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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 정적 메울 거리를 찾다 한 라디오 방송이 재생되었다. 잔잔한 팝송 사운드가 멎으며 DJ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3538님의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에겐 7년 만난 남자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요즘 권태기가 왔는지, 같이 있어도 핸드폰만 보고 데이트 횟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저는 여전히 남자친구를 많이 좋아하는데… 이대로 헤어지게 될까봐 무서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렇게 사연 주셨는데, 권태기. 연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죠. 실제로 권태기 때문에 헤어지는 분들도 많고.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사연자분…’
아무 생각 없이 듣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말에, 은재와 미래는 각자 속으로 곱씹었다.
‘연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죠. 권태기 때문에 헤어지는 분들도 많고...‘
은재와 미래가 만난 지 1460일째, 햇수로 4년.
둘 사이엔 권태로운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1
사진 속 우리는 웃고 있었을 텐데
4주년 기념 여행을 떠나는 날. 장롱 면허 소유자인 미래 대신 운전 경력 무사고 3년차인 은재는 오가는 길 운전을 맡았다.
렌트카에 짐과 몸을 싣고 2시간 정도 달렸을 때, 장시간 운전에 목이 바짝 타던 은재가 미래에게 말을 건넸다.
"미래야 나 물 좀."
"..."
"미래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은재는 슬쩍 옆을 봤다. 미래는 시트를 젖히고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갑자기 조용해지더라. 은재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뚜껑을 열어 물을 들이붓다시피 마셨다. 예전엔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운전하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며 노래도 틀어주고 물도 챙겨 줬는데… 게다가 4주년 기념 여행인데... 요즘 많이 피곤한 건가…
요즘 은재는 스스로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 생각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예민하게 굴 일이 아닌데, 귀찮지 않을 일인데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반대로 생각이 흘러가고 몸이 움직였다. 오늘만 해도 약속 시간에 잘 늦지 않던 은재는 늦잠자서 미래를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다.
권태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치로운 개념 따위라 생각하는 은재는 자신에게 권태기가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치고 들어오는 상념들을 하나 둘 씩 상대하다 지친 은재는 한숨을 푹 쉬는 걸로 상념과의 휴전을 선포했다. 옆을 흘끔 쳐다보니 이제 미래는 작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여전히 예뻤다. 내가 반했던 예쁜 그 모습 그대로다. 사랑하니까, 아직.
그런데, 왜…
아직이란 말은 참 무섭다. '나 아직 너 사랑해' 이 말은, 내일은 안 사랑할 수도 있고. 내일도 사랑할 수도 있고.
-
세시간반을 달려 차는 호텔 앞에 섰다. 체크인 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다. 평소라면 늦잠 잔 은재에게 잔소리 폭탄을 날렸을 미래지만, 오늘만큼은 후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요즘 서로에게 뜸했으니까, 오늘만큼은 꼭 행복한 하루를 보내겠다고 결심했으니.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호텔로 향한 은재와 미래는 객실에서 각자 짐을 정리했다.
"은재야! 나가서 좀 돌아다닐까?"
"근처에 갈 곳도 없을 텐데."
"아니~ 그냥 나가보잔 거지."
"...그럴까?"
호캉스라는 테마에 맞게 뷰 좋고 한적한 곳을 찾아 예약한 호텔 주변엔 딱히 놀거리라곤 없었다. 차 타고 30분가량 나가야 번화가 끝에 겨우 닿았다.
결국 은재와 미래는 조금 걷다가 맥주를 사서 올라가기로 했다.
"그래도 놀 거리 있는 곳 주변으로 예약하지~ 진짜 호텔에만 있어야겠네."
미래는 아까 나가자고 제안했을 때 은재의 반응이 탐탁치 않아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말했다.
사실 호캉스를 즐기고 싶었으니 주변 시설따윈 별 상관 없었지만 괜히 심술 한 번 부려본 거다.
"아니 네가 호캉스 가고 싶다길래... 대충 호텔만 보고 예약했지. 이런 거 아냐?"
"대충? 숙소도 우리 4주년 기념인데 좀 더 좋은 곳 가도 됐는데."
"그럼 미래가 예약하지 그랬어? 나 이런 거 잘 못 보는 거 알잖아."
"조금만 찾아 보면 되는 걸 뭘, …아니다. 그냥 걷자.”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같은 대화를 끊어낸 후, 미래와 은재는 앞만 보고 걸었다. 일종의 의무감으로 맞잡은 듯한 손은 떨어지지 않은 채. 은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었지만 미래의 속은 이미 타들어가고 있었다. 쟤는 그냥 적당히 받아치면 될 말을 오늘따라 왜 이래… 늦게 잔 것도 그냥 넘어갔는데. 왜 그런 느낌 있잖나. 이미 쿨하게 넘어간 일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꿍한. 찝찝한 마음에 플러스 알파가 붙는 듯한. 그래도 4주년 여행인데, 진짜 너무하네. 미래도 예의 없이 치고 들어오는 나쁜 상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미래와 은재의 가장 다른 점이라면, 미래는 감정적인 반면에 은재는 이성적이다. 지난 4년간 이러한 부분에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역시 타고난 감정선과 사고 방식까지 이해할 순 없었다. 결국 상념에게 져버린 미래는 은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미래야!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 미안. 뭐라고 했지?"
