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에 김상태·신태식·김동신…'의병 3인' 선정
1907년 정미의병 참여해 '항일 구국운동' 적극적으로 펼쳐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조약 강제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에 참여해 항일 구국(救國)운동을 펼친 김상태(1963년 독립장)·신태식(1968년 독립장)·김동신 선생(1977년 독립장)이 각각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고 30일 국가보훈처가 밝혔다.
보훈처에 따르면 1862년 충북 단양 출생의 김상태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선포에 항거해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 의진(의병진영) 중군장으로 의병에 참여했고,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의 제천의병에서도 활동했다.
김상태 선생은 1907년 정미의병이 발생하자 제천·단양 일대의 의병을 규합해 이강년 의진에 합류했고, 이강년 선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한 후 중군장이 돼 의병을 이끌었다. 그해 9월부터 10월까지 문경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12월 전투에서 패전해 이강진 의진이 해산되자, 1908년 영남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908년 이강년 선생이 순국한 뒤엔 선생이 이끌던 의병과 이강년 의진의 남은 병력까지 모아서 단양군 지역에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11년 6월 풍기군에서 체포돼 대구로 압송,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9월 순국했다.
1864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신태식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이 발생하자 문경 농암 장터에서 문경과 상주 지역의 일제 밀정을 처단했다.
이후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이 돼 이강년 의진과 합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뒤 울진과 평해로 이동해 신돌석과 함께 삼척에서 활동했다.
신 선생은 1908년 9월 홍주 전투에 참여했으며 그해 12월 포천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 190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신 선생은 상고해 10년으로 감형, 1918년 출소했다.
신 선생은 출소 후인 1920년 9월 독립운동의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군자금을 모금해 서로군정서에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2년 11월 의용단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돼 1922년 대구 감옥에 수감,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1871년 충남 회덕 출생의 김동신 선생은 무주와 용담 등 영호남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해 활동했고, 1907년 8월 8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삼연, 고광순과 함께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김동신 선생은 구례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군을 격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가 하면, 순창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합류해 1000여명에 이르는 부대로 규모가 커졌고, 김동신 선생은 충청·전라·경상도를 아우르는 삼남의병대장으로 불렸다.
김동신 선생은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던 중 일제에 체포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