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카데미에서 같이 온 교사의 부탁을 받고 오게 된 폐서고(안 쓰는 책을 모아놓은 창고). 왕궁 내에서 꽤 떨어진, 안 쓰는 책들만 모아놓은 여기까지 왔다. 책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폐서고 안을 훑기 시작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1년 전에 여기 놔뒀다나 뭐라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왜 하필 내가 걸린 거야. 뭐, 슬슬 여름 축제도 발동이 걸리는 것 같고. 이해를 해줘야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생각에 빠져 복잡한 와중에도 부탁받은 도서의 제목은 잊지 않는 그녀다.
“죽여야 합니까?”
흠칫!
난데없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웬 살벌한 소리. 잘 못 들었을 거라고 여긴 다나는 다시 책 찾는 것을 계속한다.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소문에 새어나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으음~!”
우뚝. 심각한 고민 섞인 소리를 들은 다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다, 이 이상 더 걸으면 위험해.
잘 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나는 책꽂이 뒤로 몸을 숨긴 채 얘기가 어디서 흘러나오고 있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 귀를 쫑긋 거렸다. 그녀의 맑은 회색 눈동자가 서고 전체를 살핀다.
‘찾았다! 폐서고의 출입구를 중심으로 했을 때 왼쪽 맨 안 책꽂이 뒤야! 목소리로 들어봐선 사람이 둘, 그것도 남자. 게다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덜그럭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봐선 갑옷을 입고 있는 건가?’
다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두 남자는 책꽂이 뒤에 몸을 숨긴 채 숙덕댄다.
“하지만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냥 두게.”
“위험합니다! 살아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선 안 됩니다! 그 아이는 종자 자체가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 아이? 종자? 누구를 말하는 걸까. 다나는 궁금함에 귀를 뗄 수가 없었다.
“이름이- 시우라고 했던가? 이번 의학학습원정대의 대표로 온 모양이던데.”
다나의 눈동자가 커진다. 누구? 시우? 의학학습원정대 대표라고?
선생님 세 명이 통솔하는 의학학습원정대에도 학생 대표가 있다. 방금 들은 대로 그 대표가 바로 1학년 회장 시우다.
“파이랑이라는 성씨를 처음 들었을 때는 몰랐습니다만, 아까 지나가는데 보니 확실하더군요. 노란 머리에 보라색의 눈동자! ‘그 아이들’ 의 전형적인 트레이드마크이지 않습니까. 글쎄, 죽여야 한단 말입니다!”
시우를 말하는 게 확실하다! 그 직후 다나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런 살벌한 말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내뱉다니, 너무하잖아!
“그만두게! 그 아이는 심심해서 놀러온 게 아니야. 파올레아카데미에서 파견 온 예비 의사란 말일세.”
띠띠 띠띠.
무의식적으로 얼른 자신의 시계를 붙잡는 다나.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은 정각이 아니다. 더불어 자신의 시계는 정각 알림을 하지 않도록 설정해놓았다. 그래도 안심이 안 돼서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10시 30분. 정각 알림 해제 중.
다나 자신의 시계 소리가 아님이 확인됐다. 그럼 누구 시계지?
“교대 시간입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음, 수고하게.”
저들에게서 난 소리구나. 다나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쉰다.
이윽고 덜그럭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다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있는 힘껏 참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제멋대로 떨려왔다. 긴장하고 있는 거야~!!
그 소리는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폐서고를 나가는 것이다.
안쪽에 사람이 한 명 남아 있으나 다나는 얼른 이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폐서고를 나왔다. 나온 뒤에도 두근거림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시우를 죽여야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폐서고로부터 거리를 적당히 둔 다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신고 있는 부츠가 굽이 적당히 높아서 무릎 꿇고 앉아도 무리가 없었다.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 한 채로, 다나는 자신의 종아리를 만져보았다.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진다.
‘세상에! 지금 떨고 있는 거야? 나 데뷔 첫무대에서도 안 이랬는데! 뭐하는 거야? 무슨 비교야, 이게 지금? 폐서고에서 시우를 죽이려는 자들이 나타난 거랑, 나 데뷔 첫무대랑 무슨 상관인데 비교 따위를 하고 있는 거냐고.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이 나라에서는 시우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야. 나보다 더.’
저들이 알고 있는 건 시우의 노란 머리와 보라색의 눈동자. 그렇다면-.
“…….”
오랜만에 넋을 잃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정신줄을 놨다. 마스터 챔피언 리우 진의 모습으로 따지자면 가나의 콘서트가 있기 전 일요일, 죠 가문 사람들을 만났을 때가 마지막이다. 시우의 모습으로 따지자면 언제 마지막으로 넋을 놨는지 모르겠다. 오늘처럼 이렇게 멍해지는 게 얼마만이던가.
물론 넋이 나간 건 그녀만이 아니다. 같이 있던 원정대 모두 정신줄을 놨다.
“우리 넋 빼는 게 취미에요, 언니는? 그렇게 정신줄 모아서 뭐에 쓰려고?”
