사회이건 인간의 행복과 양립할 수 있는 사회는 생동하는 자연적 성장체이어야 하며, 이에 대립하는 사회가 이른바 합리적인 개념화에 의해 시도된 국가 라는 것이고 이러한 국가를 형성한 합리적인 논리가 자연법과 그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적용되는 경우 오직 인간의 정신이나 마음을 노예화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
{{ 방영준, [아나키즘의 정의론에 관한 연구] (서울대 대학원, 박사, 1990), p. 51에서 재인용 }}
그것은 자연적 구성이 가장 정의롭고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즘 사상의 이론적 정립을 꾀했던 크로포트킨 역시 자연적 법칙에 따른 사회구성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서 아나키즘 사회가 됨을 밝히고 있다. 크로포트킨이 지향하는 사회는 "자연의 생활 자체에 보여지는 바와 같은" 것으로서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진화와 같은 "끊임없는 전진"만 있을 뿐이다.3)
{{ 크로포트킨(하기락 역),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도서출판 신명, 1993), p. 67 }}
그것은 자연에 대한 도저한 이해와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크로포트킨은 더 나아가 이러한 자연적 법칙의 인간화에 대한 믿음까지도 보여준다.
개개인이 아무리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인류가 멸망기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인간성 속에는 도덕적 원리가 본능으로서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것, 이 인간성에서 나오는 도덕적 감정에 위배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타인 속에 반감을 일으키리라는 것, 그것은 흡사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 역학적 반동이 일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등이다. 개개인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와 같은 반응의 능력 속에,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도덕적 감정과 사회성의 습관을 필연적으로 버티어 주는 자연적인 힘이 뿌리박고 있으므로 그것은 동물 사회에 있어서 그것을 전혀 밖으로부터 개입시킴이 없이 지탱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고, 더욱이 이 힘은 어떤 종교나 입법자의 명령보다도 무한히 강력하리라는 것을 꽁뜨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4)
{{ 위의 책, pp. 38-39 }}
이 글은 자연 상태가 가장 최고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믿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즉 자연 속에 도덕적 원리가 본능으로서 있어 인간 사회를 가장 자유스럽고 평화롭게 유지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는 점과 권위가 파괴되는 경우 이를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인간의 우애적 결속에 의해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의 강력한 윤리․도덕적 충동을 믿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관점은 자연법에 의거해 사회가 조직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자연론적 사회관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자유와 사회적 조화 속에서 살 수 있기 위한 모든 성질을 타고나면서부터 자기 속에 갖고 있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이러한 자연론적 사회관은 동양적 도가사상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당히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이 특색이다. 즉 노자에 있어서 자연은 도의 모습이며, 모든 만물이 그 스스로 존재하며 변화해 가는 과정 전체의 모습을 가리키는 개념이라 할 때, 도의 움직임은 곧 만물의 자발적 운동과 변화이다. 그러한 모습이 곧 자연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때 아나키즘에서 주장하는 자연론적 사회구성은 동양적 도가사상에서 주장하는 맥락과 같아진다. 도가 사상에서 "도는 본원이요 자연은 도의 성질"5)
{{ 羅光, {중국철학사상사} (臺北:學生書房, 1982), p. 204 }}
이라고 한다면, 아나키즘에서 자연은 바로 정의로운 사회의 본원이요 자연을 이념으로 한 아니키즘 사회는 자연의 한 성질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아나키즘 사상에서 추구하는 자연론적 사회관은 동양적 사유와 통하면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우주 공동체로서의 생태주의 세계관의 바탕이 된다. 즉 이러한 자연적 사회구성의 바람은 자연주의적 세계관, 나아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끔 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발전한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 미국에서 1930년대 이후로 무정부주의 운동을 주도하던 머레이 북친의 사회 생태론 주장은 바로 아나키즘 사상이 추구하는 자연론적 사회관의 현대적 적용이다.
