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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마지막 기회를 보며
1999년 6월 6일 / 대예배 / 눅 13:1-9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어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이 주인이 무화과나무에 쏟은 정성과 관심이 지극히 크다고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이나 계속 무화과에게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게 되자,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찍어 버리라 어찌 땅(시간, 물질, 능력)만 버리느냐”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과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의 비유의 말씀이기 때문에 일단 무슨 상징인지 해석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1. 본문은 우리 각자에게 들으라고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미 해석을 나름대로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굳이 본문의 말씀이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공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기 위하여 잠시 그 뜻을 집어가는 것도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과원지기는 예수님, 포도원의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이미 땅을 파셨고, 거름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과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에게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오늘 말씀과 같이 과원지기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 무화과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말처럼 이제 진정 이스라엘은 혈통을 따라 결정되는 곳이 아니고, 즉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유대인은 우리 예수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매를 온전히 맺어야 된다고 하는 절박감을 더욱 느끼게 될 것입니다.
▶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를 우리는 사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이 비유를 가르쳐주신 이유는 바로 앞 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일과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에 대한 화제를 떠올리면서 그들은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시면서 두 번씩이나 (눅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면서,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강조하시며, 회개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를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무조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많은 여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옆 사람의 잘못을 보고도 자기의 잘못을 돌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안일하게만 대처해서도 안됩니다.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2, 5달란트 받는 종처럼 속히 실행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었느냐 아니 맺었느냐를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아 주인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무화과는 관상 나무가 못되는 나무입니다. 즉, 그 존재의 목적이 관상에 있지 않고 열매에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그 목적대로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이미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어찌 땅만 버리느냐 찍어 버리라”고 심판한 것입니다.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며, 그 목적 또한 우리의 생의 가치와 의미의 기초가 되고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실 때에도 뚜렷한 목적으로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시고, 보호하시며, 오늘 이 땅에 있게 하심도 확실한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목적에서 빗나가거나, 목적에서 떠날 때 존재의 가치는 없어지고 맙니다. 오늘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도, 열매가 없으므로 마침내 “찍어 버리라”고 심판을 내리실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심판이 있습니다. 마 25장에서 볼 수 있듯이, 신랑되시는 예수님이 오심을 준비한 5명의 지혜로운 처녀는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칫집에 들어간 반면 기름을 준비치 아니한 미련한 5처녀는 바깥 어두운 데서 쫓겨나 슬피운다고 하였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그러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5, 2, 1달란트의 거금을 맡기며 장사하여 이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1달란 받은 종은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치 않고 1달란트를 게을러 땅 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2, 5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갑절로 남겨서 주인에게 드렸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백보좌 심판도 있습니다. 마 25:31-45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의 영벌에 들어간 저희는 누구입니까?
(마 25:41-45)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는 말씀처럼 왼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영생에 들어갈 의인은 누구입니까?
(마 25:34-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5처녀의 비유의 말씀이나 달란트 비유, 백보좌 심판 등에서 가르쳐 주듯이 세상 끝에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향한 심판이 아닙니다. 분명히 믿는다고 하는 우리를 향하신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 6:4-8)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서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러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말씀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히 5:12-13)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즉 남을 가르치는 좋은 선생이 되라는 말씀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도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살아 온 모든 삶에 대하여 장차 세상 끝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마 25장에서도 나왔듯이 믿는 이들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 잘 한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잘못한 사람에게는 영벌을 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구의 종말을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에게 임하는 행한대로 갚아주는 심판이 있는데 좋은 열매(무화과 나무에서는 무화과, 포도나무에서는 포도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겠다는 현재적인 심판을 말합니다. 내게 한 말대로 내가 심판을 반듯이 내가 행한 대로 분명히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내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3년간 기다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즉각적으로 찍어버린 것이 아니라 3년을 참아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한다고 즉시 천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를 경솔히 여겨서는 큰일납니다. 인내하시되 무한히 인내하신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참으신 후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음을 말하여 줍니다.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안믿는 자는 말도 할 것 없거니와, 믿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있을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분명히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버리겠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결코 위협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노아의 때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하나님의 경고를 경솔히 여기면 그 사람에게는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까지 인내하시며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한다면 그에게는 부끄러운 구원만이 있을 것뿐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오래 참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무한히 참으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할 때는 결국 심판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말해주는 상징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으나 십자가라는 한계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참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십자가의 한계를 넘어설 때는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요 3:16절 다음에 18절 말씀이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되시면서 또 심판도 되시고, 구주이시자 심판주도 되시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구원이 있고 동시에 심판적인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4.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간청이 있었기에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음으로 마침내 심판을 받았습니다. 3년이나 기다려 주시다가 내리신 심판인 까닭에 나무는 무슨 변명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이 심판을 받아 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고맙게도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의 심판을 가로막으며 나섰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입니까?
