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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무성서원원지」(1884) 상 (googleusercont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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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학총서 10
북학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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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① 칠광도
② 최치원 초상화
사진출처 | 정읍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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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9개 서원 중 전라북도에는 정읍의 ‘무성서원’이 유일합니다. 무성
서원은 사액서원이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전북의 도원(道院)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성서원의 위상과 역할을 보여줄 수 있는 기초자료 조사와 연구는 부족하였습니다. 이
에 전북연구원에서는 무성서원이 가지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주목하고 유네스코 등재 1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부터 1884년 판본의 『무성서원원지』 번역과 해제를 추진하였습니다. 해당 판본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의 서원지 가운데 가장 먼저 편찬되어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습
니다.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한 다른 서원들과 달리 무성서원은 마을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은 향촌 교육과 연계돼 학문을 권장하며 마을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원동력으
로 작용하였습니다. 특히 무성서원이 소재한 정읍은 전통적으로 숭의(崇義)와 유풍(儒風)이 넘치는
도시입니다.
정읍 출신 선비 손홍록과 안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을 지켜냈고,
최익현과 임병찬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무성서원원
지』 번역을 계기로 예로부터 무성서원이 수행해온 기능과 가치가 현대에서도 재창출되어 우리 전북
의 소중한 문화자산의 가치가 확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 12.
전북연구원장 권 혁 남
『무성서원원지』 상
(1884)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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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 원문은 정읍시립박물관 소장 『무성서원원지』를 대상으로 한다.
● 인명, 지명, 관직명, 건물명 등의 고유명사 및 중간점 사용이 필요한 일반명사가 나열 되는 경
우 중간점(ㆍ) 사용. 유니코드 318D를 사용한다.
예) 第一義先生名號ㆍ事實ㆍ文章ㆍ道德
● 번역문의 확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원문을 정서할 때 항수(行數)에 맞추어 입력한다.
- 고유명사는 한자와 한글을 병기한다. 다만 한 번 나온 글자는 뒤에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
다. 첫 번째 나온 단어는 ( )에 한자를 병기하고, 이후에는 한글로만 작성한다.
- 원문의 고유명사ㆍ인명ㆍ지명 등은 ( )로 표기한다.
- 의역한 부분은 [ ]로 표기한다.
예) 『무성서원원지(武城書院院誌)』[院誌]의 전후 사정은 옛 서문에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감히
다시 덧붙이겠는가.
- 세주(細註)는 【 】로 표기한다.
예) 현우 3칸【성종조 계묘년(1583)에 이건】
- 연도는 간지 등을 먼저 쓰고, 연도를 ( )로 병기한다.
- 각주는 연도를 먼저 쓰고 간지, 왕력을 ( )로 병기한다.
예) 본문 : 1554년(갑인) 12월 30일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64세였다.
각주 : 김성근(1835-1919)은 안동(安東) 김씨이다. 1861년(철종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 각주를 단 본문 내용과 하단의 각주 표제어는 일치하도록 한다.
- 각주에서 인물 설명시 성명 표기를 원칙으로 한다. 단, 호(號)나 자(字)의 사용에 한해서
다시 설명해준다.
예) 소요부(邵堯夫)는 송대(宋代) 학자인 소옹(邵雍, 1011-1077)의 자이다.
- 원문에 차자(借字)로 표기된 물명(物名) 등은 최대한 우리말로 바꾸어 표기하고 별도의 주
석은 않는다. 단, 내용 파악이 어려운 경우 주석을 달거나 단어를 풀 때
(○○ ; ~~)의 형식으로 표기한다.
예) 최치원 선생 영정이 이모(移摹 ; 본떠서 그림) 되어 봉안(奉安 ; 신주나 화상을 모심)된
뒤에는 ~
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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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맞춤법 및 띄어쓰기는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을 따른다.
- 명확한 의미전달을 위해 아래의 부호를 사용한다.
※ 부호
『 』 : 책명 및 각주의 전거(典據)를 묶는다.
「 」 : 편명, 작품명 논문 제목을 묶는다.
( ) : 번역문과 음이 같은 한자, 외국어를 묶는다
[ ] : 번역문과 뜻은 같으나 음이 다른 한자를 묶는다.
“ ” : 글 안에서 대화를 표시할 때, 남의 말이나 서책 또는 시문 등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할 때 사용한다.
‘ ’ : “ ” 안의 재인용 또는 강조 부분을 묶는다.
【 】 : 원주(原註)에 해당하는 부분의 처음과 끝에 사용한다.
■ : 원문이 누락된 부분을 표시할 때 사용한다.
□ : 판독 불가인 경우에 사용한다.
● 역주의 확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역주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바탕으로 한다.
- 난해한 용어, 인물에 대한 해설 등에 역주를 하고, 인물 등은 현감 이상을 역주로 실시한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역대인물통합정보시스템, 한국고전종합DB, 조선왕조실록, 승정
원일기 등의 자료를 이용한다.
- 연도 등에 부족한 점이나 다른 학설이 있을 경우 상세 내용을 표기한다.
예) 각주 123 : 원문에는 “癸卯以主簿出補 泰仁創建五學宮”이라고 주부에 보임된 후 태인에 5
학당을 창건한 것으로 기재하였다. 이 문맥만 보면 중앙 관직에 있던 신잠이 갑자기 태인
에 5학당을 창건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면, 1543년(중종 38)
에 신료들은 다시 신잠의 문예가 뛰어나니 명 사신을 맞이할 때 크게 쓰일 것이라면서 그
를 추천하였고, 중종은 이를 허락하여 종6품의 사옹원 주부에 제수하였다.(『중종실록』 권
101, 38년 11월 26일 병인 ; 29일 기사) 며칠 후 중종은 “신잠은 주부가 됨은 무익하니 고
쳐 守宰(수령)에 임명하여 치적을 살펴보려 한다.”하고, 태인 현감에 보임하였다.(『옥계선생
문집(玉溪先生文集)』 권3, 행장) 즉, 1543년에 신잠은 사옹원 주부에서 새롭게 태인 현감으
로 임명되었고, 태인에 와서 5개의 학당을 건립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위의 내용이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표점은 원문 입력시 띄어쓰기를 원칙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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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발간사
일러두기
■ 『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1. 개요
2. 편찬 배경
3. 체제 및 내용
■ 『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 무성서원원지 목록
• 서문(序文)
무성서원원지 서문[武城書院院誌序]
원지 서문[院誌序]
• 발문(跋文)
기양연(奇亮衍) 발문(跋文)
신기조(申岐朝) 발문(跋文)
•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1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2
• 유상대비문(流觴臺碑文)
• 유상대 중수기(流觴臺重修記)
• 원지(院誌)
• 태산사 사적(泰山祠事蹟)
• 칠현사적(七賢事蹟)
문창후(文昌侯) 최 선생
영천(靈川) 신 선생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선생
눌암(訥庵) 송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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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무성서원원지』 상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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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묵재(默齋) 정 선생
성재(誠齋) 김 선생
명천(鳴川) 김 선생
• 청액소(請額疏)
• 청액사적(請額事蹟)
• 연액례(延額禮)
• 제문(祭文)
• 각읍예부기(各邑例賻記)
• 축문기(祝文記)
• 원생 관문(院生關文)
• 홀기(笏記)
• 문창후 최 선생 영정 봉안 사적(文昌侯崔先生影幀奉安事蹟)
• 영정 봉안시 정장(影幀奉安時呈狀)
• 영정 봉안일기(影幀奉安日記)
• 영정 봉안축문(影幀奉安祝文)
• 원우단확중수기(院宇丹雘重修記)
• 이안축문(移安祝文)
• 환안축문(還安祝文) 위와 같음
• 중수기(重修記)
• 계원필경집개간기(桂苑筆耕集開刊記)
• 품장(稟狀)
• 복호보노 환복기(復戶保奴還復記)
• 지산 처사(芝山處士) 안재호(安在頀) 장서기(藏書記)
■ 『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 『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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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무성서원원지』 상(1884)
『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1. 개요
2. 편찬 배경
3. 체제 및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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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1. 개요
무성서원은 신라말에 태산태수로 부임한 최치원과 조선 명종대 부임한 신잠, 그리고
향(鄕)선비인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배향한 곳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최치원이 이임한 뒤부터 생사당을 짓고 그를 기렸으며, 그 전통은 태인에서 학교를 크게
일으키고 선정을 베푼 신잠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정극인이 건립한 향숙(鄕塾)을 기반으
로 송세림이 학교의 형태로 발전시켰으며 정언충, 김약묵 등이 계승하였다.
그 결과 성종대인 1483년에 월연대 위에 있던 태산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1615년(광해 7)에 제향기능의 태산사와 강학 기능의 강당 등이 갖추어진 태산서원이 되었
다. 무성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사액서원으로 공인되며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 되었
다. 이후 최치원의 영정을 모셔와 명실상부한 최치원 서원으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게 되
었다.
1868년(고종 5)에 전국의 47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과 사우가 철폐될 때, 무성서원
은 존치되어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예를 들어, 1871년부터 무성서원의 원장을 태인현
감 김인근이 겸임하였고, 1887년부터는 관찰사 김성근이 겸임하였다. 또한, 1873년에 시
작된 강습례는 서원철폐령 이후 강학을 통해 도(道)를 밝히고자하는 서원의 본질적 기능
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배경으로 작
『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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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용하였다.1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무성서원은 1968년에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
고, 2019년에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무성서원의 연혁과 특징을 기재한 『무성서원원지』(이하 원지)가 처음 편찬된 것은
1884년(고종 21) 6월이었다. 그리고 현전하는 판본은 크게 7종이다. 2권 2책으로 구성되
어 있고,2 국립중앙도서관본과 uc버클리대본은 목판본으로 분류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목활자본이다. 여기에서는 정읍시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자료를 번역하였다. 이 책에 의하
면 원지는 도유사(都有司)에 최성재를 필두로 서사(書寫), 발문(發文), 감인(監印), 청서(請
序), 교정(校正), 장재(掌財) 등의 업무를 맡은 21명의 유사들이 참여하였고, 무성서원에서
개간되었다.
1884년 판본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다른 서원원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먼저 만
1 이해준, 「세계문화유산 무성서원」, 『2020년도 전북학 도민강좌 교재집』, 2020, 36~37쪽.
2 전북학연구센터, 「무성서원 관련 자료 현황」, 『무성서원 역사·문화 자원화 방안』, 2020, 용계서원본은 하
권만 현전하고 있으나 이로 미루어 실상 2권 2책일 가능성이 크다.
무성서원 (제공:정읍시 문화예술과 문화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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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들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3 아울러 서원과 관련된 여러 기록
들이 남아 있어 비단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콘텐츠의 보고이자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높은 훌륭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자료는 번
역을 통해 전문연구자들을 비롯하여 일반 시민들도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 편찬 배경
원지의 편찬 배경을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후술하겠지만 1868년의 서원 철폐 이후
복호와 보노의 복구와 관련된 지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무성서원의 임원들은 원지의 중요
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서원에는 예부터 원지가 없었고, 수 백 년 동안 전해 오는 원중 사적(院中事蹟)을 베낀
것도 오래되어 쉽게 이지러져 마침내 다 없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원생[院儒] 송정순
(宋程淳)·김형식(金亨植)·우재호(禹在鎬)·장석배(張碩培)가 단연코 자신들의 임무로 여
겨 끊어지고 흩어져 남은 것들을 수습하였다. 옛것은 보존시키고 새 것은 보태 널리
헤아려 보고 넓게 실어 모아서 한 책을 만들고 간행하여 오래도록 전해지도록 도모하
였다.(기양연 발문)
당시 정읍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기양연의 발문을 보면 원생 송정순과 김형식 등은 원
지가 없어서 수 백 년 간 전해 내려오는 무성서원의 여러 가지 일들이 없어질 것을 염려
하여 책으로 만들어 간행하였다. 실제로 원지 내용의 상당수는 이미 이전에 작성된 것을
베껴 적은 부분이 많고, 새롭게 작성한 내용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상권을 예로 들면,
서문과 발문, 원지, 칠현사적, 중수기, 복호보노환복기, 지산처사 장서기 정도만 새롭게
작성한 것이다. 즉, 원지에는 제향위(祭享位)의 실적과 서원의 흥망성쇠를 쉽게 이해할 수
3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의 서원지가 만들어진 시기는 다음과 같다. 즉, 남계서원(1935·1962), 도
동서원(1997), 도산서원(1958), 돈암서원(1958), 소수서원(2007), 옥산서원(1993), 필암서원(1975)이다.(이수
환, 「서원 기록자료의 정리현황과 과제」, 『한국서원학보』 2, 2013, <표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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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있도록 서원의 역사적 사실을 시계열적으로 기재하였다.
특히, 무성서원은 최치원과 관련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전라도관찰사 김성근과
태인현감 정이원은 서문의 상당부분을 최치원에 대한 내용에 할애하였다. 예를 들어, 정
이원은 “원지 가운데 조항이 구절마다 하나라도 선생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의당
공경하고 삼가는 데 겨를이 없고 원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거듭 기록할 필요가 없
다.”라며 여기에서 최치원과 관련된 내용이 주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김성근은 한 발 더 나아가 “무성서원의 성쇠는 선생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지
만, 우리 도의 운수와 성쇠는 무성서원의 보존 여부와 크게 관련이 있다. 이 원지를 저술
하여 간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선생의 문장과 도덕에 대해서 숭상할 바를 알게 하여 선
생의 서원을 지키는 것이다.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듯이 지금 과거를 돌아보니 사문(斯
文)을 일으켜 바로 세우고 무성서원에 귀의(歸依)한다면 무성서원의 다행이 아니라 바로
한 나라의 다행이고 만세(萬世)의 다행이 아니겠는가?”라며 무성서원의 보존여부를 전라
도의 운수와 성쇠로 연결시키고, 국가의 다행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김성근은 최치원
의 정통성을 보유한 무성서원의 중요성을 거시적 차원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처럼 원지의 편찬 배경은 그동안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이를
정리하고, 후대에 이를 쉽게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문묘에 배향되었을 뿐만 아니
라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라고 손꼽히는 최치원과 관련성을 강조하여 무성서원의 정통
성을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따라서 상권은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최치원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3. 체제 및 내용
원지는 크게 상(乾)·하(坤)권으로 구성되어 있다.4 본고에서 살펴볼 상권은 서와 발을
4 정읍시립박물관 본의 표지에는 건(乾)과 곤(坤)으로 구별되었지만, 목차에는 각각 원지 상(上)·하(下)로 표
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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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포함하여 31개의 항목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목차의 순서와 실제 내용의 순서에는 약간
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를 본문의 순서에 맞추어 정열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원지 상권의 목차
무성서원원지 목록(武城書院院誌目錄)
서문[序]
발문[跋]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유상대 비문(流觴臺碑文)
유상대 중수기(流觴臺重修記)
원지(院誌)
태산사 사적(泰山祠事蹟)
칠현사적(七賢事蹟)
청액소(請額疏)
청액사적(請額事蹟)
연액례(延額禮)
제문(祭文)
각읍예부기(各邑例賻記)
축문기(祝文記)
원생 관문(院生關文)
홀기(笏記)
영정봉안사적(影幀奉安事蹟)
영정봉안시정장(影幀奉安時呈狀)
영정봉안일기(影幀奉安日記)
영정봉안축문(影幀奉安祝文)
원우단확중수기(院宇丹雘重修記)
이안축문(移安祝文)
환안축문(還安祝文)
중수기(重修記)
계원필경 개간기(桂苑筆耕開刊記)
복호보노 환복기(復戶保奴還復記)
지산처사 장서기(芝山處士藏書記)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상권은 조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내용은 크게 여러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고, 관련 그 내용으로 묶으면 <표 2>와 같이
9개 정도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표 2> 원지 상의 편목과 주요내용
편목
내용
건수
서발
서문[序](김성근, 정이원), 발문[跋](기양연, 신기조)
2
최치원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유상대 비문(流觴臺碑文),
유상대 중수기(流觴臺重修記)
3
개요와 제향인물
원지(院誌), 태산사 사적(泰山祠事蹟), 칠현사적(七賢事蹟)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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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연액기사
청액소(請額疏), 청액사적(請額事蹟),
연액례(延額禮), 제문(祭文), 각읍예부기(各邑例賻記),
축문기(祝文記), 원생 관문(院生關文), 홀기(笏記)
8
중수일기
영정봉안사적(影幀奉安事蹟), 영정봉안시정장(影幀奉安時呈狀),
영정봉안일기(影幀奉安日記), 영정봉안축문(影幀奉安祝文),
원우단확중수기(院宇丹雘重修記), 이안축문(移安祝文),
환안축문(還安祝文)
7
중수기
중수기(重修記), 계원필경 개간기(桂苑筆耕開刊記)
2
서원 운영 관련
정장(呈狀)
읍품(邑稟), 유장(儒狀)
4
복호보노
복호보노 환복기(復戶保奴還復記)
1
장서기
지산처사 장서기(芝山處士藏書記)
1
책의 머리말이라고 볼 수 있는 서문과 발문에 관한 내용은 각 2개씩 있다. 유생들이
서원지의 서문을 받은 것이 1884년(고종 21) 여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그 이전
에 이를 편찬하기 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동년 5월 단오에 관찰사 김성근에
게 먼저 받고, 하순에 정읍현감 기양연에게 발문을 받았다. 이후 6월 초에 태인현감 정이
원의 서문과 흥덕현감 신기조의 발문을 추가로 받았다. 다만 원지의 순서는 김성근, 정이
원의 서문, 기양현, 신기조의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5
최치원과 관련된 내용도 3개나 되는데 그가 남긴 책인 『계원필경』의 서문, 그리고 그가
현재의 동진강 가에서 노닐었다고 알려진 유상대와 관련된 유상대 비문과 유상대 중수기
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무성서원이 위치한 고현내 지역이 최치원과 매우 밀접한 관
계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당시 유상대의 모습과 유상곡수를 재현할 수 있는 중
요한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5 김성근의 서문에 기재된 순서는 원지의 목록과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서문에는 최치원, 칠현사적, 청액
소와 허가를 받은 사적, 치제문, 연액의절, 영정 봉안시의 통관과 일기, 『계원필경』을 재간행한 일, 서원의
뒤에 투장을 금지한 것과 읍품, 유장, 복호보노의 환복기까지 쓰여 있다. 하지만 장서기와 관련된 내용은
누락되었는데, 아마 지산처사 장서기는 김성근의 서문을 받은 후에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김
성근의 분류를 참고하여 순서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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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한편, 무성서원 자체에 대한 내용과 여기에 배향된 7현의 소개에 대한 내용도 3개가
있다. 비록 항목 자체는 원지(院誌), 태산사 사적(泰山祠事蹟), 칠현사적(七賢事蹟)으로 3
개지만, 특히, 칠현사적은 7명에 대한 개괄적 설명 및 개별적 소개가 있기 때문에 그 분
량 자체는 상당하다. 또한, 송세림이나 정언충 등 지역에서 활약한 인물들은 다른 사료를
통해 그의 행적을 찾기 힘들지만, 원지에는 이러한 단점을 상쇄할 만큼 비교적 풍부한 내
용을 보유하고 있다. 참고로 하권에서는 보유라는 형식으로 배향인물 7명의 내용을 보완
하고 있다. 한편, 태산서원이 된 이듬해(1616년)에 지은 태산사사적은 당대의 문서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서원 몫으로 제급한 토지의 유래와 함께 규모, 소장한
책의 목록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표 2>에서 보이는 것처럼 무성서원이 사액서원으로 되는 과정이 8개로 가장 많다.
여기에서는 1695년(숙종 21)에 유생들의 의견을 모아 이듬해 1월에 조정에 올린 청액소부
터 관련 내용, 동년 11월에 사액을 받는 의례, 이때의 제문, 주변 읍과 서원 등지에서 기부
한 물품 등 사액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모았다.6 이를 통해 무성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는 과정과 그 후 어떠한 방식으로 의례를 진행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많은 빈도를 차지하는 것은 최치원의 영정을 맞이한 내용이다. 이는 1783년
(정조 7)에 하동 쌍계사에 모셔져 있다가 후손인 최항대의 집에 있던 최치원 영정을 맞이
하기 위해 사당을 중수하고, 가져오는 과정, 영정을 봉안할 때의 축문과 이안(移安), 환안
(還安) 축문 등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내용 역시 당대의 이안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중수일기(重修日記)』에 상
당수가 있다.7
무성서원 중수기와 관련된 내용은 2개가 있다. 서원을 관리하면서 실시한 중수 관련
6 원문과 해제 등은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의 『연액기사(延額記事)』를 참고할 수 있다.( http://hnkostma.
org/emuseum/service/data/dataDetail_evo.jsp?data_group=17499) 본고에서는 이를 참고하여 편목을
연액기사라고 하였다.
7 원문과 해제 등은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의 『중수일기(重修日記)』를 참고할 수 있다. 원우단확중수기는
『중수일기』에서 ‘문창선생 영정 봉안시 사우 단확중수기(文昌先生影幀奉安時祠宇丹臒重修記)’로 기재되어
있다. 즉, 최치원의 영정을 이안하면서 사우의 단청을 중수한 내용이므로 뒤에 이어지는 중수기와는 사
안이 구별된다. (http://hnkostma.org/emuseum/service/data/dataDetail_evo.jsp?data_group=1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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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사항을 기록한 것이다. 서원의 유사들은 건물 설립과 같은 외적인 자산 관리와 무성서원
의 대표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최치원의 문집 발간 같은 내적 관리에 힘썼다. 우선 외적
인 관리 부분을 살펴보면 1825년(순조 25)에 강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유림 김민 등은 수
리를 의논하였다. 이후 현감 서호순의 도움을 받아 1828년 3월에 중수를 완료하였다. 서
호순은 최치원 영정을 개모할 때도 봉록을 덜었기 때문에 강당과 영정 개모의 공으로
1849년(헌종 15)에 불망비명이 세워졌다.8
다른 하나는 내적인 관리 부분이다. 앞서 화재로 강당 뿐 아니라 현판과 상량문도 불
에 탔다. 서원 유사들은 강당 중창 이후 1831년(순조 31)에 최치원의 영정 개모를 주도하
였다. 외형이 갖춰지자 최치원을 높이는 작업을 통해 서원의 중흥과 내실을 강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최종적으로 1833년(순조 33)에 태인현감 심능숙과 원유 박해언 등이 『계
원필경집』 간행을 도모하였고, 관찰사 서유구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 이듬해 완영에서 인
쇄가 이루어지고 판은 무성서원에 보관되었다.
중수기는 공통적으로 건물을 세우고 간행하는 등 현감과 관찰사의 도움이 절대적으
로 필요하며 여러 유생들의 함께 의논해야 할 대사(大事)였다. 한편, 서원을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소사(小事)는 정장(呈狀)9을 하는 방식을 통해 해결해 나갔다. 이와 관련
한 내용으로 읍품(邑稟)과 유장(儒狀)이 있다.10 당시 서원을 운용하면서 발생한 문제로
는 무성서원 뒷편 성황산에 투총(偸塚)한 일과 원예들의 역을 감해주는 것이었다.11
복호보노환복기는 1868년에 무성서원의 복호와 보노가 삭감되었는데, 필암서원의 예
로 다시 복구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무성서원은 다른 일반서원과 달리 최치원을
8 이 불망비는 현재도 서원 안에 모셔져 있다.
9 소장(訴狀)을 관청에다 받치는 행위이다.
10 전라도관찰사 김성근의 서문에서 ‘서원의 터에 투장을 금지하고 원예의 역을 덜어주는 일로 읍품과 유장
이 있다’라고 서술하였다. 여기서는 김성근의 서문에 나오는 표현에 근거하여 용어를 사용하겠다.
11 서원의 재정상황에 대해서도 정장 부분에 함께 수록되었다. 예를 들어 강당을 중수하고 최치원의 영정을
개모한 서호순의 공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세운 비용과 서원철폐령의 결과 복호보노가 삭감된 내용을 여
기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서원을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각종 사안과 재정 부분을 묶은 부
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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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배향한 서원이기 때문에 복호 3결과 보노 30명, 원생 30명을 획급 받았다.12 하지만 1868
년에 전국의 서원이 철폐되면서 그 영향으로 무성서원은 복호와 보노가 삭감되었다. 이
에 1872년에 유림들은 호포와 부역 등을 면제해달라고 요청하여 현감으로부터 11호의
포와 부역을 감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호포와 부역 면제를 해결한 것도 다행이라고 여긴 것도 잠시, 1878년에 필암서원은 복
호와 보노를 전처럼 회복하였다. 무성서원의 유림들은 뒤늦게 이를 알고 필암서원에 통
문을 보내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정읍현감에게 동년 12월부터 필암서원의
사례로 복구해 줄 것을 요구하는 품장을 올렸다.
그러나 유림들의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일이 해결되지 않자 태인현→전라감영→의정
부로 품장을 올렸고, 영의정 이최응으로부터 승낙의 제음을 받아냈다. 무성서원의 사림
들은 이를 근거로 현감과 관찰사에게 알렸고, 관찰사에게도 좋은쪽으로 잘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기에 고무되어 유림들은 다시 태인현감에게 품장을 올렸고, 1880년 1
월 19일에 원장으로부터 “보노 30명 또한 일체 복구할 것”이라는 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의정부와 전라감영의 허가를 바탕으로 태인현감이 두 차례에 걸쳐 완문(完文)
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복호문제까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태인현감은 보노에 대해
서는 아전[都吏]들에게 신칙하여 필암서원과 포충사의 전례대로 복구하라고 하였지만, 복
호 3결은 윗선에서 해결될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유림들은 굴하지 않고, 다시 품장을 올
리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마침내 1880년 6월 7일에 의정부로부터 서원이 있는데 복호가 없는 것은 있을 수 없
는 일이라며 감영에서 별도로 해당 읍에 엄중히 신칙하여 추급한 뒤 일의 상황을 시급히
보고하라는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곧바로 일이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서리 등은
이를 해결하지 않았고, 1881년 7월에 유림들이 다시 품장을 올리자 현감은 감영으로부터
획급을 받기 전까지 할 말이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러다 동년 12월 사이에 감영
으로부터 허가를 받았고, 태인현감은 이를 토대로 복호도 회복시켜 주었다.
12 강지혜, 「남원 노봉서원 건립과 운영」, 『한국서원학보』 2, 2013,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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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복호와 보노의 회복을 위한 일련의 사건들을 검토하면 무성서원의 유림들이 끊임없
이 노력한 점은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최응의 결정이
변곡점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공최응불망비(李公最應不忘碑)’는
1882년 3월에 유림들이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서원지를
집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로 남아 거의 모든 문서를 여기에 실었고, 분
량 역시 상당하다.
결국 복호보노환복기는 항목 자체는 1개밖에 안되지만 무성서원의 사림들이 어떠한 방식
으로 투쟁하여 쟁취하게 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산처사 장서기는 1872년에 안재호가 남학당의 중창과 이듬해에 시작된
무성서원의 강습례에 감복하여 개인이 소장한 책 수 백권을 서원에 기증한 내용을 작성
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가 기증한 책의 종류이다. 이를 분류하면 <표 3>과 같다.
<표 3> 안재호가 기증한 책 목록
분류
내용
종수
경부(經部)
주역구언해(周易具諺解), 서전구언해(書傳具諺解),
시전구언해(詩傳具諺解), 논어구언해(論語具諺解),
맹자구언해(孟子具諺解), 중용구언해(中庸具諺解),
대학구언해(大學具諺解), 소학구언해(小學具諺解),
춘추좌전(春秋左傳), 예기(禮記), 주례(周禮),
동래박의(東萊博議), 맹자서설(孟子序說), 대상예비(大喪禮備),
효경(孝經), 옥편(玉篇)
16
사부(史部)
통감요해(通鑑要解), 사요취선(史要聚選),
회헌안선생실기(晦軒安先生實記), 사기평림(史記評林),
홍사(鴻史)
5
자부(子部)
성리대전(性理大全), 기범연의(箕範衍義), 공자가어(孔子家語),
수학계몽(數學啓蒙), 대우씨전첩(大禹氏篆帖),
왕우군필첩(王右軍筆帖), 한문(韓文),
하서김선생필첩(河西金先生筆帖)
8
집부(集部)
고문전후집(古文前後集), 염락(濂洛),
두율(杜律), 당시(唐詩), 찬부(撰賦)
5
총 합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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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해제
그는 사부(四部)에 해당하는 주역구언해를 비롯한 경부 16개, 통감요해를 비롯한 사부
5개, 성리대전 등 자부 8개, 고문전후집 등 집부 5개를 기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책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이 기록을 통해 1870년대에 최소 300부 이상의 책이
무성서원에 보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원지는 크게 서발, 최치원의 행적, 서원의 개요와 제향인물, 사
액서원의 전후 과정, 영정봉안 관련 내용, 중수기, 복호와 보노의 환복과정, 안재호의 장
서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항목은 연액기사와 중수일기와 관련된 것
이고, 복호보노환복기는 항목은 하나이지만 당시 남아 있던 문서의 개요와 그 처분을 일
목요연하게 편집하였고, 제향인물의 경우 항목은 3개에 불과하지만 분량 자체는 상당수
를 차지한다.
당시에는 현전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은 원 고문서가 원지에 일부 기록되어 전함
으로써 당대 서원의 모습을 유추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아울러 연액기사와 중수일
기, 복호보노환복기 등은 다른 8개 서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용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자체만으로도 원지의 가치는 풍부하다고 할 수 있고, 이 내
용들을 콘텐츠의 원형으로 사업화 할 수도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단지 원지의 변역에
머물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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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무성서원원지』 상(1884)
『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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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무성서원원지 목록(武城書院院誌目錄)
원지 상(院誌上)
서문[序]
발문[跋]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유상대 비문(流觴臺碑文)
유상대 중수기(流觴臺重修記)
태산사 사적(泰山祠事蹟)
원지(院誌)
청액소(請額疏)
칠현 사적(七賢事蹟)
연액례(延額禮)
청액 사적(請額事蹟)
각읍예부기(各邑例賻記)
제문(祭文)
원생 관문(院生關文)
축문기(祝文記)
영정 봉안 사적(影幀奉安事蹟)
홀기(笏記)
영정 봉안 일기(影幀奉安日記)
영정 봉안시 정장(影幀奉安時呈狀) 원우 단확 중수기(院宇丹雘重修記)
영정 봉안 축문(影幀奉安祝文)
환안 축문(還安祝文)
이안 축문(移安祝文)
계원필경 개간기(桂苑筆耕開刊記)
중수기(重修記)
지산처사 장서기(芝山處士藏書記)
복호보노 환복기(復戶保奴還復記)
무성서원원지 상 목록(武城書院院誌上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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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서문[序文]
무성서원원지 서문[武城書院院誌序]
내가 어릴 때부터 문창후(文昌侯) 고운 최 선생이 우리 동방 문헌의 시초가 된다고 들
었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책을 보니 그 문장이 온 천하[華夷]에 이름을 떨치고,
치세에는 나가시고, 혼란할 때는 들어오시는 것은 참으로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미 시대가 멀어지고 말은 사라져 발자취와 남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다 크게 한탄하며 “옛 사람이여, 옛 사람이여!”라고 말할 뿐이었다.
1883년(계미) 봄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도내(道內)13 태산현에 선생을 제향
하는 서원이 있었다. 원유(院儒 ; 서원의 유생) 변길용(邊吉容)과 황기환(黃基煥)이 소매에
서 두루말이 1권을 꺼내 보이며 나에게 묻기를 “서원에는 원지(院誌)가 없을 수 없고 원지
는 목판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한 마디 말씀을 서문으로 써주
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자세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나는 적임자가 아니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비록 그렇더라도 선생을 옛적부터 존경하며 그리워하기를 세상
을 뛰어넘는 감회가 있소. 고사한다면 정성이 없는 게 아니겠소?”라고 답하였다.
이에 손을 씻고 두루말이의 본말을 살펴보았다. 『계원필경집』의 두 서문이 첫 머리 제
일의(第一義)가 되어 선생의 성함과 호, 사실(事實), 문장, 도덕이 남김없이 모두 쓰여 있었
다. 유상대 비문과 중수기(重修記) 또한 아득했던 모습을 심히 다 드러나 나같은 후학이
감히 거듭해서 말할 것이 없었으며, 이하에는 『무성서원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무성서원원지』에는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모시며 영천 신 공(신잠)을 합향(合享)하
고, 불우헌 정 공(정극인)·눌암 송 공(송세림)·묵재 정 공(정언충)·성재 김 공(김약묵)·명
천 김 공(김관)이 배향된 일, 칠현(七賢)을 제향(躋享)한 축문, 서원의 편액을 요청하는 상
소와 왕의 허락을 받은 사적(事蹟), 사액(賜額) 될 무렵의 치유문(致侑文 ; 致祭文)과 연액
(延額) 의절, 영정을 봉안(奉安)할 때 주고받은 통장(通章 ; 통문)과 정문 일기(呈文日記),
13 원문에는 성내(省內)이라고 되어 있다. 도(道)와 같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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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계원필경』을 간행한 사적, 서원의 터에 투장을 금지하고 원예(院隸 ; 서원의 노비)의 역
을 덜어주는 일로 읍에서 아뢴 것[邑稟]과 유장(儒狀), 의정부와 영읍(營邑)14에서 제판(題
判)한 전후 문서를 짓고 베끼는 사무와 담당한 유생들의 그 이름이 수록되어 있었다.
아! 선생의 시를 읽고, 선생의 문장을 암송하며 아직도 태산과 같이 선생을 우러러보
고, 홍벽(弘璧)15처럼 귀중하게 여긴다. 하물며 이 서원은 선생이 이은(吏隱)16하신 곳이
자 술 마시고 시를 읊은 지역이니 사우(祠宇)를 세워서 선생을 배향한 것은 옛날에 지방
의 이름난 선비[鄕先生]가 죽으면 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것과 같고, 현가(絃歌)가 끼친 교
화는 자유(子游)가 다스린 무성 지역과 같다.17 사액의 은전(恩典)을 받아 크게 선포하니
서원의 중대함이 더욱 어떠해지겠는가? 무성서원의 성쇠는 선생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음
을 알지만, 우리 도의 운수와 성쇠는 무성서원의 보존 여부와 크게 관련이 있다. 이 『무성
서원원지』를 저술하여 간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선생의 문장과 도덕에 대해서 숭상할
바를 알게 하여 선생의 서원을 지키는 것이다.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듯이 지금 과거를
돌아보니 사문(斯文)18을 일으켜 바로 세우고 무성서원에 귀의(歸依)한다면 무성서원의
다행이 아니라 바로 한 나라의 다행이고 만세(萬世)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것으로
이후 선생의 시를 읽고 문장을 외우는 여러 군자들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1884년(갑신)19 단오절(端陽節)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전라도관찰사겸순찰사(全羅
道觀察使兼巡察使) 안동 김성근(金聲根)20
14 감영이나 병영이 있는 고을로 여기에서는 전라감영을 뜻한다. 이후 전라감영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겠다.
15 큰 보배로운 구슬로 최치원이 남은 글을 뜻한다.
16 낮은 관직에 몸담고 은자(隱者)처럼 산다는 뜻으로 최치원이 태산 태수를 지낸 것에서 유래한다.
17 공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다스린 곳이 무성인데 ‘공자께서 무성에서 현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셨
다’(子之武城 聞絃假之聲)라는 일화가 『논어』 양화편에 나온다. 여기에서 무성이라는 단어가 유래 되었다.
18 유교문화를 뜻한다. 앞으로 사문(斯文)은 따로 역주를 붙이지 않겠다.
19 원문에는 알봉군탄(閼逢涒灘)으로 기재되어 있다. 알봉(閼逢)은 고갑자에서 ‘갑(甲)’을 가리킨다. 군탄(涒
灘)은 고갑자에서 ‘신(申)’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합하면 갑신, 즉 1884년에 해당한다.
