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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45
9월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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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로는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 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 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 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복음 6장 2절)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복음 6장 3~4절)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 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복음 6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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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작은 일탈이 용납될 수 있는 조건>
로마로 유학을 갔을 때 한국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언어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워낙 머리가 좋기 때문에 언어만 되면 공부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는 방학 때 DVD를 빌려 자막을 띄워놓고 영화를 돌려보며 이태리 말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TV 시청이나 영화를 보는 것에는 말을 배우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들리는 말만 들리고 안 들리는 말은 끝까지 안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보다는 읽고 쓰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매일 외웠습니다. 저녁이 되면 어설픈 실력으로 일기를 썼습니다. 일기는 내가 말할 때를 위해 도움이 되었고, 읽기는 들을 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조금은 빨리 이태리어에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화책만 주구장창 보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신학생이 성경을 읽어야지 만화책을 보느냐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그 신학생이 저보다 말을 더 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일상에서는 말을 참 잘했습니다. 첫 방학이 되었을 때 저는 신학적인 용어들은 많이 알고 있었으나 일상에 필요한 말들은 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생은 처음부터도 아이들과 잘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을 잘하니 공부도 잘했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스트레스가 적어서인지 영성생활도 참 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는 작은 일탈도 크게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도 큰 죄인데 남의 밀 이삭을 훔쳐 먹으니 바리사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제자들을 두둔하십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작은 잘못을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집어먹은 일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을 바꾸셨습니다.
제가 미사하면서 제대에 성혈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성작을 건드려서 성작이 흔들려 그 안에 있던 성혈이 제대에 흐른 것입니다. 당시 괴로울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고 세상에서 더 바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과 미사를 하고 있던 중이니 주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제대 위에 흐른 성혈을 보며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부주의해서 예수님의 성혈을 제대에 뿌렸구나!’
땅바닥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어도 주님의 성체성혈을 조심스럽게 간직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행복한 조건들은 더 이상 저에게 아무 위안도 주지 못했습니다. 만약 지금 죽게 된다면 지금까지 지켜왔던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소홀히 여긴 것에 대한 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은 하늘나라이고 행복입니다. 행복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면 행복하고 그분을 잃으면 다른 무엇으로도 그 불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길로 여겨야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행복해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비록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으나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허기를 채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율법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했습니다.
물론 죄는 예수님을 몰아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피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더 함께 하기 위한 것이라면 작은 일탈은 또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주일을 주님 뜻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면 쉬는 날 하루쯤은 늦잠 자고 TV나 영화를 보며 게을러도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로만 맞추어져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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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6,1-5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총의 안식일, 영원한 부활의 안식일을 주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처신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비난해 왔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맺은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한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고 하기보다, 그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즉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라고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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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의 묵상
미국의 어느 대기업 회장이 새 사업을 하려고 은행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담당 직원은 외근 중이었고 지점장도 자리에 없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앉아 기다리다가 여직원에게 다음날 올 테니 자동차 주차권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여직원은 이 은행에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규정상’ 도장을 찍어 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음날 회장은 은행에 있는 자신의 모든 돈을 찾아 다른 은행에 맡겼습니다.
은행의 모든 규정은 은행의 발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직원은 은행의 발전이라는 정신은 잊은 채 규정에만 충실하였습니다. 법에 ‘정신’이 빠진다면 그 법은 내용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며 그저 자신과 타인을 속박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법의 정신입니다. 율법은 이 정신을 완성하려고 존재합니다. 해적선에 타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잃은 모든 규정도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합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시며, 사랑이신 당신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사랑에 율법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율법은 사랑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율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합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정신 나간 법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지키는 것들이 사랑인지 늘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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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을 섬기는 사랑의 법>
율법학자들 및 바리사이들의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점차 고조되어갑니다. 유다 종교 당국자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주시하면서 책을 잡고 무력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태도에도 당신의 계획을 수행하시며 인류 구원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가십니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 준수 체계는 유다교의 가장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알려 주는 표지였지요.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엄격하고 세부적인 율법들을 만들어 노동과 비슷한 어떤 활동도 금지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사이들은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6,2) 하며 따집니다.
