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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의 명성 [소(蘇)주교 심포지엄 2차 자료]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1. 머리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1831년 9월 9일 칙서에 “그대가 조선에 들어가 조선의 신입 교우들 의 일을 맡아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을 때, … 이 칙서로써 지금 그대를 저와 교황청의 자의로 조선 대목구장으로 선택하고 임명”한다고1) 나와 있듯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스스로 전교를 자원하여 서양인 선교사제로는 가본 적이 없는 낯설고 위험한 땅, 천주교가 금지되어 탄압받는 조선으로 나아갔다. 그의 앞에는 예상이 되었던, 또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들이 많았지만, 그모든 것을 극복하면서 조선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고, 그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병으로 선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전교를 자원한 이래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하다가 선종할 때까지 자신이 속한 파리외방전교회를 비롯한 여러 전교회에 속한 선교사제들과 중국 신자와 신부, 조선 신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났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주교의 전교 의지와 사목적 판단(결정), 개인의 인품과 신심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는데, 주교 본인의 기록[서한, 여행기]뿐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주교를 만나본 이들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주교에 대한 이들의 소감과 평판은 ‘주교의 명성’이 되어 당시 신자들과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은 주교의 삶과 죽음, 이후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데 중요한 전거가 되며, 시복시성 수속 과정에서도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이 발표문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소감과 평판이 남겨진 자료를 시기별로 정리하면서 그 내용과 특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했던 시기가 주요 대상이기는 하지만, 대목구장 임명 이전 주교의 삶과 활동에 대해서도 소감과 평판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이 내용도 포함하여 소개하겠다. 2장에서는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출발하기 이전 시기(1832년 7월 이전)를, 3장은 조선 임지로의 여정과 입국 직전 시기(1832년 8월부터 1835년 10월까지)를, 4장은 1835년 10월 20일 선종 이 후에 작성된 기록을 대상으로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소감과 평판을 남긴 자료 중에서도 주교와 함께 활동했거나 그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동료 선교사제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가장 가까이서 그의 삶과 인품, 활동을 살펴볼 수 있었던 동료들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풍부하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료 선교사제를 비롯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담은 글[선종 이후 작성]도 있지만, 주교의 개인적 성품과 생활, 사목 결정에 대한 소감과 평판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소개함으로써 주교에 대한 다층적 평판을 이해하고, 주교의 명성이 어떤 특성을 가지면서 형성되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조선대목구장 임명과 임지 출발 이전’ 시기에 대한 평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제이자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 이전에 선종했기 때문에 조선교회 내에서는 주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직접 만나본 신자도 없었다.
같은 전교회 동료 선교사제들은 동아시아 지역 선교사제로서 또는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났기 때문에 그 이전에 삶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대목구장 임명, 더 정확히는 선교사제로서 프랑스를 떠나기 전의 생애와 평판에 대해서는 주교의 고향인 카르카손 교구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카르카손 교구청 고문서고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과 송별기2)는 그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교와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었던 동료가 작성했을 것이 틀림없다. 두 글은 주교의 선종 소식이 알려진 후 작성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추모’의 감정이 깔려 있지만, 주교에 대한 평판이 객관성을 잃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글 중에는 주교의 성격이나 행위가 ‘긍정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동시에 주교만의 특성이 서술되어 있어 후대의 사람들이 주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신학생과 신부로서 브뤼기에르는 교사와 동료들에게 총명하고 신심이 깊고 정직하고 학식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부제품을 받았을 뿐인데 1815년 21세의 나이로 소신학교 교사로 채용되었고, 1819년 26세의 나이에 카르카손 대신학교 철학 교수로 취임하고 그해 주교좌 성당 명예 참사 위원이 되었다.3) 나폴레옹 제정 시기에 탄압을 받다가 재건되던 당시 프랑스 교회 상황 속에서 신학교의 교수 인원이 부족했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의 지적 능력과 학식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데다 독립심이 강해서 그의 장상이 언젠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브뤼기에르가 언젠가 주교로 발탁된다면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전진하리라’와 같은 문장 표어를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
그는 엄격하게 고신극기를 실천했다.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기 전 카르카손 대신학교(1819~1825
년 재직)에서 보낸 마지막 한 해 동안 그는 빵과 물만 먹고 살았는데, 그래도 건강은 좋은 편이었다. 신부가 사용한 옷장에는 빛나는 십자가가 있었고, 그 십자가 위에는 그리스도 약자가 새겨져있었으며, 양쪽에는 성모 마리아 약자와 선교사들이 타는 배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쪽에는 파리외방전교회 표어 “너희는 가서 만백성을 가르쳐라.”(마태 28,19 참조)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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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양모·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약전은 375~385쪽, 송별기는 385~398쪽에 번역본이 실려있다.
