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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s VAT 4956 gives very strong support to the chronology of the Neo-Babylonian era as established by the historians. Attempting to overcome this evidence, the Watch Tower Society, in the above-mentioned Bible dictionary, goes on to state that, “While to some this might seem like incontrovertible evidence, there are factors greatly reducing its strength.” 따라서 VAT 4956은 역사가들에 의해 확립된 신 바빌로니아 시대의 연대기에 매우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워치타워 협회는 앞서 언급한 성경 사전 <통찰>에서 이 증거를 축소하려는 시도로써,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힘을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 있다"라는 언급을 계속하였다. What are these factors? And do they genuinely reduce the strength of the evidence in this ancient tablet? 그 요인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은 정말로 이 고대 점토판의 증거의 강도를 감소시키는가? (a) The first is that the observations made in Babylon may have contained errors. The Babylonian astronomers showed greatest concern for celestial events or phenomena occurring close to the horizon, at the rising or setting of the moon or the sun. However, the horizon as viewed from Babylon is frequently obscured by sandstorms. (a) 첫 번째는 바빌론에서 이루어진 관측에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은 달이나 해가 뜨거나 질 때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천체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바빌론에서 바라본 지평선은 모래폭풍으로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Then Professor Otto Neugebauer is quoted as saying that Ptolemy complained about “the lack of reliable planetary observations [from. ancient Babylon] .”12 이에 오토 노이게바워 교수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행성관측의 신뢰성의 부실"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12 However, many of the observations recorded in the diaries were not made close to the horizon, but higher up in the sky. Further, Babylonian astronomers had several means of overcoming unfavorable weather conditions. 그러나 일지에 기록된 많은 관측은 지평선 가까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은 악천후를 극복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As noted earlier, the observations were performed at a number of sites in Mesopotamia. What could not be observed at one place due to clouds or sandstorms, could probably be observed somewhere else.13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지역에서 관측을 수행하였다. 구름이나 모래 폭풍으로 인해 한 곳에서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다른 곳에서 관측될 수 있었을 것이다.13 One method used to get over the difficulty of observing stars close to the horizon due to dust was to observe, instead, “the simultaneously occurring of other stars, the so-called ziqpu-stars,” that is, stars crossing the meridian higher up on the sky at their culmination.14 먼지로 인해 지평선에 가까운 별들을 관찰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 중 하나는 "다른 별들이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 소위 지크푸 별들" 즉, 정점에서 하늘 높이 자오선을 넘는 별들을 관찰하는 것이다.14 Finally, the horizon as viewed from Babylon was not obscured by sandstorms every day, and some planetary events could be observed many days or weeks in succession, also higher up in the sky, for example, the position of Saturn which, according to our text, could be observed “in front of the Swallow [the south-west part of the Fishes].” As was pointed out above, Saturn can be observed in each of the twelve constellations of the Zodiac for about 2.5 years on the average. 결과적으로, 바빌론에서 바라본 지평선이 매일 모래폭풍에 의해 가려지지는 않았고, 몇몇 행성 움직임들은 며칠 또는 몇 주 연속으로 관측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살펴보는 문서에 따르면, "물고기 자리의 남서쪽"에 있는 제비에서 관측될 수 있는 토성의 위치도 하늘 더 높은 곳에서 관측될 수 있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토성은 12궁도의 12개 별자리에서 각각 평균 약 2.5년 동안 관측할 수 있다.(역자 보충, 아래 사진 참조) Saturn’s position in the vicinity of the southern Fish, then, could have been observed for several months in succession, which would have made it impossible for Babylonian astronomers in their regular observations of the planets to make any mistake as to where this planet could be seen during the thirty-seventh year of Nebuchadnezzar, in spite of frequent sandstorms. Our text, in fact, directly states that Saturn was observed “in front of the Swallow” not only on the first day of Nisanu (the first month), but also on the first day of Ayyaru (the second month)! 