이 과원지기의 중보적인 간청은 결코 단순한 감상이나 동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는 확실한 신념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 사건을 과원지기는 본질적으로 이 나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병적으로 잘못되었기에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본성은 선한 것이며 잠재적인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과원지기는 이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는 책임을 자기가 함께 지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주인은 분명하게 판단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동안 주인이 보아 온 바에 의하면 과원지기는 부족함이 없을만큼의 많은 수고와 정성을 기울였음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원인은 오직 나무에게만 있다고 판단하여 과원지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나무가 나쁘니 “찍어버리라”고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원지기는 그 책임을 함께 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에게도 분명히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무책임한 자의 책임을 대신 지는 것이 곧 사랑이며 믿음입니다. 과원지기는 열매 맺지 못한 책임이 자기 책임인 것처럼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대신 지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비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말없이 책임을 함께 지며 나아가서는 대신 지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오늘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된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러한 희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 53:4-7)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과원지기는 일년의 기회를 다시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 일년은 한번 두고보자 잘 맺는가 아니맺는가를 관망만 하고 있는 일년이 결코 아닙니다. 그 과원지기 자신이 일년을 더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무화과나무에게 주어지는 일년이 아니라 과원지기에게 수고와 희생의 기회로 주어지는 피눈물 나는 일년인 것입니다. 즉, 내가 수고하고 희생할 여지가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이 나무를 찍어버릴 수 없다는 신념입니다.
에스라는 온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다. 모세는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려면 차라리 그전에 자기의 생명을 먼저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심판 받을 자가 다시 살기 위하여서는 분명히 더 큰 희생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퀴오바디스’에 대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을까 생각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 생키비치의 <쿼바디스(Q-uovadis)>는 사도 베드로가 만년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포악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A. D 64-68). 이때 베드로의 신변에 위험이 직면했음을 안 성도들은 그에게 “교회의 주초가 되시는 베드로 님께서 잡혀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저 짐승같은 네로에게 승리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네로를 치실 때까지 이 곳을 떠나셔서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러 번 그 요구를 거절했으나, 성도들의 계속된 요청에 하는 수 없이 그 곳을 잠시 떠나 있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동이 뜨기 전에 로마성을 탈출한 그가 알반이라는 언덕에 이르렀는데, 그때 동편 하늘에 해가 떠올랐습니다. 베드로는 그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다가 한 장소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광채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가 황급히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자 공중에서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내 양을 버리고 가니 나는 로마에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노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도 베드로는 땅에 엎드러져 무릎을 꿇었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오늘 본문을 말씀을 되씹어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부디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므리바의 교훈
1999년 6월 6일 저녁예배 / 민수기 20:2-13
본 사건은 미리암이 죽은 것은 광야 유랑 생활의 38년 말기, 즉 출애굽한 지 40년 째 되던 해의 일인 듯합니다. 가데스는 가데스 바네아라고도 불리는데, 하갈의 피신처이기도 했으며, 정탐군들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보고한 곳, 미리암이 장사된 곳으로 약속의 남방 한계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출애굽을 시키고,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바라보질 못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환경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생활을 하다가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 40년 동안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말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뜻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마실 물이 없다고 모여서 불평을 늘어놓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을 해나갈 때에 여러가지 환경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눈이 없은 사람들은 이것을 통하여 불평과 불만을 토로할 것입니다.