3)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80~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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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첫째 인용문(약전)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기 신념과 고집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자기 신념을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는 성격이 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조선 입국을 위해 그토록 용맹하게 나서고 주변의 만류에 굽히지 않았던 주교의 특성이 신학교 시절부터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별기에서도 주교에 대해 “앞으로의 시련이 크다고 해서 뒤를 돌아다보거나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고 평가했다.5)
둘째 인용문(약전)을 통해 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선교사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로 가기 전에 1년 동안 빵과 물만 먹는 ‘고신극기’를 실천했는데 이 역시 선교사제로서 합당한 능력을 갖추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의 전교 열정이 대단했다는 것은 송별기의 다음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려면 많은 협조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카르카손 신학생들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
곧고 힘차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브뤼기에르 신부는 자신이 시작하려는 선교 사업에 참으로 합당한 능력을 갖추고자 완덕을 추구하였다.……그래서 주님의 은총을 받고자 기도와 고행을 일삼았다.6)
선교사제의 염원이 이루어져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5년 9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고, 약 5개월 간 수련을 거친 후 1826년 2월 파리를 떠나 동아시아 임지로 출발했다. 처음 임지는 베트남의 코친차이나 대목구였으나 마카오에 도착한 후 시암[현재 태국]대목구로 변경되었다. 1827년부터 방콕에서 사목활동을 했고, 1829년에 조선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그해 시암대 목구의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후 페낭으로 이동하여 페낭과 인근 지역의 사무를 담당했다. 선교사제로서 주교는 열성적으로 사목활동에 나섰는데, 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달레 신부가 편찬한 『한국천주교회사』 중권에는 시암대목구 선교사제로 브뤼기에르가 “죽을고비에 이른 비신자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일”을 즐겼으며, 이를 위해 “경험 있는 대세자(代洗者)들의 파견을 격려하고 도와줌으로써 최초의 6개월 동안 어린이 1,600명에게 대세를 줄 수 있도록 하였다”7)고 나온다.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던 샤스탕 신부 역시 1832년 7월 서한을 통해 “플로피낭[페낭]에 온 지 1년 남짓 되는 갑사 명의주교님[브뤼기에르 주교]의 불굴의 열정을 널리 축복해 주신 자비 의 아버지[주님]께서는 이 죄인들 가운데 4분의 3이 넘는 이들을 무질서에서 끄집어”냈다는 사실8)을 기록했다. 비신자에 대한 전교 사업에 주교가 열성적으로 임해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페낭에서 열성적으로 사목활동을 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자신이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조선 입국을 위한 여정을 준비하고 그해 8월 페낭을 떠났다. 이때 샤스탕 신부 역시 조선 전교를 자원했지만, 주교는 일단 대기하라고 지시하고 홀로 출발하였다. 나중에 주교의 길을 따라 샤스탕 신부도 조선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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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76쪽.
5)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89쪽.
6)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92~393쪽.
7)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221쪽.