그는 아나키즘에서 주장하는 자연론적 사회구성의 올바름을 확신하는 듯 현대 자본주의사회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 뒤 사회 공동체는 생태학적 차원에서 논의돼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사회 생태론의 힘은 사회와 생태계 간 연합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사회적인 것을 적어도 자연 속에 잠재화된 자유의 완성으로 이해하려는 점에, 그리고 생태적인 것이 사회 발전의 주요 조직 원리라고 생각하는 점에 놓여 있다.6)
{{ 머레이 북친(문순홍 역), {사회 생태론의 철학} (솔 출판사, 1997), p. 126 }}
이것은 사회 공동체의 완성은 생태 공동체 속에 위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생태적인 것이 가지는 가치와 원리는 곧바로 사회공동체의 가치와 원리가 된다. 여기서 생태적 가치와 원리는 크로포트킨이 제기한 상호부조의 원리가 가미된 진보의 형태, 곧 공동체적 질서의 완성으로서 도덕적 진보를 의미한다. 따라서 생태학적 세계관은 우주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진화해 간다는 자연론적 정의관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없다. 그것의 지향과 놓인 모습을 볼 때 사회의 완성은 자연의 완성이다. 이것은 유기론적 사회관의 최고도로 발현된 형태다.
그러나 북친이 볼 때 현대 사회는 생태적 원리나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오는 모순, 즉 분열과 파편, 소외와 대립이 깊은 심연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에게 이러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 생태론적 입장, 즉 생태 아나키즘적 세계관에 서는 것뿐이다. 사회 생태론적 입장에 설 때 공유와 협력의 건강한 인간 연합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앎, 인간과 자연 간의 창조적인 <신진대사>를 여는 기술 분야의 개발, 그리고 우리 문명 내에 자연이 현존하고 있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 등을 획득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의 곁에 자연이 여전히 함께 하고 있음을 결코 부인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그 동안 이윤을 목적으로 해서 자연 자원 을 남용하고 생물권을 마음 없는 존재로 단순화하는 것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 물리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그 점에서 북친은 "우리의 사회 공동체를 생태 공동체 내로 위치짓고, 우리의 사회 관계와 제도들을 이에 맞추어 재단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새로운 사회 또는 합리적인 사회를 의미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 "합리적인 미래 사회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혁신과 기술, 발전, 지력을 인간 외적인 자연세계와 결합시키는 생태 사회에 기반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자연 세계에 우리 문명과 인간의 복지가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7)
{{ 위의 책, pp. 128-129 }}
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나키즘 세계관과 생태학적 세계관은 그 근저에서 관련되는 사고방식이다. 두 세계관이 결합된 생태 아나키즘 세계관은 인간과 인간의 사회구성이 자연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이며, 자연의 중요성을 깨우칠 때 인간 사회공동체도 바로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국권상실기의 생태 아나키즘 문학의 모습
기술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해 생태계를 파괴한 것으로 나타났던 부정적 근대성의 극복은 보다 한 단계 높은 이상사회를 지향한다. 그것은 기술문명의 발달을 염두에 두면서도 자연과 조화하는 생태학적 유토피아를 지칭한다. 흔히 에코토피아(ecotopia)로 불리는 이 이상사회는 90년대 들어와 생태시, 생명시가 논의되면서 나온 용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기술적 유토피아, 즉 테크노피아(technopia)가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생태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의 황금 고리를 끊지 않고 이 양자를 통합하는 일원적 사고체계를 확립하고자 할 때 생태학적 유토피아는 절대적인 미래 사회로 요청된다.8)
