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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의 뒤죽박죽 형님/ 『京畿 文學人』
이원우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및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 역임/ 대한가수협회 회원/ 전 초등학교장
• 소설집 6권 ‧ 수필집 15권 ‧ 기타 3권
• KNN문화대상 ‧ 화쟁포럼문화대상 ‧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 자랑스러운 부산교대인상 ‧ 부산교육상 ‧ 황조근정훈장 ‧ 부산PEN문학대상‧ 경기문학대상 ‧ 경기문학인 문학대상 ‧ 표암문학대상 ‧ <문예시대>문학대상 ‧ 부산수필대상 ‧ 부산북구문학대상 ‧ 허균문학상 ‧ 부산가톨릭문학상 ‧ 한국전쟁문학상 ‧ 쿠알라룸푸르한인회장 감사패 등
L이 타관에 와서 산 지가 10여 년이다. 이사 올 때가 일흔이었는데, 어느덧 여든을 넘기고 보니, ‘강산이 변할 그 세월’을 절감한다.
그는 상행선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왼소리’를 들어야 할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누군가가 그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왼소리? 죽었다는 소문을 일컫는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내친김에 다른 예문을 몇 개 들어보자.
“오늘 ‘왼소리’를 들어서 어디 일하겠나! 그래 초상집엔 가보았는가?”
“뒷방에서 뛰쳐나오는 아낙의 두 손에 낭자한 핏자국을 보자 ‘왼소리’가 진정으로 여겨져 모두 움찔하였다네.”
쉽게 설명하지 않으면 그 뜻을 쉬 헤아리기 힘들다는 체념도 뒤따른다. 문인들에게까지 ‘왼소리’가 아직 널리 쓰이지 않는 탓인지 모르지만, 컴퓨터에 이를 처넣다 보면, 그 밑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고개를 가로젓기 마련이다. 혹시 ‘왼소리’는 세상에 반짝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 사어(死語)일까?
그렇지만 그의 뇌리에선 여전히 ‘왼소리’가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가 동석(同席)해 있는 가운데 혼잣말처럼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식물인간이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지, 내가 말이다,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부산에서. 이래저래 괴짜라서 많은 시민이 알 수밖에 없는 나였는데, 끈질기게 명줄이 붙어 있는 나를 사자(死者)로 치부하다니…. 20년 넘게 같이 울고 웃었던 제자(노인학생)들도 덩달아 그랬었지.”
그로부터 흐른 세월이 10년인 거다. 모든 게 만만찮았다. 한데 그토록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괴롭혔던 ‘왼소리’가 어느덧 그의 곁에서 사라졌다. 물론 갑자기 그 큰 변화가 일어난 게 아니고, 시나브로 그랬으니 자못 흥밋거리이고도 남는다. 그걸 한번 돌이켜 보고 이야기하려는 거다. 그런데 뒤죽박죽이다. 순서나 차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하지만 흥미는 있을 것이다.
아 참, 그가 요즘 입만 벙긋하면 쏟아내는 말이 이거다. 아니 ‘쏘아 댄다’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마치 속사포처럼 말이다.
“난 죽음을 딛고 일어섰다. 팔십 평생을 통해 이 정도로 영육 간의 건강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한때는 정신과(정신의학과) 의원을 불이 나게 다니면서도 환상이나 환청에 시달렸는데 지금은 그런 현상이 확 줄었다. 물론 약을 끊은 대신 두서너 달에 한 번씩 상담하지만. 원장인 여의사가 줄곧 말하지 않던가?”
의사의 탄성이 섞인 진단이었다. 자기가 아는 건강인 중에서 L이 10위 안에 들어가는 것 같다는…. 그러다 의사는 이윽고 정정(訂正)했다. 지나친 장담이 실례 같아서 망설였는데, 5위 정도로 여겨진다고.
그런 여의사의 선언을 들으면서 그는 긍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속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친구(원장 말이다. 마흔 살 정도의 나이인 것 같다)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은 소릴 하느냐며 고개를 잠깐 갸웃거렸다.
