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 14. 부여 무량사 아미타삼존상
설잠스님(김시습) 입적처이자 ‘조선 3대 불상’으로 유명
진흙으로 조성한 소조불
법주사 불상 등과 인연
현진스님 등 20명 ‘참여’
중생구제 ‘발원문’ 나와
▲무량사 아미타삼존상. 왼쪽부터 대세지보살상, 아미타여래상, 관세음보살상 .
무량사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 말사이다.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산 이름과 ‘무량사(無量寺)’라는 절 이름은 불교도들로 하여금 아미타신앙처임을 곧바로 눈치채게 한다. 서방 극락정토에 계신다는 아미타여래는 ‘무량수여래’ 또는 ‘무량광여래’라고도 하는데, 한량없는 목숨과 한량없는 광명을 상징한다. 무량한 목숨은 ‘무량수(無量壽)’이면서 ‘만수(萬壽)’이다.
1914년까지는 홍산 무량사였는데 지형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생긴데서 유래한 홍산(鴻山)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여군 홍산면이 되었다. 지난 7월 중순 비가 오는 날 천안 각원사 경해학당 오전 강의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무량사를 찾았다. 각원사 경해학당에서는 ‘불상의 이해’라는 주제로 8주에 걸쳐 오전과 야간 강의를 했는데, 오전 강의 후 현장 학습 차 매월당 김시습과 진묵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무량사를 찾은 것이다.
매표소에서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곧장 일주문이 나타나고 다리를 건너 단풍나무가 무성한 길을 걸으면 이내 천왕문에 다다른다. 천왕문 안 동남서북을 지키는 사천왕은 얼굴 표정이 유난히 무섭고 채색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어 안타깝다. 그러나 사천왕이 계신 천왕문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커다란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석등과 5층석탑과 2층의 극락전이 일직선으로 놓여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1927년 무량사 극락전 중수 기금을 모집하는 글에는 ‘무량사 극락전은 호서 지방에서 으뜸이며, 법당 안의 불상은 완주 송광사 삼세불상과 김제 금산사의 미륵불상과 함께 조선의 3대 불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624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극락전 안에는 1627년에 조성된 괘불과 1633년에 조성된 아미타삼존상,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 조성된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들이 홍산 무량사와 부여 도천사 등에서 분탕질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무량사는 이때 대부분 소실된 후 17세기 초에 중창된 것으로 추측된다.
▲김시습의 초상화.
무량사는 조선 초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설잠스님)의 초상화와 승탑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두 개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찬을 스스로 지어 두었는데, 마지막 구절에 “너의 얼굴은 지극히 못생겼고 너의 말버릇은 너무 당돌하니 너를 구렁텅에 처넣어 둠이 마땅하도다”라고 했다.
김시습은 1492년 가을 서해의 명산을 찾아 나선 길에 옛 친구인 지희(智熙)스님이 머물고 있는 무량사에 들렀다. 그는 무량사에서 판각한 <법화경>과 <능엄경>의 발문을 1493년 2월에 쓴 후 곧바로 입적했다. 무량사 입구 승탑원에 그의 승탑이 있다.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아미타삼존상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중앙에는 서방 극락정토에서 설법하는 아미타여래가 있고, 향우측에는 중생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비의 관세음보살상이 있으며, 향좌측에는 대세지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삼존상은 진흙으로 조성된 소조불로 아미타여래상은 크기가 521cm이며,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의 크기는 449cm이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삼세불상보다는 약간 크기가 작지만 거대한 불상임에 틀림없다. 소조불상은 나무와 새끼줄을 이용하여 형태를 만든 후 진흙을 바르고 자연 건조시킨 후 금칠을 한 불상을 말한다. 왜란과 호란 이후 17세기 초 소조불상은 보은 법주사, 고창 선운사, 김제 귀신사, 완주 송광사 등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조성되었다.
무량사 아미타삼존상은 개금 불사를 하던 중인 1976년 7월 18일 복장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아미타여래상과 대세지보살상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아미타여래상의 안쪽은 판자로 막은 3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어린 아이가 들어갈 정도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랫면에서는 적색 다라니 305매, 청색 다라니 117매, 흑색 다라니 507매가, 중간층에서는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등과 함께 여러 점의 천 조각이, 상층에서는 후령통과 함께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은 1976년 개금 불사가 끝난 후 다시 복장으로 넣어졌다.
