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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에 개봉하는 영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은 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흔히 봐왔던
파괴와 액션이 중심을 이룬 전쟁 영화와 다른 관점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조명한다.
생과 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전장 속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라는
더 높은 차원의 이념을 중요하게 여긴 MFAA의 위대한 행적을 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영화의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조지 클루니는 전쟁 영화 특유의 무거운 톤 앤 매너 대신
마치 히틀러를 약 올리는 중년들의 유쾌한 모험담처럼 영화의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덕분에 해외 유명 배우들의 유쾌한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인류의 문화유산 보호라는
높은 정신성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준다. 마치 '훔치기 전문'이었던
[오션스 일레븐]의 캐릭터들이 이번에는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든 버전이랄까?
글 l 아트앤팁닷컴(artntip.com) 구성 | 네이버 영화
전쟁은 인간의 생활 양식은 물론, 전쟁 전까지 유지되어 오던 문화마저 뒤엎을 수 있을 정도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인류사에서 미적,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를 '반달리즘'이라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20세기의 대표적인
반달리즘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독일은 문화 탄압 행위는 물론 높은 미적 가치를 지닌 미술 작품을
약탈 및 파괴하였으며, 독일에 대항한 연합군 역시 전쟁 초기에는 승리를 목표로 이러한 반달리즘을
보호하려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4년 2월 15일, 독일군 매복을 염려한 연합군은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공중 폭격을 가했는데 정작 독일군은 없었고 연합군은 높은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연합군은 이를 무마시키고,
나치 독일이 약탈하고 파괴한 유럽의 미술품을 보호하기 위해 기념물 / 미술품 / 기록물 전담반인
MFAA(Monuments / Fine Arts / Archives)를 창설하였다.
MFAA는 부대원들이 전투 능력보다 미술사, 역사 분야의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창설된 만큼 창설
초기에는 연합군 내에서 계륵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나 유럽 내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호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전쟁에 임하였고, 결국 그들의 노력으로 현재 우리는 인류의 위대한 미술품들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27일 개봉을 앞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예술작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모뉴먼츠 맨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의 컨셉에 맞는 두 번의 특별 시사회를 가진다.
지난 2월 19일(수)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은 모더레이터 홍경한 미술평론가와 함께 다채로운
분야의 국내 문화예술 전문가, 문화예술 커뮤니티 회원들이 영화를 본 후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아트디렉터 한젬마, 이효재 한복전문가, 반이정 미술평론가, 송한나 큐레이터,
원유상 큐레이터, 박강자 금호미술관 관장, 김윤섭 미술경영 연구소 소장, 이현호 홍익대학교 건축과학과장,
팝아티스트 낸시랭을 비롯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아트선재센터, 성곡미술관,
대림미술관, 오페라갤러리 등 다양한 관계자들이 시사회에 참석, 문화예술계의 저명인사들이 함께한
이번 특별 시사회는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부터 문화재와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
가며 뜨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2월 25일(화) 진행되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 특별 시사회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에 대한 뜻을 나누고자 진행되는 시사회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및 관계자,
문화재청 관계자 및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소속 담당자와 관계자, 해외 문화원 및 문화원 소속 관계자 등이
참석해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유년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규칙적인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편안함,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와
강한 성격으로 실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등과정 이수 후 고등과정에서 유급당하며 자퇴한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다른 학교에 재입학을 했지만, 다시 자퇴하였다. 화가로서의 재능을 갖고 있던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신분 상승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이유로 화가가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최종 불합격한다. 이에 히틀러는 재수를 하며 재도전하였지만 연이은
낙방으로 미술학교 교장을 찾아가 항의까지 한 적이 있다. 이후 건축학교 입학에도 도전한 히틀러는 연이은
낙방에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하였는데, 그가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당시 유행하던 미술사적 흐름에
맞지 않은 화풍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앙리 마티스 등의 야수주의가 유행하던 시절로 야수주의는
외부 세계에 대한 감정을 강렬한 붓 터치와 색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의 그림은 역사, 신화 속 인물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인체로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나 볼 법한 건축을 웅장하게 그리는 신고전주의
화풍을 기반으로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로 그렸기 때문에 당시 트렌드와 맞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는 청년 시절부터 추구해 온 신고전주의 화풍과 정권 유지를 위해 독일 국민들을 세뇌시켰던 인종차별주의
정책에 의거하여 다른 민족들(라틴, 슬라브 등) 사이에서 유행한 감정 표현 중심의 미술을 경멸하였다. 즉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인체적 우월성과 높은 정신성을 홍보하기 위해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 미술을 모티프로 한 신고전주의
기법을 도입하여 독일 농민, 노동자들의 투쟁적 생활상을 강조한 것이다. 쉽게 말해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뒷받침이
되어 줄 독일인들을 위대한 아리아인이라 칭송해주며 이상화된 인체, 형태를 강조한 고대 그리스의 신처럼 묘사하도록
장려한 것이다. 반대로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과 같은 유럽 다른 나라들의 미술을 '타락한 정신의 산물'로
규정하였다.