8) 샤스탕 신부가 1832년 7월 12일 플로피낭에서 사촌 알르망 신부에게 보낸 서한(A-MEP, Vol.577, ff.648~652) ; 수원교회사연구 소 편찬, 『샤스탕 신부 서한』, 수원교회사연구소, 2019.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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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샤스탕 신부의 서한을 보면 자신이 조선 선교사제가 된 이유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권유였다고 나온다. 그러면서 주교가 자신을 따라오면 큰 상[순교의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고 적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께서 저에게 조선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주교
님은 저의 마음을 끌어보시려고 [“자기를 따라오면]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상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십니까? … 이 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수도 없이 많은 고초를 겪고 난 다음에 천주님께서 그 은총을 주시면 순교하는 것입니다. [순교의] 고통이 본능적으로 싫은 것이지만 용맹한 마음을 가지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라고 하는 이 사람[샤스탕 자신]은, 아무리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해도, 천주님께서 도와주셔서, 그 일을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9)
이를 통해 샤스탕 신부에게 전교의 열정과 순교 신심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신부의 글을 통해 주교 역시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선교사제였다는 점, 적어도 주교에 대한 신부의 소감(평가)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조선 임지로의 여정과 입국 직전 시기에 대한 평판
페낭을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대목구장 임명 칙서를 받고, 본격적으로 조선 입국을 위한 여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사천 임지로 가던 모방 신부는 주교에게 감화를받아 조선 전교를 자원했고, 이후 그도 조선 파견 선교사제가 되었다. 한편, 신학교 시절부터 조선 전교에 관심을 가지던 앵베르 신부도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대표부에 서한을 보내 자 신도 조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뒤에 앵베르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주교의 선종이 확인되었기에 자동으로 제2대 대목구장이 되었다.
조선교회와는 어떠한 관련도 가지지 않았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제로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해로와 육로를 통해 중국을 관통해서 이동했는데 다른 전교회와 선교사제들, 중국 신자들의 협력이 필요했다. 포르투갈 관할의 북경교구와 남경교구 외에 복건, 산서대목구의 선교사제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우호적이었고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다. 반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북경교구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주교는 북경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남경교구장]가 중국 신자들의 영향 아래 자신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전교를 맡기 위해서는 조 선과 국경을 맞대는 요동·만주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 관할 지역이 되어 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교의 견해는 로마교황청 포교성[현재 복음화부]의 중국전교정책의 방향과 부합했기 때문에 1838년 요동대목구[1840년 만주대목구와 몽골대목구로 다시 분리] 설정으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북경교구의 전교관할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경교구와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자신의 대리자 왕 요셉과 조선 신자와 의 북경 회담을 통해 자신의 입국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로서 조선 입국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다른 선교사제들도 신자들의 도움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신자와의 약속을 통해 그해 겨울 조선 입국이 예정되었고, 10월 7일 서만자를 출발했지만 마가자 교우촌에서 20일에 선종했다.
그러나 그가 개척한 길을 통해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이후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한국) 천주교회를 관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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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샤스탕 신부가 1833년 5월 20일 플로피낭에서 부모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27) ; 『샤스탕 신부 서한』,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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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과정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했던 사실, 북경교구장과의 관계, 만주 선교지의 분리 요청 등에 대한 동료 선교사제들에 소감과 평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들 동료들은 주교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주교에 대한 다양한 소감과 평판을 확인할 수 있고, 좀 더 다층적으로 주교의 삶과 활동, 사목 활동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노력에 대한 소감과 평판
1833년 9월, 원래 의도했던 북경행을 포기하고 산서대목구로 가서 1년간 머물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10월에 프랑스 라자로회가 관할하던 서만자로 옮겨가 계속해서 조선 입국을 모색했다. 서만자에서 함께 거주했던 물리 신부[나중에 몽골대목구장으로 임명됨]는 주교의 조선 입국 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분은 중국을 건너질러 오는 동안 빈궁과 역경에 대 한 험한 훈련을 겪었다. … 인내와 청빈과 길잡이들에게 복종하는 데 있어서 아주 훌륭한 모범 을 보여주었다.
이 지방에 계신 세 분 주교를 포함한 점잖은 분들은 그 분의 고귀한 계획의 성공에 대하여 실망을 할 수도 있지만, 그분만은 또 한 사람의 아브라함 모양으로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가질 줄 안다”10)고 평가했다. 즉, 조선으로 가는 여정이 절망적으로 보일지라도 주교는 아브라함처럼 꺽이지 않는 희망을 품고, 모범이 되는 신심과 인품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냈던 것이다.
1835년 1월, 조선 신자와의 만남을 통해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여정이 확정 됨으로써, 페낭부터 시작된 주교의 기나긴 여정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단계(조선 내 활동)를 앞두게 되었다. 당시 조선 신자 대표들은 주교의 지시에 따라 주교와 그 후임 선교사제의 입국을 돕겠다는 서한을 작성했는데, 이 글을 통해 주교에 대한 인식[평판]을 확인할 수 있다.
