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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25회 '459장의 그림지도는 보물지도였다' (1999.04.24.)
25회 : 459장의 그림지도는 보물지도였다
459장의 그림지도는 보물지도였다
방송일: 19990424 조회수 : 3557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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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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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후 조선흑백그림
조선시대 마을과 사람들의 생활은 어땟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개항후 조선의 모습을 찍은 흑백사진뿐이다.
# 지도보관실 들어가는
내부 TR 지도보이면 STILL 그러나 규장각엔 개항전 조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컬러그림이 존재하고 있다.
약 130년전 제작된 459장의 그림지도. 수많은 비밀들이 담겨 있는 보물지도다.
# 전국지도+고지도 CG 459장의 보물지도는 경기도에서 북한 ,
제주도까지 내고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개항전 조선을 이해하는 블랙박스라 불리는 459장의 보물지도.
그속엔 무엇이 그려져 있으며, 숨겨진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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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 최초공개! 459장의 보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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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 8도 군현지도 깔려있고
MC 중앙에 서 있다.
우리는 흔히 지도하면 김정호를 떠올립니다.
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요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과학적이고 현대적입니다.
그런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못지않은 지도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도들인데요. 우리에겐 더 없이 소중한 보물지돕니다.
# MC 천천히 Z.O
어떻습니까?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지도를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조선시대 만들어진 지도라곤 믿기지 않을 정돈데요.
요즘 관광안내지도나 문화지도처럼 그림으로 표현돼 있어서 보기도 쉽고, 전국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 그림지도들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탄생한지 10년쯤 후인 1872년,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만들어졌는데요.
그 수가 무려 459장이나 됩니다.
각 고을마다 제작된 이런 지도를 군현지도라고 합니다.
군현지도는 조선전기부터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세히 그려진 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게다가 400여장의 군현지도는 특이하게도 각 고을마다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 전라도 광주,경기도 연천지도
떨어져 나와 MC 옆에 선다.
이 지도를 한번 보시죠. 전라도 광주지돈데요. 예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주 잘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도 연천지도는 광주지도와는 전혀 다른 분위깁니다.
# 지도들 MC옆에 병풍처럼 둘러선다
이처럼 400여장의 그림지도들은 색깔이나 표현방식, 담겨진 내용이 각양각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방의 개성과 그곳 사람들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지도라기 보다는 개항전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기록 필름인 셈이죠.
# 충청도 연산지도 나오고
솥으로 ZI
그럼, 지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죠.
충청도 연산입니다.
이곳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표현돼 있습니다.
하천가를 한번 보시죠. 둥근 모습으로 그려진 게 있는데 이게 뭘까요?
이건 바로 가마솥입니다.
그런데 가마솥에 왜 하천가에 놓여져 있는 걸까요? 가마솥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충청도 연산으로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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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 1. - 그림지도는 보물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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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전경
미륵불 보이고 하천변에 그려진 가마솥은 현재 충청도 개태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태사를 가봤다.
# 주지와 솥보고 있는 모습
솥 타이트 그곳에 정말 솥이 있었다.
그것도 전각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하천가에 그려진 가마솥은 원래 개태사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 지도->주지 INT(-솥은 당시 고려태조가 대중공양을 위해 만든것인데.... T 3. 063140
주지+ PD 2S, 주지 INT - 왜 깨어졌나? T3. 063700)
# 연천 솥 지도
크기 줄자로 재보는
지도상에 가마솥은 7파로 표시돼 있다. 실제로 어느정도인지 크기를 재봤다.
7파면 11M 정도인데 솥의 크기는 9M 20CM로 비교적 정확했다.
# 대흥군지도
태항아리 부분 대흥군 지도다. 항아리 모양으로 그려진 태실이 눈에 띈다. 크기를 달리해 위계까지
나타내고 있다.
# 지도보며 현종, 옹주 태실
확인하는 3S
태항아리, 뚜껑 태실은 대흥군에 실제로 보존돼 있었다.
현종태실과 옹주태실을 확인할 수 있고.
그런데 지도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고려태실은 보이지 않았다.
고려태실의 존재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유일하게 여지도서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 여지도서 여지도서엔 고려태실이 읍치 13리에 있다고
쓰여져 있다. 그런데 비문이 낡아 알아 볼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그때도 알 수 없었던 고려태실의
모습이 지도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 동사무소 확인하는 모습 고려태실이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동사무소에서 위치를 확인했지만 찾기가 어려웠다.
