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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세조 10 1464 갑신 天順 8 1 1월 7일, 淸道郡 雲溪里 少微洞에서 태어나다.
성종 2 1471 신묘 成化 7 8 봄, 부친이 예문관 봉교로 부임하자 外家 근처인 龍仁 鴨皐里로 이사하다. ○ 玉樹精舍에서 형들과 함께 독서하다.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17 3월, 양친을 따라 雲溪로 돌아가다. ○ 9월, 密陽에서 居喪中인 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우다. 이때 金宏弼ㆍ鄭汝昌 등 12명과 神交를 맺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18 2월, 김종직에게 韓愈의 글을 배우다. ○ 7월, 남효온과 龍門山을 유람하다. ○ 8월, 原州의 酒泉山으로 元昊를 방문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25 3월, 牧使 慶太素 및 遊官諸公 21人과 矗石樓에서 修禊하고 序를 짓다. ○ 7월, 병을 핑계로 敎授職을 그만두다. ○ 9월, 舊室의 동편 臥龍峯 아래에 雲溪精舍를 세우고 이에 ‘臥龍樵夫’로 號를 삼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26 4월, 藍溪에 가서 鄭汝昌을 방문하고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頭流紀行錄〉 ○ 6월, 예문관 검열이 되다.
성종 23 1492 임자 弘治 5 29 1월, 木川 別墅에 ‘竹林精舍’를 짓다. ○ 4월, 수찬이 되다. ○ 7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8월, 성균관 直講이 되다. ○ 9월, 사간원 헌납이 되다. ○ 李克墩ㆍ成俊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다. ○ 사가독서하다. ○ 11월, 김종직의 시호를 ‘文正’과 ‘文忠’으로 논의하다.
연산군 2 1496 병진 弘治 9 33 1월, 獻納이 되다. ○ 昭陵復位를 청하다. ○ 2월, 사직하고 雲溪로 돌아가다. ○ 3월, 모친상을 당하다.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35 1월, 〈遊月宮賦〉를 짓다. ○ 6월, 風疾이 있어 靑溪精舍에서 調養하다. ○ 7월, 김종직의 〈吊義帝文〉을 史草에 실은 일로 국문을 받다. ○ 7월 27일, 저자에서 權五福ㆍ權景裕ㆍ李穆ㆍ許磐과 함께 처형되다. ○ 楊州의 石橋에 가매장하다.
중종 1 1506 병인 正德 1 - 9월, 伸寃復爵되다. ○ 10월, 木川 鵲城山에 改葬하다. ○ 伯兄의 둘째 아들 金大壯이 奉祀하다.
중종 3 1508 무진 正德 3 - 8월, 水也山에 返葬하다.
중종 13 1518 무인 正德 13 - 2월, 자손을 錄用하게 하다. ○ 4월, 淸道의 儒生이 선생의 故宅인 雲溪精舍를 고쳐 紫溪祠를 세우다.
중종 14 1519 기묘 正德 14 - 2월, 문집이 初刊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 가을, 紫溪祠를 書院으로 만들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 봄, 紫溪書院이 중건되다.
현종 2 1661 신축 永曆 15 - 4월, 도승지에 추증되고, 紫溪書院으로 賜額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 3월, 木川 竹林祠에 배향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가을, 竹林祠가 道東書院으로 사액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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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구(鄭逑)1543년(중종 38)~1620년(광해군 12)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61 3월, 洪州 牧使가 되었으나 呈辭하고 木川에 우거하다. ○ 9월, 환향하다. ○ 寒岡 북쪽 夙夜齋가 완성되다. ○ 五先生禮說分類와 心經發揮 등을 편찬하다. ○ 鄭仁弘과 절교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62 봄, 寒岡 북쪽에 五蒼亭, 서쪽에 川上亭을 짓다. ○ 3월, 공조 참판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武屹精舍가 완성되다. ○ 濂洛羮墻錄과 洙泗言仁錄을 편차하다. ○ 景賢續錄과 臥龍巖志, 谷山洞庵志 등을 짓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 2월, 木川의 사림이 竹林書院을 건립하여 朱子를 봉안하고 선생을 從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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朽淺先生集卷之八 / 行狀 / 金濯纓行狀
