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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64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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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문화/교양/정보 스크랩 상기하자 6.25
김영원 추천 0 조회 70 06.06.25 04:3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6.25를 상기하자
 
한국중공업(주)감사 상비역 소장 배병노

◎ 주요 약력

육군소위 임관(1950.9.12)
육군소장 진급(1980.7.1)
소장 예편(1983.10.31)
1950년에 3연대 중대장 보직이후 연대장, 사단장, ○○학교장 역임.
- 육군대학졸업(1965)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1967)
- 국방대학원 졸업(1969)
▶ 무공훈장 9개
▶ 보국훈장 천수장; 삼일장
▶ 미 동성훈장

6.25가 발발한지 어느덧 34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비참하고 혼탁한 과중에서도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피눈물나는 항전을 계속했던 당시의 실상을 되새겨보고 앞으로 우리들의 자세를 다짐해 보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 많은 임전기록중에서 일부를 소개하여 이날을 상기하고저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바로 그날 미명에 북한 괴뢰집단은 불법남침을 개시하였고 불의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전후방어에 사력을 다하였으나 사전에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적의 강력한 전력앞에 아군의 전력은 중과부적이어서 후퇴를 거듭하지않을 수 없었고 조국의 운명이 간척두에 달려있던 최후의 보루 낙동강전선에서 피아간 치열한 혈투를 계속하고 있을 무렵 서울을 비롯한 경기·충청지방과 일부 경상도지방에서 피난해온 청년 약 2만여명이 대구시내소재 봉명국민학교에 집결, 조국수호의 대열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을때 본인도 충청도에서 후퇴, 7월 25일 상기장소에 도착하여 이 중의 한사람으로 가담하였읍니다.

도착 이틀후인 7월 27일 오전 갑자기 육군본부 직할 독립제1유격대대의 창설이 있어 본인은 여기에 지원하므로써 부대창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읍니다. 이 부대의 구성요원은 18세에서 40세에 이르는 애국심이 투철한 학생 및 청년들로서 18세의 소년들은 중학교 4,5학년생(현 고등학교 2,3학년생)으로 M-1 소총을 메면 땅에 끌릴 정도로 어린 소년이었읍니다.

즈음 소년들은 영양상태가 좋아 고교 2,3년생일지라도 성인과 거의 차이가 없지만 당시는 일제치하에서 잘 먹지도 못한 청소년들이라 행군도 잘할 수 없을 정도였읍니다. 우리는 당일로 부대를 편성 경북신영으로 이동하여 다음날 인근 산기슭에서 1인당 8발씩의 실탄사격실습을 한 후 바로 전투배치에 들어갔읍니다. 그만큼 당시의 전황은 너무도 긴박하여 1주일 정도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전두에 임하게 되었는데 이는 현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1차 전투는 1950.7.30. 경북 영주군에 소재한 보현산 1124고지 공격이었읍니다. 6일간의 공격끝에 보현산을 완전점령하고 구동산의 적 180여명을 비롯하여 충효동에서 700여명, 지동리에서 800여명을 격멸하고 첫 승전고를 울렸던 것으로 이 전과는 국군전사에 기록으로 남아있읍니다. 이는 전투혼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청년, 학생들의 굳은 의지가 한데 뭉친 정신력의 승리라고 하겠읍니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이 부상당하여 본인이 중대장의 보직을 받았는데 아직 22세의 젊은 나이로 경험도 경험도 부족하여 매우 당황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도 철부지인 나이에 중대병력을 통솔하여 위급했던 당시의 상황들을 어쩌면 그렇게도 용감하게 감당해 냈을까하고 자고해 봅니다.

후 공인상 1192 고지 전투를 비롯하여 칠용의 가산성 및 다부동 전투, 영천의 대회전, 안강, 기부 등에서 전투를 계속했으며 특히 영천 → 경주 가도 주변 산악을 누비면서 피아간 공방전을 계속 하다가 아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목포에서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개경, 충주를 거쳐 1950.10.6. 수도 서울에 입성하였읍니다. 포천을 경유 3일 후인 10.9. 38선을 돌파하였읍니다. 38선을 넘을 때의 감회는 이루 말할수 없읍니다. 승전강대국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그어졌던 남북분단의 선을 우리의 힘으로 싸워서 무너뜨렸다는 자부심과 그 여세를 몰고 북침하면 남북통일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열이 넘쳐 이었읍니다. "38선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전우가를 힘차게 부르며 북진하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읍니다.

이 작전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 사실은 1950.10.8 포천북방 약 4㎞지점, 현재의 국도 좌측에 지서가 있었고 도로우측에 가옥이 2호가 있었는데 바로 그집뒤에 밤나무 3그루가 있는 곳에 일가족 12명의 사체가 발견되었읍니다. 이중에는 생후 약2개월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의 총살된 사체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이는 북괴군이 후퇴하면서 저지른 만행임을 확인했을때 다시한번 공산당의 악랄함을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었읍니다.

그후에도 계속 전진하여 1950.10.20 대동강을 도하, 평양을 경유 개천 → 구장 → 희천을 향해 전진중 처음으로 중공군과 조우하여 교전하였으며 이때 작전상의 후퇴명령에 의하여 덕천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반격을 개시하여 소춘산 좌측봉까지 점령했었는데 인해전술에 의한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이 있자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통한의 후퇴를 거듭한후 양구북방 크리스마스 고지에서 휴전을 맞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인은 6.25를 회상할때마다 당시 전사한 전우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오늘과 같이 해방조국의 품안에서 자유를 구가하면서 편히 지낼수 있었을까 하고 자문해보면 언제나 머리를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빌곤합니다.

이 전쟁속에서 피아간의 인적, 물적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휴전된지 34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 종전아닌 휴전속에서도 조국의 해방과 국민소득의 향상으로 전쟁당사국 답지않게 부를 누리고 살면서 당시의 비참했던 모습은 거의 잊어가고 있으나, 반면 북한괴뢰는 국민총생산(GNP)의 20%나 되는 막대한 자산을 군사력보충에 투입하면서 재남침의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평화적 통일을 외치고 있음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될줄 압니다.

이러한 북괴를 이기기 위해서는 저들의 허위성을 깨닫고 저들보다 군사적 면에서의 우위확보는 물론 정신적 면에서도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정치경제 사회문화 각 분야의 꾸준한 성장을 지속하여 안정되 국가를 이룩하는 길만이 전쟁을 억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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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06.25 04:42

    첫댓글 생후 두달된 아이를 죽이는 공산당의 만행 - 수천명의 양민을 무차별 살해하는 요즘 테러리스트에 비하면 새발의 피

  • 06.06.25 07:58

    당시로는 옳은 얘기 이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지정학적 계산이 바뀌고 있어 단순한 반공은 오히려 어리석게 보일수 있지요...

  • 06.06.27 09:10

    더욱이나 같은 민족끼리 싸웠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였읍니다. 일제의 만행으로 고생고생하신 선조님들 - 머리속에 들은 무슨 -- 주의땀시 서로 죽이고 밟고 --- 가슴아파 ... 아파 ... 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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