처음 두서너 달 됐을 무렵이었으리라. 이 친구가 그에게 기억력 테스트인가 뭔가를 해보자며 잡다한 도구(그림 등)를 내놓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앓았던 그의 병력(病歷)을 귀띔으로 들은 이 친구가 슬쩍 그 전체를 잠시 보여주었다. 그러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차례대로 그 이름을 기억해서 말해 보라고 했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엉뚱하게
“원장님, 기독교 신자 맞으시지요?”
“아, 어떻게 아세요?”
“저 창가에 얹혀 있는 책이, 영어와 한글 대역(對譯) 『신약 성경』 아닙니까?”
“아, 할아버지도 기독교 신자이시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독교이긴 한데 가톨릭입니다.”
“….”
“개신교와 천주교 즉 가톨릭을 합해서 기독교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대부분 기독교라면 개신교인 줄로만 알고 있어서 탈이지요.”
“와 할아버지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L은 원장의 기억력 테스트에는 짐짓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거다. 아니 아예 무시했다. 그러곤 원장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성경> 22페이지를 펼쳐 보라고…. 원장은 미궁의 세계로 빠지는 듯한 느낌으로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신약 성경』 요한복음 10장에서 21장까지입니다. 그 전체를 영어로 한 번 외워 볼 테니까, 앞으로 제게 기억력 테스트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원장이 책장을 펼치기 전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영어 요한복음 10장 7절이다.
So Jesus said again, “A men, amen, I say to you, I am the gate for the sheep. All who came……”
영어를 썩 잘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듣고 해석은 하는 원장이지만, 유창한 그의 발음에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이 그의 입에서는 어느새 7장 11절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I am the good shepherd. A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그 이상은 무의미했다. 어느 한 곳 틀리지 않을 게 분명하고 자칫하면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도(라뽀)에 해악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한 의사는 그만 손짓으로 됐다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그래도 안심은 금물이라 몇 달 병원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뜻밖에 옛 직장 동료를 만났으니, 세상사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하자.
상담 시간이 처음엔 30분 안팎이었다. 두어 주일 뒤부터는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서로의 안부를 얼굴로 확인하는 정도에서 끝내기도 했다. 이윽고 진료실 문을 빼꼼 열고, 예사롭게 약만 타가겠다는 말만 던지고 돌아 나오기도 했다. 그날도 그는 ‘약만’라는 한 마디만 마치 선언이라도 하듯 던지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러다가 뜻밖에 너무나 뜻밖에도 그가 초임 교감 시절 한 학교에 1년 반 같이 근무했었던 직원을 만난 거다. 그는 어린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교원(敎員)은 아니었고, 교내의 시설과 비품 수선이나, 교육청 문서 전달 등을 주 업무로 하는 말하자면 비전문직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전달부라 불렀다. 어쨌거나 상대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L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아, 아니 요셉 형님!”
한데 상대는 그를 못 알아봤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거릴 뿐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러곤
“행여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닙니까?”
“김현상 형님, 맞으시지요? 80년대 말 부산 대저초등학교에 우리 같이 근무했었지요.”
그제야 요셉 혹은 현상이라 불렸던 상대는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딱 쳤다. 30여 년 전이 기억난다는 뜻이었다. 그러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이 병원 전체 건물의 관리 일을 맡고 있으며, 정신의학과 원장의 먼 친척 아저씨뻘이 된다고 했다. 잠깐 원장에게 배달된 우편물을 들고 들른 길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엔 상대가 다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교장 선생님, 여기 어쩐 일입니까?”
“부산 전체가 떠들썩했던 어린이 사망 사고가 있었지요, 형님. 기억나시지요?”
