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기사(초고)는 지난 3.31일자 26면기사 '알고싶은 직업의 세계'와 관련하여
설계사무소의 노동현실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한겨레신문 '독자칼럼'으로 제출된
초고입니다.
다소 긴 내용이지만 우리나라 건축계의 현실이 얼마나 어떻게 왜곡. 미화되고 있는
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최종기사는 지난 4월6일자 한겨레신문(http://www.hani.co.kr/) '독자칼럼'
(제목: 근무여건 최악인 설계노동자)에 요약형태로 실렸으니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설계사' 또는 '실내디자이너, 건축가' 등의 용어에는 설계사무소의 '사용주'와 '노동자'의 구분이 없다. 때문에
위 기사의 내용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사용주들이나 누릴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와 (설계)일을 통한 성취감이
마치 다수의 설계사무소 노동자들도 그러한 것처럼 착각하거나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기 쉽다.
지난 95년경 이름만 대면 알만큼 유명한 한 여성 연기자가 인테리어설계사무소의 능력있는 실장으로 등장한 어느
TV연속극이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바 있는데 이 연속극은 매우 심하게 설계사무소의 현실을 왜곡하면서 많은
이들 특히 '꿈많은 여고생'들에게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환상'을 주입했다.
(덕분에 그 해 이후 대학입시에서 거의 모든 대학 건축관련학과의 선호도가 법대.의대를 뺨치며 예전에 정원의 10%
이내에 불과하던 여학생의 비율이 30~40%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한겨레의 위 기사는 주로 인테리어설계사무소를 중심으로 소개됐는데 건설산업내에는 인테리어사무소와
건축설계사무소 외에도 구조, 토목, 전기, 기계, 소방, 조경, 도시계획, 교통, 환경정화시설 설계사무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고 전문화돼 있다.
그러나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삶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결코 우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향기를 음미하며 고상한 자세로」 설계도면을 그리는 '디자이너'가
'설계노동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자 현실을 무시한 '환상'이다.
담배 한모금 커피 한잔 조차 눈치를 봐야하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연속극은 어느 연속극에서도 보기
어렵다. 얼마전 어느 후배 노동자의 경우 자신의 책상 위에 일회용 커피잔이 놓여 있다고해서 그 사무소의
사용주-소장으로부터 모욕스런 폭언을 듣는 일도 있었다.
사람보다 '돈'(설계이윤)을 더 중히 여기는 설계판 사용주들의 돌도끼식 경영인식과 덤핑설계(수주)로 인해
대다수의 설계노동자들은 '노동자'이기보다 예술 배우는 '예비거장'으로 왜곡.미화되고 이를 토대로
'도면생산공장의 기계부품' 취급받으며 저임금.장시간노동의 악순환을 강요받고 있다.
보랏빛 안경을 벗고 노동자의 현실을 올바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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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중 하루만 예술가이고 나머지는 기술자다..."
'왜 우리는 5월1일 노동절에 쉬지 않냐?'고 따지는 설계노동자의 질문에 설계사무소의 소장들은 "1년 중 5월1일 단
하루만 너희들은 예술가"라며 그래서 "당연히 출근해야 한다"고 농담반 진담반 강변한다. 보랏빛안경을 벗고
우리나라 설계사무소의 노동현실을 똑바로 보라.
우리나라 약 8000여 곳의 약 20만여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이 아직도 '노동자의 날' 5월1일에 노동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은 왜 비껴가는가? 설계사무소 100군데 중 99곳 이상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상습적인 임금체불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왜 은폐하는가?
텔레비전에 비춰지고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설계사무소는 수십년 동안이나 근로기준법의 완전한 사각지대였고
노동3권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돼온 노동착취의 성역이었다. 유럽의 노동자들이 '주35시간 노동'을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은 야근.철야.휴일근로 등 주당 '시간외근로'만도 30~40시간에 달해 주당
총노동시간이 무려 70~80시간에 이른다.