先生姓金。諱馹孫。字季雲。自號濯纓。其先金海府人。駕洛國王首露之裔。世居金海。五世祖以昏娶。始卜居淸道郡。王父諱克一。節孝先生其人也。考諱孟。官至執義。外祖。官諱未詳。而按文集則必是龍仁李氏也。先生以皇明天順甲申降焉。卽我世祖十年也。成化庚子。與仲兄驥孫同赴禮圍不利。是歲先生年十七。聞佔畢齋金先生宗直丁憂在密陽。乃往從之。得聞爲學之方。自是考德問業。以爲依歸。厥後佔畢易簀。先生作祭文有曰。升其塾堂。學始知方。諭我千古。如室得戶。踐履之餘。文以博予。恩同爺孃。義當方喪云云。蓋先生之學。傳自佔畢齋也。壬寅冬。與仲兄赴殿試。仲擢第一。先生不中。弘治癸卯甲辰間。丁外憂。丙午。中進士。其年十月。登第。丁未。爲晉州學。時仲兄乞養昌寧。先生每自晉往來省母。戊申秋。先生以病辭晉學。還淸道。己酉冬。以非罪幽金寧。未幾。蒙恩得赦。尋被召。以遼東質正官赴京師。是時在烏蠻館。脫所穿衣。換得周旺所藏古畫十四幅。辛亥元正。又朝京。是時見周銓,程愈。又得小學書。俱見狀末。 是年夏。以龍驤司正。校讎綱目。壬子秋。遭仲兄喪。有祭文。是秋。又聞佔畢訃。以兄喪不得往哭。有鴒原方急。鱣堂莫及之文。癸丑春。奉旨須諭本道。是年秋冬。在讀書堂。有餘力學琴之語。丙辰三月。丁內艱。戊午仲夏。外除。是時燕山亂政。史獄大起。先生以遊佔畢門故被收。而卒於市。實是年七月十七日也。同時騈首死者有四人。而姓名無傳。又寒暄金先生,一蠹鄭先生。亦以佔畢門人。俱謫居而卒。先生之伯兄提學公諱駿孫及提學公之子三足堂諱大有。亦以先生之故。俱配湖南。逮中廟登極。得釋。先生兄弟三人。竝仕淸顯。而仲兄早歲。無箕裘。先生身後亦寂寞焉。善人報施之理安在。而獨提學公後先生卒。三足堂賢而有文。攀桂立身。曺南冥許以蓋世之雄。先生娶禮安金尾孫女。金居湖西木川地。故先生常往來或遊息。及卒。夫人因居木以終。墓於縣東十五里許。夫人之私親兄弟子孫。累世相傳。不絶香火。乃云先生亦與夫人合葬於此。然墓道無表。人皆聽氷。及觀先賢墳墓錄則曰。金某 卽先生也 墓在淸道郡西水也峴。淸道本先生之桑梓。而松楸亦在此焉。則淸道之說。似有可諉。而猶莫能釋然。恨未得擲身南紀以白眞贗也。嘻。先生一生所行。雖無可徵。而先聖有云有德者必有言。則讀其書想其人。庶可窺測其萬一矣。觀祭仲氏文。有曰。飮食必躬爨以進於親。凡應對左右。必承顏而無違。吾亦學兄而無不爲。稍知事親之方當如斯也。又云。棄官還鄕。與兄共事漁獵。用以奉養。此則可見其孝親之實也。又云。往尋佔畢。遂知向方。動必相隨。未嘗暫離。又云。經營後事。俾不供佛。撫恤孤孀。俾不失業。我在人間。兄無憂也。又云。兄於中年。飮酒失母志。吾嘗誦賈同遺蔡之詩而切責云云。於此可想友愛之道。而亦見其平生未嘗酗酒而失身也。且身居海外之偏荒。志慕中華之君子。上自程朱。下至金許。常恨不同時而不相見也。又念當今賢士之在中國者。思有以一見。而到京之後。果得二人。一則好道之程愈。一則博學之周銓。又因周銓。聞有李東陽者。文望高世。欲介周一拜。而歸期已迫。未能也。他日送人赴京。傳致不忘之意於二人焉。其好賢樂善之誠。出尋常萬萬。而所謂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者。其近之矣。朱先生小學書。行於我東久矣。而至於程愈集說。則初未聞也。先生之入京也。程愈贈集說。先生以爲是范子勸橫渠學中庸之意。而持以東還。刊布國中。集說之行於東方。蓋自此始。而學者之所賴者。爲如何也。前後赴京。行色蕭然。囊橐所有。盡買經籍。先生在書堂也。上賜四十八詠。使之和進。先生遂跋文以獻。蓋所謂四十八詠。卽詠四十八種花卉者也。先生姑舍花卉之鮮明。推廣物理之無窮。因此著彼。以小喩大。或進君德。或言治道。戒以玩物喪志。勸以主敬達順。此實陳善閉邪。因事納忠之意。而亦觀他一箇大胸襟包得許多也。先生歷職未可攷。姑敍其見於文集者。又有登瀛夏官郞等語。至今傳者。稱正郞云。文集二卷行于世。萬歷庚戌流火。朽淺黃宗海。狀。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32 濯纓 金馹孫의 행장을 짓다.
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1579년(선조 12)~1642년(인조 20)
선조 35 1602 임인 萬曆 30 24 寒岡 鄭逑에게 수업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32 濯纓 金馹孫의 행장을 짓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33 鄭仁弘이 李彥迪과 李滉을 무함하자 兩湖 諸生들과 함께 상소하여 鄭仁弘을 논척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34 鄭仁弘이 정승이 되어 木川縣을 지나갈 때 그를 배알하고자 하는 자가 수십인이었으나 선생은 그를 만나지 아니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 竹林書院에 배향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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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오(晩悟) 신달도(申達道)1576년(선조 9)~1631년(인조 9)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1 8월 20일, 義城縣 陶巖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5 족형 鼎峰 申弘道에게 「十九史」를 배우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16 長川書院에서 독서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29 3월, 西厓 柳成龍을 뵙다. ○ 9월, 月波亭에 올라 朴敦復, 崔喆 등과 重陽會를 가지다. ○ 高敬履가 五賢에서 晦齋 李彦迪을 빼버리고 成渾을 넣자 변무하는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32 2월, 別試 初試에 장원하다. ○ 3월, 安東 府使 寒岡 鄭逑를 뵙다. ○ 10월, 부친의 명으로 不知巖으로 장현광을 스승의 예로 찾아뵙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42 金城山 아래 蔚馬里로 거처를 옮기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43 3월, 黃鶴山에 薇山精舍가 완성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48 1월, 〈自警箴〉을 짓다. ○ 6월, 明政殿 庭試에 장원하다. ○ 성균관 전적이 되다. ○ 10월, 成歡道 察訪이 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49 李适의 난으로 仁祖가 公州로 幸行하자 경계에서 맞이하다. ○ 5월, 상소하여 驛의 폐단 6가지를 아뢰다. ○ 10월, 全州府 判官이 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56 3월, 장령이 되다. ○ 5월, 군자감 정, 홍문관 수찬이 되다. ○ 阿峴으로 거처를 옮기다. ○ 6월 14일, 阿峴 寓舍에서 졸하다. ○ 7월, 義城 陶巖里에 빈소를 마련하다. ○ 12월, 梧桐山에 장사 지내다.