{{ 최동호, [21세기를 향한 에코토피아의 시학], {하나의 道에 이르는 詩學} (고려대 출판부, 1997), p. 223 }}
그러나 이러한 에코토피아도 사회제도적 차원의 비판이 전제되지 않을 때 하나의 관념적 세계로 후퇴한다. 흔히 말하는 자연 중심 , 생명 중심 , 또는 동양 정신 을 강조하는 생태주의적 사고방식은 실제 생태계를 망치게 한 현실적 모순을 희석시키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인간 또는 인류 일반에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반동적이고 수구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근본 생태주의라 칭해지는 이와 같은 태도는 도구적 이성이 가져온 부정적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심층적 대안의 성격은 조금 갖고 있겠으나, 현실적 개혁의 측면에서 볼 때 다분히 추상적 관념의 세계로 나아감으로써 구체적 사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변혁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생태주의만이, 자연 그리고 인류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9)
{{ 머레이 북친(박홍규 역),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p. 16 }}
이러한 생태주의는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모든 권위주의적 사회 제도를 거부하는 아나키즘 사상에 바탕을 둔 생태주의, 즉 사회 생태론, 혹은 생태 아나키즘을 일컫는다. 이 생태 아나키즘만이 진정한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극복해 갈 수 있는 구체적 대안 사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생태 아나키즘적 세계관을 가지고 20세기 한국 아나키즘시를 살펴볼 때 국권상실기부터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다수의 시가 발견된다. 이것은 아나키즘 사상 자체가 자연론적 사회관을 바탕으로 한 만큼 아나키즘시는 은연중 자연 속의 삶을 예찬하게 되기 마련이고 그러면서 당시 사회의 제도에 대한 비판을 행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이를 가장 먼저 보여준 시는 아나키스트 흑성(黑星) 권구현의 시이다. 1926년에 발간된 {흑방(黑房)의 선물}에 실린 권구현의 시에서는 이러한 자연 , 혹은 자연스런 삶 에 대한 갈망이 대다수를 이룬다. 그것은 곧 현실 속의 삶이 자연스럽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동모여
들으라 들으라
저 奏樂을
無限한 生命力의
行進曲을 아뢰는
저 壯嚴한
大自然의 奏樂을
오 동모여
저 奏樂의調子를 라
춤추며 노래하자
生의 光榮을―
서로서로 붓들고
춤추며 노래하자
―권구현, [奏樂] 전문
도라를가자
도라를가자
누덕이의 옷을벗고
마음의 누덕이의 옷을벗고
福스럽고도 귀여운
알몸이되야
도라를가자
도라를가자
無限의靜肅으로
永遠의平和를 말하는
저 거록한 의어머니의
慈愛로운 품으로―
―권구현, [도라를 가자] 전문
위 두 시에 나타난 자연의 모습은 아나키즘 사상의 모태가 되고 있는 자연 이다. 즉 아나키즘 사상이 지향하는 자발과 조화, 균형의 개념, 곧 정의로운 사회 규범을 가리키는 기틀로써 자연이다. 또는 인간이 추구하는 유일성, 화합성, 무위성, 자율성 등의 이념으로써 자연이다.10)
{{ 방영준, 앞의 논문, p. 54 }}
권구현이 말하는 "大自然의 奏樂"이 "無限한 生命力"을 고양하는 것임을 의미할 때, 이는 곧 자연의 삶, 다시 말해 자연적 삶이 인간의 완전성을 보장한다는 아나키즘 사상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 (땅)"는 "永遠의平和를 말하는" "어머니의/慈愛로운 품"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권구현은 자연의 완전성을 두고 낙원 이라는 생태 아나키즘적 유토피아성을 부여하고 있다(" 위에 萬物이생겨날 에/太陽은 듯한 키쓰를주엇나니/萬物은 福스럽게도 자라나도다"―[樂園]에서). 그래서 아나키즘 사상을 달성 지향한다는 의식의 차원에서 권구현은 자연의 세계, 전원의 세계로 가기를 권고한다.