서양인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에 난색을 표했던 조선 신자들은 자신의 입국을 방해하면 파문하겠다고까지 언급한 주교의 입국 의지에 결국 ‘순명’했고, 주교의 지시에 따라 교황 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작성했다. 이때 신자들은 주교에 대해 ”생사와 위험을 돌보지 않고 뜻을 굳게” 하여 “허원 하신 바”(조선 입국)를 이루어려고 하니 그 “불과 같은 사랑과 충정에 감읍했습니다”라고 적었다.11) 이를 통해 주교의 전교 열정과 의지가 조선 신자들에게도 강렬하게 전해 졌고, 이는 조선 신자들을 향한 ‘불 같은 사랑’이며 천주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이라고 이해된 것이다.
한편 서만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머물렀던 모방 신부는 주교의 조선 입국 계획이 확정된 후 그때까지 이루어진 조선 입국 노력[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에 대해 자신의 소감을 서한에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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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천주교회사』 중, 321쪽.
11) 유진길, 조신철, 김 프란치스코가 1835년 2월 16일(음 1월 19일) 북경 남당에서 교황 그레고리오16세에게 보낸 서한
12) 모방 신부가 1835년 8월 10일 서만자에서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60, ff.47~50)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모방 신부 서한』 (미간)
13) 앵베르 주교가 1837년 10월 10일 산서에서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4, ff.105~106) ; 수원교회사연구소 편찬,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180~181쪽.
14)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 서울에서 포교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SOCP, Vol.77(1841~1848), ff.165~168) ; 『앵베 르 주교 서한』, 356~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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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때늦은 후회라고 하면서 아쉬웠던 점을 들었는데,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이라 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단순히 조선의 성무 집전자로 소개했었더라면, 아니면 다른 일반 사제가 주교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가려 했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12) 앵베르 주교는 사천대목구 선교사제로 있을 때 조선대목구 설정 소식을 듣고 그때부터 브뤼기에르 주교와 마카오 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자신을 조선 선교사제로 뽑아 파견해줄 것을 간청했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와 여러 차례 서한을 주고받았지만,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된 앵베르 주교는 사천 지역을 떠나 섬서-산서-하북-내몽골-만주 지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가는 도중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고, 그중 주교의 ‘특이한’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13) 아마도 현지 풍속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 것 같다. 사제의 모관(毛冠, biretta) 사용에 대한 주교의 불허 방침에 대해서도 앵베르 주교는 비판적이었다. 중국에 오래 살았던 앵베르 주교는 모관 사용이 타당하고 단정하다고 생각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금지 조처를 따르는 모방 신부가 강력하게 항의해서 모관 사용 여부를 포교성에 문의했던 것이다.14)
2) 브뤼기에르 주교가 포교성에 보고한 제안에 대한 소감과 평판
앞서 언급했듯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안정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전교를 맡기 위해서는 조선과 국경을 맞대는 요동·만주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 관할 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요동·만주 선교지의 분할을 포교성에 요청했다. 이러한 주교의 제안에 대해 동료 선교사제들은 한편으로 주교의 판단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제안에 대해 ‘역효과’[포르투갈 선교사제와의 갈등]가 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15) 그렇지만 불리할 수도 있을 주교의 결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해 보려고 했다.16)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선임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교 방침을 계승하면서도 때로는 이 방침과 다른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만주 지역 관할권을 요청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 앵베르 주교는 그 요청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 입국 여정을 떠나기 전 사천 선교지에서 포교성에 보내는 보고 서한에서 “오랫동안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분쟁의 원인이었던 만큼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든 주교나 선교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포교성이 이 청원에 대한 답변을 미루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17) 며칠 후 앵베르 주교는 마카오대표부에 보낸 서한에서는, 북경 교구와 조선대목구의 관할권을 서로 보장하기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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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샤스탕 신부가 1836년 3월 4일 산동에서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와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f.63~64) ; 『샤스탕 신부 서한』, 284~285쪽.
16) 샤스탕 신부가 1836년 5월 1일 요동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부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f.65~68) ; 『샤스탕신부 서한』, 296~297쪽.