# 호수가, 봉고차서고
할머니 만나는 우리는 태봉산근처 동네에서 고려태실 위치는 안다는 할머니는 만날 수 있었다.
# 할머니 INT(-T 3. 비석이 거꾸러져 있다. 061700)
# 할머니와 산오르는 모습 할머니를 따라 태봉산을 올랐다.
도착하자 할머니 effect ' 저기 바탕 있잖아.키가 요만했어 , 갓쓰고..'
비석기단 산 중턱에 고려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석기단이 있었다.
그러면 태항아리는 어디갔을까?
# 관계자 INT (-T3. 062300 비석은 공사를 할 때 떨어져 묻혔는지... 그전에 태항아리는 없어진 것으로 보이고.
군에서도 몰랐죠? 이런 것은 처음본다)
# 비석기단+지도 고려태실 부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채 방치됐던 고려태실.
지도를 통해 그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 태안지도 굴포부분
태안지도에도 특이한 것이 그려져 있다.
굴포, 점선으로 그어진 표시가 있다. 무엇일까?
# 굴포운하 FS
PD와 정우영 운하흔적확인하는
지도에 나타나 있는 것은 굴포지역에 있는 운하표시였다.
정우영 INT(-T 1.051809 이것을 굴착하게 된 것은 태안 굴포지역을 뚫어 세곡을
운반하려다 실패해 할 수 없이 단축하기 위해 뚫어...)
# 물들어오는 CG+
지도위에 운하만들어지는 CG
운하는 세곡운반선이 침몰하는 사례가 빈번해
1134년 고려시대부터 뚫기 시작.
그후 500년에 걸쳐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한 사실이 지도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 도랑걸어가는 ,신털이봉가리키는 운하를 판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있었다.
effect ' 운하 때문에 양쪽에 개울이 생긴거다. 윗봉우리가 신털이 봉, 신발을 털었던 것이다.'
신털이봉은 지금도 땅을 파면 흙만나온다고 한다.
# 운하흔적FS->논으로 운하운하 파는데는 3천여명의 군졸이 동원됐는데 이 논까지 700m 파다가 중단됐다.
# 지도안면도부분
안면도 붙었다 떨어지는 실사 CG
운하공사가 불가능해지자 육지였던 안면도를 굴착해 섬으로 만들었다.
안면도가 섬이 된 이유가 지도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 양보경 INT(T.4-이 지도는 예전의 국토모습을 복원한다든가... 06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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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안면도 지도 깔려있고
MC 안면도 근처에 서 있다.
새로운 사실들과 특이한 사연들을 담고 있는 그림지도.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459장의 보물지도중에도 특별히 눈길을 끄는 지도가 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 안면도 바다위에서 남원지도
솟아 오른다.
전라도 남원지돈데요.
400여장 지도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담겨진 내용도 어느지도보다 상세하고 풍부한데요. 지도가 아니라 한폭의 산수화 같습니다.
# 남원지도옆에 위 ,아래로
진경산수화 천천히 흘러내린다.
지도가 이렇게 산수화처럼 그려진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엔 보이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하고 있었는데요.
군현지도 제작을 맡았던 화원이나 관리들도 이런 화풍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 남원지도중에 읍성부분 빠졌다가
다시 들어간다.
지도가 얼마나 산수화와 비슷한지, 이렇게 지도속 건물들이 빠지면
산수화가 되고 다시 건물들이 들어가면 지도가 될 정돕니다.
# 남원지도 ZI
그러니까 바로 이 읍성이 산수화와 그림지도를 구별해 주는 부분인데요.
읍성은 중앙에 이렇게 크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지도에 그려진 읍성이 마치 활짝 핀 꽃의 꽃술같죠.
바로 이 꽃술속에 조선읍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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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 2. - 읍성의 위치와 건물 배치는 주민편의 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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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대 작업실들어가는
임동일, 지도와 지형도보고
지도에 표시하는 읍성의 크기는 어느정도일까?
백제대 임동일 현재지도와 고지도 비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임동일 INT(T12.112414 남원이 고지도에 어떻게 표시됐는지... )
# 헬기 S(또는 시가지 부감)
임동일,관계자 지도보면서 가리키고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현장확인이 중요하다.
effect+가리키는 전경들 보여주고
' 동문터는 ... 파란색 교회건물 거기가
남문자리다...