강요된 시간외근로에 대한 별도의 법적 임금은 당연히(?) 지급하고 있지 않다. 저녁밥값과 다음날의 출근을 위한
교통비 등 '일 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만을 야근.철야비 명목으로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지난
98년 IMF 3년동안 설계사무소의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경영난'이라는 허울좋은 잣대로 '단물 빠지면
버려지는 껌처럼' 길거리로 버려졌고 지금도 버려지고 있다. 또한 길거리로 내몰렸던 설계노동자 중 일부는
짧게는 1개월 길게는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잠깐 쓰고 버려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마음과 몸은 황폐해져가고 있다. '다양한 삶'을 살기는커녕 '엄청나게 통제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2001년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지난해 9월 민주노총 산하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소속의 서울경기지역설계노동조합(이하 '설계노조')이
조사한 '2000년 설계사무소 임금실태조사'결과와 '2000년 조합원 생활실태 및 의식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임금이 무려 4~5년전인 95~96년의 임금수준에 머무르고 있어 근로조건 전반의 하락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또 설계노동자 10명중 6명 이상이 설계는 물론이고 건설업과는 전혀 다른
업종으로의 전직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향후 설계업계의 인력수급구조가 크게 흔들려 경쟁력 확보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구조적으로 조작.유포되고 있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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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은폐하는 환상은 의외로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자의든 타의든 기존의 몇 안되는
건축언론(월간지)들 뿐만이 아니라 한겨레를 포함하여 중앙일간지들이 그 들러리로 나서고 있다. 특히 지난
1999년 '건축문화의 해'를 전후로 이 현상은 더욱 확대.심화돼왔다.
그 구조의 핵심은 당연히 '설계예술'로 직.간접적인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다. 건축3단체(대한건축사협회,
한국건축가협회, 대한건축학회)의 기득권집단을 중심으로 정부(건설교통부, 노동부)와 건축관련잡지를 포함한
각종 보수언론과 TV방송사와 광고업체 그리고 건축 및 디자인관련학원들도 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임금과 고용이 파괴되고 그로인해 설계노동자의 삶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과는 상관없이 극소수 사용주들의
입장이 마치 대다수 노동자들의 현실인 것처럼 '환상적인 직업'이라며 거품만 부추긴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IMF의 통제로 건설산업이 활성화될 수 없는 정치적 한계와 20~30년전의 경영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설계사무소
사용주들의 한계 속에서 황당한 근로조건을 제시하며 임시.계약직으로 구인광고를 내는 사무소에 이력서를
낸다한들 정상적인 고용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러한 현실은 철저히 은폐. 무시하면서 무책임하게 늘어놓는 '환상'은 분명 '사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IMF
덕분에 이 환상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지만 여전히 교육현장과 노동현장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범법자들이 예술을 가르치고 있다면 믿겠는가? 충격적이겠지만 이는 현실이다. 현재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노동부와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설계사무소 사용주들 중 일부가 서울의 모 유명대학
건축관련학과에서 '교수' 노릇을 하며 학생들에게 '종합예술'을 가르치고 있다. 노동현장에선 예술을 빙자한
노동착취를 일삼으면서 교육현장에선 노동착취의 현실을 은폐하고 미화하고 왜곡하기 위해 '예비거장의식'을
재생산시키며 '사이비교육자' 행세를 하고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영세사업장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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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삶을 통제.억압하는 정치구조와 현실을 비껴가는 교육구조 그리고 사람보다 돈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영악한(?) 예술가(기득권)집단의 노동착취구조.
다만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치 않는 이 구조가 '마술사.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등의 환상을 재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그 피해가 다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어두운 현실이 바로 그 피해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정론을 지향하는 한겨레가 현실을 의도적으로 비껴갔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건축언론과 보수언론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중의 하나를 한겨레 역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의 해당기사에 소개된 어느 인테리어사무소처럼 우리나라 설계사무소의 90% 이상이 10여명 안팎의
영세사업장이다. 그러나 대규모(약 100여명)이거나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명도 있는 몇몇 설계사무소의
사용주가 마치 우리나라의 설계예술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듯이 소개되고 있다.
그 어느 언론에서도 절대다수 영세사업장 설계사무소의 사용주와 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 이후라도 한겨레는 아직은 힘 없고 작은 다수 설계사무소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줄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