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갈매못 성지
도로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순교성지 갈매못.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에 있는 이 순교성지는 서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개발되어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순례해 볼 만한 곳이다. 특히 일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교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순교성지 기념관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 관련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여 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5월 6일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언덕 위에 건립된 승리의 성모 성당 제대 뒤 스테인드글라스를 양옆으로 열면 바닷가가 한 눈에 보인다. 1866년 3월 30일, 그해의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5위의 성인 중 황석두 루카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4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이화만 바오로와 두 아들 그리고 인근 교우촌인 도앙골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882년까지 16년간 묻혀 있던 4위 성인의 유해는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되었다.
오늘의 갈매못 순교성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의 후예였던 고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인근 신부들과 함께 목격 증인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순교지를 확인하고, 이듬해에 20평의 땅을 우선 매입해 1929년에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그 후 갈매못이 순교성지로 다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대전교구 대천 본당이 설립된 후 순교자 현양운동과 함께 1975년 9월 당시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고 정용택 사도 요한(1998년 7월 3일 선종)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제단이 세워졌다.
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는 갈매못을 성지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사제를 두어 성지개발과 순례자들을 위한 사목에 박차를 가했다. 2004년 4월 성지 전시관 앞에 다블뤼 안 주교 동상을 건립해 축복하고, 2006년 10월에는 성지 언덕 위에 처형장인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승리의 성모 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가졌다. 2008년 4월에는 기존의 경당과 전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수리해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로 꾸며 성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013년 2월 12일에는 갈매못 성지가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10월 15일에는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대회를 거행하며 승리의 성모 성당 옆에 새로 세운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상 축복예식을 가졌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7년 6월 10일)]
1) 갈매못 성지와 순교자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여 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5월 6일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1866년 3월 30일, 그해의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5위의 성인 중 황석두 루카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4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이화만 바오로와 두 아들 그리고 인근 교우촌인 도앙골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882년까지 16년간 묻혀 있던 4위 성인의 유해는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되었다.
2)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시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3) 갈매못 순교성인 형장으로 가는 길
가). 형조 터.
광화문 세종문화 회관 앞 보도에 그 옛날 형조 터가 있다.
1866년 3월 23일(음력2월7일) 형조에서 갈매못 성인 다섯 분은 군문 효수형을 받게 되며, 이곳을 출발하여 갈매못 형장까지 장장 250여리의 순교 길은 시작된다. 그리고 3월 29일 성 목요일에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나). 오성(五聖) 바위 (절두산)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매트리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 등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 못을 향해 끌려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 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현재 이 바위는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에 있다.
다). 충남 아산시 음봉, 오성 바위 원터
1876년 병인박해당시 다블뤼 주교와 함께 형을 언도받은 오 매트로 신부와 위앵 신부 황석두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분이 갈매 못으로 순교길을 가던 길목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신 곳이다.
이곳에 있던 오성 바위는 서울 절두 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있고, 이곳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270 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53 년 전(1866년) 지금은 순교성인이 되신 다섯 분이 이곳을 지나시던 모습을 이 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오성바위 기념비 비문
오성바위(Osung Bawui, Rock of the five Saints)
1866년 3월30일 갈매 못에서 순교한 성 안토니오 다블뤼, 성 오메트로 오 베드로,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 성인이 한양에서 군문 효수형을 언도 받고 갈매 못으로 가던 도중에 지금의 충남아산시 음봉면 동천 리 삼거리에 있는 오성(五聖)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갖은 문초로 온 몸은 부셔져 있고 또 죽으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매 못으로 가는 6일 내내 떼제 음과 기도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증언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 바위 위에서도 다섯 성인들은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 하면서 성가를 불렀다. 이 바위는 한때 “복자 바위”로 불렀으나 1984년 성인품 이후 오성바위로 불린다. 지금은 서울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정원에 있다. 이 바위는 둘레가 11미터, 지름4미터, 두께1미터, 무게는 16톤이다. 순교자들이 얻고자 한 것은 오직 천국이었다. 고통과 죽음조차도 그 희망을 꺾을 수 없었다. 주님이 전부인 이들이 누리는 자유와 희망을 우리는 이곳에서 만난다. 생각을 바꾸면 삽니다. 복음의 말씀을 따라 생각을 바꾸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큰 아들처럼 잘못된 생각을 바꾸듯이 비록 내 죄가 크다 해도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서 하느님의뜻대로 살면 될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내 생각과 생활 방식이 복음적 입니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 하여라.” 주님은 내게 하느님 나라에 가서 살자고 하십니다. 생각을 바꾸시겠습니까? 잘못을 회개하고 세리와 창녀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의로운 길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니면 유다 지도자들처럼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기심과 교만과 허영심에 빠져 그 분을 믿지 않고 거절 하겠습니까? 순간의 선택이 당신을 가름 합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 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여기 다섯 성인들이 머무셨던 자리를 기념하여 이 표지 석을 세웁니다.
