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왕피리 (순례지/성지)
간략설명: 왕피천이 시작하는 곳에 세워진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374 부근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왕피리(西面 王避里)는 동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뻗어 있는 태백산맥의 통고산(1066m)과 대령산(652m) 사이에 있으며, 통고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광천과 합하여 구산리를 지난 동해로 들어가는 왕피천(58.1㎞)의 발원 지점이다.
또한 이곳은 영양군 수비면(首比面)과 경계지역으로 ‘나그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新岩里) 땅이다. 이 고개는 옛날부터 산을 넘어갈 나그네들이 쉬어 갔다고 해서 ‘나그네 고개’라고 부른다.
한편 왕피리는 옛날 부족국가 시대에 실직국(悉直國)의 안일왕(安逸王)이 예국(濊國)의 침략을 받아 피난을 왔다하여 ‘왕피동’이라고 한다 하며, 또한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으로 이곳에 피신한데 연유하여 지명을 왕피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갈전 마을은 태백산맥 중 높고 험준한 통고산 동쪽 기슭의 깊은 산골 마을이다. 그런데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200-300년 전에 경주 이씨가 처음으로 칡뿌리를 캐내고 광범위하게 개척을 했으나 그 후에 관리가 소홀하여 칡덩굴이 다시 가득히 덮였다 해서 ‘갈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깊은 심산궁곡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문헌상으로 충청도 서산 지방의 중인(中人) 출신으로 전라도 고산을 거쳐 1801년 신유박해 때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으로 피난 온 김강이 시몬(金鋼伊, 1765?-1815년) 형제 가정이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가 입교시킨 새 신자 몇 사람과 함께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으로 이주해 따로 교우촌을 이루어 삶으로써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왕피리 지역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1815년 경상도에서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강이는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金思健, 1794-1839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김강이는 아우와 함께 강원도 원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사형 집행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인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 형벌로 인한 상처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한편 아우 김창귀는 원주에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가게 되었고, 조카 김사건 또한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으나 1827년 정해박해 때 다시 체포되어 대구 옥에서 12년의 혹독한 옥중 생활을 끝으로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김강이 시몬과 김사건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