특히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히틀러가 가장 싫어했던 작품으로 피카소는 독일 나치 입장에서 '타락한 예술의
핵심 인물'로 경멸 받았다. 이는 예술이 권력의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게르니카'를 직접 볼 수 없지만, 히틀러의 지시로 독일군이 미술품을 불태우고 퇴각할 때,
그 잔해 속에서 피카소의 이름만 남아있는 액자 파편이 등장한다.
히틀러는 고전주의, 사실주의 미술만을 위대한 미술로 여기는 편협한 취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 소장되어 있었던 르네상스, 사실주의 미술품 등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직후 다뉴브 강가에 있는 고향 오스트리아에 린츠 미술관을
건립하고 프랑스 개인, 특히 유대인 소장품을 모두 압수하여 보관하라고 한 히틀러의 지시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리고 프랑스 미술품 몰수 책임부서인 전국특별참모부(ERR)를 설립하여 점령 국가들에 소장되어 있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기도 하였다.
당시 미술품 구입에 사용된 예산은 7,000만 마르크로 8,000여 점이 넘는 작품 수집에 사용되었다. 전쟁 패망의
그림자가 엄습해오던 1944년에도 미술품 구입 예산은 되레 늘어날 정도였으며 이는 히틀러의 미술품 수집 열망을
대변한다.
1945년 3월 19일은 '모뉴먼츠 맨'들에게 최대의 위기가 닥친 날이다. 히틀러가 패망을 직감하고 자신이 죽거나
독일이 패망하면 독일의 사회기반시설(수송, 통신시설, 보급창고 등)을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심지어 예술품까지. A.D. 64년 로마의 황제 네로가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에 빗대어
이를 히틀러의 '네로 명령'이라고 칭한다. 마치 삼국지에서 조조를 중심으로 뭉친 반 동탁 연합 세력에 쫓기게
된 후한의 독재자,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치면서 연합군들의 군수 물자 보급을 방해하기 위해 기존의 수도였던
낙양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합군의 시원치 않은 지원과 격렬해져만 갔던
전쟁 속에서 미술품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모뉴먼츠 맨 들에게는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나치의
군수 및 전시생산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의 만류와 명령 불이행으로 '네로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42일이 지난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신의 벙커에서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하였다.
모뉴먼츠 맨은 13개국에서 온 350여 명의 남녀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의 직업과 연령은 매우 다양하였다.
영화 속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프랭크 스톡스는 당시 저명했던 미술사학자인 조지 스타우트를 모티프로 하였다.
조지 스타우트는 예술품 보존에 있어서 독보적인 인물로 모뉴먼츠 맨(MFAA)의 창설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제임스 그레인저는 당시 뉴욕 메트로폴리탄 큐레이터였던 제임스 J. 로라이머를 모티브로 하였다.
제임스 J. 로라이머는 훗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다. 영화 속 클레어 시몬느는 로즈발랑을 모티프로 하였다.
로즈발랑은 파리 죄드폼 박물관의 직원으로 나치 치하에서 4년 동안 나치가 약탈한 작품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추적하였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모뉴먼츠 맨은 나치의 문화재 은신처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건축가였던 로버트 포시,
권위 있는 로마상을 수상했던 조각가 워터 행콕, 극단장이자 예술품 감정가인 링컨 커스타인 등 예술계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뉴먼츠 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전쟁 속에서 전쟁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들은 본래 미술사학자, 큐레이터, 건축가, 조각가 출신으로 전투 병력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가 포화와 함께 사라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전투복을 입고 총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어떠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내건 문화유산 수호 작전을 펼치던 모뉴먼츠 맨(MFAA)은 창설 초기에는 아군인
연합군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하였다. 승리가 목표인 연합군에게 문화유산의 보존을 이유로 작전을 방해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군이 자신들의 진영에 문화유산이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거짓 정보를 흘려서 연합군의 공격을 모뉴먼츠
맨(MFAA)이 저지하게끔 계책을 펼치는 등 독일군에게 이용당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모뉴먼츠 맨(MFAA)을 독일군의
스파이로 의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결국, 연합군 내에서 철저히 따돌림당하며 잡무만 하던 그들은 존재 자체가
거부당했으며, 유명무실한 부대 취급을 받았지만 묵묵히 문화유산을 수호하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였고, 모뉴먼츠 맨
(MFAA)은 전쟁이 끝난 후 위대한 인류 문화유산을 지킨 수호자이자 전쟁 영웅으로까지 그 위상이 격상되었다.