2011년. 11월. 11일. 11시
4). 갈매못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성금요일의 순교자들 [최홍준 파비아노]
1866년 병인박해 때 사순시기 수요일에 조선교구 제4대 감목 베르뇌 장(張敬一)주교가 선교사 3명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승계권 있는 부교구장 주교이던 다블뤼 안(安敦伊) 주교가 자동으로 후임 교구장이 됐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오직 23일에 지나지 않았으니, 같은 달 30일 성금요일에 그만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블뤼 주교와 함께 형을 받은 이들은 오매트르 오(吳)신부와 위앵 민(閔) 신부 등 선교사들과 황석두 루카, 장기주 요셉 회장이었다. 성직자들은 거의 모두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이때는 형장이 달랐다. 3월 23일 국왕은 이렇게 결정했다.
“이자들을 모두 함께 포도청에서 끌어내어 충청도의 수영으로 호송해 처형하고 효수해서 교훈이 되게 하라.”
다음날 그들은 충청도로 길을 떠났다. 한 선교사가 주교께 아뢰었다.
“주교님, 국왕은 병이 들어 그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굿을 하고 있어서 우리 선교사들의 죽음으로 해서 굿의 효력이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우리를 멀리 보내서 처형한다고 그럽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국왕이 얼마 후에 혼인을 하게 돼있는데,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면 왕의 혼사에 부정이 탈지도 모른다고 해서 대원군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250리 떨어진 곳에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고 들었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상처 입은 다리에 유지만을 처맨 채 말을 타고 죽음을 향해 가는 행진은 다섯 사형수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3월 29일 성목요일에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 그날 저녁 잠시 쉬는 틈에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보령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면 처형이 또 늦어질는지도 모르겠군.”
주교는 벌떡 일어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안 될 일이오. 바로 내일 우리를 곧바로 처형장으로 데려가야 하오.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오.”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기념일에 순교하기를 열렬히 희망했던 것이다. 포졸들은 결국 이에 동의하고 성금요일에 행렬을 지었다.
“수영으로 돌아가지 않고, 처형장으로 지정된 바닷가 모래밭으로 직접 향할 것이다! 어서 떠나자!”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이곳이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산 9-53 ‘갈매못’ 순교터〔殉敎聖趾〕다. 조선대목구 다섯 번째 감목 다블뤼 안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등 세분 선교사와 주교의 복사요 전교회장 격이던 황석두(黃錫斗) 루카와 배론 신학당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 이렇게 다섯 성인들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현장이다.
