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에 관심이 많으신 與林의 요청으로 이 대예술가의 여자관계를 캐(?) 보려 합니다. 물론 필자도 언젠가 한번 깊이 다뤄 보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좀 당겼을 뿐이기도 하구요. 혹 잘못 된 부분이 있으면 필자에게 살짝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누구나 소동파를 알지만, 아무도 소동파를 모른다."
소동파(蘇東坡, 蘇軾, 1036~1101)는 북송(北宋)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이며, 붓글씨에도 뛰어나 중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名筆에다 그림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가히 '선비 3절(詩書畵)'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학(經學), 금석학, 의학, 그리고 '동파육(東坡肉)'으로 널리 알려졌듯이 요리 방면에도 대가지요.
신법 개혁을 강행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비위를 거슬려 이 지방에서 저 고을로 좌천에 귀양을 거듭하지만,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이 왕성해서 가는 곳마다 그곳 서민들과도 잘 어울리며 그들과 어려움도 함께 나누었다고 합니다. 평생토록 자연 속에 소요하고 여행하기를 좋아하여 수많은 시(詩)나 사(詞) 또는 부(賦)를 남겼으며, 거개의 시인묵객(詩人墨客)이 그랬듯이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는데.. '묽디 묽은 술(薄薄酒)' 이란 제하의 시에서 그의 이런 혐의(?)를 짐작해 볼 수 있지요.
薄薄酒勝茶湯(박박주승다탕) 묽디 묽은 술도 차 보다는 낫고
醜妻惡妾勝空房(추처악첩승공방) 못생긴 아내나 악한 첩도 독수공방 보다 낫다네.
소동파가 평생 못 잊었던 4명의 왕씨(四王)
정치적 소신의 차이로 소동파를 무척이나 괴롭힌 王씨 성을 가진 남자(王安石) 하나, 그리고 그가 사랑한 세 여인이 모두 王씨였다는 게 우연일런지.. 소동파가 열여덟에 결혼한 첫째 부인의 이름이 왕불(王弗)로 미인은 아니었으나 착하고 헌신적이어서 평생 잊지 못합니다. 왕불이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맞이한 두번째 부인은 왕불의 사촌 여동생인 왕윤지(王潤之)입니다. 소동파가 지방을 전전하던 이십 여년을 묵묵히 뒷바라지 한 둘째 부인마저 죽자, 소시적 항주(杭州)에서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반해 기적에서 빼내 준 왕조운(王朝雲)을 첩실로 삼아 오십대 후반을 함께 하는데, 이 여인 또한 34세로 소동파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요. 평생의 정적 왕안석과도 극적으로 화해하고 친하게 된 뒤 몇년이 못되어 죽듯이, 그가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모두 오래지 않아 다 그의 곁을 떠나는지..
생을 초탈한 그가 말년 쯤에 그의 동생(蘇轍, 역시 唐宋 8대가)에게 보낸 시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雪泥鴻爪)'
人生到處知何似(인생도처지하사) 인생 역정이란 게 무엇과 같은지 아시는가
應似飛鴻踏雪泥(응사비홍답설이) 날아가던 기러기가 내려 밟고 지나간 눈벌 같은 거라네
泥上偶然留指爪(니상우연류지조) 우연히 진흙벌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만
鴻飛那復計東西(홍비나부계동서) 그 기러기 어디로 날아갔는지 다시 알아 무얼하게
*기러기라도 일반적인 '雁' 자를 쓰지 않고 큰기러기 鴻 자를 쓴 걸 보면 자신이 '큰 발자국'을 남겼음을 암시하는 건 아닌지^^
27살에 요절한 첫째 부인 왕불(王弗)