20 김성근(1835-1919) : 안동(安東) 김씨이고, 자는 중원(仲遠)이다. 1861년(철종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
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예조참판, 한성부 부윤 등을 거쳐 1883년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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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원지 서문[院誌序]
1882년(임오) 가을 내가 태인현에 수령으로 부임하였는데 현은 대개 고운 선생께서 인
애(仁愛)를 베푼 곳이며 또 선생을 제향하는 서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만히 스스로
다행이라 생각하니 천년 뒤에도 비록 높은 산을 우러러 보듯이 현인의 행실을 본받더라
도 유생들이 공자[孔夫子]에 대해 그분의 말을 암송하고 그리워하여 존경하고 사모하며
잊을 수 없는 것은 붓과 종이 사이에 남겨진 찌꺼기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죽은 양처보
(陽處父)21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 가능하겠냐만 선비란 본디 백세(百世) 뒤에도 서로 감
응하는 것이 있어 사람이 그렇게 하려 하지 않는데도 절로 그렇게 되고,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 없는데도 그런 것이 이따금 그 사이에 있다. 이런 것들은 또한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인가?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을진저! 매번 밤기운이 청명하여 황홀하니 마
21 양처보(陽處父) :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조 문자가 숙예(叔譽)와 함께 구원(九原)을 구경하였는데, 조
문자가 말하기를 ‘여기 죽은 이들을 만일 살릴 수 있다면 내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하니, 숙예가 말하기
를 ‘아마도 양처보(陽處父)일 것이다.’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는 훌륭한 사람이 죽어서 다시 살
아 돌아오게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관찰사 김성근(자료제공:미국 워스콘신대학교 밀위키캠퍼스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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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치 선생의 거처로 들어가 어렴풋하게 모습을 뵙고 (선생의) 경계하고 일깨워주시는 말씀
을 들은 듯하여 자못 사람들에게 비루한 마음이 싹 틔우지 않도다. 현가루[絃歌之室]를
돌아보니 마치 자유(子遊)22가 공자를 모시고 나눈 문답(問答)이 부지런히 끊임없는 듯하
다. 청녕헌(淸寧軒)23을 바라보니 선생과 더불어 직접 몸소 교체하는 것이 마치 소하(簫
何)와 조참(曹參)이 서로 번갈아가며 재상을 맡아도 법령이 한결같이 선생의 약속과 변함
이 없는 듯하다.24 이를 통해서 살펴보면 보고 느끼는 사이에 경계하여 깨우치고 흥기한
것이 모두 선생의 은혜이다. 마침 오셔서 인애의 유풍(遺風)인 곳이 되고, 마침 떠나셔서
선생의 혼령을 모신 곳이 되었으니 이 땅이 선생과 연관 있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 서원은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여섯 선생을 배향하였는데, 그 중 한명이 명천 김공
이다. 옛날 나의 문청공(文淸公)25 선조가 전라도를 순찰하실 때에 지나는 길에 방문하
여 잠깐 이야기 하는 동안 오랜 벗이 된 듯하였다.26 내가 남쪽 지방을 다스리려 마침 이
지역에 왔으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시대는 다르나 서로 감응하여 자연히 모여서
부응하게 하는 신묘함이 은은히 그 사이에서 알선하지 않겠는가? 어찌 멀다하여 공경하
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대개 『무성서원원지』를 간행하는 것은 도를 수호하고 현인을 존숭하는 성대한 일과 관
계되는데 어찌 감히 서로 딴 마음을 품는 생각이 있겠는가? 그러나 근세 이래로 선비들
22 언언(言偃) : 언언은 자유의 본명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그가 무성에서 읍재를 지내 여기에서 그와 관련
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23 청령헌(淸寧軒) : 태인 동헌의 이름이다. 이는 1816년(순조 16) 4월에 건립한 것으로, 팔작지붕이다. 전라
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이다.
24 현재 태인 수령인 자신이 마치 태산태수 최치원과 직접 임무를 교대하는 것 같다는 의미이다.(『사기(史
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5 정철(1536-1593) : 연일(延日) 정씨로, 자는 계함(季涵),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에
서 장원하였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는 1581년부터 1582년까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
으므로 정이원이 이렇게 기재한 것이다.
26 길가에서 처음 만나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하는 사이에 오랜 벗처럼 여기게 된다는 말로, 한
번 만나보자마자 의기투합하여 지기(知己)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
어도 처음 만난 사이처럼 생소하기만 하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하면서도 오랜 옛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바로 상대방을 알고 모르는 차이를
말해 주는 것이다.”(『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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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의 자취가 바르지 않아 작은 새가 매의 날개를 찢고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리는 폐단이
이처럼 끊이지 않으니 여러 군자들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우리가 선생의 당(堂)에
축일을 드릴 때 선생의 문하에 종사하는 자들은 모두 선생의 무리이다. 거의 백세 뒤에도
염완입나(廉頑立懦)27 할 수 있으니 선생의 위풍과 운치가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
렇다면 이 원지(院志) 또한 장차 더불어 유구히 이어져 내려와 깎이지 않고 스스로 간행
될 것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무성서원원지』 가운데 있는 조항의 구절마다 하나라도 선생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
으니 의당 공경하고 삼가는 데 겨를이 없고 『무성서원원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거듭
기록할 필요가 없다. 선생의 문장과 학술이 당세에 발휘되어 지금 후학들을 깨우쳐 후천
(後天)의 수명28을 헤아리는 것은 앞 사람들이 잘 갖추어 놓았으니 어찌 견해가 얕고 학
문이 미천한 내가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재어 만에 하나라도 찬양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성은 최이며 휘는 치원(致遠)이고 그 호는 고운(孤雲)이니 문창(文昌)이 시호이다.
1884년(갑신) 음력 6월[季夏] 상순[上澣] 지현(知縣 ; 태인현감) 정이원(鄭履源)29이 서
문을 짓다.
27 염완입나(廉頑立懦) : 맹자가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지아비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지아
비는 입지(立志)하게 된다.” 라는 말을 축약한 것이다.(『맹자(孟子)』, 「만장(萬章)」 하)
28 후천(後天)의 수명 : 후천(後天)의 수명은 하늘보다 수명이 길다는 뜻이다. 이백(李白)의 악부(樂府)에 “하
늘보다 뒤에 늙어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쇠해짐을 본다.(後天而老凋三光)”고 표현하였다.(『이태백집(李太白
集)』 권2 비용인(飛龍引))
29 정이원(1843-1899) : 연일(迎日) 정씨이고, 자는 긍여(兢汝)이다. 1876년(고종 13) 진사시에 입격하고, 1885
년 증광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2년 8월부터 1884년 7월까지 태인현감으로 재임하였다. 이정직의
후임으로 도임하였고, 1885년에 ‘현감 정후이원 영세 불망비(縣監 鄭侯履源 永世 不忘碑)’가 현재의 피향
정 경내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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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발문(跋文)
기양연(奇亮衍) 발문(跋文)
원지[誌]라는 것은 서원의 역사이니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시간 순
대로 편찬하는 취지는 제향위(諸享位)의 실적(實蹟)과 서원의 흥망성쇠를 원지(院誌)를
펼치면 환하게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니 그런 연후에야 원지의 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서원에는 고운 최 선생과 여섯 선생이 배향되었는데, (고운) 선생은 신라 말에 우뚝
하게 나와서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가서 학문을 밝혀 인현(仁賢)의 교화가 아직도 여유
있고,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대개 저쪽에서 배운 것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깨우쳐
주어 수 천리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질서정연해져 중국과 병칭(竝稱) 되었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생을 비록 집집마다 제사를 받드는 것도 괜찮지만 필시 태산의 무성(서원)에
배향된 것은 까닭이 있다.
선생께서 일찍이 이 현에 읍재(邑宰)로 오셨으니 곧 옛날에 동향(桐鄕)30이라고 할 만
하며, 유풍(遺風)과 좋은 풍속이 아직도 남았으니 선생의 혼령을 어찌 태인에서 간절히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선생의 유애(遺愛)가 사람들 마음에 남아 설과 삼복(三伏) 및 납
향(臘享)31에 아직도 마을 늙은이들을 분주히 다니게 하고 하물며 멀고 가까운 유생[章
甫]32이 예법을 따라 일을 치르며, 선생의 도를 외우고 선생의 책을 읽으며 나아가고 물러
감에 우러러 배례(拜禮)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듯 존경하고 사모하기를 하루같이
하니 선생은 필시 저승에서 빙그레 웃으실 것이다.
30 동향(桐鄕) : 중국 안휘성(安徽省) 동성현(桐城縣) 북쪽의 지명으로 춘추 시대 동국(桐國)이다. 한(漢)나라
의 주읍(朱邑)이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소송과 부세를 맡아 고을을 잘 다스렸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워 받든 것에서 유래한다. 이후 형벌을 행하지 않더라도 아전이 두려워하며 백
성은 잘 따르는 고을을 지칭한다.
31 납향(臘享) : 납일(臘日)에 한 해 동안 이룬 농사와 그 밖의 일들을 여러 신(神)에게 고하는 제사를 뜻한다.
32 장보(章甫) :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먼저, 중국 은(殷) 나라 시대에 머리에 쓰던 예관(禮冠)을 가
리킨다. 공자(孔子) 이후로는 유관(儒冠)으로 쓰였다. 다음으로, 유생이나 선비를 의미한다. 공자(孔子)가
장보를 쓰자 후세 선비들이 따라 쓰면서 ‘장보를 쓴 남자’가 명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장
보를 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유생이라고 표현하였다. 앞으로 장보(章甫)는 유생으로 통칭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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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서원에는 예부터 원지가 없었고, 수 백 년 동안 전해 오는 원중 사적(院中事蹟)을 베낀
것도 오래되어 쉽게 이지러져 마침내 다 없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원생[院儒] 송정순(宋程
淳)·김형식(金亨植)·우재호(禹在鎬)·장석배(張碩培)가 단연코 자신들의 임무로 여겨 끊어지
고 흩어져 남은 것들을 수습하였다. 옛것은 보존시키고 새 것은 보태 널리 헤아려 보고
넓게 실어 모아서 한 책을 만들고 간행하여서 오래도록 전해지도록 도모하였다. 일이 장
차 끝나가므로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현재 진신 집사(縉紳執事)33로
서원에 이름을 올려 무릇 밀려드는 서원의 일로 감히 능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사양할 수
가 없어 내 외람됨을 잊고는 이와 같이 말하는 바이다.
1884년(갑신)34 5월 하순[下澣]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정읍현감
기양연(奇亮衍)35 발문[跋]을 짓다.
33 진신(縉紳) : 관리(관원)을 뜻하고, 집사(執事)는 각종 의식에서 주관하거나 주관자를 도와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신집사는 관리로서 각종 의식을 주관하는 인물을 뜻한다. 무성서원은 1868년의 서
원철폐령으로 전라도에서는 무성서원과 필암서원, 포충사만 남자 그 조직이 확대되었고, 1876년부터
1886년까지 현감이 원장을 역임하였다. 기양연이 바로 그 중 한명이었다.
34 원문에는 알봉군탄(閼逢涒灘)으로 기재되어 있다. 알봉(閼逢)은 고갑자에서 ‘갑(甲)’을 가리킨다. 군탄(涒
灘)은 고갑자에서 ‘신(申)’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합하면 갑신년이다.
35 기양연(1827-1895) : 행주(幸州) 기씨이고, 자는 자민(子敏)이다. 1867년(고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하
였다. 이후 전적, 정언, 예조정랑, 장령, 사복시정, 부수찬 등을 거쳤다. 이후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 되자
삼정책(三政策)의 상소를 올리고 고향인 장성에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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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신기조(申岐朝) 발문(跋文)
서원에 원지[誌]가 있는 것은 나라에 역사가 있고, 집안에 족보가 있는 것과 같으니 어
찌 서원이 있으면서 원지가 없을 수가 있겠으며 원지를 간행하지 않고서 또한 어찌 오래
도록 전할 수 있겠는가? 본원(本院)이 매우 빈궁하고 판각하는 일은 또 규모가 커서 원지
를 찍지[印字] 못하자 많은 선비들이 근심하며 탄식하면서도 겨를 없이 부지런히 힘써 지
금에서야 비로소 간행되었다. 아! 우리 동방의 사도(師道)가 다시금 밝아졌고 호남의 사
기(士氣)가 부흥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매위(韎韋)36의 틈에 끼어 이미 유림과
함께할 수 없는데 하물며 도덕과 문장의 근원을 엿보겠는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봉황과
지초(芝草)를 보면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 상서로 여기고, 맑게 갠 하
늘에 밝게 비친 해는 노예라도 또한 그 청명(淸明)함을 안다.37 고운 선생과 같은 이는 북
쪽 중원에서 유학하여 칭송이 사방으로 퍼졌다. 동쪽 고국(故國)으로 돌아 오셔는 당시
에 높은 직위에 등용되었으나 도리어 용감히 물러나 몸을 깨끗이 하고 은거하여 도덕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므로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 법인데 못 알아 듣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선생을) 존경하여 우러러 보았다.38
올해 봄에 (내가) 남쪽 도(道)의 한 작은 현에 관리가 되었고 외람되이 서원의 임원도
되었다.39 서원은 지금 전주의 치소 남쪽의 태인현에 있는데 옛날에는 시산(詩山)으로 불
리었다. 공께서 옛적 은거하던 무렵에 계시면서 신묘한 은택을 남기셨으니 (그곳은 선생
이) 잔을 띄어놓고 시를 읊으며 유유히 생활하시던 곳이다. 이로부터 어느덧 비로소 사
36 매위(韎韋) : 고위 무관을 지칭한다.
37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여최군서(與崔羣書)」에 “봉황 지초를 보면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아
름다운 상서(祥瑞)로 여기고, 청천백일을 보면 천한 종들도 청명하다는 것을 안다.(鳳凰芝草 賢愚皆以爲
美瑞 靑天白日 奴隷亦知其淸明)”라는 말이 나온다.
38 송(宋)나라 소백온(邵伯溫)의 『문견전록(聞見前錄)』 권1에 어사중승(御史中丞) 뇌덕양(雷德驤)이 남의 집
을 강제로 차지하고 뇌물을 거두어들이는 조보(趙普)의 비행에 대해 탄핵하니 상이 성을 내어 꾸짖기를
“솥과 냄비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너는 조보가 우리의 사직신(社稷臣)이란 것을 아직 못 들었는가.(鼎鐺
尙有耳 汝不聞趙普吾之社稷臣乎)”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이후로 귀가 있어도 못 알아 듣는 사람처럼 엉
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책망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39 이 서문을 쓴 신기조가 흥덕현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태인 인근의 흥덕현감으로서 무성서언의 임원이
되었다. 즉 1871년부터 1886년까지 무성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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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祠)가 건립되고 사는 원(院)이 되었으며 원은 다시 사액의 은전[恩額]을 입었으니 어찌
선생의 도덕이 장구하면서 더욱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선생을 배향하였는데 모두
문학 안에서 뚜렷이 빛이 나며 당대 큰 인물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서원의 귀중한 원지에
실린 것은 어떠 하겠는가? 서원을 방문하는 날에 원지(院誌)를 공경히 열람하였는데 변변
치 않는 등사본이 전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무릇 지(誌)라는 것은 알린다는 것이다. 원지가 있어야 장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기록된 것을 알아 그 서원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원지가 있지 않으면 어찌 알겠는가.
원지 때문에 전해지고 전해져 먼 후대까지 이어져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 이
것이다. 비록 금석(金石)에 새기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사라질까 근심되나 고금을 고증하
여 후학을 일깨워 주는 방법에 어찌 이것을 전하는 것 만하겠는가? 오호라! 도는 멀어지
고 성인의 말씀은 없어져 문헌에서 고증할 수도 없는 것이 이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많아
서 그런 것이니 감히 삼가지 않겠는가? 한탄을 머금으며 돌아옴에 다만 마음에 걸렸다.
재유(齋儒) 김영렬(金永烈)·송희옥(宋曦玉)·배기만(裴基萬)이 내가 원임(院任)이라 하여 찾
아와 상의하기를 “또 그대로 두면 얼마 안 가서 원지가 없어지게 될 것이니, 후세의 사람
들이 비록 옛 영광과 아름다운 덕행을 찾으려 해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좋은 말에 절하고 동의하며 호응하였다. 이윽고 결의하고 판각하는 공역을 시작하
여 문장을 부탁해오자 두려워하며 거절하길 “나는 합당한 사람이 아니니 내가 어찌 감
히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여러 번 요청하므로 이와 같이 짓는다. 그러나 선생의 도
덕과 원지의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히 관찰사[巡相閤下] 김 공(金公)40의 서문에 갖춰져 있
으니 어찌 감히 만분의 하나라도 군더더기를 덧붙이겠는가? 다만 여러 분들이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고 일에 힘쓰는 행동에 그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마침내 이와 같
이 쓴다.
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1884년(갑신) 윤달 든 여름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흥
덕현감(興德縣監) 신기조(申岐朝)41가 삼가 발문을 쓰다.
40 김성근을 가리킨다.
41 신기조(미상-미상) : 생몰년, 본관, 거주지 등을 알 수 없다. 『팔도총록(八道總錄)』에 의하면 1883년(고종
20)에 흥덕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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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142
『예기』에 이르기를 “단술[醴酒]이 맛이 좋긴 하지만 제사 때에 현주(玄酒)43와 명수(明
水) 같은 물을 윗자리에 놓는 것은 물이 모든 맛의 근본임을 중시하려고 해서이다. 각종
화려한 무늬의 옷감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제사 때에 거친 삼베로 동이를 덮는 것은 부녀
자들이 하는 길쌈질[女功]의 시초를 돌아보고 귀하게 여기려 해서이다.”44라고 하였다. 옛
날의 군자(君子)가 반드시 그 근본과 시초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다.
우리 동방에 문장이 나와서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운(孤雲) 최공(崔
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우리 동방의 선비로서 북쪽으로 중국에 유학(遊學)하여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것도 최공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최공의 글 가운데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오직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2부(部)가 있을 뿐이
다. 그러고 보면 이 2부의 서책이 또한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다.
글을 숭상하는 우리 동방의 풍조가 우리 조선[我朝]에 이르러서는 더욱 빛나고 무르익
어 집집마다 연허(燕許)45와 조유(曹劉)46가 배출되면서 시와 문으로 문집을 이룬 것이 집
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최공의 글을 아는 사람은 드물기만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근대 사람이 편찬한 『동국서목(東國書目)』을 보니 『중산복궤집』이 실려 있
기에 널리 구해 보았지만 끝내 얻지 못하였다. 다만 『계원필경』 20권은 우리 집안에서 대
대로 소장해 왔으므로 내가 어려서부터 진귀한 글로 알고서 음미해 왔다. 그러나 간혹
42 한국고전종합DB에 『계원필경집』 원문과 해석본이 있다. 여기에서는 해당 내용을 윤문하여 수록하였
다.(https://db.itkc.or.kr/dir/)
43 현주(玄酒) : 제사를 지낼 때 술 대신에 쓰는 맑은 찬물이다.
44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있는 내용이다.
45 연허(燕許) : 당 현종대의 명신인 연국공(燕國公) 소정(蘇頲)과 허국공(許國公) 장열(張說)을 가리키는 말
이다. 두 사람은 문장이 뛰어나 ‘대문장’을 일컫는 의미로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이 나왔다.
46 조유(曹劉) : 위대(魏代)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사람은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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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록 박아(博雅)47하고 글을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모두 그 글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이 글이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글이 동방에 전하지 않게 된다면 이
는 현주(玄酒)를 태실(太室)에 진설하지 않는 것과 같고, 거친 삼베로 제사용 술동이를
덮지 않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백성에게 근본을 잊지 말라고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간혹 공의 글이 모두 변려(騈儷) 사륙문(四六文)48으로서 옛 작자(作者)의
글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이 중국에 들어가서 활동한 시기가
당(唐)나라 의종(懿宗)과 희종(僖宗) 연간이었는데, 당시에 중국의 글이 변려문을 전적으
로 일삼았던 것을 감안할 때 공이 그 풍조를 따랐던 것은 원래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공이 지은 글을 보면 왕왕 화려하면서도 들뜨지 않은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황소(黃巢)49에게 보낸 격문(檄文) 1편만을 보더라도 기운이 굳세고 뜻이 곧으니 결
코 교묘하게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 것이 아니요, 공이 지은 시 역시 평이(平易)하
고 우아(優雅)하니 만당(晩唐)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더욱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는 대개 명수(明水)와 거친 삼베 같은 바탕 위에 단술의 맛과 화려한 옷감의 아름다움
을 겸한 것이라고 할 것이니, 이 어찌 보배로 여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공이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군부(軍府)에 들어갔으니 이것만으로도 벌써 당시에
명성을 떨쳤다고 할 것인데, 공은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떠나오면서 마치 헌 신발을 벗어
버리듯 하였다. 그 뒤 동방에 돌아와서는 한원(翰苑)50에 오르고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거쳐 아찬(阿飡)에 이르렀는데, 아찬은 신라의 대관(大官)이다. 게다가 현달(顯達)할 길이
47 박아(博雅) : 학식이 넓고 성품이 단아하다는 뜻이다.
48 변려(騈儷) 사륙문(四六文) : 한대(漢代) 후기에 시작되어 남북조와 당나라때 유행한 문체이다. 문장이 4
자와 6자를 기본으로 대구(對句)로 이어진다. 변(騈)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의미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이다.
49 황소(黃巢, 미상-884) : 당(唐) 나라 말기에 농민군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881년에 도성(都城)인 장
안을 점령하여 스스로 황제까지 올랐다. 883년에 당은 돌궐계 유목 부족인 사타(沙陀)의 도움으로 그를
몰아내고, 이듬해 황소는 자결하였다. 고병(高騈)이 도통사(都統使)가 되어 황소를 토벌하는데 최치원이
종사관(從事官)으로 대신하여 격문(檄文)을 지어서 보냈다.
50 한원(翰苑) : 한림원이나 예문관 등 임금의 말과 명령, 외교문서를 짓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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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바야흐로 끝나지 않았는데도, 공은 또 스스로 산림(山林)의 적막한 곳으로 나아가 배회
하며 그 몸을 마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는 대개 그 시대가 모두 뜻있는 일을 할 만
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는데 출처(出處)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
다. 그런데 출처에서 그 때를 잃지 않는 것은 현자(賢者)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
자가 지은 글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전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인데, 더군다나 그 글
이 저토록 걸출하고 또 동국(東國) 문장의 근본과 시초가 되는 데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전라도 관찰사(湖南觀察使) 서유구(徐有榘)51은 바로 내가 학식이 넓고 성품이 단아하
며[博雅] 글을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자라고 칭한 그 사람이다. 내가 이 글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얼른 가져다가 교열(校閱)한 뒤에 자기 봉록(俸祿)을 내어 활자로 인
쇄해서 수십 백 본(本)을 만들어 널리 전파하려 하면서 “이 글이 동국(東國)에서 끊어지
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아!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는 것은 백성에게 후덕함을 가르치는 것이요, 현인(賢人)을
표장(表章)하는 것 이야말로 백성에게 착한 일을 권면하는 것이다. 서공(徐公)의 마음 씀
이 이와 같으니, 그가 호남에서 행하는 정사(政事)가 어떠할지를 또한 알 수가 있다.
역(役)이 완료된 뒤에 서공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그대가 바로 이 글을 전하였으니, 지
금 한마디 말을 아껴서는 안 된다.”라고 하기에 내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
다. 최공 행적의 본말(本末)과 이 글의 고증(攷證) 자료 등에 대해서는 서공의 서문에 자
세히 나와 있으니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1834년(갑오) 9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풍산(豐山) 홍석주(洪奭周)52가 서문을 짓다.
51 서유구(1764-1845) : 대구(大丘) 서씨이고, 자가 준평(準平)이다. 1790년(정조 1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
제하였다. 순창군수, 부제학, 이조판서, 대제학,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가학을 이어 농학(農學)
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가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농업서에 대한 집대성으로 평가 받는다.
52 홍석주(1774-1842) : 풍산(豊山) 홍씨이고, 자가 성백(成伯)이다. 1795년(정조 19)의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급제해 사옹원직장, 정언, 이조참의, 병조참판,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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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253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하여 지은 것으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며, 고운은 그의 호이다. 호남(湖南) 옥구인(沃溝人)
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살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54이 회남
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장(狀)·문
(文)·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
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 ; 관복)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55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
가 무성태수(武城太守)56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지만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쉽게 얻었으며[拾芥]57,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
53 한국고전종합DB에 『계원필경집』 원문과 해석본이 있다. 여기에서는 해당 내용을 윤문하여 수록하였
다.(https://db.itkc.or.kr/dir/)
54 고변(高騈, 821-887) : 당(唐) 나라의 절도사로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다. 말년에 신선술에 빠져
군무(軍務)를 여용지(呂用之)에게 맡기고 지내다가 부장인 필사탁(畢師鐸)에게 살해당하였다.
55 국신사(國信使) : 국가에서 보내는 사신단이다.
56 무성태수(武城太守) : 태산태수 즉, 태인의 태수를 의미한다.
57 ‘티끌을 줍는 일’로 명예나 부귀 등을 쉽게 얻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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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에 빈공(賓貢)58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
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막부에 몇 년 동안 기거하면서 고변이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여
용지(呂用之)59와 제갈은(諸葛殷)60 등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초연히 자기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引嫌] 떠나갔다. 떠난 뒤 3년 만에 회남(淮
南) 지역에서 난리가 일어났는데, (공은) 또 기미(幾微)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명철한 군
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인격이나 그 문장으로 보나 후세에 전해지
도록 해야만 할 것이요 절대로 그대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왕에게 올린 표문에 의거하면, 이 문집 이외에 『금체부(今體賦)』 1권, 『금체시(今體
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등이 또 있다. 그리고 『신당
서』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전하지 않고 오직 이 『계원필경집』만 여러 차례 인행(印行 ; 서
적 등을 인쇄하여 펴냄)되었는데, 판각(板刻)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탑본(搨本 ; 비석 등
의 문자를 탁본하는 것) 또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계사년(18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
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
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공(洪公 ; 홍석주)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
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
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
58 빈공(賓貢) : 당대(唐代)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를 의미한다. 특히, 신라
와 발해인들이 많이 합격하였다. 875년에 발해 오소도(烏昭度)가 신라 이동(李同)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
하자, 최치원은 이를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며 치욕스럽게 여겼다. 906년에는 신라의 최언
위(崔彦撝)가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烏光贊)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오소도가 오광찬을 최언위보다 높게
올려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이처럼 신라와 발해의 유학생들이 빈공과에서 순위로 다퉜지만
최치원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다.
59 여용지(呂用之) : 당(唐) 나라에 대대로 거간꾼 노릇을 하다가 고변(高騈)에게 발탁되어 참모가 되었다. 고
변이 신선술에 빠진 뒤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고변이 필사탁(畢師鐸)에게 죽자 도
망갔다가 잡혀 양행밀(楊行密)에게 목이 잘렸다.
60 제갈은(諸葛殷) : 여용지와 함께 고변에게 발탁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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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얼른 교정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陜川
郡)의 가야사(伽倻寺)61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아! 명주(名酒)가 있는 동네에는 반드시 두강(杜康)62의 이름을 내걸고, 명검(名劍)의
칼날에는 반드시 구야(歐冶)63의 이름을 표기하니, 이는 그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기 위
해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들은 이 문집을 개산(開山) 비
조(鼻祖 ; 시조)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집이 또한 동방 예원(藝苑)의 근본
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문집이 닳아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서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공이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저작한 글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다
만 범궁(梵宮)64과 사묘(祠廟) 사이에서 수풀을 헤치고 이끼를 긁어내면 그래도 십여 편
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분류해 원집(原集)에 붙여서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인쇄해
보고 싶은 생각을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8) 정월에 왕탁(王鐸)
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고, 5월에는 고변을 시중(侍中)으
로 올리고서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파직하였는데, 고변이 병권(兵權)을 잃은 데다가
이권(利權)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표문을 올려 스스로 호소하
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불손하였으므로 상이 정전(鄭畋)65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작
61 합천군(陜川郡)의 가야사(伽倻寺) : 원문에는 가야사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 합천군 가야산의 해인사(海印
寺)를 의미한다. 최치원이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2 두강(杜康) : 동주(東周) 시대 낙양(洛陽) 일대의 주신(酒神) 두강(杜康) 신화와 관련 있다. 유명한 술의 대
명사로 사용된다.
63 구야(歐冶) : 춘추시대 월(越) 나라 사람으로 칼을 잘 만들었다고 한다. 월왕(越王)을 위해 거궐(巨闕)·담
로(湛盧)·승사(勝邪)·어장(魚腸)·순구(純鉤)의 5검을 만들고, 초왕(楚王)을 위해 용연(龍淵)·태아(泰阿)
·공포(工布)를 만들었다고 한다
64 범궁(梵宮) : 범천왕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절 혹은 불당을 총칭하는 말이다.
65 정전(鄭畋) : 당(唐) 나라의 정치인으로 처음에 번진막부(藩鎮幕府)에서 관리 생활을 하다가 조정으로 들
어와서 호부시랑(戶部侍郎), 병부시랑(兵部侍郎), 문하시랑(門下侍郎),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재상
(宰相)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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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집에 나오는 〈시중에 올려 준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加侍中表]〉을 보면, 겸손한 말로 인구(引咎)했을 뿐이요, 격분하거나 발
만(勃謾)한 언사는 한마디도 없다. 또 〈선위하는 조서를 내린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賜宣
慰表]〉을 보면 “우러러 윤음(綸音)을 살펴 보건대, 신의 부족한 정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
기시어 군사들이 단합하고 백성들[黎庶]이 편안하다고 하다.”고 하였다. 황제가 이해하고
위로하며 장려해 준 것이 이처럼 은근하고 진지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역사에서 말한
바 “조서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草詔切責]”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상고해 보건대, 중화(中和)의 기년(紀年)은 4년으로 끝나는데, 공이 신라왕에게 표
문을 올린 연월(年月)을 보면 중화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공이 중화 4년 10월에
배를 타고 항해하여 이듬해 봄에 비로소 신라에 도착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1년 전에 광계(光啓)로 개원(改元)한 사실을 어쩌면 듣
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834년(갑오) 7월 보름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 관풍헌
(觀風軒)66에서 짓다.
66 관풍헌(觀風軒) : 관풍각을 의미한다. 관풍각은 관찰사가 민정과 풍속을 살피던 누각으로, 규장각 소장
「전주지도」를 보면 선화당 동쪽에 있었다. 중층의 누각형태로 팔작지붕으로 묘사되었으며 누각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전면에 있고, 누각 수위에는 난간이 시설되어 있다.(전주시·전라감영복원재창조위원회, 『천
년의 시간을 읽다-전라감영 복원백서』, 전주시, 2015, 38쪽) 2020년 현재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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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대비문(流觴臺碑文)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
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
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
하며 일소(逸少)의 고사67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하며 고사(故事)로 삼
았다.
그 누대도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고 말았는데, 나의 벗인 조 사군(使君)68
자직(子直 ; 조상우)이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그 누대 위에서 소요하다가 먼 과거의 일에
대한 감회가 뭉클 솟아오르자 바위를 쌓아 증축한 뒤에 작은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는 나
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왕년에 내가 풍악(楓岳) 아래 고을69에서 재직할 적에 신
선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지역을 한번 수식(修飾)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미
처 틈이 없었는데, 자직은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태어나서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70에 바닷길로 만리 멀리 중
국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대당(大唐)의 과거에 급제한 뒤에
상대(霜臺 ; 어사대)를 밟고 금문(金門 ; 대궐의 문)에 들어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선생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원문(轅門 ; 군영)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방패에 먹을 갈아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71으로 하여금 넋이 달아나고 담이 떨어지게 하
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100만 군사보다도 낫다는 말에 부합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뛰
어난 재질과 성대한 명성을 지니고서 몸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쓰고 남은 찌꺼
67 일소(逸少) : 일소는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 321-379)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회계산(會
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68 사군(使君) : 임금의 명을 받고 온 사신을 높여서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태인현감으로 재직한 것을 의미한다.
69 풍악(楓岳)은 금강산이고, 풍악의 아래 고을은 고성군을 의미한다. 즉, 조지겸이 1682년 당시 고성군수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숙종실록』 권 37, 8년 4월 27일 갑진)
70 12세이다.
71 황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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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 끄집어내 활용했어도 한 나라를 유지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자진(梅子
眞)72처럼 동묵(銅墨)73의 지위에 침륜(沈淪)했는가 하면74 끝내 세상 밖에서 떠돌면서 선
문(羨門)75의 무리에 자신을 의탁하였다. 어째서인가?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난 그 시운이 불우해서 중국에 들어가서는 난리에 휩싸였고 고
국에 돌아와서는 위망의 조짐이 보였으므로,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한 몸도 보
전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표연히 멀리 떠나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혼란한 세상을
벗어났던 것이었으니,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를 읊다 보면 거듭 그의 뜻을 탄식하며 동
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상해 보건대, 그는 이곳에서 정처 없이 배회하시곤 했을 것
이니[婆娑徜徉] 감개(感慨)하여 계승하는 것이 어찌 다만 면앙(俛仰) 간의 묵은 자취뿐이
겠는가. 공의 청풍(淸風)과 일운(逸韻 ; 고상한 정취)이 온 우주 사이에 흘러넘친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공의 지취(志趣)를 아는 자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대저 어떤 지역이 중하
게 되고 유명해지는 것은 일찍이 사람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정(蘭
亭)의 무림(茂林)도 일소(逸少)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
데, 나 역시 “이 (유상)대의 수석(水石)도 문창(文昌)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났다.”
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1천 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드러내 찬양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
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있을지 모
르겠다.
숭정 기원후(紀元後) 15년76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조
72 매자진(梅子眞) : 한 대(漢) 나라 사람으로 신선도를 배워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 사명산(四明山)에
은거 하였다고 한다.
73 동묵(銅墨) :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74 최치원이 외관직으로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75 선문(羨門) : 고대 선인이었던 선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76 숭정 기원후 15년은 1659년(효종 10)이다. 하지만 조지겸이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시점은 1683년(숙종 9)
이다. 따라서 1659년이 아닌 1683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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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趙持謙)77이 찬한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弘文館) 응교 겸 서학교수(應敎兼西學敎授) 조상우(趙
相愚)78가 글씨를 썼다.
77 조지겸(1639-1685) : 풍양(豊壤) 조씨이고, 자는 광보(光甫)이다. 1663년(현종 4)에 진사, 1670년 별시 문과
에 급제하였다. 고성군수, 이조좌랑,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78 조상우(1640-1718) : 풍양(豊壤) 조씨이고, 자는 자직(子直)이다. 호조좌랑, 태인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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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대 중수기(流觴臺重修記)
숙종 1682년(임술) 늦가을에 조부 동강공(東岡公)79이 이곳 태인현에 부임하였고, 이
듬해 겨울에는 지평(持平)이 되어 조정으로 돌아가셨다. (태인현의 수령으로 계실 적
에) 정사를 처리하는 한 해 사이에 다스림과 교화가 크게 행해져 민간의 풍속은 크게
변해 사람들이 큰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술하고 비각(碑閣)에 또 새겼는데 “청렴 덕행으
로 풍속을 교화하고 고운(孤雲)과 영천(靈川) 두 선생 전후 함께 하네”라고 하여 거의 수
백 년이 되도록 인자하다는 명성이 물거품 되지 않고 유애(遺愛)가 쇠해지지 않아 오고
(五袴)80와 소부(邵父), 두모(杜母)의 노래81가 이 현에서 성대하게 다시 기려졌다. 현의 동
쪽 2사(舍)82 쯤에 옛 고을 터가 있다. 앞으로 협계(峽溪)가 흐르고, 시냇가에 유상(流觴)
이라는 대(臺)가 있었다. 유상대는 돌로 포개졌으며 고목(古木)으로 두르고 있어 부로(父
老)들이 서로 전하길 고운이 지현(知縣)이던 무렵에 노닐 던 곳이며 왕희지[逸少]의 고사
를 본뜬 것이라 한다. 천 년이 지나 비로소 동강공(東岡公)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감회를
일으키기 위해 옛날에 무너진 것을 개축하였다. 직무를 보는 겨를에 간혹 수레 끄는 이
에게 명하여 시골의 수재(秀才)들과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이 곳 수령을 그
만 두고 돌아간 이후에는 부제학 조지겸(趙持謙)에게 고운의 노닐던 자취를 기술하게 하
여 비석에 새기고 손수 글씨를 쓰며 유상대 위에 세웠다.