관계자서있고,임동일 사진찍는 현재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그 위치를 확인하고
# 헬기 S
+ 동서남북문 위치표시, 성곽테두리 발생
+ 남원지도
과거읍성 동문, 서문,남문, 북문은 여기 쯤에 서 있었는데 사라진 상태. 성곽은 모두 도로로 변했다.
읍성 건물들도 모두 없어지고 약간의 흔적들만 남은상태다.
# 용성초등학교 정문->건물 용성초등학교엔 객사건물 기단이 남아있다.
돌계단 확인하는 3S, 현장 effect ' 용성관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이용한다.
저기 다 모아놨다'
# 3명 걸어가는, 현장 effect ' 어떻게 있는 건가? 땅속에 파묻혀 있던 것.
나중에 복원하면 쓸거다'
돌무더기 앞에서 돌들 보는
석재들 운동장 한쪽에 객사 석재들 이렇게 모아져 있어 이곳이 객사였음을 나타내고.
# 백제대 밤 외경
임동일 고지도보고 지형도에 표시하는 지형도 , 고지도 완성된 모습 현장 확인이 끝나 지형도에 표시,
남원고지도가 지형도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 지도배경으로 임동일 INT(T 17. 140428 고지도를 보면 남북간의 거리에 비해 동서간의 거리가 길다.....)
# 고지도읍성->지형도읍성비교 고지도엔 중앙에 크게 그려졌던 읍성이
현재지도에 옮겨보니 실지로는 아주 작다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 임동일 ,PD 모니터보고 있는 2S 다른 곳도 그런지, 남원과 동일한 작업을
effect 거친 읍성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해 봤다.
' 어디지도인가?.요 부분이 읍성,
굉장히 작네? 네.
# 모니터 ' 남원지도와 어떤 점에서 비슷?
기본적으로 읍성이 중심화면에 강조'
해미읍성의 경우도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해미읍성건물들보이고
동헌건물 해미읍성의 경우 복원중에 있어 읍성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동헌은 이미 복원됐고....
객사터 객사터, 내아 복원예정이라고 한다.
현장 INT(- T1.054336 중요한 자료로 쓰고 있다)
# 해미지도 복원되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크기는 이렇게 크지 않을 거다. 실제 해미읍성은 둘레가 * 척인데
그런데 지도에는 *배나 크게 그려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읍성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 심정보 INT(T12-1. 고지도상에 보면 읍성은 항상.... 110146)
# 남원읍성과 각마을간의 거리 CG 읍성이 주민편의를 위해 각마을과 거리가
고려돼 위치했다는 것은 남원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3,40리 거리에 마을이 있고, 읍성을 하루만에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일일생활권내에 읍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동국여지승람태인편 읍성배치에 있어 주민들의 편의가 중요한
관건이었다는 사실은 동국여지승람 태인편에서도 잘나타나 있다. 여기엔 읍성이 너무 한쪽에 치우쳐 주민들
왕래가 불편하다고 쓰여져 있다.
# 천안지도
홍살문있는 서쪽객사
남쪽부분 위치뿐 아니라 읍성내 건물배치도 주민편의에 따라 배치됐는데 그같은 사실은 관아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진 천안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쪽에 객사, 동헌이 위치하고 주민들 드나들기 쉬운 남쪽, 바깥쪽으로 주민 행정담당하는 행정청들이 위치
했다.
# 나주옥,광주옥,구례현옥
지도엔 옥도 표시돼 있는데 옥은 읍성밖에 있는 것도 있고 안에도 위치.
관아나 일반인들 거주지와는 확실히 분리된 곳에 만들어졌다.
# 헬기 S +남원복원CG 이처럼 관아건물들이 주민편의에 의해 배치됐다
는 사실은 남원의 관아건물들을 통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도로,하천있는 남문->
보민청, 연호청 튀어나오고 광한루, 오작교 있고... 도로, 하천있어
교통편리. 사람들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
이용하기 편한 곳인 남문 가까이 보민청과
연호청 위치. 보민청은 지방민들 구제기관,
연호청은 부역을 담당, 관리하던 기관.
# 보민청, 연호청 뒤에
작청 나타나고
그뒤에 작청 위치, 작청은 향리근무처로 백성들 많이 들락날락하는 곳.
# 북문쪽에 향청 유지,선비들의 자문기관인 향청도 북문가까이
설치.