“그럼요. 그걸로 인해 교장 선생님이 거리에서 쓰러지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 뒤 워낙 회복이 안 되어 고생하다가 여기 아들 내외의 집안 살림도 거들고 손자 둘을 돌봐 주느라고 올라왔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은 후유증이 워낙 커서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정신의학과는 부산에서부터 다녔고, 여기 와선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둘은 그길로 건물 1층에 있는 두서너 평 짜리 관리실로 갔다. 그리고 기나긴 세월에 겪었던 각자의 고생담을 털어놓고 같이 회억에 잠겼다. 요셉 씨는 대저초등학교를 졸업한 금수현 선생과 본래 본관이 같았는데, 그분이 성을 김 씨로 바꾸는 바람에 각성(各姓)이 되었음도 다시 밝혔다. 점점 이야기가 무르익어갔다.
L은 본래 삼랑진에 살았다. 초등학교는 거기에서 나왔고 중고등학교는 부산, 그리고 부산 교육대학(2년제 초급)을 졸업했다. 삼랑진 시절, 그 고장 사람들이 좀 별나다는 이야기는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에서든 들려왔다. 거기 주민들은 한두 해 선후배를 따져 두 살 위인 선배 보고는 깍듯이(?) 형님 대접을 했던 거다. 전설의 주먹들도 많았다.
그가 교감이라는 학교의 관리직에 근무하면서도, 두 살 차이 나는 요셉을 보고 사석에선 형님이라 부른 것은 그 연장선상이었다 하자. 특히 둘은 노래를 좋아하여 강서구에 처음으로 지어진 대형 체육관에서 만나 금수현 선생의 ‘그네’를 연습하기도 했다. 가끔은 인근의 간이주점에서 둘이서 대중가요에 열을 올리기도 예사였고. 요셉의 노래 솜씨는 대단하여 둘을 비교하면 어금버금하다는 소릴 듣기도 했던 거다.
교감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들다고 했다. L도 천신만고 끝에 그 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삼랑진에서의 습관이 튀어나와 요셉에게 형님이란 호칭을 붙이고 그걸 거의 생활화했던 거다. 물론 직원들은 그 둘의 기행이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만, 둘이서 워낙 공사의 구분을 명확하게 했기 때문에 말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이야기를 들먹이는 까닭은 L의 형님관(兄님觀)을 이어나가자는 의도에 있다 하자.
또한 딸한테 와 있다고 했다. 부인이 외손자 셋을 다 키웠더라나? 막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더 이상 집안일에 매여있 을 필요가 없어 대저(大渚)에 살 때부터 이름난 요리 솜씨로 냉면과 숯불로 구운 돼지고기를 끼워 파는 체인점을 열었다. 요셉 자신은 같은 건물에 노래방을 열어 성업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 어울리겠지.
특히 요셉은 남들이 흉내 내기조차 힘든 별난 악기를 하나를 연주한다고 했다. VIP 즉 저명인사나, 장삼이사라도 노랠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왔다 치자. 그는 그동안 독학으로 익힌 트럼펫으로 마지막 몇 마디를 같이 덧보태어 연주함으로써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한다나? 스물네 시간씩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하룻저녁은 트럼펫 연주를 못 하지만….
그런데 요셉-여기서부터 가끔 형님이라 부르자-덕분에 L은 일생일대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정말 기가 막히고도 남는다고 할 정도인….
뜻밖의 조우 아니 해후가 있고 난 뒤 몇 달이 지나서였다. 군인 주일(主日)이 가까워졌다. 그는 50년 전에 제대한 불무리 사단 성당 미사에 참예(參詣)하고 싶어서 온 가족과 함께 올라갔다. 마침 기도까지 끝나고 대중음식점에서 사목(司牧) 위원들-모두 군 장교-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중 어느 대대장(중령)이 하는 말.
“교장 선생님, 저희 부대(部隊)에 와서 안보 강연 한번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말씀은 고맙긴 하지만 제가 전문 식견이 없습니다, 그 분야엔….”
“아까 ‘살아 계신 주’를 봉헌하셨잖습니까? 복음 성가 가수 이상의 실력이셨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어쨌거나 장병들에게 진중 가요며 군가 등을 가르치고, 특히 병사들이 군 복무 중 안전한 생활을 하며 무사하게 제대하여 귀가해야 하는 당위성을 각인시키는 정도라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로부터 L은 군부대에 드나든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요셉에게 전했더니 요셉의 정말 뜻밖의 사실 하나를 밝히는 게 아닌가?
