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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42장1~17절
제목 :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새롭게 깨달은 욥은 하나님께 공손하게 답변하면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고, 욥에게 번제를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욥은 온전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1. 욥의 둘째 응답(1~6절)
“[1]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1) 욥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1절)
“[1]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자기의 순전성과 의로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던 욥의 발언은 31:40에서 끝이 났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으려는 변화가 있었습니다(40:4,5).
그러나 이제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로 여호와께 조심스럽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2) 주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시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습니다(2절)
“[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 욥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행사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완벽하게 증명하신 것을 즉각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처럼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변론의 내용을 수긍하고 있는 것입니다(Hartley).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계획'에 해당하는
'메지마'는 '고안하다', '고려하다', '계획하다', '생각하다' 등의 '자맘'에서 파생된 명사로 '계획', '목적', '의도'란 뜻입니다(렘 23:20).
그리고 '못 이루다'는 '끊어 버리다', '불가능하게 하다', '잘라내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계획과 행사는 어떠한 것이라고 끊거나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며, 계획하신 것을 완전하게 실행하십니다(시 33:6-11).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한편,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지적인 인식 이상의 것으로 '직접 체험하여 깨닫게 된 사실을 영혼 깊숙이 받아들여 앎'을 의미합니다.
3) 욥은 스스로를 책망합니다(3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 38:2에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을 상기함으로써 욥은 이제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여기서 '이치'에 해당하는 '에차'는 '충고', '조언' 또는 '계획'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본절은 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들에 대해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이해함으로써,
무식하게도 하나님의 계획과 충고를 가리웠던 사실을 질책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깨닫다'의 '빈'은 '이해하다', '숙고하다', '민첩하다'란 뜻으로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나 지각력을 통해 어떤 원리나 본질을 납득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에 해당하는 '니플라오트'는 '놀랍다', '기이하다', '경이롭다'의 뜻을 지닌 '파라'의 파생형으로 하나님의 기이하신 역사를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 놀라움을 가지고 있었던 욥은
이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도 기이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떠들었던 친구들과의 대화가 얼
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가를 뉘우칩니다.
이와 같이 욥의 반응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였는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가 인지하였음을 반증합니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가르쳐 주십시오(4절)
“[4]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은 전에 자신이 하나님께 묻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답을 해달라고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13:22).
그때에는 하나님의 행사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가 의롭다는 전제하에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답변을 청원합니다.
즉 종교적 욕구나 전통적인 관념에 의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대화 속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질문합니다.
이는 자기의 확신을 단언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친구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더욱더 깨닫기 위한 겸손한 요청이며,
훈계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Delitzsch, Henry).
한편, 본절은 38:3과 40:7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이는 욥이 하나님의 도전에 대해 반항적인 자세나 변명의 태도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진정 겸비한 마음으로 청원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계획과 의로우신 행사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기도 합니다.
5)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절)
“[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직역하면 '내 귀에 들린 소식(평판)에 의하여'입니다.
즉, 지금가지는 종교적 전통이나 조상들의 가르침 등의 외적인 요인으로써만 주께 대한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불완전하고 관념적이며 가상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친구들의 주장에 쉽게 동조할 수 없었고,
더욱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불의한 면이 있다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24,31장).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하여 그의 영광과 능력과 권세가 어떠한 것인가를 피부 깊숙이 깨닫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욥의 영안이 열리고,
그분의 위대한 주권과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새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19:25-27에서 자신의 순전성과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직접 만나볼 것을 소망했던 욥으로서는,
지금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그분을 체험하고 인지한 이상,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참으로 욥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시25:14,15;123:1,2;141:8).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니다(6절)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순전성을 고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던 욥의 과거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 '티끌'(아파르)은 '먼지'나 '흙'을 가리키며, '재'(에페르)는 타버리고 남은 찌꺼기를 뜻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슬픔과 비하를 나타내기 위하여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는 전통적 습관이 있었습니다(에 4:1;사 58:5).