예술의 정치 권력화에 집중하고, 편협하지만 예술 수집 취향을 지녔던 히틀러는 총통 미술관 건립을 목적으로 유럽
각지에서 많은 미술품을 약탈, 수집하였다. 그리고 1945년 5월 독일의 패전선언으로 나치가 붕괴되면서 나치의 파렴치한
행적들이 하나둘씩 밝혀졌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약탈한 예술작품 목록이 발견되었다. 이에 모뉴먼츠 맨(MFAA)은
작품 목록을 근거로 나치가 약탈한 작품들을 되찾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오로지 작품 목록과 사람들의 증언에만
의존하여 나치가 약탈한 작품들을 찾아내는 과정도 힘겨웠지만, 그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작전 수행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뉴먼츠 맨(MFAA)은 좌절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였고, 독일 노인슈반슈타인성과
오스트리아 알타우세의 소금광산에서 수천 여 점의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되찾은 문화유산에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 밖에 소장된 작품인 [성 모자상], 렘브란트의 [자화상], 라파엘로의
[청년 초상] 등 그 이름만으로도 놀라운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이들의 눈부신 활약은 종전 후에도 계속되었고 그 덕분에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피로 얼룩진 참혹한 전쟁 후에도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모뉴먼츠 맨(MFAA)은 전 세계 사람들의 찬사를 뒤로 하고 1951년
최종 해체되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은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다 빈치가 처음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벽에 회칠을
한 후 템페라로 채색을 한 까닭에 완성 직후부터 안료가 떨어지는 등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예수의 머리를 소실점으로
하여 르네상스 때 확립된 기하학적 원근법이 완벽하게 구사된 작품으로 이 덕분에 르네상스 고전주의 특유의 안정된
구도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직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한 식사 자리에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라는 이야기를 하자 제자들이 놀라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특히 예수가 십자가 처형 이후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자 이를 의심한 성 토마스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옆구리에 찔린 창 자국을 손가락으로 확인한 적이 있는데, 다 빈치는 이를 모티프로 하여 이 작품 속에서도
예수의 왼편에 앉은 성 토마스를 검지 손가락을 올린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영화에서는 연합군의 폭격을 당한 이탈리아인들이
건물을 보수하는 장면에 배경으로 등장한다.
라 조콘다(La Gioconda)로도 부르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을
그린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고전과 예술에 심취했던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를 초청하였는데, 이때 다 빈치는
[모나리자] 스케치 본을 가지고 갔고 프랑스에서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다가 1911년에
도난당했고, 1913년에 피렌체에서 발견하여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오게 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답게 다 빈치는
이 그림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모나리자]는 안정된 대기 원근법으로 구성된 가운데, 안개에 휩싸인 듯한 대기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또렷한 인물의 피부 표현, 안정감 있는 4/3 반신상 등은 이후 서양 초상화의 전형으로 자리 잡을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은 본래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연인이었던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담비는 본래 순수함을 상징하는 유럽의 상징으로 통하는데 이 작품 역시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요소로
이입되었다. 배경 표현을 억제하고, 화려한 장신구를 최소화하면서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이때까지 유행하였던 측면 초상의 틀을 깨고 시선을 왼쪽으로 향하고 있는 반신상은 왼편에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현실감과 인물의 동세를 더해준다.
네덜란드의 거장이자 바로크 미술의 대표 작가인 렘브란트는 40여 년 동안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자화상을 그릴 때
다양한 표정 연습 등 자신만의 화풍 완성을 위해 매진했으며,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등장하는 여러 위대한 작품들에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했던 렘브란트는 1460년대 아내와 아들이 죽은 충격과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그의 자화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 자화상에는 다채로운 표정을 바탕으로 자신을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이론에 능통한 인물로 묘사하는 동시에 모피나
금장식 등으로 부유한 모습을 주로 표현하였는데, 노년이 될수록 정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경제적 파산과 가족의 죽음 등에서
비롯된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젊은 시절의 자화상보다 붓 터치가 더 자유롭고 대담해졌다.