“교장 선생님, 제 손자가 7* 여단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번 따라가 보고 싶군요.”
“형님, 참 기가 막히는군요. 지하철과 버스로 왕복(往復) 네 시간 정도 걸립니다.”
일흔 살을 갓 넘겼을 무렵 그런 소설 같은 사건이 발생했던 거다. 그 뒤의 10년 세월, L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외형상으로는 가수와 군 안보 강사, 소설가로 포장된….
물론 부산에서도 명실공히 그는 가수로서 여기저기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특히 기억될 만한 게 10회가 넘는 ‘가요 콘서트’를 당당히 개최했다는 사실! 그 처음이 남백송 우정 출연 ‘부산 노래 열아홉 곡 콘서트’였다. 남백송이 누군가? KBS 가요무대 최다 출연 기록 보유자! 그가 파격에 가까운 싼 출연료를 받고 광명에서 부산까지 와서 변두리의 6백 명 입장 공간에서 L을 도와준 거다. 무대에서 L이 남백송을 소개하던 말과 그 화답(和答)이 아직 귀에 쟁쟁하다.
“졸업 때 우등상을 받고 초임 교사가 된 게 만으로 스무 살 때였습니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객관적으로 봐서도 자질이 있다고 평가받은 결과였습니다. 한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교사로서의 출발은 지옥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론으로써만 어린이 교육이 좌우된다면, 그들을 가르치는 데에 몰두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현실에 질겁을 한 저는 교단을 뛰쳐나오리라 결심했습니다. 가수가 되길 결심한 겁니다.”
옆에 서 있는 남백송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보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L의 말.
“함자를 함부로 들먹여서 죄송합니다마는 남백송이라는 걸출한 가수 아니 스타가 바로 우리 집 곁에 살고 있었습니다. 근무지 진해에서 오후 집에 오면 가끔 삼랑진 극장에서 그분이 공연을 하는 겁니다. 그때 제가 결심한 것이, ‘좋다, 내가 언젠가는 백송 형님과 한무대에 서리라.’였습니다. 오늘 교장 승진 3년째, 정년 62세를 바로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합니다. 오늘 제 회갑 날입니다.”
그러자 우레와 같은 박수에 섞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객석에서 말이다. 두 개의 노인 학교 학생들이 예쁘게 교복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던 거다. 유네스코 간부들이며 두 교육장을 비롯한 교장, 교감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학부모들도 200명은 됨직했다. 남백송의 말이다.
“기쁜 날입니다. 눈치는 챘지만, 이 교장이 그 정도의 열정을 갖고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스무 살 때라면, 62년도쯤 제가 진해 중앙 극장 등에 공연을 많이 다녔지요. 남일해나 한명숙 등과 함께…. 오늘 삼랑진 출신 두 번째 가수가 탄생하는 역사적 날입니다. 우리나라에 두 개의 가수협회가 있습니다만 한 개는 유명무실합니다. 대한가수협회가 정통이니 앞으로 이 교장이 그 회원이 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L은 얼굴이 붉어졌다. 딱 반세기 만에, 명실상부한 최고의 가수로부터 ‘가수’의 칭호를 받았으니까. 실제 그는 당시 부산연예협회 창작 분과와 가수분과 회원이라는 명함도 지니고 다녔지만, 내세울 정도가 못 되었다. 두 가수협회의 어느 쪽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거다. 어쨌거나 그의 이어지는 말이다.
“앞으로 남백송 가수님을, 영원한 저의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혈육의 형님 이상으로.”
그건 정말 대단한 선언이었다. 사실 삼랑진읍의 인구가 1만 명가량 되었지만, 아무도 가수, 특히 대한가수협회 회원은 거의 없었다. 밀양시 전체를 보아서도 5명이 안 되었다. 그중의 하나라면 그만큼 희소가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건 거보(巨步)의 시작이었다. 그가 ‘형님’이라는 하드웨어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서울과 그 근교에서 힘차게 내딛는…. 물론 소포트웨어의 흔적은 여기 행간 어디에서든 나타나리라.
