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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키스 / 김행숙
두 개의 목이
두 개의 기둥처럼 집과 공간을 만들 때
창문이 열리고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
두 사람은 나무처럼 서 있고
나무는 사람들처럼 걷고, 빨리 걸을 때
두 개의 목이 기울어질 때
키스는 가볍고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 더 큰 물방울들이
숲의 냄새를 터뜨릴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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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숲길'
숲길이라는 책명 안에는 1935-1946의 강연과 논고가 들어있다.
1. 예술작품의 근원: 예술작품을 통해 존재사건을 경험하는 내용.(사물의 참다운 존재가 드러나는 진리의 순간인 예술)
2. 세계상의 시대: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방법론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다양한 존재사적 견해를 기술. 근대의 주체가 되어 버린 인간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고찰
3. 해겔의 경험 개념: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서문을 비판적으로 고찰. 헤겔에게 역사란 항상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주장하는 서로 다른 역동적 개념들간의 변증법적 투쟁.
4.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 니체의 신죽음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고찰. 니체의 힘에의 의지, 지배욕을 비판
5.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릴케와 횔덜린의 시를 예시로 들며 시인은 존재가 떠난 이 시대에 존재를 불러오는 막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
6.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 현존자(그때 그때 머무르는 자)가 어떻게 현존하고 있는가 하는 현존방식, 그 구체적인 모습은 ‘허여’, 즉 ‘속하게 함’, ‘마땅함’과 ‘상관함’을 속하게 함, ‘[현존자들] 서로 간의 상관함’을 속하게 함, ‘마땅하지-않음의 극복에서 서로 간의 상관함’을 속하게 함.
히이데거 철학은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후기 철학은 전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기와 다른 구별된다.
'존재와 시간'으로 대표되는 전기철학은 매우 능동적이고 주로 역사를 다룬다.역사에서는 존재는 은폐되어 있다.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함에 빠져있는 세인이 어느날 죽음을 통한 불안이 찾아오면 기획투사를 통해 본래적 삶을 살아야한다는 내용이다. 불안이 오기 전에는 잡담, 호기심, 평균성, 애매성을 쫒아 생활하는 인간은 존재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 자기의 존재는 망각되어 있다.
'숲길' 등 저작물로 대표되는 후기 하이데거는 전나무 숲으로 물러나 예술을 통해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존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듣기만 하면 된다. 수동성이 존재의 소리를 듣는데 유리하다. 전기와 뒤집어진 하이데거의 사유가 포함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숲길'에서 시원을 사유한다. 존재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고대인들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을 객체로 보지 않았다. 자기 자신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자로 보았다.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존재의 신비와 경이를 경험하는 시대였다.
중세에는 최고 존재자인 창조자가 있고 인간을 포함한 사물은 피조물이 있다.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지만 존재의 경이로움은 남아 있었다. 신이 창조한 피조물도 존재의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을 금지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표상의 시대는 모든 것이 계산되고 조작될 수 있는 시대였다.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구성하고 표상하거나 전개할 때 인간은 주체가 되고 세계는 객체가 되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계산하고 조작하는 방식으로 존재자를 받아들인다. 사물은 인간 이성을 위한 도구가 전락해 버렸다. 사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도구적으로 바라본다. 과학과 기술문명의 시대에서 이 셰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희생되고 지배되어야 하는 시대였다. 존재자의 경이도 사라졌다. 존재자로부터 존재가 떠난 경악의 시대였다.
존재가 망각되고 은폐되었다. 지배욕에 사로집힌 인간에게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존재의 망각을 완성하였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나타나서 이것을 수정하기 위하여 숲길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상의 시대의 비극이다. 예술작품도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작품을 통하여 인간 자신을 본래적 존재를 현시하는 방법으로 예술을 고찰한다. 본래적인 것은 존재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존재의 경이를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 고대인들은 존재에 대해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세계사물이 인간의 수단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상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의 존재를 묻지 않았다. 목적론이 있었는데 존재자의 본질을 묻은 철학이지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철학은 아니므로 그들의 철학으로는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 기존 형이상학의 길로 가서는 존재의 빈터를 경험할 수 없고 하늘로 뚫려진 사방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 길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언어의 도상에서', '이정표'라는 저서에서 보는 것처럼 사유의 길을 상징한다,
존재는 신비로 가득차 있다. 이 시대는 나무를 땔감으로, 돌을 집을 짓는 도구로, 새를 인간을 기뻐게 하는 수단으로만 보는. 이기적인 시대, 이성의 시대이다. 과학기술문명의 폐해다. 인간은 자기 존재까지도 망각했다. 셰계를 상으로만 본다. 유익하고 계산할 수 있는 상으로 본다. 사물과 동물과 식물은 도구로서만 사유된다. 이러한 과학기술문명에 하이데거는 저항한다. 고대에는 각각의 존재자에게 목적이 있고 존재의 경이로움이 있었다.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의 빛이 모여들었다, 인간과 자연은 존재의 동반자였다. 중세에서도 이 세계의 사물들을 파괴할 수 없었다. 신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의 확립과 이로 인한 확실성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되어 세계를 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 망각되었다. 자연은 다 계산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였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은 존재자의 존재를 물은 적이 없다, 본질만 물으면서 대상화하었다. 주체가 확립되면서 가장 확실한 객체가 확립되었다. 근대 모더니즘의 철학과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를 나의 이성을 객체로 보고 지배하는 대상으로 보았다.