"사진 한 장 찍을까 싶어서."
"여기 배경도 별로고 이제 어두컴컴 해지는데, 내일 찍을까?"
"그래 그럼."
띠리링
“은재야 잠시만.”
“응.”
무심코 미래 핸드폰에 시선을 돌린 은재의 표정이 구겨졌다. 형준이 오빠? 그게 누구야.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아, 안 받아도 되는 전화네.”
“…그래?”
“응.”
왜? 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삼켜냈다. 이어지는 정적. 아마 누군가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면 목이 턱 막혀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은재는 습관처럼 작게 한숨을 쉬고 미래에게 숙소로 돌아가자 말했다. 미래는 별말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나아가나 싶던 발걸음은 제자리를 향해 돌아갔다.
편의점에서 4캔 만 원하는 맥주와 안주 몇가지를 사고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둘 사이엔 밥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이 두 마디를 제외하곤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공기 흘러가는 소리까지 들릴 적막함이 이어졌다. 서로의 머릿속이 궁금했고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트지 않았다. 4주년 여행답지 않게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
“짠 할까?”
숙소로 돌아와 4주년 기념으로 미래가 준비한 커플 잠옷으로 갈아 입은 뒤, 은재와 미래는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 맥주 캔을 부딪혔다. 그래도 기념일 여행인데 어떻게든 분위기 풀어보자, 둘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내온 시간이 4년이라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충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여전히 견디기 힘든 탓에, 망설임만 늘어져갔다.
사실 미래는 최근 은재에게서 풍겨오는 권태로운 느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권태기라는 주제로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랐고, 여태껏 은재가 보여준 모습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에 미래는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인간은 그렇다. 어렴풋이 알아도, 믿고 있어도, 확인 받아야 완전해진다.
“은재야 요즘 무슨 일 있어?”
“응? 별일 없지.”
“요즘 힘들어 보여서… 아님 다행이구.”
“학교 때문에 그런가. 대학원 가자는 소리만 오백번 들은 것 같아.”
“전생에 죄를 지으면 대학원생이 된다던데... 우리 은재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어후, 힘들었겠네.”
“죽겠어 아주.”
은재는 얼굴을 잔뜩 구겨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래는 피식 웃으며 위로하듯 은재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라리 대학 때문이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명확한 이유가 있으면 해결하기 쉬우니까.
“그래도 우리 기분 좋게 놀러왔는데, 재밌게 놀다 가자!”
“그래야지. 저번에 보기로 했던 영화 볼까 우리?”
“어, 무슨 영화였지? 내가 얘기했었나?”
“이터널 선샤인. 맞나?”
“와, 그거 진짜 스쳐지나가듯 얘기한 건데… 그걸 기억해? 은재 뭐야~ 나 감동이야!”
“누가 한 얘긴데 당연히 기억하지.”
은재는 살풋 웃으며 영화를 틀었다. 리모컨으로 영화를 트는 동안 미래는 은재 입에 과자를 하나 둘 집어 넣어주고 있었다. 오프닝 장면이 재생되고, 은재는 자연스레 미래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미래의 입꼬리는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
‘나는 내 앞가림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여자예요.’
‘괜찮아요. ...뭐 어때요.’
‘...좋아요’
영화 속 등장인물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과거 연인이었지만, 이별 후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의 기억을 지우게 된다. 하지만 추억의 소중함을 깨닫고 결국 다시 만나게 된 둘. 영화 중반부를 지날 때쯤, 은재는 저들에게 이별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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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무 재밌지 않아? 감정선이… 미쳤어 그냥.”
“그러게. 연출도 좋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기억을 지웠는데 결국 같은 사람에게 또 반하고 사랑에 빠지다니.”
“영화니까…”
“아니지 아니지. 은재가 기억을 지웠다고 해도 나한테 다시 반할 걸?”
...그런가? 은재의 대답은 한발짝 늦게 돌아왔다. 그에 미래의 미간은 순식간에 구겨졌다. 얘는 정말, 오늘 공감 능력이고 사랑이고 아까 휴게소 라면에 싸먹었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나를 그렇게나 잘 알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 신경쓰는 나를 뻔히 알면서.
미래는 오늘 하루를 망치지 않기 위해 은재의 행동을 꾹 참고 넘겼지만, 방금 은재의 뒤늦은 대답에 참아온 감정들이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꼭 그렇게 말해야해?”
“응? 뭐가.”
“너 아까부터 왜그래? 내가 한숨쉬는 버릇도 고치자니까… 진짜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없어. 왜그래 미래야. 내가 미안해.”