실제 지난 10여 년, 타관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의 생활에서 엿볼 수 있는 큰 변혁의 하나는 ‘형님’을 줄곧 달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주변, 혹은 무대, 공간, 일상 등등에서 그는 ‘형님’을 찾아다녔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리라. 요셉이라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옛날 부하 직원(당시에는 전달부가 공식 직위였다. 지금은 주무관)에게 던진 첫 신호탄이 그의 여생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어색하긴 하지만 그 개요를 뒤죽박죽 엮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야말로 노병의 신분(?)인 그는 명함에다 새겨 넣은 문구, ‘노병은 일흔을 넘어야 새로워진다’를 좋아한다. 결국 그 총화(總和)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제와 관통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타관에서 그는 몇 해 동안 힘들게 적응해 나가던 요셉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활력을 점점 되찾는다. 특히 군부대 출입이 잦아지고, 신문이며 방송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어 그에 비례해서 바빠질밖에. 처음 몇 번은 요셉이 동행했으나, 요셉도 생업이 있는지라 나중엔 거의 혼자 움직일 수밖에.
처음 형제의 관계를 맺은 인사가 둘 있다.
첫째는 Y 대령(26사단 행정부사단장)과 L 사단 주임원사 등과 마치 삼국지의 유비와 관운장, 장비의 흉내를 내면서 결의를 한 거다. 대신 도원(桃園)에서가 아니고, L이 서울에서 처음 연 가요 콘서트장(문학의 집)에서였다. 현역 장병 30여 명이 자리를 함께한…. ‘사단가(師團歌)’를 제창하면서 그들은 ‘삼 형제’를 선언하였다. 각계각층의 하객 170명이 증인이 된 가운데서 말이다.
두 번째는 다시 만난 남백송 원로 가수였다. 피를 나눈 형제에 버금가는 사이로 발전한 것은 부산의 콘서트장에서 싹이 텄음은 강조하나 마나. 진짜 신사였다, 남백송 형님은!
헤어진 지 10년 만에 인사동의 업소에서 해후했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게 남백송으로 하여금 진정 L의 은인이 되게끔 한 계기로도 발전했다. 그 기간 사무치도록 남백송을 그리워한 L이었다. 낮긴 하지만 그 업소에서도 무대가 있었다. 둘은 나란히 서기도 했는데, 듀엣으로 몇 곡을 부르기 예사였다. 다만 남백송의 히트곡 ‘방앗간 처녀’를 그렇게 소화하진 못해서 끝내 섭섭했다. 노래방 반주기에 입력이 안 되어 있어서…. 남백송은 철저하게 약속을 지키고 저승으로 떠났다. L이 대한가수협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너무나 큰 힘을 보태 준 거다. 물론 부산 노래 2회 취입(吹入)이나, 적잖은 콘서트 개최도 도움이 되었지만. 아 참, 서울이 그때까지 낯설었는데 요셉이 자주 동행했음을 밝히자.
다시 다른 가수 형님.
남백송 형님 못지않게 L의 ‘형님’으로서 큰 역할을 한 이는 쟈니리다. 그가 군에서 복무할 무렵 쟈니리가 ‘뜨거운 안녕’을 종횡으로 누볐다. 비행기를 전세 냈을 정도였더란다. 그 쟈니리와 큰 무대에 섰으니, 원도 한도 없이 그를 형님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L의 ‘제대 50주년 기념 모부대 장병 초청 기념 콘서트’가 둘을 형제로 만들어 주었다. 두 번째 공연장(共演場)에는 180여 문인, 가수, 현역 군인들과 나그네 등이 객석을 채웠다. 이름만 들먹이면 누구나가 아는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의 아버지 원로 코미디언도 등장했다.
