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57호
- 공식명칭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통일신라
-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쌍산의로 459 (이양면, 쌍봉사)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탑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사자산 쌍봉사(獅子山 雙峰寺)
전남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송광사의 말사로 통일신라 시대인 839년에 창건되었다.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847년(문성왕 9)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에서 주석하면서 절의 앞 뒤 산봉우리가 쌍봉(2개)이어서 자신의 도호를 쌍봉이라 하였으며 사찰 명도 쌍봉사라 하였다.
철감선사 주석 시에 쌍봉사는 크게 중흥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그의 제자 징효대사가 영월의 흥녕사(現 법흥사)에서 사자산문을 열었다. 쌍봉사는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인조 때 중건 이후 수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특히 1984년에는 보물 제163호인 3층 목탑 대웅전이 불에 타버려 1986년에 새로 지었으나 보물에서는 해제되는 아쉬운 일이 있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드물게 석가여래좌상 좌우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입상을 모셨는데 1984년 대웅전 화재 시 근처의 농부가 달려와 한분씩 업어서 모시고 나와 온전하였다는 것이니 대웅전 삼층목탑은 불타버렸으나 삼존불은 지켜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새로 지은 쌍봉사 대웅전. 3층 목탑으로 사방 1칸의 네모진 평면에 사모 지붕을 얹은 모습인데 불타기 전에는 3층의 경우 팔작지붕이었다. 이는 1962년 해체, 수리 시 옛 기록을 보니 원래 사모 지붕이었다하여 다시 지을 때는 옛 모습대로 사모 지붕으로 한것이다. 이와같은 목탑 형태의 건축물은 법주사 팔상전과 이곳 쌍봉사 대웅전 뿐이다.>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
속성은 박 씨(朴氏). 호는 쌍봉(雙峰). 도윤은 휘. 경기도 시흥 사람으로 815년(헌덕왕 7) 화엄 십찰 중 하나인 김제 모악산 귀신사(歸信寺)에서 출가하여 10년간 화엄경을 배웠다. 825년 당에 건너가 도일(道一)의 제자 보원(普願)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았는데 보원(普願)은 자신의 법인(法印)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847년(문성왕 9) 범일(梵日)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며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경문왕도 그때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후 쌍봉사에서 주석하면서 종풍을 떨쳐 사세(寺勢)를 크게 중흥시켰으며, 868년(경문왕 8) 4월 18일 문인들을 모아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고 나이 71세, 법랍 44세로 입적하니 시호는 철감선사(澈鑒禪師)이며,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이다.
현재 쌍봉사에는 철감선사를 모신 승탑(국보 제57호)과 탑비(보물 제170호)가 있다.
철감선사(澈鑑禪師) 승탑(僧塔) [국보 제57호]
승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이니 철감선사 입적 후 사리를 수습하여 이 탑을 세웠을 것이며 경문왕이 징소(澄昭)라는 탑호를 내렸으니 징소탑(澄昭塔)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 탑은 현존하는 승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품이며, 일제강점기 때 파손 방치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하였는데 현재 상륜부가 없고 지붕돌(옥개석) 추녀 일부 등 작은 손상이 있으나 대체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한눈에도 균형 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기법 등이 눈길을 끈다. 가히 최고의 승탑이다.
<국보 제57호 철감선사 승탑, 2. 3m로 사람 키보다 크며 현존하는 승탑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이다.>
ㅇ 기단부 (하대, 중대)
승탑은 크게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나뉘는데 아쉽게도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며 기단부는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어지고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기단이 2개의 돌, 몸돌과 지붕돌이 각 1개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부마다 새겨진 조각들은 정밀하고 아름다운 돋을새김으로 눈을 뗄 수 없다.