2월 첫 날, 다나의 행동에 의해 모두 넋을 놨던 것을 잊지 않고 있는 시우다.
“시우 양 쌍둥이야?”
꼬집!
마찬가지로 넋을 놨던 워더가 중얼거리면서 시우의 팔을 꼬집었다.
“아파, 이씨!”
그러자 시우가 아닌 다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차드가 동그랗게 모은 입을 풀었다.
“다나 누나 목소리다.”
“그래, 나야.”
노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또 하나의 시우, 아니 다나가 찡긋 윙크를 하자, 그녀와 마주보고 있는 진짜 시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언니 뭐하는 짓이야?”
다나는 가발을 벗으며 히죽 웃는다.
“나 변장 잘 됐어?”
“언니. 뭐하는 짓이냐고요.”
“그런 게 있어. 잠깐 우리끼리 얘기 좀 할게.”
다나는 시우 손을 붙들고 학교 현관을 나온 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널 노리는 자들이 있어.”
“날? 왜?”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아까 폐서고에 갔다가 들었어. 아주 무서운 인간들이었어.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시우 너, 학교나 아미네 집을 나갈 때는 얼굴과 머리를 가리는 게 어때? 내가 이렇게 너처럼 변장을 하고 같이 다녀줄 테니까.”
다나의 변장 이유에 대해 알게 된 시우는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좋은 방법인건가?
시우의 얼굴을 살핀 다나는 보라색의 콘택트렌즈를 빼며 말했다. 원래 눈이 나쁜 편이 아니라서 1.0 정도의 시력이 있는 렌즈를 끼면 오히려 안 좋다. 렌즈에 가려졌던 깔끔하고 맑은 회색 눈동자가 나타난다.
“왜? 별로야?”
“음~.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내가 직접 겪은 상황이 아니다 보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널 죽이려고 드는데도 변장을 안 하겠다고?”
“난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나쁜 짓을 한 적도 없고, 원한 살 일을 한 적도 없는 걸요.”
“부모님 때문은 아니고?”
불현듯 아버지가 남긴 빚이 떠올랐다. 남은 금액이 2천만 페이 정도 된다.
“그럴 확률이……. 아주 없지는 않네요.”
심각한 답변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던 탓에 다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한다.
“뭐라고? 부모님이 사고를 치신 게 있어? 어머니는 한 5년 전에 자취를 감추셨다면서.”
“응. 엄마가 사라지기 두 달 전쯤에 아빠가 투신(=자살)을 하셨어요. 사업이 부도가 난 게 그 원인이라고 유서에 남겨져 있었고, 5천만 페이의 빚을 엄마와 제가 떠안았었는데, 엄마가 그렇게 사라지면서 빚은 저한테로 건너왔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언젠가 너희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럼 그 빚은 다 어떻게 해? 사채업자들이 가만히 있어?”
“저 고급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잠자코 있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학비까지 대어준다고 했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마스터 챔피언이 되고서 받은 상금이 꽤 되거든요.”
마스터 챔피언 우승 상금은 500만 페이이다. 올해로 5년째에 접어드는 지금까지 받은 상금의 총액은 4천 5백만 페이이다.
“빚이 5천만이고 상금이 4천 5백만이면, 이제 5백만 페이가 남아있겠네?”
물론 상금의 총액을 다 갚았을 경우에 그렇다. 다나의 말을 들은 시우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그럼 저는 뭐 먹고 살아요. 기숙사 학교인 파올레 입학 전에 살았던 집은 2층 월세라서 매달 월세도 나갔었는데요, 뭐.”
“으흠~ 그럼 정확히 얼마 남아있는데?”
“이제 2천만 정도 남아 있어요. 사채업자들은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돈 갚는 걸로 알고 있어요. 변장술이 너무 뛰어난가 봐요.”
시우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으나 다나의 얼굴은 심각한 채 그대로다.
“좋니? 빚더미에 앉아 있으면서 좋아? 참. 그럼 집은 팔았어?”
“엄마 돌아오실까 봐 팔지 못 하고 있어요.”
다나의 눈이 다시 커진다.
“그럼 헛돈 나가는 거네! 월세라며!”
“집 주인 할머니께서 봐주고 계세요. 기숙사 학교 입학했다고 얘기했더니 그럼 집 운영비만 받으신다고 하셨어요.”
다나는 입술 끝을 씰룩댔다.
“아주 안 받는 건 아니구나.”
“할머니도 먹고 사셔야 하니까요.”
시우는 애써 웃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자! 모자와 선글라스 사러 가자!”
“왜요?”
“파란색은 마스터 챔피언의 트레이드마크니까 다른 색으로 사야 할 거 아냐. 가자.”
다나는 시우 손을 잡아끌었으나 시우는 꼼짝도 안 했다.
“아. 그럼 은행부터 가야 해요.”
“왜?”
“돈 찾으러요.”
“부자네~”
다나의 장난기 섞인 대꾸에, 시우는 850만 정도가 남아 있는 통장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