우리는 숲길로 들어와서 에움길을 찾아야 한다. 존재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철학을 해야 한다. 존재의 빛을 드러내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숲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 세계의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자들이 총제적으로 결합해서 인간에게 말을 하는 신비로 다가오는 , 인간에게 본래성을 찾게 하는 것이다. 숲길로 들어오면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물은 나의 유용성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본래적 존재를 찾게 해 주는 신비로 다가온다. 시인의 사명은 존재가 떠난 이 시대에 존재의 소리를 듣게 해주어 인간의 본래성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사물의 신비속에 나의 모든 것을 마주 던지고 초연히 내맡기면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마주던짐과 초연한 내맡김)
과학기술문명의 단점을 역으로 사유하여 인간자신도 존재론적 질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침묵을 통하여 자연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셰게는 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아야 한다. 존재의 소리에 이성의 냉철한 판단을 맡겨야 한다. 시인의 사명은 떠나버린 존재를 다시 불러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힘에의 의지'가 지배하고 계산하고 난도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드러나는 총제척 존재의 빈터에서 지배의지가 치유되고 나 자신을 초연하게 내맡김으로서 진정한 자기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무를 땔감으로 볼 때는 존재의 빛은 드러내지 않는다. 숲에서 내가 조용히 침묵할 때 '힘에의 의지' '지배에의 의지'는 작동하지 않고 자연속에 귀속되어 있는 수동성의 존재가 된다. 자기의 인간됨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이 주인이 될 때는 과학기술문명과 결탁하여 이 세계를 돈으로 환원하고 자연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숲길에서 존재의 소리를 들으며 조화를 이루는, 이 세계에 귀속된 존재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세계와 조화를 이루면서 살면 본래적 위치를 되찾을 수 있다. 시인의 사명은 시짓기를 통하여 존재의 소리를 다시 듣게 해 주어 인간에게 본래적 존재를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숲길에서는 인간이 주인이 아니다, 웅대한 자연속에서 인간은 침묵할 때, 하나의 점이 된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표상개념으로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누었고 헤겔은 경험 개념을 통해 인간 이성이 역사속에 세계의 주인이 되어 변증법적 투쟁 개념을 전개하였고, 니체는 '힘에의 의지' 를 통해 이 세계를 지배욕이 가득찬 세계로 형이상학을 완성하였다.
본래적 존재는 주체가 아닌 다른 사물과의 친구로서 조화로운 관계를 이어갈 때 자기의 본래성을 되잧을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간다. 역사로부터 물러나서 숲길에서 존재의 소리를 듣고 예술을 통해 본래적 존재를 찾아야 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처럼 존재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고 서로 간의 상관함’을 속하게 한다. 타자의 신비속에 나의 모든 것을 초연하게 맡기면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예도TV)
( 인간의 '본질')
전기 하이데거- '존재를 향하여 있음'. 자신의 구각(호기심, 잡담,평균성, 애매함)을 벗어버리는 기투와 선구적 결의의 주체로 실존의 이행과 결단의 숨가쁜 긴박성을 강조
후기 하이데거 - '존재 안에 나가 서 있음'혹은 脫存. 존재에 대한 봉사와 복종, 경청을 통해 자신의 주도적 처분권을 존재에 완전히 양도해 버리는 존재 사역자로서의 '목동'으로서의 인간은 그의 철저한 무본질성과 비주관성을 통해서만 본래성에 도달하는 존재
(전회)
미완의 작품 『존재와 시간』은 문제점이 있었다.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서 발견했지만, 이러한 설명은 모든 것의 답이 '시간'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데거가 강조했던 '실존으로부터의 철학'은 멈추어 버린다는 문제였다.
하이데거는 연이은 강의와 저술에서 이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그 답변은 이렇다. "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이데거 학파가 훗날 신비화하는 "전회(Kehre)"라는 것도 이런 기획의 틀 내에서 등장한다. 전회, 그것은 더 이상 '시간성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존재의 '순간'에 집중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림의 순간'이다. 자신의 현존재를 실제로 경악에 몰아넣고 불안에 빠뜨리고 권태에 밀어 넣을 때, 그런 무(Nichts)의 기분에 내 자신을 내맡겼을 때, 결단으로 '열리는' 창조와 자유의 순간이다. 이 '순간'에서야 현존재의 비밀이 열린다. '열림'이라 무엇인가? 자연이 인간 안에서 눈을 뜨고 자신이 거기 있음을 깨닫는 것을 셸링은 '빛살(Lichtblick)'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자연적으로는 닫혀 있는 자연 존재자가 인간을 통해 인간 내에 (마치 빛살처럼) 나타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에게 무대를 제공한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진리(aletheia, 알레테이아)란, 숨겨져 있던 자연 존재자가 인간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모습에서 울림, 몰입, 경이를 느낀다. 진리가 발견되는 이 사건의 '순간'을 하이데거는 '생생한 고유화(Ereignis, 존재사건)'라고 불렀다. 이제부터 하이데거는 '생생한 고유화'의 철학을 평생동안 펼쳐나간다.