이미 저승에 있는 오기택 형님을 어찌 빠뜨릴 수 있으랴. 그의 ‘영등포의 밤’ 노래비를 천신만고 끝에 찾은 뒤, 수십 년 동안 병석에 있는 그를 찾아 첫마디에 형님이라 부르짖고 L은 자기가 종사하는 신문에 4회 연재하여 그의 근황을 소개했다. 하지만 양한방(洋韓方) 협치 치료로도 이미 중환인 그를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끝내 숨을 거둔 거다. 병실에서 나와 환우들과 장기를 두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론 약간의 연출(?)이 곁들여졌지만.
저승에 간 지 오래인 차중락의 사촌 차도균 가수도, 겨우 두 살 연장이지만 L은 입만 열면 형님이다. 그의 벗은 상체를 보고 나니 과연 프로답구나 싶어서…. 그의 ‘철없는 아내’를 한 소절씩 나눠 부르는 것 또한 L에겐 기쁨이다. 물론 스마트폰이 매체다.
가요계의 형과 아우는 그 외에 수두룩하다. 압축하여 표현하면 가수협회 정기 총회에 갔다 치자. 그가 만나는 모든 원로 가수들은 형님이다. 상대가 그의 얼굴을 알든 모르든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물론 억지가 대판이란 손가락질도 받지만.
자신을 반드시 형님이라 부르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압력을 넣은 상대도 있다. 그중의 대표, 이 친구만은 들먹여야 하겠다. 가수협회장 취임식장에서 만난 방글라데시 출신 B 군이다. 그와도 이런저런 인연으로 어느새 형님 아우 사이가 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법학을 전공한 친구가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대한가수협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어느 시군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민보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정확하게 쓴다. 이 결의(?)는 양국 간의 우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리라.
가수가 아니지만, 스님 전문 유명 탤런트와도 형제지간(?)이다. 남해에 거주하는 B 원로 탤런트와는 정말 가깝게 지낸다. ‘남해’ 명예 군수를 지냈던 그와 ‘해남’ 땅끝마을 고향에 묻힌 오기택 형님 둘은 그 고장 이름으로 부지불식간에 머리에 떠오른다. ‘남해’와 ‘해남’, 허허.
L은 문단의 말석에서 소설과 수필을 쓴답시고 힘겹게 씨름하고 있는데, 지금은 후자(後者)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니 작단(作壇)에서의 형님과 아우 이야길 들먹여본다.
부산 시절부터 그가 존경하는 중진 소설가가 있었다. 세 살 연장이었다. 만으로 치면, 두 살 반? 아마 그쯤 되었으리라. 종천이 서울을 오르내리며 지리를 읽힐 무렵 그와 조우(遭遇)한 게 인연이었다. 그는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오래전 투견을 소재로 한 중편 소설이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던 인물이었다. L의 첫 마디가 역시 ‘형님’이었다. 소설가 역시 ‘아우’로 응대했고. 소설가는 L에게 높임말을 절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출판기념회 취재를 하러 갔는데 그가 하는 말이었다. 물론 그는 약간 취중이었다.
“야 임마, 니가 어찌 소설가협회 이사로 당선됐노?”
좌중이 모두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L도 매우 민망해서 약간 눈살을 찌푸릴밖에. 그래도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한 그를 예우해서라도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이윽고 그가 아프단 소문이 들리더니 기세(棄世)를 하고 말았다. 문상(問喪)을 못 갔다. 대신 그의 묘지는 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아 그의 유택 앞에 서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최희준 형님도 그랬었다.
작단에서의 형님과 아우는 여남은 경우가 된다. 둘만 더 소개하고 마치도록 하자.
그가 군 복무 시절 김기수라는 세계 챔피언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한때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던 그에게 김기수는 영웅이었다. 그가 벌이는 타이틀매치가 있는 게 행여 토요일 오후면 억지로라도 이웃 시청 소재지의 다방에 들어가 죽치고 앉아 그 경기를 보았다. 한때는 『링지(Ring誌)』며, 중학교 동기동창이 발행하는 『펀치라인』을 들여다보며 체급별 세계 챔피언, 동양 챔피언 국내 챔피언의 이름은 물론 선수들의 랭킹까지 죄다 외던 그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다른 격투기에 밀려 사양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복싱 열혈팬이다. 특히 골로프킨(한국인 2세)을 좋아한다.
