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 병은 나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한 제3군 전염병(전염병예방법 제3
조 제1항 제3호)이다. 주로 체온이 낮은 피부와 눈, 손, 발의 감각신경과 운동신
경을 침범한다. 국내에서는 약 20 명 내외의 신환자가 발생한다. 현재 중앙 등록
되어 있는 사람은 약 18,000명 정도이다.
2. 전염경로
전염경로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대개 호흡기로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치료받지 않은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오래 동안 접촉한 경우에 발병한다. 한센균의 잠복기는 수년에서 수십 년 정도로 길며 환자의 면역 상태에 따라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침입경로는 피부 또는 호흡기를 통하여 체내로 들어온다. 대부분의 접촉자들은 나균에 대한 저항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걸리지 않는다. 전 세계 인구의 95%는 한센
병에 자연 저항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은 한센 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
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균을 배출하는 환자의 경우도 리팜핀(리팜피신
) 600mg(4알)을 1회 만 복용하여도 체내에 있는 나균의 99.99% 가 전염력을 상실
한다.
따라서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다. 성적인 접촉과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가족 내 한센 병 환자가 있는 경우에도 1명 이상이 감염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3. 임상증상
한센 병의 증상은 한센 균에 대한 면역상태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개 ①감각의 저하, ②말초신경의 비후(肥厚)와 통증, ③한센 균의 존재라는 3대 징후가 있다.
감각이 저하된 피부반점, 결절, 신경손상, 눈썹 소실, 손발의 감각소실, 토안, 실
명 등 여러 증상이 나타나며 치료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다양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4. 초기 증상
피부의 색깔이 변한 작은 부위가 나타나며, 지각이 소실되거나(통증이나 온도에
대한 감각이 소실됨) 모발이 탈락할 수 있다. 서서히 커지거나 새로운 반점이 나
타날 수 있다. 대개 팔, 다리 등에 나타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지 말단부의 지각
소실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진단보다는 의사들의 진찰과 검사가 필요
하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손가락 발가락의 감각 소실이 있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손상 받고 감염이 생기게 되면 수지 말단부위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최근에
는 효과적인 약제가 개발되어 치료가 잘 되기 때문에 거의 볼 수 없다.
약제나 체내 저항력이 나균을 살해한 후, 죽은 나균에 대하여 우리 몸이 통증, 발
열, 결절, 발진, 근육통 등의 급성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죽은 나균이 체내에서 제거되는데 몇 년의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수년간 반복적으로 나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약 50%에서는 치료 도중에 발생하기도 한다.
5. 치료
한센 병은 천형의 병이 아니라 약물로 치료가 되는 전염병에 불과하다.
병에 걸렸더라도 2주에서 2개월 정도 약을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
으며, 병 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5년에서 20년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전히 낫는다.
나 반응은 주로 눈, 손, 발에 나타나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신경손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토안, 근육위축, 수 하수(drop hand), 족 하수(drop foot) 과 수지의 변형이 나타나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아야 한다.
한센 병의 치료는 한센 병 자체에 대한 치료와 한센 병에 의한 후유증에 대한 치
료로 나눌 수 있는데, 대부분의 소록도와 애양원 입원자들은 한센 병의 후유증에 대한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한센 병에 의해 장
애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양원 및 교회의 시작은 미국 남 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1904년 2월 목포 선교부에서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
로 하고 벨 목사와 오웬 목사를 파송하여 설치케 하였다.1904년12월15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사택 건축이 완료 되었고 1904년 12월21일에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
었다.1904년 12월25일 오전11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 선교가 시작되
었다.
12월25일 첫 예배를 드린 후로 목사이며 의사인 오웬(Clement C.Owen)은 전라남
도 동부 지역 즉 능주, 남평, 화순, 장흥, 보성, 강진, 순천, 여수, 장흥 등지를 책임 맡아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선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중 1909년 4월3일 급성 폐렴으로 순교한 오웬 의사
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 중이던 포사이트(Wiley H.Forsythe)의사가 목포
에서 광주로 급히 오다가 광주에 도착하기 전 13마일쯤 떨어진 남평과 광주의 금
당산 사이에 있는 길가에 누워 있는 한센 병 여자 환자를 보았다. 그는 자신에 대
한 위험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서 하신대로 행하려는 마음에서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왔다.
이 한센 병 여인은 1908년 3월에 부임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윌슨(Robert M. Wilson)이 사역하고 있던 광주 선교 진료소 입원실에서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동료 입원환자들의 반발로 쫓겨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사택 건축을 위하여 벽돌
을 굽던 가마터를 치우고 그곳에 거처하게 하였다. 오웬 의사가 사용하던 침대와 침구를 사용하고, 선교사들과 양림리 교회 교우들이 수시로 방문하여 치료를 돕고
복음을 전 했다. 이 여자 한센병자는 수주일 후에 죽었다.
그때 이 여인을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던 광경을 지켜보았던 윌슨이 1909년 여
름 인근 봉선리에 작은집을 짓고 한센병자 20여명을 치료하기 시작 했다. 그 후 최흥종 목사가 제공한 1000평의 땅에 45인 수용시설로 출발하여 환자가 늘어 갔으
며 윌슨과 제중원 사무원 최흥종과 이만준 등이 3년간 전도를 해서 1912년 영국 에딘버러에 있는 영국 한센병자 협의회로부터 2천달러의 도움을 받아 한센병자 수
용소, 진료소, 교회등을 마련하게 되었다.
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자 수는 나날이 늘어나 1924년에는 560여명에 달하
게 되었다.1924년부터 광주 한센 병 수용소를 순천으로 옮기려는 준비가 진행 되
었다. 이때 광주에서 "한센병 구제회"를 설립 모금을 했으나 그 모금액이 미비했
다.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광주에서 옮겨올 준비
를 했다.서서히 옮겨오기를 시작해서 1928년에 한센병자 600여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1939년 7월 14일 부임해서 교회를 목회했으며 1945년 9월 10일부
터 10월15일까지 병원 원장을 겸임했다.
3. 사회복지법인 애양원
애양원 복지 법인 안에 애양병원, 평안 양로원, 장애자 재활 기술보도소가 있다
.
본 법인은 사회복지 사업법 제2조에 의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동법 제22조에 의한 한센병 환자 및 일반 장애자들에게 의료적, 직업적, 정신적으로 재활을 도모
하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영적 구원에 이르기까지 전인치유
의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복지 사회 건설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1) 본 법인은 상기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의 각호 사업을 수행한
다.
- 한센병 환자 일반장애자 요양보호 및 진료 사업
- 한센병 환자 발견 및 계몽사업
- 한센병 환자 및 일반 장애자 직업 재활 사업
- 기타 본 법인 목적 달성을 위한 필요 사업
(2) 의료선교 활동
문서전도로는 수시로 전도지 배부와 설문지 발송 및 퇴원 환자에게 지속적으로 거주지 교역자를 통해 책자 우송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수술환자를 위한 기도
와 보호자와의 핪심기도와 특수한 환자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다.
