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1976년 정농회를 시작으로 유기농산물생산자 중심으로 생태공동체 운동이 상당히 증가하였고, 1980년대 말부터는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유기농산물 관련 생태공동체 운동은 ① 생산․유통․소비를 포함한 회원관리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의 단체에 속해 있거나, ② 생산자가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유통과 소비를 중심으로 유기농산물품을 매개로한 단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또한 단체 이외에도 개별생산자가 독자적인 유통망을 구축하여 시장체계 외부에서 유통시키는 형태도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백화점이나 일반 상설시장에서의 유통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유기농산물 관련 생태공동체 운동은 전남 장성의 한마음공동체, 강원 원주시 호저생협, 전남 해남의 자연농업 단체들, 전북 부안의 한울공동체, 그리고 전국 단위로는 정농회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농민과 소비자가 모두 회원이고 작목반과 같은 농민들의 별도조직과 소비자의 별도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호남지역의 광록회, 성남의 주민생협, 화성 두레마을의 두레유통, 전국 규모의 한살림공동체 등은 유통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유기농산물 관련 생태공동체 운동은 농민, 종교단체, 시민운동 단체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농민과 소비자의 중간 매개 역할에 충실한 종교단체들로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의 여러 단체들이 있으며, 시민운동단체로는 정농생협, 광주시민회, YMCA, 각종 생활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유기농산물 관련 생태공동체 운동들은 경제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므로 생태적 자각과 이상을 현실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로 남아 있다. 유기농업 생산을 하는 생산자, 직거래나 생활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유통, 소비단체들은 대체로 유사한 이념을 지니고 있으나, 현실사회에서는 이념과 이상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기도 하다.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전개된 생태공동체 운동은 기능적 공동체로써 먹거리를 통하여 생태위기를 극복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생협을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 운동은 생태공동체 운동측면의 일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1989년 「한살림 선언」을 매개로 생태공동체 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살림이 진행한 생협운동은 기존의 가치관, 죽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과 문명 창조를 주요 의제로 삼고 생활양식 및 사회의 전반적 문화적 전환을 모색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후 다양해진 생활공동체 운동은 생태공동체 운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주형태를 띤 생태공동체 운동 또한 생태위기 극복의 대안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운동은 생활의 전 영역을 바꾸려는 자구 노력을 정주형태를 통하여 이루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나라에는 산안마을, 두레마을 등이 대표적인 생태공동체로 꼽을 수 있다.
이들 공동체의 형성 배경은 사뭇 다르지만, 생태중심적 자연관을 중심으로 의도적(계획적) 실천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표 1> 참조)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공동체 혹은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는 곳들은 대부분 정신적 풍요, 질적인 것을 기반으로 절약과 노동 집약적 자급자족, 순환을 근간으로 한 재활용을 강조하고 있으며,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대안적 기술, 중간 기술, 연성기술 등의 활용과 철저한 유기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정주형태를 띤 생태공동체 운동은 근본생태론, 생명지역주의, 사회생태론, 생태여성론, 토지윤리론 등이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의 삶의 모형으로서 생태위기 극복의 대안사회를 향한 모델 사례로서 의미가 크다.
그 외에도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 ‘공생농 두레’, 경남 합천군 용주면에 ‘생명누리’,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이랑둥지’,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전원살림마을’,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푸른누리’, 풀무원 공동체로 널리 알려진 경기도 양주군의 ‘한삶회’ 등이 있다.
이들 공동체들은 대부분 생태공동체의 성격에서 출발하지는 않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터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정주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완성을 위해서는 기존 일반사회와는 다른 문화적 상황이 필요하게 되는데, 자신과 타자가 교감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게 된다. 공동체들은 이러한 과정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나름의 기재와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발전시킨다. 또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이루고자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노동’과 ‘생태’적 의미가 강조된다.
여기에 이들이 지향하고자하는 생태공동체 운동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노동은 땅과 관련된 문제이며, 땅을 대하는 인간 행위에 따라 그 의미가 생태학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따라서 생태학적 감수성과 필연성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땅의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이며 결과적으로는 생산방식을 전면적으로 전환시킨 유기농업, 자연농업 혹은 순환농법 등을 고집하게 된다고 보여진다.
