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그건 또 새로운 간극이겠다
하므
하므, 너도 누구한테 화를 낸 적이 있어?
현이 먹던 떡볶이 국물에 내 새우튀김 김밥을 찍어먹으려다가 황당해서 젓가락질을 멈췄다. 이게 무슨질문이람. 우리가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너무 황당한 나머지 공기가 아주 많이 섞인 목소리가 뱉어졌다. 빠르게 빠르게.
에?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너 내가 화내는 거 한번도 못 봤어?
순간의 고민도 없이 없다고 답하는 현에 나는 그제서야 고민을 시작했다. 정말로 화를 한번도 안냈는지. 정말 없던가? 그러고 보면 목소리의 데시벨이 올라가는 화는 낸 적이 없었다. 그러게, 정말 없네. 나는 친구들과 있을때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도, 마음도 잘 없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나황당했던 것은 질문을 한 사람이 현이었기 때문이다. 현 앞에서는 가볍게 날라가는 웃음보다는 쓰고 무겁게 진동하는 눈동자를 장착하고 있을때가 더 많았다. 현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앞에서는 쓴 종류의나를 꺼낼 때에도 마음이 놓여서 그랬다. 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지는 못했더라도 나의'화'를 손쉽게 상상할 실마리는 충분했다. 게다가 지구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고개를돌려 옆을 보니 덤덤하게 떡볶이를 먹는 현이 있었다. 늘 나를 어떤 식으로든 헤집어놓고 본인은 덤덤한편이었다.
덤덤한 사람, 호들갑을 잘 떨지 않는 사람.
아 그리고, 화를 내지 않는 사람.
그러고보니 있었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지구에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냉큼 물었다.
"그러는 너는? 화를 언제 내?"
현은 별달리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자기는 화를 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화는 아무튼 무언가를 분출하는 거잖아"
뒤에 설명이 없어도 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3초에 주어진 에너지 값이 30이면, 1초에 10씩 균등하게 나누어 쓸만한 사람이었다. 시험이 내일인데 공부를 못했으면 끝까지 안할 사람이지, 나처럼 밤을 새서 커다란 에너지를 한번에 몰아쓰는 짓은 잘 안했다. 신이 난다고 갑자기 길거리를 있는 힘껏 달리고는 숨을 헉헉 몰아 쉴 사람도 아니었다. 아마 그런 그녀에게 마음을 몰아쓰는 방식은 상상하기 어렵겠지. 대신 현은 자신의 화는 모두 슬픔으로 전이된다고 했다. 아마도 현은 전이된 슬픔을 정확하게 계량되어 밤마다 조금씩 나누어 곱씹어졌을 터였다.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아무튼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옆자리에서 발견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다시 나의화를 생각했다. 보통 나의 화는 그 배경장소가 집이었다. 화에게 발바닥이 있어서 발자국이 찍힌다면. 내 작은 방안에는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수도없이 찍혀있을 것이다. 동생의 방문앞에는 "쾅!" 방문이 닫히는 마찰음과 함께 진한게 몇개 찍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현관문에서 얼마 못 가 자취를 감추겠지. 내 화의 동선은 짧고 몇평 안되는 우리집에서 그 걸음을 멈추니까, 너가 상상하기 어려웠을수도있겠다고 현에게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내가 아는 너는 '그런' 너니까.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대충 알긴 안다. 현이 말하는 그런 나. 무엇보다 다정함의 온도가 제법 높은 나.
친구들에게 애정을 전한때면 뜨거운 온도의 단어들에 손을 데일 두려움을 잊고 단어를 고르는 나.
아주 작게 떨리는 눈동자를 포착하는 나.
"그런데 그런 나중에 너한테는 가장 안 그런 편인데. 그래서 너가 나한테 화가 존재하냐는 듯 물었을 때놀랐네."
그런 나와 그렇지 않은 나. 가족들이 아는 나랑 친구들이 아는 나는 그 간극이 제법 크다. 어느쪽이 더 우선이 되는 '나'인 헷갈려서 애를 써야했던 시기도 있었다. 현은 간극 작은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가족사이의 간극뿐만 아니라 이 친구와 저 친구 사이에서의 현도 현이 에너지를 쓸 때처럼 어느정도 정교하게비슷했다. 그래서 아마 내가 나의 화를 상상할만한 실마리를 충분히 제공했다고 믿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아는 나에 충실하게 자신이 모를 때의 나를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과 달리 간극이 몹시도 큰 사람이다.
그런 나와 그렇지 않은 나로는 설명되지 않은 아주 복잡한 형상의 간극으로.
화를 내는 나와 화를 내지 않는 나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달랐다.
"그런데 있지. 내가 독립을 하면, 내가 지금의 가족들과 살지 않는다면, 그럼 내 화는 어디로 갈까? "
그럼 그 '나'는 어디로 갈까?
"글쎼. 새로운 가족을 만난다면 다시 생기지 않을까?" 현이 답했다.
그건 새 '화'일텐데, 그건 새 '나'일텐데.
속으로 생각했다.
-
그래서 나는 아마 30kg를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않을 듯하다.
집 앞에서 몇발자국만 떨어져도 그런 나와 이런 나로 나누어지는 내가.
우주정거장에 도착해서 새 땅을 밟았을 때, 누구일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도 나는 도통 모르겠다.
집에서는 화내는 얼굴을 꺼낼 줄 안다. 일그러지게 못난 얼굴을.
현 앞에서는 쓴 웃음을 꺼낼 줄 안다. 많은 이야기를 꾹꿈 눌러담은 웃음을.
서혜 앞에서는 너무 달아 혓바닥이 저린 상상을 꺼낼 줄 안다. 몹시도 어려 몹시도 늙은 농담과 함께.
노아 앞에서는 떡진 머리를 꺼낼 줄 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
나는 이런식이다. 관통되는 나보다 관통되지 않는 내가 더 많다.
마치 누군가들에게 조금씩 맡겨둔 '나'가 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서혜를 오래 보지 못했던 시기에 나는서혜에게 맡겨둔 일부의 나를 까먹는 기분이 들어 불안감에 휩싸였다. 서혜에게 그런 말들을 문자로 보내니, 자기가 보따리에 꽁꽁 싸서 잘 맡아둘 터이니 걱정말고 할일을 하다가 돌아오라는 답신이 왔다.
그렇게 이런 나와 저런 나. 그 일부의 나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사람에게 위탁되어져있다.
근데 그 위탁물들을 다 두고 지구를 떠나라니. 내가 가진 아주 조금의 나만 가지고 떠나라니.
위탁된 짐들은 이제 완전힌 내것은 아니어서. 위탁을 부탁한 그들과 한 몸이어서, 30kg는 훌쩍 넘는다.
그 몸들을 다 지구에 둔다. 가족들과 현과 서혜에게 맡겨둔 보따리를 남겨놓고. 이제 다시 찾으러가지못한다는 긴편지만 남겨두고.
남겨만 두고 챙기지는 않는다. 고작 몇개의 사물로는 무엇도 대신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그렇다면 어차피 새로운 땅에 내린 그 사람은 새사람이어서. 새 사람에게는 새화와 새사람과 새슬픔이그리고 헌 그리움이 오겠지 싶어서. 빈 두손으로 우주정거장에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