1. 백성들의 불만(2-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총회’(4)라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의중(意中)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이라면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모세와 아론이 인도한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이끌어 주면 이러한 일은 없어야 하고, 평탄한 대로(大路)가 길게 고속도로와 같이 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어려운 연단들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없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골탕 먹이고 계시는 못된 하나님이신가 말입니다.
이 질문의 답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40년이 없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 왔겠는가?’란 반문을 해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이나 종노릇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의 습성이 근성이 되어 베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회중들이 약속의 땅, 축복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과 우상숭배를 이겨낼 만한 믿음과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에서 같이 행동하게 되면, 우상이 가득한 땅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연스럽게 아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의 종노릇하며, 그들의 우상숭배를 하나님보다 더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뜻을 성취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40년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 군인들의 훈련을 예로 들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방위들의 훈련과 현역들의 훈련이 다르고, 현역보다는 특전사(공수부대) 훈련이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은 만큼 하는 일들이 각자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끄시는 것을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의 영적인 훈련을 통하여 주실 복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것이든 큰 환경이든지 간에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감사 한 마디 없이 곧 불평과 불만으로 연결되어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현실에 급급한 나머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제일 잘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만일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바라보기는커녕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약 200만 명 정도가 나왔지만,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고 불평하므로 그들 중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단 두 시람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알고 또 믿고 그 뜻에 잘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에서는 하나님의 연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 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연단을 주시는 뜻을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연단시키실 때에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불만하지 맙시다. 불평에 대한 결과는 결국 자신의 손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마다 감사하므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2. 모세의 반응(6-9)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하루 이틀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계속적으로 불평과 불만한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시간보다 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성품이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보고도 아니 그들에게 계속 부딪힘을 당하면서도 참아 오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어서 불평불만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며 곧 가나안 땅에를 들어가는데, 아직까지도 (민 20:4-5)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대처하는 방법을 봅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만의 소리가 높아질 때에 그들에게 무력이나 다투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 달려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엎드리고 있습니다(6).
성경에서는 ‘엎드리다’는 ‘항복하다(왕하 7:4; 25:11)’, ‘의지하다(단 9:18)’, 그리고 ‘간구하다(렘 38:26)’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말은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고 오직 여호와께 의지하고 간구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될 때, 교회에서는 일군이, 가정의 영적인 지도자가 문제의 시비(是非:옳고 그름)를 가리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하나님 해야 할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 문제를 발생시켜 주신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큰 아픔이 수반됩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이 어려워할 때나 불평할 때,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기도하는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어려워하고 있는데, 자신의 안일에 빠져 있거나, 영적인 잠을 자고 있으면 문제가 반드시 발생됩니다. 모세와 아론과 홀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의 적들과 전쟁하고 있을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3. 모세의 실수(10-13)
모세는 하나님께 응답은 받았지만, 한 가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여 백성들 앞에서 그것을 높이 들고 반석을 향해 단순히 명령만 하면 물이 솟아 나오게 되는 것을 알려 주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백성들 앞에서 서기까지는 그 명령을 순종하였습니다(10). 하지만 모세가 백성들 앞에 다시 서서 그들의 불신앙의 모습을 볼 때에 매우 불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성급하게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서 격한 말했습니다(시 106:32, 33). 그리고는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이나 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물은 그 백성들과 짐승들이 먹었습니다(11).
모세의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자비하심과 전능하심을 나타나시길 원하시는데, 그가 나타냈던 것은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진노를 나타내고,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냈습니다.
