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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완(茶碗 : 찻사발)
상선약수 ・ 2021. 5. 30. 23:22
말차(末茶 : 가루차)는 찻잎을 곱게 갈아 만든 분말(粉末)을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에 다선(茶筅 : 찻솔)으로 휘저어 거품을 만들어 마시는데 이때 쓰는 사발을 다완 또는 찻사발이라고 한다. 사발(沙鉢)은 한 손만으로도 다루기 편한 크기에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의 내용물을 담을 수 있으며, 두 손으로 안았을 때 어느 정도의 양감(量感)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부담(負擔)이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어 먹고 마시는 기능에 알맞은 그릇이다. 사발은 직선(直線)의 굽과 반구형(半球形)의 곡선(曲線)으로 된 몸통과 원형(圓形)의 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단순한 직선, 곡선, 원형의 세 요소가 조합되어 매우 다양한 형태의 사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찻사발이 보통 사발과 다른 점은 차격(茶格)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차격은 찻사발이 가지고 있는 우아함, 의젓함, 당당함을 의미한다. / 사진 雲中月 제공
우리나라의 찻사발 역사(歷史)는 674년에 축조(築造)된 경주(慶州)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정언영(貞言榮)’ 명문토기(銘文土器)로 보아 이미 신라시대(新羅時代)에 토기로 만든 다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고,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송(宋)나라의 사절(使節)로 송도(松都)를 방문했던 서긍(徐兢)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청자다완(靑瓷茶碗)이나 흑유잔(黑釉盞) 등에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차의 맥(脈)이 끊기다시피 했지만 일본(日本)이 국보(國寶)나 보물(寶物)로 지정한 수많은 다완(茶碗)들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거나 옛 도요지(陶窯地)에서 출토(出土)된 것들을 통해 백자(白磁), 분청사기(粉靑沙器), 지방자기(地方瓷器) 등으로 만든 사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언영 명문 다완(貞言榮 銘文 茶椀)
신라시대(新羅時代7世紀; 慶州市 雁鴨池 出土, 慶州博物館 所藏).
우리나라는 찻사발에 대해 일본만큼 중요시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찻사발은 차인(茶人)이 소중하게 다루고 아끼는 그릇이므로 모든 사발(沙鉢)이 모두 찻사발이 되는 것은 아니며, 아취(雅趣), 기품(氣品), 제대로 된 힘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찻자리에 맞는 분위기가 있는 소위 차격(茶格)이 있으면서도 크기와 무게가 적당해야 하고, 손으로 안았을 때 편안한 맛이 있어야 한다. 찻사발의 크기는 보통 두 손으로 감싸 안았을 때 손바닥 넓이만한 높이가 적당하나 조금 높거나 낮아도 상관이 없으며, 또 입의 크기에 따라 큰 것은 입 지름이 17cm, 중간 것은 15cm, 작은 것은 12cm 정도 되고, 큰 것은 발(鉢), 중간 것은 완(碗), 작은 것은 소완(小碗)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큰 찻사발, 중간 찻사발, 작은 찻사발이라고 한다.
찻사발의 부위별 명칭
한편 찻사발의 부위별 명칭은 찻사발의 굽을 제외한 몸통의 바깥 면 전체를‘겉울’이라고 하며, 찻사발의 안쪽 표면 전체를 ‘안울’이라고 한다. 겉울의 입술은 차를 마실 때 입이 닿는 자리로 구연부(口緣部) 또는 전이라고도 하고, 찻사발 전의 자연스러운 굴곡을 일본에서는 따로 이름을 지어 산길(山道)이라고 부르며 감상하고 있다. 전의 바로 밑 20~30% 아래쪽 부분을 어깨, 사발의 중심 부분인 중간 부분을 배, 배와 허리붙이 바로 위까지의 중간을 허리, 허리 밑에서부터 굽 바로 위까지를 허리붙이라고 하는데 허리붙이는 굽의 바로 윗부분으로 굽을 깎은 자리이며, ‘굽깎은자리’ 또는 ‘칼바람자리’라고도 한다. 안울 쪽은 겉울의 배 자리에 해당하는 곳을 차수건자리라고 하는데 이는 차수건으로 찻사발을 닦을 때 엄지손가락 끝이 닿는 부위이다. 또 겉울의 허리 자리에 해당하는 안울 자리를 찻솔자리 또는 다선(茶筅) 닿는 자리라고도 하는데 격불(擊拂)을 할 때 다선이 움직이는 공간부위를 말하며, 안울 밑바닥 중심에 둥글게 살짝 패인 곳을 차고임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차고임자리 부근에는 도자기(陶瓷器)를 포갬구이한 눈자국이 있는데 이는 기물(器物)을 포개어 재임할 때 기물과 기물 사이에 끼어 넣은 내화물(耐火物) 덩어리의 자국이다.