# 임동일 INT( T 13. - 112837 흔히 조선의 읍성이라면... )
# 남원지도 복원 CG 백성들의 편의가 고려된 읍성. 그 모습을
복원해 봤다.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도를 통해 조선의 읍성이 약130년전 이미 계획된 도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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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 복원된 남원남문에서
MC걸어나온다.
이렇게 조선의 읍성이 지배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과 행정편의에 맞춰 계획된 도시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당시 백성들이 단순히 통치의 대상만은 아니었던 것이죠.
# 광한루 실사배경으로
MC오작교 다리위를 거닌다.
물위에 오작교 , 광한루 흐릿하게 나타나고
제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광한루앞에 있는 오작굡니다.
광한루 , 오작교하면 춘향의 정절과 함께 남원의 상징인데요.
당시 사람들도 이곳을 중요하게 여겼던지 지도에 이렇게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 동림부분 흐릿하게 나타나고
동림글자 확대됐다 들어간다.
광한루 옆엔 울창한 숲도 보입니다. 동림, 동쪽에 있는 숲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줄기와 가지까지 나무들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얼핏보기엔 평범한 숲같은데 왜 이렇게 눈에 띄게 그려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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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 3. 광한루 앞 東林은 인공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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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헬기 S
광한루 , 오작교 모습
광한루앞에 있던 동림을 찾아봤다.
하지만 동림은 없었다. 그나마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동림교 TR 광한루앞에 있는 다리 이름이 동림교였다.
동림곱창,사거리 도로 끝에 사거리엔 동림곱창집도 있다.
# 하천부감
이석홍 INT(T 18. 현재 여기 제방하고 도로에서 광한루까지... 남아있다142259)
# 헬기 S(교룡산,백공산부분)
기 흐름보충 CG 동림은 기를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진 인공림이었다.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고 허한기를 보충해 준다는 의미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 남원지도(선원사,만복사부분)
비보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숲뿐 아니었다.
인위적인 건축물을 만들기도 했다. 주산인 백공산이 산세가 약하고 손님산인 교룡산이 기가세다고 봤다.
그래서 주산의 기를 북돋기 위해 시내에 선원사라는 절을 짓고 교룡산이 끝나는 기린봉자락에 만복사를
지었다.
# 헬기 S
조산밭,돌무더기 이처럼 남원의 기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산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같은 비보들은 단순히 풍수지리적인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 이석홍 INT (T15. 123624 바람을 막아주고.. 방비시설로 활용..)
# 남원지도 동림부분
하천부감,물그림자 나무들 보이고
동림도 마찬가지였다. 풍수지리적인 것보다는 하천범람을 막기위한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양보경 INT(T4. 지도에 잘나타나는 현상중에 하나가 임수, 인공림이다. .. 그건명분이고 ...
정서를 좋게하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 용궁리 들어가는 임수의 다양한 기능은 남원 용궁리에서도
숲 보고 확인할 수 있다.
이석홍 INT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바람을 막기위한,,, T 15. 125207)
용궁리 숲 숲은 이처럼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용됐던 것이다.
# 임수사진
함양 숲
제주도 뽕나무 자생림
남해 물건 방조림(물건 방조어부림)
임수는 전국적으로 존재, 기능도 가지가지였다.
홍수방치, 풍치, 어족자원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었다.
# 임경빈 INT(T19. 144011/ 145730 임수의 종류)
# 남원지도 동림 임수는 기능에 따라 수종이 달랐다.
남원은 어떤 나무였을까?
# 용성지찾는 용성지에 쓰여있는 시에는 버드나무라고 돼
있는데...
# 임목육종연구소
임경빈 지도보는 , 현장 effect 임목육종연구소를 찾아가 확인해 봤다.
' 버드나무다.
# 조선총독부자료 전국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자료
임수,나무종류 기록돼 있는데 남원 광한루앞 버드나무라고 쓰여있다.
# 일제시대 사진 사진도 실려 있어 이때 까지 버드나무 숲이
일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임경빈 INT(T 19. 144926 임수의 기능을 하려면 나무의 성질이 오래 살아야 하고...)
# 남원동림 지도
+ 헬기그림에서 숲생기는 CG 남원의 동림뿐 아니라 현재 많은 임수들이
사라졌는데...그림지도는 조상들의 과학적인 환경의식이 담겨 있는 임수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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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복원된 동림앞에서
MC 버드나무 잎 따고
조선시대 숲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자연을 해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이죠.
