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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위기 / 수 23:1-13, 고전 10:1-13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성추문에 시달리고 있다. 성문제를 일으켰던 대통령은 미국 초대 대통령인 제퍼슨, 노예 해방자인 링컨, 뉴딜 정책으로 미국을 공황에서 구출한 루즈벨트, 암살당한 케네디 등 8명이나 된다. 이 때문에 클린턴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란 말들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대통령이 성문제로 대통령직을 그만둔 예가 없다. 미국은 성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거짓말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문제이다. 작년에 봉동에서 합동측 전직 목사가 자기 부인을 목졸라 죽인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목사가 전주에서 목회를 할 때 여자 교인과 바람이 났던 것을 부인이 자꾸 소문내고 따지고 드니까 그랬던 것 같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성직자나 신앙이 돈독해 보이는 성도가 이외로 타락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신앙이란 대개의 경우 우리의 감정과 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늘 변화되는 의식과 감정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전인적이지 못할 때는 위기를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믿음이 깊다. 성경도 많이 알고,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철야기도도 가끔하고, 부흥회 같은 특별집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체험하였으니 내 신앙은 흔들릴 염려가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경고한 것처럼 ‘내가 섰다’라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 위기를 무시하거나 경솔히 여기다가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떨어지게 된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한 후에 시험을 받으셨다. 이때가 주님에게는 신앙의 위기였다. 우리의 본이 되시는 주님은 그 시험에서 시련과 유혹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의식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많은 유혹이 우리의 신앙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깨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라고 권고하신 것이다. 베드로 역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하면서 사탄이 우는 자사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는 성도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흐르는 물에 떠내려 간다’라고 경고하면서 항상 조심스럽게 살라고 했다. 우리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며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을 성서에서는 마귀(사탄)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뿔이 있고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 괴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사탄’의 원어의 의미는 ‘방해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도 당신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사명을 오해하고 방해하던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책망하셨다. 우리 주변에 신앙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집안 식구, 일터, TV나 영화, 친구나 운동 등이 얼마든지 사탄의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집안 식구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나에게 합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것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아신 주님은 누차 그것들을 경계하라고 강권하신 것이다. 이런 사탄의 유혹이 우리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에서 어느 때가 신앙의 위기인가를 몇가지로 생각해 보겠다.
1. 은혜를 모르고 살 때가 신앙의 위기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을 거울 삼으라고 하면서,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항상 ‘불평과 원망’의 생활, 곧 하나님의 은혜에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생활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도움으로 4백여 년간의 말할 수 없는 애굽의 폭정으로부터 기적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도 홍해를 가른 일, 원수의 군대를 물리친 일, 만나와 생수를 주신 일 등, 수없는 기적을 통하여 특별한 보호와 축복을 받으면서 살았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받은 많은 복을 상기시켰지만 그들은 불평만 할 뿐이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사도 바울이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사수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기를 불러주시고, 사도로 만들어 주심은 모두가 분에 넘치는 주님의 크신 은혜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은 다른 누구를 위함보다도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위함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죽음을 자기 ‘개인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일만큼 그는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영국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였던 아이작 왓츠가 찬송가 143장 5절에서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라고 찬송했던 것처럼, 이런 마음으로 가득찼던 바울이기에 자기 자신을 ‘관제로 드릴 몸(제물로 바쳐진 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우리도 이 한 몸밖에 드릴 것이 없을만큼 큰 은혜를 입고 산다고 느껴야 한다. 이런 믿음을 갖고 있어야 사탄이 주는 위기를 면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있게 된 것은 십자가 상에서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그 감사함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을만큼 강했던 것이다. 이런 신앙의 실례를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본다. 시몬이라는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았다. 그 당시 나병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폐인, 또는 죄인으로 취급받았으며, 사회에서는 물론 가정에서까지 쫓겨나는 가장 무섭고 더러운 병이었다. 사람들은 나병은 불치의 병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죄값으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나병환자였던 한하운 씨의 구슬픈 시에서도 그 심정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나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나는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사람이기는커녕 동물만도 못한 천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병을 가진 시몬이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은헤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의 집에 한 과거가 복잡했던 여인이 불청객으로 왔다. 그녀는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향유를 머리 위에 붓는다. 자기의 죄를 사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그 여인을 크게 칭찬하며 은혜를 모르는 시몬을 책망하였다.