이후 몇 백 년이 못 돼서 유상대가 또 무너졌고 물길 또한 변해서 유상대 위의 숱한
79 조상우의 호가 동강(東岡)이다.
80 오고(五袴) : 지방 군수(郡守)가 선정(善政)을 베푼 것을 뜻한다. 후한(後漢) 염범(廉范)이 촉군(蜀郡)의 태
수(太守)로 있을 적에 정치를 잘하여 백성이 잘 살게 되자, 모두들, ‘염숙도(廉叔度)가 오기 전엔 저고리
하나 없었는데, 이제는 바지가 다섯 벌이 되었네.’라고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염숙도는
염범의 자(字)이다.
81 소부(邵父)와 두모(杜母) : 소부(召父)는 서한(西漢) 때 소신신(召信臣)을, 두모(杜母)는 동한(東漢) 때 두시
(杜詩)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살
도록 하니, 이곳 백성들이 “앞에는 소부(召父)가 있고,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다.”하였다.(『한서(漢書)』 권
89, 「소신신전(召信臣傳)」 ; 『후한서(後漢書)』 권 31, 「두시열전(杜詩列傳)」 즉, 어진 수령을 칭송하는 노래를
의미한다.
82 사(舍) : 1사는 30리(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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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은 대부분 바람으로 꺾이고 파헤쳐진 비석은 또 큰 홍수로 물에 빠져 소실되어 있는
곳을 모르게 되어 한산(寒山)의 한 조각을83 노인들에게 물어봐도 말할 수 없어 선현(先
賢)이 남기신 유풍(遺風)을 징험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손가락으로 가리
키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내가 1794년(갑인) 겨울에 이 지역에 수령으로 와서 그 아래를 지나가다 황폐해진 유
상대를 보고서 여러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고운·영천 두 현인의 유적임을 알
고는 마음에서 우러러 사모하여 애석하기가 읍 사람들에 몇 곱절일 뿐만 아니었다. 그러
나 흉년에 굶주린 사람을 진휼하느라 수습하는 공역(工役)을 벌일 겨를이 없어 다음해
가을에 되어서야 백성들의 근심이 조금이나마 풀렸어도 오히려 쇠약해 병이 든 백성들을
동원해 유상대를 개축할 수 없었다. 드디어 다음해에 유상대 근처의 옛 것을 좋아하는
인사(人士)들과 의논하여 그들에게 주관하게 하여 돌을 쌓아 허물어진 부분을 막고 나
무를 심어 빈 자리를 메우게 했다. 또한 냇물을 끌어들여 옛날의 유상곡수를 회복하고
자 하였지만 형세 상 어쩔 수가 없었고, 이미 또한 돌을 채취해 사적을 기록한 비(碑)를
만들고자 하였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아! 또 거의 백년 뒤 계수(繼修)할 사람이 있을
지, 내와 골짜기가 바뀌어 현산(峴山)84의 물에 잠긴 비석이 다시 세상에 나올지 모르겠
도다. 이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1744년(갑오) 3월 풍성(豐城 ; 풍양의 별칭) 조항진(趙恒鎭)85이 기록하다.
83 양(梁) 나라의 신하로 유신(庾信)의 자는 자산(子山)인데 일찍이 북방에 가서는 오직 한산사(寒山寺)의 비
(碑)를 사랑하였다. 뒤에 남방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북방은 어떠냐고 물으니, 유신이 말하기를 “오직
한산사의 한 조각돌이 함께 말할 만하고 나머지는 다 개가 짖고 나귀가 우는 것 같다.”라 하였다.
84 현산(峴山) : 진(晉) 나라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을 다스리면서 항상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이에 양호
가 죽자 백성들이 사모하여 현산(峴山)에 비석을 세웠고, 이 비석을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하여
타루비(墮淚碑)라고 불렀다.(『진서(晉書)』 권 34, 「양호열전(羊祜列傳)」) 이현은 고인이 생전에 다스리던 고
을에 있는 고개이다.
85 조항진(1738-미상) : 풍양(豊壤) 조씨이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1768년(영조 44)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1782년(정조 6)의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태인현감, 장령, 헌납, 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태인향교 만
화루의 현판은 조항진이 쓴 글씨이다. 조항진은 유상대를 중수한 조상우의 손자라는 인연으로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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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원지(院誌)
무성서원은 옛날의 태산 사우로 숙종조 1696년(병자)에 사액 받은 이름이다.
대개 태인현(泰仁縣)86은 곧 신라(新羅) 태산군(泰山郡)이다.
문창후(文昌侯)87 최(치원) 선생께서 태수로 재직한 읍으로, 산으로는 가야산(伽倻
山)88, 시산(詩山)89이 있고, 대는 월연대(月延臺)90와 유상대(流觴臺)91가 있는데 선생께서
머무르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던 곳이며 글을 읽는 유풍(遺風)이 있어서 백세에 이르
도록 없어지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鄕人] 월연(月延) 아래에 사우를 세웠다.
중종조 1544년(갑진)에 영천(靈川) 신잠[申先生]이 현감[邑宰]으로 이 고을에 부임하여
열 가지 훈계를 가르치시니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쳐 사우에 합향(合享)하였다.
86 태인현(泰仁縣) : ‘태인’이란 지명은 태산과 인의가 합쳐져서 나온 것이다. 즉, “태인현은 곧 옛날의 태산(太
山)과 인의(仁義) 두 고을이었는데, 우리 조정에서 두 고을의 이름을 합쳐서 태인이라고 하였다.(泰仁縣即
古之太山仁義兩縣也 我朝倂兩縣號曰泰仁)”(『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4, 전라도 태인현)
87 문창후(文昌侯) : 고려시대인 1020년(현종 11)에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으로 높여 문묘에 배향하였고,
1023년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렸다.(『고려사』, 「세가」 4, 현종 11년 8월 ; 「세가」 5, 현종 14년 2월)
88 가야산(伽倻山) : 경남 합천군 가야면과 경북 성주군 가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가 있다. 최치원이 은둔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대인들이 그와 관련성을 찾는 곳이다.
89 시산(詩山) : 시산은 고현내에 있는 지명으로 백제때 대시산군(大尸山郡)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후일
최치원과 연계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尸)를 시(詩)로 변경하여 지명으로 굳어졌다. 현재도 칠보면 시산리
가 있다.
90 월연대(月延臺) : 월연대는 ‘달을 맞이하는 대’라는 뜻으로 무성서원을 품고 있는 성황산 서쪽 능선을 의미
한다.
91 유상대(流觴臺) : 유상대는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현재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小興縣)의 난정
(蘭亭)에 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최치원이 태산 태수로 재직할 때 만들었다
고 한다. 즉,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떠다니는 곳으로, 경주의 포석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최
치원이 검단선사(黔丹禪師)와 함께 유상곡수를 즐겼다는 내용이 설화와 각종 기록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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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태산사 사적(泰山祠事蹟)【만력 44년 1616년(병진) 2월 일】
둔전(屯田)에 대한 일로 유학 김세경(金世經)의 품장(稟狀)
“남쪽 지방의 수령으로 오셔서 다스리는데 학교의 진흥을 우선시하니 문치를 숭상하
는 뜻이 언사(言辭)의 표면에 성대하게 드러났습니다. 【결손】 사람들마다 【결손】 이미 부
임하신 초기에 “만약 학교에 보탬이 되는 것이 있다면 비록 매우 하찮은 말이라도 하찮
다고 여기지 않고, 매우 어려운 청이라도 어렵게 여기지 않겠다.”라고 하시니 어찌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때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태인현에 예부터 사학(四學)이 있는데 오직 우리 영천 신잠(申潛)
수령이 세운 곳입니다. 노(奴)를 뽑아 그 역을 면제시켜 주고, 전토를 주어 그 비용에 보
탬이 되어 선비를 기르는 방도로 삼았습니다.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으니 사
림에 공이 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그 분은 돌아가고 세월은 멀어지며 옛 터는 무성
한 풀로 막혔으니, 현가(絃歌)의 소리는 멈추고,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탄식이 극심해졌
습니다. 다행히 【결손】 오직 동·북 두 개의 학당에서 겨우 유풍(遺風)을 잇는 정도라 뜻
이 있는 후학자가 비록 귀의하려고 하여도 재물을 생산할 길이 없으니, 선비들을 뒷바라
지할 재물이 모자라 늘 스스로 개탄한 지가 오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우도할계
(牛刀割鷄)92가 있어 멀리 뛰어난 발자취를 이었으니 사문(斯文)이 또 여기 있지 않겠습니
까? 무릇 생각하는 바를 주변에 발설하지 않는다면 뒷날 그 때를 잃을까 염려됩니다. 지
금 넌지시 청이 있으니 합하(閤下)께서 어찌 몇 이랑의 전토를 아까워하여 많은 선비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비들의 기상을 배양시켜주고, 우리의 인재(人才)
를 성취시켜 이른바 “뿌리에 물을 주어서 장차 열매를 먹게 한다”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
지 않겠습니까? 【결손】
92 우도할계(牛刀割鷄) :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으로, 작은 일을 하는 데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서두
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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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본관(本官) 고용후(高用厚)93의 제사(題辭; 처분). 둔전 2섬지기 논을 서원과 동·북 두
곳의 학당에 출급하므로 가을에 타작하여 여러 유생들의 공용(公用)으로 하도록 하는
것을 해마다 정식(定式)으로 삼되 뒷날 본읍 수령이 만일 도로 추심(推尋)하는 행동이 있
다면 이 문서를 가지고 고과(告課)할 것.
김일정(金一挺) 전세륜(全世綸) 김남정(金南挺) 김여해(金汝諧) 김봉정(金泰挺) 전천부
(全天賦) 민재중(閔載重)
은지임(殷之任) 김시환(金時煥) 김만정(金萬挺) 백순필(白舜弼) 김세형(金世衡) 김시정
(金時挺) 김상옥(金尙玉)
둔전
결복(結卜) 3결 12부 4속. 옛날에는 문서가 있었으나 현재 문서가 없다.
서책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좌전(左傳)·춘추(春秋)·통감(通鑑)·성리절요(性理節要)·심경부주
(心經附註)·성학십도(聖學十圖)·원규(院規) 1부·삼강행실(三綱行實)·이륜행실(二倫行實)·향
약(鄕約) 1권·소학(小學)·사우도(祠宇圖)는 명록(銘錄)만 있을 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다.
대명(大明) 헌종(憲宗) 황제 성화(成化) 19년, 우리 조선 성종(成宗) 대왕 15년 계묘년
(1483)에 사림들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 태산사를 (월연)대[臺]에서 서원터[院垈]로 이건하
였다. 이후 불우헌 정(극인) 선생·눌암 송(세림) 선생·묵재 정(언충) 선생·성재 김(약묵) 선생·
명천 김(관) 선생을 배향하니 곧 일곱 현인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의종(毅宗) 황제 숭정 기원후[紀元年] 69년, 우리 조선의 숙종(肅宗) 대왕 22년 1696년(병
자)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예조(禮曹)에서 무성(武城)·태산(泰山)·남천(南川) 세
가지 액호(額號)를 추천하여 보고하였는데 숙종이 수망(首望)인 무성으로 윤허하였다.
93 고용후(1577-미상) : 장흥(長興) 고씨이고, 자는 선행(善行)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시에 호남의 의병을 이
끌고 금산에서 전사한 고경명(高敬命)이고, 이때 형 고인후(高仁厚)도 함께 순국하였다. 그는 1605년(선
조 38)에 생원시, 동년의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 병조좌랑, 병조
정랑, 1609년에 태인현감을 거쳐 남원부사, 고성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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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칠현사적(七賢事蹟)
문창후(文昌侯) 최 선생
휘(諱)는 치원(致遠), 자(字)는 해부(海夫), 호(號)는 고운(孤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당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94 대중(大中) 9년95 855년(정축)에 태어나 12세에 큰 바다 배
[海舶 ; 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학문에 힘써 희종
(僖宗)황제96 건부(乾符) 원년 874년(갑오)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광계(光啟) 원년 885
년(을사)에 신라로 돌아왔다. 헌강대왕(憲康大王)97 때 한림학사(翰林學士)98에 임명하니
비로소 우리나라에 문물을 창도하여 이학(理學)의 종주[宗儒]가 되었으며 『계원필경집』
20권이 있다. 송나라 진종(眞宗)황제99 23년이자 고려 현종대왕(顯宗大王) 11년 1020년(경
신)에 문창후의 시호가 내렸다.
94 선종황제(宣宗皇帝) : 선종(810-859)은 당의 16대 황제이다.
95 대중(大中) : 대중 8년은 855년이다. 각종 자료에서는 최치원이 태어난 해가 857년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바로 뒤의 문장에서도 건부 원년(874)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최치원이 빈공과에 합
격한 것을 18세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855년은 오류이고, 857년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96 희종(862-888) : 당 나라 18대 황제이다.
97 헌강왕(재위 875-886) : 신라의 49대 왕이다.
98 한림학사(翰林學士) : 정식명은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
書監事)이다.
99 본문에는 당 진종황제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진종제(968-1022)는 북송의 3대 황제로, 본문에서 송으로
수정하였다. 그는 재위기간에 함평(咸平), 경덕(景德), 대중상부(大中祥符), 천희(天禧), 건흥(乾興) 등 5개
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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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영천(靈川) 신 선생
휘는 잠(潛)이고, 자는 원량(元亮), 본관은 고령이다. 홍치(弘治) 4년 성종 22년 1491년
(신해) 3월 일에 태어났다. 나이 겨우 7세에 백형(伯兄)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조금 가르
쳐주자마자 곧 스스로 이해하므로 가르치는 노고(勞苦)를 번거롭게 들이지 않았고, 사조
(詞藻)100가 날로 진보하여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정덕(正德) 1513년(계유)에 공의 나이 23
세에 진사에 올랐다. 중종조[中廟朝]에 치교(治敎)가 개혁되어 사학(士學)이 날로 새로워
지니 공은 즉시 통렬하게 겉치레를 없애버리고 힘써 스스로 가다듬어 성현의 글을 취하
여 읽었다. 당대 선비들과 두루 교유를 맺고 왕래하면서 논변함이 뛰어나 우뚝하게 자득
하자 명망(名望)은 더욱 무거워졌다. 1519년(기묘)에 과거에 급제하여101 곧장 예문관 검열
에 보임(補任)되었다.
전례[故事]에 매번 사대(賜對)할 때에 사관(史官)이 늘 뒤에 들어갔다가 먼저 나왔었는
데 공이 아뢰기를 “사관은 임금의 미세한 말과 행동을 살펴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늦게 들어가서 먼저 나오면 사실을 기록하는 취지에 손상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듣건
대 성종조(成宗朝)에 한 간사한 사람이 있어서 이러한 틈을 타서 그 말이 쓰이게 되어서
마침내 화(禍)의 계제(階梯)가 되었다하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사관이 먼저 들어왔다가 뒤
에 나가는 것으로 상례를 삼으소서.”라고 하니 중종이 옳다고 여겨 즉시 규례로 삼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나 지나지 않아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공이 마침내 벼슬을
100 사조(詞藻) : 시문(詩文)의 문채(文彩)을 뜻하는 말로 문장력이 뛰어남을 의미한다.
101 1519년에 시행한 현량과(賢良科)를 의미한다.
102 원문에는 “癸卯以主簿出補 泰仁創建五學宮”이라고 주부에 보임된 후 태인에 5학당을 창건한 것으로 기재
하였다. 이 문맥만 보면 중앙 관직에 있던 신잠이 갑자기 태인에 5학당을 창건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면, 1543년(중종 38)에 신료들은 다시 신잠의 문예가 뛰어나니 명 사신을 맞이
할 때 크게 쓰일 것이라면서 그를 추천하였고, 중종은 이를 허락하여 종6품의 사옹원 주부에 제수하였
다.(『중종실록』 권 101, 38년 11월 26일 병인 ; 29일 기사) 며칠 후 중종은 “신잠은 주부가 됨은 무익하니
고쳐 守宰(수령)에 임명하여 치적을 살펴보려 한다.”하고, 태인 현감에 보임하였다.(『옥계선생문집』 권 3,
행장) 즉, 1543년에 신잠은 사옹원 주부에서 새롭게 태인 현감으로 임명되었고, 태인에 와서 5개의 학당
을 건립한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위의 내용이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03 정응두(1508-1572) : 나주(羅州) 정씨이고, 자는 추경(樞卿)이다. 1521년(중종 16)의 진사시, 1534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 전적, 부수찬, 이조정랑, 예조참의, 대사헌 등을 역
임하였다. 1553년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이때 상주목사 신잠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보고하였다.(『명종
실록』 권 20, 8년 8월 4일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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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삭탈당하여 한가하게 지내고 사관이 먼저 들어가고 뒤에 나오는 제도 또한 폐지되니 공
이 이로부터 다시는 이 시대에 회복될 수 없음을 알았다.
1521년(신사)에 무고하게 죄를 입어 장흥부(長興府)로 귀향을 갔고 1537년(정유)에는
양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38년(무술)에야 마침내 편의대로 거주(居住)하도록 명하였
다. 이듬해 모친상(喪)을 당하여 아차산(峨嵯山)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1543년(계
묘)에 주부(主簿)에서 태인 현감으로 보임되어 다섯 개의 학궁(서당)을 창건하였다.102
1549년(기유)에는 간성군(杆城郡)의 군수로 옮겨 갔고, 태인을 다스리듯이 학문을 흥
기시켰다. 1552년(임자)에 상주목(尙州牧)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상주는 경상도의 요충지
로 교통이 모여들며 기무(機務)가 번거롭고 많았다. 또 큰 흉년이 들어 유랑민이 굶주려
쓰러지고 사망한 사람은 서로 줄을 이었다. 공이 이에 마음을 다해 구휼하니 규모와 절
목이 태인현감 시절과 한결같으니 이로써 백성들 중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없었다. 관
찰사 정응두(丁應斗)103 공이 조정에다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한 치적이 최고라고 보고하
자 상(上)이 명령하여 품계를 올려주었다.
1554년(갑인) 12월 30일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64세였다. 관찰사가 조정에 부음을 알렸
태인신잠선생영상(자료제공:정읍시 문화예술과 문화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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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잠은 청렴하고 부지런함이 다른 사람에 비할 바 아니므로 지
금 그의 죽음을 듣고는 진실로 측은하다.”고 하였다. 마침내 부의금을 보내는데 더하라고
명하셨다. 돌아가시는 날에 선비들은 뜰에서 곡을 하고 백성들은 들에서 부르짖으니 어
버이의 장례와 같았다. 옥계(玉溪) 노진(盧禛)104 선생이 말하길, “공의 훌륭한 덕과 뛰어
난 행실은 당세에 스승이 되어 유림을 바로잡으며 문장과 학술은 임금의 정치와 태평을
보좌할 수 있고 기개(氣槪)와 도량이 크고 넓으며 식견은 고상하고 우아했다. 멀리서 바
라보면 엄숙해 경외감을 느끼고, 그 앞에 나아가면 유연(油然)해 가까이 할 만하였다.”라
고 하였다. 1555년(을묘) 3월 아차산(峨嵯山)에 예장(禮葬)하였다.
104 노진(1518-1578) : 풍천(豊川) 노씨이고, 자는 자응(子膺)이다. 1537년(중종 32)의 생원시, 1546년(명종 1)의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전적, 지례현감, 장령, 직제학, 도승지, 진주목사, 충청도관찰사, 전주부
윤,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평소 기대승, 김인후, 노수신 등과 교류하였다. 그의 여동생이 신잠의 후처
가 된 인연으로 행장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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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선생
자는 가택(可宅), 본관은 영광이다. 태종대왕 원년 신사년(1401) 8월 6일에 두모포리
(豆毛浦里) 자택에서 태어나셨는데, 자라서 관향(貫鄕)으로 돌아왔다. 타고난 성품이 순
수하며 아름답고 학문은 정밀하고 밝았다. 선덕 기유년(14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
고 경태(景泰) 계유년(1453)에는 정과(丁科) 13인으로 급제하였다. 이단을 물리치는 상소
를 올려 요사스러운 승려를 귀양 보내 쫓아내고, 상소[封章]를 올려 폐단을 아뢰어 잠실
을 혁파하였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설행하였으며, 여씨향약(呂氏鄕約)105에 따라 자제
를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정언(正言)으로 나이 70세에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불우헌(不憂軒)이라 호
를 붙였다. 절구시 한 수를 읊어 벽에 써 붙여서 지족자지(知足自止)의 뜻을 나타냈다. 성
종조[成廟朝]에 전 정언 정극인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듣건대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남에
게 알려지거나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으면서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다고
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불러서 쓰고자 하나 그대가 연로하여 정사를 맡기가 어
려울 것이므로 특별히 3품(三品)의 산관(散官)을 더해 주노라.”고 하였다.
또 공(公)에게 폐단을 구제할 의견을 물었다.
공이 이때 나이 80세로 어쩔 수 없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또 ①학교를 진흥
시킬 일, ②불법을 혁파할 일, ③수령의 근무 태도를 평가[殿最]하는 일, ④공신의 사천첩
자(私賤妾子)가 아버지를 따라 양인이 되는 일, ⑤논밭을 일구고 묵힌 정도를 구별하여
납세하는 일, ⑥상번(上番)한 정병(正兵)의 봉족(奉足)을 넉넉하게 할 일, ⑦각 도의 도잠
실(都蠶室)106을 다시 설립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할 일, ⑧조운(漕運)에 쓰는 선박이 여러
고을에 폐단이 되는 일, ⑨공법(貢法)에 따른 토지 품등 제도가 폐단이 되는 일 ⑩도적
을 다스리는 법이 너그러워 폐단이 되는 일 등 10가지 조목을 올리니 상께서 술을 하사
105 여씨향약(呂氏鄕約) : 중국 북송(北宋) 때 향촌을 교화·선도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이다. 섬
서성(陜西省) 남전현(藍田縣)의 여씨 문중에서 만들었으며, 뒤에 주자(朱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주자여씨향약(朱子呂氏鄕約)』이 만들어 졌다. 1517년(중종 12)에 중앙 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관에 의
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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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하여 위로하여 보냈다.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때로 은혜를 베풀어 보살피게 하니 그대
는 마땅히 알도록 하라”고 하셨다.
성화(成化) 신축년(1481) 8월에 사망하니 나이 81세였다.
106 도잠실은 잠실도회(蠶室都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양잠과 누에고치의 생산·공납, 뽕
나무의 재배와 민간배포 등을 담당하였다. 조선은 백성들에게 양잠의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궁중에 잠실
을 설치하였고, 1416년(태종 16)에 경기도 가평의 속현인 조종, 충청도 청풍, 경상도 의성, 전라도 태인, 황
해도 수안, 개성 등에 잠실을 설치하였다. 태인의 잠실은 현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고읍인 태산에 두었다
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칠보면 일대로 보인다. 여기에 속한 노비는 30명이고, 한량(閑良)으로 일을 맡길만
한 사람을 가려서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세종실록』 권 151, 지리지, 전라도 태인현) 태인현 잠실의 운
영 실태의 단초를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계열의 기록이 있다. 먼저, 1427년(세종 9)에 전라도관찰
사는 태인의 잠실감고(蠶室監考)인 전 부사정(副司正)이 양잠에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고치 생산이 120여
섬에 달하였다며 벼슬에 채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권장해야 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권 36, 9년 5월
27일 갑인) 즉, 본래의 목적대로 양잠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1474년(성종 5)경에 이르면 태인현의 잠
실은 제 기능을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의 부담으로 작용하였다.(『성종실록』 권 45, 5년 7월 29일 임오) 그
러므로 이듬해에 이르면 태인현의 잠실은 1백 칸 정도의 규모였지만 모두 풀로 덮여있어 창평현 관아로
옮기자는 의견이 제시된 것이다.(『성종실록』 권 53, 6년 3월 18일 정묘) 따라서 이 문장의 맥락은 백성들에
게 폐단을 주는 태인의 도잠실을 개선할 방안을 제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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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암(訥庵) 송 선생
휘는 세림(世琳), 자는 헌중(獻仲)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성화(成化) 15년 1479년(기해)
12월 14일생이다. 어머니 김씨가 임신하였는데 태몽으로 포의(褒衣 ; 몸통과 소매통이
넓은 옷)에 금색 띠를 두른 신인(神人)이 말하길 “삼일 뒤에 마땅히 귀한 아들을 낳을 것
인데 만년관(萬年館)이라 부르라”라고 하였다. 기일이 되어 과연 공이 태어났고 어려서부
터 총명했는데, ‘만년관’이라는 세 글자는 이름의 유형이 아니었으므로 민간에서는 다만
‘만년(萬年)’이라 불렸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스승이 번거롭게 가르쳐 줄
필요가 없어 학문이 날로 진보했고 약관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빛나는 명성이 크게
퍼졌다.
처음 공의 아버지(宋演孫)는 한산군수를 지냈는데 경술(經術)이 훌륭하여 중종의 어릴
적 스승[甘盤]107이자 나라를 안정시킨 공108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원종공신(原從功臣)109
을 하사 받았다. 1502년(임술)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03년(계해)에 이조좌랑으로 옮
겼다. 곧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6년 동안 피눈물 흘려 이 때문
에 고질병이 생겨서 호를 눌암(訥庵)이라 하였다.
일곱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숙배하지 않았다. 백록동규(白鹿洞規)의 발문을 써서 자제
(子弟) 간을 교수(敎授)하였다. 할머니 정씨110의 명으로 나가 능성현령(綾城縣令)이 되었
다. 재각에 누운 듯 관직에 임하여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았고, 관대하면서도 느슨하
지 않았다. 백성 중에 형제간에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고서는 1경의 밭을 다투는 자가 있
었다. 공이 “이 문서는 위조 되었다. 형제는 한 몸에서 나뉜 사이인지라 한 자의 삼베도
꿰매어 옷을 만들어 함께 입을 수 있는데 한 치 땅을 두고 다투겠는가?”라고 말씀하였
107 감반(甘盤) : 중국 은대(殷代) 임금인 무정(武丁) 때의 현신(賢臣)이다. 고종이 즉위하기 전 감반(甘盤)에게
글을 배웠다. 뒷날 즉위하고는 그를 등용해서 정승으로 삼았다는 고사로부터 사제(師弟)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108 1506년의 중종반정을 뜻한다.
109 원종공신(原從功臣) :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 외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
호로 중종반정 이후 송연손과 송세림이 정국원종공신에 책봉된 것을 의미한다.
110 송세림의 할머니는 정숙관(鄭淑琯)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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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다. 두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 그 문서를 불사르고 빌며 소송을 멈추고 물러나니 의(義)로
사람을 움직인 것이다. 상소[封事]를 올려 이단을 물리치고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民瘼]를
아뢰니 고기와 비단을 내려서 임금을 감동시킨 충심을 장려하였다. 1519년(기묘) 정월에
별세하니 향년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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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묵재(默齋) 정 선생
휘는 언충(彦忠), 자는 양구(良久)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기량이 침중(沈重)하여 말이
적고 행동은 민첩하였다. 진사에 합격한 이후 곧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뜻을 가다듬으며
도를 구하니 더욱 『역학계 (易學啓蒙)』의 괘획(卦畫)에 정밀해졌다. 정전본의(程傳本義)·선
기옥형(璿機玉衡)111·홍범태극(洪範太極)도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구하니 과녁을 깨트리
고 얼음이 녹듯이 이치가 풀려 길흉, 소장(消長)의 이치에 밝고 진퇴(進退), 존망(存亡)의
기미를 변별할 수 있어 요부(堯夫)112에 비길만하여 전혀 뒤지지 않고 뛰어났다.
공의 아름다운 덕에 있어서 효행을 제일로 삼아 사는 집을 막내 누이에게 주어 (돌아
가신) 어머니의 뜻을 이루어드렸고, 몸소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손수 약을 제조한 것은
살아 계신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최질(衰絰 ; 상중에 입
는 삼베옷)을 풀지 않고 하루에 죽 한 끼를 마시며 3년 동안 묘를 지키고 발이 사립문[柴
門] 밖을 나서지 않은 것은 돌아가신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겉으로는 비록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안으로는 실로 엄숙하고 굳세었다. 소박하고 청빈
하게 살아도[單瓢屢空]113 선비의 도리를 지켜 내면에 아름다운 자질을 품은 채 은거하여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고 이욕(利欲)과 성색(聲色)을 허공에 뜬 구름 같이
여기시니 타향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문하[盈門]에 가득하여 착하고 어진 무리를 배
출해내었다. 규암(圭庵 ; 송인수)114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더불어 도를 강설하니 선운(仙
111 선기옥형(璿機玉衡) : 옛날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을 관찰하던 천문관측기(天文觀測機)이다. 오늘날
혼천의(渾天儀)와 같다.
112 요부(堯夫) : 소요부(邵堯夫)는 송대(宋代) 학자인 소옹(邵雍, 1011-1077)의 자이다. 성리학의 이상주의 학
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수(數)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유교의 경전이며 점치는 데에도 이용
되는 『역경(易經)』을 공부하다가 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13 단표누항(簞瓢陋巷) : 좁고 지저분한 거리에서 먹는 도시락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라는 뜻이다. 소박한 시
골 살림 혹은 청빈한 선비의 살림을 가리킨다.
114 송인수(1499-1547) : 은진(恩津) 송씨이고, 자는 미수(眉叟)이다. 1521년(중종 16)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
제하였다. 부수찬, 사간원정언, 예조참의, 예조참판,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545년에 을사사화로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형옥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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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雲)처럼 일어났고, 영천(靈川) 신잠(申潛) 선생은 수레에서 내려 먼저 초가집을 찾으셨으
며, 일재(一齋) 이항(李恒)115 선생은 공경히 스승이자 벗으로 섬기며 대우하니, 임금께서
선생의 어짊을 표창하시며 후릉참봉[厚陵]116에 제수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그
만두고 벼슬길을 단념하고는 자제를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115 이항(1499-1576) : 성주(星州) 이씨이고, 자는 항지(恒之)이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고, 태인에서 칩
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 대학자인 기대승, 노수신,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고, 홍직필은 김인후, 기
대승, 안방준, 박광일, 이항을 호남의 다섯 학자로 뽑았다. 태인의 남고서원에 배향되었고, 김대립과 김제
민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116 원문에는 ‘원릉(原陵)’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였다는 기록
이 있어 후릉으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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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성재(誠齋) 김 선생
휘는 약묵, 자는 태용(太容)이고 본관은 도강이다. 홍치(弘治) 1500년(경신) 2월 1일에
곡성 관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또한 단정하고 정중하면서 총명하였다. 점차 자라서는
스승인 취은(醉隱) 송세림을 따라 학문을 배워 날로 열리고 달로 증진되어 탁연(卓然)히
나아감이 있어 만년(晩年)에 대강을 알게 되었으니 장부의 사업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
가. 묵재 정언충(鄭彦忠)과 뜻을 가다듬고 강학하니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사랑하고
어질어서 자신에게 있는 것을 기르고 성색(聲色)과 기욕(嗜欲)은 스스로 외물로 여겼다.
가정(嘉靖) 1536년(병신)에 아버지 증 좌랑공(佐郞公) 김희석(金希奭)과 어머니 송씨가
연달아 돌아가셔서 공께서 홀로 상을 연달아 지냈으나 직분을 완수하여 예도 빠지는 것
이 없고 모두 절도에 맞았다. 산소 곁에서 3년 시묘를 하였다. 중종 경자년(1540)에 별시
을과 제1등으로 등과하였고 1549년(기유)에 청홍도사(淸洪都事)로 제수 받고, 1550년(경
술)에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는데 다스림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유학을 권장하여 솔
선수범하니 1년이 되지 않아 형벌이 공평해지고 정사가 다스려지니 왕이 듣고 가상하게
여겨 두 차례 포장(褒獎)을 내리고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공이 기뻐하지 않으
며 말하기를, “공로 없이 성은을 받은 것은 신하에게 다행이 아니다.”하고는 늘 옛 사람들
의 ‘촛농이 떨어질 때 사람 눈물 떨어진다’는 구절을 취해 좌우명으로 써 붙여 놓고 매번
방을 쓸고 조용히 앉아 성리서를 읽으셨다. 뒤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시자 사방의 백성
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공을 따라가며 곡을 하길, “우리 아버지께서 떠나신다.”고 하였다.
1557년(정사)에 양주목사로 제수되었는데 다만 예법을 가지고 아주 사소한 사사로움
도 용납지 않으셨으니 토호들이 모두 기를 펴지 못하였다. 한산군과 양주목의 경험으로
다스리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 해로운 근원을 제거하고 교조(敎條)를 번거롭지
않게 하고 사람을 대우함이 반드시 신실하니 백성들은 안락하게 여겼다. 양주목을 다스
린 지 수 년 동안 직무를 보지 않은 날은 단지 이틀뿐으로 아침저녁으로 고생하여 초췌
해졌다. 마침내 병환이 깊어져 고질병이 되었고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별사(別
舍)로 옮기고 부녀자를 금하였다. 일을 끝마침이 모두 예에 맞아 실수가 없으셨다. 집에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1558년(무오) 7월일에 관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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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명천(鳴川) 김 선생
휘는 관(灌), 자(字)는 옥이(沃而)이고 본관이 도강이다. 만력 1575년(을해) 5월 25일에
태어나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고, 정훈(庭訓)을 이었으며 성장해서는 난계(蘭溪)
박종정(朴宗挺)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받았다. 이에 앞서 향선생 불우헌 정극인·눌암
송세림이 학당(學堂)을 세우고 향약을 상정(詳定)하였다. 공이 한결같이 준행하며 학식(學
式)으로 삼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심의(深衣)를 갖춰 입고 복건을 쓴 차림으로 사원(祠
院)을 참알하고는 서실로 물러나와 부지런히 배우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잠시도 쉬지 않
았다.
만력 1615년(을묘)에 진사로 합격하였는데 광해조(光海朝)의 정치가 혼란하자 일찍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삼창(三昌)117을 처단하지 못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으니 당시 광창
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柳希奮)·밀창부원군
(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에게 모두 훈봉(勳封)이 있어 번갈아 나라의 운명을 다스렸
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때 사계 (沙溪) 김장생(金長生)118 선생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마
음을 다해 곡식을 모았다. 선생이 더욱 보좌하며 찬양하고 탄복하니 광해군 때 윤리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를 만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호암 송치중(宋致
中), 세마(洗馬) 김감(金堪)과 함께 여러 현인(賢人)들이 만든 송정십현(松亭十賢)119의 모
임을 만들고 유상대에서 시를 읊고 즐기며 비풍(匪風)·하천(下泉)의 회한을 부치고 그림
117 삼창(三昌) : 광해군대의 세도가였던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 박
승종(朴承宗)·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柳希奮) 등 세 사람을 말한다.
118 김장생(1548-1631) : 광산(光山) 김씨이고, 자는 희원(希元)이다. 1578년(선조 11)에 유일(遺逸)로서 천거되
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산(定山)현감, 호조정랑,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서 송준길(宋浚吉)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연산(현재의 논산시 연산면)의 돈암서원 등에 제향되고 문묘(文廟)
에 배향되었다.