왜냐하면 율법 규정에 따르면 밀 이삭은 추수의 한 형태였고, 이것은 안식일을 더럽히는 스물아홉 가지의 중요한 노동 형태 중의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에게 시비를 건 것은 실제로는 예수님께 대한 경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과 그 일행이 성전에 들어가 하느님께 봉헌된 빵을 먹은 사실을(1사무 21,1-7) 예로 들어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십니다.
이로써 인간의 선익이 실정법보다 우위에 있고, 생존권이 그 어떤 법률보다 위에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인간 세상에서 세우려 하십니다. 하느님의 질서를 따르는 세상의 모든 제도와 구조, 법과 관습은 늘 인간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요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며 그 목적은 영혼구원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지요.
따라서 사랑에 어긋나는 법, 인간이 배제하고 인간을 섬기지 않는 모든 법과 제도는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느님의 질서를 따르는 참다운 법과 제도의 기준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뿐 아니라, 모든 율법의 주인이며 세상 모든 법의 기준이십니다.
우리 또한 사랑의 기준으로 새로운 인간적 또는 종교적인 질서를 세우신 예수님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제도와 체제, 법률이 서로를 섬기는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해야겠지요.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은 법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늘 인간을 중심에 두고 가장 중요시 여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부터 사랑의 질서를 위한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도록 힘써야겠지요.
나아가 각자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고유한 처지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살도록 서로 도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법이나 제도도 만들지 말 것이며,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발생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법적용도 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법은 인간을 살리고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며 인간을 섬기는 ‘사랑의 법’, ‘성령의 법’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법과 제도,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법과 제도들이 과연 인간을 섬기고, 사랑과 자유 안에서 생명을 키워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인간을 변두리로 내몰고, 인간을 도구화하며 비인간화를 부추기는 불의한 온갖 법과 제도에 저항하고 그것을 폐기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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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시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마태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르코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막을 가리던 휘장을 찢듯, 율법의 낡은 옷을 벗기시고, 말씀으로 은총의 새 옷을 입히십니다.
앞 장면에서 단식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이제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오늘 우리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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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일 쉼>
루카 6,1-5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 일 쉼>
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지요
쉼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쉼을 위해 쉬는 것은 아니지요
일을 위해 쉬는 것도 아니지요
다만 사람을 위해 쉬는 것이지요
사람이 일해야 할 때 일할 수 있고
사람이 쉬어야 할 때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이기에 일할 수 있고
사람이기에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고
사람으로서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답게 일할 수 있고
사람답게 쉴 수 있어야지요
사람이 일을 위해 있지 않고
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요
사람이 쉼을 위해 있지 않고
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요
일도 쉼도 사람을 옥죄지 않고
사람이 일도 쉼도 누려야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살맛나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이 바로
하느님나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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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함께’라는 말을…>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지나던 택시를 세웠습니다. 첫 번째 택시가 서더니 내가 장애인인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번거로웠겠지요. 두 번째 택시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대, 네 대…. 열 대 이상의 빈 택시가 지나갔고 나는 늦은 밤까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있어야 했습니다. 나는 떠나가는 택시를 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저 택시를 운전하는 아저씨들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깊은 밤에 장애인을 길바닥에 버려두고 가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저분들이 상처받지 않게 어루만져 주세요.”
이 장애인의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부터 변화시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함께’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인내하고 참아주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해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 사이들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복음을 찬찬히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손을 비벼 먹었습니다.
신명기 23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식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손으로 이식을 잘라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비난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까? 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함께’라는 말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사람을 굶겨 죽이는 것이 더 큰 죄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배고프고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항상 너희와 함께….”라는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런 광고가 있습니다.아빠가 너무 바빠서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은 시간에 퇴근하다 보니…. 깨어있는 어린 딸아이의 모습을 볼 수기 없었습니다. 어느 날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일찍 퇴근하여 늦게까지 딸아이와 놀아주다가 재웠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아빠를 보고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아빠, 내일도 놀러 오세요.”