광한루옆 버드나무엔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멋이 담겨 있습니다.
# 동림지도속으로 사라지고
남원지도 바닥에 생긴다.
사직단, 여단, 서낭당 글자 함께 일어나 MC옆으로 서고
지도엔 이런 신기한 숲뿐 아니라 새로운 사실들이 많습니다.
우선 여기 사직단이 보입니다.
사직단은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인데요. 농업이 중심이었던 당시에 사직단은 국가가 관리하는 성스러운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사직단 주변엔 특이한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여단과 서낭당입니다.
이 건물들은 이 지도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인데요. 여단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을 제사지내는 곳이었고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시는 곳이었습니다.
조선전기엔 수령들이 이런 민간신앙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기부터는 국가가 직접 이런 건물들을 지어 백성들이 민간신앙을 모실 수 있게 했습니다.
민간신앙을 억압하기보다는 국가차원에서 흡수해 하나의 통치논리로 이용했던 것이죠.
지도 곳곳에 그려진 여단과 서낭당은 이같은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일어선 것들 다시 붙고
MC시장을 찾아 다닌다.
이처럼 400여장의 그림지도엔 조선후기의 변화된 사회상이 그대로 기록돼 있습니다.
경제적인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시장입니다.
시장이 이렇게 지도에 표시된 것은 처음인데요. 남원의 경우 시장이 읍성안에도 있었고, 성밖에도 섰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이렇게 시골 구석구석까지 존재했습니다.
당시 장풍경은 어땠는지 장터로 나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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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 4. - 지도에 최초로 시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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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장거리
물건사고파는 모습 * 장. 5일장으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장이다. 이 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됐다.
# 아저씨 INT(T 16. 132613 조선시대 제일 유명한 장으로 알고 있으며 광한루 부근에
있다가 70년대 옮겨졌다)
# 남원지도 광한루앞장
옮겨진 곳 현재 이 부근에 위치한 * 장은 원래 광한루 앞에 있던 장인 것이다.
지도에는 이곳 말고도 곳곳에 시장이 표시돼 있다.
# 용성지기록 용성지에는 당시 남원에서 유명했던
시장과 개시일이 기록돼 있다. 당시 시장은 수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 증가했는데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할 정도였다.
# 김대길 INT(T20. 151507 이전에는 3일 8일에 개설되던 장시가 읍치를 중심으로..
각 장마다 개시일을 달리해 하나의 시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 광주지도,해미지도,익산지도등
시장 부분 이같은 사실을 남원뿐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는데 지도에는 이같은 사실이 정확하게
표현돼 있다.
# 남원장시부근도로+지형도 CG 시장의 발달은 도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지도에는 각 도로들이 상세하게 표시돼 있다.
# 남원지도 동문->용궁리 거리표시부분
각 도로에는 거리까지 기록돼 있다. 동문에서 용궁리, 지도에는 23리인데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 도로 TR 용궁리까지 거리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 차안 , 지도보며 얘기하는 2S
effect ' 지금 이길이 그대로인가? 그렇다.
지도 동문을 지나 동문밖 도로를 따라 요천을 건너.. 용궁리 코스.
# 비포장도로 들어서고
용궁리 마을회관앞
차안 얘기나누는 2S
이석홍 effect '지도상으로 23리면 9km인데 미터기는
8.5km나왔다. 그때 수치하고 비슷하다.
# 미터기 8.5km 거리는 비교적 정확했다.
지도 용궁리 거리표시 당시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을까?
# 오상학 INT(T20. 153213 전통시대 거리측정은... 또는 152742 각 마을까지 거리가 얼마냐
하는 것 은 중요했다...)
# 천안지도 점 표시 도로의 발달과 함께 도로 곳곳엔
점이라는 새로운 숙박시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안지도엔 도로 중간중간에 점이 명확하게 표시돼 있다.
# 오상학 INT(T 20. 153255 역원이 있었는데 양난이후 기능을 할 수 없어...
상업적인 기능을 하는 민간 숙박업소다)
# 남원시장
약초사고파는 , 약초가게 도로와 숙박시설이 발달하면서 시장은 더욱 활성화됐다.
일반적인 쌀이나 포목등이 교환되던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상품이 생산, 판매.
남원의 경우 약초가 많이나 유명...