17) 앵베르 주교가 1837년 6월 16일 사천에서 포교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SOCP, Vol.76(1833~1840), ff.624~625) ; 『앵베르 주교 서한』, 98~101쪽.
18) 앵베르 주교가 1837년 6월 18일 사천에서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4, ff.89~91) ; 『앵베르 주교 서한』, 150~151쪽.
19) 앵베르 주교가 1837년 12월 8일 묵덴[심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과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4, ff.101~103) ; 『앵베르 주교 서한』, 214~217쪽.
20)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3일 서울에서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4, ff.133~136) ; 『앵베르 주교 서한』, 420~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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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입국 여정에 나서 요동·만주 지역에 들어와 현지 상황을 파악하게 된 뒤에 앵베르 주교의 입장은 바뀌게 된다. 여전히 신중한 태도였지만, 우려했던 포르투갈 선교사제와의 갈등 요소가 줄어들고 프랑스 라자로회외의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면 만주 선교지의 분할과 파리외방전교회의 담당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19)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후 외부와의 연락 관계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를 위해서도 만주지역의 관할이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즉, 만주 지역에 연락소를 설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 지역의 선교를 맡아 그곳 신자들의 신임을 얻는다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관할권이 없다면 신자들의 신임을 얻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보았다.20)
3)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한 소감과 평판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 여항덕 신부가 자신의 조선 입국에 협조하지 않거나 방해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두 주교는 직접 만나 이야기해본 적이 없으며, 서신을 왕래하거나 대리자를 통한 간접적 만남만이 있었다. 반면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는 북경에 들어가 직접 페레이라 주교를 만났고, 그가 자신들을 도와주는데 진심이라고 파악했다. 특히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페레이라 주교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소감을 밝히면서 둘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랐다.
샤스탕 신부는 페레이라 주교가 조선대목구 선교사제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가 페레이라 주교를 오해했었다는 점을 밝혔다. 만약 브뤼기에르 주교가 페레이라 주교의 호의를 제대로 알았다면 만주 지역의 관할권을 포교성에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했다. 실제로 페레이라 주교는 그 지역 신자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를 도와달라는 요지의 서한을 여러 번 보냈고,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 자신도 모두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21)
이러한 샤스탕 신부의 서한 내용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여행기와는 차이가 난다.
샤스탕 신부는 페레이라 주교에 대한 악감[편견]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물론 마카오대표부의 르 그레주아 신부에게도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불식시키려고 노력했다.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페레이라 주교에 대한 편견을 모두 버리라고 요청했다.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생전에 자신에게 “남경교구장을 비난하는 글을 포교성으로 보냈는데, 그것을 취소해야 하느냐?”
물어보았을 때에, 샤스탕 신부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샤스탕 신부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 같다.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페레이라 주교에 대해 비난했던 글을 취소한다는 서한이 작성되지 못했거나 작성되었다 해도 다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제에게 전해지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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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샤스탕 신부가 1836년 5월 1일 요동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부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f.65~68) ; 『샤스탕 신부 서한』, 294~295쪽.
22) 샤스탕 신부가 1836년 9월 16일 산동에서 마카오 대표부 르그레주아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f.71~73) ; 『샤스탕 신 부 서한』, 314~315쪽.
23)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1월 24일 경기[서울]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과 사천, 통킹, 코친차이나대목구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4, 쪽수 불명) ; 『앵베르 주교 서한』, 238~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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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다음에 작성한 보고 서한에서 페레이라 주교가 조선대목구 선교사제[브뤼기에르 주교, 모방 신부]의 조선 입국을 방해했다는 소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반박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다.
페레이라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을 방해하고 북경에 거의 도착한 주교를 죄수처럼 구금했다는 이야기, 조선 신자의 연락원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면담을 주선하지 않고 조선 신자들에게 조선대목구장을 맞아들이라는 충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모방 신부가 북경에서 페레이라 주교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며, 주관적으로 상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앵베르 주교가 강조했다.23)
이러한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의 서한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와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와의 불편한 관계가 페레이라 주교의 비협조와 방해에서 기인했다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주장이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의 오해와 편견에 기인 했을 가능성도 있다. 페레이라 주교와 라자로회 선교사제들의 서한 등의 자료를 새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4. 선종 이후 주교에 대한 추모와 평판
조선 입국 여정의 마무리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결국 조선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대신 급보를 받고 서만자에서 모방 신부가 주교의 장례식을 치르고 주교 대신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산동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조선 입국을 대기하고 있던 샤스탕 신부도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들었다. 이외에 산서대목구의 도나타 주교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음을 전했고, 프랑스 고향의 부스케 신부는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소감을 남겼다. 이들은 추모의 감정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선교사제로서 주교의 삶과 죽음, 활동에 대해 평가했다.