1642년경 프랑스 반닝코크 대장의 중대가 주문한 그룹초상화로 대장부터 부하까지 30여 명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지금은
높이 평가받는 작품이지만 당시 렘브란트는 이 작품으로 기점으로 화가로서의 명성이 하락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전의
딱딱하고 형식적이었던 그룹초상화와 달리 강렬한 조명과 움직임, 각자 다른 자세들로 생동감을 더해 파격적인 구도를
보이지만, 이러한 표현으로 가려지거나 작게 표현된 사람들의 불만으로 작품 주문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그룹 초상화를 주문할 때 그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각기 더치페이를 했기 때문에 누구는 주인공처럼 보이고,
누구는 배경에 놓인 채 주변 인물처럼 보이는 것을 시도할 수가 없었지만,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그릴 때 자신의 창작 의지에
맞춰서 과감하게 이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 후,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나폴레옹에게 그 진가가 높이 평가되어 지금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야경]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이 작품은 본래 16시에서 18시 사이에 그려졌다.
하지만 복원 작업 중 착색으로 인한 어두운 광택 때문에 [야경], [야간순찰대]라는 제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전성기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그린 초상화, [빈도 알토비티]이다. 라파엘로는 1512년에 피렌체의 돈 많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젊은 은행가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신비로운 표정과 아름다운 색감으로 라파엘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 중에는 그림 속 주인공이 라파엘로라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1512년경 피렌체에서 라파엘로가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후 19세기 한 감식가의 말 한마디로 라파엘로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그 후 독일
뮌헨의 황태자가 소유하였고 19세기 말 라파엘로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당한 적도 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 치하에서
외면당하다가 발견된 후 영국으로 옮겨졌지만 이후 미국인 사업가가 이 작품을 구입하여 현재 워싱턴 DC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되고 있다.
이 작품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정권에 의해 도난당한 이후 현재 소재 불명이며, 많은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잃어버린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있다. 초상화 속 인물은 화려한 옷차림을 한 채 자신감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젊은 남자인데, 작품도 소재 불명이고, 이와 관련된 기록도 발견되지 않아 라파엘로의 [자화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문가들 역시 그림에 나타나 있는 얼굴표현이 기존 라파엘로의 [자화상]과 일치한다고 하여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년 초상]은 1798년경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던 리투아니아의 명망 있는 귀족 출신인 아담 예르지차르토리스키에 의해 폴란드로 넘어 오게되었다. 현재 이 작품은 폴란드 외교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소재불명 상태이다. 영화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불에 타서 훼손되는 장면으로
나오며, 마지막 장면에서 모뉴먼츠 맨의 리더인 조지 스타우트(조지 클루니)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 작품을 비롯하여 아직
찾지 못한 작품을 계속 수색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작품은 유화 기법을 최초로 사용한 플랑드르 미술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경-1441년)의 대표작인
[겐트 제단화]이다. 현재 성 바보(St.Bavon) 대성당에 걸려 있는 제단화로 구원의 신비라는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15세기 플랑드르 회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겐트 제단화]는 두 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배경을 제외하고 펼친 것과 접은
것의 그림이 다르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 속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묘사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메시지를 글보다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라틴어를 지배층인 왕공, 귀족,
성직자들만 배울 수 있었던 중세 시대의 미술 작품들은 대개 일반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교화시키고,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이러한 목적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의 미켈란젤로의
[성 모자상]과 더불어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실질적인 주인공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빛을 통해 그림 속의 인물을 매혹적으로 표현한 네덜란드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베르메르가 주로 그렸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장르화에 상징적인 의미를 함께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의 제목인 알레고리(allegory, 다른 이야기라는 뜻)에 걸맞게 베르메르는 추상적인 개념을 그림 속
사물에 이입시켜서 그림의 주제를 암시하였다. 예를 들어 벽에 걸린 네덜란드의 지도는 네덜란드의 역사를 상징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림 속의 다양한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찾는 것은 이 작품을 감상할 때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문화재의 손실은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많이 벌어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모뉴먼츠 맨과 같이 한국전쟁 당시 덕수궁과 신흥사의 불경 목판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
겠다.