가자
가자
田園으로 가자
우리의먹을 것은
그곳에서 엇나니
푸른풀욱어진
田園으로 가자
심으고 매려
그곳으로 가자
毒魔의巢窟을 나
餓鬼의 싸움터를버리고
都市를 버리고
田園으로 가자
健全한 알몸이되야
自然의惠源을차저
가자
가자
―권구현, [田園으로] 전문
이 시에서 보아야 할 것은 도시와 자연의 이원적 대비다. 도시는 "독마(毒魔)의 소굴(巢窟)", "아귀(餓鬼)의 싸움터"로서 허식과 악마적 공간이고, 이에 비해 전원(田園), 즉 자연은 '건전'함과 '혜원(惠源)'이 깃든 진실과 안락의 공간이다. 이러한 대비의 이면에는 당시 도시적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 존재하는데 이는 곧 근대화, 문명화를 명분으로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된 조국 현실을 마귀의 소굴, 도시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저항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즉 머레이 북친의 견해로 보자면 올바른 사회를 구성하지 못한 사회 제도를 비판함으로써 생태적 바른 삶을 추구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 점에서 위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健全한 알몸"이라는 표현과 "自然의 惠源"이란 개념이다. 이 때 건전한 알몸은 인위와 제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본연의 상태를 지향하는 의미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에 나오는 야성과 원시의 생명의식은 바로 복고적인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역사의 체험 끝에 우리 인간이 찾아야 할 미래지향적 인간 정체성이라 할 것이다. 또 자연의 혜원(惠源)이란 개념도 인류의 원초적 꿈이었다 할 수 있는 황금시대에서의 총체성처럼 인류의 미래에 회복되어야 할 유토피아의 한 전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자연주의에 입각한 아나키즘적 유토피아 사회상은 당대의 비인간적 현실을 비판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열망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러한 아나키즘 속성은 부정적 근대성, 즉 자연이나 타자를 물화(物化)나 수단으로 치닫게 하는 기술적 근대성 에 저항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아나키즘 사상은 분명 타자를 자기의 보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관점이나 행동에 대해 반대한다. 아나키즘은 모든 사람이 이성과 양식에 따라 자발과 평등의 호혜로운 원칙 위에서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점은 앞에서 보았던 자연론적 사회관의 반영이다. 그것은 지배자의 특권에만 봉사하는 과학과 자본주의의 발달을 부정하는 측면에서 도덕적 특성을 강조하는 전근대적 사고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전근대성은 복고주의적 차원에서 말해질 것은 아니다. 이 때의 전근대적 사고 방식은 근대적 방식이 갖는 어떤 한계를 드러내거나 교정한다. 근대성을 비판하는 개념으로써 전근대성은 바로 기술적 근대성이 갖는 도구성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이때 아나키즘 사상에서 내세우는 반감의 구체적 실례들은 중세적 질서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다. 공동체주의의 사고는 근대성이 갖는 개인주의적이고 분열적인 현상에 대하여 전체적인 시각과 소외 없는 이념으로서 동질성을 환기시킨다. 이는 마치 역사 속의 낭만주의 운동이 각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화가 구미 각국에 확산되면서 전대미문의 급격화를 겪은 산업자본의 사회에서, 여러 형태의 소외 를 경험한 지식인들이 부르주아 산업문명에 보여준 적의에 찬 반응과 자본주의 이전의 과거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동경, 즉 낭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세계관을 드러낸 것11)
{{ 임철규,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 p. 359 }}
과 같은 이치다.
이러한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인위적이고 부정적인 근대성에 대해 비판의 인식은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사상적 전화를 보인 단재 신채호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3.
일시적 순간적인 너의 몸을 바치어
동포 국가 사회 인류 모든것을 위하라는
너희의 가진 윤리 싸움질을 못 금한다.
싸움 없는 매암의 사회 윤리를 어데 쓰랴
온 세계의 모든 겨레 한 소리로 화답하자 매암매암
4.
수천 여년 기업으로
문학 미술 정치 풍속 모든 것을 창조해 온
너희의 가진 역사 종 되는 화를 못 구한다.
자유 자재 매암이 나라 역사를 어디 쓰랴
자연으로 만든 풍류 또 한 마디 아뢰어라 매암매암
5.
여름은 우리 시대 綠樹는 우리 家鄕
이슬은 우리 양식 생활이 평등이다.