<해설>
이 시는 하이데거의 숲길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등 형이상의 철학자는 머리 속에서 존재를 생각하고 구성하고 표상하거나 전개하여 인간은 주체가 되고 세계는 객체가 되게 하였다. 그 이후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계산하고 조작하는 방식으로 존재자를 받아들인다. 사물은 인간 이성을 위한 도구가 전락해 버렸다. 사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도구적으로 바라본다. 과학과 기술문명의 시대에서 이 셰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희생되고 지배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존재자의 경이도 사라졌다. 존재자로부터 존재가 떠난 경악의 시대이다. 존재의 빛을 드러내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숲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 세계의 자연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자들이 총제적으로 결합해서 인간에게 말을 하는 신비로 다가오는 , 인간에게 본래성을 찾게 하는 것이다.사물은 나의 유용성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본래적 존재를 찾게 해 주는 신비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시인의 사명은 존재가 떠난 이 시대에 존재의 소리를 듣게 해주어 인간의 본래성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사물의 신비속에 나의 모든 것을 마주 던지고 초연하게 맡기면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마주던짐과 초연한 내맡김)
숲속의 키스 / 김행숙
(존재의 시원, 귀향에서의 깊은 만남)
두 개의 목이
(인간과 자연/타인의 목이, 얼굴을 지지하고 가슴이하 부위와 연결하는 대상으로서의 목)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술가와 작품이라는 두개의 기둥이)
두 개의 기둥처럼 집과 공간을 만들 때
(두 기둥처럼 동등하게 기초로서 이 세계를 건립할 때)
창문이 열리고
(안과 밖이 연결되고, 소통이 되고, 존재사건의 '열림'이 드러나고)
(세계를 열어 밝히고, 존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예술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건립하면서 열어놓는다)
불꽃처럼 손이 화라락 날아오를 때
(소통의 상징으로서의 손. 소통과 신뢰의 감정이 극대화될 때)
(예술은 존재자의 진리를 열어 놓으며 솟아오르게 한다)
(하이데거의 '손 안에 있음'의 개념은 '둘러봄'이며, 대상과 하나가 될 때이며, 그와 반대개념인 '눈 앞에 있음'은 '고정해 봄'이며, 대상과 분리해서 보는 것임)
두 사람은 나무처럼 서 있고
(두 사람은 나무처럼 자연적이고, 존재의 열림으로 순간을 체험하고)
(두 사람이 존재의 빛 가운데 '서 있게 함'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6 있음이고)
나무는 사람들처럼 걷고, 빨리 걸을 때
(자연 혹은 타자는 사람을 무대삼아 인간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 것이 가속화되고)
두 개의 목이 기울어질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에게 의존할 때)
키스는 가볍고
(깊은 만남은 가볍고)(가벼워야 날아오를 수 있다)
가볍게 나뭇잎을 떠나는 물방울, 더 큰 물방울들이
숲의 냄새를 터뜨릴 때
(개체의 키스의 물방울이 숲, 이 세계 전체적으로 퍼질 때)
두 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얹을 때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어질 때)
(세계상의 시대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형이상의 철학을 무위화할 때)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인간인 나를 자연 혹은 타자에게 마주 던지고 초연하게 내맡겨서 나의 본래적 존재가 돋아나왔을 때)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처럼 현존자들 서로 간의 상관함’을 속하게 함)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마주 던짐과 초연한 내맡김의 개념
존재의 진리를 대지(존재자) 안에 간직해 넣기 위해서는 우선 현존재가 자신에게 현성해 오는 존재의 진리를 존재의 진리로서 맞아들여야 한다. 현존재가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벗어나 자신을 존재의 진리에게 초연하게 내맡기는 가운데 존재의 진리를 향해 자신을 마주 던짐으로써만 현존재는 존재의 진리를 존재의 진리로서 맞이한다. 존재의 진리를 존재자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존재의 초연한 내맡김과 마주 던짐이 요망되는 것이다. 초연한 내맡김은 존재 진리의 열린 장, 즉 만남의 장과의 적합한 관계를 말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품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사물들에로의 초연한 내맡김'이다.
진리를 존재자에게로 간직함에게는 그 어느 것에나 그때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마주 던짐과 실행이 속한다. // 모든 마주 던짐은 폭풍이며, 축복이며, 진동이며, 순간이다. 모든 실행은 초연한 내맡김, 인내, 체념(본래적으로 파악하면 그렇다. 거기에 속하는 비본래성의 형식. 비-본질?)이다. 이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과 기분을-같이 함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둘 모두 언제나 간직함이라는 필연성을 근거로 하여 발생한다.(391,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