입원환자 중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개별전도로는 제2병동 및 여인숙 환자 방문 수시 전도,입원실 방문 전도(매주 수요일 밤,주일 밤). 물리치료실 전도(매일 찜
질하는 시간 이용). 대합실 전도(매주 월,수) 등이 있다.
4. 산돌과 같은 교회
베드로 전서 2:4~5의 말씀처럼 산돌(손양원목사의 호가 산 돌이다)과 같이 살았
던 손양원목사의 애양원식구들을 위해 쏟으신 사랑과 주를 위해 흘리신 피가 살아
서 역사하고 있는 곳이다.
애양원 교회는 이러한 뜻을 받들어 주님 재림의 날까지
1) 순교자의 신앙을 계승하고
2) 산돌과 같은 신앙 인재를 양성하며
3) 소외된 지역을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는 일에 힘쓰고 있는 교회다.
손양원목사가 시무할 당시 천 여명이 넘었던 성도들이 지금은 삼백여명 정도 있
다. 교인들의 평균 연령이 70세 이고 보면 노인들만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 하나
님의 일은 나이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한다는 신앙으로 평균 연령이 70세
인 고령 교회이지만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애양원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중단 없이 잘 감당해 갈 것이다.
1916년에 세례 교인 56명이 투표를 해서 이종수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시
작 되었다.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자 수는 나날이 늘어나 1924년에는 56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때 즉 1924년부터 광주 한센병자 촌을 순천으로 옮겨가려
는 준비를 해서 1928 년에 완전히 현재의 애양원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1928년 이주 당시 본원의 이름이 "비더울프 나병원(Biederwolf Leper Colony)"
이라 고 불리 웠으며, 교회는 신풍 교회라 불리웠다. 비더울프라는 사업가가 당시
에 애양원내의 시설을 지어주겠다고 자신의 이름으로 병원 이름을 짓도록 했다. 그러나 그 사업가는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개인의 이름
으로 본원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하여 1935년 당시 원장인 윌
슨박사가 본원의 이름 을 환우들에게 현상 공모하여 "애양원"이라는 이름이 채택
되었다. 그 이후로 본원의 이름을 애양원이라고 불렀고 교회도 애양원 교회로 불
렀다.
1909년부터 1925년 애양원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교회가 광주에 있을 때 교회 이
름을 봉선리 교회당이라고 불렀다.1928년 애양원으로 완전히 이주 한 후 지명 이
름을 따라 신풍 교회당이라고 부르다가 석은혜씨가 후원하여 교회당을 새롭게 짓
고 석은혜 예배당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그후 본원 이름이 애양원으로 불리우게 되자 자연히 교회도 애양원 교회라고 불리웠다. 그러다가 1982년2월28일 본원의 어린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교회이름을 성산교회로 바꾸었다. 현재는 성산
교회라고 불리우고 있다.
1) 초석 다지기(1928년~1938년)
애양원으로 이주해온 본 원의 입주자들의 생활은 문란하기 그지 없었다. 한 마
디로 힘 있는자는 사람 행세를 하고 힘 없는 자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러
다 보니 성적으로도 문란했다. 힘이 통하는 세계가 되다 보니 같은 그룹을 만들어
힘을 규합하고 같은 그룹의 사람들은 문신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이렇게 극
도로 문란한 애양원에 초대 담임목사로 김응규 목사가 1931년에 부임을 했다. 그
는 이 문란한 생활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우선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했다. 세례를 받을 때에는 문신을 지워야만 세례를 주었고 모든 그룹들은 전부 해산을 시켰다. 이성간의 문란한 생활도 바로 잡았다. 신앙의 초석을 성경공부를 통해서 다져가면
서 생활의 질서를 바로 잡아갔다. 그래서 그 문란했던 애양원 사회의 질서가 바로
잡히게 되고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애양원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
다.
2) 신앙 지키기(1939년~1950년)
김응규 목사의 노력으로 신앙의 기초가 다져져 가고 생활의 질서가 확립되어 가
면서 평화롭게 성장을 해가던 애양원에도 믿음을 시험하는 시련이 왔다. 그것은 일제의 신사참배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김응규 목사가 노회에 참석했다가 일
경들의 강제에 의해서 신사 앞에 머리를 숙이는 일이 발생 하여 김응규 목사가 사
임을 하고 애양원은 일대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때에 손양원목사가 부임을 하게 되었다.그는 신사 참배를 반대하
다 1940년에 투옥되어 해방되기까지 옥중 생활을 하며 신앙을 사수했다. 해방 후 여순 사건과 6.25의 위기들을 겪을 때 마다 손목사의 흔들림 없는 신앙이 곧 애양
원의 신앙을 지켜 주게 되었다. 손양원목사로 인해서 위기의 때에 애양원의 신앙
은 더욱 확고해졌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3) 신앙 성장기(1950~1990)
손양원 목사의 순교로 애양원이 위기를 맞이했으나 당시 전도사로 있던 서현식 목사의 헌신적인 목회로 교회는 안정을 되찾고 신앙의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당
시 신앙의 성장은 교회 개척으로 이어져 전국적으로 3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은 윤성화 목사와 박병돈 목사로 이어져 개척교회라
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특별히 박병돈 목사는 부흥집회 인도를 통해서 애양원을 전국적으로 알렸을 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에까지 알렸다. 박 목사의 집회를 통해서 애양원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지게 되었다. 이때에 신앙 성장은 교회 개척으로 이어져 참다운 신앙 성장은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열매 맺어져야 함을 보여 주었고, 주
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났다.
4) 신앙 계승기(1991~현재)
신앙의 선배들이 맺은 열매와 순교자들의 순교 신앙을 계승해야 할 필요성을 느
끼게 되어 본격적으로 순교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순교 신앙 계
승의 일환으로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을 건립 1993년 4월 27일 준공하여 1년이
면 4만여 명에게 순교 신앙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 계승의 운동은 노회로 이어져 1998년에는 여수 노회안에 손양원 목사 기념 위원회를 구성케 했으며 2000
년에는 순교 50주년을 맞아 초교파적으로 순교 기념대회를 개최하여 순교 신앙을 초 교파적 범 교회에 계승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5) 교회의 특색
교인 평균 연령이 76세의 고령화된 한센 병 환우 들이 모여 있는 교회이나 지금
까지 36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열심히 미자립 교회를 돕고 있다. 믿음으로 일한다
는 신앙으로 모든 성도들이 죽는 순간까지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자는 의지를 가
지고 전도와 봉사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주일예배, 찬양예배, 그리고 수요예배, 새벽예배에 출석하는 교인이 크게 변동
이 없다. 특별히 30분전에 대부분의 교인들이 모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
한다.
각 가정으로 예배 실황이 방송으로 중개 되도록 되어 있어서 교회에 못 나온 분
들도 집에서 스피커를 통해서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며 성경을 공
부하는 프로그램이 없지만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을 하므로 예배 자체가 좋은
신앙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장년 주일학교가 잘되고 있다. 260여명이 출석하여 주일 오전 9시에 본당에 모
여서 50분정도 공과 공부를 한다. 공부하고 헌금하고 문답을 한다. 그 날 그 날 주일학교 보고를 오후 찬양 예배 전에 한다. 장년 주일 학교를 통해서 신앙이 바
로 세워져 가고 있다.