굽의 종류
또 찻사발의 굽은 사발의 다리로 무게를 지탱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굽에 대한 허리붙이의 각도는 울각, 사발을 놓을 때 굽이 밑면에 닿는 부분을 굽술, 굽의 안쪽에 파인 자리를 굽안, 굽안의 한가운데에 솟아있는 곳을 굽꼭지라고 한다. 굽의 종류는 대마디굽, 나팔굽, 햇무리굽, 초생달굽, 정조굽(釘彫굽 : 못파낸굽), 이중굽, 둥근굽, 각굽, 달팽이굽, 자른굽, 나눔굽(사방굽 또는 십자굽), 잘린굽, 오기굽 등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며, 상체인 찻사발의 생김새와 비례(比例), 구도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굽의 종류에 대해서는 뒤에 상술(祥述)하고자 함)
[출처] 다완(茶碗 : 찻사발)|작성자 상선약수
▣ 우리나라 찻사발에 대한 잘못된 견해(見解)
우리나라는 찻사발(茶碗)에 대해 일본만큼은 중요시하지 않지만 차인(茶人)이라면 누구나 소중하게 다루고 아끼는데 일본은 1500년대부터 자신들도 직접 만들고, 중국과 조선(朝鮮)에서 찻사발들을 수집(蒐集)하여 분류(分類)하고 이름 붙이기를 해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찻사발을 설명하려고 해도 우리 찻사발의 대다수가 일본에 있고, 일본인들이 이름을 붙여놓고 분류하여 일본을 빼고는 설명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차인들도 찻사발 이름을 일본에서 부르는 대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말이 있는 것은 우리말로 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두두옥(斗斗屋, 도도야), 교맥(蕎麥, 소바), 어소환(御所丸, 고쇼마루) 등 우리나라 말로는 별 의미가 없는 명칭(名稱)들은 일본에서 부르는 기준으로 하여도 무방(無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국보(國寶)로까지 지정(指定)된 우리나라의 찻사발을 ‘막사발’이라고 부르는데 당시는 지금과 같이 공장에서 똑 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처럼 많이 만들 수도 없었고, 생산하지도 않았기에 도자기(陶瓷器)라는 물건 자체가 도공(陶工, 도공은 일본식 표현이므로 사기장(沙器匠)이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라고 함)이 대충 만들어 가난한 서민(庶民)들이 아무나 마구 쓸 수 있는 값싼 제품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의 상황(狀況)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나라의 찻사발을 일본의 어느 학자가 막사발이라고 비하(卑下)하여 부르는 잘못된 견해(見解)를 그대로 답습(踏襲)하는 것은 이제 불식(拂拭)되어야 하기에 마침 이에 대해 적절(適切)한 말씀을 기고(寄稿)하신 분의 글을 인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찻사발을 막사발이라고 부르는데 도자기(陶瓷器)라는 것 자체가 도공(陶工)이 대충 만들어 서민들이 막 쓸 수 있는 값싼 제품이 아니기에 찻사발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내용들에 대해 몇 가지 논의(論議)를 하고자 이제 다시 한 번 짚어 보겠다. 고려청자(高麗靑瓷)를 막사발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분청(粉靑 : 분청사기(粉靑沙器)라고도 함)도 자유롭게 만든 것이지만 서민(庶民)들이 깨져도 상관없이 막 쓰던 것은 값싼 물건은 아니며, 이도나 웅천다완은 아마도 제사(祭祀)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데 이 또한 막 만들어 막 쓰는 도자기가 아니다.