시편 106:23절에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아론을 향해 원망과 다툼을 일으키는 그들을 향해 저주를 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만 마디 저주를 할지라도, 그들의 저주보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저주 한 마디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반석을 두 번 내리치면서 몹쓸 말을 했을 것입니다. 결코 온유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고 책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모세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네가 인도하여 여기까지 이끌어 낸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도 없고 패역한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능히 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전혀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로 본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이 사건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을 남기는 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그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지금까지 수고한 많은 업적보다 하나님 앞에서 명령에 대한 단 한번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의 최종적인 ‘가나안 입성’이라는 꿈은 막혔습니다. 그래서 이곳 지명(地名)을 ‘므리바’라고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이 ‘므리바’ 40년 동안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적인 곳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 오늘날 교회들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작정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응답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서로가 그 동안에 쌓였던 인간의 감정을 앞세워서 해결하려 합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제 2차적인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한가지는 문제해결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나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법과는 정반대로 행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모세처럼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더 꼬이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보다 자신의 육신의 문제가 더 시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하여 기도할 때, 확실한 하나님의 문제 해결책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성도들끼리 싸움을 하면서 하는 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이 못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그러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용서하고,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시켜 주는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이어주어 완벽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져 갑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중에 진정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서로 용서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십시다.
●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 훈련에 대해 깊은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다투면서 하면 안됩니다. 일이 조금씩 늦어진다 할지라도 서로 같이 한 마음이 되어서 일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모세와 같이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은 제목은 내가 손해가 난다고 할지라도 자아를 죽이고 그 응답 받은 내용에 대해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므리바의 교훈’을 통하여 현실에 대해 하나님 앞에 불평과 불만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맙시다. 순종하므로 축복받는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므리바 물
본 문 : 민 20:2-13
요 절 : (민20: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비록 불평과 범죄로 점철된 생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약 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그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훨씬 탁월한 존재들이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세 지도자인 모세, 아론, 미리암 등은 가나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 장면이 대조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지정한 통치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가나안 땅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주역은 결단코 혈기와 감정과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1. 반석을 두 번 친 모세.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완악한 백성들 앞에서 순간적인 혈기를 참지 못해 범죄하고 말았다. 시편 기자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106:32)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시106:33)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결국 모세는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모세는 단지 바위에게 명하기만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깊은 이유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아마 그것은 말만으로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모세는 말해야 했고, 쳐서는 안 됐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2. 연약한 인간.
슬프게도 모세는 불복종했다. 왜냐하면 크게 보아서 아마도 그는 말만으로 그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간이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돕기 위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앞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 온전한 영광을 돌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수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사실과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3. 솟아나는 물.
모세가 화를 내고, 불복종하고,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은 펑펑 솟아났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불순종 때문에 공경에 처한 백성의 어려움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종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신의는 깨어지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믿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다. 이 사실은 복된 교훈이다. 우리들은 무가치하고 부적당한 종이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둑을 넘쳐 흘러서 수정 같은 물결로 광야를 적셨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물은 졸졸 흐르지 않았고, 펑펑 솟아 올랐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그 얼마나 신실한가! 그러나 모세 그 자신은 인생 말년에 벌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종의 불복종은 용서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의 인격이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고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스스로 선택하셨기에 그들이 잘못했을 때 더욱 엄하게 벌하신다.
적용
1)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때때로 불순종의 삶을 산다. 우리는 보통 어떤 때 어떻게 불순종하는가?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고 이를 반성하자.
2) 모세는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행동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 생각해 보자.
3)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던 종 모세도 연약한 인간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우리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고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자.
