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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에 탄 후보자가 시내 곳곳을 누비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목청을 높인다. 그동안 길가에 있는 선거운동원들이 능숙하게 구호를 외치며 허리 굽혀 인사한 뒤 행인들 손에 후보 명함을 쥐여준다. 후보들은 주민이 모일만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악수하며, “꼭 좀 뽑아주십시오” 한 마디를 건넨다.
시끌벅적한 다른 유세 현장과 비교해볼 때 서울 중곡 1·2·3·4동에서 노동당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김주현(38, 뇌병변·언어장애 2급) 후보의 유세는 차분했다. 지난달 31일 늦은 2시께 만난 김 후보는 군자역 1, 2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지하철역을 드나드는 주민들 손에 장애인운동 활동가로서 활동해온 약력 등이 간소하게 적힌 명함을 쥐여주고 있었다.
김 후보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등 기성 정당보다 인지도에서 한참 떨어지는 노동당 후보라서 자신을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어장애가 있어 말로는 지지를 호소하지 못한다. 또한 돈이 없어 유급 선거운동원을 구하지도 못했기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선거 유세를 진행하고 있다. 그마저도 주중에 동료들이 일하러 가면 김 후보를 포함해 겨우 두세 명으로 선거운동에 나선다.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지만 김 후보는 최선을 다해 행인들에게 자신을 알렸다. 명함을 내미는 손놀림도 제법 능숙해 보였다
#거리에서 투쟁하던 활동가, 정치인으로 나선 이유
김 후보는 진보정당 당원이자 올해로 18년 차 장애인운동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어려움을 감수하고 이번 선거에 출마하게 된 계기도 진보정당과 장애인운동 활동과 관계가 깊다.
김 후보는 지난 1996년 말 에바다농아원 인권유린 사건을 계기로, 대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장애인시설 비리척결과 에바다 문제해결을 위한 전국대학생연대회의’에 참여하며 장애인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김 후보가 활동해온 18년 동안 가열찬 현장 투쟁 등으로 장애인에게 가혹했던 사회는 조금이나마 변화했다.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저상버스, 활동지원서비스,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거리에서 싸워온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계속 죽어가는 상황에서 보듯 우리 사회는 변화시켜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에 많은 이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각기 다른 다른 방식으로 악전고투하고 있다. 김 후보는 그 수많은 방식 중에서도 제도 정치를 통한 변화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돌이켜보면 많은 투쟁에 많은 동지와 함께했고, 적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시스템의 모순은 변화되지 않았고, 보수우익의 집권이 계속되고 오히려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다 죽어가고 있지요. 그래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바깥에서의 투쟁과 동시에 시스템 안에서의 투쟁도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주민이 만드는 정책이 실현되는 공동체로 세상을 바꾸자"
군자역에서 진행하던 ‘조용한’ 선거유세를 마치고 늦은 3시 30분께 역 위로 올라오자 역 앞에서 신발을 팔던 노점상 주민이 김 후보를 보고 “김주현! 김주현!”을 크게 외쳤다. 그 주민은 “중곡동에서 10여 년째 신발 장사를 하고 있는데 살기가 쉽지 않다”라며 “이런 처지에 김주현 후보가 내세우는 ‘돈보다 사람’, ‘다름이 아름다운 서울’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주변에 홍보 많이 하겠다.”라고 전했다.
건국대학교와 어린이대공원 주변으로 높은 빌딩과 문화시설이 즐비한 옆 동네 화양동과 달리 김 후보의 선거구인 중곡 1·2·3·4동에는 빌딩도, 아파트도, 오락·문화시설도 없다. 김 후보가 신발을 팔던 노점상과 인사를 나누고 대로변 건물을 지나 골목으로 향한다. 골목에 들어서자 낡고 오래된 다세대주택들과 중곡제일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답지 않은 소박한 풍경이다.
김 후보가 내세운 공약도 중곡동에 사는 소박한 사람들에게로 향해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고자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 이동 약자 편의시설 예산 확대와 활동보조인,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노동 처우 개선 등이 김 후보의 공약이다. 또한 복지 사각지대 해소,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 처우 개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난방비 지원,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공동육아 지원 등도 공약에 담았다.
마지막 공약으로 김 후보는 ‘함께 살아갈 권리가 보장되는 서울’을 제시했다. 주민 자치를 이룰 다양한 방안을 통해 중곡동 주민들이 단순히 자신을 뽑아주는 존재를 넘어 지역사회를 함께 바꿔나가는 정치적 동반자이길 바라는 것이다.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정책, 그리고 그 정책이 실현되는 공동체, 이 세 가지가 변해야 지방자치가 올바로 서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상이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힘든 중곡동, “여기서 할 일 많다”
장애인 당사자인 김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장애인을 위한 공약을 도드라지게 제시하진 않았다. 김 후보는 “진정한 연대를 위해서는 내가 속한 부문의 이슈에만 민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라며 “오히려 모든 이슈에서 현황을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약에서 장애인이 특별히 드러나지 않은 것도 그런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중곡동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외면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일터인 광진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광진센터) 주변에는 많은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보조인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김 후보를 비롯한 장애인들이 중곡동에서 생활하기는 쉽지 않은 듯했다. 김 후보는 중곡동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바를 이야기했다.
“오래된 동네라서 장애인이 건물이나 도로를 이용하도록 개선하기가 쉽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저희 센터에서 회식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갈 수 있는 식당이 거의 없다 보니 매번 가던 곳만 가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중곡동에서 할 일이 많은 것이겠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중곡제일시장을 돌며 선거 유세를 마친 김 후보는 늦은 4시 30분께 광진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로변에 있는 다른 후보 선거사무소를 지나갈 때, 김 후보가 잠깐 멈춰 서며 계단 위에 있는 선거사무소와 관련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원래 여기에 선거사무소를 차리고 싶었는데, 계단이 많아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저와 전동휠체어를 타는 제 동료들이 선거운동을 하려면 접근권이 중요하죠.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은 아예 선거용 단기임대 자체를 꺼리고, 1층 공간은 이렇게 턱이나 계단이 많아 경사로를 놓기도 어려운 곳이 많았습니다. 겨우 조건에 맞는 공간을 찾아도 한 달 임대료로 300만 원을 요구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결국 선거운동을 해야 할 시기에 장애인 접근이 되는 사무소를 찾느라 한 달 이상을 허비했습니다. 이번에 느낀 접근권 문제는 선거에서뿐 아니라 앞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해결해나갈 과제가 될 것 같아요.”
#강자의 전유물 아닌, 공기 같은 정치를 고대한다
김 후보는 한 시간여를 걸어 늦은 5시 30분이 돼서야 광진센터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더니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언어장애가 있는 군소정당 후보인 데다가 재정도 열악해 유급 선거운동원을 고용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었을 그간의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그런 김 후보에게 큰 힘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다. 안부 문자를 보내주는 주민, 현장에서 응원해주는 주민, 선거 유세에 함께했던 주민과 동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김 후보는 서울시의회로 입성해 그에게 힘을 준 주민들과 함께하는 정치를 실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강점이 많은 잘난 사람들만 의회에 있으니 정치가 강자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정치는 생활이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공기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의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지요. 그래야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