좋을씨고 매암이 생활 매암매암 매암매암
아비가 매암이면 아들도 매암
사내가 매암이면 아들도 매암
이름도 차별없다
좋을시고 매암이 이름 매암매암 매암매암
―신채호, [매암의 노래]에서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에 빠져들면서 썼다고 추정되는 이 시는 자본주의적 삶을 부정하고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통해 소유욕 자체를 없애 버리는 무정부 공산주의, 즉 유기적 공동체주의의 한 양상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인간의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사회 제도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생태 아나키즘적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총 6연으로 된 장시인데 1연과 2연에서 주체성과 도덕성을 노래한 뒤 3연에 가서 매미 입장, 즉 생태 아나키즘적 입장에서 인간을 준열하게 꾸짖는다. 곧 3연에서 인간의 윤리로는 싸움을 그칠 수 없다고 말한 뒤 "싸움없는 매암의 사회 윤리"를 제시하는데, 이 윤리는 자연적 자발적 합의에 의해 도출된 윤리이기 때문에 아나키즘 사상에서 말하는 윤리, 곧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의 정신을 일컫는다. 이런 상호부조의 정신 속에서 드디어 유기적 공동체 사회로써 아나키즘적 이상 사회상을 5연에서 제시한다. 매미 생활로 비유하여 보여주고 있는 이 사회상은 우선 "여름은 우리 시대 綠樹는 우리 家鄕"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의미한다. 이는 아나키즘 사상이 자연의 원리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즉 호혜적(互惠的)인 자연성이 모든 윤리적 가치 기준을 결정하고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임을 뜻한다는 푸르동이나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지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쾌적한 자연적 삶의 양상은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가장 염원하는 이상적 세계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슬은 우리 양식 생활이 평등이다"와 "이름도 차별 없다"에서 신채호가 바라는 이상적 사회상의 성격을 간취할 수 있다.
즉 지상의 모든 물적 재산에 대하여 공동 소유임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그는 양식과 생활의 평등이 전제되지 않은 삶이란 자유와 행복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철저히 동등하면서 그 개별성과 주체성이 보장된 사회, 바로 아비와 아들, 사내와 아내가 함께 평등히 꾸며 가는 유기적 공동체 사회로의 지향이 이 5연의 주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채호가 당시 역사적 현실에서 발생하는 궁핍과 억압에 대한 이상적 전망을 떠올린 생태 아나키즘적 유토피아 상(像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또한 일제 치하 아나키즘 사상을 그 창작의 바탕으로 삼은 유치환의 강렬한 생명성과 원시주의도 생태 아나키즘의 해석 선상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亞剌比亞)의 사막으로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을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生命의 書(1章)」전문
이 시의 서정적 자아가 거처하는 곳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로 두고 볼 때, 부정적 근대성이 표출된 사회 속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자아에게는 도구적 상태에서의 탈출이 필요한데 유치환은 이를 절대의 사막 '아리비아 사막'으로 형상화해 놓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의 사막이란 나에게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게 하는 도량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도구적 근대성을 극복할 하나의 비전으로써 원시주의, 또는 생명주의가 된다. 즉 부정적 근대성에 대립한 이미지로서 야성적 생명 공간인 생태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유치환 시에서 이러한 원시성과 야성적 생명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물론 명백할 것이다. 그것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독점 자본주의의 포악성에 저항하는 면역체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에게 아라비아 사막으로 대변되는, 지금 이곳의 파편적 근대성을 넘어서는 원시적 공간은 일제에 의해 사물화되는 자아를 지켜내기 위한 의식적 투쟁 장소였다. 그 점에서 원시주의로 대표되는 생명성은 바로 생태 아나키즘적 사유를 바탕으로 자아의 파편화와 인식의 해체로 특징지워지는 근대에 있어서 그것을 통합하는 유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현실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는 모순에 대한 상상적 해결을 발견하는 데에 그 기능이 있다.12)
{{ 김형효,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1989), p. 201 }}
유치환은 이러한 상상력을 통한 자기 해소로 일제의 파쇼화되어 가는 악랄한 상황에서 그들의 논리에 수렴되지 않고, 즉 도구화의 길을 걷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그가 생태 아나키즘의 인식을 통해 당대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의 확인인 셈이다.