물고기자리 남쪽 부근에서 토성의 위치가 몇 달 동안 계속해서 관측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이 행성에 대해 정기적으로 관측함으로써, 느부갓네살 통치 37년에 자주 일어났던 모래 폭풍에도 불구하고 이 행성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실수할 여지가 없게 하였다. 사실 우리가 살펴본 문서에는 토성이 "제비자리 앞에서" 관측되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 달인 니사누 월뿐만 아니라 두 번째 달인 아야루 월에도 관측되었다! That the observations recorded in VAT 4956 are substantially correct may be seen from the fact that all of them (except for one or two containing scribal errors) fit the same year. This would not have been the case if the observations were erroneous.15 VAT 4956에 기록된 관측치가 실질적으로 정확하다는 사실은 모든 관측치(기록자의 오류를 포함하여 한두 개를 제외)가 같은 해에 적합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만일 관측이 잘못되었다면 그렇게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15 The next factor brought up in the Watch Tower Society’s Bible dictionary that is held to reduce the strength of VAT 4956 is the fact that some diaries are not original documents but later copies: VAT4956의 정확성의 강도를 낮추기 위해 고안된 워치타워 협회의 성경 사전 <통찰>에서 거론된 다음 요인은 일부 기록이 원본 문서가 아니라 후기 사본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b) Second, the fact is that the great majority of the astronomical diaries found were written, not in the time of the Neo-Babylonian or Persian empires, but in the Seleucid period (312–65 B.C.E.), although they contain data relating to those earlier periods. Historians assume that they are copies of earlier documents. (b) 둘째, 발견된 천문학적 일지의 대부분은 신바빌로니아 또는 페르시아 제국의초기 시기와 관련된 데이터는 포함되어 있지만, 그 시대가 아니라 셀레우코스 시대(기원전 312-65)에 작성되었다. . 역사학자들은 당시 문서들이 이전 시대 문서들의 사본이라고 추측한다. There is nothing to show that most diaries are later copies, but some are, as indicated by writing conventions used in the text. The earliest dated diaries frequently reflect the struggle of the copyists to understand the ancient documents they were copying, some of which were broken or otherwise damaged, and often the documents used an archaic terminology which the copyists tried to “modernize.” This is clearly true of VAT 4956, too. Twice in the text the copyist added the comment “broken off,” indicating he was unable to decipher a word in the copy. Also, the text reflects his attempt to change the archaic terminology. But did he also change the content of the text? 대부분의 천문일지들이 후기 복사본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지만, 일부 일지의 내용에 사용된 쓰기 규칙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일지는 종종 필사자들이 그들이 필사하고 있던 고문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애써 노력하였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부서지거나 훼손되었고, 종종 판들이, 너무 고어적인 용어가 사용되어 있어서 "현대화" 하기를 원했던 것들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VAT 4956에도 해당된다. 본문에서 두번이나 필사자가 "글씨가 깨졌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단어를 해독할 수 없음을 표현했다. 또한, 본문은 필사자가 고대 용어를 바꾸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하지만 그가 본문의 내용을 바꿨는가? On this the first translators of the text, P. V. Neugebauer and E. F. Weidner, concluded: “As far as the contents are concerned the copy is of course a faithful reproduction of the original.”16 Other scholars, who since have examined the document, agree. Professor Peter Huber states: 여기에 P. V. 노이게바워와 E. F. 바이드너는 이 문서의 첫 필사자들에 대해서 "내용에 관한 한 사본은 원본의 충실한 사본임은 당연하다."라고 결론지었다.16 그 후 이 문서를 검토한 다른 학자들도 이에 동의하였다. 피터 휴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It is preserved only in a copy of much later date, but that appears to be a faithful transcript (orthographically somewhat modernized) of an original of NEBUCHADNEZZAR’S time.17 그것은 훨씬 후기의 사본으로 보존된 것이기는 하지만, 느부갓네살 시대의 원본의 충실한 필사본(문법적으로 다소 현대화된)으로 보인다.17 Suppose that some of the material in the about thirty completely received observations recorded in VAT 4956 had been distorted by later copyists. How great is the possibility that all these “distorted” observations would fit into one and the same year—the very one corroborated by Berossus, the Royal Canon, the chronicles, the royal inscriptions, the contract tablets, the Uruk kinglist, and many other documents—that is, Nebuchadnezzar’s thirty-seventh regnal year? Accidental errors of this kind do not “cooperate” to such a great extent. So there is no sound reason to doubt that the original observations have been correctly preserved in our copy. VAT 4956에 기록된 약 30건의 관찰 자료 중 일부가 후기 필사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가정하자. 