또한 일본인이 주문제작한 다기(茶器)들은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진주(晋州)의 백토(白土)와 곤양(昆陽) 새미골의 수을토(水乙土) 등의 흙을 김해요(金海窯), 창기요(경남 양산군 법기), 부산(釜山)의 왜관(倭館) 부산요(釜山窯)까지 가져와 관요(官窯)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만든 것으로 거칠게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렇게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막 만들고 막 쓴다는 의미의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表現)임이 명백(明白)하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막 만들었다거나 막 쓰는 용도(用度)의 물건이 없으며, 더군다나 일본인들이 도자기가 없고, 안목(眼目)이 없고, 돈이 없어서 우리나라의 개밥그릇, 거지 동냥 그릇을 마구잡이로 가져가 국보로 삼은 것이 아니라 뛰어난 심미안(審美眼)을 가지고 고르고 골라간 것이 바로 조선(朝鮮)의 찻사발인데도 “우리 개밥그릇인 막사발을 가져가 국보(國寶)로 삼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구겨진 자존심(自尊心)을 세우려는 분들을 만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생긴다.
일본의 박물관 등에 있는 중국의 다완(茶碗)들도 이미 1500년대에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구해다 쓰던 찻사발들이다. 이런 더 고급의 도자기들을 쓰던 일본인들이 조선의 다완에 눈을 돌린 것은 중국 다완들은 화려(華麗)하여 의식용(儀式用)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일반 차인(茶人)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차를 나누기에는 너무 사치(奢侈)스러워 오히려 조선의 소박(素朴)한 사발들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도자기(陶瓷器)가 없거나 안목(眼目)이 낮아 우리 사발(沙鉢)에 열광한 것은 아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또한 1931년에 기자에몬이도를 보고 적은 글에서 지적(知的) 의식(意識)이 없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조선(朝鮮) 도공(陶工)이 뒷산의 흙을 파다가 대충 굽고 화로(火爐)에서 꺼낸 재로 대충 유약(釉藥)을 입혀 구운 것이 이도다완(井戶茶碗)이고, 조선의 어디서나 쉽게 싼 값에 구할 수 있고 천민(賤民)들이 부담 없이 사서 마구잡이로 쓸 수 있는 값싸고 흔한 물건이 바로 이도다완이며, 그런 이도사발을 다완(茶碗)의 용도로 골라낸 일본 다인들의 안목을 칭송(稱頌)하면서 이도다완은 조선인들이 만들었지만 찻사발로서의 용도와 가치는 일본인들이 찾아내었기 때문에 일본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우리 이도다완에 대한 최고(最高)의 평가(評價)라고 많이들 인용(引用)하고 있다.
막사발이 아니라 찻사발이라는 글에서도 비판했지만 도자기가 근대(近代)에까지도 막 쓰기 힘든 물품인데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천민(賤民)들이 도자기(陶瓷器)를 마구 썼다는 내용도 그렇고, 이도다완도 경남(慶南) 진해(鎭海)와 하동(河東) 진교(辰橋)에서 조선 초기에 아주 잠깐 생산된 것인데도 1914년부터 조선의 민중예술(民衆藝術)에 심취(心醉)하고 조선의 도자사(陶瓷史)를 연구한 조선 민예(民藝)의 전문가(專門家)라는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1931년(나이 43세로 조선도자사를 공부한지 17년 됨)에 기자에몬을 보고 적은 글이라는 게 고작 전국 어디서나 만들어졌고 천민들이 부담 없이 마구 쓰던 물건이 이도다완이라니, ‘조선 도공의 지적 의식’ 운운(云云)하던 야나기의 지적(知的) 의식(意識)을 의심(疑心)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막사발이라는 표현은 조선 말기(末期)에 상공업(商工業)의 발달로 상인(商人)들이 도공들을 고용하여 도자기(陶瓷器)를 대량생산(大量生産)하게 한 것에서 나온 표현일 수는 있겠으며, 그중에 다완과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만들어 졌을 수 있겠으나 일본인들이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고 이야기하는 15~6세기의 조선 찻사발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우리나라의 근현대 도자사 참조) 그런데도 15~6세기 막사발 운운하며 ‘막사발’이라는 표현(表現)에 집착(執着)하시는 분들이 정작 글에서는 서민용(庶民用)이 아닌 것 같다거나 막 쓰던 것이 아니라는 상반(相反)된 주장들을 펴시며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이는 ‘막사발’이라고 이름을 잘못 붙인 이름의 ‘막’이라는 글자 때문에 머릿속에서 은연중에 찻사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에 스스로 헷갈려 그런 것이다. 찻사발이건 막사발이건 차만 잘 마시면 되지 뭐가 그리 복잡(複雜)하냐고 하실 분이 많겠지만 사물(事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바르게 이름 붙이는 것인 ‘정명(正名)’에서 부터 시작해야하며, ‘막사발’이 아니라 ‘찻사발’이라고 고쳐 불러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최성림님의 「한국 찻사발 정리(막사발 비판 2)」, 01/09/05, 글 중에서 발췌 정리함.