〈與黃大進〉은 黃宗海에게 보낸 것으로, 竹林書院에 鄭逑와 金馹孫을 追享할 때는 세대보다 道學이 우선하므로 정구를 먼저 모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지만 장현광에게 여쭈어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晩悟先生文集卷之六 / 書 / 與黃大進 宗海○甲子(1624,인조2)
伏聞竹林院宇已成。將以濯纓,寒岡兩先生。從世代追配云。未知貴鄕僉君子所據之如何。而惜乎吾兄高明之見。亦未免爛熳同歸也。昔朱子之爲南康軍也。建濂溪祠。以兩程配之。又別立五賢堂。以奉陶靖節,陳了翁,李公擇,劉西澗父子。彼八賢者。皆有遺躅於南康。則同堂列享。固無不可。朱子特別其廟以奉之。近世盧公慶麟宰星州時。爲文烈公李兆年,文忠公李仁復刱建書院。欲追享寒暄先生於其下。禀于退溪先生。先生答書曰寒暄先生。乃道學儒宗。其視二李之只取一節者。尊崇之道。不能不殊歸矣。不記原書。其大意如此。 其後寒岡先生更禀于退溪先生。遂祠程朱兩夫子而以寒暄配之。旣又立祠其傍。以奉二李。蓋自古書院之設。以道學爲重。而不以世代爲主故也。金濯纓文章節義。世所欽慕。而鄭先生乃異日陞廡之大賢。其尊奉之道。固不當乃爾。後日若有斯文公論。則主事者之咎責。當如何也。盖此追配。實有極難處者。若以道學爲重。奉寒岡於濯纓之上。則有違鄭先生謙虛讓長之意。若以世代爲主。奉濯纓於寒岡之上。則實非後生崇奉大賢之道。雖分奉寒岡濯纓於朱子之左右。而酌獻則當先左而後右。亦如上下之難便。抑緣此而不祀濯纓。獨奉鄭先生。則又非鄭先生當日講定之遺意。未知如何可以得當也。鄙意則具此措語。禀質於旅軒先生而處之。然後方爲穩當而無後議矣。事係斯文。不容泯默。若非吾兄。亦何敢妄言及此耶。幸有以諒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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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1760년(영조 36)~1839년(헌종 5)
硏經齋全集卷之五十三 / 逸民傳 / 李榮元,李俶,權得己,李挺豪,黃宗海,曺行立。
黃宗海字大進。懷德人。幼有至性。年二十四。受學於寒岡鄭逑。得聞爲學之法。已而丁父憂。守塚三年。䟽食飮水。哀毁甚至。杖而後起。會鄭仁弘詆誣退溪先生李滉。宗海與西湖諸生千餘人。上䟽論之。仁弘入相光海。行過木川縣。有媚仁弘者邀諸生欲迎謁。會者數十人。宗海曰前年上章罪狀。今年遽事干謁。得無愧乎。諸生遂皆謝去。癸丑光海幽閉母后于西宮。宗海廢擧不出。時至連山。從沙溪先生金長生講禮。宗海旣廢擧三十年。博學經術。尤深於禮樂。著有寒岡喪制答問,禮學疑難答問等書。癸亥仁祖旁求文學之士。文忠公張維薦宗海守道狀。屢拜參奉。至掌苑別提不就。丙寅長生以元宗追崇不可。將上䟽。問于宗海。宗海引春秋閔文襄哀事答之。又著論言追崇非禮。以崇禎壬午卒。年六十四。學者稱朽淺先生。後八年。享竹林書院。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64 12월 24일, 졸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 竹林書院에 배향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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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26권 / 행장(行狀) / 황 징군(黃徵君) 행장
선생의 휘는 종해(宗海)요 자는 대진(大進)이요 성은 황씨(黃氏)요 본은 회덕(懷德)이니, 고려 때에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길신(吉臣)이 선생의 7대조가 된다. 지후의 아들은 상문(尙文)이니 과문(科文)을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 뒤에 직장(直長)을 지낸 빈(彬)이 있었고, 직장의 아들은 철균(鐵均)이니 글을 잘하고 행실이 높아서 녹사(祿仕)로서 의주 판관(義州判官)을 지냈다. 판관의 아들은 국자 생원(國子生員) 우삼(友參)이니 효행이 높다고 칭송되었다. 생원의 아들은 선무랑(宣武郞) 윤림(潤淋)이요, 선무랑의 아들이 덕휴(德休)니 곧 선생의 아버지이다. 효도와 우애의 지성이 있어서 은덕(隱德)으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니,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언신(彦信)의 7대손이요, 80에 효우(孝友)로 참봉(參奉)이 된 우(羽)의 딸이다. 만력(萬曆) 7년(1579, 선조12) 3월 26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글을 배우기 전에도 벌써 부모 섬기는 절도(節度)를 알아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효성스러운 아이라 일렀다. 10세에 비로소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서 14, 5세에 학문으로 이름이 났고, 24세에 처음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을 스승으로 섬겨서 비로소 학문하는 종지(宗旨)를 들었다. 아버지가 8년 동안 중풍으로 누웠다가 병오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운명할 때에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8년간이나 앓아 누운 동안에 네가 나를 간호했는데, 그 8년간을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내가 죽은 뒤에 네가 울다가 몸을 해칠까 봐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였다. 상사를 당하여서는 5개월이나 장례를 치르지 않고 죽만 먹고 땅바닥에서 잠잤으며, 너무 슬피 울어서 남이 부축하여야 일어섰다. 장사를 마치고는 3년 동안 여묘를 사는 동안 거친 밥에 물만을 마시었고, 채소도 과일도 먹지 않았다. 그 거상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한강 정 선생의 《상제문답(喪制問答)》이 있다. 상제를 마친 뒤에 어떤 사람이 술과 반찬을 주어 위로하였는데, 선생이 받지 않았다.