119 송정십현(松亭十賢) : 칠광은 계축옥사에 반발하여 고현내에서 유유자적한 7명이다. 즉, 김대립, 김응빈,
이탁, 이상형, 김감, 송치중, 송민고이다. 이들은 기자(箕子)의 고사를 따라 광인(狂人)을 가장하고 동지를
모아 유유자적하며 칠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십현은 1621년 8월에 김대립과 이상형이 빠지고 김관, 김정,
양몽우, 김급, 김우직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5명과 함께 구계(舊契)의 수정 모임을 가지고 시를 지
으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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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으로 후세에 전했는데120 몽촌 상국(相國) 김종수(金鍾秀)121가 그 그림에 발문을 썼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22 선생이 유고(遺稿)의 발문을 작성했고,123 두호(杜湖) 조정
(趙晸)이124 찬하였다.
1635년(을해) 정월 일에 돌아가셨다.
120 비풍(匪風)·하천(下泉) : 멸망한 왕조(王朝)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이다. 비풍
은 주 왕실이 쇠약해짐을 탄식하여 현인(賢人)이 지은 시이고, 하천은 왕실이 쇠약해지자 약소국이 곤란
을 당하게 되는 것을 마치 차가운 샘물이 아래로 흘러 풀이 해로움을 당하는 것에 비유한 시이다.
121 김종수(1728-1799) : 청풍(淸風) 김씨이고, 자는 정부(定夫)이다. 1768년(영조 44)에 식년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정랑, 경기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대제학, 우의정 등을 거쳤다.
122 김원행(1702-1772) : 안동(安東) 김씨이고, 자는 백춘(伯春)이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
(경종 2) 신임사화 때 조부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아버지와 형들이 유배되어 사사되
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학행으로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
다. 그는 산림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일부 실학자도 있었는데 홍대용(洪大容)과
황윤석(黃胤錫) 등이 대표적이다.
123 이 발문은 김원행이 지은 『미호집(渼湖集)』 권 13, 「제발」의 ‘제금릉김씨세고후(題金陵金氏世藁後)’로 보인다.
124 조정(1719-1775) : 풍양(豊壤) 조씨이고, 자는 인서(寅瑞)이다. 1767년(영조 43) 생원시, 이듬해 식년 문과
에 급제하였다. 승지, 의주부윤, 대사성, 수원부사,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의
재배를 실현한 조엄(趙曮)은 그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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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청액소(請額疏)
삼가 생각건대 서원의 설립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이전의 좋은 행
실을 밝히며 사문(斯文)의 성대한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만약 조정에 훌륭
히 계승하고 깊이 (사액을) 호소하는 청
원을 하지 않는다면 선현을 표창할 수
없고 특히 높이고 보답하는 뜻에 결함
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인이 있다
면 반드시 사우(祠宇)가 있고 사우가 있
으면 반드시 편액이 있는 것은 그 유래
가 오래 된 일입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
옵건대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현인
(賢人)을 좋아 하시고 선행을 즐겨 하시
며 선비를 아끼시고 도를 중히 여겨 현
인을 모신 사우의 설립을 원하는 대로
해주셨고, 사액(賜額)의 은전을 요청하
면 즉시 윤허해 주셨습니다. 무릇 지난날 미처 겨를이 없던 사안을 모두 차례로 거행하
였습니다. 유독 본도(本道) 태인현에 선현을 모신 사우가 창건된 지 이미 백 여 년이 지
났으나 아직도 사액을 받지 못한 형편에 처해 있사오니 이는 실로 태평성세에 은전을 입
지 못한 일이라 여겨 신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들이 청하여 전하께 대략적으
로 그 개요[梗槩 ; 대강의 줄거리]를 아뢰니 오직 어질고 밝으신 전하께서 들어주시고 살
펴주옵소서.
신들이 삼가 신라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을 살펴보니 사문의 종장(宗匠)으
로 혼란한 때를 만나 태산군수로 부임해 왔으니 곧 지금의 태인현입니다. 당시 문헌이 비
록 징험하기에 부족하였지만 (문창후께서 끼치신) 유풍과 여운이 백세 동안 묻힐 수 없
송정십현도 (자료제공:정읍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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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었는지라 고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집 한 채를 지어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 뒤 일찍이 현감을 지낸 본조(本朝)의 선정신(先正臣) 신잠이 그 사우에 합향(合享)되
었고 이 고장의 어진 선정신 정언 정극인(丁克仁), 좌랑 송세림(宋世琳), 진사 정언충(鄭彦
忠), 목사 김약묵(金若默), 진사 김관(金灌)을 배향하여 왔습니다. 무릇 최치원의 문장이
나 학업은 아주 빛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이미 문묘 배향의 반열에 올랐으니 신들
이 어찌 감히 구차스럽게 그 사이에 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신잠은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찍이 유교 경전에 밝아 천거 받았고 중년에는 부절
(符節)을 받아 이 읍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한결같이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는
것을 임무로 삼아 방·촌·리·사[坊村里社]에 널리 국당(局堂)을 세우고 강습소[講肄之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녹봉을 덜어내 비용의 바탕이 갖춰져 문풍(文風)이 크게 변하고 현
사(賢士)가 배출되었습니다. 그 효능으로 인재 양성의 효과가 난 것이 촉(蜀) 지역을 교화
한 문옹(文翁)125보다 못하지 않아 이 고장 사람들이 추모하여 마침내 최치원과 함께 제
향되었습니다.
125 문옹(文翁) : 문옹은 한대(漢代) 경제(景帝) 말에 촉군(蜀郡) 태수로 재직하면서 성도(成都)에 관학을 설치
하여 그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 배우게 하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성적이 우수한 자는 고을 관리로 임명
하였는데, 무제(武帝) 때 전국의 고을에서 관학을 설치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연액기사 (자료제공:정읍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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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극인(丁克仁)은 세종(世宗) 때 인물로 처음 성균관 생원으로 태학(太學)에 들어갔을
때 요사스러운 승려가 멋대로 불법을 행해 당대를 미혹시키자 정극인이 여러 생원들을
이끌고 대궐을 지키며 소장(疏狀)으로 항거하고 크게 물리쳐 성상께서 깊이 칭찬하고 감
탄하셨습니다. 문종(文宗) 때 은둔한 선생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예
종(睿宗) 때에 정언(正言)을 제수 받았으나 나이가 70이 돼서 치사(致仕)하며 고향으로 돌
아왔습니다.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들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들자 정성을 다해 가르
쳐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설행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규
범을 한결같이 따르니 온 고을이 교화됐습니다. 성종(成宗) 대왕이 듣고는 교서를 내려
권장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때때로 은혜로이 보살피게 하였습니다.
송세림(宋世琳)은 중종(中宗)의 스승인 송연손(宋演孫)의 아들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학업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져 나이가 겨우 20살에 갑과(甲科)에 이름을 올
렸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조정에서 일곱 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김
에 지극하고 정성과 예가 모두 극진하였습니다. 불당을 훼철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
의 백록동규(白鹿洞規) 발문을 써서 걸어 학식(學式)으로 삼아 나이 어린 학도들을 깨우
쳐 주어 학도들의 재주에 따라 성취가 독실하니 당시 재주와 덕망 있는 선비들이 대부분
송세림의 문하에서 나왔습니다.
정언충(鄭彦忠)은 기질이 온후해 말은 어눌했으나 행동이 민첩하였습니다. 사마시(司馬
試)에 합격한 뒤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의리에 침잠해 더욱 역학에 정밀하였습니다. 고
명(高明)하여 한 곳에 마음을 두어 상수(象數)를 오묘하게 꿰뚫어 전하지 않는 비법을 천
년 뒤에 깊이 터득하였으니 세상으로부터 동방의 소옹[康節]으로 칭송 받을 것입니다. 선
정신 송인수(宋麟壽)는 호남의 관찰사로 제일 먼저 방문하여 도를 강설하셨고 이항(李恒)
및 김인후(金麟厚)126와 서로 친하게 교유하여 학문을 갈고 닦으니 (이들이 선생을) 스승
126 김인후(1510-1560) : 울산(蔚山) 김씨이고, 자는 후지(厚之)이다. 그는 장성에서 태어나 순창 등에서 지내
다 장성으로 돌아갔다. 1531년(중종 26)의 사마시, 1540년의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인종 1)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제수 받
았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김인후는 필암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사우와 문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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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을만한 벗으로 대우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후릉 참봉(厚陵參奉)127을 제수
했으나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김약묵(金若黙)은 학문을 닦고 힘써 행하며 예전의 현인들을 존경하여 믿었습니다. 어
려서 외숙 송세림(宋世琳)을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자라서는 김인후(金麟厚)·정언충(鄭彦
忠) 등과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닦아 드러내 밝힌 것이 많았습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
는 3년 동안 피 눈물을 흘렸고, 과거에 급제해 대성(臺省)128을 지내다 노년에 양주목에
보임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농업을 권장하며 교화를 우선하였습니다. 공무에서 물러난 여
가에는 매번 방을 쓸고 몸을 바로 하여 앉아 성리학의 여러 책을 읽다가 한밤중이 되어
서야 비로소 마쳤습니다. 평생 곧은 뜻과 절조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공손하고 부지
런하셔서 금과 옥처럼 세상에 근본이 되어 군자들이 선생을 칭송하였습니다.
김관(金灌)은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깝고 천부적으로 효성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의리
에 힘을 써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습니다. 광해군[昏朝] 때에 일찍이 과거를 보러 서울에
갔을 때, 원흉(元兇) 이이첨(李爾瞻)129이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매우 간절히 초청하거나 몸
소 선생이 세 들어 사는 집까지 왔으나 끝내 피하며 만나지 않고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좌우에 도서를 쌓아두고 깊은 뜻을 찾
았습니다.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향숙(鄕塾)으로 생도들이 모였고, (이들을) 이끌
고 도와주며 권장하여 정진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게으르지 않아 엄연(儼然)히 사림들
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굳은 품행과 깊고 두터운 덕의를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27 황해북도 개풍군 영정리에 있는 조선 2대 왕 정종(1357-1419)과 정안왕후(1355-1412)의 쌍릉이다. 북한 보
존급문화재 제551호이다. 참봉은 종9품으로 조선시대 각 능을 맡아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128 대성(臺省) : 조선시대 대관과 간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29 이이첨(1560-1623) : 광주(廣州) 이씨이고, 자는 득여(得輿)이다. 1582년(선조 15)의 사마시,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608년의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전적(典籍) 등을 지낸 후 사가독
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정랑,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이 대
립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과 함께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의 즉위 이후 임해군과 유영경
을 사사하는 등 소북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김직재의 옥사를 일으켰다. 1613년에 영창대
군을 살해하고, 1617년에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발의하는 등 정권을 농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도망가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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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생각건대 이 다섯 신하는 비록 그 뜻과 효험은 당시에 볼 수는 없었으나 혹은 현명한
재주를 가지고도 포부를 다 펼치지 못했고, 혹자는 먼 지방에 있어 임금께 미처 알려지
지 않아 풍성(風聲)130만은 오히려 백세에 세울 수 있다면 옛 사람들이 말하는 ‘이름난 시
골 선비가 죽으면 사(社)에 제사 지낼 만하다’는 한유(韓愈)의 글이 바로 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현인을 위해서고 사액하여 기리는 것은 그 일
이 중해서이니 많은 선비들이 덕을 사모하여 이미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다면 국가에서
현인을 높이 존숭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 끝내 사액을 내려주는 은전이 빠질 수 있겠
습니까? 우리나라 여러 현인들을 비교하여 말해보자면 이미 성묘(聖廟)에 배향 했다면
무릇 여러 곳에 세워진 사당이 모두 사액의 은전을 입고 있으니 대개 배향의 의리를 중요
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 신하의 덕행과 학업을 되돌아보건대 이미 옛 사람들에게 부
끄러울 것이 없고 후세의 학자들[來學]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최치원은
이미 종사(從祀)의 반열에 있는데 오직 이 사우만이 어찌하여 홀로 사액을 받지 못했습니
까? 옛날 선왕조에 도내 유생들이 일찍이 이 일을 성상[天陛 ; 임금의 거처]께 진달하였는
데 마침 그 당시 조정에 많은 일이 있어서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문에 큰 흠
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신들이 번거롭고 외람된 죄를 피하지 않고 합동으로 봉장(封
章)해 천리 길을 와서 다시 이렇게 구중궁궐에 계신 전하께 호소합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바라는 실정을 살펴 생각하셔서 누대의
조정에서 오래도록 하지 못했던 은전을 거행해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빨리 사액을 내
리셔서 원우를 빛나게 하시고 제사를 영원히 지내게 해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저희들이 간절히 바라며 지극히 황공한 마음 이기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
니다.
소두(疏頭) 생원(生員) 유지춘(柳之春)
제소(製疏; 청액상소문을 지은 사람) 진사(進士) 송명연(宋明淵)
130 풍성(風聲) : 윗사람의 공덕 또는 교육을 통해 아랫사람 내지 풍속을 감화시키거나 교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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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사소(寫疏; 청액상소문을 쓴 사람) 생원(生員) 김정삼(金鼎三) 이후배(李厚培)
유학 김원(金垣) 김익초(金益初) 은정화(殷鼎和) 은정현(殷鼎鉉) 정지인(鄭之仁) 정송
년(鄭松年) 정지웅(鄭之雄) 김상경(金尙敬) 김태중(金泰重) 이성연(李星淵) 김상겸(金尙謙)
이성필(李星弼) 송상익(宋相益) 이성규(李星奎) 신만욱(辛萬煜) 송재량(宋載亮) 김상준(金
尙俊) 김양채(金亮采) 김상채(金相采) 정세관(鄭世觀) 송산두(宋山斗) 송산보(宋山甫) 정
만기(丁萬期) 김상전(金商傳) 정세태(鄭世泰) 김신주(金信冑) 이성기(李星箕) 송치량(宋致
亮) 송상기(宋相夔) 송상직(宋相稷) 정세익(鄭世益) 권익재(權益載) 권유재(權有載) 송홍
보(宋弘輔) 조여흠(趙汝欽) 이구서(李龜瑞) 김운익(金雲翼) 김명익(金溟翼) 김치백(金致白)
김태초(金太初) 이대령(李大齡) 홍응기(洪應玘) 조상선(趙相宣) 김만채(金萬采) 김세강(金
世剛) 김붕익(金鵬翼) 김치화(金致和) 김상형(金尙衡) 김신채(金愼采) 김상현(金商鉉) 김
치상(金致祥) 김상설(金商說) 송도연(宋道淵) 나서규(羅瑞奎) 나서성(羅瑞星) 송현보(宋賢
輔) 송도보(宋道輔) 이필정(李必挺) 이필기(李必起) 정 설(丁 說) 정 오(鄭 璈) 권민성
(權敏聖) 권 만(權 鏋) 오윤익(吳允益) 오윤중(吳允中) 이봉서(李鳳瑞) 경화학(景華學) 김
응삼(金應三) 장명한(張溟翰) 김응백(金應白) 경화우(景和雨) 경화성(景和星) 황 흠(黃
欽) 한후기(韓后琦) 장남한(張南翰) 오성해(吳聖海) 최 현(崔 袨) 한후성(韓后成) 최 기
(崔 岐) 최주창(崔冑昌) 안대덕(安大德) 최익화(崔益華) 최 저(崔 禇) 최 녹(崔 祿) 최
우(崔 祐) 고두광(高斗光) 고두명(高斗明) 고두표(高斗杓) 서문태(西門台) 조산하(趙山河)
이만영(李萬榮) 백광호(白光瑚) 윤우일(尹遇一) 백광우(白光瑀) 이 선(李 繕) 이시열(李時
說) 조여익(趙汝益) 이필욱(李必郁) 황재중(黃載重) 김태오(金泰五) 이후량(李后亮) 배만
후(裵萬垕) 유익장(柳益長) 홍중연(洪仲衍) 박태진(朴泰眞) 김복겸(金復謙) 오명기(吳命祺)
유광옥(柳光玉) 양응팔(梁應八) 이구석(李龜錫) 김응의(金應義) 이구상(李龜祥) 황세흠
(黃世欽) 유몽린(柳夢麟) 송시관(宋時瓘) 이재흥(李載興) 박대항(朴大恒) 유종혜(柳宗惠)
강만순(姜萬純) 임종곡(林宗穀) 조기전(趙器全) 문만위(文萬緯) 이관제(李寬濟) 송은성(宋
殷成) 유 렴(柳 濂) 유우계(柳友桂) 이명욱(李命郁) 유필수(柳必壽) 임치홍(任致弘) 유하
영(柳夏英) 유하진(柳夏振) 남필기(南必箕) 조정봉(趙禎鳳) 김백겸(金百兼) 김중화(金重華)
심수태(沈壽台) 기정회(奇挺會) 기정옥(奇挺玉) 김백련(金百鍊) 변 유(邊 攸) 변 구(邊
俅) 변치용(邊致用) 기정위(奇挺緯) 반세무(潘世茂) 김백흠(金百欽) 변 희(邊 僖) 변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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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邊 偉) 심석기(沈碩基) 이익원(李益元) 변 찬(邊 儹) 권옥형(權玉衡) 윤지요(尹志堯) 소
완(蘇 玩) 변치상(邊致尙) 최수경(崔受慶) 소 빈(蘇 玭) 권석형(權碩衡) 소 완(蘇 琬) 진
명신(陳命新) 임만태(林萬泰) 이 용(李 溶) 김응규(金應奎) 소경정(蘇景鼎) 진유신(陳維
新) 황도제(黃道濟) 김기봉(金紀鳳) 최흥조(崔興祖) 유현기(兪顯基) 소 환(蘇 瓛) 최익조
(崔翊祖) 이덕저(李德著) 소진필(蘇震苾) 유경기(兪慶基) 이기석(李基錫) 소홍원(蘇弘遠)
최홍조(崔弘祖) 최치상(崔致相) 이 격(李 激)
김서봉(金瑞鳳) 김몽신(金夢臣) 이 관(李 {火+寬}) 김 근(金 瑾) 유수휘(柳秀輝)
유도휘(柳道輝) 송만성(宋晩成) 이 운(李 澐) 이사선(李嗣先) 채 근(蔡 根) 채 장(蔡
章) 은정매(殷鼎梅) 김도형(金道亨) 진사 이징헌(李徵憲) 이석봉(李錫鳳) 이백익(李白翊)
김오일(金五一) 변 수(邊 修) 이 후(李 {后/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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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청액사적(請額事蹟)
1695년(을해) 11월 13일 본 서원에 모여 도내로 알렸고, 12월 초1일에 본읍 향교에서
소회(疏會)를 하였다. 1696년(병자) 정월 초5일에 봉소(封疏)하고 2월 초9일에 왕에게 윤
허를 받아 11월 23일에 사액을 맞이하였다.
예조가 계문(啓聞)하기를 “이 전라도 생원 유지춘(柳之春) 등의 상소를 보면 신라 문창
후 최치원은 사문의 종장(宗匠)으로 혼란한 시절에 태산군 태수로 임명되었으니 곧 지금
의 태인현입니다. 유풍(遺風)의 여운이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함께 하나의 당(堂)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일찍이 수령을 지낸
본조(本朝)의 선정신(先正臣) 신잠을 그 사(祠)에 합향하였고, 향현(鄕賢)인 정언 정극인·
좌랑 송세림·진사 정언충·목사 김약묵·진사 김관을 배향했습니다. 여러 신하의 덕행과 학
업이 옛 사람에 부끄럽지 않고 후학들에게 모범이 되어 이미 제사 지낼 곳이 이루어졌으
나 선액(宣額)131하는 은전이 아직 시행되지 못해 사림들이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해 급히 화려한 편액을 반포하여 원우(院宇)를 장식하여야 하는 바 최
치원은 도학(道學)이 뛰어나 우리나라에서 이미 성묘(聖廟)에 철식(餟食)하고 있고 신잠
은 학교를 흥기시키고 인재를 길러 성대한 유교의 교화가 있어 지금까지 읍민(邑民)들에
게 사랑을 남겼습니다. 향현 정극인 이하 다섯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어 두드러지게 칭송
을 받아 많은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며 존경하여 그리워하는 정성을 볼 수 있
습니다. 그리고 사당을 세운지가 이미 오래되고 또 거듭 세운 사당도 없으니 (저희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 온당할 것 같아 사액(賜額)을 해주시되, 사안이 장려와 중전(重
典)에 관계되어 있기에 아래에서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
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696년(병자) 2월 9일 동부승지 신 심평(沈枰)132이 담당하여 아뢰니 특별히 사액하라
131 선액(宣額) : 임금이 현판을 내리는 은전을 뜻한다.
132 심평(1642-미상) : 청송(靑松) 심씨이고, 자는 여기(汝器)이다. 1677년(숙종 3)의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 장령, 강원도관찰사, 도승지,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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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는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 액호(額號)로 무성(武城)·태산(泰山)·남천(南川)을 보고하자 수
망(首望)인 무성으로 왕의 윤허를 받았다. 복호(復戶) 3결, 원생(院生) 30명, 보노(保奴)
30명을 서원에 획급(劃給)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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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연액례(延額禮)
○ 본관(本官)이 행사 당일에 앞서서 사자(使者)의 자리 및 향축(香祝)133과 액호(額號)를
봉안할 막차(幕次)134를 묘문(廟門) 밖의 서남향에 설치한다.
○ 사자가 향축과 액호를 용정(龍亭)135에 담아 수행하여 서원 대문 밖에 이르도록
한다.
○ 유생들이 나와서 길의 왼쪽에 차례로 서서 향축과 액호가 도착하면 몸을 숙여 공
경이 맞이하고 지나가면 몸을 편다.
○ 사자가 대문 밖에 서고 집사(執事)는 축향과 액호를 받들어 막차의 상탁(床卓) 위
에 봉안한다.
○ 알자(謁者)136가 사자를 인도하여 막차로 나아간다.
○ 대축(大祝)137은 손을 씻어 전축(塡祝) 한다.
○ 찬인(贊引)138이 대축과 집사를 인도하여 먼저 들어가서 관세위(盥洗位)139로 나아
가고 각자 자리로 간다.
○ 대축은 신위(神位)로 가는데 동남서향하여 선다.
○ 집사관(執事官)은 신위로 나아가는데 서남동향하여 선다.
○ 제생(諸生)은 뜰 한 복판[庭中]으로 나아가 북향한다.
○ 축문상(祝文床)은 신위의 왼쪽에 설치한다.
○ 향로와 향합상(香榼床)140을 진설한다.
○ 액호(額號)를 앞 기둥 계단 위의 탁자에 설치한다.
133 향축(香祝) :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의미한다.
134 막차(幕次) : 임시로 장막을 쳐서 높은 사람들의 수레를 잠깐 머물게 하는 곳을 의미한다.
135 용정(龍亭) : 나라의 옥책(玉冊)·금보(金寶) 등을 실어 나르는 데 쓰는 견여(肩輿)를 의미한다.
136 알자(謁者) : 제사 때 빈객(賓客)을 인도하거나 국가의 제사 때 제관(祭官)을 인도하는 일을 맡았다.
137 대축(大祝) : 제향을 올릴 때 축문을 읽는 사람이다.
138 찬인(贊引) : 제사를 거행하면서 예의(禮儀) 절차대로 도와 인도하는 사람이다.
139 관세위(盥洗位) : 제향을 올릴 때 제관이 손을 씻는 자리이다.
140 향합상(香榼床) : 향합은 제사 때 향을 담기 위해 사용하는 놋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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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 집사가 제물을 받들어 신위 앞에 자리를 마련하며 대축이 제문을 받들어 내온다.
○ 집사 두 사람은 향과 액호(額號)를 받들고 먼저 들어온다. 여러 유생이 몸을 굽히
고 공경이 맞이하였다가 지나가면 몸을 편다.
○ 향을 받들어 책상 위 통에 담고 축(祝)을 받들어 신위의 동쪽 상 위에 두며 액호는
받들어서 앞 기둥 계단 위의 탁자에 둔다.
○ 알자는 사자를 인도하고 동문에 서서 계단 사이에 북쪽을 향하여 선다.
○ 알자는 사자를 인도하여 관세위(盥洗位)에 나아간다.
○ 알자는 사자를 인도하여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신위의 동북남향하여 선다.
○ 유생은 사배(四拜)하고 찬자가 ‘국궁(鞠躬), 배(拜), 흥(興), 평신(平身)’이라고 의식대
로 창한다.
○ 대축은 판위(板位) 앞에 나아가 개독(開櫝)141한다.
○ 알자가 사자를 인도하여 향안(香案) 앞으로 나아가 서고 집사 한 사람은 향로를 받
들고, 다른 한 사람은 향합(香榼)을 받들어 사자의 좌우에 꿇어앉아 나간다.
○ 사자는 서서 세 번 향불을 피운다.
○ 대축은 헌폐(獻幣)하고 사자가 받아 대축에게 다시 주어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 사준(司罇)142이 술을 따르면 집사관(執事官)이 술잔을 사자 앞에 드린다.
○ 사자는 술잔을 집사관에게 주어 신위 앞에 드리게 한다. 연달아 세 잔을 올린다.
○ 다음에 배위(配位)로 나아가 상향(上香)·헌폐(獻幣)·전작(奠爵)143을 의식대로 마치
면 사자는 자리로 돌아오며 유생은 꿇어앉는다.
○ 대축이 제문을 가지고 신위의 왼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읽는다.
○ 찬인은 사임(祠任)을 인도하여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신위 앞에 엎드린다.
○ 사자가 액호를 내린다.
141 개독(開櫝) :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모신 독을 여는 행위를 뜻한다.
142 사준(司罇) : 향례 때에 제주(祭酒) 단지를 맡아보던 사람이다.
143 상향(上香)·헌폐(獻幣)·전작(奠爵) : 이는 향을 피우고, 폐백을 받들어 올리며 술잔을 신위 앞에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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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 찬인이 사임을 인도하여 내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유생은 사배한다.
○ 찬자가 ‘국궁(鞠躬), 배(拜), 흥(興), 평신(平身)’이라고 의식대로 창한다.
○ 알자가 사자에게 나아가서 앞에서 예가 끝났다고 고한다.
○ 대축과 집사관이 제문과 폐백을 받들어 요소(燎所)로 나아가 불사른다.
○ 알자가 사자와 제집사관을 인도하여 강당으로 나가고 유생들은 차례대로 나간다.
○ 사임은 꿇어앉아 예폐(禮幣)를 올리면 사자는 서서 이를 받는다.
○ 사임이 조금 물러서서 재배하면 사자는 읍을 한다.
○ 그 다음에 집사관 앞에 이르러 꿇어앉아 예폐(禮幣)를 바치면 집사관(執事官)은 서
서 받는다.
○ 사임이 조금 물러서서 재배하면 집사관은 답하여 재배하고 좌정한다.
○ 그대로 예를 행한 뒤에 사자가 일어나면 사임이 대문 밖으로 나와서 절을 하고 전
송한다.
1696년(병자)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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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제문(祭文)
유세차(維歲次) 1696년(병자) 11월 갑인삭(甲寅朔) 23일 병자에 국왕은 예조좌랑 유격
(柳格)144을 보내 문창후 최치원과 선정신 신잠·정언 정극인·좌랑 송세림·진사 정언충·목
사 김약묵·진사 김관의 혼령에 제사를 지냅니다.
아! 생각건대 문창은 신라 말년에 탄생하여 중국 조정의 관직을 역임하고 성대하게[蔚
然] 나라의 상서가 되신 분으로 문장과 학술이 길고 오랜 세월[千祀] 동안 환하게 빛나 장
성(將聖)의 사당에 배향되어 사문(斯文)이 실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방의 유교가 실
로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세상이 혼탁한 것을 싫어한 나머지 빛을 감추고 한가함을
택하였습니다. 난새가 가시나무에 깃들었나니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바로 저 태산이라.
공의 유풍과 여운이 귀와 눈에 혁혁한지라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면서 보은의 제사를 오
늘도 올립니다.
신잠과 같은 기묘명신(己卯名紳)이 이 읍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조금 경륜(經綸)을 시험
해 교화를 베풀어 학교를 일으키고 후학들을 이끄니 문풍(文風)이 크게 변하여 남기신
은덕이 백성들에게 남았습니다. 또한 다섯 신하 역시 훌륭한 명성이 모두 드러나 한 지
방의 본보기가 되어 남쪽 지방의 인망이 되었으니 혹은 조정에 오르고 혹은 재야에 묻
히셨습니다. 무릇 그 행적이 서로 오르내리나 땅에 남기신 자취가 보존되어 고을 선비들
이 그분들의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겨 한 당[一堂]에서 제향하는데 사당에 사람들이 몰립
니다. 아름다운 편액을 내려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도록 하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애도와
영예이니, 영령께서는 흠향하소서.
144 유격(1633-미상) : 전주(全州) 유씨이고, 자는 정부(正夫)이다. 1694년(숙종 20) 갑술 별시 병과 1위로 입
격하였다. 통덕랑, 예조좌랑, 예조정랑 등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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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사자(使者) 예조좌랑 유격(柳格)
대축(大祝) 순창군수 이직(李溭)145
봉향(奉香) 정읍현감 신희징(申喜澄)146
봉로(奉爐) 태인현감 이당(李堂)147
원장 영의정 남구만(南九萬)148
경유사(京有司) 응교 조상우(趙相愚)
원임(院任) 유학 김만채(金萬采) 은정화(殷鼎和)
집례(執禮) 생원 김대형(金大衡)
예관(禮官) 폐물(幣物) : 채단(彩段) 1필, 백저포(白苧布) 1필, 장지(壯紙) 5속
대축(大祝) 장지(壯紙) 3속 봉향(奉香) 장지(壯紙) 2속, 백지(白紙) 1속
봉로(奉爐) 장지(壯紙) 3속
예조서리(禮曹書吏) : 전문(錢文) 22냥 ,채단 1필, 백목(白木) 1필, 장지(壯紙) 7속, 백지
3속
145 이직(1651-미상) : 한산(韓山) 이씨이고, 자는 우정(虞庭)이다. 1675년(숙종 1) 식년 문과시에서 병과 4위로
합격하였다. 순창군수 등을 거쳤다.
146 신희징(1639-미상) : 고령(高靈) 신씨이고, 자는 성삼(聖三)이다. 1677년(숙종 3) 증광 진사시에서 3등 39
위로 합격하였다. 헌릉참봉, 제용봉사, 선공직장, 남부주부, 정읍현감 등을 지냈다.
147 이당(1650-미상) : 전주(全州) 이씨이고, 자는 사긍(士肯)이다. 1673년(현종 14) 식년 진사시에서 3등 24위
로 합격하였다.
148 남구만(1629-1711) : 의령(宜寧) 남씨이고, 자는 운로(雲路)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
년(효종 7)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주서, 정언, 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 대사성,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쳤다.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 폐사군의 재설치를 주장하여 무성과 자성 2군을 설치하였다. 우의
정과 좌의정을 거쳐 1687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688년에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었고, 1689년에 기사환국
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1694년에 갑술옥사를 계기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
년에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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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각읍예부기(各邑例賻記)
○ 순찰사 김만길(金萬吉)149 : 쌀 2석 장지(壯紙) 2속, 후백지(厚白紙) 2속
○ 본관(本官 ; 태인현감) 이당(李堂) : 원우(院宇) 안 백문석 지의(白紋席地衣) 1건, 찹
쌀[眞米] 6두, 벼[租] 1석, 백지(白紙) 10속, 누룩[曲子] 2동, 감장(甘漿) 2두
○ 정읍관(井邑官 ; 정읍현감) 신희징(申喜澄) : 전문(錢文) 2냥, 백미(白米) 5두, 장지(壯
紙) 1속, 백지 2속, 조기[石魚] 2속, 민어(民魚) 1마리, 곶감[乾柿] 2첩
○ 금구관(金溝官 ; 금구현감) 조해(趙楷)150 : 쌀 10두, 백지 3속, 누룩 1동
○ 부안관(扶安官 ; 부안현감) 이만선(李萬選)151 : 쌀 1석, 누룩 1동, 찹쌀 2두, 생어(生
魚) 1속, 닭 2마리[首], 송판(松板) 2닢[立]
○ 정읍향교(井邑鄕校) : 전문 5냥
○ 흥덕향교(興德鄕校) : 백지 4속 전(錢) 2냥
○ 남원향교(南原鄕校) : 전문 5냥
○ 광주향교(光州鄕校) : 백목 2필
○ 본읍 향교(本邑鄕校) : 백미(白米) 2석
○ 나주향교(羅州鄕校) : 장지 5속
○ 전주향교(全州鄕校) : 전문 4냥
○ 금구향교(金溝鄕校) : 전문 5냥
○ 순창향교(淳昌鄕校) : 백지 5속
○ 순천향교(順天鄕校) : 백목(白木) 2필
149 김만길(1645-미상) : 광산(光山) 김씨이고, 자는 자적(子迪)이다. 1682년(숙종 8)의 춘당대 문과(春塘臺文
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 부교리, 강원도관찰사, 부제학,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697년에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0 조해(1639-1699) : 함안(咸安) 조씨이고, 자는 군범(君範)이다. 1681년(숙종 7)에 천거로 공릉참봉,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홍천현감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뒤 금구현령이 되었는데, 진휼을 잘하여 칭
송을 들었다. 1697년 순창군수가 되어 3년간 재임하였다.
151 이만선(1654-1735) : 전주(全州) 이씨이고, 자는 택중(擇中)이다. 1693년(숙종 19)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하였다. 삼사와 승정원의 관직, 금구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판윤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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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 고암서원(考巖書院) : 전문 10냥
○ 남고서원(南皐書院) : 백미 10두, 전 4냥
○ 의암서원(義巖書院) : 전문 2냥
○ 동학당(東學堂) : 백미 7두
○ 북학당(北學堂) : 백미 5두
○ 서학당(西學堂) : 백미 5두
○ 남학당(南學堂) : 논 3마지기 납부
○ 흥양정씨 문중(興陽丁氏門中) : 백목 7필
○ 청액하는 일로 본교(本校)에서 소회(疏會)할 때 들어간 쌀 42두 7승
○ 소행(疏行)하는 일로 상경할 때 들어간 돈 91냥, 들어간 쌀 17두
○ 연액(延額) 때 반미(飯米) 37두, 주미(酒米) 44두, 찹쌀 65두, 전 43냥 8전, 벼 3석 12
두, 소 3마리[隻]
○ 1696년(병자) 봄 원우를 중수할 때 들어간 쌀 154두 7승, 벼 3석 11두 4승, 전 11냥
1전
○ 9월 15일 원우를 다시 수리할 때 들어간 쌀 50두 5승, 벼[租] 6두 7승, 전 1냥 3전
도유사 유학 김우삼(金禹三) 별유사 권효성(權效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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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축문기(祝文記)
유년(維年) 모월 모일에 아무개가 감히 문창후 최 선생에게 밝게 고합니다. 삼가 생각
하건대 공은 누구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해서 도와 함께 동방으로 돌아오고 우리 후학을
창도하여 만고토록 영풍(英風 ; 영특하고 걸출한 풍채)을 드날린 분이셨습니다. 이에 중
정일(仲丁日)을 만나 정결한 제사를 올리기 알맞아 삼가 희생과 폐백 등[牲幣] 여러 가지
물품을 차려서 신명께 올립니다. 불우헌 정 선생·눌암 송 선생·묵재 정 선생·성재 김 선
생·명천 김 선생을 배향하니 부디 흠향하소서.