이 모든 "왜곡된" 관측 결과가 베로수스의 기록, 왕실 명부, 연대기, 왕실 비문, 계약 점토판, 우루크 왕들의 목록 및 기타 많은 문서들, 즉 네부카드네자르의 37번째 연도와 조화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사본에서 이런 종류의 우연한 실수가 있었다면, 당시에 상황이 기록된 다른 많은 점토판의 내용에 그렇게 크게 "조화"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원본이 사본으로 이어지면서 내용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기우(杞憂)이다. (c) Finally, as in the case of Ptolemy, even though the astronomical information (as now interpreted and understood) on the texts discovered is basically accurate, this does not prove that the historical information accompanying it is accurate. Even as Ptolemy used the reigns of ancient kings (as he understood them) simply as a framework in which to place his astronomical data, so too, the writers (or copyists) of the astronomical texts of the Seleucid period may have simply inserted in their astronomical texts what was then the accepted, or “popular,” chronology of that time!18 (c) 결국, 프톨레미의 명부와 마찬가지로, 발견된 문헌에 대한 천문학적 정보(지금의 해석과 이해)가 기본적으로 정확하더라도,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 명부에 수반되는 역사적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프톨레미가 고대 왕들의 통치를 단순히 그의 천문학 자료를 배치하는 틀로 사용했더라도, 셀레우코스 시대의 천문 일지의 서기들 (또는 필사자들)은 그 당시 통용되었던, 혹은 "대중적인" 연대기를 단순히 그들의 천문 문헌에 삽입했을지도 모른다!18 What is suggested by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is that the later copyists changed the dates found in the “diaries” in order to adapt them to their own concepts of the ancient Babylonian and Persian chronology. Thus a writer in the Awake! magazine imagines that “the copyist of ‘VAT 4956’ may, in line with the chronology accepted in his time, have inserted the ‘thirty-seventh year of Nebuchadnezzar’ .”19 Is this a plausible theory? 워치타워 조직이 암시하는 것은 후기 필사자들이 고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연대에 대한 그들만의 생각에 적용시키기 위해 '일지'에 있는 날짜들을 변경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깨어라! 지의 한 필자는 'VAT 4956'의 필사자가 그의 시대에 인정된 연대표에 따라 '네부카드네자르 37년'을 삽입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부여한다."19 이것이 과연 타당한 논리인가? As was pointed out above, VAT 4956 is dated from Nisanu 1 of Nebuchadnezzar’s thirty-seventh year to Nisanu 1 of his thirtyeighth year. Further, almost all events mentioned in the text are dated, with the month, the day and—when necessary—the time of the day given. About forty dates of this kind are given in the text, though the year, of course, is not repeated at all these places. All known diaries are dated in a similar way.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VAT 4956은 느부갓네살의 37번째 해의 니사누 1일부터 그의 38번째 해의 니사누 1일까지이다. 또한 문서에 언급된 거의 모든 행사일정이 날짜로 지정되어 있으며, 월, 일 및 ㅡ필요한 경우ㅡ 시간까지 기록되었다. 이런 종류의 날짜가 이 문헌에 40개 정도 나오고 있지만, 이 모든 곳에서 연중 중복된 시기는 없다. 기록된 모든 일지는 비슷한 방식으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In order to change the years in the text, the copyists would also have been forced to change the name of the reigning king. Why? Nebuchadnezzar died in his forty-third year of rule. If his thirtyseventh year fell in 588/87 B.C.E., as the Watch Tower Society holds, he must have been dead for many years by 568/67 B.C.E. when the observations of VAT 4956 were made. 문서의 연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필사자들은 또한 통치한 왕의 이름도 바꾸어야 했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느부갓네살은 집권 43년만에 죽었다. 워치타워 협회가 주장하듯이 그의 서른 일곱 번째 해가 기원전 588년/87년이라면 , 그는 VAT 4956이 관측된 해인 기원전 568년/67년까지 이미 죽은지 여러 해가 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Is it really likely that the Seleucid copyists devoted themselves to such large-scale forgeries? What do we know about the “popular” chronology of their time, which is proposed in the Watch Tower’s publication as the motive for this deliberate fraud? 셀레우코스 시대의 필사자들이 정말 그런 대규모 위조를 단행했을까? 워치타워 출판물에 이런 고의적인 사기 동기로 제시된 그 시대의 '널리 알려진' 연대기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The chronology for the Neo-Babylonian era composed by Berossus early in the Seleucid period evidently represents the contemporary, “popular” concept of Neo-Babylonian chronology.20 If counted backwards from the fall of Babylon in 539 B.C.E., Berossus’ figures for the reigns of Neo-Babylonian kings place Nebuchadnezzar’s thirty-seventh year in 568/67 B.C.E. as does VAT 4956. 