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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필 姜順必 (1884 ~ 1921)】 "이강년 의진(李康年義陣)’ 종사(從事)로 활동"
1884년경 경상북도 함창군(咸昌郡) 이안면(利安面) 소암리(素岩里, 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자는 영숙(泳叔), 호는 신암(信菴)이다. 초명은 강순필(姜順必)이었으나, 주로 강병수(姜炳洙)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병수(秉秀)·병수(秉洙)·병수(炳修)·순필(順弼)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제 병합 이후 1914년 지방제도가 개편될 때 함창군이 상주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상주 출신’으로 기록되었다. 또 의병 운동 당시에는 경북 문경군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간혹 ‘문경 출신’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로 주권이 침탈당하고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로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경북 문경 출신의 의병장 이강년(李康年) 휘하에 들어가, 강원·경북·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활약한 ‘이강년 의진(李康年義陣)’에서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이강년의 항쟁 기록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에 따르면, 1908년 당시 좌종사로서 이강년 옆에 바싹 붙어서 “한 편으로 싸우며 한 편으로 퇴각하는 중에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라고 한다. 1908년 6월 4일 이강년이 체포된 후에는 1907년 7월 이래 ‘이강년 의진’에 합류한 ‘김상태 의진(金相泰義陣)’의 총대장, 순흥(順興) 출신으로 ‘이강년 의진’의 중군진(中軍陣) 후군장(後軍將)을 맡았던 성병태(成炳台) 등의 지휘 아래 부장(副將)으로서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의 전국적인 의병 소탕 작전인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탄압이 거세어지자, 김상태를 중심으로 소백산·태백산 등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의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삼아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김상태 의진’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하면서 각처에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10년 음력 5월 무렵에는 강원도 영월군 태백산 일대에서 김상태의 지휘 아래 분대(分隊)를 이끌던 최성천(崔聖天)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였다. 경북 안동군 서후면(西後面) 송천동(松川洞)의 부호들을 찾아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김운석(金雲石)에게서 엽전 10냥, 김대헌(金大憲)에게서 엽전 127냥, 이덕원(李德元)에게서 엽전 150냥 385푼을 모금하였다. 직접 이를 금 40원의 지폐로 교환한 후 태백산 근거지에 있는 김상태에게 전달하였다.
일본군은 ‘김상태 의진’을 소탕하려고 강제 병합 이후인 같은 해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감행하였다. 결국 김상태를 비롯한 다수가 검거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는데, 당시 ‘김상태 의진’에서 총대장을 맡고 있었다. 이후 최성천도 검거되어 그해 12월 8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다행히 검거를 면하여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대한광복회 결성지 달성공원(대구 달성) [판형2] |
1913년 당시 성병태의 지휘 아래 경북 봉화 출신의 의병 김병일(金炳一) 등과 함께 삼척·봉화·울진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29일 밤, 김병일 등 수 명의 동지와 함께 총기와 군도(軍刀)를 휴대하고 강원도 삼척군 상장면(上長面) 동점동(銅店洞)으로 가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장(里長) 박문석(朴文石)을 비롯하여 김광숙(金光淑)·장개봉(張介鳳)·김성로(金成老)·김덕로(金德老)·정원백(鄭元伯)·장사명(張士明) 등의 집에 들어가 금전·삼베·무명·짚신과 현금 10원, 그리고 추후 현금 40원을 지불하겠다는 증표를 받아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김병일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4년 2월 18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번에도 무사히 검거를 피하여 활동을 계속해갈 수 있었다.
1913년 12월경 경북 영주군 풍기면(豊基面)에서 채기중(蔡基中)의 주도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즉 일명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결성될 때 참여하였다. 풍기를 비밀결사의 결성 장소로 한 이유는 『정감록(鄭鑑錄)』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8도에서 소통하기 편하면서도 은거하여 활동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채기중은 강순필과 같은 고향인 경북 함창군 이안면 소암리 출신이다. 이 외에도 풍기광복단에는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漳烈)·한훈(韓焄)·장두환(張斗煥)·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相圭)·이각(李覺) 등 다수가 참여하였다. 초기 단원들은 주로 경북 북부 지역이나 충청도 등지에서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강년 의진’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들을 광복단으로 연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예천 출신의 정진화·조용필(趙鏞弼)·윤창하(尹昌夏) 등의 의병 운동 동지들을 풍기광복단에 가입시켰다. 이 외에 유창순·한훈 등 충청도 출신들은 대부분 홍주(洪州)의 ‘민종식 의진(閔宗植義陣)’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풍기광복단의 주된 운동 방략은 서간도(西間島) 등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그리고 동지의 규합에 목표를 두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잃어버린 뒤 국내의 의병 운동 조직은 항전(抗戰)의 기반을 상실하자 대부분 만주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913년 만주의 지린(吉林)에서 귀국한 후 만주를 오가며 활동하던 단원 한훈 등을 통해 만주의 명망가들과 소통하면서 국내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결성된 것이다. 풍기광복단 결성 후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채기중과 함께 강원도 영월(寧越)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중석광(重石鑛)에 광부로 가장하고 들어가 자금 탈취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북 문경 출신으로서 함께 ‘이강년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국권침탈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한 후 1914년 9월에 귀국한 옛 동지 이동하(李東下)가 문경 지역을 중심으로 ‘민단조합(民團組合)’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강년 의진’ 출신의 풍기광복단원 조용필·정진화·윤창하 등도 민단조합에 가입시키기도 하였으며, 이후 두 단체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민단조합을 중심으로 이강년의 조카인 이식재(李湜宰), 문경 출신의 최욱영(崔旭榮) 등 9명의 동지와 함께 강원도 원주군 백양산(白陽山)에서 군자금 모금 방안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1일 충북 제천군 근북면(近北面) 현박리(峴朴里) 소재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군자금 100여 원과 공용지(公用紙) 100장을 마련하였다. 또 면장과 면서기의 집을 찾아가 각각 30여 원과 70여 원을 모금하였다.