옛날 신앙 전통을 대부분 이어가고 있다. 주일날 교회 기관의 식사 모임은 일체
없다. 주일날밖에 나가서 식사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주일날 일체의 회식은 없
다. 더 나아가 주일에 손님이 와도 밖에 나가서 대접을 하지 않는다.
모든 집회가 낮에 있다. 주일 예배는 오전 10시에, 찬양예배는 오후2시30분에, 수요 예배는 오후1시에 드린다.
정오기도, 새벽기도, 금요기도 등 기도 생활에 힘쓰고 있으며, 사랑의 실천, 손
양원 목사 순교기념선교회 를 통한 선교 등에 주력하고 있다. 특별히 성경 암송반
을 통해서 순례자들에게 순교신앙을 일깨우고 있다
교회의 기관은 당회와 제직회가 있고 자치 기관으로는 여전도회, 청년회가 있으
며, 교육기관으로는 교회학교와 장년주일학교가 있다. 특별 기관으로는 성경암송
반이 있다. 그리고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선교회가 있어서 선교지 후원과 인재 양
성 등에 주력하고 있다.
6) 역대 담임목사
제 1대 김응규 목사 : 1929.11.1~1938년까지 시무 행정에 능하신 목사님으로 초
기 애양원의 문란한 생활을 바로 잡아 질서를 확립하고 신앙중심의 동산으로의 초
석을 만드신 목사님이시다. 제2대 손양원 목사 :1939.7.14~1950.9.28
예수님의 사랑으로 환우들을 사랑하되 예수님 다음으로는 애양원의 환우들을 사랑
했고,1948년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내 양아들로 삼으신 사랑의 원자탄을 터트린 삶을 사셨다
제3대 서현식 목사 : 1950.5~1969.12.31
손목사 때 전도사로 부임 손 목사 순교 후 애양원 교회를 담임하여 손목사의 순교
정신을 가장 크게 계승하신 목사이시다. 시무 기간 중 2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셨
다
제4대 윤성화 목사 :1970.1.31~1983.10.31
손목사의 신앙을 계승키 교회 개척에 힘썼으며 교회를 영적으로 더욱 깊이 있게 세우신 목사님이시다.
제5대 박병돈 목사 : 1984.3.14~ 1990.9.17
손목사의 신앙 계승을 위한 전도와 교회 개척에 심열을 쏟으셨으며 손목사의 유적
지 보존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신 분이시다. 현재는 조성교회에 시무 중이다.
제6대 이광일 목사 : 1984.8.17 ~ 현재
전도사로 부임해서 부목으로 시무하던 중 담임목사가 되었다. 애양원의 역사를 정
리하고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세워 그 신앙을 후대에 계승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
다
7) 성경 암송반
애양원 교회는 한센 병으로 인하여 시각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다.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무료하게 놀던 중 몇 사람이 모여서 성경을 외워보자고 한 것이 성경 암송반이 탄생케 되었다. 이때가 1946년경이었다. 1954년부터 몇 사람들이 성경을 본격적으로 외우기 시작했다. 로마서를 외우고 옥중 서신을 외우고 신약을
다 외우게 되었다. 이때는 한 주간에 15절에서 20절을 외웠다. 이 분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을 외우고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서로 교제하고 기도하는 모임이다.
지금은 재단에서 1986년에 24평의 성경 암송관을 신축해 주어서 25명의 식구들
이 모여 성경을 외우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 모임을 갖고 있으며, 애양원을 찾아오
는 분들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다. 금은 연세들이 많아서 한 주간에 5절에서 6절씩을 외운다.
이들은 고백한다.
한센병에 걸려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눈이 안 보이므로 성경을 외워 신약을 다 외웠다고 말한다. 말씀을 외우는 것과 기도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
게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영광을 받았다고 한다. 암송반 식구들
은 신약성경을 다 외우며, 하모니카 합주단이 있어서 찾아오는 분들에게만 아니라
전국 교회의 초청예배(150여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 있다. 특별히 양재평 장로님의 간증은 많은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문의전화 / 양재평장로 061-682-9581
성경암송반 061-682-9583
5. 애양원의 현재(양재평 장로님과 도성교회 목사님과의 전화 인터뷰)
나환자 206명 중 시설에 100명이 기거하고 있으며, 그 외에 400명이 15만평에 정착마을(도성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도성래 선교사가 세운 도성마을은 나병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더 많지만 자치
법으로 교회를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되며, 교회와 새벽 기도회 등 교회 집회에 참
석하지 않으면 소외감이 있기 때문에 교회를 출석할 만큼 기독교 문화권으로 타 종교는 발 불일수비슷한 영적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질문 1) 애양원 식구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가?
손양원 목사과 여러 목사님들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희생이 너무 크고, 버림받
은 자들을,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접 해 주고 치료해 주고 사랑
한 사랑의 감격과 갈 데가 없는 곳도 아닌데 우리들 보고 예수님 믿고 영생 받으
라는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감사해서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고, 복음이 들어
오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희생과 사랑과 섬김이 고개를 숙여지게 한다.
“생활면에서 쉽게 문을 열지 않는 집단이었지만 그러나 우리를 보통의 사람보다 더 귀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감동을 안 받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질문 2.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 감사하고 행복한가?
신앙을 알게 된 후 기독교인으로서 행함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에수님 믿고 좋으니까 기쁘고 감사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고향, 버린 부모, 형제가 생각이 나서 전도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교
회가 시작되면서 부터 돈을 주고 건강한 자(전도인)를 사서 그들을 통하여 제주도
까지 전도했다.
또 외부에 성도가 생기면 교회를 세우기 시작해서 1909년에서 현재까지 36교회를 세우면서 전도가 자연 발생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환자 100%가 교회를 출석하고, 100% 세레 교인이지만 70-80%는 예수님을 영접했고
약 20%는 영접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뜻이 믿음에서 나고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방장들이 5-6명 정도 팀으
로 다니면서 전도하고 있다. 그리고 입원 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배반하면 안 된다고 권면하고 고마운 뜻을 전하면서 전도한다고 한다.
철조망으로 격리되고 세상 적으로 소망이 없는 불치병이 걸렸지만 하나님 나라
의 소망을 갖고 산다고 말하며 책임과 사명감을 갖고 전도하고 있다고 한다..
질문 3. 성령의 체험이 있는가?
교회를 나가게 되고 2-3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
다. 성경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감각적이거나 신비주의의 성령체험은 없지
만 말씀중심의 삶을 살면서 순결하고 내안에 인격이 형성되며 온유, 겸손, 순결해
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획일적이 아니며, 예를 들어(행 11:18) 베드로의 고넬료 “저희
가 이만한 ... 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신다.