덕수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폭파될 위험에 처해있었다. 이 위험을 막은 것은 미국인 포병 중위 제임스 해밀턴 딜이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군이 덕수궁에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폭격을 가하려 했으나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유적을 폭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이 덕수궁을 벗어났을 때를 기다려 공격하였는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원에는 제임스 해밀턴 딜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뉴먼츠 맨(MFAA)의 문화유산 보호 정신에 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제임스 해밀턴 딜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을 남겼다.
"오늘의 활동 사항 중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서울 시내에는 중요한 건물이 많이 있었다.
역사적 건물로 알려진, 한국의 지난날 왕의 궁전으로 사용된 고궁이 몇 개 있는데, 그중 서남쪽에 있는 것이 '덕수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지점을 포격하면 나는 틀림없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의 병력과 그 장비를 순식간에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고궁도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 국가의 유물인데, 나의 '포격 개시'란 말 한마디로
불과 몇 분 안에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처리하여 포격하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1950년
9월 25일, 제임스 해밀턴 딜
이런 인연으로 제임스 해밀턴 딜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KOREA'가 새겨져 있다. 본래 '나라의 운을 기리는 곳'
이라는 의미의 경운궁이라 불렸던 덕수궁은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도 한 미국 장교의 문화유산 보호 정신
덕분에 지금까지 이 자리에 남아 현재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한창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겨울, 국군 병사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주둔지 인근 사찰의 목재들을 태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 목재 중 귀한 문화재인 '신흥사 불경 목판'이 있었다. 이를 발견한 국군 제11사단 장교는
부연대장에게 불을 끄고 남은 경판을 모조리 회수하여 절에 반환하도록 권했다. 이 장교는 지난 2010년에 타계한 언론인
겸 저술가 리영희다.
신흥사의 불경 목판은 조선 효종 시대인 1650년대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한자와 한글과 산스크리트어 대역으로
이루어진 불경이다. 이러한 형태의 불경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귀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중 277판이다.
지난 2월 19일에 있었던 언론시사회를 통해 영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전쟁 영화와는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그 안에 미술사라는 학문과
문화유산 보호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 영화 매니아라면 전투 씬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가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미술사,
전시회 관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유희로서의 미술 애호를 넘어 더 큰 가치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해준다.
영화의 감독과 주연을 맡은 조지 클루니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모뉴먼츠 맨들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앳된 얼굴의 독일군과 대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서로 죽이거나, 포로로 체포하는 여타 전쟁
영화들의 공식과는 달리 담배를 나눠 피우며 어색하게 담소를 나누다가 제 갈 길을 간다. 마치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 장면은 '기존의 전쟁 영화와는 분명 다르다.' 라는 조지 클루니 감독의 의지가 십분 반영된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모뉴먼츠 맨의 공공의 적은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이다. 그러나 일개 병사들이 주인공인 영화인만큼(아무리 모뉴멘탈한
인물들이더라도) 병사들의 이야기 속에 국가의 수뇌부를 동시에 보여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는 잠깐
스쳐 지나가듯이 등장할 뿐이지만, 조지 클루니 감독에게 히틀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렇게 해야 모뉴먼츠 맨들의 활약에 대한 공감대를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클루니 감독은 이러한 문제를 히틀러를
상징하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간단하게 해소하였다. 영화 속에서 프랑스의 유명 미술품을 독일이 약탈하는데 일조하는
슈탈 박사 (유스투스 본 도난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의 외모가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슈탈 박사 역을
맡은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히틀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유스투스 본 도난이(Justus von Dohnanyi)라는 독일 배우는
2004년에 개봉한 히틀러의 자살 며칠 전을 다룬 영화 [다운 폴]에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이상주의자 장군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역을 맡은 바 있다. 이러한 배우의 배경을 차용한 점, 영화 속에서 히틀러와 유사한 외모로 등장하는 점, 그리고 슈탈 박사의
역할이 독일군에게 협력하여 약탈한 유명한 미술품들을 집에 전시하고 있다가 모뉴먼츠 맨들에게 체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역할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조지 클루니 감독이 의도한 '작은 히틀러'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영화 [모뉴먼츠 맨 : 세기의 작전]의 처음과 마지막은 미켈란젤로의 [성 모자상]과 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가 장식한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인물들은 하나같이 전쟁의 승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오로지
미술품 보호와 반환을 목적으로만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화유산은 왜
보호해야 하는가?', '인간의 생명과 문화유산 보호의 갈림길에 선다면 어떠한 선택을 하겠는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해주며,
관객 입장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중심으로 영화를 관람한다면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영화에 대해 음미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