3 해방 후의 생태 아나키즘 문학의 양상
이러한 생태 아나키즘적 관점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시는 해방 후에도 계속된다. 신동엽이 해방 후 대표적 아나키스트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이러한 생태 아나키즘적 인식의 구체적 표현으로써 유기적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의 이상사회의 모습을 띠고 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 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 [散文詩 1 ] 전문
이 시는 전형적인 미래의식의 선취로서 에코토피아적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60년대 분단의 모순 속에 얽매여 있는 지식인에게 대통령도 자전거를 타고 시인의 집으로 놀러 가는 낭만적 비전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될 무계급사회의 한 유토피아적 꿈일 뿐 아니라 생태주의적 세계관의 표출에 해당한다. 특히 이 시에서 대통령, 즉 시인의 집에 놀러 가는 대통령은 인위적 제도를 부정했던 동양 자연론자 장자(莊子)가 꿈꾸는 이상사회 지덕지세(至德之世)의 "민여야록 상여표지(民如野鹿 上如標枝)"의 표지 와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제왕은 한 그루 나무 끝에 달린 가지처럼 그 지위는 매우 높지만 자연에 따르고 작위하는 것이 없는 존재13)
{{ 진정염․임기담(이성규 역), {중국의 유토피아 사상} (지식산업사, 1993), p. 93 }}
로서 대표성만 지닌다는 것이다. 때문에 착취와 압박의 상징으로서 대통령의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폭력으로부터 포도밭을 지키는 농민들의 상(像)으로 반외세 및 자주적 세계의 확립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시에도 강조하는 전경인(全耕人) 의 사상, 즉 농본주의적 상상력을 통해 부정적 근대성을 극복하는 모습은 바로 생태주의 세계관과 아나키즘 세계관의 한 절묘한 결합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중립에 대한 의미부여도 인위적 제도에 대한 거부로서 자연적 질서를 택하겠다는 의지로 보여지며, 무엇보다 대통령의 이름도 모른다에서 보듯 인위적 정치질서에 대한 부정의식으로 읽혀진다.
이것은 모두 생태 아나키즘 입장에서 제도적 비판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의 꿈을 드러낸 것에 해당한다. 즉 이 시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동양적 유토피아 상, 즉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과 장자의 지덕지세(至德之世)의 금욕적이고 정적인 유토피아 상에 충실한 모습임을 말해준다.14)
{{ 그것은 신동엽이 산문에서 " 治大國 若烹小鮮 老子 五千言 속에 있는 말이다. '大國을 다스림은 흡사 조그만 생선을 지짐과 같아야 한다.' (……) 나도 내 인생만은 조용히 다스려 보고 싶다. 큰소리 떠든다고 세상 정치가 잘 되는 것이 아니듯이 바삐 서둔다고 내 인생에 큰 떡이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신동엽, [서둘고 싶지 않다], {신동엽전집}(창작과 비평사, 1992), p. 344 참조 }}
즉 그 말은 노자의 정신을 하나의 사표로 삼고 있는 그에게 노자의 정신과 그 맥을 같이 한 아나키즘 사상을 접했을 때, 자연스럽게 두 사상은 융합 발전돼 제도적 비판의 생태 아나키즘 문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태 아나키즘 인식은 신동엽에게 바로 상호조응과 식물적 이미지로 세계를 포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이 때 시인은 바로 이상사회로서 무정부 마을을 건설하는 대지의 아들이면서 화합과 조화의 전인적 인간으로 선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을 신동엽은 둥구나무 에서 찾고 있다.
뿌리 늘인
나는 둥구나무.