그런데 여기서 욥이 이처럼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의 표시로 크게 애통하여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다'의 '나함'은 '위로', '슬픔', '뉘우치다'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진실로 뉘우쳐 회개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곧 욥의 비탄과 그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전격적인 변화를 시사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껄였던 지난 과오를 깊이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2. 친구들에 대한 판결(7~9절)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에게 노합니다(7절)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 즉, '욥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38장에서 41장까지의 말씀을 하신 후에'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욥의 청원을 듣고 그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다음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 '노하다'는 '분노하다', '화를 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후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아마도 엘리후의 연설이 중대한 실수를 범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의 연설이 세 친구들이 변론했던 주제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Hartley).
한편, 욥의 세 친구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엘리바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가 세 친구들의 지도자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
본벌에 나타난 욥의 변론이 '정당하다'는 말은,
고통이 항상 죄로 말미암는다는 친구들의 인과 응보식 사상을 부인하고,
자신의 무죄성을 끝까지 고수한 욥이 옳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의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가리운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3절).
이와는 반대로 친구들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방어한다는 핑계로 자기들의 신학적인 지식과 견문으로 욥을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강조한 나머지 주관적인 진실을 외면한 처사였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욥을 위로 하기는 커녕, 고통 받는 이유만을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짐으로써 욥에게 상처만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자신들의 짧은 신학적 지식을 변호하기 위해 고난 받는 자의 처지를 비난하는 경건한 위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이지,
종교적인 아집과 신학적인 위선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본절과 8절에서 욥을 가리켜 '내 종'(아베디)이라고 거듭하여 부른 것은 하나님과 욥과의 결속된 관계를 보여줍니다(1:8;2:3).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2)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8절)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욥이 소망하였던 바대로(16:21;23:7;31:35-37)
-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3: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31:35~37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그와 친구들 사이를 판결하였습니다.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 이러한 희생 제물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값비싼 것으로 사료되는데(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참조), 이는 사태의 심각성과 희생 의식의 중대함을 나타내 줍니다(민 23:1,14,29;28:11,19;대하 29:21).
그런데 매우 역설적으로 본문은 욥이 자기 자녀들의 속죄를 위하여 '번제'(올라)를 드렸던 것처럼(1:5) 친구들도 똑같이 희생 의식을 치르어야 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 이는 친구들의 교만을 꺾어 낮추시고, 그들이 비난했던 욥과 먼저 화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 종 욥이...기도할 것인즉 - 즉, 욥이 하나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대제사장적인 임무를 맡아 중재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임명된 제사장으로서가 아니라, 족장의 자격으로서 일을 수행하는 것인 듯합니다(Hartley).
한편, 이러한 욥의 중보는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고 신뢰하신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 원어를 직역하면 '내가 그의 얼굴을 들어올리리라'입니다.
즉, 욥의 전인격을 용납하고 그로 인하여 기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의인의 중보적인 행위는 확실한 효력을 갖게 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 20:7;민 21:7;삼상 7:5).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 원어의 뜻은 오히려
'너희와 같이 어리석게 다루지 않겠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리석게'에 해당하는 '네바라'는 이미 욥의 아내에게 적용되었던 말로(2:10), 친구들의 무정함과 분별없는 비난을 간접적으로 드려내 줍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판단이 어리석고 무정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과 똑같이 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용납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3)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9절)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친구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였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비난과 변론들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의로움을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1:8;2:3,6).
이 같은 본절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한편, 혹자는 욥의 고난과 그의 중재적인 역할이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 되었다고 말함(Rawlinson)으로써 본서에서 기독론의 암시를 발견하려 합니다.
3. 욥의 회복(10~17절)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1)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10절)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 비록 친구들이 욥의 고통과 처지를 비난하고 험담하였을지라도 욥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욥에게 있어서는 절정의 대목이며 영광스러운 전환점이 되는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 '곤경'은 '추방', '포로', '사로잡힘'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절은 '돌아가다', '취소하다'란 뜻을 지닌 '슈브'와 함께,
욥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 이것은 고난을 끝까지 견디어 내고 참았던 인내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욥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용납하셔서 그에게 풍족하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자유로우심을 증거 합니다.