-성령충만 결과로는 요리문답 87문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이냐? 에서 구원 얻는 은혜와 죄인임을 원통히 여기는 것이라고 보며 성령 충만일 때 우리 안에 이
러한 열매가 생기는 것이다. (시119:67-71) 고난당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
고 계시며 (이 45-47) 나는 빛과 어두움을, 환란을 만드셨다고 하셨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환란은 좋은 것이다.
Ⅲ. 소록도
1. 국립소록도병원은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항으로 부터 해상 600여m 떨어진 소록도(3,699,575㎡)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6년에 설립되었다.
2. 역사적 배경
1882년 5월 22일 한미 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에도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니 1884
년 10월20일 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의사 부부가
개신교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들어와 왕실 병원 제중원(1886년)을 세우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Horace G. Unerwood)선교사와 1885년 6월 아펜젤러
(H.G.Appenzeller) 의료 선교사 부부가 한국에 와서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
었다. 이 때 한국에서 한센 병이 만연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1909년 4월 미국 남 장로교 의료선교사 포 사이드
(H. W. Forsthe)와 윌슨(R. M. Wilson)의사가 광주지역에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
기 시작하였고, 1909년 여름 윌슨(R. M. Wilson)선교사에 의해 최초 한센병 환자 10여명을 전남광주 근처 봉선리에 수용하게 되었다.1925년 현재 여천군 OO리로 옮
겨 교회, 병원, 숙소등을 신축하고 치료하며 발전한 것이 여수 애양원의 시작이다
. 1910년 3월 30일에 부산 감만동에서 선교사 어빈(C. H. Irvin)과 맥긴져
(J.Mackenzie)목사가 특수병원을 개설하니 이것이 부산 상애원의 시작이다.1913년
3월1일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프렛처(A. G.Fletcher)의사가 병원을 개설하여 치
료하기 시작한 것이 대구 애락원의 시작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복음과 함께 육신
의 치료가 시작되고 한국의 한센병 치료는 복음과 함께 시작되었으니 한국의 복음
전파는 한센병 치료와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 한센병에 대한 불안 시대에 선교사
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이 선교의 효력을 극대화 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3. 병원 역사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방조약이후 일본의 탄압과 한국인의 원성이 고조될 무
렵 여수, 부산, 대구등지에서 한센병 치료에 국민적 반응이 좋았으나 다 수용할 수 없는 환우(患友)들 처우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었을 때 일본 총독부에서
착안한 것이 한센 병원 개설이었다.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
이 풍부하며 육지와 가깝고 서달 지역 남쪽에 구릉이 있어 환자 지대와 직원지대
로 나누기 용이하여 격리 수용에 적합한 소록도를 선택하고 1915년 2월 섬 주민들
을 설득하여 소록도를 서북쪽에 19만 7백평과 주민 가옥 10동을 매수하여 동년 7
월 에 착공하였고, 1916년 1월에 47동의 병동과 병원 본관을 준공하고 1916년 5월
17일에 전남 도립 자혜의원으로 개원하여 처음 100명을 현재 소록도 2번지 구북
리 일대에 이주하게 하여 삶을 다시 개척하여 치료받게 되었다. 일본인 아리가와
씨가 제 1대 소록도 병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2대 하나이씨가 3대는 미스자와
씨가 4대는 수호씨가 5대는 니시기씨가 부임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사립 나요양소
가 세 군데 있었으나 그 규모가 작아 수용된 인원이 아주 적었으며 대부분의 한센
환자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일제에게는 '반 사회인'으로 의학적으로 관리대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관리대상으로 보고 일제는 집단 격리하는 과정에 정치적 힘을 동원함으로써 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초기, 조선에는 광주, 부산, 대구 등 세 곳에 각각 외국인 선
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 요양원이 있었으나 규모가 작아 수용인원이 아주 적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 걸식하는 실정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이러한 환자들이 국가 위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일정
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방침을 세우고 전국 각지를 답사하여, '섬'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격리되면서, 기후가 온화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이 많
으며, 육지와 가까워 물자를 나르기가 쉽다는 점을 들어 소록도를 적지로 선정하
였다..
이런 결정에 따라 원주민들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여만 평에 대해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하여 이주시킨 후 1916년 2월 24일 조선
총독부령 제7호로 관제를 공포하여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하였다..
원래 자혜의원이란 일반 병원으로 전국의 19개가 있었는데, 그 중 소록도 자혜의
원은 한센병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병원이었다.
1917년 1월부터 본관을 비롯한 건물 47동 (388평)을 점차적으로 준공하면서 4월부
터는 환자 100명을 정원으로 하여 각 도(道)로부터 후송된 환자들을 수용하기 시
작하였고, 5월 17일 개원기념식을 거행하고 연말까지 99명을 수용하였다.
4. 교회 창립
병원에서 5년간은 일본 원장과 직원들이 원생들에게 일본식 복장과 일본식음식
으로 생활을 지도했고 매일 일본 천조대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소록도 병원 제 2대 원장으로 부임한 하나이 젠기스(花井善吉.1921.6.23-1929.10.26)원장
이 일반 주민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니 하나이 원장은 이스라
엘 백성에게 신앙의 장를 허락한 바사왕 고레스같은 귀한 원장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것이다. 하나이 원장은 외지의 요양소 운영을 시찰하고 소록도에도 기독교
를 허락하여 1922년 10월 8일 (음력8월18일) 일본 성결교단 전도목사인 나나까 신
사부로(田中道三郞)목사가 총독부의 포교 허가를 받아 포교한 것이 소록도 교회의
창립이 되었는데, 최초로 수십명의 신앙을 작성하고 모여 예배 드린 곳이 구북리
1호사였다. 날마다 입원환자는 늘어나고 교인수도 증가 해 갔다. 1923년 11월 경
에는 교인 수가 120명에 달 하였으며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니 1923년 11월18
일 주일에는 일평생 예수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최초로 세례식을 거행하
였는바 남자 40명, 여자 4명이 구북리 서해안 백사장 앞에서 나나까신사부로 목사
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병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나이 원
장은 일본 천조대신 신당을 예배소로 허락하므로 그 해 12월25일 성탄절은 성대하
게 지내게 되니 오전 9시에 성탄축하예배를 시작하여 12시에 폐회하여 소록도 최
초의 성탄절 예배였다. 1925년 4월 2일 교회 역원을 선출하니 전도원으로 박극순(
朴克淳), 최병수(崔炳洙), 이종일(李鐘一), 박우석(朴佑碩)씨였고 집사에 이채권(
李彩權), 박학진(朴學珍)씨를 직원으로 세워 교회가 더욱 안정되어 든든히 서가며
1926년 7월3일 다나까 신사부로목사는 이임하고 후임으로 대대후지(小出朋治) 목
사가 부임하여 1927년 4월7일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고 11월 16일에는 새벽기도회
를 실시하게 되었다. 1928년 북병사(구북리)를 신축하면서 예배당도 신축하여 7월
20일에 입당예배를 거룩하게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북성교회 예배당이었고
,1928년 10월24일 남부 병사(남생리)와 함께 남부 예배당(현 남성교회)이 세워졌
다. 예배당과 함께 오르간(풍금), 종, 시계, 등을 하사함으로 온 교회는 기쁨이 충만했다. 외롭고 고독하며 질병의 고난 속에 쌓인 자들에게 복음이 전차되어가면
서 불행의 소록도는 감사와 찬송과 기도의 동산으로 변해갔다. 소록도 신앙의 자
유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이 원장은 8년4개월간 경천애인정신으로 병원을
환자중심으로 다스리다가 1929년 10월16일 소천하시니 모든 성도들은 아버님 돌
아가신 것처럼 애도했다. 원생들의 뜻을 모아 하나이 원장 공덕비를 세우니 현재 구북리 입구 최초의 자혜의원 동편에 세우고 하나이 원장을 늘 생각하며 추모하면
서 그 언덕을 오갈 때 마다 원장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감사하는 한센 환자들이 많이 생겼다. 일본인 하나이 원장을 위해 추모하며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공덕비
를 세운 것은 아마도 소록도 동산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일이었다.
