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구를 즐긴 정종
“내가 무관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격구 놀이를 하여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이다.”(『정종실록』1399년 3월 13일)
이 말은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 대사헌에게 격구를 즐기는 이유를 설명한 내용이다. 궁중의 놀이나 문화는 국왕이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관람자로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격구는 달랐다. “전하께서 격구를 낙으로 삼으신다.”는 지적을 들을 만큼 격구를 좋아한 정종은 수시로 궁궐 뜰에서 격구를 했다. 정종은 어느 때에는 이틀 연달아 격구를 하기도 하였다. 격구는 오늘날 폴로 경기와 유사한 스포츠로서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막대기로 공을 쳐서 상대방 구문에 넣는 경기였다. 고려시대 대문장가인 이규보가 “세상에 좋기로 격구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고 했을 만큼 격구는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왕실의 사랑을 받던 스포츠였다.
태종도 격구를 즐겼다. 태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던 정종이나 종친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면서 격구를 했다. 어느 날은 격구를 하면서 내기를 걸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잔치를 벌이면서 격구를 하다가 잔치의 흥이 고조되면 함께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태종이 격구를 즐긴 이유는 정종에 대한 배려이자 종친의 담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매개체였다고 할 수 있다. 격구에는 걸어서 하는 경기도 있었다. 세종 대에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데 넓은 마당 여기저기에 구멍을 파놓고 걸어 다니면서 그 구멍에 공을 쳐서 집어넣는 경기였다. 오늘날 골프와 유사한 이 경기는 무릎을 꿇거나 서서 봉으로 공을 쳤는데 규칙이 대단히 복잡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왕들이 여가로 즐기던 격구도 시대의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세종 대에 놀이로서 격구에 대한 신하들의 비판이 높아가자 격구는 점차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으로 탈바꿈되었다. 그 결과 무과武科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고, 이제 국왕들은 격구를 직접 하기보다는 야외에서 군사들의 격구를 구경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조선후기에는 이마저도 실시되지 않았고 무과 과목으로 채택되지도 못했다.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무렵에 격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지적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활쏘기와 투호 시합을 좋아한 성종
투호는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화살과 비슷한 모양의 막대기를 일정한 거리에 놓인 항아리에 집어넣은 경기다. 투호는 이미 『구당서』에 기록되었을 만큼 연원이 깊으며, 고려에서도 궁중 오락으로 사랑받던 놀이였다. 투호 역시 조선 초기에 궁중에서 즐기던 놀이로서 태종이나 세종이 투호를 하거나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성종은 활쏘기와 함께 투호를 궁중 잔치의 흥을 돋우는 놀이로 발전시킨 임금이었다. 성종은 투호가 놀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늘 투호가 마음을 닦는 공부와도 같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성종은 잔치를 열거나 술자리를 마련할 때면 활쏘기나 투호 시합을 열었다. 투호는 활을 잘 쏘지 못한 사람에 대한 배려였다.
농사가 풍년이라는 소식을 들으면 후원으로 정승이나 종친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면서 편을 갈라 투호 시합을 열었다. 투호가 열리는 날에는 해가 저물 때까지 놀았고 어느 때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잔치를 벌이면서 투호를 즐겼다. 또 상품으로 사슴가죽, 각궁, 후추, 어린 말 등을 내놓고 내기를 시켜 이긴 팀에서 상으로 내렸다. 성종은 심지어 종친이나 대신들을 대상으로 한 기영연耆英宴을 잘 치르기 위해 투호절차投壺儀까지 따로 만들었다. 또 대비大比를 위해 잔치를 벌일 때에도 흥을 돋우게 하기 위해 투호나 활쏘기를 하게 하였다. 성종에 대한 후대 평가 가운데 하나가 종친을 위한 잔치를 자주 열어 종친의 화합을 도모했다는 대목이 있다. 태종이 격구를 통해 화합을 이끌어냈다면 성종은 활쏘기나 투호 경기를 통해 종친의 결속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왕실에서 사라진 놀이와 여가
세조는 세자에 대한 교육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세자가 관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운동을 제안했다. 곧 “선왕先王 때부터 겨울이면 격구하고, 여름이면 투호하고, 봄가을이면 활을 쏘았다.”고 하면서 국왕 또는 세자가 관료들과 친밀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격구나 투호, 활쏘기 등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실의 전통은 조선후기가 되면 점차 기록에서 사라지고 있다. 유교적 정치의식이 높아져가는 조선후기에 활쏘기를 제외한 격구나 투호 등은 놀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궁중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왕실에서 임금의 개인 여가나 놀이가 사라지는 대신에 점차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의례화 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예컨대, 조선후기까지 국왕이 공무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행사는 온천 행차뿐이었다. 온천 행차도 임금이 몸이 아프다는 이유가 있어야하며 농번기나 흉년·가뭄 등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좋지 못하면 행차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이 온천 행차마저도 국왕의 사적인 휴식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기위해 공식적으로 의례 화 되어 버렸다. 1915년 순종이 창덕궁에 당구대 2대를 설치해 대신들과 실내스포츠를 즐겼다거나,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국왕의 취향이나 여가활동이 공식적인 의례에서 벗어나 개인의 취향이나 여가로 인정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글·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연합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