4)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마찬가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와 불순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사 명
민 20:22-29
우리 민족이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전쟁이 발발한지 4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날도 오늘과 같은 주일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일성은 적화야욕의 꿈을 가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개시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도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남한은 남한 인구 중의 25%가 예수를 믿고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쪽인 북한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당하였고 북한의 경제는 피폐하여 파탄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올해 양식이 150만 톤이나 모자라 미국, 일본 등에 쌀을 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었고 우리 남한에서도 15만 톤의 쌀을 보내주기로 합의하고 지금 수송 중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6.25를 겪어본 세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6.25와 같은 무서운 전쟁은 이 땅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 중에 하나가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남한만이라도 민주국가로 보존을 시키신 것은 우리들에게 큰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사명은 북한의 동포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고 통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북한에 허물어진 교회를 다시 건축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기도로 준비하고 경제적으로도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칼 희티는 사명 받는 날은 태어난 날 부다 더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는데 그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삶이 긍정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지만 그 사명을 바르게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삶이 늘 부정적이며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나의 사명과 연관을 시켜서 생각을 해 본다면 결혼을 해서 한 남자와 여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은 누구나 하는 보편적인 일이지만 이 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 삶이 아름답고 기쁨이 넘치고 감사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늘 하고 사는 일에 그 사명 의식이 없는 사람은 그 삶이 늘 불평이요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을 하는 것만 사명이 아닙니다. 목사만 사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만 특별한 사명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장 귀한 사명입니다. 그 아이는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하는 것. 가정에서 살림을 하는 것. 교회에서 맡은 보잘것없는 것 같은 작은 일 모두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명입니다.
수만 명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사람만 큰 사명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 하나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크고 귀한 사명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일 교회에서 충성하게 하시고 집사나 권사로 세우시고 교회학교 교사로 세우시고 성가대 대원으로 세우시고 반주자로 세우시고 전도하게 하시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크고 귀한 사명이라고 깨닫고 신앙생활하는 성도는 늘 기쁨이 넘치고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사명을 깨닫지 못한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지 못할 뿐더러 조금하다가 중단해 버리고 실망하고 불평하다가 돌아서 버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일을 맡겨주시고 나에게 맡겨주신 이 일이 다른 사람들도 다하는 보편적인 일이고 평범한 일이며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귀한 사명이라는 생각을 가진 성도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일할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중에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형이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죽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도 늙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다 마치고 세상을 떠나서 그의 사명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물려주고 호르산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열심히 일하게 되고 사명을 다하면 그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죽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사명을 다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들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으로 일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명예나 권세와 재물의 탐욕 때문에 일하는 것도 사명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시장이나 도지사 선거에 자신이 이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려는 진정한 마음으로 출마했다면 그것은 사회를 위하여 일하는 사명자 이지만 그 반대로 자신의 명예나 권세를 얻기 위하여 출마했다면 그것은 사명이 될 수 없습니다.
미국의 가스 페터슨은 주일성수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트럭을 사고 스피커를 구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 일찍 마이애미 비치를 찾아가서 물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로키 산맥의 등산로에 스피커를 수십개 설지를 해놓고 주일날 하나님께 돌아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전도를 합니다. 그는 지금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며 그는 평생 이일을 계속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명자 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명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진정한 사명은 힘들고 어려워도 즐거운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라고 믿는 사람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 일이 즐거운 것이며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여 잠을 자지 않으며 충성하고 아까운 재물을 소비하면서 열심히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가 전도사로 있을 때 담임하던 교회에서는 70이 넘은 노인 여자 권사님께서 계신데 그 분은 20여년동안 새벽종만 쳤다는 것입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새벽을 종을 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종 줄을 붙잡고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할리우드에 가면 매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무거운 십자가를 만들어지고 근엄한 표정으로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편하게 살려고 하고 자기만 위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희생의 십자가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매일 이 일을 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이 분을 쳐다보면 은혜를 받고 그를 존경하여 헌금을 하게 되고 그 돈으로 그 분이 생활을 하면서 지금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할리우드의 죄악이 가득한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것을 믿는다면 그 사명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도 즐겁고 신나는 것임을 믿습니다.