“사과를 듣자는 게 아니잖아! 너 요즘 진짜 이상해. 왜 복잡하게 해?”
“뭔…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그럼. 별일 없다니까?”
“뭐?”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대화가 싸움으로 번졌다. 미래는 바닥 짚고 있던 손을 말아쥐었다. 은재는 미래를 마주볼 뿐 행동에 변화는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은재는 아까 본 형준이 오빠한테 걸려온 전화가 떠올라 기분이 팍 상했다. 한참 서로를 마주보고 정적을 지키던 중, 미래는 눈물이 고인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침에 돌아가자. 우리 여행올 때가 아니었네."
-
다음날 아침, 은재와 미래는 어떠한 말도 주고받지 않으며 짐을 챙겼다. 미래는 새벽동안 울었는지 눈이 평소보다 더 부어있었다. 은재는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
“…”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을 때, 불과 3주 전만 해도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는 잠시 형태를 감추었단 걸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미래는 고개를 차창 쪽으로 고정한 채 잠들었고, 은재는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 미래가 잠든 걸 확인한 은재는 어제의 상황을, 자신의 마음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미래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이유인 즉슨, 당장 내일부터 미래와 남이 된다 생각했을 때 온몸이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헤어짐이 답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러나 최근 자신의 행동은 변했다. 돌이켜보면 무관심한 태도가 늘었고 그에 미래가 외로움을 비출 때도 있었다. 집을 데리러 갈 때나 데이트를 할 때나 즐겁지만 어딘가 지루하다. 비유하자면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슬럼프를 겪는…
아.
은재는 생각을 멈췄다. 여태껏 사치로운 개념 따위라 생각했던 것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를 깔끔하게 한 단어로 정리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은재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미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미안함과 사랑, 슬픔과 정. 그 어느 것도 선명하게 와닿지 못했다.
“어떤 게 진짜일까…”
#2
엎드려 머리맞기
다시 세시간반을 달려 차는 미래의 집 앞에 섰다. 은재는 익숙하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미래의 짐을 들여놓았다. 그 과정은 마치 자신의 집을 들어가듯 자연스러웠다. 금방 잠에서 깬 미래는 아무 말 없이 은재를 보고 있었다.
“…집 조심해서 가.”
“너도 피곤할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그래.”
“응. 나 갈게.”
미래는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집으로 향했다. 짐을 정리하려다가 은재가 옮겨준 형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저 짐들이 은재의 관심인 것 같았다. 미래는 조용한 집안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세달 전 자취를 시작한 미래에게 은재는 집들이 선물이라며 거의 한 살림을 들고 왔었다.
"헤엑! 뭐가 이렇게 많아!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다 주세요 뭐 이런 거라도 했어?!"
"ㅋㅋㅋㅋ아니야. 아 미래야, 혼자서 못 자겠으면 이 캔들 잠시 켜고 있어봐."
"이거 키면 좋아? 냄새 되게 좋다~"
"라벤더 향이 숙면에 도움을 준대."
"뭐야 그런 것까지 알아본 거야? 은재 이리 와봐 뽀뽀해줄게!"
"뭐 별거 아닌데…"
무심한 말투였지만 분명 그때 은재의 입꼬리는 예쁘게 올라가있었다.
돌아보니 새삼 은재가 남긴 흔적이 정말 많았다. 외로움을 잘 타던 미래는 혼자 살아도 은재가 자주 왔던 터라 적적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은재가 알바하랴 공부하랴 바빠서 자주 못 오던 시기에도 미래는 혼자 잘 있었는데, 오늘따라 집이 너무 적적했다. 친구라도 부를까 고민하던 중, 문자 알림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링
은재에게 걸려온 전화인 줄 알고 미래는 급하게 수신 버튼을 눌렀지만, 발신자는 절친 소미였다. 미래는 약간의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전화를 받았다.
-미래야 뭐해? 은재랑 있어?
"아니~ 혼자 집에 누워있었지."
-나 네 집 가도 돼? 그때 급하게 간다고 집들이도 제대로 못했잖아!
“와도 되지 그럼! 얼른 와."
-맥주 좀 사갈까? 낮이라 좀 그런가?
"아냐 뭔 상관이야~ 황금같은 주말에 좀 마시고 놀고 푹 쉬지 뭐."
-오케이. 조금만 기다려.
"응. 밑에 오면 전화해!"
-응!
미래는 전화를 끊고 문자 알림을 확인했다. 문자 발신자는 은재였다.
[남자친구♥]
민수 와서 같이 게임하고 있어 오후 3:17
이따 술 한 잔 하고 오늘은 일찍 자려고 오후 3:18
물어보지 않아도 뭐 하고 있는지 알려주던 은재는 여전했다. 이에 미래는 안도했다. 아주 약간, 마음의 짐을 덜어낸 것 같았다. 미래는 소미랑 집에서 놀 예정이라고 최대한 쿨해보이면서 다정함은 잃지 않은 투로 답장을 보냈다.
