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59) 다시 시작된 군웅할거
왕윤이 죽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장안성 문이 힘차게 열렸다.
이것은 반란군과 내통한 동탁 잔당이 한 짓이었는데, 이바람에 난적들이 물밀듯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인명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전까지도 태평성대를 소리높이 찬양하던 장안의 백성들은 또다시 아비규환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리고 난적들은 이 기회에 천자까지 죽여 버리고 천하를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자는 말도 해댔다.
그러나 번주와 장제는 찬성하지 않았다.
"천자를 죽이기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민심을 잃게 될 것이니, 천자의 위력을 점진적으로 꺽어가면서, 민심을 얻은 뒤에 대사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약속한 대로 군사를 곱게 물리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난적들은 고집을 부렸다.
"이대로 곱게 물러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왕윤을 제거한 논공행상이라도 받은 후에 물러나기로 합시다."
하고 당장 벼슬자리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헌제는 마침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이각은 거기장군(車騎將軍)에, 곽사는 후장군(後將軍)에 번주는 우장군(右將軍)에 그리고 장제는 표기장군(驃騎將軍)에 각각 임명하여, 이들을 사후(死後)에라도 묘당(廟堂)에 오르게 하였다.
한편, 장안성이 적도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여포는 산중을 빠져 나와 장안으로 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가 장안성 밖까지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장안성 안은 온통 검은 연기와 화염으로 덮혀 있었다.
"앗차! 너무 늦어버렸구나!"
여포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매사에 실망할 줄을 모르던 여포도 이때만은 낙담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포는 군대를 그 곳에 남겨 둔 채 불과 백여 명의 심복만을 데리고 피신의 길에 올랐다.
앞서는 사랑하던 초선이를 잃어버리고, 이제는 싸움도 진력이 나버려 피신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자신의 앞날이 캄캄하였다.
한편, 헌제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은 장제와 번주는 헌제 옆에 자신들의 첩자를 달아놓고 , 수만의 군사들을 성 안에 공지(空地)에 천막을 치고 주둔시켰다.
천자가 있는 장안성이 동탁의 잔당인 이각과 번주등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량 태수 마등(西凉 太守 馬騰)과 병주 자사 한수(幷州 刺史 韓遂)가,
"조정을 점령하고 있는 적도들을 소탕해야 한다!"
하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십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쳐들어왔다.
이각은 모사 가후와 더불어 대책을 강구하였다.
가후가 이렇게 말한다.
"장안성 외벽에 적이 타고 넘을 수 없도록 방책을 세우고, 성 밑에는 깊은 늪을 팝시다. 그리고 나서 공격해 오는 적을 그냥 내버려 두면 제풀에 지쳐서 물러가 버릴 것이오."
과연 서량군과 병주군이 수없이 장안성을 공격해 왔으나 그들은 성을 넘어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군량과 마초가 떨어지고 군사들의 사기가 침체해 가는데, 때마침 장마철이어서 군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병에 걸려서 수없이 죽어나갔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장안의 이각군이 일시에 성문을 열고 달려나와 반격을 개시하는 바람에 마등의 군사들은 무참하게 패주하였다.
특히 한수는 우장군 번주에게 추격을 당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옛날의 우정을 내세우며 이렇게 외쳐대었다.
"번주, 번주! 그대와 나는 동향인(同鄕人)이 아닌가?"
"이놈아! 여기는 싸움터다. 국난을 진정하는 데 개인의 연록(緣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대가 나라를 위해 싸운다면 나 또한 나라를 위해 싸운다.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지금 퇴각하고 있는 내 부하 군사들 만은 추격하지 마라!"
번주도 그 말에는 동감했던지 더 이상의 추격은 하지 않았다.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장안에서 승전 연락이 베풀어졌을 때, 이각은 번주가 적장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곱게 돌려보내 준 데 대한 책임을 묻고,
"번주, 너는 배반자다!"
하고 외치며 번주의 목을 한칼에 잘라버렸다.
표기장군 장제는 그 광경을 보고 몸을 떨며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각은 그를 붙들어 일으키며,
"번주가 한수의 군사를 곱게 돌려보내 주었다는 사실은 나의 조카인 이별(李別)의 밀고가 있어서 알게 된 것이니, 그대는 이번 일에 두려워하지 마라. 그대는 어디까지나 나의 심복이니 안심하고 계속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하고 말하며 번주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장제에게 돌려주었다.
*이 무렵을 전후한 군웅할거도.
이 무렵에 청주(靑州)지방에서는 또다시 황건적을 표방한 무리가 날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는 이각의 일당이 동군 태수(東郡 太守)인 조조에게 천자의 이름을 빌려,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조는 이각 따위는 애당초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자의 이름을 빌려 내려온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어서, 즉시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소탕해 버렸다.
이 무렵 조조는 전국 각지에서 유능한 인재를 두루 모으고 있어서, 그의 수하에는 용감한 무장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조조는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여 먹을 것과 지위를 부여하고, 각기 가진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요소요소에 포진시켰다.
조정에서는 황건적을 토벌한 조조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실상 알고 보면 조조로서는 그런 명예보다는 그가 거둔 실리(實利)가 훨씬 더 컸다.
황건적을 토벌하기 얼마 전에는 그의 휘하로 투항해 온 병력만도 삼만 여명이나 되었고, 점령지에서 새로 지원한 병력까지 합하면 물경 십만에 가까운 병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점령한 제북(濟北)과 제남(濟南)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해서 재정적으로도 넉넉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조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조조는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모았다.
그중에는 한고조 시대(漢高祖 時代)의 장자방(張子房) 못지 않게 지혜로운 순욱(荀彧)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조카 순유(荀攸)를 데리고 조조의 진지를 찾아왔다.
순욱은 본래 원소의 수하였으나 조조의 전공에 감탄하여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조조는 순욱을 만나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귀공을 대하니 나는 장자방을 얻은 것만 같구려!"
조조는 순욱을 그 자리에서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았다.
순욱의 조카 순유도 병법에 밝은 학자로서 일찍이 황문시랑(黃門侍郞)이라는 벼슬을 지내다가 그 자리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있다가 순욱의 권유를 받고, 함께 조조를 찾아왔던 것이다.
조조는 순유에게 행군교수(行軍敎授)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산중에 칩거한 정욱(程昱)과 초야에 묻혀있던 곽가(郭嘉)같은 사람도 인물이 비범하다는 소리를 듣고 손수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진류(陳留)에 있는 전위(典韋)같은 인물은 수백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찾아와 조조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특히 전위는 키가 일 장(一丈)이나 되어, 팔십 근자리 창검을 회초리 다루듯 가볍게 내두르는 천하의 장사였다.
그밖에도 정욱의 천거로, 유명한 무사, 유엽과 만총 같은 사람도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조조의 세력은 족히 천하를 호령 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세도가 이쯤 되고 보니 조조는 오래 떨어져 있던 늙은 부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曺崇)은 고향에서 난리를 피해 <낭야>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부친을 이리로 모셔 오도록 하라."
조조는 태산 태수 응소(泰山 太守 應昭)에게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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