나이 40도 안되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 신장이 좋지 않아 기계에 위존하여 생명을 유지해 가고 있었는데, 그 기계가 콩팥 역할을 하는 동안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의사의 진단대로 그는 임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은혜로운 찬송을 부르며,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나가고 있었다. 그가 늘 즐겨부르던 찬송이 있었다.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속의 은총을 잊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은혜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를 구속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나를 신앙의 위기에서 지켜줄 것이다.
2. 죄성을 지닌 채 살 때가 신앙의 위기이다.
보통 영어에서는 죄를 두가지로 정의한다. 주홍색의 죄(Scarlet Sin)와 회색적인 죄(Gray Sin)이다. 주홍색의 죄는 객관적인 증거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써 행위로 나타난 죄, 곧 살인, 간음, 사기, 도둑질 등의 소위 형법상의 죄를 말하며, 회색적인 죄는 마음으로 짓는 죄, 곧 미움, 시기, 욕심, 음욕 등 양심적이고 종교적인 죄를 의미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가지 죄 중에 눈에 띄는 주홍색의 죄를 더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도 역시 그런 죄를 더 엄하게 취급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셨다. 주홍색의 죄를 비난하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마음의 죄가 더 무거움을 강조하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을 돌로 치려던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는 눈에 안보이는 ‘회색적인 죄’가 없는 사람만이 돌로 치라고 하신다. 그때 모두 슬그머니 다 물러가 버린다. 주님께서는 그처럼 간음한 여인과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사람을 같은 죄인으로 취급했다. 또한 행위로 나타난 죄만을 죄로 여기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이 더러운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우리가 이 마음의 죄악의 근성을 그대로 묵인하거나 그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회개라든지, 중생, 성화라는 용어들은 모두 이 죄성이 없어지고 주님의 새로운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바울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정욕과 감정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런 근본적인 죄악의 본질을 그대로 두고 적당히 주님을 믿게 될 때 위기를 만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신다. ‘새 의식과 마음과 생각’을 갖고 주를 믿으라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는한 우리는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죄성 때문에 바울도 몹시 고민하였다. 그는 ‘내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만을 행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는 늘 악을 행하도록 나 자신을 죄악으로 끌고 들어가는 또 하나의 실체를 본다. 그래서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한다. 우리 자신의 의식 속에 먹물과 같은 이 죄성의 탁류가 깊이 자리잡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한 우리는 비록 남의 눈에 드러나는 죄된 행위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예수의 눈에 비쳤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름없는 죄인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죄를 행위가 아니라 상태에 강조점을 둔 신학자 폴 틸리히의 이해가 옳다고 본다. 틸리히는 죄의 시점을 3대 분리,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분리로 보았다. 그리고 이 회색적인 죄는 신앙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죄 자체가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런 죄에 대한 정의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한 성서의 정의는 언제나 변함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이 무서운 죄성을 그대로 갖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치 화약을 등에 지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 자신을 ‘사로잡아 끌고 들어가는’ 이 강하고 파괴적인 무서운 죄악의 존재 앞에 우리는 바울처럼 절규할 수밖에 없다. 행위를 중요시한 구약과는 달리 나쁜 마음가짐이 벌써 죄라고 정의한 예수의 태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곧 주님은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행위와 같이 취급했으며, 여인에 대한 음란환 생각을 품는 것도 간음행위와 같이 취급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무서운 탁류를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정화시켜야 한다. 이 검은 회색적인 죄악의 탁류가 흐르는 동안에는 신앙의 위기를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선 줄로 생각할 때가 신앙의 위기이다.