근데 복싱의 모든 것을 자신만큼 꿰뚫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탄식에 빠져 있는데, 희소식이 들려온 거다. 여든 살이 훨씬 넘어 정식으로 소설가로 데뷔한 대선배, 어느 사범학교를 나왔으며(배구 선수) 다시 서라벌 예대를 졸업한 H 형님! 그가 우리나라에서 복싱 해설가로 가장 유명하다는 건 이름 석 자를 밝히면 중년 이상은 안다. 유수의 신문에서 부장 일까지 오랫동안 보았던 그는 복싱 해설가보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훨씬 더 돋보인다. 당연히 L은 그를 형님 중의 형님으로 모신다. 좀 전에도 통화를 했다. 약간의 난청이 왔다니 마음이 아프다.
그에 버금가는 원로 소설가 아니 형님이 또 있다. L이 여덟 살 아래라, 함부로 형님이라 부르기 좀은 망설여지는데, 그분이 양해해서 몇 해 그러다 보니 이제 서먹서먹함은 많이 줄었다. 이왕이면 설명까지 덧붙이자. 도시와 학교 이름은 다르지만 둘은 사범학교를 나왔다. L이 교감으로 승진했을 무렵 그분은 교장을 거쳐 교육청에서 학무국장으로 근무했으니, 신분으로 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당기엔 둘 사이에 형님과 동생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동성동본이라면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둘은 수시로 전화한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듯이 소설의 소재에서도 같은 냄새가 풍길 때가 더러 있다.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그분과 L은 공비들의 출몰을 어릴 때 수도 없이 겪었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래 고향이 그리우면 무조건 그분께 스마트폰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의 ‘형님(아우)론’은 끝이 없다. 지금은 없어진 모부대(母部隊)-앞서의 불무리 사단이다- 앞에서(출발점이다), 택시를 타면 기사 몇몇은 그를 알아보고, 형님 혹은 이(李) 하사로 불렀다. 55년 전에 그가 복무할 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으니, 그런 희한한 관계도 성립된다. 거꾸로 양주역에서 부대까지 택시를 이용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 그 옛날 하도 부대 밥맛이 형편없어 농가 일을 도와주고 점심과 중참을 얻어먹기도 했는데, 그 시절의 주민 몇이 살아 있어 그들을 그는 형님으로 여기고 허리를 굽힌다.
군과 관련된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형님이 있으니, 둘 다 예비역 중령이다.
L은 월남전 영웅이라 할 수 있는 H 형님에게 참으로 많은 지혜를 얻는다.
그분을 모시고 참 여러 군데를 다녔다. 102세에 소천한, 한국 최장수 장경석 장군을 취재해서 4회 연재한 것도 H 형님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은혜를 입은 것은 그분이 낯설어하는 L을 데리고 현충원 장군 묘역을 찾아 55년 전에 헤어진 사단장님의 묘역을 참배한 거다. 내려오다 봉안당에서 영면에 든 후임 사단장님 유택 앞에서 둘은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이윽고 그는 두 분 사단장에게 감사패를 증정했으니, 이것 또한 창군 이래 처음인 사례다. 두 분을 수시로 뵙는 것은 그가 ‘현충원 전속 가수로서’ 임들과 더불어 떼창을 쏘아 올리는 하나의 명분이랄 수 있겠다. 참 H 중령은 6 · 25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용사요, 월남전에서 크나큰 공을 세운 영웅이다.
L 중령도 형님이다.
그는 L과 같은 모부대에서 포병 소위로 임관되었다가 일선의 여러 부대에서 지휘관 및 참모로 근무했다. 마침내 1사단 포병 부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전역했는데 키도 훨씬 크고 덩치도 남을 압도할 만한 신체 조건이라 L과 같은 조무래기 하사 출신은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워낙 겸손한 성격이라 그런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부대 출신이라는 특별한 관계 덕분이라고 둘은 강변(?)하기도 한다.