지황보여주는 아저씨 INT(T 16. 지황인데 남원에서 많이 나....)
# 용성지 기록 용성지에는 복령,자황등 당시
판매됐던 물품들이 기록돼 있다.
# 목기장 전시된 목기들
목기만드는 모습 지방의 특산물도 생겼다. 특산물은 도로를 따라 전국적으로 유통됐다.
남원의 경우 목기가 유명해 전국적으로 팔려나갔다.
# 무형문화재 INT(T17. 남원목기.. 임금님 진상.. 전국적으로 유통)
# 구한말 장그림
조선 후기 장은 경제활동만 이뤄지던 곳이 아니었다.
관에서는 전 지역민들이 모이는 장날을 이용해 정부의 전령이나 행정적인 정보들을 알리는 알림장으로 ,
민에게 장은 놀이, 축제의 장이자 정부나 관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항거하는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 김대길 INT(T 20. 152140 장시는 지역민심을 파악하는 장소로... 괘서나 벽서가 나붙는
... 민심의 동향이나 저항의 장으로 활용)
# 남원지도,장,도로 부분
그림지도엔 이렇게 당시의 변화된 경제상황이 담겨 있고. 지도에 이런 것들이 나타날 정도로 민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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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 남원지도 사창에 악센트 주고
남원의 시장을 둘러봤는데 이번엔 지도 주변을 좀 더 살펴보죠.
마을 곳곳에 노란지붕을 한 건물이 있습니다.
시장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졌지만 시장이 아닌데요. 이 초가집은 바로 사창이란 겁니다.
지금의 농협과 같은 기능을 했던 곳이죠.
사창제도는 춘궁기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때면 갚게 해 농민들을 도와주는 제도였는데요.
관에서 운영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사람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됐습니다.
사창제도는 조선시대 몇번의 시행과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대원권 집권기에 다시 실시된 것이었습니다.
자, 지금까지 내륙지방 지도들을 살펴봤는데, 해안지역은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합니다. 해안지도를 한번 보시죠.
# 나주지도 나타난다.
이건 전라도 나주지돕니다.
나주라면 내륙지방인데 어떻게 해안이 그려져 있는지 의아해 하실텐데요.
조선시대 나주는 나주목으로, 현재의 나주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지칭했습니다.
당시 이런 섬들도 나주목에 소속된 땅이였죠.
보시는 것처럼 육지뿐 아니라 각 섬들도 아주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섬들이 하나,둘 , 샛, 넷... 몇 개의 섬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섬 주변엔 읍성에서 이 섬까지의 거리와 바다의 깊이까지 기록돼 있습니다.
# 흑산도, 지도진 지도 펼쳐지고
이뿐만 아닙니다. 중요한 섬들은 이렇게 따로 지도를 하나 더 만들어 놨습니다.
흑산도와 지도진 지돈데요. 카메라로 클로즈 업 해놓은 것을 보는 느낌입니다.
여기 지도진 지도엔 섬 꼭대기에 요망대라는 감시초소(전망대)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부둣가엔
전선이 아주 크고 , 자세하게 보이는데요. 배밑이 평평한 게 전통적인 우리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해안지도들이 이렇게 상세하게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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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 그림지도는 국방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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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조사원
그림지도와 해도 확인하는 모습
고지도(진도 금압진)->해도비교
해안지도가 얼마나 정확하게 그려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해양조사원을 찾았다.
진도 금압진에서 구자도까지 거리가 지도에는 30리로 돼 있는데 , 해도에는 11km라는 결과가 나왔다.
# 황세열 현장 INT(T9. 093739 30리면 12km니까 상당히 정확한 거리다)
# 장도 수심
활세열 해도보면서 설명하는 그렇다면 수심은 어떤가?
대흑산도 앞 장도 수심이 15장이라고 표시돼 있다.
' 지금해도에는 30-60까지 표시돼 있으니
거의 그 범주다.'
# 순천부지도,광주지도
해안지도에는 거리와 수심뿐 아니라 다른것들도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순천부 지도에는 섬들이 자세하고 방파제까지 있다. 광주지도에는 봉수와 연결관계가 설명까지 쓰여있다.
해안지도들이 이렇게 자세하게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 음죽현지도 제작일시 표시
'同治十一年三月' 400여장의 그림지도는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1872년 3월에서 6월 사이 만들어졌다. 음죽현 지도에 표시된 제작일시를 통해 그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3개월만에 급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급박한 정세 때문이었다.