-
“미래야!”
“야 진짜 오랜만에 본다 너. 손에 뭐가 한가득이네? 이리줘!”
“집들인데 선물은 있어야지. 휴지랑 인테리어 소품 좀 사왔어. 너 집 꾸미는 거 좋아하잖아!”
“역시 황소미. 들어가자! 근데 집 좀 드러워.”
“원투데이도 아니고 괜찮아~”
소미는 성격이 털털하고 쿨한 편이었다. 마음 고생 깨나 하는 미래가 종종 고민을 털어놓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대신 욕해주고 공감해주며 미래를 다독여줬다. 오늘 미래에겐 그런 소미만의 위로가 필요했다.
“서은재는 요즘 바쁘대? 맨날 붙어있는 것 같더니.”
“아, 좀 바쁘대… 뭐 좀 먹을래?”
눈치 빠른 소미는 은재 이야기에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를 캐치했다. 잠시 고민하다 주방 쪽으로 향하는 미래를 붙잡고 말했다.
“너 귀찮게 해먹지 말고 시키자!”
“그럴까? 뭐 먹을지 골라봐. 밥은 내가 살게.”
“김치찜 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고.”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해 미래야.”
“ㅋㅋㅋㅋ나 네 선물 정리하고 있을게. 주문 부탁해.”
소미는 미래랑 하이파이브 한 번 시원하게 때리고 김치찜을 주문했다. 그리곤 테레비 보는 아버지 자세로 고쳐 누워 미래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소미는 첫사랑에 얽힌 복잡한 사정으로 거하게 앓던 미래를 옆에서 직접 봤었다. 잘 극복하고 좋은 사람 만나나 싶었는데, 오랜만에 본 얼굴이 시들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소미는 걱정 섞인 말투로 미래에게 물었다.
“미래야. 별일 없지?”
“응? 별일 없지. 왜?”
“그냥~ 고민 생기면 언제든 말해. 둘 다 바빠서 자주 못 봐도 널 향한 내 마음은 한결같단다.”
손하트까지 만들어가며 얘기하는 소미에 미래는 웃음을 빵 터트렸다. 미래는 아까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
“야. 너 어제 미래랑 여행간다고 하지 않았냐?”
“갔다 왔지.”
“왜 이렇게 일찍 왔대. 기념일 여행 간 거라며?”
“그냥 좀, 일이 생겨서.”
“뭐래 딱 봐도 뭐 안풀린 표정이구만. 미간에 지렁이 키우냐?”
지렁이 사육사가 된 은재가 민수를 째려봤다. 민수는 대학 와서 처음 사귄 친구였는데, 똘끼 넘치고 친화력이 좋아서 미래랑도 안면을 텄다. 은재는 민수가 똘끼 넘치는 면과는 또 다르게 진지한 면이 있단 걸 첫 연애 상담 때 알았다. 가볍게 털어놓은 고민에 민수는 철저히 제 3자의 입장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조언해주었다. 은재는 하던 게임을 멈추고 민수에게 물었다.
“민수야. 너 권태기 온 적 있냐?”
“엉? 그럼. 나도 다현이랑 오래 만났잖아.”
“하긴…”
“왜, 너 권태기 왔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뭔지 잘 모르겠네.”
“너 미래 안 사랑해? 이제 막 싫어?”
“뭔 그런 1차원적인 질문을 해. 당연히 좋지.”
“뭐가 1차원적이여. 아주 그냥 근본적인 질문이구만. 그럼 됐네~”
“뭐가 됐어? 복잡해 죽겠다. 미래도 힘들어 하는 것 같고…”
“혼자 해결하겠다고 깝치지 말고 그냥 지내봐.”
“그런다고 돼?”
“그럼 헤어지게?”
은재의 표정이 굳었다. 헤어진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미래와 영원히 만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헤어짐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하는 은재에 민수도 하던 게임을 멈추고 말을 이어갔다.
“야 서은재. 너 잘 생각해라? 지금 당장은 싸웠으니까 헤어지니 마니 생각 들 수 있겠지만, 그럼 이제 니 과제 힘들다고 해도 괜찮냐며 애교 떨어줄 사람 없어. 니가 평생 가볼 생각도 안하는 맛집, 핫플레이스 데리고 가줄 여자도 없어.”
“랩 해? 그런 거 아니야.”
“아님 딱. 어? 남자답게 직진해. 나 권태기라 존나게 힘들다! 좀 도와줘라! 얘기를 해보란 말이야.”
“그게 되냐?”
“왜 안 돼?”
그러게. 왜 안 되냐고 물으니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은재는 덤덤하게 대화하는 법을 모른다. 특히 감정을 주제로 한 대화는 더더욱. 미래한테 많이 배웠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은재는 자신의 입은 장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얘기를 해도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고.”