처음엔 한 살 그가 많다는 미확인 소문이었지만, 워낙 계급의 차이가 커서 이래저래 예우하느라고 고생께나 했다. 한 살 차이 형님? 그러던 어느 날 L은 은근슬쩍 자기 속내를 내비치고 말았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손을 내저었지만, L은 막무가내로 초지일관 ‘형님’ 예우를 했다. 그 정도의 인물이 되어서 그랬겠지만, 그와도 정말 형제처럼 지냈다. 특히 포병 연합회 정기 총회 같은 데에 따라가서 취재한 게 기억에 남는다. 어느 전 국방부 장관을 만난 것도 그 공간에서였다. 한참이 지난 뒤 H 형님으로부터 그가 L보다 실제 세 살 위라는 전언을 듣고 한결 마음이 편했다. 한 살과 세 살은 형님의 무게를 달리하지 않는가.
부산에서 정말 큰 사건이 있었음을 들먹인다. L이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느 경찰청장으로 말미암아,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가방 없는 날’ 운영하느라 전교생이 빈손으로 출석하는, 잔치 같은 날이 있었다. 경찰청장이 경찰청 악대를 보내 연주함으로써 어린이들이 하루를 즐겁게 보내게 해 주기로 한 것! 그러나 당연한 사유야 있겠지만 불발로 끝나고 말았으니 낭패 아닌가. L은 특유의 순발력으로 군수사령부 군악대에 하소연, 그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그게 경찰을 불신하는 요인이 되었고, 수년이 지나 남대문 경찰서 경위 덕분에 군과 경찰을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됨으로써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 그걸 소설로 써서 한국 최고의 문학잡지에 발표하였으니, 파장이 만만찮았다. 피해는 결국 경찰청장에게 돌아갔다.
근데 당시의 경찰청장과 L 형님은 간부후보생 임관 동기라는 게 아닌가? 형님은 계속하여 군에 남았고, 경찰청장은 소령 때 경정으로 경찰에 특채, 치안정감까지 승진한 경우라니 한마디로 기가 막힐 수밖에.
당연히 셋이서 만나야 한다. 내년 상반기쯤에…. 한데 호칭이 정말 문제다. 청장의 나이를 인터넷에서 뒤져보니, L 형님보다 몇 살 아래라는 게 아닌가? L이 되레 ‘형님’이니, 상호의 예우에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다. 물론 공적으로 청장이니 부사령관이니 교장이니 하면서 넘어갈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신경은 쓰인다. 만약에 경찰청장이 호방하게(?) 불쑥 L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어쨌거나 뒤죽박죽 형님 타령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는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덮친다? 이 명제 앞에 숙연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L은 너무나 뜻밖의 큰 불행을 겪게 되었으니 몸서리가 쳐진다. 요셉 형님의 부음을 들었던 거다. 어찌 하늘이 무심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현충원 채명신 장군의 묘역 앞에서 ‘전선야곡’을 녹화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상한 예감이 드는 게 아닌가? 그래 L은 도중에 차에서 내려 정신의학과 병원에 들렀다. 아닌 게 아니라 원장의 눈이 퉁퉁 부어 있고, 침통한 표정이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아저씨가 실족하여 돌아가셨습니다.”
L은 다그쳐 물었다, 자세하게 말해 보라고. 원장의 대답이 기가 막힌다. 비교적 큰 건물이라 세가 나가지 않은 사무실 앞은 어두컴컴하다. 그런데 낮에 정전까지 되는 바람에 건물에 볼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걸어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요셉 형님은 그 상황을 살피러 6층에까지 올라갔다가, 거기 널브러져 있는 음식 찌꺼길 밟아 미끄러지고 끝내 1층으로 추락했다는 것.
요셉 형님의 선종은 종천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다. 자연히 우울감이 전신을 덮친다. 설마하니 공황장애까지 다시 앓겠느냐마는…. L은 기억력, 원장이 놀라던 그 기억력을 더 증진시키기 위해 ‘삼일 독립선언문’을 다시 외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요셉의 생년월일이 40년 6월 3일이라는 정도도 L은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