특히, 유기농업의 부분에 중점을 두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직접 만나서 생명을 부양하고 생명을 느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태적 활동이기 때문이며, 노동과 땀, 그리고 땅과 토지에 대한 생태학적 감성을 불러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3) 한국의 대표적 생태공동체
◇ 야마기시즘 사회 경향 실현지
야마기시회(山岸會, 행복회야마기시회)는 1953년 일본의 교토 야마기시 미조오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활동체이다. 야마기시씨는 청소년 시절부터 일관하여 진리를 탐구․실천했다고 하며,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사이 좋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실현을 구상하고 실천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양계기술과 벼농사 기술로 전후 궁핍했던 일본에서 급격히 많은 농가에(산안마을에서는 스스로를 공동체라기보다는 ‘일체사회’로 표현한다.) 보급되었고,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1956년부터 야마기시 연찬강습회가 열렸고, 그 후 이 특강은 연속적으로 실시되어 현재 1,700회가 넘었고, 한국, 스위스, 브라질 등지에서도 개최되고 있다. 1961년부터 야마기시즘 생활실현지가 만들어져 일본에만 40여개 소가 넘고, 한국과 스위스, 브라질, 타이랜드, 독일호주, 미국 등지에도 그 공동체가 건설되었다.
한국에서 야마기시운동이 본격화 된 것은 1966년 1월 수원 농민회관에서 야마기시즘 특강이 열린 후 부터이다. 그리고 1984년 화성군 구문천리에 야마기시즘사회경향실현지가 건설되었다.
이 공동체는 자연과 인위, 즉 천․지․인의 조화를 도모하여, 풍부한 물자와 건강 그리고 친애의 정으로 가득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게 가져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 곳에서는 공동체 대신 일체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 본래 하나이지만, 그러나 공동체란 용어에는 개체와 개체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곳에는 48명이 살고 있고 이 곳에서 특강을 받은 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회원은 대력 2천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양계부, 채소부, 생산물을 도시에 공급하는 공급부, 세탁과 식사를 맡는 생활부, 아이들의 양육과 학습을 맡는 양육부에 속해 일하고 있다.
구성원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먼저 특별강습연찬회를 받은 뒤 연찬학교 과정을 거쳐 자기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재산과 재능 등 모든 물질적․영적 소유를 실현지에 풀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목표를 함께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공의에 따라 행한다는 원칙 아래 일상적 삶을 살아가려는 자세를 갖출 때 비로소 참여할 수 있다.
야마기시회는 무소유를 근본가치로 하고 있다. 또한 돈이 필요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며, 다른 야마기시회가 물건을 필요로 할 때, 무료로 공급해 준다.
실현지 내에는 무인 점포가 있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그냥 가져간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특별히 마련된 상자에 주문신청서를 넣고, 연찬회를 통해 구입여부가 결정된다. 오전 11시와 오후 7시에 식사를 하며 간식은 없다. 기호품은 식사 후에 먹으며, 술과 담배는 1986년 이후 금지되고 있다.
◇ 두레마을
두레마을은 1971년 당시 신학생이었던 김진흥 전도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송정동에서 활빈교회의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빈민선교활동을 시도하였다. 그 후 판자촌이 헐리면서 갈 곳을 잃은 50여 세대와 함께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하여 남양만 지역 간척지로 집단 이주하여 물질만능주의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두레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79년 1월에 8세대가 입주한 1차 두레마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차 두레 공동체는 준비 소흘과 축산물 가격의 폭락, 성원들 사이의 인화 문제 등으로 실패하였고, 그후 활빈교회는 86년 10월에 2차 두레마을을 만들었다.
현재 두레마을에는 140여 명 정도가 살고 있고, 이 마을의 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3개월의 공동체 생활 훈련과정을 거쳐, 남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공동체 성원의 동의를 얻어 준회원으로 영입하고, 그후 9개월의 적응과정을 거쳐 정회원이 될 수 있다.
두레마을의 재산은 모두 공유한다. 공동체에 가입한 회원들은 재산과 부채를 모두 가지고 들어오며, 다시 나갈 때에는 가지고 들어 온 것을 모두 반환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부분적인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고, 용돈 제도를 두어 필요에 따라 용돈이 지급된다. 또한 공동체는 개인의 생활비와 의료비, 자녀들의 교육비 등 모든 것을 책임진다.
매우 강한 종교공동체인 두레마을에서는 하루 7시간 정도의 노동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오전 8시30분부터 12시까지, 그리고 2시부터 5시30분까지가 노동시간이다. 일요일은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토요일에는 대개의 경우 오후 작업은 하지 않는다. 각 부서별 독립채산제를 고수하며, 각 부서는 사무부, 생산부, 생활부, 재정부로 구성되어 있다.
두레마을에는 두레마을 영농조합법인, 사회복지법인 새생활 치유원, 두레선교회, 두레유통, 두레시대, 두레연구원, 두레 모임 등이 있고 앞으로 연변에 150만평 규모의 두레마을 건설을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다음은 두레마을과 산안회를 비교한 도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