“새꺄 지금 미래도 대가리 깨질 걸.”
“알아 조용히 해봐.”
“야 임마 넌 다행인 줄 알아! 미리 겪어본 선배가 조언해주잖어!”
“너 얼마 전에 다현이 회식 가는 거 질투난다고 나한테 하루죙일 찡찡댄 거 알지? 선배는 무슨.”
“큼. 원래 연애는, 사랑은 다 그런 거란다.”
“ㅋㅋㅋㅋㅋ등신.”
민수는 상큼한 표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펴보였다. 은재는 말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말은 거칠게 해도, 민수한테 고마워 하고 있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핸드폰을 집어 들고 다시 게임을 켰다.
“그래도 다행이네. 권태기 오면 사랑 아닌 줄 알고 헤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데.”
“뭔가 헤어지는 건 진짜 안될 것 같더라.”
“니가 사람 새끼라 다행이다.”
“니랑 나랑 목숨 걸고 게임 한 판 어떠냐?”
“나쁘지 않지. 암튼 잘해 임마, 후회하지 말고.”
“그래야지.”
“니가 여기서 더 빡칠 기폭제를 평소에 안 만들어서 다행이다.”
“내가 닌 줄 아냐.”
“칭찬을 해줘도 머리채를 잡네…”
은재는 아직도 정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방금 대화로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헤어짐은 정답이 아니다. 은재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던 직접 부딪혀 보기로 결심했다. 아,
“아 맞다. 민수야 너 형준이 형이 누군지 아냐?”
“내가 국정원에서 일했으면 알았겠지. 누군데?”
“아니, 나도 잘 몰라.”
“뭐야?”
형준이 오빠가 누군지도 물어보고…
-
미래는 식사를 하려 김치찜을 시켰으나 소미가 이야기를 재촉해 김치찜은 안주가 되었다. 소미는 시원한 맥주를 입 안 가득 들이키고 한 번 더 미래를 재촉했다.
“아 빨리 얘기해봐. 서은재 잘못이지?”
“어… 은재가 권태기 왔나봐.”
“미친놈이네? 당장 전화 걸어!”
“소미야 진정해!”
소미는 핸드폰을 들고 당장이라도 은재에게 전화를 걸 듯 자세를 취했다. 물론 진짜 전화할 생각은 없었다. 미래에게는 현실적인 답변을 제시하기 보다는 공감이 위로임을 알기에 소미는 더 오버해서 행동한 것이다.
“어제 4주년 기념으로 여행갔는데, 하루종일 뚱하더라고.”
“4주년 여행인데? 제대로 미쳤구만.”
“그래도 챙길 건 다 챙기는 거 보니까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요즘 좀 바쁜 것 같던데, 그래서 힘든가봐.”
“얼씨구 어제 여행갔는데, 오늘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응. 놀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어...”
“야 니가 왜 울어! 지만 바쁘고 힘들어? 미래도 미래 생각하느라 바빠!”
과연 소미는 재주가 있었다.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닭똥같은 눈물을 한두방울 떨어뜨리던 미래는 난데없이 치고 들어오는 농담에 빵 터졌다. 소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래는 휴지로 눈물을 톡톡 닦아내곤 말을 이었다.
“돌아올 거라 믿는데, 믿어도 힘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하기도 하고.”
“서은재가 멍청하네. 있을 때 잘해야지. 너는 그동안 어땠는데?”
“많이 좋아하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게 상상이 안 가더라.”
“너는 그정도면 됐어. 너무 신경쓰지 말자. 응?”
“노력해야지. 잘 지나갔으면 좋겠다…”
“야야 권태기 그거, 별거 아니라 생각하면 별거 아니야. 친구 사이에도 오고 인생에서도 맞이하는 뻔한 거지 뭐! 사람들이 자꾸 권태기를 국가 재난인 것 마냥 말하니까 괜히 겁나잖아.”
소미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미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쳤던 눈물이 다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잘 버텼지만, 미래도 사람이었다. 불안했고, 위로받고 싶었다.
“미래야, 너무 많이 울지 말자. 걔 때문에 흘리기엔 아깝다.”
“흑… 소미야 나 진짜 은재 없으면 안돼…”
“그래그래. 서은재가 정신 못차리면 내가 책임지고 패줄게.”
“패지는 마. 우리 은재 연약해…”
“얼씨구 지랄났다. 알겠으니까 뚝 그치기나 해.”
미래가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소미는 미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알코올이 들어간 탓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잠들어버린 미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반 쯤 뜬 눈으로 시계를 보니 열시였다. 소미는 뒷정리도 하고 바닥에 퍼질러 누워버린 미래에게 이불까지 덮어준 듯 했다. 화장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미래는 목을 두어번 가다듬고 큰소리로 소미를 불렀다.