아빠는 딸아이의 말에 충격을 받고, 아빠는 모든 것을 멈추고 사랑하는 딸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아줍니다. 딸아이에 얼굴을 보고 아빠의 첫 마디 무엇이었을까요? 내 딸 아이가 참 예쁘구나! 모든 것을 멈추고 보니….
탈출기 25장 22절에 보면…. 계약 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나고, 내가 너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에 주님께서 “너희와 함께”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곳에서 고운님들을 만나시고, 그곳에서 고운님들에게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저희는 주일날에 일하고 싶고, 놀러 가고 싶고, 돈 벌고 싶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겠지만, 되도록 주일날에 본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일을 잠깐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왜냐면, 고운님들의 삶의 마지막 날에 “헛되고 헛되도다. 만사가 헛되도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함께 해주셨으니 “아름답고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행복한 인생이었다.”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번 주일에는 멈추고 주님의 아름답고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마음을 담고 보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심에 감사드리며, 그분께서 항상 고운님들과 동행함으로써 지금도, 먼 훗날 생애 마지막 날에는 크게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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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47)
♧♧ 시편 48편 2절….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우리 하느님의 도성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 주님은 위대하시고...
시편 48편은 여호사팟이 유다의 임금으로 다스리는 기간 중 ‘모압’ ‘암몬’ ‘므운’ 등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범 했을 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패배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한 이야기(역대기 하권 20장 1-30절. 참조)이나, 아니면 히즈키야 때에 예루살렘을 침략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군대가 주님의 천사에게 전멸당한 이야기(열왕기 하권 19장. 참조)를 배경으로 쓰여진 시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윗은 이러한 시를 시작함에 있어 많은 적의 위협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 우리 하느님의 도성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하느님의 도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한 언덕인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과 시온 산은 동의어로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과 보호를 받은 선택된 백성들의 거주지를 상징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 날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48편 3절….
"아름답게 솟아오른 그 산은 온 누리의 기쁨이요 북녘의 맨 끝 시온 산은 대왕님의 도읍이라네."
* 아름답게 솟아오른 ...
이는 예루살렘이 지형적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그 자연적인 경관이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한 세상의 중심인 도성(성전)으로 삼으셨기에 그 도성(성전)이 세상의 다른 어떤 도성(성전)보다 탁월한 축복의 도성(성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온 누리의 기쁨이요...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온 누리에 있는 민족들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곳에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누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 북녘의 맨 끝 시온 산...
시온 산은 분명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북녘에 있는’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볼 때 다윗 성이 성전 북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온 산’ 은 ‘하느님의 도성(2절)’과 동일하게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다윗 성) 자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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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사람들 사이에 유럽의 체코가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체코가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사람들이 체코에 관한 이야기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한 자매님께서 제게 “신부님, 체코 가본 적 있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강의 때문에, 그리고 교포 사목을 하는 신부님 방문을 위해 세 번 가봤다고 대답을 했더니, “카프카의 생가도 다녀오셨겠네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저는 그 생가 앞을 지나가기는 했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말하니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체코까지 가셨는데, 카프카의 생가에 안 가보셨어요? 신부님 책 좋아하시잖아요.”
사실 프란츠 카프카의 생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쓴 글을 읽지 않으면서 그의 생가를 직접 가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떠올려집니다.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한 간호사가 다친 병사를 돌보는데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강력한 진통제로 사용되던 모르핀이 다 떨어져서 그의 고통을 줄여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사기에 식염수를 넣어 고통받고 있는 병사에게 투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아주 강력한 약이니까 곧 좋아질 거예요.”
거짓말같이 이 병사는 고통에서 벗어났고 상태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이 효과를 플라세보 효과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간호사가 거짓말을 했다고 비판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병의 치료에 효과를 봤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서 바리사이 몇 사람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분개하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 단순한 행동을 추수와 타작을 했다고 확대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안식일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인간을 위해 쉼의 시간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이 시간에 온전히 하느님께 나 자신을 사랑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은 보지 못하고 그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율법의 준수만을 주장하면서 확대해석하는 당시 종교지도자의 모습이 어쩌면 사랑은 뒤로 미루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반대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하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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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맞추는 삶}
어느 사람이 택시를 타고서 앞에 가는 비싼 외제 차를 쫓아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택시 기사는 앞차를 쫓아가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줄 알고서 정신을 바짝 차려서 앞의 비싼 외제 차를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에게 이 손님이 말합니다.