1. 다완(茶碗)의 종류(種類)
우리나라와 중국은 찻사발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은 찻사발을 매우 귀하게 여겨 1500년대부터 자신들도 직접 만들고, 중국과 조선에서 차사발들을 수집, 분류하고 이름을 붙여왔다. 그들은 다완을 원산지에 따라 분류할 때 중국 다완은 당물(唐物), 우리나라 다완은 고려물(高麗物), 일본의 다완은 화물(和物)이라고 분류하였으나 실제로 고려시대의 것은 청자사발이나 청자통형 다완 등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이 15~16세기 조선시대의 것임에도 통상적으로 고려다완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조선시대의 일상잡기(日常雜器)를 다기로 사용한 미시마(三島), 이도(井戶), 고히키(粉引), 가다테(堅手), 아마모리(雨漏), 고모가이(熊川) 다완 등이고, 또 하나는 일본에서 조선에 주문하여 만든 ‘고혼(御本)다완’으로 소바(蕎麥), 도도야(斗斗屋), 카키노헤타, 이라보(伊羅保), 긴카이(金海), 고쇼마루(御所丸), 고키(吳器) 등이다. 특히 고려다완(高麗茶碗)의 정수(精髓)인 이도(井戶)다완은 크게 형태와 종류에 따라서 오오이도(大井戶), 아오이도(靑井戶), 고이도(小井戶) 등으로 분류된다.
한편 우리나라 찻사발을 설명하려고 해도 우리나라 찻사발의 대다수가 일본에 있고, 일본인들이 이름을 붙여놓고 분류하여 우리나라 차인(茶人)들도 찻사발 이름을 일본식 발음대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일부 차인과 도예가(陶藝家), 학자(學者)를 중심으로 우리식으로 분류하고 우리말로 표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본문(本文)에서는 비전문가의 임의적인 한국어 표기는 옳지 못할 뿐 아니라 정확한 의미의 전달(傳達)에도 혼란(混亂)을 야기(惹起)할 우려가 있어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옮겼다.
※ 본 단원의 내용은 일본의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한 자료를 참고(參考)하였음을 밝히며,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일부 한자를 그대로 표기하고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옮겼다.