5. 신사참배와 종교탄압
1932년에 일제당국은 소록도 전역을 매수하여 병원확장공사를 추진해 나갔는데 1933년 9월에는 조선 나협회 상무이사인 수호 마사히대(周防正李.1933.9.1-1942. 6.20) 원장이 부임하여 병원확장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현 신생리 병사와 신생리 교회가 세워졌다. 이 때 대구. 부산등지에서 400여명이 입원하게 되니 원
생은 3천여명으로 늘어나며 1934년에는 동생리 부락과 예배당이 건립되었는데 처
음에는 연합예배당으로 건축했다는 것이다. 1934년 6월7일에는 소록도 성결교회시
대가 12년만에 끝나고 소록도 기독교라 개칭하였는데 조선 총독부의 기독교 탄압
에 따라 소록도에서도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1936년 12월에는 야다분이찌로(
矢田文一郞) 목사를 축출하고 관목으로 승려를 기용하니 본원사(本原寺) 다게시마
(竹島)씨가 부임했고 교회 핍박은 가중되었다. 교회서는 1937년에는 서생리 교회
가 구북리 교회에서 분리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938년1월에 중앙교회가 설
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교회탄압은 더욱 심하여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이를 거부
하는 교회직원과 성도들을 30여일 동안 구금시키고 형언할 수 없는 곤욕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호 마사히대(周防正李) 원장의 동상건립을 구실로 하여 성도들의 가
진 금품을 몰수당했고 식량을 삭감하고 교회 핍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해졌고 필설로 이루 형언 할 수 없었다. 1939년 9월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 시
작된 전쟁이 1941년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의 만행은 극에 달
하여 정신통일을 해야 한다며 매일 신사참배와 수호 원장 동상 참배가 강요되고 강제노동 원생동원령이 내려져 벽돌과 기와굽기(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의 붉은 벽
돌은 그 때 굽은 것)와 가마니 짜기, 바닷가 축대 쌓기, 선창 축조공사, 도로공사
중앙 공원 조성 공사, 솔 굉이 기름짜기, 다른 섬으로 가서 화목 벌채작업이 이
루 형언할 수 없는 노동이 강요되어 병약한 육신은 일에 지치고 감독자들의 몽둥
이와 채찍에 피멍이 들고 허기에 시달린 굶주린 배를 허리끈으로 졸라 매고 온종
일 일하고 황혼이 지면 집으로 돌아와서 밤이면 고통과 눈물로 밤을 지새고 새벽
이면 별을 보고 일터로 끌려가서 죽도록 일을 시키고 조금이라도 서있으면 몽둘이
질이고 고개만 들어도 욕설이었다. 주일날이면 더욱 심한 중노동을 시켜 예배를 방해했고 예배당 안에는 우상을 세우고 가마니 공장을 차려놓고 일일 할당량을 정
해주고 달성 못하면 태형이니 눈을 감고 입을 막고 귀를 막고 살아야 했으며 입만
열겸 불문곡직하고 감금실로 끌려가서 무차별 구타하니 그때 얼마나 많은 영혼
들이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갔다. " 아 한 많은 소록도....." 故 김정균 성도가 남
겨 놓은 고난의 시 한편이 있다. "아무 죄도 없고 불문곡직하고 가두어놓고 ,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
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 따라 내가 참아야 할 줄 아옵니다. 이 속
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
달아 죽으려고 했지만, 내 주님 위로하시는 은혜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께 감사
하나이다. 저희들을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 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
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견디다 못해 죽기 살기로 바다를 헤엄쳐 도망 가다가 물
에 빠져 죽은 자가 얼마며 순찰선에 발각되어 곡괭이(바다에서 쓴 연장)에 맞나 죽은 자가 얼마인가. 그래도 살아남은 자는 재발 방지한다고 공개처형했으며 밤마
다 문 앞에 불려 나와 점호로 확인하고 한 사람의 이탈자가 생기면 집단 구타를 당해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자가 되게 했다. 1942년 6월20일 수호원장 동상 참배하는 보은 감사날이라 하여 전 원생들이 모였고(원장 동상은 지금 40주
년 기념비 자리위치) 수호원장이 훈시하려고 등단할 때 원생중 한 사람 이춘상(李
春相)씨가 달려나가 "3천원생의 원수는 칼을 받으라"하고 흉부를 찌르니 수호원장
은 자기 동상 앞에서 저주의 죽음으로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일본 관리들은 더욱
악한 방법으로 다스리고 감시를 강화하였다. 성도의 신앙심은 땅에 내려 앉았고 눌린 영혼들의 탄식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예배당 문은 철장을 했고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 소리를 들으셨을 것이다.