“소미야! 이거 니가 다 치웠어?”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못 들었나?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킨 미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명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소미]
미래야 니 남자친구 전화오길래 집으로 불렀어 오후 9:11
깨면 연락해 오후 9:12
[남자친구♥]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려 오후 9:20
미래는 본능적으로 신발장 거울로 달려가 흐트러진 머리부터 정리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화장실 문이 열리고 은재와 미래의 시선이 마주쳤다.
#3
클리셰 로맨스
“…”
“…”
5년 같은 5초간의 정적 후, 은재가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잘잤어?”
“어? 응. 이거 은재가 다 치웠어?”
“아냐 나는 설거지만.”
“아, 고마워. 지저분했을 텐데.”
“설거지 거리 별로 없어서 괜찮았어.”
“아.”
미래는 지금 두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첫번째로 자신의 거지같은 몰골이 신경쓰인다는 생각, 두번째로 은재가 왜 전화를 걸었고 왜 왔을까 하는 생각. 혹시나 하는 불안감은 덤이었다.
은재도 두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첫번째로 미래가 이렇게 예뻤나 하는 생각, 두번째로 여기 오면서 준비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는 생각.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은재와 미래가 순간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미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어? 전화도 했던 것 같은데…”
“아, 잠시만. 일단 물 가져다 줄게. 너 목 갈라졌어.”
미래가 급히 목을 가다듬는 동안, 은재는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지난 4년 동안 진솔한 대화를 먼저 꺼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마침내 10번째 시뮬레이션을 마친 은재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미래야. 최근에 너도 느꼈겠지만,”
“잠시만, 잠시만 은재야.”
하지만 준비했던 말은 미래의 제지에 다시 입 속으로 쏙 들어갔다. 동시에 은재는 몹시 당황한 기색을 띄었다. 미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은재는 이도 저도 못하고 허공에 손만 허우적 댔다.
“어? 미래야, 왜 울어. 울지마.”
“왜? 너 무슨 얘기 하려고 한 건데? 얘기해봐!”
등을 토닥이려는 은재 손을 밀어낸 미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첫마디를 듣고 헤어지자 말하는 걸까, 머리가 멋대로 생각해 버렸을 때, 미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손이 밀려난 채로 굳어있던 은재의 눈에도 서서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미래가 저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썩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애한테 지금까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너, 헤어지자고 말하러 온 거,”
“미래야. 나 권태기 온 것 같아.”
“…”
“...도와줄래?”
이내 은재의 볼에도 눈물이 타고 흘렀다. 미래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은재는 팔을 뻗어 미래를 살짝 안았다. 포옹 한 번이 미래가 눌러왔던 감정들이 물 새듯 흘러나왔다.
“너… 너 그러면 안됐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혹시나 헤어질까봐, 내가 얼마나!”
미래는 은재의 어깨를 퍽퍽치며 소리질렀다. 은재는 아무 말 않고 있다 미래가 엉엉 울기 시작하자,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둘은 아직 모르겠지만, 한동안 은재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던 얇은 막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권태기가 왔음에도 부정하고 애써 더 잘해주려다, 혹은 권태기를 숨기기 위해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려다 제 풀에 지쳐 서로를 져버리는 것이 아닌, 권태기라는 상태와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공유하는 것. 그것이 은재와 미래 사이에 생긴 얇은 막을 제거하는 첫 단계였다.
-
15분쯤 서로를 안고 울었을까, 미래는 정말 숨 넘어갈 뻔했다. 꺽꺽대는 걸 보고 은재가 물 한 모금 먹이고 토닥여주니 겨우 진정됐다.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을 때 쯤, 미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
“잘 모르겠어. 권태기 온 애인을 도와준다는 말 자체도 어색하고.”
“내가 왜 이럴까, 정말 많이 생각해봤어.”
“응.”
“근데 결론이 안 났어. 단순히 바쁜 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은재가 한마디씩 뱉을 때마다 미래는 은재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은재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시뮬레이션 열심히 돌려도 실전은 훨씬 더 어려웠다.
“은재야, 소미가 그러더라. 별거 아니라 생각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고.”
“…”
“왜, 그런 거 있잖아. 인생과 사람 사이엔 인생 노잼 시기, 일과 사람 사이엔 슬럼프, 연인 사이엔… 암튼 이런 거.”
“응.”
“대부분 명확한 이유는 모르잖아. 근데 또 어느날 그런 시기는 지나있고.”
은재는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한 채 고개를 몇차례 끄덕였다. 미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지금껏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하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에 미뤄뒀지만 이젠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에 대한 마음은... 그대로야?”
은재는 입술을 달싹였다. 민수가 가장 근본적이라 했던 질문. 미래를 좋아하냐던. 더이상 오해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은재는 미래를 똑바로 마주하고 대답했다.
“응.”
“그럼 됐어. 나는 그걸로 됐어. …일단은.”
“너랑 헤어지는 걸 상상해봤는데, 그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어.”
“다행이네. 근데 그걸 살상했어?”
“응? 아니 그게,”
“은재야 이리 와봐.”