2) 그들은 욥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을 축하하였습니다(11절)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 빈곤과 중병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외면하고 떠나갔던 형제, 친척, 친구들(19:13-22)은 이제 다시 욥의 주위에 예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욥과 함께 식사를 하며 새로운 친분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은 어쩌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아첨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고 원망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납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용납하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본절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보다도 욥이 예전과 같이 회복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 그들은 욥에게 닥쳤던 고통을 생각하고 뒤늦게나마 슬픔을 같이 나누며 욥을 위로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실된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지만, 여하튼 그들은 욥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을 축하하였습니다.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 그들은 욥과의 우정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욥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케시타'는 구약의 족장 시대에만 나타나는 돈의 무게 단위로서,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으나 세겔보다 더 값진 것으로 알려집니다(창 33:19;수 24:32).
한편 '금고리'는 고대 근동에서 귀(창 35:4;출 32:3;삿 8:24), 또는 코(창 24:47;사 3:21)에 걸고 다니는 장식품이었는데, 이러한 물건을 욥에게 주었다는 것은 욥과의 신뢰 관계를 예전처럼 다시 회복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3)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습니다(12절)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 욥의 고통이 끝나고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된 '인생의 황혼기'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전에 받았던 축복을 회복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욥의 인내에 대한 상급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성취에 따른 자비와 은혜의 결과입니다.
한편 이러한 욥에 대한 번영의 축복은 엘리바스(5:18-26)와,
빌닷(8:7,20-22)과, 소발(11:15-19)에 의해 예고된 바 있었습니다.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
욥이 가진 모든 소유는 처음 것(1:3)보다 두 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갑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완전하고 풍부하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께서 욥을 온전히 용납하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4)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13절)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부(富)와 명예에 그치지 않고 자손들의 번성에까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욥의 자녀들의 숫자는 그의 다른 소유들처럼 두 배가 되지는 않았습니다(1:2).
아마 이것은 인생의 가치가 다른 재산들보다 더 크고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죽었던 욥의 처음 자녀들도 그의 소유로 인정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처음 열 자녀는 내세에, 두 번째 얻은 열 자녀는 현세에 욥의 소유로 계수된다는 의미입니다(Henry).
이처럼 죽은 자녀들도 소유로 생각하는 히브리 사상에 따르면,
욥은 자녀에 있어서도 두 배의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삼하 12:23).
한편, 두 번째로 얻은 자녀는 누구에게서 낳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5) 세 딸의 이름입니다(14절)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욥의 일곱 아들들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반면에, 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딸들의 이름은 고대 근동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으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첫째 딸은 여미마라 -'여미마'는 비둘기의 일종인 이집트의 '호도애' (turtledove)을 뜻합니다.
비둘기는 애정어린 사랑과 순결, 헌신의 상징으로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새입니다.
그런데, 첫째 딸을 이렇게 부른 것은 그녀의 눈이 비둘기의 눈과 같이 생겨서인 듯합니다.
한편,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여미마'를 '욤'(날)과 관련시켜 그 이름을 '낮'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매튜 헨리(M.Henry)는 이 이름이 고통의 캄캄한 밤이 지나고 형통의 빛이 비취게 된 욥의 변화된 축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둘째 딸은 긋시아라 - '긋시아'(케치아)는 종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계피나무의 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나타냅니다(출 30:24;7:17).
그런데 델리취(Delitzsch)는 그녀에게서 계피향의 냄새가 풍기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 같다고 합니다.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 '게렌합북'(케렌 하푸크)은 '물감의뿔'(a horn of paint)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물감'은 안티몬(Antimony) 가루로 만든 화장품으로 여성들이 눈썹이나 눈꺼풀을 칠할 때 사용하는 분을 가리킵니다(왕하 9:30;렘 4:30).
그리고 '뿔'은 이러한 분가루를 담는 통으로 여겨집니다(삼상 16:1;왕상 1:39).
따라서 이 이름은 눈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눈 화장과 연관된 이름임을 추측케 합니다.