1913년에 조직된 풍기광복단은 1915년 (음)7월 15일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박상진(朴尙鎭) 등이 주도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등의 일부 인사들이 합세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확대 발전되었다. 이때 본부의 행형부(行刑部)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같은 해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菴)에서 박상진 등 대구를 중심으로 한 혁신 유림 세력이 국권 회복 운동과 단군봉사(檀君奉祀)를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다. 원래 1908년 대구에서 결성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1912년 대구에 설립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등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을 위시하여 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濟安)·권영만(權寧萬)·정운일(鄭雲馹)·엄정섭(嚴正燮)·김경태(金敬泰)·김한종(金漢鍾) 등이 대한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풍기광복단의 참여 인물들은 황상규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거나 무학(無學)인 경우가 많아서 다소 복벽주의(復辟主義) 성격이었던 반면, 대한광복회로 발전한 후에는 신학문을 공부하고 일정한 경제력을 지닌 조선국권회복단 단원들이 합세함으로써 이러한 성격을 탈피할 수 있었다.
대한광복회의 창립 목적은 국권 회복과 독립 달성을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할 계획도 세웠으며, ‘무력 준비·무관 양성·군인 양성·무기 구입·기관 설치·무력전’이라는 투쟁 방략을 세우고 군대식으로 조직을 편제하였다.
대한광복회의 장승원 처단 보도(『신한민보』 1918.1.17) [판형1] |
이를 위해 먼저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로 보내고, 또 국내에 확보한 기지를 거점으로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을 두었으며, 활동 거점으로 각지에 곡물상(穀物商)을 설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일정한 조직 편제를 갖춤과 함께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에도 여러 군데 거점을 마련하였다. 사령관 박상진, 지휘장(指揮長) 우재룡·권영만, 경상도지부장 채기중, 충청도지부장 김한종, 전라도지부장 이병찬(李秉燦), 경기도지부장 김선호(金善浩), 함경도지부장 최봉주(崔鳳周), 평안도지부장 조현균(趙賢均), 황해도지부장 이해량(李海量), 강원도지부장 김동호(金東浩)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만주의 사령관은 이석대(李奭大)가 맡았으며, 안둥(安東, 현 단둥(丹東))의 안둥여관(安東旅館)에 손회당(孫晦堂),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의 삼달양행정미소(三達洋行精米所)에 정순영(鄭淳榮) 등이 책임을 분담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중에 평양 은산금광(殷山金鑛)에서 이석대가 검거되자 새로 만주의 사령관으로 김좌진(金佐鎭)이 가게 되었다. 본부는 박상진 사령관 밑에서 최준(崔浚)·이복우(李福雨) 등이 사무를 총괄하고 각 부서를 두었는데, 그 행형부 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행형부는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반역자를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처단하는 임무를 맡은 부서였다.
대한광복회로 확대 발전된 후부터는 위와 같은 실천 계획과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군자금 모금과 친일적인 지주나 부호, 일본인을 처단하는 활동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과거의 풍기광복단원들이 직접적인 친일 부호 등의 처단에 앞장섰다. 1916년 10월 과거 풍기광복단에서 채기중과 함께 위장 취업하여 자금을 빼돌렸던 영월의 일본인 중석광을 공격하는 데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0여 명이 참여한 이 거사는 민단조합과 대한광복회가 함께 펼친 군자금 모금 활동이었다.
1917년 (음)9월 26일 밤에는 박상진의 명령으로 채기중·유창순·임봉주(林鳳柱)와 함께 경북 칠곡(漆谷)의 친일 부호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강 이남에서 제일가는 부호라고도 알려진 장승원은 일본인 지주보다 더 소작인을 괴롭힌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한말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할 당시 허위(許蔿)에게 20만 원의 군자금을 내기로 약속하였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대한광복회에서도 몇 차례 지원을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 관헌에게 이를 밀고하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이 이끄는 대한광복회에서는 1916년에 이미 두 차례나 처단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들의 거사는 이러한 장승원에 대한 처단을 성공한 것이었다.
장승원 처단이라는 거사에 참여하여 이를 성공시킨 4인은 모두 풍기광복단 출신이다. 채기중의 지휘 아래 전체 거사가 계획되었는데, 이때 직접 장승원을 사살하는 임무를 맡아 권총으로 머리와 목, 왼쪽 무릎을 명중시켰다. 총상을 입은 장승원은 대구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이틀 뒤인 (음)9월 28일 사망하였다. 유창순은 처단 후 집을 소각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사를 성공한 후 이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버드나무 누각에 미리 준비해 간 대한광복회의 서편(序片) 즉 ‘처단 고시문’을 내걸어서 거사의 대의(大意)를 밝혔다. 그 내용은 “오직 광복은 하늘과 사람의 뜻이라(天人是符). 이 큰 죄를 성토하여(聲此大罪) 우리 동포를 경계하노라(戒我同抱). 성토하고 경계하는 사람 광복회원(聲戒人光復會員)”이었다. 이 사건으로 광복회라는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안동의 부호 안승국(安承國)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계속하다가, 1918년 초에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한말 의병 활동 이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가면서 여러 활동을 해온 지 십수 년만의 일이다. 모진 고문과 취조를 거친 후 1919년 2월 공주지방법원에서 ‘광복회 사건’의 피고 40명에 대한 예심(豫審)이 종결되었다. 32명의 동지와 함께 공판에 회부되어, 박상진·김한종·김경태·임봉주·채기중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