“앞차 정말로 멋지지 않습니까? 사실 저 차는 제 것입니다.”
택시 기사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자기의 멋진 차를 놔두고서 왜 택시를 타셨어요?”
그러자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차에 타면 내가 볼 수가 없잖아요.”
차를 구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타고 다니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보기 위해서 그리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차를 구매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이들에게 맞추기 위한 삶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삶입니다. 이를 통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게 맞추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맞추는 삶은 곧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아닐까요? 누가 뭐라 해도 주님의 사랑에 맞춘다면 가장 큰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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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 맨해튼의 한인 공동체에서 처음 미사와 강론을 했습니다. 그날 성서 말씀의 주제는 ‘겸손’이었습니다. 제가 교만하게 살면 앞으로의 삶에 어려움이 올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겸손하게 지내면 앞으로의 삶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서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갇힌 이를 풀어주고, 억눌린 이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성서 말씀처럼 겸손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기쁘게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도록 지혜를 청하고 싶습니다.
매장과 파종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다른 면이 있습니다. 매장은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합니다. 매장당한다는 말은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매장한다는 말은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파종 역시 땅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종은 어둠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는 걸 기대합니다. 그러기에 파종은 새로운 희망을 의미합니다. 파종하는 사람은 수고와 땀을 흘리지만, 그 수고와 땀이 기쁨으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합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새싹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파종된 것이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매장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법과 규정의 이름으로 쉽게 남을 단죄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언론은 제2의 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언론이 가지는 정보와 힘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언론은 공정해야 하고, 언론이 잘못 보도했다면 즉시 사과해야 합니다. 언론은 민심을 선도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단죄하기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고,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법과 규정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과 규정은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기까지 우리 인생에 쉼표는 있겠지만 마침표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따르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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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분별의 잣대>
-영적靈的일수록 현실적現實的이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모든 참된 영성가가 이에 해당됩니다. 예전 수도원에서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이는 원장과 재무라는 말에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영적 삶을 추구하지만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아주 현실적이 될 수뿐이 없는 두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흔들리면 공동체도 불안정하고 장상도 사임에 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여 우스개 소리로 원장의 한 눈은 하느님(하늘)을 보고 한 눈은 돈(땅)을 봐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엊그제 재미있는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자신의 좌우명을 벽돌에 써서 배치한 교구 사제입니다.
-“수사님,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일하라! 뒤에 완성 문구 생각했습니다. 자 이제 드디어 곧 수도원에 완성하러 가겠습니다. ㅎㅎ 잘 놀고 좀 쉬어라!ㅎ”-즉시 화답했습니다.
-“기가 막힌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예수님 생각도 일치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보고한 후엔 즉시 쉬도록 배려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영적 분별력을 지닌 이들은 육신의 배려에 민감합니다. 결코 무지하게 고신극기한다며 육신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교회도 언제나 극단에 치우친 광기와도 같은 육신의 고행은 이단으로 엄중히 단죄했습니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에도 구체적 몸과 관련된 요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하여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여 우선 확인하는 것이 화장실, 샤워실, 식당, 침실입니다. 배설하고 씻고 먹고 자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몸의 욕구입니다.
수도원에 피정 오는 분들도 이 네 요소가 잘 구비되어야 상쾌한 피정도 가능합니다. 피정집 안내중 쾌적한 크고 밝은 침실, 깨끗한 식당, 화장실, 샤워실을 봤을 때 환해 지는 얼굴 표정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여 지혜롭고 현실적인 장상은 공동체 형제들의 몸의 욕구에 신속히 응답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지친 형제들은 병원에 가든지 쉬든지 즉각 조치하며 기도 의무도 관면해 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현실적인 분인지 드러납니다. 사실 진짜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을 정도라면 극히 배고픈 현실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후에는 온통 굶주린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일과 병든 이들, 귀신 들린 이들, 불구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몸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임을 봅니다.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지만, 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법 위에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법위에 있는 사람’이란 말마디에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바로 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법은 상대적입니다만 사랑의 법은 절대적입니다. 안식일법을 잣대로 당신 제자들의 위법을 추궁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다윗 일행의 예를 들면서 예외적 상황도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법대로 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일처리도 간단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악은 디테일 안에 있습니다. 생각없이 법대로 한다 하면서 배고픈 현실을 방치하거나 억울한 이를 양산해 낸다면 이건 분명히 악입니다. 참으로 법의 미명하에 인간의 무지나 악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이 벌어지는 지요.