3. 이 사명은 누구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으로 맡겨주신 일을 우리는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그 가문이 훌륭하고 얼굴이 준수하게 생기고 용맹성이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는데 왕이 되고나서부터는 교만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으며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사명을 빼앗아서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불순종의 사람, 사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사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화점왕 와나메이커씨는 대통령이 그를 장관으로 불렀는데 주일날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통령은 할 수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 날은 절대로 부르지 않을 것을 약속을 했고 그 후에 그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장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자신이 다니는 침례교회의 교회학교 교장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대통령 자리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교회학교 교장자리의 사명은 지금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굳게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순종함으로 잘 감당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사명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삼하 23:10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전쟁에 나갔다가 불레셋 사람들에게 포위를 당하였을 때 물이 떨어져서 목이 말라서 괴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물은 적군의 수중인 베들레헴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부하 중에서 세 사람이 적군인 불레셋 군대를 뚫고 들어가서 물을 떠가지고 왔습니다. 이 때 다윗은 너무가 감격하여 이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용사는 자신의 주군인 다윗을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귀한 사명이라고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6.25 때 나라를 지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많은 젊은이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나라를 지켰습니다.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였던 이승훈 선생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서 오산 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의 화장실을 청소하며 지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으면서 유언을 하기를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뼈를 잘 추려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표본으로 삼으라” 고하였습니다.
이 승훈 선생은 이 나라에 인재를 키우고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데 생명을 아까워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이 신일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받치게 하소서. 이 부족하고 작은 종의 생명을 드립니다.” 하며 기도합니다. 제가 이 신일 교회에서 언제까지 목회를 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이 교회와 내가 받은 사명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목회를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나에게 주신 사명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일하셔야 합니다.
5.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만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두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드리겠습니까? 그곳에서는 좋은 대학을 나온 것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업을 잘하여 많은 돈을 모은 것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도지사 시장 선거에 당선된 것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식을 공부를 잘 가르친 것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였을 때 그것이 자랑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에서 나오는 아론을 몇 가지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1. 아론은 동생을 섬기는 사명이었습니다.
동생이 형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형이 동생을 섬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자신의 동생인 모세가 40년만에 돌아왔는데 그가 하나님의 큰 명령을 받고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하나님의 사명자인 동생을 정성껏 섬겼고 2인자로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들 앞에서면 조리 있게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실수를 하고 더듬거리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론은 말을 잘못하는 모세를 돕는 것이 그가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입니다. 사람이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고 큰 재능입니다. 모세는 이 재능을 받지 못하고 아론은 이 재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말을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교만해 지기도 하고 그 말을 잘하는 것 때문에 거짓말도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은 말 때문에 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론은 말을 잘하였지만 말을 잘못하는 모세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명령을 받아 백성들에게 잘 전달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르비딤에 도착을 하였을 때 아말렉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과 한판 전쟁이 붙었습니다. 젊은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서 열심히 싸우고 있고 모세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오면 여호수아 군대가 패하여 도망을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론은 훌과 함께 모세 옆에 앉아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므로 이스라엘이 이기게 되었습니다.
아론은 평생동안 자신의 동생인 모세 앞에 서서 일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뒤나 옆에 서서 모세를 보좌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동생이며 자신보다 말도 잘못하는 동생을 잘 보좌하는 사명을 장 감당한 아론은 참으로 귀한 사명자였습니다.