경술년에는 김탁영(金濯纓) 행장을 지었고, 신해년에는 호남(湖南)ㆍ호서(湖西)의 1천여 명 유생(儒生)과 더불어 선현(先賢)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의 죄를 상소하여 논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정인홍이 정승이 되어서 목천현(木川縣)을 지나가는데, 인홍에게 아첨하는 자가 모든 선비들을 불러서 환영하고자 하니, 모여든 자가 수십여 명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제생(諸生)들이 정인홍의 죄상을 상소로 아뢰고 이제 와서 환영을 하니, 어찌 양심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니, 선비들이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계축년에는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幽閉)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인도가 멸하여지는구나.’ 하고 드디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정사년에는 퇴계 선생의 산거시 발문(山居詩跋文)을 지었고, 무오년에는 연산(連山)에 가서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을 만나 예를 묻고 《예학의난답문(禮學疑難答問)》을 지었으며, 임술년에는 도잠동(陶潛洞)에 터를 정하여 집을 지었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구할 때에 고을 현감(縣監)이 선생의 행의(行誼)를 보고하였는데, 보고가 올라가기에 앞서서 장유(張維)가 벌써 임금에게 추천하였다. 그 다음해에 어머니 성 부인(成夫人)이 별세하셨다. 그때에 선생의 나이가 50이 되었으나, 곡읍 거상(哭泣居喪)하는 절도를 연로하다는 이유로 변경함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반곡(返哭)한 뒤에는 여막에서 거처하였는데, 묘소까지의 거리가 수 리(數里)였으나 매일 이른 새벽에 무덤 앞에 나아가서 울고 절하기를 여묘사는 예절과 다름없이 하였다. 상례(喪禮)를 읽고 나서 《사계의례답문(沙溪疑禮答問)》을 지었다. 을축년에는 《독서록요어속선(讀書錄要語續選)》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병인년에는 사계 선생이 원종(元宗)을 추숭(追崇)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나라에 소(疏)를 올리려고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이 《춘추(春秋)》에 실린 민공(閔公)ㆍ문공(文公)ㆍ양공(襄公)ㆍ애공(哀公)의 사실에 빙거(憑據)하여 답하고, 또 추숭하는 것이 예절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말하였다. 무진년에는 장유(張維)가 임금께 아뢰어서 처음으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에는 《가례박해(家禮剝解)》 발문(跋文)을 짓고, 경오년에는 여헌 선생(旅軒先生 장현광(張顯光))에게 편지를 보내서 죽림서원(竹林書院 전라도 여산(礪山)에 있는 조정암ㆍ이퇴계를 봉안한 서원)과 탁영사당(濯纓祠堂) 두 곳의 향사(享祀) 치르는 절차를 물었다. 그때에 목서흠(睦叙欽)ㆍ목장흠(睦長欽) 두 분이 한꺼번에 선생을 행의(行誼)가 있다고 추천하였고, 임신년에는 장유가 또 임금께 아뢰어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갑술년에는 최명길(崔鳴吉)과 목서흠이 임금께 아뢰기를,
“황종해(黃宗海)는 산림(山林)에서 도(道)를 지키고 출세에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에는 《도산언행습유(陶山言行拾遺)》와 《한강오복연혁도(寒岡五服沿革圖)》의 발문을 짓고, 또 비풍(比豐) 문규(門規)에 대하여 제의(祭義)ㆍ분묘(墳墓)ㆍ경종(敬宗)ㆍ목족(睦族)의 저작(著作)이 있었는데, 각각 참고와 증거가 분명하였다. 병자년에는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호란(胡亂)이 나자 선생도 늙은 몸으로 나이 많은 형을 모시고 산중에 피란하였는데, 형을 위하여 때로는 밥을 짓고 때로는 말 고삐를 잡으면서 ‘난중에 형제가 서로 떠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정축년에는 ‘예시(禮詩)’ 9장(章)을 지었으니 1. 사친(事親), 2. 교자(敎子), 3. 군신(君臣), 4. 부부(夫婦), 5. 형제(兄弟), 6. 사사(事師), 7. 장유(長幼), 8. 붕우(朋友), 9. 총론(摠論)인데, 곧 오륜(五倫)을 부연하고 《소학(小學)》의 내용을 계술(繼述)하여 지은 것이다. 무인년에는 《동방선행수문(東方善行謏聞)》과 《목악고사(木嶽古事)》를 지었고, 기묘년에는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을 지었다. 경진년에 정부에서 6품직(品職)에 특서(特敍)하여 장원 별제(掌苑別提)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마을의 규약(規約)을 정하였는데 그 범례(凡例)는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따르면서 당시의 풍속에 의하여 빼고 더한 것이 46조항이었다. 《경민편(儆民篇)》 서문을 짓고, 또 《문중완의(門中完議)》를 지었으니, 적손(嫡孫)으로서 계승(繼承)하는 책임과 제전(祭田)과 묘전(墓田)을 중시(重視)하는 일 등이다.