# 남연군묘 모습
의성, 신진척화비 지도
대흥군 뒤 척화비 당시 무력으로 서구세력 밀려와, 하지만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했는데.
1868년 오페르트 남연군묘를 도굴하는 사건
발생했다. 이 일을 겪은 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곳곳에 세웠는데 척화비는 지도에도 그려져 있다.
400여장의 그림지도제작은 대원군의 이같은 의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 양보경 INT (T4.065311 1872년은....군사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영종지도 지도 곳곳에는 국방강화와 대원군의 의지가
표현돼 있다.
해방의 요충지로 부각됐던 영종도 지도. 해로가 상세히 나타나 있고 암초가 그려져 험로임을 알 수 있다.
# 대부지도 / 뱃길 확인
양요과정에서 서양배들이 지나간 대부도 지도. 육로와 해로 , 각 섬들 상세히 묘사돼 있고.
'이양선이 지나간 자리'라는 설명까지 돼 있다.
# 광양현지도 병선,전선
함평지도 배들 광양현, 함평지도엔 배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당시 조선의 배의 다양한 종류와 그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 해남, 진도,순천지도
거북선 표시
해남,진도,순천지도에는 거북선도 그려져 있다.
1872년까지 거북선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진남관자리 부감
지도에 표시된 곳은 바다였는데 지금은 매립돼 시가지가 됐다.
거북선은 1890년까지 당시 진남관 앞에 있었다고 한다.
# 정광수 INT(T13. ...마지막 전라도 좌수사 김동훈 시집....)
# 오동대교에서 진해루 pan 그러니까 거북선이 지도가 제작되던 70년대도
있었고 90년까지 존재했다는 것이다.
# 일본 조선시보자료
이같은 사실은 일본기록인 조선시보에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거북선이 1894년까지 경상도에 9척, 전라도에 3척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 순천지도 거북선
거북선이 대원군 당시까지 중요한 전선으로 여겨졌다는 것이 지도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 포수청 그려진 해안지도
(아산,임천,천안,옥천,해매,황간현)
당시 대원군의 국방강화 핵심은 포군의 설치였다. 그같은 상황은 지도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전에 없었던 포수청이 해안지역 뿐 아니라 내륙지방까지 나타난다.
황간현에는 포수들이 살던 포수촌까지 있다.
# 연갑수 INT(T20. 153660 그전에는 창을 쓰거나 활을 쏘는 ... 상비군체계로 강화해 간다)
# 문화견문록 자료 이같은 대원군의 국방강화 사실은
문화견문록이라는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중국에서 수천근의 대포를 들여와..
일본 상인들 통해 조총 만드는 기술 익히게 ...'
# 연갑수 INT(T 20. 153840 실물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대원군의 군비증강노력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
# 강화부지도
해방에 최대 요충지였던 강화도지도.
대원군 당시 국방강화 노력이 그대로 보여진다.
구체적인 수비체제가 그려져 있고, 읍치안에 포량창이 있고 ,해안가 포대, 발사대의 숫자까지 기록해 놨다.
강화도 지도뿐 아니라 해안지도들에 나타난 대원군의 국방강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조선이 서양세력을 아무 대비없이 맞은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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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 8도 지도 바닥위에 있고
서해안 쪽 점점 불타고, 이때 벽면으로 대원군 나타난다.
그림지도가 제작되던 1872년, 조선은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개혁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밀려오는 외세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459장의 그림지도.
그속엔 대원군과 당시 사람들의 위기의식과 국방강화의 노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급격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그들의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 바닥지도와 대원지도 사라지고
개성, 함흥지도 나타난다.
오늘날 그림지도들은 그때 못지않게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밝혀지지 않았던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하거나, 유적지를 복원하는데도 더없이 중요한 자료로 말입니다.
459장의 그림지도들은 우리가 가지 못하는 북한의
모습까지 볼 수 있게 합니다.
이건 개성 지돕니다.
여기 이렇게 정몽주의 충절이 서려있는 선죽교도 보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종을 못마땅하게 여겨
머물렀다는 함흥땅의 모습도 이 지도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 벽면에 지금까지 지도 옆으로
흘러들어가고
459장의 그림지도엔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묻어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과학과 예술, 그리고 희망이 담겨있는 그림지도.
이것은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우리들의 보물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