영천 신 선생께서는 삼가 십훈(十訓)으로 선비를 가르치시고 삼사(三事)로 다스려 은택
이 백성들에게 끼쳐 오래도록 공경합니다. 이에 중정일(仲丁日)을 만나 정결한 제사를 올
리기 알맞아 삼가 희생과 폐백 등[牲幣] 여러 가지 물품을 차려서 신명께 올립니다. 불우
헌 정 선생·눌암 송 선생·묵재 정 선생·성재 김 선생·명천 김 선생을 배향하니 부디 흠향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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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원생 관문(院生關文)
관찰사 겸 순찰사가 상고함
지금 접수된 예조의 관문 내용에 이번에 계하한 계사를 대신과 비변사[備局] 당상을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하였을 때 “서원 하재유생(下齋儒生)의 인원수가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정하는 일을 임금님 앞에서 결정[榻前定奪]152하여 이미 사액서원은 20명으로,
사액 받지 못한 서원은 15명으로, 문묘종향(文廟從享)된 유현(儒賢)의 서원(書院)은 30명
을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하도록 제도(諸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
자 윤허한다고 전교하셨다.
계하(啓下)하신 내용을 상고하여 도내 각읍 서원에 알려서 시행하게 하는 관문(關文)
이다. 관문 안에 있는 내용을 상고하여 유생의 인원수를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되 서원에
알려서 시행할 것
152 탑전정탈(榻前定奪) : 신하가 제기한 의견에 임금이 그 자리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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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홀기(笏記)
○ 헌관과 집사가 3일 전에 치재(致齊)한다.
○ 행사일 4경 1점 시점153에 축(祝) 이하는 주독(主櫝)154과 덮개를 연다.
○ 찬인(贊引)이 초헌관을 인도하여 진설(陳設)을 점검하여 보고 원 자리로 돌아온다.
○ 제생(諸生) 및 제집사(諸執事)를 모두 모시고 문 밖의 자리에 서도록 한다.
○ 집례(執禮)와 찬인은 동문(東門)으로 들어가 먼저 나아가 절하고 제자리로 가서 재
배(再拜)한다.
○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면 찬인이 제생을 인도하여 들어와 배위(拜位)에 나아간다.
○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문 밖의 자리에 나아가게 한다.
○ 찬인이 축과 제집사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고 축 이하는 모두 재배하며 관세위(盥
洗位)에 나아간다.
○ 각각 자리로 가면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자리로 나아간다.
○ 헌관과 제생은 모두 재배를 행한다.
○ 초헌례(初獻禮)에 찬인이 초헌관(初獻官)의 왼쪽으로 나아가 “유사(有司)들이 다 갖
추어졌으니 행사하소서”라고 아뢴다.
○ 찬인이 초헌관을 인도하고 관세위에 도착하면 문창후(文昌侯) 최 선생·영천(靈川)
신 선생의 준소(罇所)155로 인도하여 나아가서 서향하여 서게 한다.
○ 인도하여 문창공 최 선생의 신위(神位)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 엎드렸다가[俯伏] 일어나 전폐(奠幣)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奠爵)하며 엎드렸
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 무릎을 꿇어앉고 축문을 읽는다.
○ 인도하여 영천 신 선생의 신위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153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넷째 부분인 사경(四更)의 한 시점(時點)이다. 사경(四更)은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이다.
154 주독(主櫝) : 신주를 모셔 넣어 두는 궤를 의미한다.
155 준소(罇所) : 제향을 지낼 때 술상을 차려 놓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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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 엎드렸다가[俯伏] 일어나 전폐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하고 하며 엎드렸다가 일
어나 조금 물러나 무릎을 꿇어앉고 축문을 읽는다.
○ 배위의 준소(罇所)로 인도하여 동향하여 선다.
○ 인도하여 불우헌 정 선생의 신위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폐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하며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 인도하여 눌암 송 선생의 신위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폐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하며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 인도하여 묵재 정 선생의 신위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폐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하며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 인도하여 성재 김 선생의 신위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폐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하며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 인도하여 명천 김 선생의 신위 앞에 꿇어앉고 세 번 향을 올린다.
○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폐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 전작하며 엎드렸다가 일어나 인도
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 아헌례(亞獻禮)를 행하고 마지막에는 종헌례(終獻禮)도 위와 같다.156
○ 음복수조(飮福受胙)157는 찬인이 초헌관을 인도하며 올라가 음복(飮福)할 위치로 가서 서
향하여 서며 봉작(奉爵)하고 모두 일어나 몸을 펴며 인도하여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 헌관과 제생은 모두 재배하고 축이 변두(邊豆)를 거둔다.
○ 헌관과 제생이 모두 재배하고 축이 주독의 뚜껑을 닫아서[闔櫝] 망예(望瘞)158한다.
○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고 망예하는 자리로 가서 축례(祝禮)를 마친다.
○ 헌관과 제생은 차례대로 나오고 집례와 찬인이 재배하고 나온다.
156 조선시대 제례의식의 절차이다. 아헌은 두 번째로 올린다는 뜻이고, 종헌은 세 번째로 올리는 것이다. 보
통 순서는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망요례(望燎
禮)이다.
157 음복수조(飮福受胙) :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고 고기를 제관들이 나누어 받던
것을 의미한다.
158 망예(望瘞) : 제사를 끝마치고 대축(大祝)이 축문(祝文)과 폐백(幣帛)을 일정한 곳에 묻거나 불사를 때 헌
관(獻官)과 집례(執禮)가 지켜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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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문창후 최 선생 영정 봉안 사적(文昌侯崔先生影幀奉安事蹟)
정조 7년 1783년(계묘) 10월 모일(某日)에 흥양(興陽)과 낙안(樂安) 두 고을의 통문
다음과 같이 통문으로 알리는 일입니다. 귀읍(태인현)은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자
취가 남아있는 고을이 아닙니까? 태산의 위상과 곡수(曲水)의 으뜸은 모두 선생께서 남기
신 기풍이 아닌 것이 없으니 여러 군자들이 우러러 존경하는 바가 다른 선인들보다 배나
더 되리라 생각합니다. 일전에 들으니 선생의 영정[遺像]이 지리산 쌍계사(雙溪寺)에 있다
하였는데 이는 선생이 노닐던 곳[逍遙]이라서 승려들이 벽에 걸었던 것이 고적이 된 것입
니다. 그러나 선생은 높은 도덕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선생의 영정이 나한(羅漢)들 사
이에 섞여 있는 것은 어찌 사문(斯文)의 치욕이 아니겠습니까? 호남과 영남의 유생들이
근래 공의(公議)를 내서 궐리사(闕里祠)159 중수청(重修廳)의 여러 유생과 또 하동향교에
통문을 보내 쌍계사의 승려들에게 신칙하여 곧 선생의 먼 후손[雲孫] 집안으로 옮겨 봉
안하니 사림에게 다행스럽기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천고(千古)의 영정
이 뚜렷하게 오늘날에 있게 되어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우러러 보니 공경이 일어나지 않음
이 없습니다. 사적으로는 한 집안에서 높여 받들기 보다는 차라리 공적으로 온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또한 먼 후손의 영락함이 매우 심해 한 칸의 영당(影
堂)도 짓기 어려워 위에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이닥쳐 먹빛이 변해 채색을 흐
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론(士論)에서 당초 옮겨 봉안[移奉]할 뜻이 처음 일어났으나, 거
의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데에 돌아가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생각하기
에 귀읍의 무성사(武城祠)는 곧 선생의 제향을 모시는 곳[妥靈之所]으로 많은 선비들이
흠앙하니 영정 또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의 영정을 선생의 신위(神位)에 걸
어둔 후 때때로 우러러 배례(拜禮)하며 오래도록 존경하고 그리워한다면 선생의 먼 후손
에게도 절로 난처할 것이 없고 또한 사림들이 오랫동안 정성으로 받들 곳이 될 것이니[揭
159 궐리사(闕里祠) : 조선시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공자의 출생지가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
궐리(闕里)이므로 궐리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조 대 화성에 궐리사를 모방하여 동국궐리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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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虔]160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에 가까운 곳의 여러 선비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의
논하고 선생의 먼 후손인 최항대(崔恒大)를 보내어 여러 군자들의 높은 의견을 듣고자 하
니 어떠합니까? 바라건대 모름지기 헤아려 살피시며 결정해 주신다면 보다 다행이 없겠
습니다. 공경히 태인향교에 통문을 보냅니다.
통두(通頭) 유학 정덕보(丁德輔), 제통(製通) 양백해(楊伯楷)
본읍(本邑)의 답통
다음은 통문으로 알리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세상에서 고운 선생을 크게 우러러
봄에 자천대[紫遷臺]161와 가야산[伽倻之遊]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며 천년이 지난 뒤에도 다만 맑은 하늘을 떠받치는[柱晴], 산봉우리의 구름[嶂雲]과 맑
160 게건(揭虔) : 선현에게 추앙하는 정성을 표한다는 뜻으로, 사우를 세워서 위패를 봉안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161 자천대(紫遷臺) : 옥구에 있던 최치원 관련 유적지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자천대(紫遷臺)는 서해안에 있
다. 지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샘과 돌이 가히 사랑할만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
다”고 기재되었다. 옥구군 옥서면 선연리 일대에 있었으나 비행장이 생기며 현재의 위치(옥구면 선연리)로
옮겨졌다.
1783년 무성서원 중수일기 (자료제공:정읍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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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은 달[瀅月], 못 위의 연기[潭烟] 구절을 암송할 뿐입니다. 대개 이는 선생의 화상(畫像)에
찬하는 말이었으나 후생말학이 견문이 적고 비루하여 찬문(贊文)이 전해지나 화상의 소
재는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절[梵宇]에서 본손의 집안에 봉안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으
니 한편으로는 놀랍고 의아했으며,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행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
가(禪家)에서는 석가와 달마의 상(像)을 높이 받드는데 선생의 영정은 어찌 천년 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이는 오도자(吳道子)162가 자로(子路)를 그리
고 고황(顧況)이163 안자(顏子)를 그린 것인저!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공자의 화상
을 중국[中州]에서 구입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엄숙하게 구슬과 옥[珠衡 ; 공자
를 상징함] 같은 화상에 배례(拜禮)할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皇明] 때 사행(使行) 길에 주
자[朱夫子]의 화상을 그려오니 우리나라[左海] 선비들이 처음으로 시원한 연잎 구슬 같은
화상을 보았습니다. 선생의 영정은 신라와 고려 때 만들어 보관하던 것이 전해진 것으로
한 폭의 그림 속에 남겨진 모습이 뚜렷하며, 선비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정성을 펴 마치
스승의 곁에서 직접 뵙는 듯하니 크게 다행스러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을 위해서도 선생
이 수령을 지낸 고을에서 그리고 노니시던 땅에 한 칸의 영당을 지어야 마땅하며 호남과
영남의 사림들이 갑자기 모여 협의하기 어려우므로 우선 형편에 따라 무성서원[妥靈之祠]
에 봉안하고자 하니 여러 군자들이 이런 저희 마음을 먼저 알고 계신 것입니다.[先獲我
心] 이에 이번 달 18일에 우리 읍의 유생 제회(齊會)를 하고, 내년 음력 2월[仲春] 중정일
(仲丁日)에 무성서원으로 영정을 옮겨 봉안하도록 의절을 정하여 배행 유사(陪行有司) 두
명[二員]의 이름을 부기하니 여러 군자들께서는 기한이 너무 늦고 의절이 소략함을 허물
로 여기지 마소서. 공경히 흥양·낙안 향교에 통문을 보냅니다.
통두 김광운(金光運)
162 오도자(吳道子) : 도자(道子)는 당(唐) 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오도현(吳道玄, 685-758)의 자(字)이다. 그는
산수(山水)와 불상(佛像)에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163 포옹(逋翁) : 당(唐) 나라의 유명한 화가이자 시인인 고황(顧況, 미상-미상)의 자(字)이다. 시와 진행서(眞
行書)에 능하고, 수묵산수화에 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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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영정 봉안시 정장(影幀奉安時呈狀)
성주 합하(城主閤下)께 삼가 아룁니다. 본읍(本邑)의 고현(古縣)은 곧 태산의 옛 치소
(治所)이며 문창후(文昌侯) 최 선생께서 은거하시던 곳입니다. 산으로는 가야산과 시산이
있으니 곧 선생께서 노닐던 곳입니다. 월연대(月延臺)와 유상대(流觴臺)는 곧 선생께서 술
잔을 들며 시를 읊던 곳입니다. 그리하여 후대 사람들이 월연대 아래에 사(祠)를 세워서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지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그 후 영천(靈川) 신 선생(신잠)과 동강
(東岡) 조 상공(相公 ; 조상우)이 태인현으로 부임해 오셔서 서원의 터에 향학(鄕學)을 설
치하고 초하루에는 반드시 공경한 마음으로 배알하고 유상대 옛 터를 중수하여 날마다
가서 쉬셨으니 어찌 선현(先賢)의 아름다운 자취를 사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도
덕이 펼쳐진 마을 안에 오히려 군실(君實 ; 사마광)164의 그림이 없고, 금성(錦城)의 문물
과 교화에도 오히려 괴애(乖崖; 장영)165의 그림이 보이질 않으니 남아 있는 백성들이 눈
물 흘리는 것을 미루어 생각건데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작년 겨울에 낙안과 흥양에서 통문이 도착하였는데, “본손(本孫)의 집안에 봉안된 문
창후(文昌侯) 최 선생의 영정을 본손이 쇠락[凋殘]하여 삼가 본현(태인현)의 무성서원으
로 옮겨 봉안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아, 성대합니다! 선생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중국
[北方]에서 공부하셨고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문묘에 배향되셨습니다. 당시에 실을 사
다 수를 놓았는데 과연 비단 위에 채색된 초상화[神錦]가 전해져 돌아오는 해에 오계(五
季)166의 비바람에도 희미해지지 않았고 삼한의 병화[兵燹]167에도 미쳐 사라지지 않고 닳
164 군실(君實) :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이다. 『자치통감(資治通
鑑)』의 편저자로 유명하다. 신종 초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은퇴하였다. 철종 때에 다
시 재상이 되자, 신법을 폐하고 구법(舊法)으로 통치하였다. 사마광이 사망하자 사방에서 그를 기려 초상
화를 그려 제사를 지냈다.
165 괴애(乖崖) : 송(宋) 나라 장영(張詠, 946-1015)의 호이다. 그는 익주(益州), 항주(杭州), 승주(升州) 등의 자
사(刺史)로 나가서 가는 곳마다 치적을 세웠다고 한다. 특히, 지금의 사천 지역인 익주자사를 지낼 때 선
정을 베풀어 여기에서는 익주의 별칭인 금관성(錦官城)을 금성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166 오계(五季) :당나라 말기 이후 송이 건국될 때 까지를 오대(五代)라고 한다. 즉,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
(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를 가리킨다.
167 병선(兵燹) : 전쟁으로 일어나는 화재를 말한다. 병화(兵火)와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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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지도 않으며 완전히 쌍계사 법사(法師)에게 탈 없이 전해진 것이 거의 백년입니다.
절에서 본손의 집안으로 옮겨 보관하고, 본손의 집에서 무성서원[妥靈之所]으로 이안
(移安)한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서로 떨어진 거리가 500리인데 나누어졌다가 다시 합해
졌고, 시대의 차이가 900여 년 차이인데 신이한 영정이 서로 뒤따르므로 어찌 그 사이에
운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후학인 제가 천년 동안 우러러 사모하나 (선생의)
명성과 공적이 이미 오래되고 전형(典刑)은 의지할 것 없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빌려주어
천 백년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니 못 속 달빛[潭月]에 연기가 사라지고 갠 하늘에 구름
걷히니 또한 어찌 천년에 한 번 있는 기회이자 천년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신명한 태수의 관패(冠佩)가 엄숙해 한 폭 자취를 살피는데 마치 다시 부임하신 듯 하여
한 읍의 남녀노소 및 아이들과 노인들 중 누가 우러러 바라보며 발돋움하여 기다리지 않
겠습니까?
지금 정월 보름 낙안의 본손 집안에서 선생의 영정을 이안하는 날을 2월 초6일에 출발
하자고 하였으나 일자(日字)가 얼마 안남아 형세 상 나아가고 물러가기에 어려움이 있었습
니다. 다만 이 쇠잔한 서원은 힘이 약해 무리한 공사를 일으켜 영당(影堂)의 판자와 화상,
휘장을 장차 어떻게 기일에 앞서 준비할 것이며, 멀고 가까운 유생들은 또한 어떻게 그때
에 임하여[臨時] 물자를 조달할 것인지 본원의 원임(院任)을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선비들로
잘 선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별도로 선정해 이름을 부기하니 다만 생각건데 지영
(袛迎 ; 예식을 갖추어 맞음)의 절차, 사체(事體)는 대개 유림들이 사사로이 혼자 부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에 감히 함께 소리 내어 우러러 합하(閤下)께 하소연합니다.
어진 이를 사모하고 선비를 아끼시는 아래에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헤아려 살펴주시
어 넉넉히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아 주소서. 곧바로 영문(營門; 감영)에 전보(轉報)하여 도
착하는 곳에서 지영의 성대한 절차가 이루어지도록 하시고, 또 즉시 공장(工匠)을 내려
주어 신축하고 대규모로 수리하게 하여 화려한 의식이 흥기되어 옛 사람들만이 아름다
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않도록 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저희들이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장두(狀頭) 유학 김도수(金道修) 짓다.
김경우(金慶遇)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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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영정 봉안일기(影幀奉安日記)
1784년(갑진) 2월 6일 태인현 배행유사 유학 김광일(金光一), 김재후(金載厚)가 낙안향
교를 떠나서 순천부에 숙박하였다. 최치원 선생의 후손인 낙안의 최항대, 흥양의 최인갑
(崔仁甲) 그리고 진사(進士) 최현대(崔顯大), 낙안향교의 교임(校任) 신영수(申永壽), 김이
현(金以鉉)이 유생을 거느리고 영정을 맞이하였다. 순천부사(順天府使) 이혜조(李惠祚)가
절을 올렸고, 순천향교의 교임 김완(金玩)이 유생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7일 순천부를 떠나 북창(北倉)에 이르러 점심을 하고 저녁에 압록진(鴨綠津)을 건너 압
록의 원사(院舍)에서 숙박하였다. 8일 압록원을 떠나 곡성읍(谷城邑)에서 점심을 하였다.
곡성향교 교임 이유근(李惟謹), 유완재(柳完載)가 유생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같은 날
곡성을 떠나 옥과읍(玉果邑) 관아에서 숙박하였는데 이승휘(李升徽)가 절을 올렸다. 옥
과 향교의 교임 김치현(金致賢率)이 유생을 거느리고 맞이하였고, 서원의 원임 심채진(沈
埰鎭), 신치록(申致祿), 김달민(金達民)이 원생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9일 옥과를 출발
하여 순창(淳昌)에서 점심을 하였다. 순창향교의 교임 한팔교(韓八敎), 홍낙근(洪洛根)이
유생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같은 날 순창을 떠나 심원사(尋院寺)에서 숙박하였다. 10일
심원사를 떠나 무성서원에 도착하였다. 태인현의 김낙윤(金樂胤), 송계천(宋啓天)이 원생
과 유생을 거느리고 능교(菱橋)에서부터 영정을 배행했다. 잠시 유상대에 봉안하였는데
김경우(金慶遇)가 맞이하였고 이어서 배행하였다. 같은 날 (서원에) 봉안하였다. 제향의
헌관(獻官)은 유학 김광추(金光秋)였고, 예차(預差)에 박양식(朴良植), 전사는 최일동(崔日
東), 집례는 김치영(金致榮), 찬인은 정국교(鄭國僑), 찬창(贊唱)은 홍치경(洪致慶), 대축(大
祝)은 송박(宋撲), 봉향(奉香)은 박대식(朴大植), 봉로(奉爐)는 송훈(宋訓), 전작(奠爵)은
김현탁(金賢鐸), 척기(滌器)는 안계창(安啓昌), 망예(望瘞)는 김기일(金基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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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영정 봉안축문(影幀奉安祝文)
유년(維年) 모월 모일에 삼가 문창공 최 선생과 영천 신 선생께 밝게 고합니다. 삼가 문
창 선생의 도는 천년토록 이어지건만 의형을 담은 영정은 한 자 남짓한 화폭에 전할 뿐이
네. 저 낙읍(樂邑)에서 옮겨 와 주벽(主壁)에 걸고 자리를 단단하게 하며 틈을 메꾸고 이
에 길일[穀朝]을 택하여 공경히 그 사유를 고합니다. 삼가 자성과 여러 가지 제물로 제수
를 차려 올리니 불우헌 정 선생, 눌암 송 선생, 묵재 정 선생, 성재 김 선생, 명천 김 선생
을 배향하였으니 흠양하소서.
현감 서간수(徐簡修)168, 재장 송정린(宋廷麟), 장의 김이길(金履吉), 색장 조석린(趙
碩麟)
168 서간수(미상-미상): 생몰년, 본관, 과거 급제 여부 등이 미상으로 알 수 없다. 그는 1843년(헌종 9) 10월에
태인에 도임하여 1845(헌종 11) 6월에 이배(移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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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원우단확중수기(院宇丹雘重修記)
1783년(계묘) 10월 일에 낙안(樂安) 지역의 사인(士人) 최항대(崔恒大) 공이 흥양과 낙
안 두 읍의 향교 유생들과 여러 선비들의 통문을 우리 고을(태인)으로 가져왔다. 최항대
는 바로 문창공의 후손으로 그 통문의 내용을 보니 문창 선생의 화상(畫像)을 옮겨 봉안
하는 일이었다. 무릇 선생의 영정을 상고하건대 신라에서 고려, (고려에서) 현재에 이르기
까지 두류산 쌍계사(雙溪寺)에 보관되고 있었다. 불교가 유자(儒者)를 받드는 것은 아니
지만 선생의 남겨진 초상[遺像 ; 영정]이 어찌하여 세상[世局]에서 삼가히 받들어졌는가?
아니면 쌍류(雙流)와 청계(淸溪)는 선생께서 노닐며 자적(自適)하신 곳으로 옛 모습을 절
에서 모사해 전하여 기이한 자취로 삼은 것인가?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영남의 유생들이 선생의 초상화[七分之儀]169가 그릇되게 절에 모셔져 있는 것을
개탄스럽게 여겨 먼저 하동향교에 통문으로 알리고 최항대의 집으로 전달하여 옮겨 봉
안하게 하니 예식(禮式)에 깊이 타당하다. 호남 좌도 두 읍의 유림들이 또 본손(本孫)이
쇠락하여 집안의 사우[祠]가 기울고 무너져 내려 한 척의 영정이 끝내 비바람의 우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장차 제사를 받드는 사우에서 봉안하고자 하였으니 또한 그 예에 적합
하다. 이 글을 받들어 펴서 읽고 채 읽는 것을 마치기 전에 여럿이 “아! 우리 읍은 선생께
서 은거하신 곳이자 제사 지내는 고을이다 어찌 화상(畫像)을 사우에 봉안하지 않으리
오.”라고 하였다. “아! 이듬해 중춘일(仲春日)에 이안할 때 내가 외람되게 별유사(別有司)
가 되어 마침내 읍의 선비들과 도모하여 선생의 주벽 북쪽에 설위(設位)하는데 모두 말
하기를 “판을 깎아 좌당(座當)에 걸기를 응당 감실 형태로 화상틀과 비단장정으로 갖추
자.[龕形畵欄錦帳]”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우에 이끼가 끼고, 단청은 색이 바래었으
니 모두 수리해야합니다.”라고 하였다.
169 칠분지의(七分之儀) : 초상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정이(程頤)가 『역전(易傳)』을
지어 문인들에게 “단지 7분만 말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스스로 살피고 궁구해야 한
다.(只說得七分 學者更須自體究)”고 하였는데, 장역(張繹)이 이를 인용하여 “선생의 말씀으로 문자에 드러
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으로 그려진 것은 7분의 용모가 있다.(先生有言見於文字者 有七分之心 繪
於丹靑者 有七分之儀)”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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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본 서원은 재력이 부족하여 주관하지 못했는데, 우리 현감 서간수(徐簡修) 공이 곧 먼
저 10냥[鏹銅]을 찬조하였다. 이에 일을 거행하여 서원에서는 사학(四學)에 일꾼을 부탁
하고 또 별청(別廳)의 돈[錢]을 덜어내니 총 60여 민(緡)170으로 채단(彩緞)과 비단을 장만
했다. 영정을 모실 곳을 빛나게 하였는데 모시는 곳이 이끼가 끼어 부서진 곳은 바꾸고
시커먼 단청은 다시 새롭게 하였다. 공인의 동원과 색토(色土)의 사용 또한 현감의 힘이
다. 본원에서 비용을 절약한 것이 어찌 적겠는가. 대개 이번 달 초6일 임술일에 일을 시
작해 중정(仲丁) 하루 전 날인 병인일에 영정을 받들고 7일 뒤인 계유일에 공사를 마쳤
다. 읍 사람들이 유상(遺像)을 배알하며 대부분 손뼉 치고 기뻐하면서 나에게 이를 기록
하게 하였다.
아! 선생의 영정에 찬(撰)을 지은 이가 ‘맑은 하늘을 떠받치며 구름이 개이고, 맑은 달,
사라지는 연기’라고 비유했으니 아득히 넓어 더할 나위가 없다. 천년 뒤에 누가 형상을 포
착할 수 있어서 한 폭 생초(生綃)의 모발이 우거지고 관패(冠佩)171는 거룩하게 할 수 있
으리오. 그렇다면 화공이 초상화를 그려 전함이 후학들이 선생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낫단 말인가? 유상대에서 행차를 쉬니 살아 있는 영정은 밝은 영령이라 생각건대
응당 천년 동안 이어진 종유(從遊)의 감응이 있으니 옛 사당에 있는 신이한 영정을 받들
어 서로 따르니 만남과 이별에는 또한 운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비가 우러러 배례
(拜禮)함에 황홀하여 가야산[伽山] 자천대[紫臺] 위에서 직접 모시고 배우는 것 같으니 어
찌 후세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함이 이 정도까지 이르게 하는가! 시산(詩山)은 닳아지지
않고 곡수(曲水)는 다함이 없으니 선생의 풍모는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어라.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세 번째 1884년(갑진) 중춘일에 금릉(金陵) 김인행(金仁行)
이 서문을 짓다.
170 1민은 1000냥이 꿰어 있는 돈꿰미다.
171 관패(冠佩) : 의관(衣冠)과 패옥(佩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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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이안축문(移安祝文)
유년(維年) 모월 모일에 아무개가 감히 문창공 최 선생·영천 신 선생께 밝게 고합니다.
삼가 위에서 비가 새고 침식되어 서까래[椽桷]가 낡고 썩어 이에 마땅히 수리하여 고쳐야
하므로 공경히 그 사유를 고합니다. 삼가 희생 폐백[粢盛]과 여러 물품을 차려서 신명께
올립니다. 불우헌 정 선생·눌암 송 선생·묵재 정 선생·성재 김 선생·명천 김 선생을 배향하
니 부디 흠향하소서.
환안축문(還安祝文) 위와 같음
삼가 새는 것을 보수하고 폐해를 고쳐 이미 새로워지고 또 완전해졌습니다. 신위(神
位)를 받들어 모시고 돌아오니 잘 봉안합니다.
중수기(重修記)
화재로 현판·상량문이 불에 탐.
순조 25년 1825년(을유) 4월 일에 강당에 화재가 있어 본손 유학 김민(金玟)·송치덕(宋
致德)·김준철(金峻哲)·정문덕(丁文德)·정재혁(鄭載赫)·김광술(金匡述)이 함께 수리를 의논
하였다. 공역을 시작한 지 수년이 지나 본관 서호순172에게 아뢰니 서 현감이 현자를 좋
아하고 진심으로 사모하여 봉록을 덜어[捐廩] 마음을 다했다. 이에 4년 뒤인 1828년(무
172 서호순(1789-1848) : 대구(大丘) 서씨이고, 자는 명원(明遠)이다. 1789년(정조 13)의 생원시 1818년(순조
10)의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적성현감, 회인현감, 임실현감, 함양군수, 태인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825년
의 무성서원 화재 이후 중건에 힘써 주민들이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웠다. 1866년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서상정(徐相鼎)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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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자) 3월에 중수의 공역을 마무리했다. 4년이 지난 뒤인 1831년(신묘)에는 문창후 최 선생
의 영정을 개모했는데, 그에 관한 사적은 비문 및 현판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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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계원필경집개간기(桂苑筆耕集開刊記)
순조 34년 1834년(갑오)에 본관(本官) 심능숙(沈能淑)173 수령과 원유 박해언(朴海彦)·
이준한(李俊漢)·김조현(金祖鉉)·김주(金黈)·김규훈(金奎勳)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간행하는 일을 순찰사 서유구(徐有榘) 공에게 아뢰었다. 서 공(徐公)이 봉록을 덜어 개
간하였다. 완영(完營)에서 인쇄하고 판을 서원에 보관하였다. 사적을 현판에 기록한다.
헌종 15년 1849년(기유)에 현감 서호순(徐灝淳)의 불망비명(不忘碑銘)을 세운다. (서호
순이) 현인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사모하여 마음을 다하여 봉록을 덜어 최치원의 영정을
[幀面] 다시 새롭게 하고, 서원의 모습을 중창하였다.
유사 김민(金玟)·김홍(金泓)
173 심능숙(1782-1840) : 청송(靑松) 심씨이고, 자는 영수(英叟)이다. 1829년(순조 29) 음직(陰職)으로 감역(監
役)이 되었고, 감찰, 판관을 역임하였다. 1832년부터 1835년(헌종 1)까지 태인현감을 지냈다. 그는 시인으
로 유명하였고, 근체시(近體詩)에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문 소설 「옥수기(玉樹記)」를 지었는데 문
학사적으로 이정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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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장(稟狀)
철종 6년 1855년(을묘), 서원 뒤에 투총(偸塚) 문제로 원임인 유학 김도(金燾)·송정순
(宋程淳)·진사 김형후(金烱厚)·권집규(權執圭)·송지호(宋持灝)가 올린 품장(稟狀)
“삼가 본 서원의 뒷 기슭 성황산은 곧 옛 태산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성황당 터
로 현재는 무성서원의 주산(主山)입니다. 수 백 년 동안 애초부터 한 줌의 무덤도 없다가
뜻하지 않게 투장(偸葬)한 사람들이 있어 무덤이 늘어나 30여 개나 되었습니다. 이는 풍
속·교화와 관계되니 이를 참는다면 무엇을 참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불씨(佛氏)와 노
장(老莊) 등 이단의 학설을 막지 않으면 우리의 도가 유행하지 못할 것이요, 저지하지 않
으면 우리의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이다. [不塞不流 不止不行]174’라고 하였으니 그 무덤을
파야만이 무성서원이 서원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현인을 존경하기 위한 방도이고, 둘째
는 법을 업신여기는 습속을 막기 위한 것이니 간절한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본관(本官) 한산(韓山) 이승경(李承敬)175 현감이 “직접 조사하여 파갈 것을 독촉하라”고
처분하였다.
174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지어 요순(堯舜) 삼왕(三王)의 도(道)를 추구(推究)하여 밝혀서, 불씨(佛氏)
·노씨(老氏) 등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175 이승경(1815-미상) : 한산(韓山) 이씨이고, 자는 경조(景祖)이다. 1837년(헌종 3)의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경릉참봉, 직장,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853년(철종 4) 8월에 태인현감으로 임명받아 재직하다가 1857년
12월에 통천군수로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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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當宁]176 5년 1868년(무진) 각 서원을 훼철할 무렵에 본 서원의 복호(復戶)177와 보
노(保奴)178가 삭감되었다.
고종 6년 1869년(기사) 순찰사 서상정(徐相鼎)179 공이 서호순 수령의 비각[徐候碑閣]을
창건하는데 돈 100민(百緡)을 획급하며 애써 힘썼다.
176 당우(當宁) : 현재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로 이때 당시의 임금은 고종이였다.
177 복호(復戶) : 조선시대에 어떤 특정한 대상자(왕족·권장·진휼·특수인·군호·정역(定役))에게 요역과 전세
(田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것이다.
178 보노(保奴) : 조선시대에 병영이나 관아·서원·유향소에 소속되어 잡역을 맡아 하던 노비이다.
179 서상정(1813-1876) : 대구(大丘) 서씨이고, 자는 이응(而凝)이다. 1834년(순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848년(헌종 14)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응교,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를 역임한 뒤 1866년(고종 3) 전
라도관찰사로 임명받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며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서 임기가 2번이나
연장되었다. 이후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828년에 화재로 불탄 원우(院宇)를 중수하는 데 공
을 세운 현감 서호순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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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고종 9년 1872년(임신) 3월 일에 유학 김필흠(金必欽)·김정훈(金廷勳)·변대용(邊大容)·
김영노(金永璐)가 서원터의 역을 면제하는 일로 올린 품장
“삼가 생각건대 현인을 존경하고 도를 숭상하는 것은 조정에서 높여 보답하는 성전(盛
典)입니다. 본 서원은 곧 일곱 현인을 제사 지내는 서원으로 숙종조(肅宗朝)에 사액을 하
사할 때 복호 3결(結)과 보노 30명, 원생 30명을 정원으로 획급(劃給)해주셨는데 혼입하
여 삭감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 호포(戶布)제가 시행된 뒤로 뒤에 서원 터로 들어와
거주한 한장(汗掌)180, 고직(庫直) 또한 균포(均布)를 내는 역을 지게 되어 봄·가을의 향사
(享祀)는 지탱해 나갈 길이 없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의 분향(焚香)은 공구(供具)를 마련하
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주 합하(城主閤下)께서 우러러 조정에서 높이 보답하
는 성전에 회답해주셔서 서원 터의 20호, 호포(戶布), 부역[烟役]을 즉시 면제해주시길 간
절히 바라는 마음 가눌 길 없습니다.”라고 하니 본관 조중식(趙中植)181 수령이 “11호의
호포와 요역을 감하여 영구히 준행할 것”이라고 처분하였다.
180 한 장(汗掌) : 서원에서 일하는 노비들 중 최고 책임자이다.
181 조중식(1808-미상) : 함안(咸安) 조씨이다. 음관으로 관직에 올랐는데 감역, 광흥봉사, 주부 등을 거쳤다.
1871년(고종 8) 8월에 태인현감으로 임명받아 1875년 2월에 백천군수로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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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복호보노 환복기(復戶保奴還復記)
고종(高宗) 1878년(무인)에 장성 필암서원182이 복호(復戶)와 보노(保奴)를 예전처럼 회
복시킨 일을 들었습니다. 거원(擧員) 유학 황기환(黃基煥)으로 정하여 통문(通文)을 보냈
고 답통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아룁니다.
필암서원 답통(筆巖書院答通)
이 통문은 회통(回通)하는 일입니다. 무릇 서원이 보존되어 있고 복호가 옛 그대로 있
으니 이는 조정에서 높이고 보답하는 성전(盛典)임을 알겠습니다. 지난 서원을 철폐할 때
전부 혼입된 것은 이서배(吏胥輩)들이 조정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한 까
닭입니다. 본원(本院)이 추심할 때 의정부(議政府)에서 엄한 처분이 있어 도리배(都吏輩)
의 농간을 죄를 주고, 관에서 감영에 보고하여 완문(完文)을 받아 영원히 폐단이 없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일의 본말[原委]이 이와 같습니다. 바라건데 귀 서원은 명백히 추심하여
봄·가을 자성(粢盛 ; 제수물품)의 방도를 돕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내 서원은
두 세 곳에 불과하니 존경하고 받드는 것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하물며 복호는 중요하
여 특별한데 짧은 시간[晷刻] 동안 따르는 것도 불가하니 오직 원하건데 여러분께서 더욱
용기 있게 결단하여 추심이 꼭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니, 또한 사림(士林)에게 큰 영
광이 아니겠습니까?