조선으로 가는 길을 터놓으시느라고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모세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으시려고 [천국으로] 불러 가셨습니다.24)
천주님께서는 주교님을 조선에 들어가라고 부르시기보다 주교님이 아주 현명하게 동료로 정하신
저희 두 사람을 위해서 조선에 들어가는 길을 개척하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25)
샤스탕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나서 그의 선종은 ‘천주님의 뜻’이라고 해석했다. 주교에게 주어진 역할은 ‘조선으로 가는 길을 터놓은 것’[조선 입국로 개척]이고 마치 ‘모세’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으로 불려갔다고 보았다.
고행과 기도는 그분이 가장 좋아한 덕목이었습니다. 주교님은 매주 위령 성무일도를 드리셨고, 날마다 묵주기도 한 꾸러미를 바치셨으며 여기에 더하여 성모 칠고(七苦) 묵주기도와 성모님을 공경하는 다른 여러 가지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또한, 날마다 특별히 우리의 고된 [조선 입국] 시도가 성공하기를 청하는 특별 기도와 또 전교(후원)회 회원으로서 지원해주는 자비로운 프랑스의 신자들, 선종한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 모두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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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샤스탕 신부가 1836년 3월 4일 산동에서 마카오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와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64) ; 『샤스탕 신부 서한』, 284~285쪽.
25) 샤스탕 신부가 1837년 9월 15일 서울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신부들과 마카오대표부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56, f.97) ; 『샤스탕 신부 서한』, 392~393쪽.
26) 모방 신부가 1835년 11월 9일 서만자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60, f.55, f.60) ; 『모방 신부 서한』 (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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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주교님은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을 조선 왕국 전체의 주보 축일로 정하겠다고 제게 말
씀하셨습니다.26)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큰 슬픔과 고통에 빠졌는데, 한편 평소 주교의 일상을 되돌아보면 갑자기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즉 혹독한 여정 속에서도 고행과 기도를 매일같이 수행했으며, 출발 전에도 계속 두통을 앓았다고 했다. 이러한 모방 신부의 회고를 통해, 잘 드러나지 않았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심과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다. 다른 프랑스 선교사제들도 그렇지만,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성모 신심이 깊어 ‘성모 승천 대축일’ 을 조선대목구의 주보 축일로 정하겠다고 했다.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천주님께서는 말하자면 조선의 문을 여는 일을 하도록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택하셨습니다. 당신이 마련하신 선교사제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서 조선에 신앙을 전파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약속의 땅’이라 스스로 부르곤 했던 그 나라[로 들어가려던 순간 주님께서 그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주님께서 맡기신 모든 달란트를 잘 키웠습니다. 주님께서는 명령과 복음의 권고의 길을 열심히 달린 이들에게 약속하신 영원하고 차고 넘치는 보상을 그분에게 주시고자 도중에 그분을 데려가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저의 친애하는 [브뤼기에르] 갑사 주교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르고자, 저[모방 신부]는 오늘 조선 국경을 향해 출발하여, 고인이 되신 갑사 주교님을 대신하여 조선에 입국할 것입니다.27)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처럼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은 천주님의 뜻이며, 주교는 ‘조선의 문을 여는 일’을 하도록 선택되었고, 그 자신이 택한 선교사제들이 그 문으로 조선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방 신부 자신이 주교를 대신하여 조선으로 입국 할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모방 신부가 본 브뤼기에르 주교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는 용기를 가지고 오직 조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실천했고, 스스로 ‘약속의 땅’이라고 부른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순간 천주님에게 부름을 받아 영원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을 관통하여 조선으로 올라갈 때 브뤼기에르 주교와 여정을 함께 한 적이 있고, 산서대목 구에서 주교와 함께 거주했던 도나타 주교는 주교의 부음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교를 추모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여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쓰셨습니다. ‘나는 외지 타타르[요동·만주]에서 죽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주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많이 겪으셨으니, 큰 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교님이 천국에서 당신이 맡으셨던 선교지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신다는 확고한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28)
프랑스 고향의 부스케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무척 가슴이 찢어졌으나 하늘에서 그분이 이미 영광의 관을 썼을 것을 소망하고 확신하면서 고통을 삭였습니다. 저는 기도에서 그분을 위해 기도한다기보다 그분께 기도하게 되었다고 느꼈습니다.”라고 주교를 추모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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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모방 신부가 1835년 11월 9일 서만자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서한(A-MEP, Vol.1260, f.55, f.63, f.65) ; 『모방 신부 서한』 (미간행)
28)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59~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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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이상과 같이 동료 선교사제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소감과 평판을 정리해 보았다.