넘어지기 쉬운 신앙의 위기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내 힘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온다. 지나친 자기 과신이나 자만심 같은 것을 말한다.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은 부요하여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한다. 우리 주변에서 자기가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얼마든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신앙의 위기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오만한 태도를 탕자에게서 본다. 아버지에게 자기의 몫을 요구한 그의 태도는 그가 곧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아버지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이다. 에덴의 비극도 바로 이런 마음가짐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귀의 꼬임에 그들은 넘어가고 만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은 곧 예수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라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단호히 배격하셨다. 그리고 그는 항상 ‘아들이 하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없다...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한다’라고 하시면서 독립적으로, 또는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산다고 하셨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혜, 재물, 명성, 국력이 세게에서 으뜸이 되어 왕으로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정상에 올랐을 때, 그는 ‘어지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급속도로 신앙의 위기를 맞아 내리막길로 내달리게 되었다. 다윗도 그런 신앙의 위기에서 결국 큰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다윗은 본래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신앙적인 성군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 자기의 아름이 빠진데 대하여 그는 큰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심정을 실토하며 항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내가 준 모든 시련과 유혹을 물리친 믿음의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주님, 저도 그들처럼 얼마든지 시험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라며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 마리의 새가 방에 날아 들어왔다. 그 새를 내보내다가 창문으로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누를 수 없어서 결국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여인이 바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다. 신앙의 위기에 그는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자기가 범한 이 큰 죄에 대한 고백과 참회로 슬픈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바벨론 왕으로 자기가 이룩해 놓은 업적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자기 만족에 도취한 그는 지붕 위를 거닐며 중얼거린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고, 나의 도성을 삼았으며, 이것으로 내 위엄이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이 말이 입에서 떨어진 순간 그는 들에 던져져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 짐승의 신세가 되었다. 그가 겸손해 질 때까지 짐승들 속에서 일곱 때를 살다가 결국 다시 왕으로 복직이 되었다. 그는 그때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라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신앙의 가장 위험한 때는 ‘나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교인들은 ‘내가 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내가 아니면 이 교회가 운영될 수 없다. 내가 이 교회를 떠나면 이 교회는 곧 없어지게 된다’는 등의 교만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나가버린다 해도 여전히 교회는 존재하게 되며,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더 잘되는 것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시 62:9절의 말씀대로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운’ 인간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터가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일본의 여성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는 오랫동안 신병으로 고생을 했고, 결혼 후에는 가난 때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사히 신문이 1천만 엔의 상금을 걸고 공모한 장편소설에 아야꼬의 작품이 당선되어 하루아침에 인기작가가 되었다. 아야꼬는 이 기쁜 소식을 영림국(산림창)에 근무하는 남편에게 전화로 알렸다. 그러나 남편은 이상하게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담담한 태도에 몹시 서운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이층으로 올라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는 것이었다. 기도를 마친 후 아야꼬는 남편에게 왜 그처럼 무표정한가를 물었다.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1천만 엔의 상금을 받고 너무나 유명하게 되면 인간이 바보가 되기 쉬우니까요’ 하면서 응모에서 떨어진 730명이 겪고 있는 실망과 좌절감에 깊은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상금은 비록 가난한 살림이지만 자선사업에 다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야꼬는 그 일등상을 받았을 때 수많은 사람이 축하하고 칭찬해 주었지만 그후 20여년이 지났어도 남편의 그 말 한마디 ‘바보가 되기 쉬우니까요’가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자칫 정상에 이르렀을 때 너무 지나치게 자기를 과신한 나머지 ‘어지러워’지거나 ‘바보’가 되고 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섰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때 마치 물을 가득히 담은 물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가듯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옮기듯,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어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 죄성을 지닌 채 사는 것, 선줄로 생각하는 것 등 이 세가지 신앙의 위기를 알고 경계하면, 넘어지지 않고 바울처럼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런 신앙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