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관아
간략설명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배출한 경기 북부의 치명지
관련주소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고릉말로 127-34
문화정보경기도 기념물 제167호(양주 관아지)
조선시대 양주목을 관할하던 행정관청이 있던 양주 관아지 전경. 동헌과 어사대가 복원되어 있다.양주별산대 놀이마당과 유양 초등학교 사이 야산 아래 양주 관아지(楊州官衙址)가 있다. 양주 관아는 1506년(중종 1년) 현재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간 양주목(楊州牧)을 관할한 행정관청이었다. 1871년(고종 8년)에 부천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35개 군의 읍지를 합편한 6책의 필사본인 “경기읍지(京畿邑誌)” 등에 양주 관아에 동헌(東軒), 객사(客舍), 사창(司倉), 군사시설 등 약 30여개의 시설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4월 23일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로 등록된 양주 관아지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을 복원했는데, 이 건물이 위치한 곳에 양주목사가 정무를 보는 관아의 중심건물인 동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3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관아의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다수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며, 보다 자세한 건물의 위치나 용도, 규모 등은 지속적인 학술조사를 통해 규명되어야 할 연구과제이다.
박해시대 경기도 북부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나 박해가 진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재건 속도가 빨라져 1830년대 초 고양(高陽) 지역에선 70-90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양주 관아지의 송덕비와 유허비. 각지에 있던 양주 목사들의 송덕비 17개를 모아 놓고 이를 기념해 유허비를 세웠다.또한 이 지역은 서울 인근이라는 지리적 배경 때문에 경기의 동부나 남부에 비해 교세적인 측면은 약하지만 새로운 교우촌 형성과 기존 교우촌 재건을 통해 신앙을 이어갔고 초기 교회 때보다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신앙 전통은 초기 포천과 마재에서 19세기 전반ㆍ중반기엔 고양과 송도 지역으로, 장단, 파주, 포천, 양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양주 관아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용인과 이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순교지가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호 요한, 권 마르타, 김 마리아, 박 서방 등 5명이 순교하였다고 “치명일기(致命日記)”는 전하고 있다.
김윤호와 그의 아내 권 마르타는 용인 굴암에서 거주하다가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김 마리아는 용인 한덕골에서 거주하다가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홍성원은 포천에서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치명하였고,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서방은 홍주에서 치명한 박사행의 부친으로 양주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홍성원과 박 서방은 양주와 관련이 있으나 용인에서 체포된 이들이 양주 관아까지 와서 순교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정조가 활을 쏘았던 곳을 기념해 어사대비가 세워져 있다.병인박해의 혹독한 시련을 거치면서도 1883년 이전에 경기 북부 지역에는 이미 양주 고령(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가라비(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연천 밤골에 공소가 있었으며, 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후 약현 본당과 송도 본당이 설립되면서 이 지역 신자 수가 크게 늘었다.
1909년 행주 본당과 1927년 신암리 본당 설립 이후 경기 북부 지역의 공소 수는 이전에 비해 감소했지만 기존에 공소가 없었던 지역에까지 신앙이 전파되어 공소가 설정되었다. 1924년 448명에 불과하던 이 지역 신자 수가 1937년에는 1,700여 명으로 증가한 것이 이를 잘 방증해 준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2008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심포지엄을 통해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의 정확한 치명지를 찾았고, 앞으로 치명 순교성지로 가꾸어 나갈 계획이다. [최종수정 2015년 12월 15일]
양주 관아지에는 현재 동헌과 어사대가 복원되어 있다.양주 관아지 전경. 오른쪽으로 양주별산대 놀이마당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