셀레우코스 시대 초기에 베로수스가 구성한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연대기는 분명히 신-바빌로니아 당대의 "널리 알려진" 개념을 나타낸다.20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 함락 이후 거꾸로 계산하면, 신-바빌로니아 왕들의 치세에 대한 베로수스의 기록수치는 기원전 568/67년 느부갓네살의 37번째 해가 VAT 4956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More importantly, Berossus’ Neo-Babylonian chronology, as shown earlier in chapter three, is of the same length as that given by the many documents contemporary with the Neo-Babylonian era itself such as chronicles, royal inscriptions, business documents, as well as with contemporary Egyptian documents! 더 중요한 것은 베로수스의 신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3장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대기, 왕실 비문, 사업 문서가 같은 시대의 이집트의 문서들뿐만 아니라 신 바빌로니아 자체 시대의 문서들이 알려주는 기간의 수치이다! The “popular” Neo-Babylonian chronology as presented in the Seleucid era, then, was not something based on mere supposition, but meets the qualifications of a true and correct chronology, and there was no need for copyists to alter the ancient documents in order to adapt them to it. The theory that they falsified these documents, therefore, is groundless. Besides, it is refuted completely by other astronomical texts, including the next diary to be discussed. 당시 셀레우코스 시대에 나타난 '널리 알려진' 신바빌로니아 연대기는 단순한 추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참되고 정확한 연대기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이를 적용시키기 위해 고대의 문헌들을 수정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이 문서들을 위조했다는 논리는 전혀 근거가 없다. 게다가, 그러한 논리가 무근하다는 사실은 다음 논의될 천문일지를 포함한 다른 천문에 관한 문서들에 의해 완전히 입증된다. |
The astronomical diary B.M. 32312 천문일지 B.M. 32312 This diary gives details on the positions of Mercury, Saturn, and Mars, which date it to the year 652/51 B.C.E. An historical notice, also repeated in the Akitu Chronicle and there dated to the 16th year of Shamashshumukin, fixes that year to 652/51 B.C.E., which prevents any extension of the Neo-Babylonian era backwards in time. Photo used courtesy of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이 일지는 기원전 652/51년 당시의 수성, 토성, 화성의 위치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아키투 연대기에서도 기술되어 있으며, 날짜가 샤마슈뮤킨 16년으로 되어 있는 이 역사적 자료는 그 해를 기원전 652/51년으로 확정시킴으로써 신 바빌로니아의 존속기간이 기존의 기간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진은 대영박물관의 이사진이 제공한 것이다.) |
A-2: The astronomical diary BM. 32312
A-2: 천문 일지 BM. 32312
In an article published in 1974, Professor Abraham J. Sachs gives a brief presentation of the astronomical diaries. Mentioning that the oldest datable diary contains observations from the year 652 B.C.E., he explains how he was able to fix its date: 1974년 발표된 기사에서 아브라함 J. 삭스 교수는 천문일지에 대해 간략하게 발표했다. 그는 가장 오래된 시기의 일지는 기원전 652년의 관측 결과가 포함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일지의 날짜를 어떻게 확정할 수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When I first tried to date this text, I found the astronomical contents to be just barely adequate to make this date virtually certain. It was a great relief when I was able to confirm the date by matching up a historical remark in the diary with the corresponding statement for –651 in a well-dated historical chronicle.21 내가 처음 이 문서가 기록된 시기를 정하려고 했을 때, 천문관측의 내용은 이 시기를 확정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일지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과, 날짜가 훌륭하게 잡힌 역사 연대기를 매치시킴으로써, 그 해가 –651(=기원전 652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21 As this diary seemed to be of great importance for the question of Babylonian chronology, I wrote to Professor Sachs back in 1980 and asked two questions: 이 일지가 바빌로니아 연대기에 대한 의문에 해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것 같아서, 나는 1980년에 삭스 교수에게 편지를 써서 두 가지 질문을 했다: 1. What information in the diary makes the date –651 [=652 B.C.E.], “virtually certain”? 1. 일지의 어떤 정보에 의해 시기가 –651 [=기원전 652년]로, "확정적"이 됩니까? 2. What kind of historical remark in the diary corresponds with what statement in which well-dated chronicle? 2. 일지의 어떤 역사적 사실이 연대기의 내용과 부합됩니까? In his answer Professor Sachs enclosed a copy of a photograph of the diary in question, B.M. 32312, and added information which fully answered my two questions. The astronomical contents of the diary clearly establish the year as 652/51 B.C.E. when the observations were made. Sachs writes that “the preserved astronomical events (Mercury’s last visibility in the east behind Pisces, Saturn’s last visibility behind Pisces, both around the 14th of month I; Mars’ stationary point in Scorpio on the 17th of month I; Mercury’s first visibility in Pisces on the 6th of month XII) uniquely determine the date.”22 삭스 교수는 답변에서 내가 제기한 문제와 관련된 일지의 사진 한 장을 동봉했고, 두 가지 질문에 답변이 되는 충분한 정보를 추가했다. 