통두(通頭) 유학 송일(宋馹)·김수천(金壽千)·박윤양(朴崙陽)
182 필암서원(筆巖書院) :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사적 제242호이다. 1590년(선
조 23)에 세웠다가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24년(인조 4)에 복원하였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
었으며 1672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2019년에 무성서원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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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12월 23일 유학 송정순(宋程淳)·변길용(邊吉容)·황기환(黃基煥)의 품장(稟狀)
삼가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를
더 아낀다.”183고 하셨으니 고삭(告朔)184이 비록 폐해져도 초하룻날 종묘에 고유(告由)하
면서 바치는 희생양을 버릴 수 없고 미루어 증험할 수 있는 체례(體禮)와 크게 관련되는
데 더구나 서원이 이미 그대로 보존되는 것은 복호(復戶)와 보노(保奴)가 바로 체례(體禮)
와 크게 관련됩니다.
문창후 최 선생 휘 치원(致遠)은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유풍(遺風)의 여운이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천(靈川) 신 선생 휘 잠(潛)은 기
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찍이 명경(明經)으로 추천 받아 부절(符節)을 받고 지방관으로 학
교를 일으켜 영재를 교육시켰습니다. 불우헌 정 선생 휘 극인(克仁)은 처음에 성균관 생
원으로 태학에 입학하였는데 상소를 올려 불교를 배척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촌으로
돌아와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설치하였습니다. 눌암 송 선
생 휘 세림(世琳)은 나이 겨우 스무 살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조정에서 일곱 번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불우(佛宇)를 헐어 치워 버렸고
학사(學舍)를 세웠으며 백록동규(白鹿洞規) 발문을 걸어 학식(學式)으로 삼았습니다. 묵
재 정 선생 휘 충언(彦忠)은 기질이 혼후(渾厚)하고, 말은 어눌하나 행동이 민첩해 의리에
침잠하여 더욱 역학(易學)에 정밀했고 마음에 사색하기를 높고 밝게 하니 상수(象數)가
오묘하게 뛰어났다. 성재 김 선생 휘 약묵(若默)은 학문을 돈독히 하고 행실에 힘썼으며
예전의 현인을 존경하여 믿었는데 말년에 양주(楊州)로 보임되자, 학교를 일으키고 농업
을 장려하며 청렴하고, 검소하며 공손하고 부지런해 세상에서 금옥군자(金玉君子)로 불리
었습니다. 명천 김 선생 휘 관(灌)은 천성이 도에 가까웠고 하늘이 내린 진실된 효자로 의
183 『논어』 「팔일(八佾)」의 구절로 실질적인 효용을 상실한 일이라 해도 그 형식을 보존함으로써 본래의 의의
와 목적을 알게 한다는 의미이다.
184 고삭(告朔) : 주대(周代)에 제후들이 매월 초하루마다 선조의 사당에 고하고 역(曆)을 얻던 일이다. 매년
섣달에 천자(天子)가 다음해에 사용할 12개월의 역을 제후에게 내려주면, 각 제후들이 이를 자신의 선조
의 사당에 두고 매달 초하루에 양을 삶아 바치고 고하면서 그 달의 역을 가져다 나라 안에 반포하였다.
춘추(春秋) 시대에 이르면 유명무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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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리에 힘을 다해 더욱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지조가 굳세고 품행이 단정하였으며 덕성과
신의는 더욱 두터워 사림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일곱 현자가 배향된 사우(祠宇)를 세운지
가 오래입니다.
숙종(肅宗) 1696년(병자) 11월 일에 특별히 선액(宣額)의 은전을 받아 복호(復戶) 3결,
보노(保奴) 30명, 원생 30명을 서원으로 획급(劃給)하여 봄·가을의 향사, 음력 초하루와
보름의 분향을 삼가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지난 1868년(무진)에 서원이 훼철될 때 나라
안의 보존된 47개 서원 중에 본도 안에서 태인의 무성, 장성의 필암, 광주의 포충185 3개
만이 특별히 그대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나 보인(保人)과 복호(復戶)가 줄어들었고 원생
또한 3개 서원이 일시에 감해졌습니다. 원우(院宇)가 이미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보인과
복호를 반드시 줄어들 이치가 없으나 그 당시 사림들이 의논하는데 황공하여 겨를이 없
었습니다.
근자에 필암·포충 2개 서원의 복호(復戶)가 회복되고 보노(保奴)를 다시 보전해준 것은
과연 어진이를 존경하고 우러러 사모할 수 있도록 흠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내 3개
서원이 모두 그대로 보전되었으므로 보인과 복호가 회복된 것은 또한 같은 것이나 2개
서원은 이미 보인과 복호가 회복되었는데 한 서원만이 어찌 다시 회복할 이치가 없겠습
니까? 본 서원은 문창후(文昌侯)를 모신 사원(祠院) 중에서 가장 먼저 사액 받고 창설되
었으니 얼마나 존숭(尊崇)한 곳인데 아직도 보인과 복호가 환복(還復)되지 못한 것이 실
로 사림의 공의(公議)로 탄식한지가 오래입니다. 필암서원의 재중(齋中)에서 통문과 완문
의 초고(草稿)가 내도하였으므로 이에 감히 점련(帖連)하여 일제히 소리 내어 복호와 보
노를 다른 서원의 전례대로 회복시켜 줄 것을 우러러 호소하니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 가
눌 길이 없습니다.
진신(縉紳) 정읍현감 김익건(金益健)186 제음(題音). “원장에게 품의할 것.”
185 포충사(褒忠祠) :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과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안영
(安瑛) 등 5위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우이다. 1601년(선조 34)에 세웠고, 1603년 ‘포충(褒忠)’으로 사액
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남은 47개 사우 중 하나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다.
186 김익건(1834-미상) : 청풍(淸風) 김씨이고, 자는 치순(稚順)이다. 1867(고종 4)의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876년 7월에 정읍현감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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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유학 이병덕(李秉德) 정해두(鄭海斗) 김영홍(金永洪) 정세기(丁世基) 김필흠(金必欽) 권
종희(權鍾喜) 기일연(奇一衍) 민치우(閔致佑) 김영언(金永彦) 김영준(金永準)
고영주(高永柱) 김영로(金永璐) 송만수(宋晩秀) 우재호(禹在鎬) 남 찬(南 鑽)
김낙흠(金樂欽) 김창흠(金昌欽) 신학모(申學模) 김영조(金永朝) 정한구(鄭漢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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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1879년(기묘) 2월 초4일 유학 이병덕(李秉德)·권병규(權秉圭)·김영로(金永璐) 품장
국도(國都)에는 상서(庠序)187가 있고 향촌에는 향교와 서원이 있으니 곧 우리나라[我
東方]의 성현을 존경하고 후학들을 깨우쳐 주는 의리입니다. 그리고 복호(復戶)와 보노
(保奴)를 획급(劃給)해 주니 이는 도를 높이고 예를 숭상하는 성전(盛典)에서 나온 것 입
니다. 하물며 또 서원이 사액을 받고 이어서 복호와 보노를 획급 받은 것은 역대 임금들
이 배양해 온 성교(盛敎)입니다. 본 서원은 곧 일곱 현인이 배향된 서원입니다. 일곱 현인
의 행적은 이미 전에 올린 상소에서 다 말씀드려 낱낱이 거론하는 것이 불필요하지만 숙
종조(肅宗朝)에 특별히 선액(宣額)을 받는 은혜가 있어 복호 3결, 보노 30명, 원생 30명을
서원에 획급(劃給)해 주어 봄·가을 향사(享祀)와 초하루·보름 때의 분향[朔望之焚香]을 거
의 수 백 년 동안 삼가 봉행했습니다. 지난 무진년(1868)에 각 서원이 보존되거나 훼철될
때 나라 안에 그대로 향사를 지낼 수 있는 47개 서원 중 본도 안에서는 태인 지역의 무
성·장성 지역의 필암·광주 지역의 포충 3개의 서원만 특별히 그대로 향사를 지낼 수 있었
으나 복호와 보노는 삭감되었고 원생 또한 감소됨이 3개 서원 동일했습니다. 원우(院宇)
는 이미 그대로 보존됐으므로 복호를 필시 삭감할 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림
들의 공의(公議)가 황공하옵게도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몇 해 전에 필암과 포충 두 서
원은 복호가 환복(還復)되고 보노도 환보(還保)되어 존경하여 그리워하며 우러러 사모할
수 있게 되니 과연 어찌해서입니까? 도내의 세 개 서원은 모두 그대로 훼철되지 않고 남
겨져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보노와 복호의 환복(還復)도 또한 한결같아야 하
나 두 서원만 이미 환복되는 예가 있고 어찌 한 서원만 홀로 옛날처럼 회복되지 못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본 서원은 곧 문창후(文昌侯)의 사우와 서원 중에 먼저 사액 받고 제
일 처음 창설된 서원이니 얼마나 존경하고 숭상할 곳이나 아직도 서원의 보노와 복호가
환복되지 못하였으므로 사림들이 한탄한지 오래입니다. 필암서원에서 통문(通文)과 완문
(完文) 초본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이에 감히 점련하여 일제히 한 목소리로 우러러 호소
합니다. 삼가 원컨대 특별히 도를 숭상하고 예법을 높이시는 법식을 드리우셔서 복호와
187 상서(庠序) : 향교(鄕校)를 주(周)나라에서는 상(庠), 은(殷)나라에서는 서(序)라고 부른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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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보노를 한결같이 두 서원의 사례대로 환복하셔서 사림들이 크게 우러러 바라는 것[顒望]
에 부응되어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 가눌 수 없습니다.
원장 민관호(閔觀鎬)188 제사. “유생들의 단자[儒單]는 혹 괴이할 것이 없을 듯하나 관
에서 독단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음.”
유학 송남수(宋南秀) 홍순달(洪淳達) 김광흠(金光欽) 고태진(高泰鎭) 김영렬(金永烈)
김영준(金永準) 송정순(宋程淳) 박태동(朴台東) 김영필(金永弼) 변대용(邊大容)
신흥모(申興模) 권종홍(權鍾洪) 김영곤(金永鯤) 김상호(金相浩) 이승호(李承湖)
안요석(安堯錫) 유인엽(柳寅燁) 최병호(崔炳灝) 정종구(鄭鍾龜) 김정술(金廷述)
김요승(金堯昇) 정상현(丁相鉉) 송희옥(宋曦玉) 이광열(李光烈) 배기만(裵基萬)
188 민관호(미상-미상) : 생몰년, 본관, 과거 급제 여부 등이 미상으로 알 수 없다. 1876년 3월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무성서원의 복호와 보노 등에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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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1879년(기묘) 2월 16일 유학 김용조(金龍祖)·김광흠(金光欽)·변대용(邊大容)의 품장
노나라에서 대뢰(太牢)189로 제사 지낸 것은 성인을 호위하고 덕을 높이는 뜻으로 어진
이가 있다면 서원이 있고, 서원이 있으면 복호(復戶)가 있으니 우리나라에서 열성조(列聖
朝)의 덕을 숭상하는 아름다운 성전(盛典)입니다. 본 서원은 곧 일곱 현인의 영령을 모신
곳으로 일곱 현인의 사적은 이미 앞서 올린 문서에서 다 말씀드려 낱낱이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숙종조(肅宗朝) 1696년(병자)에 특별히 사액의 은혜를 입어 복호
(復戶) 3결, 보노(保奴) 30명과 원생(院生) 30명을 정원으로 획부(劃付)해서 서원에서 봄·
가을 서원 향사(書院享祀)의 예와 초하루·보름의 분향[朔望焚香] 절차가 수 백 년 이래로
삼가 봉행되었습니다.
지난 1868년(무진)에 각지 서원이 훼철될 때 나라 안에 그대로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
에 본도(本道)에서는 태인 지역의 무성과 장성 지역의 필암, 광주 지역의 포충사 뿐으로,
세 개 서원은 특별히 그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나 보노와 복호가 감소되고 원생의
수 또한 줄어드는 것이 세 개 서원이 같았습니다.
원우(院宇)는 이윽고 그대로 보존되었으므로 보노와 복호를 반드시 줄일 이치가 없습
니다만, 그 당시 사림들의 공의(公議)라 황공하옵게도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몇 해 전
에 필암과 포충 두 서원의 복호가 회복되고 보노도 도로 보존되어 (현인을) 우러러 사모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도내 세 개의 서원은 함께 보존되었으므로
보노와 복호가 환복(還復) 된다면 또한 한결같아야 하나 두 서원만 이미 환복되는 예가
있고 어찌 한 서원만 홀로 옛날처럼 회복되지 못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본 서원은 곧
문창후(文昌侯)의 사원과 서원[祠院] 중에 제일 먼저 창설되었고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얼마나 존경하여 그리워할 곳이겠습니까. 보노와 복호가 아직도 옛날처럼 회복되지 못
한 것은 실로 사림들이 우러러 한탄한지 오래입니다. 필암서원에서 통문과 관문(關文) 초
본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이에 감히 점련하여 우러러 아룁니다. 삼가 원컨대 특별히 덕을
숭상하는 법식을 살피시어 한결같이 두 서원이 환복(還復)된 전례를 따라주십시오라는
189 대뢰(太牢) : 나라의 제사에 소·양·돼지를 아울러 바치는 것인데, 뒤에는 소만 바치게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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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내용입니다.
순찰사 심이택(沈履澤)190 공 제사(題辭). “사론(士論)이 매우 당연하나 (그동안) 미처
겨를이 없어 시행하지 못한 특전이다. 마땅하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유학 송영채(宋永采) 이동규(李東奎) 권종홍(權鍾洪)
박윤수(朴潤壽) 이계호(李啓鎬) 김낙흠(金樂欽) 안영문(安永文) 이민구(李珉求)
정기흡(丁基翕) 손규선(孫奎先) 기동욱(奇東旭) 김종림(金宗琳) 김형식(金亨植)
이계응(李啓應) 안학율(安學律) 남 제(南 濟) 김정훈(金廷勳) 노극수(盧極壽)
김영창(金永昌) 윤희성(尹希成) 나도원(羅燾元) 유경선(柳景善) 박재식(朴在植)
190 심이택(1832년-미상) : 청송(靑松) 심씨이고, 자는 치은(稚殷)이다. 1857년(철종 8)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
다.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냈고, 1878년에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3년 여 간 지방민의 진
휼문제, 수세(收稅)에 따른 애로 사항, 이양선 출몰상황 등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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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1879년(기묘) 8월 10일 의정부 정장(呈狀)
송정순(宋程淳)·김영렬(金永烈)이 상경할 때 백낙준(白樂俊)은 경사(京司)와 감영 사이
에서 주선하여 제음을 얻어내어 서원에 공이 있음.
진사 변우기(邊遇基)·이이필(李以鉍)·김요익(金堯翊)의 품장.
“나라에 서원이 있어 사액을 받은 이후에 복호(復戶)와 보노(保奴)를 획하(劃下)해주시
니 실로 이는 현인은 사모하고 도를 숭상하는 성대한 의식입니다. 본 서원은 곧 문창후
(文昌侯) 최 선생의 영령을 주향(主享)으로 하는 서원으로 숙종조(肅宗朝) 1696년(병자)
10월 일에 특별히 사액(賜額)의 은전을 입어 복호 3결과 보노 30명, 원생(院生) 30명을 정
원으로 획급(劃給)해주어 서원에서는 봄·가을 향사(享祀) 및 초하루·보름의 분향[朔望焚
香]을 지낸지 수 백 년으로 삼가며 봉행했습니다.
1868년(무진)에 서원을 철폐할 때 본도(本道) 내에서 그대로 향사(享祀)를 지낼 수 있
는 서원은 태인의 무성서원, 장성의 필암서원, 광주의 포충사 뿐이었으니 복호와 보노를
줄이는 것도 세 서원이 같았습니다. 그러나 원우(院宇)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므로 보
노와 복호를 필시 삭감할 이치가 없어서 당시 사림들이 보노를 예전대로 회복시켜 줄 것
을 의논하였으니 미처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필암서원과 포충사 두 곳의
복호가 환복(還復)되고 보노도 환보(還保)되어 현인을 존경하고 우러러 사모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과연 어찌해서입니까? 도내 세 곳이 모두 그대로 보존되었으니 보노와 복호를
예전으로 되돌리는 것 또한 한결 같아야 하나 두 곳은 이미 다시 복호와 보노가 회복된
예가 있는데 어찌 한 서원만 홀로 옛날처럼 회복되지 못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본 서원은 문창후의 사당과 서원[祠院] 중에 제일 먼저 창설되고 오래 전에 사액 받은
서원이므로 얼마나 존숭(尊崇) 받는 곳이지만 보노와 복호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직도 옛
날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 실로 사림들이 탄식한지 오래입니다. 전후 문서를 점련하여
일제히 한 목소리로 우러러 아룁니다. 삼가 원컨대 특별히 현인을 존경하고 도를 숭상하
는 법식을 살피시어 복호와 보노를 전례에 의거하여 도로 회복시키도록 관문(關文)을 특
별히 해당 도의 감영과 읍으로 내려 다시 서원의 모습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삼가 우매함
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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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영의정 이최응(李最應)191 공의 제음(題音). ‘이미 서원이 있다면 반드시 보노와 복호가
있으니, 이는 본디 법식이다. 그런데 다른 서원과 규정이 다르니 어찌 현인을 존숭하는 방
도에 결흠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결같이 다른 서원의 전례대로 시행하라. 읍리배(邑
吏輩)가 만일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다면 이는 사체상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유학 김용조(金龍祖) 이동협(李東莢) 권종풍(權鍾豊) 유항풍(柳恒豊)
김영필(金永弼) 고영주(高永柱) 박노수(朴魯洙) 김상환(金相煥) 권수일(權壽日)
김건중(金建中) 정태현(丁泰鉉) 변진규(邊鎭奎) 최익곤(崔翊坤) 최항연(崔恒淵)
최철수(崔喆洙) 송종수(宋鍾壽) 조병호(趙秉浩) 황종묵(黃鍾黙) 송지흥(宋持興)
민경호(閔慶鎬) 김영조(金永朝) 황기환(黃基煥) 김낙흠(金樂欽) 배기만(裵基萬)
김용채(金龍采) 변길용(邊吉容) 이창녕(李昌寧) 우재호(禹在鎬) 백창진(白昌鎭)
김영로(金永璐) 박상엽(朴尙燁) 안병석(安炳錫) 정영관(丁永瓘) 김영훈(金永勳)
191 이최응(1815-1882) : 전주(全州) 이씨이고, 자는 양백(良伯)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으로 흥인군(興寅
君)에 봉해졌다.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고, 판의금부사·호위대장 등
을 역임하였다. 대원군 정권하에서는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으나,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이
수립되자 호위대장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이후 영의정,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 광주부유수,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임오군란 때 난민(亂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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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1879년(기묘) 9월 초6일 경사(京司)의 제음(題音)에 본관(本官)에 도착한 문서[到付狀]
서원의 일은 오직 원장의 처분이 어떠하느냐에 달려 있기에 본원(院復)의 복호(復戶)와
보노(保奴)를 도로 회복시키는 일로 이미 원장에게 아룄습니다. 또 순영(巡營)에 올리고
우러러 의정부에도 번거롭게 아뢰어 받은 제교(題敎)192를 점련하여 우러러 원장 민관호
(閔觀鎬)에게 아룁니다. 제음[題]. “곧 마땅히 감영[營]193에 보고하여 조처할 것.”
1879년(기묘) 10월 초1일 경사(京司)의 제음(題音)을 도부하는 문서[到付狀]
본원(本院)의 복호(復戶)와 보노(保奴)를 도로 회복시키는 일로 삼가 영읍(營邑)의 제
교(題敎)를 받고 이러한 연유를 우러러 영상 합하(領相閤下)께 번거롭게되었는데, 그 제
교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관찰사 심이택(沈履澤) 공의 제교. “이미 선비들의 공론이 있
고, 또 경사의 제칙(題飭)도 있으므로 복구하는 절차는 좋은 쪽을 따라서 잘 처리하도
록 하라.”
1879년(기묘) 10월 28일 원유(院儒) 품장
본원(本院)의 복호(復戶)와 원생(院生)의 보노(保奴)를 복구하는 일은 이미 전후 올린
문서[狀辭]에 다 말씀 드려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고 의정부와 영문(營門)의 제칙
도 정중합니다. 모두 올바르게 되돌아가는 것은 오로지 관청의 재량과 처결에 달려 있
습니다.
우리 원장께서 고을의 수령으로 마침 지금 본원의 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성현의 예제
(禮制)를 본받아 마땅히 더욱 도를 다하셨습니다. 무릇 (복호와 보노를) 복구하는 절차
는 곧 새로 시작하는 정사이므로 이와 같이 획하(劃下)해 주신 성전(盛典)은 모두 그 처
음을 따른 것이니 빨리 시행해 조치하여 예전대로 다시 새로워질 수 있다면 우러러 조정
에서 현인을 숭상하는 본뜻에 회답할 수 있어 사문(師門)에 큰 공이 있고 유풍(儒風)을
192 제교(題敎) : 백성이 관부에 제출한 소장, 청원서, 진정서에 대하여 수령이나 관찰사가 써주는 처분으로
제음 또는 제사를 말한다.
193 전라감영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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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성대히 흥기시키는 것이니 실로 무성현의 현가(絃歌) 소리가 오래도록 노래할 수 있게 됩
니다. 이에 그 감복하여 감사함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간절히 기원합니다.
원장 민관호(閔觀鎬) 제음. “복결(復結)은 영제(營題)에 의거하여 시행하거니와 원생들
의 보노(保奴)는 민사(民事)의 어려움과 관계되니 물의(物議)를 널리 살핀 뒤에 마땅히 구
획할 것.”
태인현감 서목(泰仁縣監書目)194
본 현의 무성서원 복결(復結)은 이미 무진년(1868)부터 첨부한 개장(槩狀 ; 대략적인
보고)이 세금을 내는 문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읍에서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
으니 다시 처분의 가부를 기다립니다.
영제(營題). “이미 다른 서원에서 행해진 전례도 있고 또 의정부의 제칙(題勅)이 있으니
옛날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
1880년(경진) 정월 19일 원임 품장
본원(本院)의 복호(復戶)와 보노(保奴)에 관한 일은 특별히 옛날대로 회복하라는 제교
(題敎)를 받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춘향제(春享祭)가 가까우므로 이에 감히 우러
러 현인을 사모하고 도를 지키시는 아래에 호소하니 삼가 원컨대 복호 3결, 보노 30명을
즉시 추급(推給)해 주셔서 향사(享祀)에 쓸 것을 편안히 행할 수 있도록 이에 감히 우러
러 아룁니다.
원장 제음. “보노(保奴) 30명 또한 모두 복구할 것”
1880년(경진) 2월 15일 원유 품장
본원(本院)의 복호를 도로 회복시키는 일은 이미 전후 문서 안에 다 말씀드려 상세히
194 서목은 하관(下官)이 상관(上官)에 올리는 원장(原狀)에 구비(具備)되는 문서로 원장의 대략적인 내용을
쓴다. 여기에서는 태인현감 민관호가 작성하여 전라도관찰사에게 올린 첩정 문서에 첨부된 서목에 관찰
사가 처분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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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말씀드리는 것이 불필요합니다. 무릇 의정부의 제음은 이와 같이 정중하고 순영의 교칙
(敎勅)이 얼마나 엄격하고 확실합니까? 원장이 제음과 교칙대로 시행해 주셔서 두 차례
완문(完文)을 작성해 주었으나, 세금을 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해당 아전은 수조안(收
租案)195에서 삭감했다고 말해 끝내 자문[尺文 ; 영수증]을 발급받지 못하였습니다. 의정
부와 순영, 읍에서 여러 차례 신칙하였지만 일이 (시행되지 않음이) 매우 놀랍습니다. 삼
가 원컨대 해당 읍에 엄중한 관문(關文)196을 보내 면세된 3결은 예전대로 도로 회복시켜
주셔서 춘·추향사(春秋享祀)를 지내는 예에 보태도록 해주십시오.
영제(營題). “이미 전에 보고한 제사가 있는데 왜 시행하지 않는가?”
1880년(경진) 4월 13일 원임 품장
본원(本院)의 복결을 도로 회복시키는 일은 이미 전후 문서 안에 다 말씀드려 지금 굳
이 상세히 말씀드리는 것이 불필요합니다. 게다가 특별히 더 도리(都吏)에게 제음(題音)을
신칙하여 한결같이 필암서원·포충사 두 곳의 전례대로 복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원장의 제
음. “복결에 대해서는 상사(上司)와 관계되므로 관에서 절대 마음대로 처리할 방도가 없
다.”
1880년(경진) 6월 초7일 도유(道儒) 품장
본원(本院)의 복호를 도로 회복시키는 일은 이미 전후 문서에 다 말씀드렸는데 지난해
8월에 합하(閤下)께 번거롭게 아뢰었습니다. 제교(題敎)는 즉시 영읍(營邑)으로 접수[到
付]되었으나 복호는 아직도 복구되지 못했으니 엄중하고 분명하게 영읍에 관문(關文)을
보내 즉시 도로 복호하도록 하라는 내용입니다.
의정부의 제음(題音). “이미 이전 제음에서 다 말했거니와 서원이 있는데 복호가 없는
것은 사체로 보나 사리로 보나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해리(該吏)가 농간을 부린 것
195 해마다 각 도의 관찰사가 그해 가을에 호조(戶曹)에 납부해야할 세액을 기록하여 보고한 문서이다.
196 관문(關文)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 또는 동등 관청 간에 보내는 문서이다. 여기에서는 상급에서 하급
으로 보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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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이 분명하다. 본영(本營)에서 별도로 해당 읍에 엄중히 신칙하여 법식에 의거하여 추급한
뒤에 일의 상황[形止]을 시급히 보고할 것.”
1881년(신사) 7월 17일 원유(院儒) 품장
본원(本院)의 복호를 복구하는 일은 이미 전에 문서에서 다 말씀드렸고, 의정부와 영
문의 제칙(題飭)도 여러 차례 정중하게 내려왔습니다. 이제 오직 원장의 처분이 어떠하느
냐에 달려 있습니다.
원장 이정직(李定稙)197의 제음. “몇 해 전에 이미 조사하여 보고한 영제(營題)가 있으
나, 이제 와서 계문(啓聞) 하여 획급(劃給)을 받기 전까지는 달리 방법이 없다. 오직 회답
을 기다릴 뿐이다.”
1881년(신사) 12월 16일 원유 품장
본원의 복결을 도로 회복시키는 일은 7월에 모두 우러러 호소하였습니다. 제교(題敎)
에 의거하여 삼가 특별히 바다와 같은 은택을 내려주시기만 기다립니다. 여러 해 동안
겨를이 없어 못 하던 일을 영구히 준행할 뜻으로 완문을 성급(成給)하라는 내용이었습
니다.
원장 제음. “이는 바로 조정[朝家]에서 획부(劃付)한 것인데 도로 중지된 것이 무슨 연
고인지는 모르겠다. 필시 해당 색리 무리[色輩]가 아직도 살피지 않은 소치이다. 이것으로
증빙을 삼아 영구히 없애지 않도록 할 것.”
1882년(임오) 3월에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의 비명(碑銘)을 세움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여 크고 성대한 공렬(功烈)이 있네. 보인(保人)과 복호(復
戶)를 중창하니, 제수가 더욱 정결해졌네.
197 이정직(미상-미상) : 생몰년, 거주지 등을 알 수 없다. 다만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여원(汝元)이다.
1880년 8월에 태인현감 민관호와 덕천군수 이정직이 서로 바꾸었다.(『승정원일기』 2878책, 고종 17년 8월
24일 경신) 이후 1882년 8월에 원주판관으로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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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아울러 현감 이정직(李定稙)의 비명(碑銘)을 세움.
보인과 복호를 옛날대로 회복시켜 향기 나는 제수(祭需)가 거듭 향기롭네. 진실로 사
모하는 마음이 깊고 칭송이 넘쳐 비명을 새기네.
유사 정세기(丁世基)·송정순(宋程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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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지산 처사(芝山處士) 안재호(安在頀) 장서기(藏書記)
언해를 갖춘 주역[周易具諺解] 1질
언해를 갖춘 서전[書傳具諺解] 1질
언해를 갖춘 시전[詩傳具諺解] 1질
언해를 갖춘 논어[論語具諺解] 1질
언해를 갖춘 맹자[孟子具諺解] 1질
언해를 갖춘 중용[中庸具諺解]
언해를 갖춘 대학[大學具諺解]
언해를 갖춘 소학[小學具諺解] 1질
춘추좌전(春秋左傳) 10책
예기(禮記) 10책
주례(周禮) 10책
성리대전(性理大全) 1질
기범연의(箕範衍義) 4권
공자가어(孔子家語) 3권
동래박의(東萊博議) 2권
맹자서설(孟子序說) 1권
효경(孝經) 1책
고문경(古文鏡) 3권
통감요해(通鑑要解) 2권
대상예비(大喪禮備) 1권
사요취선(史要聚選) 5책
수학계몽(數學啓蒙)1권
대우씨전첩(大禹氏篆帖)
찬부(撰賦) 6권
왕우군필첩(王右軍筆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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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역주
한문(韓文) 2권
하서 김선생 필첩(河西金先生筆帖)
고문전후집(古文前後集) 8책
회헌안선생실기(晦軒安先生實記) 3책
염락(濂洛) 2책
옥편(玉篇) 2권
두율(杜律) 2책
사기평림(史記評林) 1질
당시(唐詩) 5책
홍사(鴻史) 1질
무성서원은 칠현의 영령을 봉안한 서원으로 도내 유생들이 읍양진퇴(揖讓進退)를 행
하는 곳이다. 내가 후학으로 외람되이 원지(院誌)의 소임을 맡았으니 고금을 오르내리는
사안이기에 감히 그 사이에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런데 태산의 지산처사(芝山處士) 안
지산처사 유상(遺像)·지산문집(芝山文集 (자료제공:전북대학교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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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재호(安在頀)는 문의공(文懿公) 휘 문개(文凱)198의 후손이자, 승지공(承旨公) 휘 대규(大
規)199의 6세손이다. 평소 행실이 효성스럽고 우애하는 등 여섯 행실200이 있었으며 위
로는 수신하여 검약했고, 제가(齊家)하여 맑고 화목하였다. 동(洞)의 자제를 모아 가르치
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식(學式)을 당벽(堂壁)에 걸어 붙였는데 하나는 백록동규(白
鹿洞規)이고 하나는 향음주례(鄕飮酒禮)였다.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습례(習禮)를 하고
봄·가을에는 강마(講磨)하셨다. 노년에 남학당이 중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서원의 습
례를 다시 보게 되자 개연히 현인을 사모하고 학교를 진흥시키는 마음으로 집에 소장한
서책 수백 권을 서원에 간직하게 하여 강습의 바탕이자 학업을 닦는 보배로 삼게 하였다.
훌륭하여라, 공경할지어라. 내가 감회가 일어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변변치 못한 내 문
장의 고루함을 잊고 쓸 뿐이다.
1884년(갑신) 윤월 일. 하서 김 선생 후손 (11세손) 요승(堯昇)이 삼가 서문을 짓다.
198 안문개(1273-1338) : 순흥(順興) 안씨이고, 국평(國平)이다. 130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1321년(충숙왕 8)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
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1338년에 사망하였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199 안대규(1642-1711) : 순흥(順興) 안씨이다. 지금의 김제시 용지면 출신으로 함경북도 명천부사로 재임하면
서 백성을 편히 다스렸다. 숙종이 안대규를 아껴 내직으로 불러들였는데,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놓아 주
지 않아 상경하지 못하였다. 기다리던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원인을 조사하였는데, 조사자는 관민이
일치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부사의 이임을 만류한다고 보고하였다.