2. 아론도 실수하였지만 회개함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이 다 실수를 하고 불완전하듯이 아론도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간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려오지 안으므로 백성들은 모세가 우리를 버리고 갔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아론을 충동하므로 아론은 백성들의 말을 안 들으면 목숨이 위태하여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 금송아지는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아피스라는 신입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야 하는데 사람을 말을 들으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명을 받은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뜨고 순종해야지 사람의 말, 사람의 생각을 듣고 따르게 되면 아론처럼 실패자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일로 3천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후에 아론은 철저하게 회개하였고 회개한 아론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제사장이 되어 거룩한 에봇을 입고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 때마다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우리들이 받은 사명을 다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3. 아론은 죽을 때까지 사명을 붙잡고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지 40년 오월 오일에 호르산에서 죽어서 땅에 묻혔습니다. 그는 모세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후세 대에게 그 사명을 넘겨주고 가나안을 바라보는 것에서 죽어 땅에 묻힌 것입니다. 아론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큰 영광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 죽는 것이 두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론은 동생인 모세를 도와서 그의 사명을 잘 감당한 하나님의 귀한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자신의 사명을 물려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귀한 사명을 배앗기지 마시고 우리의 생명을 다할 때가지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쁨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나의 사명을 물려주어서 그들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들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기쁘게 감당하시고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단을 건너라
1999년 5월 30일 / 수 3:1-13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가나안땅에 이주해서 살기까지 그들이 넘어서야 할 뚜렷한 두개의 난관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기위해서 건너야했던 홍해 바다와 요단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승리의 바다요 생명의 바다였습니다.그러나 애굽 군대들에게는 홍해는 사망의 바다요 패배의 바다였습니다. 추격하던 애굽 군대들은 이제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애굽의 추격은 이제틀림없는 사실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이스라엘은 애굽의 추격을 받고 도저히 건너지 못할 바다를 건너도록 이스라앨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것은 마치 죄의 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로 건너가는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출애굽한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출애굽은 구원에 대한 출발이며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아직남아 있습니다.애굽에서 탈출을 시도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분이 지시한 곳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오늘 본문의 내용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이제 정복할 땅 가나안을 두정탐꾼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고 이제 싯딤을 떠나 바로 요단 강에서 건너지 않고 요단에 이르러 저들이 삼일을 유숙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지대로 가는 첫관문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는 이 요단강을 육신의 죽음과연관된 그런 가사들이 많이있습니다.그것은 우리가 성화되어가는 과정을통하여 마침내 영화의 단계에 이르는 그단계가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는 날이기때문입니다.찬송가 534장 가사 후렴에도 보면요단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가 건너가네 저건너편에 빛난곳 내 눈에 희미하네
찬송가291장 후렴가사에도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거너가 만나리
천국이 마치 요단강을 거너 편에 있는 그런 장소로 오해 될만한 가사입니다. 가나안지역은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 내려오는 요단강 건너편의 땅입니다. 사실은 우리나라 가물때에 개천같은 그런 이름뿐인 강입니다.이스라엘에 여행하면서 다리를 못보았습니다. 강이 없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러나 여호수아때에는 이 요단강을 건너지않고는 가나안땅을 정복할수 없는 그런 큰 장애 였던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홍해를 건널때에는 하나님께서 바다를 말리워 육지 같이 만드시고 건너게 하셨고 요단을 건너게 하실때에는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의롭다 하심에는 우리의 공로나 선행이 없는 절대 은총입니다.그러나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에는 행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태여나는 것은 나의 공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를 닮아가는 노력도 필요하고 결단도 필요하고 각오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출생도 있고 성장도 있습니다. 태여나자 마자 죽은 사람에게는 성장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장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것입니다.
그래서 약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2:26절 말씀에
영혼이 없는 몸이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의 말로 표현하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성장하는 움직임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바울의 복음과 야곱의 복음이 서로 다른 복음입니까? 바울은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이 생명이 반드시 성장하는 행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태여 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너는 너의 출생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 이세상에 아무도 자기의 출생을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은혜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출생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의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에 태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태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장성한 자녀는 만들어지고 자라나야 합니다.먹어야 하고 운동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다는 말에는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갔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완전한 출애굽은 애굽에서 탈출로 끝이난 것이 아니고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구원속에는 예수의 거룩을 이루워야하는 신앙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죄악의 포로에서 탈출한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요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것이 큰은혜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큰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는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가운데 행하게 하심이니라
예수안에서 선한일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쉬고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게서 우리를 예수안에서 살리실때에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위하여 우리를 살리셨고 이 일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안에서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영화롭게 되는 일입니다.거룩하지않고 영화에 자리에 이럴수가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거룩의 자리자리 마다 요단강의 준비하시고 그 강을 건너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신앙의 고비는 여러 차례 우리 성도들에게 닥아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거룩의 요단강을 어떻게 건널까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받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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