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의 아버지

그리운 나의 아버지 정동식 나는 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아버지도 조실부모를 하셨으니 어이 가능한 일이랴. 그렇다고 어린 시절에 왜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외가댁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내외는 물론, 큰할머니가 계셔서 친할매사랑을 충분히 메워 주었다. 큰할매는 외할머니의 엄마이신데, 우리는 외할머니와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 유난히 나를 좋아하셔서 외갓집에 가면 큰할매 방에서 재미있게 놀고, 잠을 자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친가는 영천시 자양면, 태어나신 곳은 경산시 용성면이다. 아버지의 유년시절 얘기를 많이 들은 적은 없지만, 뿌리를 찾기 위해 오천과 영천, 경산을 오가며 수집한 자료로 미루어 보아, 증조할아버지 윗대는 영천에서, 할아버지는 경산에서 사셨고, 할머니는 큰아들의 부산근무를 계기로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정리가 된다. 나는 아버지와 일곱 살쯤 처음 세상 구경을 했다.태평양의 서쪽 끝, 6월의 젊은 태양이 내리쬐는 부산 앞바다는 찬란한 은빛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초장동 산마루의 빨간 도단집! 아버지가 타향살이 삼십 년 만에 처음 장만하신 집이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한 동안 일요일엔 어김없이 내 손을 잡고 그 집으로 향했다. 언덕 위의 집이어서 전망은 일품이었다. 오륙도를 넘나드는 뱃고동 소리와 하늘로 치솟은 영도다리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명소였다. 최근에는 영도다리 축제에서 야간 도개를 한다니 예전 못지않게 인기가 여전한 모양이다. 아버지는 언덕 위 빨간 집을 보러 가실 때 나만 계속 데리고 다녔다. 내가 예뻐서라기 보다 데리고 다니기에 딱 좋았던 나이였으리라 짐작한다. 길을 가다 지인을 만나면 “제 큰 아들입니다.” 하며 꼭 소개를 하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들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포스트맨이셨는데 우체국까지 평생을 걸어 다니셨다.하루 종일 걷는 직업이어서 잠자리에 누우시면 끙끙 앓으신 적이 많았다. 매일은 아니지만 잠들기 전에 아버지의 피곤한 다리를 풀어드리곤 했는데 이 일은 우리가 용돈을 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1회에 1원씩 아버지 봉급날인 25일에 결산을 했다. 물론 아버지께서 정한 셈법이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시간에 나부터 30분씩 아버지의 두 다리를 주무른다. 다음은 남동생, 여동생, 순으로 6살 이상이면 의무적으로 참가를 허용(?)했다.아버지는 “아이구 시원하다.”를 연발하시며 스르르 잠이 드셨다. 자식들의 고사리손 안마가 얼마나 시원했으련만 어린 시절(6살경) 부모를 여의고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자신이 편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간을 통해 자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려 하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의 얘기는 교통사고 전과 그 후로 나뉜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새해를 불과 3일 남겨 둔 12월 29일!연탄을 갈아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잠자리에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추운 겨울이었다. 이불 밖으로 내뿜는 날숨에 김이 서릴 정도로 방은 서늘했다. 우리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어머니와 대화하는 소리를 꿈속에서 들었다.“아주머니! 아저씨가.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 이부자리 준비해서 저하고 병원으로 가입시더.” 정말 꿈 속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해를 보내고 33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66개월가량의 치료를 요하는 중상이었다. 버스에 부딪혔다고 한다. 머리도 다치고 성한 데가 없었다. 나는 3개월을 병원에서 통학했다. 회복하는 데는 외할머니의 인분 조달 정성도 한몫했다.. 퇴원은 하셨지만 이후 아버지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많이 달라지셨다.. 직장에서 가끔 실수도 하시고, 즐겨 드시는 막걸리 주량도 늘어나고, 가끔 사람을 의심하는 일도 있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은 바깥세상과 거리를 두고 신문과 라디오를 벗 삼아 본인을 천천히 가두기 시작했다.요즘 같으면 전문가의 심리상담을 받으실 정도였는데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가까이 있는 어머니께 전해졌다.휴가를 가면 아버지의 말씀과 어머니의 하소연을 번갈아가며 들어주었다..그러나 별다른 대책은 없었다. 그래도 요리를 잘하는 아내는 갈 때마다 전복죽과 닭백숙으로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렸다. 교통사고 이후 아버지와 나는 실외에서 같이 걸어보지 못했다. 바퀴 달린 기구를 함께 탄 기억이 없으니 여행의 추억도 있을 리 만무하다. 2004년, 앰뷸런스를 타고 떠난 이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신 아버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생전반은 검소하신 탓이고, 사고 이후는 고통사고 후유증이 주된 원인이었다. 세상은 넓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가. 이 지구촌에 아름다운 곳은  또 얼마나 되는가. 아버지는 가시지 않았다. 멋있는 양복도 입을 수 있고, 좋은 구두와 넥타이도 함께 고를 수 있는데, 아버지는 오로지우체부의 관복으로 버티셨다.아버지가 싫다고 하셨더라도 휠체어에 모시고 떠나라도 볼 걸...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셔도 선물로 드린 옷을 입혀라도 볼 걸...아버지는 그러려니 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이젠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에 눈물만이 핑 돈다. (2022.11.09. 초고)(2022.11.13. 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