이래서 깨어 ‘살아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고 사랑을 잣대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명쾌한 처방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사랑이 유일한 분별의 잣대임을 천명합니다. 사랑의 분별의 잣대라 함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라 함과 일치합니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은 명쾌하게 밝힙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모든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심사숙고하면 답은 자명히 나옵니다.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무지의 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어제 참으로 깊고 풍부했던 ‘그리스도 찬가’(콜로1,15-20)는 바로 바오로의 영성의 뿌리와 같습니다. 얼마나 깊은 영성의 사람 바오로 사도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사랑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에 그리도 명쾌한 분별력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제의 그리스도 찬가를 우리 영성의 뿌리로 만드는 일 역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뿌리는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의 자유롭고 사랑 풍부한 삶입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성의 뿌리가 튼튼하고 건강합니다. 그러니 일상의 영적 수행이 목표하는 바, 우리 영성의 뿌리를 건강하고 튼튼히 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시어,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 영성의 참된 뿌리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우리가 들은 복음의 희망을 지니고 아주 영적이자 현실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영성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시고 풍성한 사랑을 선사하시어 올바른 분별력을 지니고 살게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참으로 하느님은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영성의 뿌리임을 고백하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아멘.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모든 참된 영성가가 이에 해당됩니다. 예전 수도원에서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이는 원장과 재무라는 말에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영적 삶을 추구하지만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아주 현실적이 될 수뿐이 없는 두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흔들리면 공동체도 불안정하고 장상도 사임에 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여 우스개 소리로 원장의 한 눈은 하느님(하늘)을 보고 한 눈은 돈(땅)을 봐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엊그제 재미있는 카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자신의 좌우명을 벽돌에 써서 배치한 교구 사제입니다.
-“수사님,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일하라! 뒤에 완성 문구 생각했습니다. 자 이제 드디어 곧 수도원에 완성하러 가겠습니다. ㅎㅎ 잘 놀고 좀 쉬어라!ㅎ”-즉시 화답했습니다.
-“기가 막힌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예수님 생각도 일치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보고한 후엔 즉시 쉬도록 배려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영적 분별력을 지닌 이들은 육신의 배려에 민감합니다. 결코 무지하게 고신극기한다며 육신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교회도 언제나 극단에 치우친 광기와도 같은 육신의 고행은 이단으로 엄중히 단죄했습니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중에도 구체적 몸과 관련된 요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하여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여 우선 확인하는 것이 화장실, 샤워실, 식당, 침실입니다. 배설하고 씻고 먹고 자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몸의 욕구입니다.
수도원에 피정 오는 분들도 이 네 요소가 잘 구비되어야 상쾌한 피정도 가능합니다. 피정집 안내중 쾌적한 크고 밝은 침실, 깨끗한 식당, 화장실, 샤워실을 봤을 때 환해 지는 얼굴 표정들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여 지혜롭고 현실적인 장상은 공동체 형제들의 몸의 욕구에 신속히 응답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지친 형제들은 병원에 가든지 쉬든지 즉각 조치하며 기도 의무도 관면해 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현실적인 분인지 드러납니다. 사실 진짜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을 정도라면 극히 배고픈 현실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후에는 온통 굶주린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일과 병든 이들, 귀신 들린 이들, 불구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몸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임을 봅니다.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하지만, 법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법 위에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법위에 있는 사람’이란 말마디에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바로 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법은 상대적입니다만 사랑의 법은 절대적입니다. 안식일법을 잣대로 당신 제자들의 위법을 추궁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다윗 일행의 예를 들면서 예외적 상황도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법대로 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일처리도 간단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악은 디테일 안에 있습니다. 생각없이 법대로 한다 하면서 배고픈 현실을 방치하거나 억울한 이를 양산해 낸다면 이건 분명히 악입니다. 참으로 법의 미명하에 인간의 무지나 악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악한 일들이 벌어지는 지요.
