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3 연중6주일 다해 – 133위 059° 고의진 요셉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133위 059° ‘하느님의 종’ 고의진 요셉
이름 : 고의진 요셉, , ‘하느님의 종’ 고시수 야고보 子, ‘하느님의 종’ 문 막달레나 夫, 여사울 고재성 안당(1929~2018) 祖
출생 : 1847년?, 원머리(당진 신평 한정리)
순교 : 1866년 12월 14일, 교수, 공주
고의진 요셉의 어릴 때 사정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씨 집안에서는 고의진 요셉의 부친 ‘하느님의 종’ 고시수 야고보[0.1]가 홍주 원머리(현 충남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살 때 처음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가족들을 데리고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이주해 살았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
소학골로 이주한 뒤 고의진 요셉은 이웃에 살던 배문호 베드로와 친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박해를 받으면 함께 순교하자.’고 다짐하였다.[2] 그들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페롱 신부[2.1]와 칼래 신부[2.3] 등에게 성사를 받는 은총을 누리기도 하였다.[3]
1866년 병인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을 휩쓴 것은 칼래 신부가 이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음력 10월 8일)이었다.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고의진 요셉과 배문호 베드로를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를 체포하여 목천으로 압송하였다.
목천 관아에 이르러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 고의진 요셉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하게 고백하였고, 관장이 “배교하라.”고 하자 “죽을지라도 배교는 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옥에 갇혀 있을 때는 배문호 베드로와 함께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 뒤 고의진 요셉은 동료들과 함께 공주로 이송되었다. 도중에 일행은 서로 순교를 권면하면서 기도문을 소리 높여 화답하면서 외웠는데, 이 모습을 본 배교자 두 사람이 스스로 통회하고 포교들에게 자수한 뒤 함께 공주 진영으로 갔다고 한다. 공주에 이르러 고의진 요셉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였다. 또 하옥될 때는 배문호 베드로와 서로 위로하면서 순교 원의를 다졌다. 그런 다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로, 고의진 요셉의 나이는 대략 19세였다.[4]
[註]__________
[0.1] 고시수(야고보, 1817-1866) : ‘하느님의 종’ 고시수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사람으로, 소년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고향에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과 함께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교우촌으로 이주해 교우들과 함께 살았다.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고의진 요셉이 아들이고, 죽산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문 막달레나[0.2]가 며느리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고의진 요셉이 체포돼 공주로 끌려가자, 고시수 야고보는 남은 가족과 함께 더 깊은 산 속으로 피신했다. 이때 며느리 문 막달레나는 겨울 산속에서 유복자를 출산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고시수는 그의 피신 소식을 듣고 산속까지 쫓아온 죽산 포졸들에게 며느리와 함께 체포돼 죽산 도호부로 압송됐다.
[0.2] 문 막달레나(1848-1866) : ‘하느님의 종’ 문 막달레나는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장성한 뒤 고의진 요셉과 혼인했다. 이후 그는 남편과 시댁 가족을 따라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녀의 남편 고의진 요셉이 가족 중 가장 먼저 체포돼 공주에서 순교했다. 문 막달레나는 시부모를 따라 산속으로 피신해 다니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당시 임신한 그는 겨울 산속에서 해산하게 됐으나 힘든 기색 없이 고통을 견디어냈다. 그러던 중 문 막달레나와 시아버지 고시수 야고보는 죽산 포졸들에게 체포돼 죽산 도호부로 압송됐다. 이때 그는 갓 태어난 자식과 헤어지는 극한의 슬픔을 이겨내고 순교의 길을 택했다. 문 막달레나는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고시수 야고보는 이미 순교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도호부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형벌을 가하지 않고 그냥 옥에만 가둬 두었다. 이후 그는 담당 관원이 바뀌면서 수원 유수부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1] 고길천(재호, 바르나바), 「사기점골 고제환의 비문」(필사본),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소장, 2006년 3월. 고길천(재호)은 고의진 요셉의 차남인 고제환의 후손이라고 한다.