南쪽 山 北쪽 고을
빨아들여서
좌정한
힘겨운 나는 둥구나무
다리뻗은 밑으로
흰 길이 나고
東쪽 마을 西쪽 都市
등 갈린 戰地 바위고 무쇠고
투구고 憎惡고
빨아들여 한 솥밥
樹液 만드는
나는 둥구나무
―신동엽, [둥구나무] 전문
이 시에서 그가 인식하는 둥구나무는 바로 분단 조국이라는 역사적 현실에서 참된 인간적 삶을 지향하는 존재로서 상호부조와 생명의 원리를 바탕에 깔고 있는 존재자다. 그가 서 있는 역사적 벼랑은 "힘겨운" 상태지만 언제고 남쪽, 북쪽, 동쪽, 서쪽 등으로 갈라진 싸움터를 "한 솥밥"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역사적 소명의식과 의지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이러한 조화의 원리, 혹은 융화의 원리로 살아 있는 나무의 이미지는 바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실천의지와 사상의 깊이가 도저한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 없는 이미지다. 따라서 신동엽 시인이 자신을 인식하는 세계 속의 둥구나무, 다시 말해 무정부 마을에 서 있는 둥구 나무는 바로 생명의 나무요, 지혜의 나무로서 아나키즘 사상이 갖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의 의미를 갖는다. 그가 가 닿은 아나키즘 사상의 궁극적 이미지는 비로소 조용히 생명의 열로 타오르는 평화스러운 식물 이미지인 것이다. 유토피아 이미지가 사랑, 평화, 협동을 강조하는 여성적 이미지로 나타남을 그 역시 잘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15)
{{) 임철규, [역사의 바보들], 앞의 책, p. 42 }}
해방 후 또 이러한 생태주의적 삶의 유토피아성을 가장 잘 형상화하고 있는 시는 아나키즘 운동을 역사 현실에서 실천한 바 있는 아나키스트 박노석의 작품에 잘 나타난다.
다시 돌아온 癸丑年 나의 돌해에
이런 저런 世間이 겨워
山으로 들어 餘生을 산다.
여기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永遠한 우리의 本鄕!
나의 寢室 온돌방과 咫尺인
뜨락엔 數百으로 櫛比한 墓碑
고된 삶의 나래 접고
平安히 누운 魂靈들―
이 慈悲로운 고요와 永樂의 世界에
東天의 햇빛 玲瓏히 떠오르면
울울창창 湧天山 溪谷엔
구슬을 굴리는 맑은 물소리
거기 와서 지저귀는 山새소리
그 소리들에 어울려
나는 冷水浴을 즐긴다.
西山에 해가 걸리는 저녁나절
곱게도 노을이 물들면
땔나무를 하다가도 일손을 멈추고
저 白雲山 기슭에 피었다
스러지는 구름떼를 하염없이
건너다 보기도 한다.
또한 대낮의 無聊함을 달래서일까
짙푸른 하늘 半空中을 旋回하는
솔개라도 뜨는 날이면
그 雄渾하게 펼쳐진 날개를 우러러
壯快한 律動에 흠뻑 취해도 본다.
밤이 오면 버려진 地域 같지만
北斗七星 三台星 北極星 등
綺羅星들이 제자리에 나와 앉고
휘영청 달이라도 밝아 오면
이 靜寂의 天地는 왼통
나로 하여 神韻속에 잠기려 하느니
때로는 컬컬히 막걸리라도 한사발
젊은이와 어울려 주욱 들이키면서
날품팔이 人夫들과
弄談도 싱그러이 걸어도 본다.
나의 人生과 眞實은 조촐하지만
그러나 淸明할손 이렇게
한편의 詩를 가꾸며 余生을 산다.