일지의 천문적 내용은 관측된 연도를 기원전 652/51년으로 명확히 확정한다. 삭스는 (수성이 물고기자리 뒤에 있는 동쪽의 마지막 가시성(可視性), 토성이 물고기 자리 뒤에 있는 마지막 가시성, 둘 다 1월 14일 경, 화성의 전갈자리 정지점, 12월 6일 수성의 첫 가시성)이 날짜를 오직 하나로 결정시킨다"고 답변하였다.22 Interestingly, it cannot be claimed that this diary was redated by later copyists, because the name of the king, his regnal year, and month names are broken away. Yet these data may justifiably be supplied because of a historical remark at the end of the diary. For “the 27th” of the month (the month name is broken away) the diary states that at the site of “Hiritu in the province of Sippar the troops of Babylonia and of Assyria fou[ght with each] other, and the troops of Babylonia withdrew and were heavily defeated.”23 흥미롭게도, 이 일지는 왕의 이름, 그의 연호, 그리고 달의 이름이 부셔졌기 때문에 후기 필사자들에 의해 다시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는 일지 끝에 있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 그 달의 "27일"(달의 명칭이 부서짐)에는 "싯파르 지방의 히리투가 있던 곳에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군대가 서로 전투를 벌였고 바빌로니아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여 철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3 Fortunately, it is possible to place the time of this battle since it is also mentioned in a well-known Babylonian chronicle. The chronicle is the so-called Akitu Chronicle, B.M. 86379, which covers a part of Shamashshumukin’s reign, especially his last five years (the sixteenth to the twentieth). The battle at Hiritu is dated in his sixteenth year as follows: The sixteenth year of Shamash-shuma-ukin: 다행히 이 전투는 유명한 바빌로니아 연대기에도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시기를 알 수 있다. 이 연대기는 소위 아키투 연대기, B.M. 86379로 샤마슈무킨의 통치 기간, 특히 그의 마지막 5년을 다루고 있다. 히리투에서의 전투는 그의 16년째해에 있었으며 다음과 같다: 샤마시-슈마-우킨 16년: . . . On the twentyseventh day of Adar [the 12th month] the armies of Assyria and Akkad [Babylonia] did battle in Hirit. The army of Akkad retreated from the battlefield and a major defeat was inflicted upon them.24 . . . 아다르[12번째 달] 월의 스물일곱째 날에 아시리아와 아카드 군대가 히릿에서 전투를 벌였다. 아카드 군대는 전장에서 후퇴했고 그들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24 The astronomical events described in the diary fix the battle at Hiritu on Adar 27 to 651 B.C.E.25 The Akitu Chronicle shows that this battle at this place on this day was fought in the sixteenth year of Shamashshumukin. Thus Shamashshumukin’s sixteenth year was 652/51 B.C.E. His entire reign of twenty years, then, may be dated to 667/66 – 648/47 B.C.E. 일지에 묘사된 천문관측과 관련된 사건들은 아다르 월 27일에 있었던 전투를 기원전 651년으로 확정시킨다.25 아키투 연대기는 이 날의 전투가 샤마시-슈마-우킨 16년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샤마시-슈마-우킨의 16번째 해는 기원전 652/51년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667년/66년-648년/47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Now this is the way historians have dated Shamashshumukin’s reign for a long time, and that is why Professor Sachs concluded his letter by saying: “I should perhaps add that the absolute chronology of the regnal years of Shamash-shuma-ukin was never in doubt, and it is only confirmed again by the astronomical diary.” 바로 이것이 역사가들이 샤마시-슈무-우킨의 치세를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식이며, 삭스 교수가 "샤마시-슈무-우킨의 통치연대는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천문 일지로 다시 확인된다는 점만 덧붙여야 할 것 같다"고 편지를 마무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Shamashshumukin’s reign has been known, for example, through the Royal Canon which gives him twenty years and his successor Kandalanu twenty-two years. Thereafter Nabopolassar, Nebuchadnezzar’s father, succeeded to the throne. 26 These figures are in good agreement with the ancient cuneiform sources. Business documents, as well as the Akitu Chronicle, show that Shamashshumukin ruled for twenty years. Business documents, supported by the Uruk King List, also show that from the first year of Kandalanu to the first year of Nabopolassar was a period of twenty-two years. Thus the chronology of that era, supplied by these sources, is as follows: 예를 들면, 샤마시-슈무-우킨의 치세는 20년, 그의 후계자인 칸달라노의 치세는 22년이라는 사실이 왕실 명부(프톨레마이오스의 명부)의 기록을 통해서 알려져 왔다. 그 후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사르가 왕위를 계승했다.26 이 수치들은 고대 설형문자로 된 자료와 거의 일치한다. 예를 들어, 아키투 연대기뿐만 아니라 사업 문서도 이 샤마시-슈무-우킨이 20년 동안 통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루크 왕들의 목록의 지원을 받는 사업 문서에도 칸달라노 원년부터 나보폴라사르 원년까지의 기간이 22년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출처가 제공하는 그 시대의 연대는 다음과 같다: | |||