(1) 이도(井戶)
다완(茶碗)이 일본 다도의 꽃이라면 이도는 일본의 다도에서 가장 우위의 것으로 손꼽히는 다완으로 오이도(大井戶)는 이도 중의 으뜸으로 비파색(枇杷色)에 죽절(竹節, 대마디)모양의 높은 굽, 굽을 깎은 자리에는 매화껍질처럼 유약이 뭉쳐 있으며(유약말림(凝結)현상으로 이를 일본말로는 ‘가이라기(梅花皮)’라고 하며, 매화피의 주 원인은 굽칼로 깎은 부분이 상어껍질처럼 까칠까칠하여시유(施釉)를 하면 유약의 말림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칼질자국과 안쪽 차고임, 몸통의 아랫부분에는 부드럽게 펼쳐진 3~4줄의 힘찬 물레선이 나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도다완은 소박(素朴)하고 단순(單純)하면서도 당당(堂堂)하고 기품(氣品)이 있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다완을 통털어 최고(最高)의 다완(茶碗)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도다완 중에는 일본에서 국보(國寶)로 지정된 기자에몬이도를 비롯하여 중요문화제 3개, 중요미술품 19개가 있는 등 일본인들이 극찬(極讚)하는 다완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기자에몬이도(喜左衛門井戶)를 보고 쓴 글이 유명하고, 우리나라 차인들도 우리 찻사발에 대한 최고의 찬사(讚辭)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과 한국인을 무시한다는 면에서 다시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도라는 이름이 붙게 된데는 ‘이도(井戶)’라고 하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손에 의하여 일본에 전해져서 그 성(姓)을 따다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정호약협수각홍(井戶若狹守覺弘)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사발이 그 당시 너무나 유명하게 되어 ‘정호(井戶)씨가 가진 사발’이라는 뜻으로 정호다완(井戶茶碗)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설, 정호삼십랑(井戶三十郞)이 가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進上)한 ‘이도의 다완’이라는 이름의 도자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이도(井戶)’ 즉, 우물이 나는 곳의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는 한자의 뜻을 풀이한 설로 경상북도 문경의 정호리(井戶里)가 원래의 산지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어떤 것이 정확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이도(大井戶)는 당당하고 호쾌한 자태(姿態)를 가진 다완으로 크기도 크고, 굽도 높으며, 태토는 철분이 많고 내화도(耐火度)가 강한 사토질의 흙으로 보기에는 두툼하고 무거워 보이나 정작으로 들어보면 보기보다 가벼운 느낌이 든다. 고이도(小井戶, 혹은 古井戶)는 글자 그대로 오이도보다 크기가 조금 작다고 이름이 붙여진 다완으로 오이도에 비해 기벽(器壁)이 얇고 물레자국이 가늘고 약해 전체적으로는 기교미(技巧美)가 있어 온화하고 화사하며, 정숙한 느낌이 든다. 소이도다완은 대이도다완에 비해 크기가 조금 작은 게 많고, 구연부(口緣部)가 좁고 속이 깊으며, 굽도 조금 낮지만 대이도와 동일한 태토(胎土)와 유약(釉藥)이며, 둘을 나누는 기준은 물리적인 크기보다는 대이도다완에 비해 크고 당당한 느낌이 덜하다는 느낌의 차이인 것 같다. 아오이도(靑井戶)는 소지(素地)의 철분 함유량이 많고, 중성염(中性焰)의 영향으로 청회색의 유조(釉調)를 띄며, 유약의 질감이 오이도나 고이도의 비파색과는 달리 푸른 기운이 감도는 부분이 많고, 형태도 넓게 벌어지고, 굽의 높이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고간유(小貫入)는 시유를 얇게 하여 균열이 가늘고 잔잔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외에도 접시처럼 넓어 차가 빨리 식어서 여름 다완용으로 적합한 평이도(平井戶)와 이도와키(井戶脇), 소바(蕎麥) 등이 있다.
한편 소바(蕎麥, そぼ)는 낮은 굽에 평다완의 형태로 전이 넓어 여름에 쓰기 좋은 다완으로 조선 초기부터 중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색상은 밝은 편이고, 두 손으로 다완을 잡았을 때 받쳐서 드는 듯한 느낌으로 편하다. 백색계의 모래가 많이 섞여있는 거친 태토에 반투명한 황록색의 유약을 칠한 다완의 일종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치 메밀의 색과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도다완의 옆에 두어도 뒤지지 않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옆에’ 라는 일본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2) 미시마(三島)
우리나라 분청사기(粉靑沙器)를 이르는 말로 인화기법(印畵技法)의 분청사기와 같이 안팎을 모두 빗금으로 자연스럽게 시문(施文)하고, 안쪽 바닥에 꽃무늬 문양(文樣)을 찍고 그 위에 백토(白土)를 씌운 후 백토를 벗겨 문양에만 백토를 남게 한다.