―박노석, [山으로 들어 餘生을 ―白雲墓苑에서] 전문
서정적 낭만주의 시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이 시는 아나키즘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상당한 의의가 있다. 박노석이 이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연과 조응하고 자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자세인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그는 산문집에서 [돌아간 봄 다시 오는데]라는 글을 통해 "일찍이 장자(莊子)가 말한 여천위도 의 경지, 자연과 동화되어 하나가 되는 데에 삶의 참뜻과 기쁨을 얻으려 함인지도 모른다."16)
{{ 박노석, {行雲流水 -奴石 박영환 팔순 기념문집} (빛남, 1994), p. 221 }}
라고 말함으로써 동양적 유토피아상으로서 자연 속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시의 본질은 역시 아나키즘 입장에서 문명이 갖는 인간의 소외현상을 자연론적 사회관의 투사로써 비판하는 차원에 그 의미가 크다. 박노석도 그의 이런 자연적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진 것 없는 억만장자란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손수 일군 여남은 평 되는 채전밭에 올라서 거기에 자라고 있는 온갖 채소를 어린아이 돌보듯 조심스레 돌본다. 그러한 작물들은 모두가 주인의 발자국소리에 큰다는 재미스런 말이 있다. (……) 인간생활을 유익하고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자신이 온갖 연구와 노력으로 이룩한 과학적 물질문명은 오늘날에 와서는 도리어 그로 인한 문제들로 하여 인류의 앞길에 큰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는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야 할 절박한 시간에 와 있는데 그 같은 자연을 보호하고 그 자연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소박한 인간자세로 돌아가야 모든 인간이 영육간에 건강을 얻을 것이다.17)
{{ 위의 책, pp. 210-211 }}
이 글의 내용을 두고 볼 때 자연에 손수 노동하고 그 노동의 대가로 얻는 작물을 먹을 때, 정신과 육체의 분리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전언이다. 즉 그가 이러한 자연을 "여기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永遠한 우리의 本鄕!"이라 말할 때, 거기는 이상적 삶의 사회상이 투사되어 있다. 이는 미국 아나키스트 D.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채소와 농작물을 직접 길러 먹으면서 당시 문명에 의해 오염된 도회적 삶을 부정하고 자연적 삶을 추구한 경우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18)
{{ 헨리 데이빗 소로우(강승영 역), {월든} (도서출판 이레, 1993), 참조 }}
또한 그러한 삶이 "淸明할손 이렇게/한편의 詩를 가꾸며 余生을 산다."처럼 예술적 삶이라 할 때 생태 아나키즘 사상의 가장 고도한 발현인 셈이다. 박노석의 자연주의적 삶은 아나키즘 사상이 추구하는 사유재산 부정으로서 무소유와 상호부조의 자연적 질서 속에 살기를 몸소 실천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4 생태 아나키즘 문학의 가치와 가능성
이상으로 볼 때 한국 생태 아나키즘 시는 일정한 역사 사회 현실에 대응하는 시적 인식을 표출해 왔다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 현실의 모순과 제도적 왜곡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연적 삶과 이상적 사회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 생태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도구적 근대성이 갖는 물화와 수단화에 저항하여 자연적 삶이 갖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서정의 결로 표현해 내고 있음은 한국 생태 아나키즘 시의 그 미학적 역사적 가치를 엿보게 한다.
이러한 생태 아나키즘 시는 사실 21세기를 맞는 이 시점에서 더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고 말해야 옳으리라. 이윤택을 비롯한 김지하, 송재학, 서림의 일부 시에 보이는 제도적 차원의 근대성 비판과 자연 중심의 삶 추구는 사회 생태론적 입장에서 해석될 여지를 주고 있다. 그들이 비록 아나키스트라 자처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시적 세계가 앞서 살펴보았던 생태 아나키즘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 많으므로, 21세기를 맞는 이 시점에서 자유와 자발과 자치의 생태 아나키즘 사상의 실천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역사성으로 보아 앞으로 여러 시인들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자연적 삶의 본질에 바탕을 둔 이상적 사회상을 탐구하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될 때 생태 아나키즘 시의 전망은 밝다 하겠다.
유토피아 인식이 당대 현실의 모순에 대한 보다 철저한 비판 위에 서 있음을 전제할 때, 아나키즘에 기반한 에코토피아의 전망은 현재 우리들의 결핍된 삶을 메꿔 주고 풍요로운 미래적 삶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절대적 요청이다. 때문에 인간의 삶의 조건이 되는 자연과 그 연장 선상의 사회의 원리를 형상화하고 있는 생태 아나키즘 시를 지속적으로 관찰해 보는 것은 동시대적 삶의 지형도를 그려보고 그것의 지향점을 확인해 보는 것으로서 의의 있는 일일 것이다. (오늘의 문예비평. 1998겨울. 통권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