임오년 12월 24일에 죽으니 향년이 64세였다.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힘이 없었는데, 원근에 있는 사림(士林)들이 서로 물력(物力)을 내어 함께 장례를 치렀다. 문인(門人) 중에는 조유안(趙帷顔)ㆍ안여룡(安汝龍)ㆍ김광훈(金光勳) 등이 상례(喪禮)를 맡아서 그 다음해 3월에 그 고을의 치소(治所) 동편 삼생동(三生洞) 덕천(德泉) 선영(先塋) 아래 장사 지냈다. 광중(壙中)을 3자 정도를 파다가 고기(古器)를 얻었는데, 덕천(德泉)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으므로 그 산을 덕천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8년 만에 선생을 죽림서원(竹林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선생은 이미 대현(大賢)의 문정(門庭)에서 친히 배워서 신념이 독실하고 옛 법을 좋아하였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행실을 닦았으니, 그의 학문은 한결같이 효도와 공경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는 가정생활에 착실하였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얻었다. 제사에 법도가 있어서 가까운 조상이라 해서 더 풍부하게 하지 않았으며, 제사의 절차에 극히 엄하여서 선비(先妣) 제사에 선고(先考)를 합사(合祀)하지 않았으며, 제사를 받드는 종손에 대하여는 비록 항렬이 낮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예모(禮貌)로 대하며,
“조상을 높이는 예절은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형제간에는 은혜와 사랑을 주장하였으며, 가정에서는 서로가 원한과 노염을 품지 말라는 것으로 항상 경계를 삼았다. 아들과 아우들이 잘못이 있을 때에도 심히 꾸짖지 않고 정성스레 타일러서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남들과 교제하는 데는 반드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였으며, 잘못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일러 주었고 만일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스스로 반성하여 말하기를,
“내 말을 믿지 않으니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하고 성의로써 스스로 힘썼다. 선생이 본디 병이 많았으나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돈하고 앉아 있었다. 거처를 항상 엄하게 하고 《논어(論語)》에 ‘있으되 없는 듯이 하며 충실하되 빈 듯이 하며 남이 나를 집적이더라도 따지지 않는다.[有若無實若虛犯而不較]’는 말을 즐겨 일컬으며,
“한평생 가슴 깊이 새겨 둘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평생에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하였고, 산수의 아늑한 곳을 찾아 살면서 한가로이 시(詩)나 읊으며 스스로 즐기었다. 30년 동안 과거(科擧)에는 한 번도 응하지 않고 경술(經術)만 널리 공부하였으며 예학(禮學)에 더욱 깊었고 또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과 의학ㆍ약학ㆍ수학에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학문을 더욱 넓히고 행실을 더욱 닦았으며 스스로 지킴은 더욱 겸손하였다.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소학(小學)》과 《효경(孝經)》부터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에 사서(四書)를 읽게 하였다. 글 배우는 문인들이 후천 선생(朽淺先生)이라 불렀으니, 후천은 그의 관향(貫鄕)의 구호(舊號)이기 때문에 호를 삼은 것이다. 그의 ‘언행잡기(言行雜記)’에 기록하기를,
“선생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젊었을 때에 술에 취하여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어서 부친으로부터 경계를 받더니, 그 뒤로는 스스로 꾸짖어서 평생에 취하도록 술을 마신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늙으셔서 모든 자제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려 할 때에 선생은 박한 토지와 늙은 종을 갖기로 하고 말하기를 ‘재물은 얻기 쉬운 것이고 형제는 얻기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심해졌을 때 감을 먹고 싶어 하였으나 병에 해롭기에 드리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 늙도록 감을 차마 먹지 못하였다.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검은 두건을 쓰고 흰옷을 입고 종일토록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앉지 않았으며, 슬퍼함이 상주 노릇 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지금까지 마을 늙은이들은 선생이 어머니 병환을 당하였을 때에 변(便)을 맛보아서 병세를 징험하고 손을 깨물어서 피를 드리고 북두성에 기도하던 일들을 서로 말하며 《신정선행고사(新定善行古事)》라는 기록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였다.