은재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어정쩡한 자세로 미래 곁으로 다가갔다. 미래는 엄지와 중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손에 입김을 후 불더니, 다가온 은재의 이마 정중앙에 딱밤을 시원하게 꽂았다. 청명한 딱- 소리가 났다. 은재는 눈을 두배로 크게 뜨고 양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미래는 그 모습을 보고 입으로 동굴 만들고 와하학, 하고 웃었다. 그에 은재 얼굴에 떠있던 물음표는 배로 늘어났다.
미래는 은재에게 소심한(?) 복수를 한 것이다. 똑같이 속앓이 시키고 싶진 않은데, 일단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니까. 딱밤 한 방으로 그 동안의 아픔을 청산하기로 했다. 그래도 자기가 그은 선 자기가 넘으러 왔으니. 은재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미래는 은재가 용기낸 것을 알아 고맙기도, 기특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의아하게 여길지라도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건 서로였으니까. 이제야 미래가 정말 후련한 표정을 지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겠나.
“나 힘들었어 은재야. 너를 믿는 거랑은 별개로 불안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근데, 지금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잖아.”
“어…”
“약속하자. 다음이 있다면 그때도 나한테 말해줘. 망설이지 말고.”
“응. 그렇게 할게. 혹시 미래도 힘들면 말해야해.”
“그럴게. 그리고… 용기내줘서 고마워.”
“내가 고마워 해야지. 해보니까 그동안 미래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는지 깨달았어. 견디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미안해.”
“이제 미안해 하지마. 미안할 일을 만들지도 마!”
“응. 그럴게. 근데 미래야,”
“응?”
은재는 형준이 오빠가 도대체 누군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물어보기로 결심했는데, 괜히 속 좁아 보일까봐 또 말문이 막혔다. 미래를 믿지만, 확실히 하고 싶은데... 은재도 역시나 사람이라서 확인받아야 완전해졌다. 미래는 불러놓고 말 없는 은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재야 왜?”
“그, 형준이 오빠는… 누구셔?”
“응? 사촌 오빤데 왜?”
“아. 아니, 여행갔을 때 전화… 어쩌다 봤는데,”
“ㅋㅋㅋㅋㅋㅋ신경쓰였어? 진작 물어보지!”
“아니, 당연히 너 믿는데! 전화를 안 받길래 나 때문에 안 받는 줄 알고 신경쓰여서!”
“아이고 서은재야, 이상한데서 귀엽네 너는.”
“아니야!”
“그래 그렇겠지~”
“…”
이날 미래와 충분히 대화를 나눈 후, 은재는 권태기를 새롭게 정의했다. 권태기는 그저 ‘상태’일 뿐이라는 것. 마음 먹으면 벗어날 수 있는 것.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아니게 되는 날이 찾아올 수도 있고.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니까. 믿으니까.
-
그날로부터 두달이 지났다. 그동안 미래와 은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일상은 똑같았다. 은재는 과제와 교수님, 대학원 러브콜에 시달리고, 미래는 취업 준비 겸 자격증 준비하느라 전전긍긍하고. 그런데 둘의 성격이 바뀌었다. 은재는 좀 더 솔직해졌고, 미래는 좀 더 이성적으로. 속마음 비추는 일이 거의 없었던 은재는 기분과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감정적인 탓에 자주 서운함을 느끼던 미래는 ‘그럴 수도 있지. 다 지나갈 일’이라는 마인드를 탑재함으로서 감정과 이성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어느날 아침 눈 떠보니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서로 많이 노력했다. 아 물론, 가끔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은재야. 권태기인지 알아보는 질문이래. 내가 밥 먹는 게 처먹는 걸로 보인 적 있어?”
이런 거친 질문을 잘도 눈 반짝이며 물어본다. 미래 볼을 만지작 거리던 손이 멈칫한다. 아무 대답도 안하는 은재에게 미래는 대답을 부추겼다.
“나 이제 이런 걸로 상처 안 받아~ 편하게 말해도 돼.”
“전혀 그런 적 없는데... 권태기 왔을 때 몇 번?”
“…”
“아니 그, 잘 먹는다는 걸 좀 거칠게 표현해서~ ...미래야?”
은재는 말하다가 오싹함을 느끼고 아차 싶었다. 분명히 실수다. 완전 실수다. 미래는 아무말 없이 천천히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우리 은재가~ 이젠 이렇게 선을 넘네~”
흥얼거리며 주걱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미래를 발견했을 때, 은재는 진짜 울 뻔 했다. 미래는 주걱으로 은재 등을 후들겨패기 시작했다. 그와중에 강약 조절은 기막히게 했다. 적당히 아프도록.
“야이! 화상아!”
“악! 미래야! 아! 미안해!”
“너무 솔직하잖아!”
하지만 우리는 또 한 번 변화했으니까. 이런 오류는 고장난 테레비 퍽 치면 돌아오듯 그런 거니까.(진짜 퍽 치긴 했다) 이정도 쯤이야 뭐.