소동파가 18살에 맞아들인 첫 번째 부인 왕불(王弗, 당시 16세)은 글을 아는 여인으로, 남편이 과거공부하는데 도움을 줄 정도로 똑똑했으며 사람을 보는 안목이 깊어 교우관계도 조언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결혼한지 11년 되던 해에 6살의 어린 아들을 남기고 스물 일곱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십여년을 같이 살았다지만 소동파의 방랑벽과 계속된 지방 좌천으로 실제로 함께 한 기간은 불과 3,4년에 불과하였다네요. 그 후 아버지(蘇洵, 역시 唐宋 8대가) 마져 돌아가시어 고향인 밀주(密州, 산동성)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합니다(부인도 함께 이곳으로 이장). 부인과 사별한지 10년 후에 밀주에 가게 되었는데, 어느날 꿈에 죽은 아내가 나타납니다. 그때의 절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강성자(江城子)'란 제하의 글(宋詞),
十年生死兩茫茫(십년생사양망망) 삶과 죽음으로 갈라 선지 10년으로 아득한데
不思量 自難忘(불사량 불난망) 생각을 말자 해도 스스로 잊을 수 없네
千里孤墳 無處話凄凉(천리고분 무처화처량) 천리 외로운 무덤, 쓸쓸함을 말할 데 없네
縱使相逢應不識(종사상봉응불식) 설령 나를 만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하겠구려
塵滿面 鬢如霜(진만면 빈여상) 세상 먼지에 찌든 얼굴, 머리는 서리처럼 하얗게 변해
夜來幽夢忽還鄕(야래유몽홀환향) 밤새 깊은 꿈속에서 문득 고향집으로 돌아갔는데
小軒窓 正梳粧(소헌창 정소장) 작은 집 창가에서 그대는 막 머리를 빗고 있었지
相對無言 惟有淚千行(상대무언 유유루천행) 서로 대하고는 말없이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네
料得年年腸斷處(료득년년장단처) 해마다 애끊는 곳을 헤아려 보니
明月夜 短松崗(명월야 단송강) 달빛 환한 키작은 소나무 언덕 (그대 무덤)
*천년을 거슬러 이렇게 漢文으로 된 글을 읽으면서도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소동파란 시인이 참 대단하다 느껴집니다.
*망부가를 사(詞, 일종의 노래 가사)로 쓴 건 소동파가 최초라고 함.
첫 부인의 사촌 동생(王潤之)을 둘째 부인으로
그전부터 형부를 흠모하다가 언니가 죽은 3년 뒤(소동파의 나이 32세)에 두 번째 부인이 됩니다. 전실 자식을 자기가 낳은 두 아들과 똑같이 아끼고 사랑했으며, 바람기가 많은 남편의 잦은 기방출입과 외도에도 투정부리거나 추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동파가 황주에 있을 때 지어 직접 붓글씨로 쓴 '후적벽부'에 둘째 부인의 심성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 있네요. 소동파가 적벽강에서 친구 둘과 달밝은 밤에 함께 노래를 부르며 노닐다가,
已而嘆曰 "有客無酒,有酒無肴,月白風清,如此良夜何" 客曰“今者薄暮,舉網得魚,巨口細鱗, 狀如松江之鱸。顧安所得酒乎?”歸而謀諸婦。婦曰:“我有斗酒,藏之久矣,以待子不時之需"
한탄하기를 '친구가 있으면 술이 없고, 술이 있다 해도 안주가 없네. 이리 좋은 밤에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니 친구가 답하길 '오늘 으스름께 그믈을 올려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늘어 마치 송강의 농어 같았네. 어디서 술을 구할 수 없겠나?" 하기에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의논하였다. 아내가 이르기를 “당신이 갑자기 필요할까봐 제가 한 말 술을 준비해 둔지 오래 되었지요.”

소동파가 쓴 후적벽부
이십년 이상을 말없이 내조하고 그의 전성기를 함께한 왕윤지는 소동파가 57세가 되던 해 병으로 죽습니다. 먼저 간 둘째 부인을 위해 지은 시 '꽃을 사랑한 나비(蝶戀花)' 일부,
花褪殘紅靑杏小(화퇴잔홍청행소) 꽃은 시들어 붉은 빛 사라지니 파란 살구 조그맣게 생기고
燕子飛時(연자비시) 제비가 나는 좋은 계절
綠水人家繞(녹수인가요) 녹수는 人家를 감아돌고
枝上柳綿吹又少(지상유면취우소) 가지 위 버들 솜은 부는 바람에 하늘거리는데
天涯何處無芳草(천애하처무방초) 하늘 가 어디인가 향기로운 풀 없을까?