동료 지인의 약전과 송별기를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신학교 시절부터 해외 전교를 갈망하 면서 고신극기를 통해 미래의 선교사제로서 자신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주교는 소년 시기부터 자기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고집이 셌는데 이러한 성격은 뒤에 견고한 의지와 용덕을 갖춘 선교사제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앞에 놓여진 수많은 시련에 굴복하지 않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대리자 왕 요셉을 통해 서양인 선교사제를 꺼려하던 조선 신자들에게 대목구장의 권한을 행사하여 주교의 입국을 관철시켰다.
조선 신자들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 의지를 확인하고 주교의 지시에 순명했는데, 그들이 작성한 서한을 통해 신자들이 주교의 전교 열정과 신자들에 대한 사랑, 천주님에 대한 충정에 대해 감읍했음을 알 수 있다.
플로피낭[페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교수였던 샤스탕 신부는 같이 플로피낭에 체류하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교 열정과 그 성과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권유로 순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조선 선교사제의 길을 갔다고 말했다.
모방 신부는 복건 지역과 내몽고 서만자 지역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신앙과 전교 열정을 지켜보았다. 주교는 혹독한 여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건강을 잃었지만, 매일 고행과 기도에 매진했으며 깊은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모방 신부 서한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조선 입국을 앞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천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천주님이 주교에게 부여한 역할[임무]는 마치 ‘모세’처럼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문]을 열고 그 자신을 따랐던 선교사제들을 대신 입국시키는 것이었고,
‘모세’와 같이 ‘약속의 땅’ 앞에서 먼저 부름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는 것이었다.
조선 입국을 위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노력에 대한 찬송과 더불어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모방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지적을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요동·만주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야 한다고 포교성에 제안]에 대해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는 동료 선교사제인 포르투갈 선교사제들과의 갈등을 우려했고, 북경교구장 서리 겸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에 대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인식에도 오해가 있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시대에 살면서 주교의 조선 입국 여정에 참여했거나 인연을 맺은 조선 신자, 동료 선교사제들의 소감과 평판은 주교의 명성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주교의 삶과 활동, 인품과 업적을 고찰할 때 핵심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시련과 발전이라는 격변기를 겪게 되었는데,주교에 대한 기억과 평판은 기록으로만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다시 소환되었다. 대목구의 설정과 발전의 기초를 닦은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한편 만주 마가자에 있던 그의 유해를 조선 땅으로 모셔오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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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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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회 언론 기사나 이장기를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심과 활동이 재조명되었고, 그의 명성이 퍼져나갔다.
조선대목구 설정 150주년이 되는 1981년에도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기억이 다
시 소환되었고, 150주년 기념 미사가 용산 성지자 묘역 브뤼기에르 주교 모 앞에서 봉헌되었다.
2004년 차기진 박사가 마가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원 묘소 자리를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개포동성당을 중심으로 한 주교에 대한 현양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이 현양 사업은 개포동본당 뿐 아니라 현재 묘역이 있는 용산본당, 서울대교구로 확산되었으며, 2031년 조선대목구 설정 200주년을 앞둔 2024년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 수속 과정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 죽음, 죽음 후의 명성(평판)에 대한 학술 적 검토와 현양 사업이 전개되고 있는데, 앞으로도 조선대목구 선교사제 외에 다른 동료 선교사제, 라자로회 선교사제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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