-
“미래야 요즘 은재랑 어때?”
“죽겠어. 참,”
“그새끼 데려와.”
“너무 좋아 죽겠어…”
“…”
소미는 미래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미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요즘 은재가 너무 귀여워졌다고 자랑이나 하고 있었다.
“참 잘됐네. 응. 그래.”
“아, 은재가 너랑 셋이서 밥 한 번 먹자더라.”
“나? 왜?”
“너 집들이 왔을 때, 내가 너 덕분에 살았다니까 엄청 고마워 하던데?”
“뭘, 야 그럴 시간에 너한테나 더 잘하라 그래.”
“아 진짜 황소미! 멋있는 거 혼자 다 하네.”
“그럼. 그래서 권태기 겪어보니 어때? 별거 아니지?”
“별거긴 했는데 별거는 아니더라.”
“말이야 막걸리야?”
“그냥 뭐랄까, 힘들었는데 잘 지나갔어.”
“다행이네. 혹시 서은재가 또 개소리하면 바로 말해. 밥숟갈로 후드려줄게.”
“우리 은재 연약하다니까.”
연약은 개뿔! 소미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소리질렀다. 하지만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혼자서 답을 찾은 아이가 기특한 어머니같은 미소.
아, 은재에게 민수도 연락이 왔었는데.
-야 바쁘냐? 파티원 부족한데 게임 접속해라.
“은재 지금 씻으러 갔는데?”
-아 깜짝이야. 강미래? 뭐야 같이 있어?
“어 지지고 볶는 중이니까 사라져줄래?”
-아주 끼리끼리 지랄나고 보기 좋다 참.
“칭찬 고마워^^”
뭐 그렇게 됐다.
-
“이제 날씨 적당히 춥고 좋다.”
“미래 추워?”
“응 조금? 근데 괜찮아~ 아 괜찮다니까! 너 추워!”
“나 열 많아. 괜찮아.”
“추우면 말해야 돼. 알았지?”
응. 은재는 미래에게 건네준 후드집업 지퍼를 목까지 쭈욱 올리며 대답했다. 모자까지 야무지게 정리해주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기로 했던 카페가 코 앞인데 남이 보면 꼴값떤다고 할 모습이었다. 카페에서 은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미래는 따뜻한 초코라떼를 주문하고 소파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어제 미래에게 보여주려고 저장해놓은 귀여운 고양이 영상을 틀기 위해 들어간 어플 상단에는 ‘권태기 극복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한 영상이 떠있었다. 은재는 이끌리듯 영상을 재생했고, 요란한 인트로 음악이 들려왔다.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음악 소리에 돌아본 미래도 어느새 같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BJ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래된 연인이 언제 가장 많이 헤어지는지 아세요? 누가 바람 피워서 말고. 바로 멀리 여행갔을 때 입니다.'
왠지 떠오르는 자신들의 모습에 은재와 미래는 마주보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다 해봤으니까 이제 뻔하고 질리는 거죠. 딱히 재미가 없는 거예요. 오래 만났으니 설렘도 없고,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심장이 빨리 뛰면 오히려 부정맥을 의심해봐야 하거든요?'
미래는 부정맥이란 말에 깔깔 웃어댔고 은재는 자신이 부정맥인가 의심했다. 더 보지 않고 영상을 끈 은재는 고양이 영상을 미래에게 보여줬다. 역시 미래는 귀엽다며 펄쩍 뛰었다. 고양이를 귀여워 하는 미래를 귀엽게 바라보던 은재는 아까 영상에서 들은 내용을 곱씹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미래야. 혹시 우리 데이트가 너무 뻔해서 재미 없거나 그러면,”
“뻔하지 그럼. 매번 밥 먹고 카페가고 가끔 영화보고 여행가고.”
“…”
“사랑, 연애만 놓고 보면 뭐든 다 똑같고 질릴지 몰라. 그런데,”
미래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미래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진 은재는 더 떨어질 심장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표정에서 심정이 드러나는 은재를 귀엽게 바라보던 미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와 내가 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하나 뿐이잖아. 어떤 하루를 보내든 네가 있어서 특별하고 좋아.”
“미래야. 나 부정맥인가봐…”
“아ㅋㅋㅋㅋㅋ 은재 너무 재밌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부정맥을 의심하는 은재에 미래는 와르륵 웃었다. 은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진동벨이 울렸고, 은재는 음료를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미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랄한 걸음으로 은재를 앞섰다. 같이가자!
앞서는 미래를 바라보는 은재의 표정도, 은재를 보고 환하게 웃는 미래도, 모두 명백히 사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변치 않는 사랑이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형태는 변해도, 본질은 늘 똑같았다는 것. 이 사실을 깨닫는데 삽질 좀 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국가 재난 수준이라는 권태기를 지나온 은재와 미래는, 경도 높아진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