이래서 깨어 ‘살아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고 사랑을 잣대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명쾌한 처방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사랑이 유일한 분별의 잣대임을 천명합니다. 사랑의 분별의 잣대라 함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라 함과 일치합니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은 명쾌하게 밝힙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모든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별의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심사숙고하면 답은 자명히 나옵니다.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무지의 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어제 참으로 깊고 풍부했던 ‘그리스도 찬가’(콜로1,15-20)는 바로 바오로의 영성의 뿌리와 같습니다. 얼마나 깊은 영성의 사람 바오로 사도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 사랑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에 그리도 명쾌한 분별력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제의 그리스도 찬가를 우리 영성의 뿌리로 만드는 일 역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뿌리는 땅속에 묻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의 자유롭고 사랑 풍부한 삶입니다. 참으로 현실적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성의 뿌리가 튼튼하고 건강합니다. 그러니 일상의 영적 수행이 목표하는 바, 우리 영성의 뿌리를 건강하고 튼튼히 하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시어,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 영성의 참된 뿌리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는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우리가 들은 복음의 희망을 지니고 아주 영적이자 현실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영성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시고 풍성한 사랑을 선사하시어 올바른 분별력을 지니고 살게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참으로 하느님은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영성의 뿌리임을 고백하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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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이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가시화됩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루카 6,1).
선교 여행으로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 밀밭 사이에 난 길을 걷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밀이삭을 흝어 입으로 가져갔나 봅니다. 어찌 보면 별 의도 없는 자연스런 행동인데, 바리사이들 눈에는 추수 정도의 노동으로까지 보인 듯하네요. 그렇다면 그들에겐 분명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 손에서 일을 놓아야 하는 규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임에 틀림없겠지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루카 6,2).
두 존재 사이에 관계 맺음이 시작되면 처음엔 서로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 고민이 시작될 겁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후손들이 본격적으로 야훼 하느님을 "신"으로 모시면서도 그랬겠지요. 이집트의 파라오나 가나안의 바알처럼 자기들만의 "신"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거고요.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 하느님 백성으로서 피조물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 맞게 내리신 규정들이 탈출기 중반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에 잘 나타나 있지요.
안식일에 무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실은 하느님을 더 잘 섬기고 모든 피조물과 더 조화로이 공존하라는 하느님의 의도가 담긴 조항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날 해서는 안 될 일보다, 그날 해야 하고 허용하며 품어야 하는 일들에 대해 더 고민했겠지요.
아무튼 두 존재 사이에 시간이 지나고 관계가 깊어지면 서로에게 처음 제시한 규정은 차츰 희미해지게 마련입니다.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이미 존재에 새겨졌다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리만치 몸과 마음에 배어들게 된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좀 더 정신과 마음으로 접근했더라면 그 긴 시간 동안 더 깊고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수많은 율법 규정이 불필요할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신뢰 만땅, 사랑 만땅의 관계가 되면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 되었다면, 척 하면 척! 두꺼운 율법 규정집을 치워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만은 뼛속 깊이 남았을 겁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율법 조문이 주인이 되어버린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제도에 성자이신 예수님의 권위가 미치신다는 의미이고, 또 안식일이 회복과 해방의 날인 것처럼, 당신을 바쳐 온 인류에 참된 해방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개의 시선을 관상합니다. 제자들이 하는 행동 너머로 그들 존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따사로운 사랑의 시선,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에 대한 존중 없이 행동만으로 올가미를 씌워 단죄하려는 차가운 증오의 시선... 이 시선이 곧 그 사람의 마음이고 영혼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그러나 이제..."(콜로 1,21).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의 과거와 현재, 즉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를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사랑으로 애끓는 하느님의 마음보다 심판자의 칼날을 염두에 두고 살 때는 엄벌에 처하는 "심장 없는 신" 하나를 우상으로 삼아 섬기며 사는 꼴이기에 실제로는 진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원수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 아들을 내주시어 세상과 화해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이제 사람의 아들의 공로로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짜 하느님, 심장을 지니신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 되면 더 이상 세세한 율법 조항에 얽매여, 해도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따지느라 심장을 빼놓고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에는 어찌 해야 될지 사랑이 답을 알려 줄 것입니다. 사랑이 길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사랑이 원하는 걸 하면 됩니다. 마음 저 깊은 곳에 머무르시는 주님께서 우리 존재 안에서 울려 주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예수님의 시선에 우리 눈길을 포개어 사랑이 알려준 답을 찾아가면 됩니다.