의인(宜人) 이씨(李氏)는 태종대왕(太宗大王) 7세손(世孫)인데, 아버지 홍벽(弘璧)은 선행(先行)으로 세상에 알려져 한때 사림(士林)들의 존경을 받았고, 어머니 진주 정씨(晉州鄭氏)는 중고(中古)에 이름 높은 승지(承旨) 성근(誠謹)의 4세손이자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의 외손녀이니, 내외분이 다 명문 법가에서 태어났다. 의인이 지성으로 시부모를 섬기어서 역시 효부라는 칭찬이 있었다. 만력(萬曆) 10년 9월 30일에 나서 선생이 돌아가신 뒤 2년 만에 63세로 돌아가셨는데, 선생과 한곳에 부장(祔葬)하였다. 두 아들은 곡립(鵠立)과 학립(鶴立)이다. 곡립은 진사요, 사위는 사인(士人) 이감(李堪)이다. 곡립은 재후(載厚)ㆍ이후(履厚)ㆍ명후(命厚)를 낳았고 학립은 도후(道厚)를 낳았다. 사위는 이순희(李淳煕)인데 2남 2녀를 두었으나 아직 어리다. 《후천유고(朽淺遺稿)》 5권이 있고 또 《언행록(言行錄)》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수락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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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서원(竹林書院 전라도 여산(礪山)에 있는 조정암ㆍ이퇴계를 봉안한 서원)과 탁영사당(濯纓祠堂) 두 곳의 향사(享祀) 치르는 절차를 물었다. ->죽림서원(竹林書院 충청도 목천(木川)에 있는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을 봉안한 서원)
*목천(木川)에 있다.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이 살던 곳에 3현을 향사하기 위하여 竹林書院으로 건립하고 道東書院으로 사액되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 3월, 木川 竹林祠에 배향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가을, 竹林祠가 道東書院으로 사액되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 ㆍ황종해(黃宗海) 호는 후천(朽淺)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도(忠淸道) / 목천현(木川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조(仁祖)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 문묘에 보인다. 정구(鄭逑) 충주(忠州)에 보인다. 김일손(金馹孫)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金海), 연산군 무오(戊午)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獻納),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황종해(黃宗海) 자는 대진(大進), 호는 후천(朽淺), 본관은 회덕(懷德), 벼슬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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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26권 / 행장(行狀) / 황 징군(黃徵君) 행장
선생은 휘는 종해(宗海)이고 자는 대진(大進)이다. 성은 황씨(黃氏)이며 본관은 회덕(懷德)이다. 고려 때의 합문지후(閤門祗候) 길신(吉臣)이 선생의 7대조이다. 합문지후가 상문(尙文)을 낳았다. 모두 과목(科目)으로 저명하였다. 그 후손에 직장(直長) 빈(彬)이 있었고, 직장이 철균(鐵均)을 낳았는데 글을 잘하고 행실이 있어서 녹사(祿仕)로 의주 판관(義州判官)을 지냈다. 의주 판관이 국자감 생원 우삼(友參)을 낳았는데 또한 독실한 효성으로 칭송되었다. 생원이 선무랑(宣務郞) 윤림(潤淋)을 낳았고 선무랑이 덕휴(德休)를 낳았는데, 덕휴가 선생의 아버지이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성품이 지극하였고 남모르는 덕을 많이 쌓았다고 일컬어졌다.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인데,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성언신(成彦信)의 7세손이며 여든에 효성과 우애로 참봉(參奉)이 된 성우(成羽)의 따님이다.
만력 7년(1579, 선조12) 3월 26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어려서 글을 배우기도 전에 어버이 섬기는 예절을 아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효자라고 하였다. 열 살에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열너덧 살에 학문과 재예로 이름이 났고,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섬겨 학문의 종지(宗旨)를 들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아버지가 중풍을 8년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운명할 때에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8년을 앓는 동안 아이가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근심 어린 얼굴로 나를 봉양하였다. 내가 죽으면 아이가 곡을 하다가 몸을 상할까 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초상을 당해서는 다섯 달 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죽만 먹고 땅바닥에서 잤으며 너무 곡을 하여 남이 부축해야 일어날 수 있었다. 장사를 지내고 3년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은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셨고 채소도 과일도 먹지 않았다. 그 거상(居喪)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정한강 선생의 〈상제답문(喪制答問)〉이 있다. 복상(服喪)을 마친 뒤에 어떤 사람이 술과 음식을 가져와 위로하니 선생이 받지 않고 말하기를 “운운” 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신해년(1611)에는 호남과 호서의 유생 1천여 명과 함께 선현을 헐뜯은 정인홍(鄭仁弘)의 죄를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자년(1612)에 정인홍이 정승이 되어서 목천현(木川縣)을 지나가는데 정인홍에게 아첨하는 자가 서생들을 불러 모아 정인홍을 영접하고자 하니, 수십 명이 모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서생들이 상소하여 이 사람의 죄상을 성토하였는데 이제 와서 다시 알현하고자 한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생들이 모두 돌아갔다. 계축년(1613)에 광해군이 태비(太妃)를 서궁에 유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인도(人道)가 없어지는구나.”