[2] 『병인치명사적』, 6권, 2면. 이 내용은 전주 대성동(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살던 배경집 베드로가 증언한 것이다.
[2.1] 페롱(Stanislas Feron, 1827-1903) : 조선교구와 인도의 퐁티셰리(Pondichéry)에서 전교한 선교사. 한국성 권(權). 프랑스의 세즈(Sez)에서 태어나 그곳 대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수품 연령이 미달이었지만, 관면을 받고 1850년 12월 21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플레르(Flers)와 아르장탕(Argentan)에서 사목하였다. 1854년 10월 1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고 1년간 수련한 다음 1856년 1월 23일 프랑스를 떠나 14개월 만에 조선에 도착하였다(1857년). 베르뇌 주교가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다블뤼 신부를 그의 후임으로 삼을 때였다. 페롱 신부는 서천 산막동에서 황석두 루카에게 한문과 조선 문화를 배우고 나서 ‘몽소승천지방’, 곧 경상도 서북부지방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866년 3월 박해로 2명의 주교와 7명의 성직자가 순교하였다. 페롱 신부는 살아남아 한국 교회의 장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료 칼레(Calais)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조선에 남으려 하였지만, 외국 선교사를 잡으려는 박해가 지방에까지 뻗어 신자들의 희생이 커지자, 페롱은 칼레 신부와 함께 내포에서 산둥반도로 탈출했다.[2.2] 그 후,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배를 타고 조선에 밀입국하여 예산 덕산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게 된다. 이로써 전국이, 특히 내포 천주교는 ‘무진박해’(1868)로 피의 홍수를 겪게 된다. 그는 본국으로 송환되어 1870년에 인도의 퐁티셰리로 파견된다. 그곳에서 30년간을 선교하다가 조선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목하다 1903년 6월에 77세에 선종하였다.
[2.2] 병인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는 12명의 성직자 중 9명의 성직자가 체포되어 순교하고, 3명(페롱, 칼래, 리델) 신부가 난을 피해 아산 신창군 용당포에서 배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두 차례에 걸쳐 탈출하였다.
첫 번째 탈출, 리델 신부 : 11명의 용감한 교우들이 배를 마련하여 병인년 6월 29일 베드로 바오로 대축일에 신창 용당포를 출항하여 7월 7일 중국 해안에 도착.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 함대를 만나 함장 로즈(Rose) 제독에게 한국의 박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두 번째 탈출, 칼래·페롱 신부 : 프랑스 함대가 조선 해안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의 협조로 배를 마련하여 프랑스 함대가 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함대를 찾지 못하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신부들을 배로 탈출시키고 돌아온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는데 이들이 순교 후 성거산에 모셔졌다.
[2.3] 칼래(Alphonse Calais, 1833-1884)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 성(姓)은 강(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1860년 7월 5일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의 선교사로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하여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지역에서 전교하였다. 병인박해 당시 경상도 문경 지역의 한실 교우촌과 여우목은 칼레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였다. 병인박해로 3개월 동안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속에 피신해 있다가 1866년 10월 페롱(Feron, 權)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하여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프랑스에서 본당 사제로 있을 때, 그는 ‘언제 잠을 자는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늘 조선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본당 신부의 급여 전부를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서 조선을 위해서 쓰이게 했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주요 저술로는 ‘강 신부 훈계’(필사본)가 있다. 1866년 3월 30일 다블뤼 주교님이 순교하신 뒤 조선교회 치명자에 관한 기록은 칼레 신부가 썼다.
[3] 차기진,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 10-16면.
[4]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2번; 『병인치명사적』, 1권, 62면; 6권, 2-5면; 8권, 47면. 『병인치명사적』 1권의 내용은 진산 저귀골(현 충남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에 살던 배 안드레아가 증언한 것이다. 한편 『병인치명사적』, 8권에는 순교 당시 고의진 요셉의 나이가 배문호 베드로와 같은 19세로 나온다. 그러나 배문호 베드로의 나이는 23세가 분명하므로, 그와 동갑인 고의진 요셉의 나이도 23세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