200 육행(六行) : 여섯 가지의 덕행으로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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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무성서원원지』 상(1884)
『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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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武城書院院誌目錄
院誌上
序
跋
桂苑筆耕序
流觴臺碑文
流觴臺重修記
泰山祠事蹟
院誌
請額疏
七賢事蹟
延額禮
請額事蹟
各邑例賻記
祭文
院生關文
祝文記
影幀奉安事蹟
笏記
影幀奉安日記
影幀奉安時呈狀
院宇丹雘重修記
影幀奉安祝文
還安祝文
移安祝文
桂苑筆耕開刊記
重修記
芝山處士藏書記
復戶保奴還復記
武城書院院誌上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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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序文
武城書院院誌序
余自髫齔聞有文昌侯孤雲崔先生 爲我東文獻之
始 及觀桂苑筆耕集二十冊 其文章之擅於華夷 出
處之審於治亂 固可想像其萬一 而猶以世遠言湮
末由訪遺躅挹餘芬 竊嘗嘐嘐然嘆曰 古之人 古之
人而已 歲癸未春 按湖南省 省內之泰山縣 有先生
尸祝之院 院儒邊吉容·黃基煥 袖示一卷 諏余言院
不可無誌 誌不可無鋟梓而壽其傳 盍詔一言以弁
之 余作而曰 顧非其人惡敢當 雖然以夙昔尊慕 曠
世之感 辭之固則非恫愊乃盥手 而按卷之本末 桂
苑筆耕集兩序文爲開卷第一義 先生名號·事實·文
章·道德 畢陳無餘 流觴臺碑文及重修記 亦甚悉藐
余後學不敢架疊爲言 而以下則附院誌 先生主院
靈川申公合享 不憂軒丁公·訥庵宋公·黙齋鄭公·誠
齋金公·鳴川金公配享事也 七賢躋享祝文也 院
額籲請疏及蒙允事蹟也 宣額時致侑文及
延額時儀節也 影幀奉安時 往復通章及呈文日
記也 桂苑筆耕刊蹟也 院址禁埋 院隸蠲役 邑稟
與儒狀也 政府及營邑題判也 以至前後文狀 製寫
事務 句幹之儒 濟濟載其名 鳴呼 讀先生之詩 誦先
生之文 尙可以仰之若泰山 重之如弘璧 而況是院
也 因先生吏隱之邦 杖屨觴詠之地 立祠而享之 如
古者 鄕先生之歿而祭其社 絃歌遺化 如子游之武
城 至於恩額之 以是誕宣 是院之重 尤何如哉 是
院之興替 知非有損益於先生 而吾道之氣數升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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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大有關於是院之存不存如何 此院誌之所以述而
刊之 使人知所尊尙於先生之文章道德 而衛翼先
生之院也 使後之視今者 如今之視古 扶植斯文 依
歸於是院 則非是院之幸 乃一國之幸 萬世之幸 余
以是深有望於嗣後讀其詩誦其文之諸君子云爾
歲閼逢涒灘端陽節 嘉善大夫行全羅道觀察使兼
巡察使 安東金聲根
院誌序
壬午秋 余守是縣 縣盖先生遺愛 而又先生眞食所
在也 竊自幸千載之下 雖高山仰止 景行行止 如儒
氏之於孔夫子 誦其語想其人 尊慕而不可諼者 不
過是鉛槧之間 糟粕之內而已 曷嘗有陽處父之九
原可作 而士固有曠百世而相感 莫之爲而爲 莫之
致而至者 往往存乎其間 此等處 亦孰使之然歟 其
冥冥不可測度者歟 每夜氣淸明 怳焉惚焉 如入先
生之室而覿其彷佛 聽其警效 殆令人鄙吝不萌乎
心矣 顧瞻絃歌之室 則宛然言偃之侍夫子問答亹
亹寓目淸寧之{囗*扁}則宛然與先生身親交遞 如簫曹
迭相 若將劃一於先生之約束 由此觀之 觀感之間
警發而興起焉者 皆先生賜也 適來則爲遺愛之地
適去則爲妥靈之所 先生之於玆土也 豈偶然者哉
是院也 先生爲主 而配享六先生之中 鳴川金公 其
一也 昔我文淸公先祖之巡察是道也 歷路委訪 傾
盖如舊 而余之南麾 適値玆土 此亦非偶然矣 曠世
相感 自然湊合而孚應之妙 隱隱斡旋乎其間 則烏
得不緬遠而起敬乎 盖院誌登梓 係是衛道尊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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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盛事 曷敢有携貳之端 而挽近以來 士趍不正 隼翼
鷃披 虎威狐假之弊滔滔 皆是諸君子豈爲之哉 凡
我瞻禮於先生之堂 從事於先生之役者 皆先生徒
也 庶幾乎百世之下 廉頑立懦 使先生之風稜韻致
永永無替 則斯誌也 亦將與之悠久綿遠 不刊而自
刊矣 不以爲不然否 誌中條件 頭頭項項 無一非關
涉於先生者 宜其敬謹之不暇 而具在本誌中 不必
疊床爾 若其先生之文章也學術也 發揮當世 牖啓
後人 可以圖後天之壽者 前人之述備矣 豈淺見末
學之所可蠡酌測海讚揚其萬一者哉 先生姓崔諱
致遠 孤雲其號 而文昌其誄也
甲申季夏上澣 知縣鄭履源 序
跋文
奇亮衍 跋文
誌者院之史也 實具紀事 編年之義 諸享位實蹟曁
院之興廢 開是卷而瞭然 然后可謂誌事就矣 院享
孤雲崔先生而配以六君子 先生奮乎羅季 妙齡北
學發明 仁賢之化 尙有餘地 而及夫東還 盖以學於
彼者 牖我東人 使數千里禮樂文物帙帙然 與中華
併稱 先生之於東人 雖家尸而戶祝之可也 必於泰
山之武城 則蓋有以也 先生嘗宰是縣 卽古所謂桐
鄕者 而遺風善俗 猶有存者焉 先生之靈 豈無眷戀
乎玆者耶 遺愛之在人心 歲時伏臘 尙走村翁 況遠
近章甫 以禮將事 而于以講先生之道 于以讀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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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之書 進退瞻拜 如在函丈之間 尊慕如一日 則先生
必莞爾於冥冥矣 院舊無誌 使數百年院中事蹟 傳
謄歲久 易致殘缺 懼夫遂於湮沒 院儒宋程淳·金亨
植·禹在鎬·張碩培 斷然以爲己任 收拾斷爛之餘 存
古附新 廣考博載 彙爲一書 謀鋟梓而壽其傳 工將
告訖 以記事之文徵於余 余方以縉紳執事 托名於
院 凡以院事來 不敢以不能辭 忘僭如右云爾
閼逢涒灘五月下澣 通訓大夫行井邑縣監
奇亮衍 跋
申岐朝 跋文
院之有誌 如國之有史 家之有譜 豈有院而無誌 誌
而不刊 亦豈可壽於傳也 本院甚貧 事且鉅重 誌不
印字 縱多士君子 憂失之歎 而黽勉未遑 今始登梓
於乎 吾東師道之再明 湖南士氣之復興 於斯可覩
予以韎韋仄跡 旣不與於儒林 而況窺測於道德文
章之源乎 雖然鳳凰芝草 賢愚皆以爲美瑞 靑天白
日 奴隸亦知其淸明 至若孤雲先生 北學中原 流譽
四方 東還故國 顯用當時 乃勇退而潔歸 爲道德之
宗匠 則鼎尙有耳 慕而仰之 是年春 作吏於南省一
小縣 猥忝是院之任 院在今全州治之南泰仁縣 古
所稱詩山 而公昔吏隱之時 存神遺澤 觴詠自適之
地也 由是焉 始而祠 祠而院 院而復蒙恩額 豈非
先生道德之光久而益著者 且配享先生 皆文學中
章章有光 表準於一世之碩也 然則院之所重 誌之
所載 當何如哉 及於拜院之日 敬覽院誌 則冷墨殘
編 不過謄傳而已 夫誌者知也 有院之誌 將使後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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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者 知其誌而尊其院也 不有其誌 焉得其知 所以誌
而傳 傳而遠 遠而不欲泯者是也 雖銘金勒石 尙患
其泯 其在證古詔後之道 豈可以是傳之 噫 道遠言
湮 文獻之莫徵 率多由是而然 敢不愼歟 齎歎而歸
徒爾懸懸 齋儒金永烈·宋曦玉·裴基萬 以予有院任
之名 來叩而諏曰 又復因循 誌之泯將有日矣 後之
人雖欲振光採芬 其孰從而求也 予拜言而同和而
唱之 旣决而起 因囑文怵然而謝曰 自非其人 予何
敢也 固而詰之 故有如述焉 而至於先生之道德 院
誌之事實 備晣於巡相閤下金公序文 豈敢贅疣
於萬一也 但以諸君子賢賢事事之義 不勝其懇 敢
乃如是云爾
歲在崇禎紀元后五甲申閏夏 通政大夫行興德縣
監申岐朝 謹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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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桂苑筆耕序
桂苑筆耕序 1
記有之曰 醴酒之美 而玄酒明水之尙 貴五味之本
也 黼黻文繡之美 而疏布之尙 反女功之始也 古之
君子 必重其本始如此 吾東方之有文章 而能著書
傳後者 自孤雲崔公始吾東方之士 北學于中國 而
以文聲天下者 亦自崔公始 崔公之書傳于後者 唯
桂苑筆耕與中山覆簣集二部 是二書者 亦吾東方
文章之本始也 吾東方以文爲尙 至我朝 益煥以
融 家燕許而戶曹劉 以詩若文成集者 無慮充棟宇
矣 而顧鮮有知崔公之書者 余嘗見近代人所撰東
國書目 有載中山覆簣集者 徧求之 終不可得 唯桂
苑筆耕二十卷 爲吾家先世舊藏 自童幼時 知珍而
玩之 然間以語人 雖博雅能文而好古者 亦皆言未
曾見 然則是書也幾乎絶矣 使是書不行于東方 是
玄酒不設于太室 而疏布不羃于犠罇也 豈所以敎
民不忘本哉 世或謂公文皆騈儷四六 殊不類古作
者 公之入中國 在唐懿僖之際 中國之文 方專事騈
儷 風會所趨 固有不得而免者 然觀公所爲辭 往往
多華而不浮 如檄黃巢一篇 氣勁意直 絶不以雕鏤
爲工 至其詩平易近雅 尤非晩唐人所可及 是蓋以
明水疏布之質 而兼有乎酒醴黼黻之美者 豈不彌
可珍哉 公在中國 取科第入軍府 亦旣已聲施當時
矣 而一朝去之如脫屣及歸東方 躋翰苑 貳兵部 以
至阿飡 阿飡者 新羅大官 其顯用方未已也 而顧又
自放於山林寂寞之濱 以終老其身而不悔 蓋度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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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時之皆不可有爲也 士君子立身蹈道 莫有大乎出
處之際 出處而不失其時 非賢者 不能也 賢者之作
固不可使其無傳 況其文傑然如彼 而又爲東國文
章之本始者哉 湖南觀察使徐公準平 卽余所稱博
雅能文而好古者也 聞余蓄是書 亟取而校之 捐其
俸搨以活字 得數十百本 用廣其傳曰 不可使是書
絶于東國也 嗚呼 不忘本始 敎民厚也 表章賢人 勸
民善也 徐公之用心也如此 其所以爲政於湖南者
亦可知已 役旣完 徐公屬余曰 子實傳是書 今不可
以靳一言 余辭不能得 若崔公之蹟行本末與是書
之可備攷證者 徐公之序詳之矣 余無所復贅云 甲
午九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豐山洪
奭周 序
桂苑筆耕序 2
桂苑筆耕集二十卷 新羅孤雲崔公在唐淮南幕府
時公私應酬之作 而東還之後 手編表進于朝者也
公名致遠 字海夫 孤雲其號也 湖南之沃溝人 幼穎
慧絶倫 年十二 從商舶入中原 十八 擧進士第 久之
調溧水縣尉 任滿而罷 時値黃巢之亂 諸道行營都
統高騈開府淮南 辟公爲都統巡官 凡表狀文告 皆
出公手 其討黃巢檄 天下傳誦 奏除殿中侍御史 賜
緋魚袋 後四年 充國信使東歸 事憲康王定康王 爲
翰林學士兵部侍郎出爲武城太守 眞聖時 挈家入
江陽郡伽倻山以終焉 葬在湖西之鴻山 或謂公羽
化者妄也 夫以海隅偏壤之産 而弱齡北學 取科宦
如拾芥 終以文章鳴一世 同時賓貢之流 莫之或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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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豈不誠豪傑之士哉 若其居幕數載 知高騈之不足
有爲 呂用之諸葛殷等之誕妄必敗 超然引去 去三
年而淮南亂作 則又有似乎知幾明哲之君子 其人
與文 要之可傳不可泯者也 據進表 是集之外 復有
今體賦一卷 今體詩一卷 雜詩賦一卷 中山覆簣集
五卷 唐藝文志 則稱桂苑筆耕二十卷 文集三十卷 而
他皆不傳 唯是集屢經鋟印 板刻舊佚 搨本亦絶罕
癸巳秋 余按察湖南 巡到武城 謁公書院 裵徊乎石
龜流觴臺之間 俛仰遺躅有餘嘅焉 會淵泉洪公以
是集寄曰 此近千年不絶如線之文獻耳 子其無流
通古書之思乎 余如獲拱璧 懼其愈遠而愈佚也 亟
加証校 用聚珍字擺印 分藏諸泰仁縣之武城書院
陜川郡之伽倻寺 嗟乎 名醞之坊 必題杜康 良劍之
鍔 必標歐冶 爲其不忘本始也 我東詩文集之祗今
傳者 不得不以是集爲開山鼻祖 是亦東方藝苑之
本始也 庸詎可一任其銷沈殘滅 而不之圖哉 東還
後著作 散逸無傳 唯有梵宮祠墓之間 披林藪剔苔
蘚 尙可得十數篇 彙附原集 剞劂壽傳 余竊有志而
未遑云 按史稱中和二年正月 王鐸代高騈爲諸道
行營都統 五月 加高騈侍中 罷鹽鐵轉運使 騈旣失
兵柄 復解利權 攘袂大詬上表自訴 言辭不遜 上命
鄭畋草詔切責之 今考集中 有謝加侍中表 巽辭引
咎而已 無一語激忿勃謾又有謝賜宣慰表云 仰睹
綸音 深嘉師徒輯睦 黎庶安寧 其假借慰獎也 若是
之慇摯 史所謂草詔切責者 無乃非當時實錄也歟
又按中和紀年 止於四年 而公進表年月 系以中和
六年 蓋公以中和四年十月浮海 翌年春始抵國 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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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翌年編進是集 而前一年之改元光啓 容或未聞知
也 歲在閼逢敦牂中元 達城徐有榘書于湖南布政
司之觀風軒中
流觴臺碑文
泰仁郡卽新羅之泰山郡 文昌侯崔公舊所莅也 郡
南七里許 巖石盤陁巖下流水環廻 文昌每觴詠於斯
倣逸少故事 至今父老相傳爲故事 臺歲久荒廢 余
友趙使君子直 視篆之暇 逍遙乎臺上 悠然有曠世
之感 累石增築 竪小碑以識之 屬余爲記 頃年余爲
吏楓岳下 地稱神仙窟宅 思一修飾 而未暇及 子直
其多乎哉 余惟文昌生星一周 涉海萬里 未弱冠 擢
大唐巍科 踐霜臺 入金門 天下已爭知之 及其從事
轅門 磨墨楯頭 使販鹽老賊魄褫膽落 眞所謂賢於
百萬師矣 以其高才盛名 捲而東還 推出緖餘 亦足
以維持一邦 顧乃沈淪銅墨若梅子眞 終焉浮遊方
外 自託於羨門之屬 何也 噫 公之生世不辰 入中華
則亂離瘼矣 歸故國則危亡兆矣 道不可行 身且難
容 以此飄然遐擧 蟬蛻棼濁 誦紅流一絶 未嘗不三
復歎憐其志焉 想其婆娑徜徉於是地也 感慨繼之
者 豈但俛仰間陳迹而已哉 公之淸風逸韻 溢於宇
宙之間 而知公志者盖亦尠矣 夫地之重與輕顯與
晦 未嘗不由於人 古人有言 蘭亭茂林 不遇逸少則
不傳 余亦云 是臺水石 得文昌而始彰 而千有餘年
又得子直增修而表揚焉 玆豈非有待於其人歟 不
知是後繼子直而修者又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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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崇禎紀元後十五年通政大夫行弘文館副提學趙
持謙撰
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兼西學敎授趙相愚書
流觴臺重修記
肅廟壬戌之秋季 祖東岡公莅是邦 翌年冬以持憲
還于朝 視政周歲之間 治化大行 氓俗丕變 人用豊
碑 記述功德 碑之閣 又有銘曰 淸德居官 醇風化俗
孤雲靈川 前後並蹟 幾至數百年之久 而仁聲未沫
遺愛不衰 五袴之歌 召母之謠 蔚然再美於玆縣 縣
之東二舍許 有古邑基址 前有峽溪之流 溪之上有
臺名曰流觴 壘之以石 匝以老樹 父老相傳 以爲孤
雲知縣時杖屨處 而倣逸少故事者也 歷千載而始
有東岡公起曠世之感 仍古廢而築之 視篆之暇 有
時命輿 與村秀才 觴詠於斯 解紱歸後 使趙副學持
謙記述孤雲遊遨之蹟 載之石而手書之 俾竪之臺
上 伊後未數百年而臺又廢焉 水道亦隨而改 臺上
千章古木 多爲風所折拨碑亦爲大水所渰踣不知
其處 寒山一片 問之遺老而不語 先賢遺韻 無可徵
矣 過之者莫不指點而傷惜之 余之於甲寅冬來守
玆土 行過其下 見荒臺而問諸縣人 始得兩賢遺
蹟 心所景慕傷惜之者 不啻蓰倍於邑人 然而歲荒
賑飢 未遑修擧 至翌年有秋而民憂少紓猶不可以
役凋瘵之氓改築臺 爲迺於粤明年 謀諸臺傍人士
之好古者 俾掌之 帖石防潰 栽木補缺 又欲引溪復
古流觴之水 而其勢末由也 已亦欲伐石爲記事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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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碑而力不逮矣 嗚呼 又不知幾百禩之後 人有能繼
修之者 而川谷變遷 峴山沈水之碑 復出人間歟 是
未可知也 歲甲午季春 豐城趙恒鎭 記
院誌
武城古泰山祠宇 而
肅廟朝丙子蒙額之號也 盖泰仁縣 卽新羅泰山
郡而
文昌侯崔先生視篆之邑 山有伽倻·詩山 臺有月延·
流觴 先生杖屨觴詠之所 而絃歌遺風 百世不泯
鄕人立祠于月延之下矣 逮我
中廟朝甲辰 靈川申先生宰莅玆鄕 十訓敎事 澤在
斯民 合享其祠
泰山祠事蹟【萬曆四十四年丙辰二月日】
屯田事 幼學金世經稟狀 五馬南來 政先興學 右文
之意 藹然於言辭之表【缺】
人人 旣行於下車之初 苟
有補於學校者 雖其所言之至淺 而不以爲淺 所請
之至難 而不以爲難 斯豈非有悔必達之秋耶 竊惟
本縣 古有四學 惟我靈川申侯之所建也 募奴而
復其役 給田而資其用 以爲養士之方 而民到于今
稱之 其有功於士林 爲如何哉 嗚呼 人歸世遠 古基
茅塞 絃歌之聲息矣 才難之嘆極矣 幸有【缺】維曁東
北二學 堇繼遺風 則後生之有志者 雖有依歸也 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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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生財無地 供士乏資 常自慨然者久矣 何幸今日有
牛刀割雞遠踵芳武 文不在玆乎 凡有所懷 不發說
於左右 則後而失其時者矣 今願竊有請也 閤下
豈可惜數頃之田 不遂多士之望耶 培養我士氣 成
就我人才 所謂漑其根將食其實者 豈不在於此乎
【缺】 本官高用厚題 屯田二石落只畓乙 書院及東北
二學堂出給爲去乎201 秋來打作 以爲諸生公用之地
而年年永爲定式之地爲乎矣202 後來主倅如有還推
之擧 持此告課事
金一挺 全世綸 金南挺 金汝諧 金泰挺
金汝雨 全天賦 閔載重 殷之任 金時煥
金萬挺 白舜弼 金世衡 金時挺 金尙玉
屯田結卜三結十二負四束 古文有 今文無
書冊七書與左傳·春秋·通鑑·性理節要·心經附註·聖
學十圖·院規一部·三綱行實·二倫行實·鄕約一卷·小
學·祠宇圖 只有銘錄遺失無傳
大明憲宗皇帝成化十九年 我朝成203宗大王十五204
年癸卯 士論齊發 自臺上移建于院垈 伊後配享不
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齋金先生
鳴川金先生 卽七賢享祀之祠也
毅宗皇帝崇禎紀元年後六十九年 我朝肅宗大王
二十二年丙子 請額上疏 禮曹啓報以武城·
201 爲去乎 : ‘거온’으로 읽는 이두로 ~하므로, ~하기에, ~하고서, ~하오니의 뜻으로 사용된다.
202 爲乎矣 : ‘오’로 읽는 이두로 ~하오되, ~하되, ~하옵되의 뜻으로 사용된다.
203 원문에는 예(睿)라고 표기되었으나, 문맥상 성종이므로 ‘성(成)’으로 입력하였다.
204 원문에는 오(五)라고 표기되었으나, 정확한 연도는 14년이므로 ‘사(四)’로 입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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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泰山·南川三額號薦望 而首望武城蒙允
七賢事蹟
文昌侯崔先生 諱致遠 字海夫 號孤雲 慶州人也 唐
宣宗皇帝大中九年丁丑生 年十二 隨海舶入唐 尋
師力學 僖宗皇帝乾符元年甲午登第 光啟元年
乙巳東還新羅 憲康大王朝拜翰林學士 始倡文
物於東國 爲理學之宗儒 有桂苑筆耕集二十卷 唐
眞宗皇帝十三年·高麗顯宗大王十一年庚申
諡文昌侯
靈川申先生 諱潛 字元亮 高靈人 弘治辛亥三月
日生 年纔七歲 受業伯兄 纔經指授 卽自領觧不煩
劬苦205 詞藻日進 聲名大振 正德癸酉 公年二十三
登進士 中廟朝治敎更張 士學日新 公卽痛刮浮
華 務自砥礪 取讀聖賢之書 徧206交當世之士 往來論
辨 卓然自得 聞望益重 己卯登第 卽補藝文館檢閱
故事每賜對時 史官常後入先出 公進言曰 史官於
人主言動之微 無不察而書之 後入先出 恐有失於
紀實也 聞成廟朝 有一憸人 乘此得售其說 卒階
後禍 請自今先入後出以爲常 上可之 卽命爲例
未幾時事大變 公遂落職就閒 史官先入後出之制
205 1884년 원문에 若자로 되어 있으나 『옥계선생문집(玉溪先生文集)』의 신잠 행장과 1930년 『무성서원원지』
에는 苦자로 되어 있어 苦자로 고쳐 해석하였다.
206 원문에는 ‘편(編)’으로 되어 있으나 『옥계선생문집』 행장에 근거하여 ‘편(徧)’으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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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亦廢 公自此知不復有爲於時 辛巳橫被罪籍 遷于
長興府 丁酉移楊州 戊戌遂命任便居住 翌年丁憂
廬于峨嵯山下 癸卯以主簿出補泰仁 創建五學宮
己酉移守杆城 興學如治泰 壬子超拜尙州牧 州當
慶尙一道之衝 輪蹄輻輳 機務浩繁 又年歲大侵 流
民顚仆死亡相枕籍 公於是盡心賙活 規模節目 一
依在泰時 以是民無損瘠 觀察使丁公應斗 上荒政
之最于朝 上命增一秩 甲寅十二月三日卒 春秋
六十四 觀察使以訃聞于朝 上敎曰 潛淸廉勤幹
非他人比 今聞其死 良用惻然 遂命賻贈有加 卒
之日 士哭于庭 民號于野 如喪所親 玉溪盧先生曰
公之懿德俊行 可以師範一世 綱紀儒林 文章學術
足以黼黻皇猷 潤色太平 氣宇宏博 識量高雅 望之
儼然可畏 卽之油然可親 乙卯三月禮葬峨嵯山
不憂軒丁先生克仁 字可宅 靈光人 太宗大王
元年辛巳八月六日 生于豆毛浦里第 長歸貫鄕 天
資粹美 學問精明 宣德己酉中司馬 景泰癸酉丁
科第十三人 疏闢異端 竄逐妖僧 封章陳弊 革罷蚕
室 設鄕飮酒禮 一遵呂氏鄕約 聚子弟 敎誨不倦 以
正言年七十致仕歸鄕 號不憂軒 吟成一絶 題壁以
寓 知足自止之意 成廟朝諭前正言丁克仁 予聞
廉介自守 不求聞達 聚鄕子弟 敎誨不倦 予甚嘉焉
欲招用之 然年老難於任事 故特加三品散官 又求
獘言於公 公時年八十 强詣闕謝恩 又陳興學校事
革罷佛法事 守令勤慢殿最事 功臣私賤妾子從
父爲良事 田畓起陳區別納稅事 上番正兵優其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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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足事 各道都蚕復立利民事 漕船作弊列邑事 貢法
爲獘事 治盜寬法之獘事十條 上賜酒慰遣 又令本
道 時致惠養 爾宜知悉 成化辛丑八月卒 年八十一
訥庵宋先生 諱世琳 字獻仲 驪山人 成化十五年己
亥十二月十四日生 母夫人金氏方娠 夢有神人褒
衣金帶以告曰 三日當生貴子 名之萬年館 及期果
生公 岐嶷胎成 三字不類 俗只稱萬年 公少聰穎 不
煩師資 學問日進 弱冠中司馬 華聞大播 初公父韓
山 以經術爲中廟初九時甘盤 及靖國賜公父子
原從功臣 壬戌擢壯元科 癸亥轉吏曹佐郎卽未幾 怙
恃相繼捐背 泣血六年 仍成綿痼 號訥庵 七命不拜
跋白鹿洞規 敎授子弟間 因王母鄭氏命出爲綾城
縣令 莅官如臥齋閣 威不苛寬不弛 民有兄弟 詐述
文書 爭一頃田 公曰是書僞也 兄弟一體而分 尺布
可縫而競寸土乎 二人相感 乞焚其書 罷訟而退 義
動人也 上封事 斥異端訴民瘼賜肉帛以獎忠感
主也 己卯正月卒年四十一
默齋鄭先生 諱彦忠 字良久 慶州人 器局沈重 訥言
敏行 自中進士 旋廢赴擧 礪志求道 尤精易學啓蒙
卦畫程傳本義·璿機玉衡·洪範太極 精思力求 的破
氷釋 是以明吉凶消長之理 卞進退存亡之機 擬之
堯夫 非劣以優 在公懿德 孝行爲最 捐居舍 以與季
妹 終天只之志 躬親甘旨 手執劑藥 生事父也 衰經
不去 日啜一粥 守墓三霜 足不出柴門者 没報親也
外雖如愚 內實嚴毅 單瓢屢空 守士之常 含章賁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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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求人知 利欲聲色 浮雲太空 負笈盈門 善良輩出
圭庵宣化 講道仙雲 靈川下車 先訪草廬 一齋李先
生 敬事待以師友 上褒其賢 原陵是拜 俄觧職 絶意
崇途 聚鄕子弟 敎誨不倦
誠齋金先生 諱若黙字太容 道康人 弘治庚申二月
一日 生于谷城衙 幼且端重穎悟 稍長從師醉隱受
學 日開月增 卓然有進 到晩盖知 男兒事業 不在彼
歟 鄭默齋彦忠 礪志講學 孝友慈良 養爲己有 聲色
嗜欲 自爲外物 嘉靖丙申 公考贈佐郞公·母夫人
宋氏相繼沒 公身單喪疊 尙克盡職 禮靡不擧 皆得
中節 伏墓側三年 中廟庚子登別試乙科第一 己
酉除淸洪都事 庚戌爲韓 爲治淸儉 勸儒學居
先 未一朞刑平政理 上聞而嘉之 再降褒獎賜表
裏 公無喜曰 無效受恩 非臣子之幸 常取前人燭淚
落時民淚落之句 書諸座右 每掃室靜坐 讀性理書
後秩滿歸 四境老弱 塡街追哭曰 吾父去矣 丁巳拜
楊州牧 特以禮法 不容尺寸私 豪右皆斂氣 由韓及
楊 俱知治本有在 止除害根 不煩敎條 待人必信 民
安樂之 爲楊數年 廢不視事者 只兩箇日 晨昏勞悴
遂成沈痼 及其不救 遷別舍禁婦女 終事皆合禮無
差失 未嘗一語及於家 戊午七月日卒于官
鳴川金先生 諱灌 字沃而 道康人 萬曆乙亥五月二
十五日生 天性孝友 克承庭訓 稍長師事朴蘭溪宗
挺 先是鄕先生不憂軒丁公克仁 訥庵宋公宋世琳 立
學堂 詳定鄕約 公一遵之 揭爲學式 每月朔望 深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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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幅巾 參謁祠院 退坐書室 勤學誨人 斯須不掇萬曆
乙卯中進士 當昏朝政亂 嘗痛哭曰 恨未斷三昌頭
時廣昌李爾瞻·文昌柳希奮·密昌朴承宗 幷有勳封
迭執國命故也 丁卯胡亂從沙溪金先生倡義 盡誠
募粟 先生益翊獎歎 當昏朝斁倫之時 不樂仕進 與
宋壺巖致中·金洗馬堪 諸賢作松亭十賢之會 觴咏
自娱以寓風泉之懷 圖傳後世 夢村金相國鍾秀跋
其圖 渼湖金先生跋遺稿 杜湖趙晸撰 乙亥正月日卒
請額疏
伏以書院之設 所以尊有德景前行 興起斯文之盛
擧 而若非請于朝廷顯承澳號 則無以褒揚先賢
而殊欠崇報之意 故有賢則必有祠 有祠則必有
額者 其來尙矣 臣等伏覩 殿下臨御以來 好賢而
樂善 愛士而重道 賢祠之建 無願不從 恩額之典
有請卽允 凡前日之所未遑者 莫不次第擧行 而
獨本道泰仁縣 有先賢祠宇 創建已逾百有餘年 而
尙未蒙寵錫之號 則此實盛世之闕典 而臣等之
所羞也 臣等請爲殿下 略陳其梗槩惟聖明試
埀省覽焉 臣等謹按羅朝文昌侯崔致遠 以斯文宗
匠 遭時昏亂 出守泰山郡 卽今泰仁縣也 當時文獻
雖不足徵 而遺風餘韻 百世不泯 鄕人合謀 共搆一
堂 以爲報祀之地 而其後又以曾爲邑宰者 本朝
先正臣申潛 合享於其祠 以鄕賢先正臣正言丁克
仁·佐郎宋世琳·進士鄭彦忠·牧使金若默·進士金灌
配以享之 夫致遠之文章學業赫然 照人耳目 旣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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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祀之列 則臣等何必贅說於其間哉 申潛以己卯
名賢 早薦明經 中年受符 是邑其爲政 一以興學校
育人才爲務 坊村里社 廣設局堂 以爲講肄之所 捐
出己俸 以備餼廩之資 文風丕變 賢士輩出 其效作
成之效 不下文翁之化蜀 邑人追慕 遂與致遠而共
享焉 至若丁克仁 乃世宗朝人也 初以上庠入太
學時 有妖僧恣行佛法 誑惑一世 克仁率諸生 守
闕抗章 闢之廓如 自上深加獎歎焉 文宗朝擧
逸民不就 睿宗朝拜正言 以年滿七十 致仕還鄕
願學之士 遠近坌集 諄諄敎誨 老而不倦 設鄕飮酒
禮 一倣呂氏之規 一鄕化之 成宗大王聞之 下敎
獎諭 令本道時致惠養焉 宋世琳乃中廟師傅演
孫之子也 天分甚高 學業夙成 年纔弱冠 策名甲科
無意仕宦 七徵不起 事親至孝 誠禮備盡 毁撤佛宇
創立學舍 跋白鹿洞規 揭爲學式 訓迪蒙士 隨其才
而篤成焉 當時俊髦之士 多出於其門 鄭彦忠氣質
渾厚 訥言敏行 自中司馬 廢絶擧業 沈潛義理 尤精
易學 翫心高明 妙透象數 深得不傳之秘 於千載之
下 世以東方之康節稱之 先正臣宋麟壽 按節湖南
首訪講道 李恒·金麟厚相從講劘待以師友 朝廷
特除厚陵參奉 終身不仕 金若黙篤學力行 尊信前
賢 幼從內舅宋世琳受業 長與金麟厚·鄭彦忠等 互
相切磋 多所闡發 執親之喪 血泣三年 逮登科第 歷
職臺省 晩補楊州牧 興學勸農 敎化是先 公退之暇
每掃室靜坐 讀性理諸書 夜分乃罷 平生志操 以淸
儉恭勤 爲本世以金玉 君子稱之 金灌資稟近道 誠
孝出天 自少用力於義理上 深有所得 在昏朝時 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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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赴擧入洛 亢兇爾瞻聞其名 邀請甚勤 至於躬造其
僦舍 而終避不見 卷書歸家 不復就擧 左右圖書 探
賾蘊奧 每月朔望 聚會生徒於鄕塾 誘掖獎進 終身
不怠 儼然爲士林之表 則其操履之堅確 德義之深
厚 此可見矣 惟玆五臣者 或抱賢才而未盡展布 或
在遐遠而未及上聞 志效雖未可見於一時 風聲
猶可樹立於百世 則古人所謂鄕先生沒而可祭於
社者 其不在斯歟 嗚呼 立祠而享之者 爲其賢也
賜額而旌之者 重其事也 多士慕德 旣成俎豆之所
則其在國家尊崇風勵之道 其可終闕宣額之
典乎 試以東方諸賢言之 旣爲餟食於聖廟 則凡
諸立祠之所 皆蒙賜額之恩 盖所以重其從祀之
義也 顧念諸臣之德行學業 旣足以無愧於古人 爲
範於來學 況致遠旣在從祀之列 則惟玆祠宇 豈可
獨無頒號之擧乎 昔在先王朝 道內章甫 曾以此
事陳達天陛 而適綠其時朝家多事 未克施行 豈
不爲斯文之大欠事乎 玆以臣等不避煩猥之誅 合
辭封章 裹足千里 復此籲呼於九重之下 伏願
殿下 軫多士顒望之情 擧累朝久曠之典 特命
有司 亟宣華扁 以賁院宇以永祀 則千萬幸甚 臣
等不勝祈懇屛營之至 謹昧死以聞
疏頭 生員 柳之春 製疏 進士 宋明淵 寫疏 生員
金鼎三 李厚培 幼學 金垣 金益初 殷鼎和
殷鼎鉉 鄭之仁 鄭松年 鄭之雄 金尙敬
金泰重 李星淵 金尙謙 李星弼 宋相益
李星奎 辛萬煜 宋載亮 金尙俊 金亮采
金相采 鄭世觀 宋山斗 宋山甫 丁萬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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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商傳 鄭世泰 金信冑李星箕 宋致亮
宋相夔 宋相稷 鄭世益 權益載 權有載
宋弘輔 趙汝欽 李龜瑞 金雲翼 金溟翼
金致白 金太初 李大齡 洪應玘 趙相宣
金萬采 金世剛 金鵬翼 金致和 金尙衡
金愼采 金商鉉 金致祥 金商說 宋道淵
羅瑞奎 羅瑞星 宋賢輔 宋道輔 李必挺
李必起 丁 說 鄭 璈權敏聖 權 (鏋?)
吳允益 吳允中 李鳳瑞 景華學 金應三
張溟翰 金應白 景和雨 景和星 黃 欽
韓后琦 張南翰 吳聖海 崔 袨韓后成
崔 岐 崔冑昌 安大德 崔益華 崔 禇
崔 祿 崔 祐 高斗光 高斗明 高斗杓
西門台 趙山河 李萬榮 白光瑚 尹遇一
白光瑀 李 繕 李時說 趙汝益 李必郁
黃載重 金泰五 李后亮 裵萬垕柳益長
洪仲衍 朴泰眞 金復謙 吳命祺 柳光玉
梁應八 李龜錫 金應義 李龜祥 黃世欽
柳夢麟 宋時瓘 李載興 朴大恒 柳宗惠
姜萬純 林宗穀 趙器全 文萬緯 李寬濟
宋殷成 柳 濂 柳友桂 李命郁 柳必壽
任致弘 柳夏英 柳夏振 南必箕 趙禎鳳
金百兼 金重華 沈壽台 奇挺會 奇挺玉
金百鍊 邊 攸 邊 俅邊致用 奇挺緯
潘世茂 金百欽 邊 僖 邊 偉 沈碩基
李益元 邊 儹
權玉衡 尹志堯 蘇 玩
邊致尙 崔受慶 蘇 玭 權碩衡 蘇 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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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陳命新 林萬泰 李 溶 金應奎 蘇景鼎
陳維新 黃道濟 金紀鳳 崔興祖 兪顯基
蘇 瓛崔翊祖 李德著 蘇震苾 兪慶基
李基錫 蘇弘遠 崔弘祖 崔致相 李 激
金瑞鳳 金夢臣 李 {火+寬} 金 瑾 柳秀輝
柳道輝 宋晩成 李 澐 李嗣先 蔡 根
蔡 章 殷鼎梅 金道亨 進士李徵憲 李錫鳳
李白翊 金五一 邊 修 李 {后/田}
請額事蹟
乙亥十一月十三日 會于本院 通告道內 十二月初
一日 疏會于本校 丙子正月初五日封疏 二月初九
日蒙允 十一月二十三日延額 禮曹啓聞 觀
此全羅道生員柳之春等疏辭 則羅朝文昌侯崔致
遠 以斯文宗匠 遭時昏亂 出補泰山郡 卽今泰仁縣
也 遺風餘韻 百世不泯 鄕人合謀 共搆一堂 以爲報
祀之地 又曾爲邑宰者 本朝先正臣申潛 合享於其
祠 以鄕賢正言丁克仁·佐郞宋世琳·進士鄭彦忠·牧
使金若默·進士金灌 配以享之 諸臣之德行學業 無
愧於古人 爲範於來學 旣成俎豆之所 而宣額之
典 未免施行 士林惜之 特命有司 亟宣華扁 以賁院
宇爲白臥乎所207 崔致遠之道學卓冠 吾東旣已餟食
於聖廟 申潛之興學育才 蔚爲儒化 至今遺愛於邑
207 爲白臥乎所(누온바)로 읽는 이두로 ~하옵는 바, ~하옵시는 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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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 以至鄕賢丁克仁以下五人 皆有學識 表表可稱
則多士之建祠俎豆 可見尊慕之誠是白乎㫆立祠
旣久 又無疊設之處 似當依願賜額是白矣208 事係
褒獎重典 自下不敢擅便 上裁何如
丙子二月九日同副承旨臣沈枰次知啓 特
爲賜額爲良如敎209 額號以武城·泰山·南川啓報
而首望蒙允 復戶三結 院生三十名 保奴三十名
劃下院中
延額禮
本官前期 設使者次及香祝額號奉安幕次於
廟門外之西南向 使者以香祝額號盛龍亭 隨行
將至書院大門外 儒生出序立於道左 香祝額號
至 鞠躬祗迎 過則平身 使者立大門外 執事奉香
祝額號 安於幕次床上 謁者引使者 就幕次 大祝盥
洗塡祝 贊引引大祝及執事先入 詣盥洗位訖 各就
位 大祝就神位 東南西向立 執事官就神位 西
南東向立 諸生入就庭中北向 設安祝文之床於
神位之左 設香爐香榼床 設安額號之卓於前楹
階上 執事奉祭物 陳設于神位前 大祝出奉祭文
執事二人奉香及額號先入 諸生鞠躬祗迎 過
則平身 奉香盛于案上榼奉祝置于神位之東
床上 奉額號置于前楹階上卓 謁者引使者 立東
208 是白矣(이/이되)로 읽는 이두로 ~이사오되, ~이삽되, ~이옵되를 뜻한다.