샤마시-슈무-우킨 | 20년 | 667 – 648 B.C.E. | |
칸달라누 | 22년 | 647 – 626 B.C.E. | |
나보폴라사르 | 21년 | 625 – 605 B.C.E. | |
네부카드네자르 | 43년 | 604 – 562 B.C.E. | |
The diary B.M. 32312, although establishing a date prior to the Neo-Babylonian period (which began with Nabopolassar), again coincides with and helps corroborate the chronology of that era. 일지 B.M. 32312는 신 바빌로니아 시대 이전(나보폴라사르로 시작됨)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시대의 연대와 일치하고 그 연대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This diary, then, adds yet another witness to the increasing amount of evidence against the 607 B.C.E. date. A change of Nebuchadnezzar’s eighteenth year from 587 to 607 B .C.E. would also change Shamashshumukin’s sixteenth year from 652 to 672 B.C.E. But the diary B.M. 32312 rules out such a change. 그렇다면 이 일지는 기원전 607년이 옳지 않다는 또 다른 증거물을 추가함으로써 증거의 양을 증가시키고 있다. 느부갓네살의 18년째 통치가 기원전 587년이 아니라 607년이라 가정하면 샤마시-슈무-우킨의 16년차도 652년에서 기원전 672년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러나 일지 B.M. 32312는 그러한 변화를 배제한다. And, as already pointed out, no one can claim that later copyists inserted “the 16th year of Shamashshumukin” in this diary, because the text is damaged at this point and that datum is broken away! It is the unique historical information in the text, information repeated in the Akitu Chronicle, that fixes the diary to Shamashshumukin’s sixteenth year. 그리고 이미 지적했듯이, 후기 필사자들이 이 일지에 "샤마시-슈무-우킨 16년"을 삽입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는 문서판이 손상되어 자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샤마시-슈무-우킨의 16년째에 일지를 확정시키는 것은 아키투 연대기에 부합되는 독특한 역사 정보 때문이다. This diary, therefore, may be regarded as an independent witness which upholds the authenticity of the dates given in VAT 4956 and other diaries.27 따라서 이 일지는 VAT 4956과 기타 일지에 주어진 날짜의 신빙성을 지지하는 독립적인 증거물로 간주할 수 있다.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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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Insight on the Scriptures, Vol. 1, p. 456.
12 성경에 대한 통찰, 제1권, 456면
13 See the comments by Hermann Hunger (ed.) in Astrological Reports to Assyrian Kings (Helsinki: Helsinki University Press, 1992), p. XXII.
13 아시리아 왕에게 보낸 점성술 보고서(헬싱키: 헤르만 헝거)의 해설을 참조하라. 헬싱키 대학 출판부, 1992년), XXII면.
14 B. L. van der Waerden, op. cit., pp. 77, 78. ziqpu is the Babylonian technical term for culmination. The procedure is explained in the famous Babylonian astronomical compendium MUL.APIN from about the seventh century B.C.E. (van der Waerden, ibid.)
14 B. L. 반데르 바르덴의 앞서 인용한 책 77, 78면. 지크푸는 바빌로니아어로 절정(zenith)을 뜻한다. 그 절차는 유명한 바빌로니아 천문학 개론 MUL.APIN에 설명되어 있다.기원전 7세기 APIN (반 데르 바르덴의 동저서)
15 Some events recorded in the diaries are actually not observations, but events calculated in advance. Thus VAT 4956 records an eclipse of the moon which occurred on the 15th day of the month Simanu (the third month). That this eclipse had been calculated in advance is evident from the expression AN-KU10 sin (also transcribed atalû Sin), which denotes a predicted lunar eclipse. It is further pointed out in the text that the eclipse “was omitted” (literally, “passed by”), that is, it was invisible in Babylon. (Sachs-Hunger, op. cit., Vol. I, 1988, pp. 23, 48, 49) This does not mean that the prediction failed. The expression implied that the eclipse was expected not to be seen. According to modern calculations, the eclipse took place on July 4,568 B.C.E. (Julian calendar), but as it took place in the afternoon it was not visible at Babylon. The method that may have been used by the Babylonian astronomers for predicting this eclipse is discussed by Professor Peter Huber in B. L. van der Waerden (op. cit., note 11 above), pp. 117–120.
15 일지에 기록된 일부 관측기록은 실제 관측치가 아니라 미리 천문학적으로 계산된 관측기록이다. 따라서 VAT 4956은 시마누 월의 15일(3개월)에 발생한 달의 월식을 기록한다. 이 월식이 미리 계산된 것은 예측 월식을 의미하는 AN-KU10 sin(아달루-씬이라고도 표기)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월식이 "누락되었다"(문자적으로는 "지나갔다") 즉, 바빌로니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삭스-헝거의 앞서 인용한 글에서, 1988년, 23, 48, 49면) 이것은 예측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표현은 월식 현상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였음을 암시했다. 현대의 계산에 따르면, 월식은 기원전 4,568년 7월(율리우스력으로)에 일어났지만, 오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바빌론에서는 볼 수 없었다. 바빌로니아 천문학자들이 이 월식을 예측하기 위해 사용했을 법한 방법은 피터 휴버 교수가 B. L. 반 데르 바르덴(위의 각주 11)에서 논의하고 있다.