이와 같이 욥의 세 딸들은 각기 특유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6) 딸들에게도 아들처럼 기업을 주었습니다(15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욥의 딸들의 아름다움은 온 땅위의 백성들에게 소문이 났습니다.
이러한 딸들의 아름다움은 욥을 기쁘게 하였을 것이며,
욥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축복을 상기시켜 주는 요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편, 딸들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갑절로 받은 재물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새롭게 변화된 욥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
유대인의 딸들에게는 아들이 없는 경우에만 유산이 상속되거나 분배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민 27:1-11;36:1-13).
따라서 본 절처럼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이 딸들에게도 분배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특징적인 사실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을 이스라엘보다는 아랍의 풍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고, 욥기의 저자가 모세 이전 시대에 대한 역사를 쓰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이것이 욥기 당시의 족장 사회에 있어서 여성의 향상된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아무튼 본절은 욥이 아버지로서 갖는 딸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풍부한 소유를 증거하는 것으로 사료되는 듯합니다.
한편, 이 같은 유산의 분배는 아마 딸들이 시집갈 때에 결혼 지참금의 명목으로 주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1:4).
7)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16절)
욥이 일백 사십 년을 살며 - 70인역(LXX)에는 '그의 시련이 있은 후에 170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는 모두 240(또는 248)년을 향유하였다'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욥이 고난당할 때의 나이는 70세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실제 살았던 삶은 210년이나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하튼 이러한 장수의 축복은 여호와를 섬기는 자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출 23:25,26).
그리고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징계와 경책을 업신여기지 않고 순종하는 자는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5:26).
따라서 욥이 장수하게 된 것은 그의 의로움과 인내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 욥은 장수의 복과 함께 자손의 번성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그 자손들은 욥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시 128:6).
*시128: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8)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17절)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이와 같이 비문을 적은 듯한 글의 형식은 고대의 훌륭한 족장들의 죽음(창 25:8;35:29)과 뛰어난 왕(대상 29:28), 또는 제사장(대하 24 :15)에 대한 언급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서'에 해당하는 '사바'는 '만족하다', '풍부하다', '유복하다', '꽉 차다', '완전하다'라는 뜻으로 욥의 삶이 아주 만족하여 후회 없이 자신의 생애를 완전히 산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욥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계획 가운데 그분의 섭리에 따라 살다가 죽음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꾸짖고, 욥에게 가서 사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7~9절).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과 욥을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과법칙이라는 틀에 하나님을 가두고, 잘못된 잣대로 욥을 판단하는 바람에 의인의 고난을 가중시켰습니다.
혹시 내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 말한 것이 있습니까? 2) 욥을 총체적으로 회복시키십니다(11~17절).
극심한 고난으로 망가진 욥의 전부가 원상 복구됩니다.
먼저 친구들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7~9, 11절).
친구들을 위한 중보기도로 그의 영혼이 회복되고(10절),
경제적으로 두 배의 복을 내리십니다(12절).
가족도 회복됩니다(13~15절).
마지막으로 장수를 누립니다(16~17절).
이 또한 욥의 고난과 신실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까닭 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잠깐 고난당하지만, 결국 회복됩니다.
욥의 결말이 바로 우리의 결말입니다.
복된 결말을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드디어 욥은 회개합니다(1~6절).
욥은 그동안 친구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에 심히 절망했고, 그래서 하나님께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뿐 아니라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입을 다물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실 때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2) 욥은 친구들의 진심 어린 사과에 용서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다(10절).
그들은 사랑하는 친구들이지만, 욥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친구들입니다. 욥의 진정한 회복은 친구를 위한 기도와 용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심으로 고난받는 자를 도우시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아프게 한 친구들을 용서한 욥처럼, 내가 받은 고난으로 나와 같은 고난을 겪는 자를 돕는 또 하나의 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공동체-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질문하는 용기를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열방-전 세계 인구의 77%는 은행 계좌가 없으며, 20억 명은 정규 금융기관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소액 금융(microfinance)과 금융기관 확대를 통해 많은 이들의 삶이 개선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