<승탑의 기단부중 하대석이다. 바닥을 평평하게 한 8각 지대석 위에 두 겹의 굄돌이 있고 그 위로 2단의 하대석을 두었다. 하대석 하단은 구름무늬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가운데 정면으로 2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새겼는데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하대석 상단은 8면을 나누어 다양한 모양의 사자상을 새겼는데 각각의 자세나 표정이 너무 재미있다. 이 모든 조각은 양각으로 새겨 그 사실감이 더욱 뛰어나며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하대석 상단의 다양한 사자상 모양, 엎드리고 뒤돌아보는 등 다양한 자세이며 자기 뒷다리를 깨무는 모습도 있다.>
<상, 하 2단의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는 중대석인데 하대석 위에 홈을 파서 중대석을 끼우는 형태로 세웠다. 중대석은 상대석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고 높이가 낮으며 8각의 각 면에는 다양한 모습의 상상의 새, 반인반조 가릉빈가를 새겼다.>
<다소 좁게 보이는 중대석에 새긴 가릉빈가. 명확하게 반인반조로 식별되지 않는다.>
ㅇ 기단부 상대, 몸돌
<기단부 상대는 바로 선 꽃 모양 앙화(仰花) 형태로 큼직한 연꽃잎을 둥글게 돌아가며 새겼으며 그위로 몸돌을 받치는 굄돌이 높직한데 팔각의 각 면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다양한 모습의 가릉빈가를 새겼다. 중대석에 새긴 가릉빈가의 모습이 잘 안 보이는데 비하여 상대석 몸돌 받침에 새긴 가릉빈가는 그 모습이 뚜렷하다. 그 위로는 팔각의 몸돌이 얹혀 있다.>
<상대석 위 몸돌받침에 새겨진 가릉빈가의 다양한 모습들. 저마다 다른 모양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가릉빈가는 반인반조(伴人半鳥), 인두조신(人頭鳥身)의 모양을 한 상상의 새(鳥)로 극락에 산다 하여 극락조라고도 하고, 울음소리가 매우 곱다는 뜻의 묘음조(妙音鳥)·호음조(好音鳥)·미음조(美音鳥)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사위를 취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처럼 승탑에 새겨진 경우와 불전의 수미단이나 고분의 벽화, 기와의 막새 등에서 볼 수 있다.
가릉빈가의 소리를 부처만이 낼 수 있는 범음(梵音)에 비유하여, 이를 널리 펴기 위해 나타난 새라고도 하며, 춤과 노래, 연주 등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상서롭고 경사스러움을 전하는 길조(吉鳥)로 손꼽힌다.
<승탑의 몸돌은 팔각인데 앞뒤 정면으로는 자물쇠 모양의 문비(門扉)를, 그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새겼으며 (큰 사진), 그 사이에 하늘거리는 모습의 비천상을 좌우로 새겼다. (작은 사진) 각 면을 구분하는 기둥을 자세히 보면 배흘림 원기둥임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 승탑의 진짜 멋스러움은 지붕돌에 있다. 기와지붕의 기왓골을 세세하고 정밀하게 표현하였으며 특히 수막새에는 그 작은 공간에 연꽃무늬를 일일이 새겨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둥근 서까래와 네모 부연 서까래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겹처마 지붕을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처마 아랫면에도 비천상과 다양한 무늬를 새겨 넣어 석공의 예술 감각과 정성에 혀를 내두른다.>
철감선사(澈鑑禪師) 탑비(塔碑) [보물 제170호]
철감선사 승탑 옆에는 그 내력을 적은 탑비가 세워져 있는데 아깝게도 탑신은 없어진 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거북의 네발 중 오른 앞발은 위로 들어 올려 막 내디디려는 역동적인 모습이 특이하며 여의주를 입에 물고 씩씩거리는 듯한 느낌의 머리와 목줄기도 또렷하다. 등짝은 두 겹의 육각 귀갑 무늬를 새겼으며 비좌에 얹힌 이수는 앞면에는 3마리의 용, 뒷면에는 2마리 용이 노니는 모습이며 위로는 3개의 불꽃 무늬 보주가 꽂힌 특이한 모습인데 오른쪽 하나는 없어졌다.
<철감선사 탑비, 비신은 없어졌지만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이수의 중앙 제액(題額)에는 '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雙峰山故澈鑑禪師碑銘)'이라고 새겼다. 일부 책자나 인터넷 자료에는 '쌍봉산 철감선사탑비명(雙峰山澈鑑禪師塔碑銘)'이라 씌어있다고 되어있는데 오류로 보인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조선일보 시니어조선 :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8/20190508801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