하고, 드디어 과거(科擧) 공부를 중지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정사년(1617)에 퇴도(退陶) 선생 산거시(山居詩)의 발문을 지었다. 무오년(1618)에 연산(連山)에 가서 사계(沙溪) 선생을 만나 예를 물었다. 〈예학의난답문(禮學疑難答問)〉이 있다. 임술년(1622)에 도잠동(陶潛洞)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인조가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널리 찾을 때에 고을에서 선생의 행의(行誼)를 보고하였는데, 보고가 올라가기 전에 장유(張維)가 이미 상에게 추천하였다. 이듬해에 어머니 성 유인(成孺人)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나이가 50이 다 되었는데도 곡읍(哭泣)하고 거애(擧哀)하는 예절을 노쇠를 이유로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반곡(返哭)한 뒤에는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분묘까지의 거리가 또한 몇 리쯤 되었는데 매일 새벽이면 무덤 앞에 가서 곡하기를 한결같이 여묘살이할 때와 같이 하였다. 상례(喪禮)를 읽었다. 〈사계의례답문(沙溪疑禮答問)〉이 있다.
을축년(1625)에 〈독서록요어속선(讀書錄要語續選)〉의 발문을 지었다. 병인년(1626)에 사계 선생이 장묘(章廟)를 추숭(追崇)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소장(疏章)을 올리려고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이 《춘추》의 민공(閔公), 문공(文公), 양공(襄公), 애공(哀公)의 일을 근거로 대답하고, 또 글을 지어 추숭하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아니함을 말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6)에 장유가 상에게 아뢰어, 첫 벼슬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629)에 《가례박해(家禮剝解)》의 발문을 지었다. 경오년(1630)에 여헌(旅軒)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죽림서원(竹林書院)과 탁영 사당(濯纓祠堂)의 향사 절목(享祀節目)을 물었다. 이때에 목서흠(睦敍欽)과 목장흠(睦長欽) 두 분이 선생을 행의(行誼)가 있다고 추천하였다.
임신년(1632)에 장유가 또 상에게 아뢰어 동몽교관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갑술년(1634)에 최명길(崔鳴吉)과 목서흠이 상에게 아뢰기를,
“황종해는 산림(山林)에서 도(道)를 지키고 살면서 출세에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13)에는 〈도산언행습유(陶山言行拾遺)〉와 〈한강오복연혁도(寒岡五服沿革圖)〉의 발문을 지었다. 또 〈비풍문규(比豐門規)〉를 지었다. 제의(祭儀), 분묘(墳墓), 경종(敬宗), 목족(睦族) 등에 대한 내용인데 각각 고증(考證)과 통론(通論)이 있다.
병자년(1636)에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호란(胡亂)이 있었다. 나이 많은 형이 있었는데, 선생도 이미 늙은 몸이었으나 형과 함께 산중으로 피난하여 음식을 손수 차려 올리고 출타 시에는 고삐를 잡고 수행하면서 말하기를,
“난리 중에는 형제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정축년(1637)에 예시(禮詩) 아홉 장(章)을 지었다. 첫째는 사친(事親), 둘째는 교자(敎子), 셋째는 군신(君臣), 넷째는 부부(夫婦), 다섯째는 형제(兄弟), 여섯째는 사사(事師), 일곱째는 장유(長幼), 여덟째는 붕우(朋友), 아홉째는 총론(總論)인데, 오륜(五倫)을 미루어 부연하고 《소학》을 조술(祖述)하여 편장(篇章)을 이룬 것이다. 무인년(1638)에 〈동방선행수문(東方善行謏聞)〉과 〈목악고사(木嶽古事)〉가 완성되었다. 기묘년(1639)에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을 지었다. 경진년(1640)에 조정이 특별히 6품직에 서용하여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를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촌규범례(村規凡例)〉를 지었다.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본뜬 것인데 당시의 풍속을 따라 가감하여 손질한 것이 46조항이었다. 〈경민편(儆民篇)〉의 서문을 지었다. 또 〈문중완의(門中完議)〉를 지었는데 차적(次嫡)이 승중(承重)하는 일과 제전(祭田)과 묘전(墓田)에 대해 논한 것이다.
임오년(1642) 12월 24일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64세였다.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가 없자 원근의 사림(士林)들이 서로 물력(物力)을 내어 함께 장례를 치렀다. 문인(門人) 조유안(趙惟顔), 안여룡(安汝龍), 김광훈(金光勳) 등이 상례(喪禮)를 맡았다. 이듬해 3월에 고을의 치소(治所) 동쪽 삼생동(三生洞) 덕천(德泉)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 지냈다. 광중(壙中)을 3자 정도 파 내려가니 오래된 그릇이 하나 나왔는데 ‘덕천(德泉)’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그 언덕을 덕천이라 이름하였다. 8년 뒤에 선생을 죽림서원(竹林書院)에 종사(從祀)하였다.
선생은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직접 배웠고 독실하게 믿고 옛 법을 좋아하였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행실을 쌓았다. 그 학문은 한결같이 효도와 공경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집안에서 실천을 독실하게 하여 고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제사는 법도에 맞게 지냈고 가까운 조상이라 해서 더 풍부하게 하지 않았다. 제사의 예절은 엄격함을 위주로 하여, 어머니 기일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아버지를 함께 제사하지 아니했다. 종중(宗中)의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에 대해서는 비록 자기보다 항렬이 낮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예모(禮貌)를 갖추고 대우하며 말하기를,
“조상을 높이는 예절은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형제간에는 한결같이 은혜와 사랑을 위주로 하였고, 가정에서 교육할 때에는 반드시 노여움과 원한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다. 자제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또한 꾸중을 하지 아니하고 차근차근 타일러서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반드시 진심을 다하고 반드시 공경을 다하였다. 불선함이 있으면 반드시 말해 주었고,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스스로 반성하며 말하기를,
“내 말이 신뢰받지 못하니 나의 허물이다.”