율법의 자리에 사랑이 들어서면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는 사뭇 달라질 겁니다. 벗님도 그렇게 되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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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잘 본다’는 것은 자기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믿는 오만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1-11.35-41)
♣이 단락의 마지막 이르러, 예수님은 놀랄 만한 말씀을 하신다. 진짜 눈먼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아주 잘 본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받지 못하는 유일한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마르 3,29 참조) 이것은 어쩌면 복음서에서 ‘잘 본다’고 하는 표현처럼 자기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에 ‘모든 것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는 오만이다. 이 때문에 구원이 도달할 수 없는 상태고(눈먼 소경에서 치유될 수 없는 상태로), 구원되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아가게 된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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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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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6,2)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 몇 사람이 지적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을 수 없었던 빵을 먹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몹시 굶주린 상태였다고 생각됩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하느님 창조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쉼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내일을 위해 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고, 또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쉼과 사랑이 안식일에 본질이고,
안식일에 참된 의미입니다.
율법을 위해 세부적으로 만들어 놓은 또 다른 규정들은 항상 이 본질과 참된 의미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굶주린 이들에게 필요한 쉼과 사랑은 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중한 밥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율법이라는 규정이 이 쉼과 사랑이라는 본질 위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랑이 곧 안식일의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10)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나의 행위로써 그 사랑을 완성하도록 합시다!
나의 안식일은 어떤지요?
쉼과 사랑이 넘치는 주일인지요?
"도전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기쁨과 담대함과 희망찬 투신을 포기하지 맙시다! 선교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복음의 기쁨', 10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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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트집>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ᆢ'
예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심을
느끼는 사람은 트집을 잡지도 않을뿐더러
넓은 마음으로 좋게 보는 눈을 지녀서
무슨 이유가 있겠지ᆢ 생각합니다
마음이 꼬여있으면 이해하고 넘어갈것도
걸고 넘어지게 되니 서로가 부딪기고
쓸데없이 힘빼게 됩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위해 들추면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트집잡는 이유가 뭔지 내 자신을 살펴본다면
대부분 입을 다물게 됩니다
나는 밀이삭 뜯어먹지 않았다고 하여
뜯어먹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은 남들이 모르게 완전히 감춘것처럼 착각하는 미숙아같은 행동입니다
'트집잡다가 나쁜 습성에 젖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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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 5)
예수님을 통해
쉬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안식일 통해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안식일의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소중한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건네주십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교체되거나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한 인격을
일깨워주십니다.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예수님 자체가
안식일의 주인임을
믿습니다.
다치고 아픈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안식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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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1-5)
안식일은 하느님과 이웃, 우리자신을 사랑하는 거룩한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기초는 비난을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딸들을 우리가 비난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이끌어 가시고 삶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이웃 형제들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 먼저 우리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거룩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결코 이웃을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 사랑을 과거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에 적용하는 가장 살아있는 사랑입니다.
안식일이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위해서는 먼저 살아계신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안식일을 참되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넘어서야 안식일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용서로 안식일을 완성하십니다.
우리 또한 안식일에 갇혀있는 안식일의 자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확장시켜 나가시고 풍요롭게 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비난을 멈추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듯이 사랑으로 이웃과 형제들을 바라보는 거룩한 날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안식일은 하느님 사랑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비난을 멈추고 사랑할 힘을 되찾는 겸손한 안식의 시간이 되시기를 또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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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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