*꽃과 열매라는 자연의 순환을 자식을 낳아 임무(?)를 다하고 간 부인을 빗대어 표현한 듯한데, 마지막 구절이 묘한 여운을..
가장 사랑했던 제3의 여인, 왕조운(王朝雲)

소동파와 왕조운 상
소동파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다 고도 항주(杭州)로 좌천되어 통판(通判)이란 벼슬을 하고 있을 때(1071~74, 그의 나이 35~38세),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춤을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당시 12세였던 그녀를 기적에서 빼내 시첩(侍妾)으로 데리고 있게 되지요. 소동파가 그녀의 미모에 깊이 빠졌음을 방증하는 수많은 일화 중 2가지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우선 소동파가 지어준 '조운(朝雲)'이란 이름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회왕(懷王)이 꿈에 어떤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녀가 떠나면서 저는 아침에는 구름(朝雲)이 되고 저녁에는 비(暮雨)가 되어 이 양대(陽臺)에 항상 머물러 있을 거라고 한 고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또 하나 혐의(?)가 가는 건, 소동파의 절창 중의 절창 '서호상에서 한잔 할 때 처음엔 맑고 나중에 비(飮湖上初晴後雨)' 란 다소 긴 제목의 시입니다. 항주의 전설적인 미인 서시의 미색을 아름다운 호수 서호(西湖)와 견주어 읊었다지만, 사실은 바로 왕조운을 두고 노래했다는 거지요.
水光澰灩晴方好(수광렴염청방호) 물빛이 찰랑이고 반짝이니 갠 날이 마침 좋고
山色空濛雨亦奇(수색공몽우역호) 산색 비어있는듯 흐릿하니 비오는 날 또한 기이하네
欲把西湖比西子(욕파서호비서자) 서호를 들어 서시(왕조운?)와 비교하라면
淡粧濃抹總相宜(담장농말총상의) 옅은 단장이나 짙은 화장이나 모두 다 맘에 든다 하리
소동파가 호북(湖北)의 황주(黃州)로 좌천되고 남쪽 광동(廣東)의 혜주(惠周)로 유배되어 어려움을 겪을 때, 다른 첩들은 뿔뿔히 달아났지만 왕조운만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킵니다. 황주에 있을 때는 소동파를 위해 유명한 '동파육(東坡肉)' 요리를 만들어주기도 하지요. 혜주로 간 지 3년째 되던 해(소동파 나이 58세) 왕조운은 남방의 풍토병으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습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고향 항주와 같은 이름의 서호(西湖, 광동성 惠州 소재) 가에 묻힙니다. 소동파가 먼저 죽은 왕조운에게 헌사한 시(西江月梅),
玉骨那愁瘴霧(옥골나수장무) 옥 같은 (매화) 줄기 남방의 습한 안개를 품고도
氷姿自有仙風(빙자자유선풍) 얼음 같은 자태 스스로 신선의 풍골을 지녔네
海仙時遣探芳衆(해선시견탐방중) 바다의 신선 때에 맞춰 보내 매화숲을 찾으니
倒掛綠毛幺鳳*(도괘녹모요봉) 초록 작은 새가 거꾸로 매달렸네 *綠毛幺鳳 : 전설 속의 녹색 깃을 지닌 작은 새
素面常嫌粉涴(소면상혐분완) 맨 얼굴에 항상 분단장을 싫어하고
洗妝不褪脣紅(세장붕퇴순홍) 화장을 씻어내도 붉은 입술 지워지지 않아
高情已逐曉雲空(고정이축효운공) 높은 뜻은 이미 새벽 구름을 하늘로 쫒아 버리니
不與梨花同夢(불여이화동몽) 배꽃과 더블어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남방의 습한 곳에 고결하게 피는 매화와 왕조운을 비교한 시인데, 난해한 부분이 많아 제대로 새겼는지 모르겠네요.
조운이 묻힌 곳에 소동파는 육여정(六如亭)이란 정자를 짓는데, 六如란 如夢 如幻 如泡 如影 如露 亦如電. 즉, 꿈 같고, 환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다를 야그. 그녀와 지낸 나날이 그러했다는 말인지, 삶 자체가 그렇다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