무량사 아미타삼존상 조성에는 현진스님의 주도 하에 연묵(衍黙), 회묵(懷黙), 통경(通冏), 태응(太應), 천민(天敏), 신운(信云), 천휘(天暉), 계진(戒眞), 인호(仁胡), 각혜(覺惠), 철행(哲行), 극린(克隣), 철의(哲義), 무흡(無洽), 쌍납(双納), 쌍언(双彦), 성해(性海), 성준(性俊), 순일(順日)스님 등 총 20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
수조각승 현진스님은 17세기에 활동한 여러 조각승 유파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현진·청헌파의 리더이다. 그는 17세기 초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1622년 광해군의 비 장열왕후와 그 가계의 원불인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 조성에도 참여해 왕실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활동 시기는 1612년부터 1637년까지로 밝혀졌는데, 대표적인 불상은 1626년 보은 법주사 비로자나삼불상과 1633년 부여 무량사 아미타삼존상이다. 두 불상은 대형의 불상이고, 재료는 진흙이며, 조성을 이끈 조각승이 같아서인지 모습이 매우 닮아 있다. 특히 얼굴이 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넓적한 각진 형태에서 유사함이 절정을 이룬다.
무량사 아미타여래와 두 보살상은 모두 설법인을 짓고 있는데, 두 보살상은 좌우 대칭을 이루기 위해 관세음보살상은 왼손을 들고, 대세지보살상은 오른손을 들고 있는 차이가 있다.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의 차이는 보관에서도 나타난다. 보관 중앙에 관세음보살상은 스승인 아미타여래를 화불(化佛)로 표현했고, 대세지보살상은 감로수가 든 정병(淨甁)을 표시해 두 보살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넓게 트인 가슴 앞에는 두 보살상 모두 세 줄로 된 화려한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들어 올린 팔목에는 팔찌를 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승탑.
무량사 아미타삼존상은 보은 법주사 비로자나삼불상 뿐만 아니라 완주 송광사 대웅전 삼세불상과도 관련이 깊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역시 건립 당시는 무량사 극락전처럼 2층 불전이었다가 19세기에 1층으로 축소되었다. 또한 두 불상 조성의 증명으로 진묵스님이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진묵스님은 왜란과 호란 때 청허당 휴정, 사명당 유정, 벽암당 각성스님이 의승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과 달리 오로지 수행에 전념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완주 송광사에서 멀지 않은 서봉산 봉서사에서 주로 활동했다.
진묵스님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1622년 완주 송광사와 홍산 무량사에서 동시에 불상을 조성하고 모두 진묵스님께 증명 법사가 되어 주기를 청했다. 스님은 모두 갈 수 없자 각각 한 물건을 주면서 증명단에 올려놓으면 두 절의 불상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무량사 화주 스님은 불상이 완성되기 전에는 절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송광사에서는 스님이 보낸 주장자를 증명단에 세워두었는데 그 주장자는 밤낮없이 꼿꼿하게 서서 기울어지지 않았다. 무량사에서는 스님이 보낸 염주를 증명단에 올려 놓았는데, 그 염주는 항상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았다. 홍산의 백성 가운데 삼천금을 내어 혼자 삼존불상을 조성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항상 와서 참배하겠다고 했는데 온다는 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화주 스님은 그를 기다리다가 그만 절문을 나서고 말았다. 이때 갑자기 갑옷을 두른 신장이 나타나 그를 쳐서 죽였다.”
무량사 극락전 아미타삼존상의 발원문은 무량사가 중생을 구제하는 곳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즐거움을 얻으며, 가섭존자와 같이 불심(佛心)을 전하고, 아난존자와 같이 교학을 널리 펼치며, 문수보살과 같이 큰 지혜를 이루고, 보현보살과 같이 행하고, 미륵보살과 같이 자애로우며, 관음보살처럼 자비스러우며, 지장보살과 같이 큰 서원을 이루기 바라며, 극락에 왕생해 무량수여래 만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