16 P. V. Neugebauer and E. F. Weidner, op. cit. (see note 8), p. 39.
16 P. V. 노이게바워와 E.F. 바이드너의 앞서 인용한 글 (각주 8 참조), 39면
17 Peter Huber in B . L. van der Waerden, ap. cit., p. 96.
17 피터-휴버, B. L. 반데르 바르덴의 앞서 인용한 글, 96면.
18 Insight an the Scriptures, Vol. 1, p. 456. As pointed out in chapter 3 above (section A2), the so-called “Ptolemy’s Canon” (or, Royal Canon) was not worked out by Claudius Ptolemy. Further, as his quotations from ancient Babylonian astronomical texts available to him show that these were already dated to specific regnal years of ancient kings, he cannot have used the canon “as a framework in which to place his astronomical data.”
18 <통찰>, 1권, 456면. 제3장 (섹션A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소위 "프톨레마이오스의 명부"(또는 "왕실 명부")는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완성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이용할 수 있는 고대 바빌로니아 천문학 문헌에서 인용한 내용들이 고대 왕의 특정한 통치 연대에 이미 날짜가 매겨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그의 천문 자료를 배치하기 위한 구조로" 명부를 사용할 수 없었다.
19 Awake!, May 8, 1972, page 28.
19 깨어라! 1972년 5월 8일 28면
20 As explained in chapter 3 above (section A-1), Berossus’ chronology was composed about 281 B.C.E. The Seleucid era began in 312 B.C.E.
20 3장(섹션 A-1)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베로수스의 연대기는 기원전 281년경에 작성되었다. 셀레우코스 시대는 기원전 312년에 시작되었다.
21 A. J. Sachs, ‘Babylonian observational astronomy,” in F. R. Hodson (ed.), The Place of Astronomy in the Ancient World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 A. 276,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p.48. — For the purpose of facilitating astronomical computations, the year preceding 1 C.E. is called 0 instead of 1 B.C.E. and the year preceding 0 is called -1 instead of 2 B.C.E. The year 652 B.C.E., therefore, is astronomically written as —651.
21 A. J. 삭스, F. R. 호드슨(편집인)의 '바빌로니아 관측 천문학', 고대 세계의 천문 관측소(런던 왕립 학회의 철학적 거래, ser. A.276, 런던: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74년), 48면. — 천문학적 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 서기 1년 앞의 해를 기원전 1년 대신 0으로 두고, 0보다 1년 앞선 해인 기원전 2년을 -1로 나타낸다. 따라서 기원전 652년은 천문학적 표기로 -651년으로 나타낸다.
22 Letter Sachs-Jonsson, dated February 10, 1980. The diary has since been published in Sachs-Hunger, op. cit., Vol. I (1988; see note 6 above), pp. 42–47. Of the first two events, the scribe says: “I did not watch because the days were overcast “ (Ibid., p. 43) This statement does not make the astronomically fixed date of the positions less certain. As pointed out earlier, the Babylonian scholars not only knew the various cycles of the visible planets , but they also regularly watched their daily motions and positions relative to certain fixed stars or constellations along the ecliptic. Thus, even if a planet could not be observed for some days due to clouds, its position could easily be deduced from its position when it was last seen.
22 1980년 2월 10일자로 된 삭스-존슨의 편지. 그 일지는 이후 삭스-헝거의 앞서 인용한 저서 1권에 실렸다. (1988년; 위의 각주 6 참조), 42–47면. 처음 두 관측에 대해서 기록자는 "날들이 흐려져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같은 책, 43면) 이 진술이 있다고해서 천문학적으로 계산해 확정된 날짜가 덜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바빌로니아 학자들은 관측될 수 있는 행성의 다양한 주기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도를 따라 특정한 고정된 별이나 별자리에 대한 그들의 일상적 움직임과 위치를 정기적으로 관찰했다. 따라서 행성이 구름 때문에 며칠 동안 관측되지 않더라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위치를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23 Sachs-Hunger, op. cit., p. 45. For a discussion of this battle, see Grant Frame, Babylonia 689–627 B.C. (Leiden: Nederlands Historisch-Archaeologisch Institut to Istanbul, 1992), pp. 144–45, 289–92.
23 Sachs-Hunger, op. cit., p. 45. For a discussion of this battle, see Grant Frame, Babylonia 689–627 B.C. (Leiden: Nederlands Historisch-Archaeologisch Institut to Istanbul, 1992), pp. 144–45, 289–92.
23 삭스-헝거의 앞서 인용한 책, 45면, 이 전투에 대한 논의는 기원전 689–627년의 바빌로니아 그랜트 프레임을 참조하라(레이든: 네덜란드 역사 고고학 연구소, 1992년), 144–45면, 289–92면.
24 A. K. Grayson, Assyrian and Babylonian Chronicles (Locust Valley, New York: J. J. Augustin Publisher, 1975), pp. 131–32.