당시 조정의 사정으로 서울 새남터가 아닌 이곳까지 와서 순교하게 됐으나,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이들 순교자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묻어있던 고장이라는 점에서 더 합당한 장소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845년 8월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페레올 고주교를 모시고 강경 부근 익산 나바위에 첫발을 내디딘 그해 10월 12일 이래 다블뤼 주교는 줄곧 이 일대 내포(內浦)지방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사목하고 연구하며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포(浦)라고 하면 배가 드나드는 갯벌로, 그것이 내만(內灣)에 있으면 내포라고 했다. 전국적으로 보면, 남해군에 내포현이 있었고, 창원군에 내포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택리지》에 나오는 내포로, 충청남도 가야산 둘레의 10개 현을 총칭하는 지역이다. 삽교천 서쪽에 있는 아산, 당진, 면천, 홍주, 덕산, 해미, 결성, 보령, 서산, 태안지역이 그곳이고, 공주와 부여, 논산, 강경, 서천, 전라북도 함열 등지에 걸쳐 있는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부르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사에 ‘내포의 사도’라 불린 이가 있었으니, 이존창 루도비코로 곤자가(1759-1801)로서, 그의 딸이 김대건 신부의 조모이며, 사촌 누이의 조카딸이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다. 그래서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루도비코의 고향이요 생가가 있던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고들 말한다.
여사울이 초기 충청도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요람이었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모진 박해에도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면서도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손자선 토마스는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배교하라고 강요하는 박해자에 맞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기까지 신앙을 증언한 순교 성인이다.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다. 다블뤼 주교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면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를 이 곳 신리에서 작성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해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다블뤼 주교가 그 전인 1862년 10월에 이미 순교 기록과 교회사를 정리해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프랑스로 보냈기 때문에 자료 사본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 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즈음 수원 근처 샘골[泉谷里]에서 전교하고 있던 오매트르 신부가 찾아오자 삼거리에 있던 위앵 신부도 오게 해서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황 루카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쇠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5) 갈매못 순교자
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1818-1866년) :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래서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고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나)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837-1866년) : 성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메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신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가 1863년 6월 말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용인의 손골(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가 조선말을 익혔다. 그 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 박해의 소문이 나돌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감추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 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다블뤼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포졸들은 주교를 위시하여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홍주 옥으로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결국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였다. 바로 그 날이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일로 그들이 처형된 시간이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다)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1836-1866년) :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친은 항상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자랑하면서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 자신이 전교해야 될 지방이 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 7월 15일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와 함께 전교지인 조선을 향해 파리(Paris)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1864년 11월 만주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과의 연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한문과 조선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에 비로소 위앵 신부는 일행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도착 후 위앵 신부는 6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 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다. 위앵 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3월 12일 그는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라) 성 황석두(黃錫斗) 루카 회장(1813-1866년) :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어느 양반 집안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도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였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마)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1803-1866년) :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6) 갈매못 순교성인들 서짓골에 묻히시고
서짓골에서 나가사키에, 나가사키에서 서울로
가)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성인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 되었나?
1866년 3월 30일 갈매못 해변의 법장(法場 사형장)에서 다섯 분의 성인들을 참수 처형한 충청수영의 집행관은 그분들의 목을 벤 머리를 장깃대에 매달아 사흘 동안 효수하였다. 매어달린 그분들의 머리 밑에는 각각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의 글자를 쓴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러한 효수 기간이 지난 후 그곳의 모래자갈 바닥에 병졸들이 대충 묻었는데,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를 함께 묻고 다른 세 순교자들은 한 구덩이에 함께 묻었다.
순교자들의 효수된 머리와 알몸을 일치시켜 칡넝쿨로 묶어서 각각 그 시신별로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의 글자를 쓴 그 팻말을 머리에 덮어 묻었다.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의 조선식 이름 안돈이(安敦伊)에 따라 그분의 시신에 ‘안가(安家)’, 오메트르 신부의 시신에 ‘오가(吳家)’ 등의 표식이 함께 묻혔기에 나중에 신자들이 수습할 때 유해 구분이 용이하였다.
나) 순교하신 성인들의 시신은 그렇게 방치 되었나?
함께 치명하시고 갈매못 형장 모래자갈 속에 묻힌 다섯 성인의 시신 가운데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은 두 달 후 5월 29일(음력 4월 16일)에 그분의 양자 황천일 요한과 조카 황기원 안드레아의 수습작업으로 홍산 삽티(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에 안장되었다.