하고, 반드시 성의(誠意)로 자신을 면려하였다.
선생이 평소 병이 많았으나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었다. 거처를 반드시 엄격하게 하였다. 항상 《논어》에 있는 “있어도 없는 듯이 하고 찼어도 빈 듯이 하고 남이 건드려도 따지며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을 즐겨 일컬으며,
“한평생 가슴 깊이 새겨 둘 말이 이것이다.”
하였다. 평생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하였다. 거처를 그윽한 산수 속에 정하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30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경술(經術)을 널리 공부하였고 예학(禮學)을 더욱 깊이 공부하였으며 또 제자백가의 말과 의약(醫藥)과 산수(算數) 같은 지엽의 학문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학문이 더욱 넓어지고 행실이 더욱 수양될수록 몸가짐은 더욱 겸손해졌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과 《효경》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사서(四書)를 가르쳤다. 배우는 자들이 선생을 후천(朽淺) 선생이라 불렀다. 후천은 그 관향(貫鄕)의 옛 이름인데 그것으로 호를 삼은 것이다.
그의 〈언행잡기(言行雜記)〉에,
“선생은 평소에 술을 잘 마셨다. 젊을 때에 한번은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한 번 아버지의 경계를 듣고는 물러나 자책하고 종신토록 술에 취해 아버지의 경계를 망각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연로해지자 여러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 살림을 하도록 하였는데, 선생은 굳이 척박한 논밭과 늙은 노복을 갖기로 하고 말하기를 ‘재물은 얻기 쉽고 형제는 얻기 어렵다.’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심해졌을 때에 감을 잡숫고 싶어 하였으나 병환에 해로워서 올리지 못하였는데, 그 뒤 선생은 늙을 때까지 차마 감을 먹지 못하였다. 기일(忌日)이 되면 반드시 검은 두건을 쓰고 흰 옷을 입고 종일토록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앉지 않았으며, 슬퍼함이 초상을 당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오늘날까지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선생이 어머니 병환에 대변을 맛보고 피를 내어 흘려 드리고 북신(北辰)에 기도하여 대신 죽게 해 달라고 했던 일들을 서로 전하며 《신정선행고사(新定善行古事)》를 만들었다.”
하였다.
의인(宜人) 이씨(李氏)는 우리 태종의 7세손이다. 아버지 이홍벽(李弘璧)은 선행(善行)으로 세상에 알려져 당대 사림들의 존경을 받은 분이었고, 어머니 진주 정씨(晉州鄭氏)는 중고(中古)에 이름 높은 승지 정성근(鄭誠謹)의 4세손이며 현헌(玄軒) 선생 목세칭(睦世秤)의 외손녀이니, 내외분이 모두 이름 있고 법도 있는 집안 출신이다. 의인은 성품이 아주 훌륭했으며, 시부모를 잘 봉양하였다고 칭송을 들었다. 만력 10년(1582, 선조15) 9월 30일에 태어나, 선생이 돌아가신 뒤 2년 만에 의인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63세였다. 같은 언덕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둘인데, 곡립(鵠立)과 학립(鶴立)이다. 곡립은 진사이다. 사위는 사인(士人) 이감(李堪)이다.
곡립은 재후(載厚)와 이후(履厚)와 명후(命厚)를 낳았다. 학립은 도후(道厚)를 낳았고 사위는 이순희(李淳煕)이며 또 아들 둘과 딸 둘이 있는데 어리다.
《후천유고(朽淺遺稿)》 다섯 권이 있고 또 《언행록(言行錄)》이 있다.
[주-D001] 장묘(章廟) : 인조의 아버지이다. 인조반정 이후에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가 1627년(인조5)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능(陵)이 김포에 있다.[주-D002] 죽림서원(竹林書院) : 여산(礪山)에 있다.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성혼(成渾),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였다.[주-D003] 동방선행수문(東方善行謏聞) : 한국문집총간 84집에 수록된 황종해의 문집인 《후천집(朽淺集)》 권8에는 〈동방명인사적수문대략(東方名人事跡謏聞大略)〉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4] 목악고사(木嶽古事) : 《후천집》 권8에는 〈목현사적(本縣事蹟)〉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5] 있어도……않는다 : 《논어》 〈태백(泰伯)〉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헌순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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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2] 죽림서원(竹林書院) : 여산(礪山)에 있다.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성혼(成渾),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였다.->목천(木川)에 있다.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이 살던 곳에 3현을 향사하기 위하여 竹林書院으로 건립하고 道東書院으로 사액되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 3월, 木川 竹林祠에 배향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가을, 竹林祠가 道東書院으로 사액되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홍충도(洪忠道 충청도의 별칭)
목천(木川)
도동서원(道東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 주자(朱子)ㆍ정구(鄭逑)ㆍ김일손(金馹孫) 무오당적에 들었다 ㆍ황종해(黃宗海) 호는 후천(朽淺)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도(忠淸道) / 목천현(木川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조(仁祖)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 문묘에 보인다. 정구(鄭逑) 충주(忠州)에 보인다. 김일손(金馹孫)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金海), 연산군 무오(戊午)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獻納),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황종해(黃宗海) 자는 대진(大進), 호는 후천(朽淺), 본관은 회덕(懷德), 벼슬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민수 (역) |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