24 A. K. 그레이슨의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 연대기> (뉴욕 로커스 밸리: J. J. 오거스틴 발행인, 1975년), 131–32면.
25 As the first month, Nisanu, began in March or April, 652 B.C.E., Adaru, the twelfth month, began in February or March, 651 B.C.E.
25 첫째 달인 니사누(Nisanu) 월은 기원전 652년 3월이나 4월에 시작되었고, 아다루 월은 기원전 651년 2월이나 3월에 시작되었다.
26 That Kandalanu was succeeded by Nabopolassar is directly stated in the Akitu Chronicle: “After Kandalanu, in the accession year of Nabopolassar”— Grayson, op. cit., p. 132.
26 칸달라누의 왕위를 나보폴라사르가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아키투 연대기에 직접 언급되어 있다: "칸달라누 이후, 나보폴라사르 즉위년"—그레이슨의 앞서 인용한 책, 132 면.
27 A catalogue of business documents compiled by J. A. Brinkman and D. A. Kennedy that includes the reigns of Shamashshumukin and Kandalanu is published in the Journal of Cuneiform Studies (JCS), Vol. 35, 1983, pp. 25–52. (Cf. also JCS 36, 1984, pp. 1–6, and the table of G. Frame, op. cit., pp. 263–68.) Cuneiform texts show that Kandalanu evidently died in his twenty-first regnal year, after which several pretenders to the throne fought for power, until Nabopolassar succeeded in ascending to the throne. Some business documents span the period of interregnum by artificially carrying on Kandalanu’s reign after his death, the last one (B.M. 40039) being dated to his “22nd year” (”the second day of Arahsamnu [the 8th month] of the 22nd year after Kandalanu”). This method is also used by the Royal Canon, which gives Kandalanu a reign of twenty-two years. Other documents span the period differently. The Uruk King List gives Kandalanu twenty-one years, and gives the year of interregnum to two of the combatants, Sinshum-lishir and Sin-shar-ishkun. See chapter three above, section B-1-b.) The Babylonian chronicle B.M. 25127 states of the same year: “For one year there was no king in the land” (Grayson, op. cit., p. 88) All documents agree, however, to the total length of the period from Shamashshumukin to Nabopolassar. (For additional details on Kandalanu’s reign, see the discussion by G. Frame, op. cit., pp. 191–96, 209–13, 284–88.)
27 J. A. 브링크만과 D. A. 케네디가 작성한, 샤마시-슈무-우킨과 칸달라누의 통치기록이 포함된 사업 문서 카탈로그는 설형문자 연구 저널(JCS), 제35권, 1983년 25-52면에 발표되었다. (Cf. 또한 JCS 36, 1984년, 1–6면 및 앞서 표기된 G. Frame 표, 263–68면) 설형문자에는 칸달라노가 왕위에 오른 후, 나보폴라사르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왕위를 노리는 여러 권력들이 다투던 중, 그는 21번째 통치 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칸달라노가 죽은 후, 인위적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왕이 공석인 기간에 걸쳐 있는 사업 문서도 있는데, 마지막(B.M. 40039년)은 칸달라노 22년 아라삼누 월[8월]의 둘째 날로 되어 있다. 이 방식은 칸달라노에게 22년의 재위 기간을 부여한 왕실 명부에 의해서도 사용된다. 다른 그 기간에 다르게 걸쳐 있는 문서들도 나타난다. 우루크 왕들의 목록은 칸달라노에게 21년을 부여하고, 신숨-리쉬르와 신-샤-리쉬쿤 두 명의 권력자에게 부재기간의 연도를 부여한다. 3장, 섹션 B-1-b 를 참조하라. 바빌로니아 연대기 B.M. 25127은 같은 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1년 동안 이 땅에 왕이 없었다" (그레이슨의 앞서 인용한 저서, 88면) 그러나, 모든 문서는 샤마시-슈무-우킨에서 나보폴라사르까지의 전체 기간에 대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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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i카페에 나오는 "딸이 웃어"님의 VAT4956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니 상당히 세심하게 공부해서 알려준 흔적이 있더군요.
그런데 달의 위치에 대해서만 언급이 있어서 워치타워의 반박을 물리치기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약간 부족한 것 같았는데 4판의 오늘 부분에서 토성의 위치를 설명해주니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습니다. 토성은 공전 주기가 29.5년이기 때문에 기원전 568년에 제비자리에 나타났다가 그 지점에 다시 나타날때까지의 기간은 29.5년이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기원전 588년에 토성이 그 위치에 있을 수 있다고 주장(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함)하는 것은 토성의 공전주기가 2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시원하게 뚫리십니까? ^^
토성의 위치를 중심으로 천문학적 연대계산이 가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