한편, 장주기 요셉 성인의 아들 장노첨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을 찾아가 수습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락골의 신자들은 두려움으로 그 협력을 거절하였다.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남포현(보령시) 서짓골에 살던 이화만 바오로의 아들들과 신자들이 장노첨과 더불어 갈매못 현지에 가게 된다.
네 분 성인의 유해를 서짓골에 옮겨 오기까지 ‘보름 동안’의 이러한 작업을 한 이치문 힐라리오의 증언에 따르면, 서짓골에 안장한 것은 그해의 (양력으로) 9월 1일이 된다.
다) 서짓골에 안장된 성인들의 유해는 그 후 어찌 되었나?
네 분 성인의 유해가 서짓골에 안장 된 후 1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분들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당시 조선대목구의 부주교인 블랑(Blanc) 신부는 1882년 3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였다.
“본인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 요셉 회장의 유해 발굴 임무를 맡고서 전에도 발굴을 했었던 교우들에게 유해를 찾아서 가능한 한 정성껏 유해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전에도 발굴을 했었던 교우들” 중 한 사람인 이치문 힐라리오는 이러한 블랑 부주교의 지시를 받고 서짓골의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다시 발굴하게 되었다.
이렇게 네 분 성인들의 유해는 서짓골에서 수습되어 강경에서 블랑 부주교에 의해 확인 절차를 거쳐서 1개월 남짓 강경의 이치문의 집에 보관되고, 이어서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조치가 있기까지 전라도 진안 널티 공소회장 집에 일시 보관 되었다.
‘널티’는 현재의 ‘전북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이다. 그 후 성인들의 유해는 일본 나가사키의 오우라 성당 구내 신학교에 보내져서 12년 동안 보관되다가 1894년에 서울로 모셔오게 되었다.
라) 성인들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옮겨 모시다
네 분 성인의 유해를 나가사키에 안전하게 옮겨 모시게 되었음을 1882년 11월 6일 일본의 대목구장인 프티장(Petitjean) 주교의 편지로 알 수 있다. 일본의 프티장 주교의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에 의하면,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의 승인을 받아서 나가사키로 유해를 모시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프티장 주교는 다음과 같이 조선 대목구장 리델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가사키에 있는 우리들은 오늘 큰 기쁨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블랑 주교의 매우 귀중한 위탁물인,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와 조선인 회장의 유해를 받았습니다.…”
마) 성인들의 유해를 서울로 모신 경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의 유해는 보령 서짓골에 묻혀 있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블랑 주교에 의해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
네 분 성인의 유해가 나가사키의 신학교에 12년 간 정중히 보관되어오다가 블랑 주교의 선종 후 조선 대목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의 의지에 의해 조선 땅으로 귀환하게 된다.
블랑 주교의 후임자인 1894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이 유해들을 다시 조선으로 옮겨 오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나가사키 대목구의 사목을 담당하던 파리외방전교회가 동일한 전교회 선교사 주교인 조선 대목구의 뮈텔 주교의 뜻에 따라 흔쾌히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선으로 귀환해주었던 것이다.
5월 1일 나가사키에서 그렇게 르 포르페 호에 실려 보내진 유해는 5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5월 22일에 뮈텔 주교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그 유해들은 서울 용산에 세워진 신학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4년 후 1898년 명동 대성당이 준공된 다음에 1900년 9월 10일 대성당의 지하 소성당에 이전하여 안치되었다가, 병인 순교자 시복을 기하여 1967년 절두산 기념 성당의 순교자들 유해 안치실에 이전 안치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료: [하부내포성지 담당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
바).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에 서짓골 순교성인 기념비 제막
2016년 9월 29일에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에서 병인순교자 4위 유해봉안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병인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고 서짓골에 묻히셨던 4위 순교
성인 유해를 1882년에 옮겨서 1894년까지 12년간 봉안했던 오우라 천주당에 하부내포의 서짓골에서 출토한 석재로 기념비를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