209 爲良如敎(아산이샨)로 읽는 이두로 ~하라고 하신, ~하라고 하심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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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 立於階間北向 謁者引使者 詣盥洗位訖 謁者引
使者 陞自東階詣神位東北 南向立 儒生四拜 贊
者唱鞠躬拜興平身如儀 大祝詣板位前開櫝謁者
引使者 詣香案前立 執事 一人奉香爐 一人奉香榼
跪進使者左右 使者立三上香 大祝獻幣 使者受之
還授大祝 奠于神位前 司罇酌酒 執事官以爵進
使者前 使者以爵授執事官 奠于神位前 連奠三
爵 次詣配位 上香獻幣奠爵 幷如儀訖 使者復位 儒
生跪大祝取祭文 立於神位之左西向讀 贊引引
祠任 陞自西階 俯伏於神位前 使者宣額號訖
贊引引祠任 降復位 儒生四拜 贊者唱鞠躬拜興平
身如儀 謁者進使者前 告禮畢 大祝及執事官 奉祭
文及幣 就燎所焚訖 謁者引使者及諸執事官 出就
講堂 儒生以次出 祠任跪進禮幣 使者立受 祠任小
退再拜 使者揖 次詣執事官前跪進禮幣 執事官立
受 祠任小執再拜 執事官答再拜坐定 仍爲行禮後
使者起 祠任拜送於大門外 丙子十一月二十三日
祭文
維歲次丙子十一月甲寅朔二十三日丙子 國
王遣臣禮曹佐郞柳格 祭于文昌侯崔致遠 先正臣
申潛·正言丁克仁·佐郞宋世琳·進士鄭彦忠·牧使金
若默·進士金灌之靈 粤維文昌 挺生羅季 歷敭中朝
蔚然爲國瑞 文章學術 輝映千祀 餟食將聖 斯文未
墜 我東儒敎 實自公始 厭世溷濁 鞱光就閒 鸞棲枳
棘 于彼泰山 流風餘韻 赫赫耳目 邑人追思 報祀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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式210 有若申潛 己卯名紳 出宰玆邑 少試經綸 設敎興
學 誘掖後人 文風丕變 遺澤在民 亦越五臣 令名俱
彰 矜式一方 南土之望 或升于朝 或遜在野 凡厥行
蹟 式相上下 地存遺躅士挹餘徽 一堂齊享 有廟祁
祁 庸錫華扁 俾薦芬苾 曠世哀榮 靈其欽格
使者禮曹佐郞柳 格 大祝淳昌郡守李溭
奉香井邑縣監申喜澄 奉爐泰仁縣監李堂
院長領議政南九萬 京有司應敎趙相愚
院任幼學金萬采 殷鼎和 執禮生員金大衡
禮官幣物彩段一匹 白苧布一匹 壯紙五束
大祝壯紙三束 奉香壯紙二束 白紙一束
奉爐壯紙三束 禮曹書吏錢文二十二兩 彩段
一疋 白木一匹 壯紙七束 白紙三束
各邑例賻記
巡察使金萬吉 米二石 壯紙二束 厚白紙二束
本官李堂 院宇內白紋席地衣一件 眞米六斗
租一石 白紙十束 曲子二同 甘漿二斗
井邑官申喜澄 錢文二兩 白米五斗 壯紙一束
白紙二束 石魚二束 民魚一尾 乾柿二貼
金溝官趙楷 米十斗 白紙三束 曲子一同
扶安官李萬選 米一石 曲子一同 眞米二斗
生魚一束 鷄二首 松板二立
210 『고운집(孤雲集)』에는 忒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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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邑鄕校 錢文五兩 興德鄕校白紙四束錢二兩
南原鄕校 錢文五兩 光州鄕校白木二疋
本邑鄕校 白米二石 羅州鄕校壯紙五束
全州鄕校 錢文四兩 金溝鄕校錢文五兩
淳昌鄕校 白紙五束 順天鄕校白米二匹
考巖書院 錢文十兩 南皐書院白米十斗錢四兩
義巖書院 錢文二兩 東學堂白米七斗
北學堂 白米五斗 西學堂白木五斗
南學堂 畓三斗落納 興陽丁氏門中白木七疋
請額事本校疏會時所用 米四十二斗七升
疏行上京時贐 錢九十一兩 用米十七斗
延額時 飯米三十七斗 酒米四十四斗 眞米六十
五斗錢四十三兩八錢 租三石十二斗 牛三隻
丙子春院宇重修時所用 米一百五十四斗七升 租
三石十一斗四升錢十一兩一錢
九月十五日 院宇更修時用 米五十斗五升 租六斗
七升錢一兩三錢
都有司幼學金禹三 別有司權效聖
祝文記維年月日 某敢昭告于
文昌公崔先生 伏以北學莫先 與道俱東 倡我後蒙
萬古英風 玆値仲丁 精禋是宜 謹以牲幣庶品 式陳
明薦 以不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
齋金先生·鳴川金先生配 尙饗
靈川申先生 伏以十訓敎士 三事爲治 澤在斯民 久
而敬之 玆値仲丁 精禋是宜 謹以牲幣庶品 式陳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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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薦 以不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齋
金先生·鳴川金先生配 尙饗
院生關文
觀察使兼巡察使爲相考事 節到付禮曹關內 節
啓下敎 啓辭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書院下
齋儒生額數多少酌定事 榻前定奪 已賜額書
院二十名 未賜額書院十五名 文廟從享儒賢
書院三十名 定式施行事 分付諸道何如 傳曰允
事啓下爲有置211 啓下辭緣相考 道內各邑書院
良中212 知委施行關是置有亦213 關內辭緣相考 儒生
額數定式施行爲乎矣214 書院良中 知委施行事
笏記
獻官及執事 前期三日致齊 行事日四更一點 祝以
下 開櫝開盖 贊引引初獻官 點視陳設 訖還出 諸生
及諸執事 俱就門外位 執禮贊引 入自東門 先就拜
位再拜 訖各就位 贊引引諸生 入就拜位 贊引引獻
官 就門外位 贊引引祝及諸執事就拜位 祝以下皆
再拜 詣盥洗位 訖各就位 贊引引獻官入就位 獻官
211 爲有置는 ‘잇두’로 읽는 이두로 ‘ 하였다. ~하였어도’라는 의미이다.
212 良中는 ‘아’로 읽는 이두로 ‘ 에,~에서, 때(時)를 보이는 토’ 등의 의미이다.
213 是置有亦는 ‘이두이시니여’로 읽는 이두로 ‘ 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라고 하였어요’라는 의미이다.
214 爲乎矣는 ‘오되’로 읽는 이두로 ‘하오되, ~하되’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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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及諸生皆再拜行 初獻禮贊引進初獻官之左 白有
司謹具請行事 贊引引初獻官詣盥洗位 訖引詣
文昌公崔先生·靈川申先生罇所西向立 引詣文
昌公崔先生神位前跪三上香 俯伏興奠幣 俯伏興
奠爵 俯伏興少退跪讀祝文 引詣靈川申先生神
位前跪三上香 俯伏興奠幣 俯伏興奠爵 俯伏興少
退跪讀祝文 引詣配位罇所 東向立引詣 不憂軒
丁先生神位前跪三上香俯伏興奠幣 俯伏興奠爵
俯伏興 引詣訥庵宋先生神位前跪三上香 俯伏
興奠幣 俯伏興奠爵 俯伏興 引詣默齋鄭先生神
位前跪三上香 俯伏興奠幣 俯伏興奠爵 俯伏興 引
詣誠齊金先生神位前跪三上香 俯伏興奠幣 俯
伏興奠爵 俯伏興 引詣鳴川金先生神位前跪三
上香 俯伏興奠幣 俯伏興奠爵 俯伏興 引降復位 行
亞獻禮 終獻禮上同 飮福受胙贊引引初獻官 升詣
飮福位 西向立奉爵 俯伏興平身 引降復位 獻官及
諸生皆再拜 祝撤邊豆 獻官及諸生皆再拜 訖祝闔
櫝望瘞贊引引獻官 詣望瘞位 可祝禮畢 獻官
諸生次次出 執禮贊引再拜出
文昌侯崔先生影幀奉安事蹟
正廟朝七年癸卯十月日興陽·樂安兩邑通文 右文
爲通喩事 貴邑非孤雲崔先生遺馥之鄕耶 泰山
之高 曲水之長 莫非先生之風 則僉君子景仰尊
慕 想必有倍於他矣 竊嘗聞先生遺像在於智異
山之雙溪寺 是盖先生所逍遙之地 而僧輩揭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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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古蹟者也 然而先生道德從享文廟 則遺像
之混處於羅漢列者 寧不爲斯文之恥乎 是以湖嶺
章甫 頃發公議 而闕里祠重修廳諸儒 又通于河
東鄕校 仍飭于雙溪寺僧 卽爲移奉於先生之雲
孫家 爲幸於士林 不其大歟 第念千古遺像 宛然在
今 人思瞻拜 無不敬起 與其私於一家之尊奉 孰若
公於萬人之矜式也哉 且其雲孫零替太甚 一間影
堂 有難構成 將未免上雨旁風 墨渝而彩漶則當初
士論之倡發移奉 不幾於有始無終之歸乎 生等竊
惟貴邑武城祠 卽先生妥靈之所 而多士之欽
仰 像亦不爲無助矣 以先生之遺像 掛先生之
位後 時時瞻拜 永永尊慕 則在其雲孫 自無難處之
慮 而亦於士林長爲揭虔之地矣 豈不美哉 玆與近
地諸儒 合席相議 資送先生雲孫恒大 欲聽僉君
子高論之如何 望須諒察而進退之 不勝幸甚 右敬
通于泰仁鄕校 通頭幼學丁德輔 製通楊伯楷
本邑答通 右文爲通諭事 竊惟世之景仰孤雲先
生者 恨不得摳衣親炙於紫遷·伽倻之遊 而千載之
下 徒誦其柱晴嶂雲瀅月潭烟之句 盖是先生畵
像贊語也 後生末學 見聞寡陋 只傳贊文 未知畫像
之所在矣 今聞得之於梵宇而奉之本孫家云 一以
驚訝 一以欣幸 何者 禪家之崇奉釋迦·達摩之像 而
先生影幀 胡爲相傳於千古浩㤼之後也 此是吳道
子之畵子路歟 顧生家之繪顔子歟 文成公購得
孔夫子畫像於中州 而東國人始拜其儼然珠衡之
像 皇明時模來朱夫子畫像於使行 而左海之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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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初睹其灑落荷珠之像 先生之像 出於麗羅晦藏
之餘 而一丹靑幅遺儀宛然 則士之瞻拜展誠 怳若
親謁 函丈之間 是所以欣幸也 爲吾徒者 當於先
生所鍾之邑 所遊之地 構一間影堂 而湖嶺之儒 猝
難協議 遂忱從權隨便 而奉安於妥靈之祠者 僉君
子先獲我心矣 玆以今月十八日 鄙邑章甫齊會 武
城書院以定明年仲春仲丁 移安影幀之儀而陪行
有司付名二員 僉君子不以其期之大緩 其儀之草
草爲尤歟 右敬通于興陽·樂安鄕校 通頭金光運
影幀奉安時 呈狀
城主閤下 伏以本邑之古縣 卽泰山古治 而文昌
侯崔先生吏隱之地也 山有伽倻·詩山 卽先生遊
賞之所 臺云月延·流觴 卽先生觴咏之處 而後人
立祠於月延之下 而春秋享祀之者 盖亦古矣 其後
靈川申先生 東岡趙相公來莅此縣也 爲設鄕學於
院垈 而朔必祗謁 重修流觴臺於古址 而日必來憩
何莫非景慕先賢之徽躅而道德村中 尙闕君實之
昌繪 錦城文化 猶阻乖崖之彷佛 則遺氓之墮淚 想
像果何如哉 昨年冬自樂安·興陽通章來到而有曰
文昌侯崔先生影幀 奉安於樂安本孫之家 而本孫
凋殘 竊欲移安於本縣武城書院云 噫嘻盛哉 先
生以北方莫先之學 爲東國從享之首 而伊當日買
絲之繡 果傳神錦還之年 而五季之風雨 不得晦焉
三韓之兵燹不得到焉 不銷不泐完爾無恙於雙溪
之法師者 幾百載矣 而自寺而還安於家 自家而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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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於先生妥靈之所者 有此來諭 地之相去也 半
千餘里 而分而復合 歲之相後也 九百餘載 而神影
相隨 則豈非有數存於其間也耶 後學小生 景仰千
秋 聲猷已曠 典刑莫憑 而忽地天借 獲覩千百載眞
面 而潭月烟消 霽空雲捲 則亦豈非千載一時千古
盛擧歟 矧乎神明太守 冠佩儼然 而一幅省識 怳若
再莅則一邑之大小髫白 孰不翹首而望趾足而待
乎哉 今元月望 自樂安本孫家 先生影幀移安日 以
二月初六日發程云 日字只隔 勢難前却 而顧此殘
院 力綿擧羸 影板幀幌 將何以前期辦措 遠近章甫
亦何以臨時供億 本院院任 不可不極選 一鄕之望
士 故爲先別擇付名 第念祗迎節次事面 類非儒林
之私自獨擔 故玆敢齊聲 仰籲於閤下 慕賢愛士之
下 伏乞特垂諒察 優加顧恤 旋卽轉報營門 以爲
所到祗迎之盛節 又卽下付工匠 以爲營繕修理之
大擧 丕興縟儀 罔俾專美 幸甚 民等無任祈懇
狀頭幼學金道修製 書金慶遇
影幀奉安日記
甲辰二月初六日 本邑陪行有司幼學金光一·金載
厚 自樂安鄕校發行宿順天府 先生後孫樂安崔
恒大 興陽崔仁甲 進士崔顯大 樂安校任申永壽·金
以鉉率儒生祗迎 順天府使李惠祚瞻拜 校任金玩
率儒生祗迎 初七日 自順天至北倉中火暮到鴨綠
津宿院舍 初八日 自鴨綠院至谷城邑中火 校任李
惟謹·柳完載率儒生祗迎 同日自谷城宿玉果邑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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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中 李升徽瞻拜 校任金致賢率儒生祗迎 院任沈埰
鎭·申致祿·金達民率院生祗迎 初九日 自玉果至淳
昌中火 校任韓八敎·洪洛根率儒生祗迎 同日自淳
昌宿尋院寺 初十日 自尋院寺至本院 本邑金樂胤·
宋啓天率院儒 自菱橋陪行影幀 暫奉于流觴臺 金
慶遇祗迎 仍爲陪行 同日奉安 祭享獻官幼學金光
秋 預差朴良植 典祀崔日東 執禮金致榮 贊引鄭國
僑 贊唱洪致慶 大祝宋撲 奉香朴大植 奉爐宋訓 奠
爵金賢鐸 滌器安啓昌 望瘞金基一
影幀奉安祝文維年月日 某敢昭告于
文昌公崔先生·靈川申先生 伏以文昌先生 道
遠千載 神傳尺幅 自彼樂邑移次 主壁板以揭 位埴
而補罅玆擇穀朝 虔告厥由 謹以粢盛庶品 式陳明
薦 以不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齋
金先生·鳴川金先生配 尙饗
縣監徐簡修 齋長宋廷麟 掌議金履吉 色掌趙碩麟
院宇丹雘重修記215
癸卯十月日樂安士人崔公恒大 袖興樂兩邑校儒
僉章而來弊邑 恒大卽文昌公之裔孫 而覽其通
辭 文昌先生畫像移奉事也 若稽夫先生影幀
215 1930년 원지에는 賢宇丹雘重修事蹟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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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自羅而麗而至今 藏在頭流雙溪寺 禪非慕儒者 而
先生遺像 胡爲謹奉於世局浩㤼之餘耶 抑以雙流
淸溪杖屨逍遙之地 而模來古貌爲寺之奇蹟歟 不
可詳爾 第嶺南章甫 慨其先生七分之儀 誤留佛
家 而先通于河東校 轉通于恒大家 使之移奉 深得
其禮也 湖左兩邑之儒 又以爲本孫凋殘 家祠傾圮
竊恐尺幅畵面 竟有風雨之憂 而將欲奉之於妥靈
之祠 亦中其禮也 擎章披讀 讀未了而僉曰 於我邑
先生吏隱之地也 俎豆之鄕也 盍以畫像奉諸祠宇
粵明年仲春日 方以移安 而余沗別有司之任 遂與
邑之士 謀所以設位於先生主壁之北 咸曰斲板
揭座 當如龕形畵欄錦帳可具也 又曰祠之地衣已
弊 丹雘亦渝 並可改也 本院殘罷 財力無以辦 我
侯徐公簡修 乃先以十鏹銅助焉 乃擧役而自院乞
力於四學 又除別廳錢 總六十餘緡 貿彩買繡 煥其
影像之位 而地茵之破裂者易之 丹靑之䵝昧者新
之 至於工匠之使色土之用 亦侯之力也 本院之
省費 豈小小哉 盖以是月初六日壬戌始事 仲丁前
一日丙寅奉影畫像 後七日癸酉工訖焉 邑之人獲拜
遺像而擧皆懽欣蹈抃 俾余以記 噫 贊先生之像
者 擬之以柱空捲雲 瀅月消烟 浩浩杳杳 不可尙已
千載之下 孰能模捉 而一幅生綃毛髮森然 冠佩偉
焉 則畫工之傳神 勝於後學之想像耶 觴臺弭節 活
畵不冥之靈 想應有千古續遊之感 而奉之舊祠神
影 相依離合 亦有數歟 士之瞻拜者 怳若摳衣陪從
於伽山紫臺之上 胡令後人景慕之至此也 詩山不
磨 曲水無盡 先生之風 山高水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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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崇禎後三甲辰仲春金陵金仁行書
移安祝文維年月日 某敢昭告于
文昌公崔先生·靈川申先生 伏以上雨滲漏 椽桷朽
落 玆當修改 虔告厥由 謹以粢盛庶品 式陳明薦 以
不憂軒丁先生·訥庵宋先生·默齋鄭先生·誠齋金先
生·鳴川金先生配 尙饗
還安祝文上同
伏以補漏改弊 旣新且完 奉還神位 庶幾妥安
重修記216 回祿以上懸板·上樑文 入於灰燼
純廟朝二十五年乙酉四月日 講堂有回祿之禍 本
孫幼學金玟·宋致德·金峻哲·丁文德·鄭載赫·金匡述
合謀修葺 經始數年 稟告本官徐侯灝淳 徐侯好賢
誠慕 捐廩心貺粤四年戊子三月 改新訖功 越四年
辛卯 文昌侯崔先生影幀改模 事蹟載碑文及懸板
216 1930년 원지에는 講堂重創事實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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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桂苑筆耕集開刊記
純廟朝三十四年甲午 本官沈候能淑 與院儒朴海
彦·李俊漢·金祖鉉·金黈·金奎勳 筆耕集開刊事 稟于
巡察使徐公有榘徐公捐廩開刊 完營押印 藏于書
院 事蹟載於懸板
憲廟朝十五年己酉 竪徐候灝淳不忘碑銘 好賢誠
慕 捐廩心貺幀面再新 院貌重創 有司金玟·金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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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稟狀
哲廟朝六年乙卯 院後偸塚事 院任幼學金燾·宋程
淳·進士金烱厚·權執圭·宋持灝呈禀狀
伏以本院後麓城隍山 卽古泰山郡城隍堂天祭之
址 今爲武城書院之主山 累百年初無一坏之塚矣
不意有偸葬之人 至於三十餘塚之多 風化所關 是
何忍也 孰不可忍也 不塞不流 不止不行 掘其塚 院
其院 一以爲尊賢之道 二以杜蔑法之習 無任祈懇
本官韓山李侯承敬 親審督掘
當宁五年戊辰 各院存撤之際 本院復戶 保奴蠲削
當宁六年己巳 巡察使徐公相鼎 創建徐候碑閣 劃
給錢百緡拮据
當宁九年壬申三月日 幼學金必欽·金廷勳·邊大容·
金永璐院垈除役呈稟狀217
伏以尊賢尙道 朝家崇報之盛典也 本院卽七賢
享祀之院 而肅廟朝宣額時劃下 復戶三結 保奴
三十名 院生三十名 混入蠲削 而況且今玆戶布後
院垈接人汗掌庫直 亦入於均布之役 春秋之享祀
接支末由 朔望之焚香 供具難措 伏願城主閤下
仰答朝家崇道之典 院垈二十戶戶布烟役 卽爲
頉下之地 無任懇祝 本官趙侯中植 蠲頉十一戶布
217 1930년 원지에는 復戶保奴事實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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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及烟役 永久遵行
復戶保奴還復記
當宁十五年218戊寅 聞長城筆巖書院 復戶保奴復舊
事 定擧員幼學黃基煥 發文受答通 始爲呈稟
筆巖書院答通 右文爲回通事 夫院存而復戶之自
在 知是朝家崇報之典 而曩在撤院之時 混入一
體者 係是吏胥輩之畏劫於朝令 而未能詳審之
致也 本院則推尋時 自政府有嚴題 而罪其都吏輩
之弄奸 官而報營 至有完文 永久無弊事之原委
如斯已矣 幸望貴院 明白推尋 以補春秋粢盛之
道如何 道內書院不過三數處 其所尊奉 尤當如何
況復戶所重自別矣 不可晷刻仍循者矣 惟願僉君
子 益加勇斷 期必推尋 亦豈非士林之大生光者乎
通頭 幼學 宋馹·金壽千·朴崙陽
十二月二十三日 幼學宋程淳·邊吉容·黃基煥稟狀
伏以夫子嘗曰 爾愛其羊 我愛其禮 告朔雖廢 餼羊
不去 推可驗體禮之大關 而況乎書院旣爲仍存 則
復戶保奴 是乃體禮之大關者也 文昌侯崔先生
諱致遠 以斯文宗匠 從祀文廟 遺風餘韻 百世不泯
靈川申先生諱潛 以己卯名賢 早薦明經 受符爲政
218 1930년 원지에는 高宗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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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 원문
興學育英 不憂軒丁先生諱克仁 初以上庠入太學
抗章斥佛 致仕還鄕 敎誨不倦 設鄕飮酒禮 訥庵宋
先生諱世琳 年纔弱冠 策名甲科 無意仕宦 七徵不
起 毁撤佛宇 創立學舍 跋白鹿洞規 揭爲學式 默齋
鄭先生諱彦忠 氣質渾厚 訥言敏行 沉潛義理 尤精
易學 玩心高明 妙透象數 誠齋金先生諱若默 篤學
力行 尊信前賢 晩補楊州 興學勸農 淸儉恭勤 世稱
金玉君子 鳴川金先生諱灌 資稟近道 誠孝出天 用
力義理 深有所得 操履堅確 德義深厚 爲士林之表
七賢配享立祠維舊矣
肅廟丙子十一月日 特蒙宣額之恩 復戶三結保
奴三十名 院生三十名劃下院中 春秋之享祀 朔望
之焚香 奉行謹審 去戊辰書院存撤之際 國中仍
存四十七院中 本道內泰仁之武城長城之筆巖光
州之褒忠三院 特存仍享 而保復之蠲削 院生之亦
減 三院一時矣 院宇旣是仍存 則保復必無蠲削之
理 而其時士林公議 惶恐未遑矣 近者筆巖·褒忠
兩院 復戶還復 保奴還保 尊賢景慕之地 欽仰果何
如哉 道內三院 俱是仍存 則保復之還復 亦是一體
而兩院旣是有還復之事 一院奚獨無還復之理乎
本院文昌侯祠院中 先額首創 何等尊崇之地 尙
未還復其保復者 實是士林之公議 齎嘆者久矣 自
筆巖齋中通文與完文草來到 故玆敢帖連齊聲 仰
龥復戶保奴 依他院例 還復之地 無任祈懇
縉紳井邑縣監金益健 題往稟于院長事 幼學
李秉德 鄭海斗 金永洪 丁世基 金必欽
權鍾喜 奇一衍 閔致佑 金永彦 金永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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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永柱 金永璐宋晩秀 禹在鎬 南 鑽
金樂欽 金昌欽 申學模 金永朝 鄭漢龜
己卯二月初四日 幼學李秉德·權秉圭·金永璐稟狀
國有庠序 鄕有校院 卽我東方尊聖賢開來學之義
而復戶之劃下 保奴之劃付 寔出於崇道尙禮之盛
典也 矧且書院之蒙額 繼之而復戶保奴 自是列
聖朝培養之盛敎也 本院卽七賢配享之院 而七賢
行蹟已悉於前狀 不必歷擧 而
肅廟朝特蒙宣額之恩 復戶三結保奴三十名院
生三十名劃付院中 春秋之享祀 朔望之焚香 年近
累百 奉愼謹行矣 去戊辰各院存撤之際 國中仍
享四十七院中 本道內泰仁之武城·長城之筆巖·光
州之褒忠 三院特蒙仍享 而復戶保奴之蠲削 院生
之亦減 三院同然矣 院宇旣是仍存則保復必無蠲
削之理 而其時士林公議 惶恐未遑矣 年前筆巖
·褒忠兩院 復戶還復 保奴還保 尊慕欽仰 果何如哉
道內之三院 俱是仍存享 則保復之還復 亦是一體而
兩院旣是有還復之禮 一院奚獨無還復之理乎 本
院卽文昌侯祠院中 首創先額之院 何等尊崇
之地 保復之尙未還復者 寔是士林之齎嘆久矣 自
筆巖書院通文與完文草來到 故玆敢帖連齊聲仰
龥伏願特垂崇道尙禮之典 復戶保奴一依兩院
例還復 以副士林之顒望 無任祈懇
院長 閔觀鎬題 儒單容或無怪 自官無擅便之道事
幼學 宋南秀 洪淳達 金光欽 高泰鎭 金永烈
金永準 宋程淳 朴台東 金永弼 邊大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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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興模 權鍾洪 金永鯤 金相浩 李承湖
安堯錫 柳寅燁 崔炳灝 鄭鍾龜 金廷述
金堯昇 丁相鉉 宋曦玉 李光烈 裵基萬
己卯二月十六日幼學金龍祖·金光欽·邊大容稟狀
魯祀太牢 衛聖崇德之義 而有賢則有院 有院則有
復 我東方列聖朝崇德之懿典也 本院卽七賢妥
靈之所 而七賢事蹟已悉於前狀 不必歷擧 而
肅廟朝丙子特蒙額恩 復戶三結 保奴三十名 院
生三十名劃付 院中春秋俎豆之禮 朔望焚香之節
累百年來 奉行謹愼矣 去戊辰各院存撤之際
國中仍存四十七院中 本道內泰仁之武城 長城之
筆巖 光州之褒忠 三院特蒙仍享 而保復之蠲削 院
生之亦減 三院一時矣 院宇旣是仍存則保復必無
蠲削之理 而其時士林之公議 惶恐未遑矣 年前筆
巖·褒忠兩院 復戶還復保奴還保 景慕欽仰 倘何如
哉 道內三院 同是仍存則保復之還復 亦是一體 而
兩院旣有還復之禮 一院奚獨無還復之理乎 本院
卽文昌侯祠院中 首創蒙額之院 而何等尊慕
之地 保復之尙未還復者 寔是士林之顒嘆者久矣
自筆巖書院通文與關文草來到 故玆敢帖連仰瀆
伏願特垂崇德之典 一依兩院例還復之意云云
巡察使沈公履澤題 士論非不當然 而未遑之典也
從當議處 幼學宋永采 李東奎 權鍾洪
朴潤壽 李啓鎬 金樂欽 安永文 李珉求
丁基翕 孫奎先 奇東旭 金宗琳 金亨植
李啓應 安學律 南 濟 金廷勳 盧極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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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원지』 상(1884)
金永昌 尹希成 羅燾元 柳景善 朴在植
己卯八月十日政府呈狀事 宋程淳·金永烈上京時
白樂俊京營間周旋得題 有功於院中
進士邊遇基·李以鉍·金堯翊稟狀
國之有院 賜額而繼以復戶保奴之劃下 實是尊
賢崇道之盛典也 本院卽文昌侯崔先生妥靈主享
之院 而肅廟丙子十月日 特蒙宣額之恩 復戶三
結保奴三十名 院生三十名劃下 院中春秋享祀朔
望焚香 年將累百 謹愼奉行矣 戊辰撤院之際 本道
內仍享之院 泰仁之武城 長城之筆巖 光州之褒忠
而復戶保奴之蠲削 三院一時矣 院宇旣是仍存 則
保復必無減削之理 而其時士林之還復公議未遑
矣 年前筆巖·褒忠兩院 復戶還復保奴還保 尊賢景
慕欽仰 果何如哉 道內三院俱是仍存 則保復之還
復 亦是一體 而兩院旣是有還復之禮 一院奚獨無
還復之理 本院文昌侯祠院中 首創先額之院 何
等尊崇之地 保復尙未還復 實是士林之齎嗟久矣
前後文狀帖聯齊聲仰瀆 伏願特垂尊賢崇道之典
復戶保奴依前例還復之意 關文特下該道營邑 以
爲更新院貌之地 謹冒昧以陳
領議政李公最應題 旣有院則必有保復 自是典式
也 而與他院異規者 豈不有欠於尊賢之道乎 一依
他院例施行 而邑吏輩如有從中奸弄 則甚非事體
攸當事
幼學 金龍祖 李東莢 權鐘豊 柳恒豊
金永弼 高永柱 朴魯洙 金相煥 權壽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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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建中 丁泰鉉 邊鎭奎 崔翊坤 崔恒淵
崔喆洙 宋鍾壽 趙秉浩 黃宗黙宋持興
閔慶鎬 金永朝 黃基煥 金樂欽 裵基萬
金龍采 邊吉容 李昌寧 禹在鎬 白昌鎭
金永璐朴尙燁 安炳錫 丁永瓘 金永勳
己卯九月初六日 京司題音本官到付狀
院事惟在院長之處分何如 而本院復戶與保奴還
復事 旣稟于院長 又呈于巡營 仰瀆于政府 而題敎
帖聯 仰稟院長閔觀鎬 題卽當報營措處
己卯十月初一日 京司題音營門到付狀
本院復戶與保奴還復事 伏承營邑之題敎 而緣
由仰瀆于領相閤下 題敎云云
觀察使沈公履澤 題旣有士論 且有京司題飭 復舊
之節 從長善處
己卯十月二十八日院儒稟狀
本院復戶及院生保奴復舊事 已悉於前後狀辭 不
必更溷而政府及營門之題飭鄭重 同歸於正 則惟
係主司之裁處 惟我院長以邑之司成 方在本院院
長 則其所以象賢禮制 宜加盡道 凡所復舊之節 卽
一更始之政 則右此劃下之盛典 皆從其朔 亟施措
處 依舊更新 則仰答朝家崇賢之本意 而大有功
於師門 蔚然興於儒風者 實爲武城絃歌之永誦 其
在感服銘佩 無任祈懇
院長 閔觀鎬題 復結依營題施行是在果 至於院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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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奴 繫之於民事艱艱 廣探物議 從當區劃
泰仁縣監書目
本縣武城書院復結 已自戊辰添付槩狀屬於出稅
之案 則有不可自邑擅便 更伏俟處分之如何
營題 旣有他院已行之例 且有政府題勅 不容不依
舊施行
庚辰正月十九日院任稟狀
本院復戶與保奴事 特蒙復舊之題敎 而以待處分
矣 春享祭在邇 故玆敢仰龥於慕賢尊道之下 伏願
復戶三結 保奴三十名 卽地推給 以爲享祀需用安
行之意 玆敢仰稟
院長題 保奴三十名亦一體復舊
庚辰二月十五日 院儒稟狀
本院復戶還復事 已悉於前後狀內 不必枚擧矣 夫
政府之題意 如是鄭重 巡營之敎勅 何等截嚴 院長
之許施 兩度完成 而至於出稅之境 同該吏云削於
收租案 終不出尺 政營邑累勅之下 事甚駭然 伏願
嚴關該邑 復三結 依舊還復 以補春秋享祀之禮
營題 已有前報之題 何不施行
庚辰四月十三日 院任稟狀
本院復結還復事 已悉於前後狀內 今不必更陳 而另
加題飭於都吏處 一依筆巖·褒忠兩院例復舊 院
長題 至於復結 係之於上司 則自官萬無擅便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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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六月初七日 道儒稟狀
本院復戶還復事 已悉於前後狀 去年八月 仰瀆于
閤下 題敎卽到付營邑 而復戶尙未復舊 嚴明發關
於營邑 卽爲還復云云
政府題 已悉於前題是在果 有其院無其復 非事體事
理也 蔽一言 明是該吏之舞奸偸弄者也 自本營別
般嚴飭於該邑 依式推給後 形止馳報
辛巳七月十七日院儒稟狀
本院復戶復舊事 已悉前狀 政府及營門題飭屢次
鄭重 則惟係於院長處分何如云云
院長李定稙題 年前已有査報之營題 而到今
啓聞 蒙劃之前無他道 惟竣下回
辛巳十二月十六日 院儒稟狀 本院復結還復事 七
月擧槩仰籲依題敎 伏待特下如海之澤 旣復積年
未遑之事 永久遵行之意 完文成給之地云云
院長題 此乃朝家之劃付 未知還寢之何故 而必
緣該色輩未察之致也 以此憑信 永久無至沒實
壬午三月竪李相公最應碑銘 尊賢尙德 豊功盛烈 保
復重創 粢牲愈潔 並竪李侯定稙碑銘 保復還舊 苾
芬重馨 誠深慕仰 頌溢刻銘 有司丁世基·宋程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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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山處士安在頀藏書記
周易具諺解一秩
書傳具諺解一秩
詩傳具諺解一秩
論語具諺解一秩
孟子具諺解一秩
中庸具諺解
大學具諺解
小學具諺解一秩
春秋左傳十冊
禮記十冊
周禮十冊
性理大全一秩
箕範衍義四卷
孔子家語三卷
東萊博議二卷
孟子序說一卷
孝經一冊
古文鏡三卷
通鑑要解二卷
大喪禮備一卷
史要聚選五冊
數學啓蒙一卷
大禹氏篆帖
撰賦六卷
王右軍筆帖
韓文二卷
河西金先生筆帖
古文前後集八冊
晦軒安先生實記三冊 濂洛二冊
玉篇二卷
杜律二冊
史記評林一秩
唐詩五冊
鴻史一秩
武城書院七賢妥靈之院 而道內章甫揖讓進退之
所也 余以後學猥沗院誌之任 溯古歷今 不敢贅說
其間哉 而泰山芝山處士安在頀 文懿公諱文凱之
後孫 承旨公諱大規之六世孫也 平日素行 在於孝
友等六行 上而守身儉約 齊家淸穆 聚洞子弟 敎誨
不倦 學式揭付堂壁 一則白鹿洞規 一則鄕飮酒禮
朔望習禮 春秋講磨 及其年暮 聞南學重創 復覩
玆院習禮 慨然有慕賢興學之心 家藏書冊累百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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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藏于院中 以爲講習之資 莊脩之寶 猗歟欽哉 余
不勝興感之心 以不文忘孤陋云爾 甲申閏月日
河西金先生後孫堯昇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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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저서에 게재된 내용이 (재)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의 공식 견해는 아닙니다. 본 저서의 내용을 인
용할 경우 출처를 명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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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인쇄 | 2021년 12월 17일
초판발행 | 2021년 12월 17일
옮긴이 | 박정민·권이선
교정감수자 | 김현영(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발행인 | 재단법인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주 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콩쥐팥쥐로 1696
전 화 | Tel. 063-280-7212 (Fax. 063-286-9206)
홈페이지 | http://jbstudies.re.kr
제 작 | 퓨전디자인
주 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현무3길, 53
전 화 | Tel. 063-244-4433 (Fax. 063-244-2428)
등 록 | 제2008-000004호
이메일 | fu4433@naver.com
비매품
ISBN 978-89-6612-349-0 94090
978-89-6612-348-3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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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학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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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성
서
원
지
지
(1884)
박정민
·
권이선
옮김
上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