6. 8. 15 해방과 수난
1945년 8월 15일 소록도 성도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해방의 축복을
주셨으니 우리 민족해방은 소록도의 해방이었다.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할렐루야 영광을 부르며 섬 전체는 기쁨과 환호성 속에 연일 기쁨이 충만했고 우
상의 조각들을 파괴하고 예배당을 청소하고 애매히 구금, 구타하던 감금실과 형무
소의 문을 열어 갇힌 종들이 풀려 났고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
이 돌아오네"... 찬송을 목청 높여 부르며 감격스런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께 영광
을 돌렸다. 이때 소록도의 식량이 떨어져 당장 굶을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마침
군량미 벼 가마니를 싣고 가던 배가 소록도 앞 바다를 지나다 풍량을 못 이겨 좌
초되었다. 원생들이 생명을 걸고 바다에 들어가 곡식을 건져 연명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방은 되었으나 준비 없는 해방이라 병원은
큰 혼란이 발생했으니 일본원장이 물러난 뒤 원장직 주도권싸움이 벌어져 직원끼
리 분쟁이 일어났고 원생들은 해방이 되었으니 자치권을 찾자는 주장들이 일어났
다, 다음날 협상을 조건으로 모여온 원생대표들을 유인하여 미리 준비한 치안 유
지대라는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대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학살해서 구덩이에다 넣고 원생들이 전쟁용으로 강제 체취한 송탄유(松炭油)를 쏟아 부어 생화장을 시
켰고 그 때 살아남은 자들도 함께 화형을 당했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컸을지 하나
님은 아실 것이다. 그 때가 바로 1945년 8월22일이었다. 이 때 희생된 종들이 12
명이니 중앙교회 전도원 이경도(李京道), 집사 정수완(鄭守完), 김원식(金元植), 이차하(李且夏), 신성교회 전도원 김학로(金學魯), 집사 김금영(金今永), 북성교
회 집사 김칠송(金七松), 강윤형(姜允衡), 서성교회 집사 김이진(金伊辰), 남성교
회 전도원 강암우(姜岩佑), 집사 송인범(宋仁範), 동성교회 집사 유유슌(劉裕順) 전도원 3명, 집사9명이요. 그 외에 모두 신실한 성도들 84명이나 희생되었다. 교
회는 큰 비탄에 빠졌고 일본통치 30년시대를 마감하면서 소록도교회는 희생과 순
교로 역사를 마감하니 일본 직원이 업무를 완전 종결되어 섬을 떠나게 되었는데 때는 1945년 8월 24일. 이 때 원생은 4천 8백명이었다
7. 장로교단 시대
1945년 4월말에 신사참배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신 애양원 교회 손양원 목사는
고흥 길두 교회 김정복 목사를 모시고 오셔서 교회재건을 위해 역사하시는 중 5
월 1일부터 10일간을 공회당에서 부흥 사경회를 실시하고 헌법을 가르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시대를 열고 김정복 목사를 초대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공동
의회를 열고 장로를 피택하고 1946년 6월13일에 역사적인 장로 창립식을 거행하니
중앙교회 김차동 장로, 북성 교회 김민옥 장로, 남성교회 박소도 장로, 서성 교
회 서원갑, 이성곤, 황중오 장로, 신성교회 최장식 장로, 동성교회 최병수 장로였
다. 손양원 목사가 안수 기도하고 김정복 목사는 공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
록도 교회 당회를 조직하니 초대 당회장에 김정복 목사 당회서기에 김민옥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1882년 6월10일
출생하여 구한말 전주부를 지키는 장병으로 충실한 군 생활을 하시다 일제 탄압
으로 해산되니 생활이 어렵게 되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지원하였으나 너무
나 심한 노동에 못이겨 귀국하여 고향에서 신앙생활하시다 한 . 일 합방 소식을 듣고 민족운동은 기독교를 통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믿고 평양신학교에 진학(제
9회 졸업) 수학하여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하던 중 1940년 9월에 전
국 목사, 장로 193명을 체포하여 구금시키게 되었다. 여론이 너무 악화됨으로 모
두 석방시키고 그 해 11월 15일 애국심과 재림신앙이 강하고 비판적인 순천지방 15명의 목회자를 재 구속하니 그 15명중에 김정복 목사와 오석주 (1937.6.9-1942.10 소록도 교회 시무)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15명 목회자에게 1년에서 3년의 형을 확정하고 광주 교도소에 수감 시켰다.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묵묵히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시던 김정복 목사가 소록도에 오셔서 소록도 교회를 재건하시고 초대 당회장이 되셨으니 하나님의 귀하신 일이 아닐 수 없다. 1946년 6월 15일에 장안리 교회를 설립하니 소록도 7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김목사님은
소록도 교회 당회장으로 부임 하시기전 1915년 4월 제주중앙교회를 시무하셨고 1918년 5월에는 벌교읍 교회, 1920년 9월에는 고흥읍 교회 및 길두 교회를 시무하
셨고 소록도에 오셔서 우리 한센병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 말씀과 깊은 영적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목회하셨다.
8. 6. 25와 김정복 복사 순교
날 마다 교회는 부흥되고 은혜가 충만해 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북
공산군이 불법 침략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5일에 16,7세의 인민군 40여명
이 소록도까지 침입했다. 원 내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위원회가 조직되고 추종
자들과 불신자들이 규합하여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세례교인들을 강제 이동시
켜 교회간판을 내리고 인민공화국 간판을 달고 찬송과 기도를 중지시키고 인민공
화국 노래를 가르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모든 활동을 중지 당했다. 교인들
은 잠시라도 피신하시라고 눈물로 청원했으나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연약한 양떼를 버리고 버릴 수가 없노라"고 거절하시고 "내 늙은 목숨 살고자 도
망 갈 수 없다"시며 평소에 늘 기도하시던 굴날뿌리(신생리 마을 뒤편 바위) 동굴
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다가 평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원생 청년들의 밀고에 의
해 체포되어 강제로 고흥 정치보위부로 끌려 가셨으니 그 날이 1960년 8월20일 이었다. 끌려가는 목사님을 울부짖으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성도들을 몇 번이나 뒤돌아 보시며 "사랑하는 소록도 성도들아 신앙절개 굳게 지켜 천국에서 다시 만
나자" 하시며 손을 흔들고 가신길이 소록도 마지막 이별의 길이였다. 병원 안에서
는 9월말에 교회 장로, 집사들을 처형시키려고 인민재판이 공회당 앞뜰에서 진행
되고 있을 때. 머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니 안심하라는 전단지가 비행기
에서 뿌려졌고, 소록도에서도 그것을 받아보았다. 공회당에서 인민재판을 진행하
던 지방 빨갱이와 인민군들은 금방 얼굴이 파래지며 모든 재판을 끝도내지 못하
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그날이 9월27일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인민군들을 퇴각
하면서 고흥 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김정복 목사님을 경찰서 뒷산으로 끌고가서 무
차별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히니 무릎을 꿇으시며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순교하셨다
. 목사님은 그렇게도 사랑하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며 사랑하던 소록도 성도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순교의 제단 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그 분이 늘 즐겨
노래하던 천국을 향하여 떠나 가시니 향년 69세 그날이 1950년 9월30일이었다. 1951년 1월 23일 고대작(高大作) 목사님이 부임하여 3월3일에 중앙 예배당에서 김
정복 목사님의 순교 추도예배를 드리니 4천여 성도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고 김
정복 목사님의 순교 신앙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1977년 9월 30일 27
년만에 김두영 목사님에 의해 김정복 목사님 순교 기념비를 중앙예배당 앞 뜰에 세워 그 높은 순교신앙을 영원토록 기리며 계승하고자 하여 그 분 비에 "샛별"이
란 제목의 시문을 기록했다. 1978년 5월 17일에는 병원당국에서 병원입구에 순록
탑을 세우고 김정복 목사님과 함께 병원을 지키다 순직한 11분의 이름을 새겨 후
세에 남기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잊혀졌던 김정복 목사님의 유해를 고흥읍 남방 1km도로변 왼편 산 기슭에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묘역을 천대성 목사님을 위
원장으로 기독교 십자성 선교회가 후원하여 세웠으며 소록도 가는 길목을 오늘도 지키고 있는 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소록도 교회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은
오늘까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묻혀 계시며 교계에서는 이름조차 모르고 이곳 소록도 중앙교회 앞에 순교비만 쓸쓸히 세워져 있는 것이다.
9. 성경학교개교
숭고한 진리로 5천여 성도를 오직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목회하시던 이덕
길 목사님은 우리들 중에도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시며 성경고등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하기로 의논하시고 1957년 4월 17일 연합당회에서 이사회를 조
직하고 이사장에 박순하장로, 초대교장에 이덕길목사, 교감에 정명순목사를 정하
고 1957년 7월 1일 중앙교회에서 성경고등학교 개교 예배를 드리고 개교하니 학생
지원자가 무려 70명이나 입학 신청을 했으나 시험결과 30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성 신학교(여수)와 영광신학교(부산)로 진학하여 수많은 목회
자가 나와서 오늘까지 신실한 목회자로 주님위해 일하며 더러는 초대 한국의 정착
마을 마다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장로로 시무하는 종들도 많이 생겨서 그 시대에 한센형제들의 지도자로 크게 공헌했으니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다. 이들 중
에는 외국 유명한 신학교 교수로 봉직하는 이들도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1957년 개교하여 1983년 23회로 종결하여 총 151명이 이 학교를 거쳐서 복음을 위해 역사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역사가 아닐 수 없으며 당시 부교역자로 있던 김명환강도사와 서삼용전도사는 각각 신약과 구약개론을 가르치며 제 23회 성경고등학교의 폐교를 지켜보았다.
10. 5 16혁명과 수난
1961년 5월 16일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민주당정권이 무너지고 군사 정부가 들어
서면서 소록도 병원장으로 현역 육군대령인 조창원(趙昌源) 원장이 부임했다. 원
장은 부임하여 각 부락의 예배당은 병원 건물이므로 병원으로 반환하고 현 복지관
한 건물만 예배당으로 사용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연약한 성도들이 예배당을 반환하고 공회당에 모여 예배드리자니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을까. 그러나 병약한
서러움을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새벽마다 모였고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에 모였으
니 이 또한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다.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랴. 예배당 없는 서러움을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했다. 혁명 정부아래 군인원장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또 무슨 명령이 떨어질까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다. 1962년 1월 3일 수요 연
합예배 후 교회 헌금 중지 명령을 내렸고 각 교회장부 일절을 압수당했고 또한 각 교회 종각철거 명령이 내렸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지 않
는 성도가 없었고 원장은 내 뒤에 수십만 군대가 있으므로 거역하면 총살시킨다
고 권총을 휘둘렀으니 불안 공포의 나날이었다. 병사지대는 목사님의 출입이 금지
되었다. 교회는 어려움에 처했고 성도들의 울부짖는 기도도 끊이지 않았다. 어떤 장로님들은 교회의 형편을 들어 기도했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감금당하기도 했으며
이유없는 교회 탄압에 못이겨 불만을 가 진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1962년1
월9일에는 교회장로10명, 집사14명 권찰11명, 주일학교 교사 9명, 교인 4명, 모두
48명이 전주 소생원으로 추방되었으니 그 날은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쳤고, 이른 새벽에 추방시키니 4천여 성도는 통곡하며 이별 했다. 강제 추방으로 인하여 섬 전체는 불안하여 살수 없는 공포분위기에 쌓여 있게 되었다. 1962년 1월10일에는 교회기관을 해체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교 간판을 내리고 소록도국립병원 장로교회
로 개정할 것을 명령했다. 1월17일에는 9일 추방당한 가족 등 교회역원 83명을 추방 시켰다. 교회지도자들을 잃은 연약한 성도들은 입을 다물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뿐이었다. 신앙은 침체되었으나 성도들은 숨어서 눈물로 기도하면 교회사수를 위해 목숨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다
11. 김두영 목사 부임과 교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4천여명 성도가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의 응답으로 1962년
2월10일 김두영(金斗英) 목사님을 소록도 교회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 날에 4천여
명의 성도가 모여 연합예배를 드렸고 김 목사님은 찾아오신 예수님이란 제목의 설
교를 하셨는데 온 교회는 은혜가 충만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962년 6월3
일에는 연합당회에서 일곱 교회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병원당국과 예배당 부지 절충을 하기로 했다. 1962년 8월8일 김두영 목사 위임예배를 드렸다. 그 때 성도
가 4천 6백명이었다. 1962년 11월 26일 신생리 교회 착공을 시작으로 28일 남생리
교회와 장안리 교회 30일 구북리 교회가 착공예배를 드렸다. 이때를 맞추어 병원
에서는 오마도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건장한 일군들을 공사장에 다 동원시키고 남
은 자들은 병약한 노약자들뿐이었고 예배당 공사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처음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준비된 건축비는 일곱 교회가 겨우 7만원밖에 없었으나 그러나 4천여성도들이 밤낮으로 기도했고 1963년 8월14일에 중앙교회가 착공되었
고 1963년 12월24일에는 신성교회, 남성교회, 북성교회, 장성교회가 준공되고 감
격 속에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64년 1월3일에 서성교회 6월15일 동성교회
가 준공되었고, 1964년 11월15일에 중앙교회가 완공되어 준공예배를 드리니 참으
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이 소록도를 사
랑하셔서 일곱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40여년을 지켜오던 예
배당을 몰수당한 성도들의 눈물 기도를 들어주시고 김두영 목사님을 보내사 일시
에 일곱 교회를 건축할 수 있게 되었으니 병약한 몸으로 건축에 참여했으며 금식
하며 식량을 절제하여 건축비를 만들고 부인들은 머리를 잘라 팔았으며, 눈 밝은 성도는 안내하고 눈 어두운 성도는 손수레를 끌었으며 부인들은 세수 대야로 자갈
을 운반하고 손 없는 분들은 숫가락으로 자갈을 주워 담았으며 예배당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성도들의 눈물과 피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하나님은 기도의 섬 소록도에 기적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의논할 때 소록도 일곱
교회가 가진 건축기금이란 고작 7만원 뿐 이었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소록
도 동산에 보리떡 다섯 개의 기적을 허락하셨고 일곱 교회를 다 짓고 나니 남은 돈이 367,500원이었다. 1966년 11월23일-24일 양일에 소록도 일곱 교회의 헌당 예
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23일 오전 9시에 북성 교회 10시에 서성교회 오후2시에는 동성교회 오후4시에 소록직원 교회가 헌당예배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드리
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세계기독교 역사 속에 전무후무 한 기적의 역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소록도 여덟 교회(직원교회포함)는 하나님의 은혜와 김두영 목사님의 위
대한 능력과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으로 생겨난 하나님의 교회로 주님 오실
때까지 시은소가 될 것이다. 1966년 11월 24일 소록도 여덟 교회의 역사적 봉헌
예배를 마치고 그 날 밤에 전국에서 모인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들이 모여 연
합체를 구성하니 그것이 한국 한성 장로회 모체가 된 것이다. 이제 소록도 교회는
만세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든든히 서가는 교회로 날마다 감사하
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교회로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었
다. 김두영 목사님은 소록도교회의 멋 훗날의 운영을 염려하며 기도하던 중 3차 세계 전도여행을 하시면서 소록도 교회 후원자들을 찾아 자립 못하는 교회의 앞날
의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시는 선견자적인 종이 되신 것이다. 그들 중에 오늘날까
지 후원을 계속하여 소록도 교회 운영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목사님은 소록도 일
곱 교회를 노심초사 애타는 마음으로 돌보시다가 1993년 4월22일 원로목사로 추대
되니 1962년 2월10일 부임하여 1993년4월2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31년 2개
월 12일 동안 그 어려운 시절 약한 성도들과 함께 애환을 같이 겪으며 청춘을 바
치며 불철주야 국내외 일하는 기계처럼 오직 소록도를 위해서 멋 훗날 늙고 나약
해질 때의 소록도 교회를 염려하시며 사랑하신 신실한 종으로 기독교 역사에 아름
다운 큰 빛을 남기시고 1995년 1월17일 향년 78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
으로 떠나시므로 소록도와 함께 성도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과 고인이 되신 김두영 목사님의 신앙을 계승하고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 중심으로 소록도 교회를 이끌어 나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 성도들
과 한 식구가 되어 날로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소록직원 교회는 정임묵 목사님을
중심으로 병원직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12. 원생들의 노동
1933년,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한 수호(周防正季)는 첫 번째 목표를 확장사업에 두
고 먼저 1회 10만장, 연간 140만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벽돌공장을 완성하였
다. 원생들은 이 확장 사업을 위해 벽돌 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도로 개설
, 도배 등 힘들고 험한 공사에 동원되었다.
제1차 확장공사 이후 수용원생의 급증으로 대규모의 확장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 1년간의 제2차 확장공사로 직원 관사 42동과 물품 창고 2동, 그리고 소록도 일
주도로가 완성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원생들의 생활은 굶주림과 강제 노동으로 점차 피폐해
지고 있었으나 수호는 다시 3차 확장공사를 시작하였다. 원생들은 이러한 요양소 확장에 동원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일 수만장의 벽돌을 구워내야 하는 등 이중 삼
중의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원생들의 시련과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노동력도 없는 원생들까지 동원하여 연간 6천㎏의 송진을 채취하고, 1941
년도에는 500대의 가마니틀을 구입하여 연간 30만장의 가마니를 생산하였으며, 연
간 1,500장의 토끼 가죽과 3만포의 숯을 제조하는 등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
되었다.
원생들의 참사(1945. 8. 21.)
소록도에 조국의 해방 소식이 전해지자 원생들은 병사지대에 있는 신사를 불태우
고 교도소의 죄수들과 감금실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또한 일본인들이 떠나자 병원 운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의사와 행정 직원 간에 세
력다툼이 벌어져 섬 전체의 분위기가 아주 어수선하였다.
병원 운영권에 대한 투표에서 직원들에게 진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빼앗을 욕심
으로 원생 대표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의 식량과 의약품 등
을 섬 밖으로 빼돌리려고 하니 이를 막아야 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소식을 듣자 극도로 흥분한 원생들은 몽둥이와 삽 등을
들고 직원지대 입구(경계선)에 모여 함성을 지르며 데모를 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직원들은 처음에는 공포탄을 쏘았다. 그러나 수많은 원생들이 계속 돌진해오자 실탄을 채워 사격하여 원생 몇 사람이 쓰러졌다. 이에 흥분한 원
생 일부가 직원들 몇을 폭행하여 죽이고, 병원 운영권을 원생자치회에 넘기라며 직원지대에 쳐들어가자고 하였다.
이에 직원들은 고흥 치안 유지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다음 날 원생들과 협상
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장한 직원들과 치안 유지대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온
원생 대표들을 결박하여 모두 사살해 버렸다. 또한 각 마을에 있는 원생 간부들
을 찾아내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총으로 사살하여 치료본관 앞, 장작을 쌓은 모래
사장 구덩이에 송탄유(松炭油)를 붓고 시신 전부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배로 식
량을 실러 나갔다 돌아오는 원생 간부들도 바다에까지 나가 사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90명의 각 마을 대표 원생 중 84명이 희생되고 6명만이 간신히 살아 남았다.
13. 소록도 교회 사명과 현재
이제 소록도 교회는 외로운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소록도 병원 85년 역사 뒤안길에 소록도 교회 80년 역사 속에 순수한 성경
적인 신앙을 고수하며 주님 오실 때 까지 변질되지 않는 재림 신앙을 고수하며 빛
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한국 한센가족들의 모 교회로서 그동안 많은 신앙
의 생명들을 해산하였다. 기도의 동산인 이곳을 거쳐 나간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또한 선교사들이 아마 수백명은 될 것이다. 주님 재림이 임박한 이때에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면서 세계선교와 한국 복음화를 위해 수많은 방문자들과 후원교회들
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쉬지 않고 힘 있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 소록도 교회
에 최후 사명으로 여기고 소록도 다섯 교회는 수십명이 철야하며 기도하고 새벽
마다 기도하며 낮12시에는 교회마다 종을 울리고 교회에서는 정오 기도회로 모이
고 기적과 능력으로 기도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소록도교회가 선교사들을 통해 받은 은혜와 한국 교회를 통해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많기에 사랑에 빚진자들
로서 기도로 보답하고져 하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며 소망인 것이다. 그래
서 모두들 생명 다하는 그 날까지 기도하다가 천국 가고자 하는 각오들이다. 현재
소록도 교회는 당회장으로 박주천 목사님과 천우열 전도사님, 박대철 전도님을 모시고 550여명 성도가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으로 감사하면서 마지막 때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오직 우리 소록도 성도들은 천국 소망만을 가지고 살아
가고 있다. 현재 소록도 섬 안에는 신성교회, 중앙. 동성, 남성, 북성교회 등 5개
교회가 있으며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소록(직원)교회가 있다.
14. 소록도 이 남철 장로님과의 전화 인터뷰
현재 소록도에는 700명이 살고 있고, 평균 연령은 72,3세로, 99% 한센씨병이 치
료되었다. 약간의 인구 증가가 있는데 그 이유는 한센병 휴우증으로 다시 돌아오
기 때문이다. 종교 상황은 6개의 개신 교회와 두 개의 천주교회, 그리고 1개의 원불교가 있다. 성도로는 160명의 천주교인이고 원불교인은 없으며 나머지가 기독교인이다.
소록도인의 생활은 “병들어 괄시받고 울고 떠난 내 고향, 웃고 만난 소록도”로 일축된다.
특별히 국내전도와 세계선교에 매우 열심이어서 교회전도 팀이 구성되어 있어서 약 50%는 거동이 불편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성도들을 심방하고, 전국 약 80
개의 나환자 정착마을에 포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해외 선교지로는 미얀마, 방글
라대시 베트남, 태국의 한센가족 선교를 25년 전부터 하고 있다. 특히 태국 10만
명의 한센 가족 자녀 복음화를 위한 선교전략을 갖고 있고 이것을 이들은 ‘재 투
자’ 라고 말한다.
예배로는 주일 낮 12시에 교회 종이 울리면 모든 소록도인이 기도와 묵념을 한다
. 4시 새벽 기도가 있고 평균 참석수가 약60명 정도이고, 공동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