조선(朝鮮) 초기에 수입된 것을 총칭하는 고삼도(古三島, 고미시마), 찻사발 안팎에 국화(菊花) 등 꽃무늬가 찍혀진 화삼도(花三島, 하나미시마), 예빈시(禮賓寺)나 장흥고(長興庫) 등 관청(官廳) 이름이 새겨진 것을 총칭하는 예빈삼도(禮賓三島, 라이힌미시마), 그릇 안쪽에는 상감(象嵌) 무늬가 있고 그 위에 덤벙기법으로 백토를 씌웠으며, 그릇 바깥쪽에는 귀얄문이 있는 삼작삼도(三作三島, 산자쿠미시마), 17세기 초 에도(江戶)시대 초기에 일본 차인들이 부산요에 주문하여 제작된 조삼도(彫三島, 호리미시마), 대삼도(大三島), 와삼도(渦三島), 각삼도(角三島), 어본삼도(御本三島), 계룡산삼도(鷄龍山三島), 이덕삼도(二德三島) 등이 있다.
미시마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인화문(印花文)과 선문(線文)의 모양이 시즈오카현의 이즈미시마신사(伊豆三島神社)에서 배포한 달력의 글자문양과 비슷한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나 이설(異說)도 있다. 田內梅軒은 마카오, 필리핀, 대만(臺灣) 등 세 섬(三島)의 도자기를 통틀어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는 억지로 꿰어 맞춘 것 같은 느낌이 있으며, 일본 다도의 원점이 조선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淺川伯敎는 조선의 거문도(巨文島)를 미시마[三島]라고 불렀으며, 조류(潮流) 관계상 중국이나 일본의 선박이 거문도에 정박했을 때 부근에서 만들어지던 도자기가 매매되었고, 그 가운데의 다완을 미시마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박정상 씨는 전남 무안(務安)이나 고흥(高興)에서 만들어진 분청그릇을 배로 실어가다가 지금의 거문도(巨文島)인 삼도(三島)에 마지막으로 정박(碇泊)한 후 정동(正東)쪽에 있던 하카다항으로 갔던 것에서 삼도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았으나 이에 대해 최성림 씨는 조선에서 일본과의 교역(交易)은 삼포에만 엄격히 국한하다가 삼포왜란 이후 제포(경남 진해)만 열었는데 제포에서 일본으로 갈 때 굳이 거문도로 나가서 갈 이유가 없으므로 신빙성(信憑性)이 없어 보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시마라는 이름은 일본의 차인(茶人)들이 붙인 것으로 통설(通說)과 같이 그 문양에 의해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보이며, 센노리큐(千利休)가 개최한 <리큐백회기(利休百會記)>나 <남도마츠야다회기(南都松屋茶會記)>에 의하면 1586년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소구(紹鷗) 이래 와비다도가 유행하던 초기로 종래의 귀인용(貴人用)인 중국의 천목다완(天目茶碗)은 점차 사라지고 고려다완 즉, 조선의 것들로 옮아가던 시기로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신중한 화려함과 와비의 유현함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에 사랑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미시마라는 용어가 원래의 우리말인 분청사기를 제치고 세계시장에서 자주 쓰이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미시마(古三島)는 초기에 수입된 것으로 형태는 윤형(輪形)에 구연부(口緣部)가 외반(外反)되어 있으며, 태토(胎土)의 색상은 엷은 흑색으로 유약(釉藥)이 비교적 두껍게 시유(施釉)되었다. 하나미시마(花三島)는 그릇의 내외면에 국화무늬의 도장을 찍고 백토(白土)로 상감(象嵌)한 기법의 다완으로 산지(産地)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각삼도(角三島)는 각상(角狀)의 상감문이 완자문(卍字紋) 띠를 두르고 있으며, 와삼도(渦三島)는 그릇 안쪽에 3단 또는 5단의 달팽이모양으로 상감된 다완이다. 이작삼도(二作三島, 니자쿠미시마)는 귀얄기법과 인화문, 두 가지 무늬를 보이는 다완이고, 삼작삼도(三作三島)는 안쪽은 상감(象嵌), 바깥쪽의 전부터 몸통까지는 덤벙, 허리부분은 귀얄의 세 가지 작업방법으로 만든 다완이며, 어본삼도(御本三島)는 일본이 주문한 다완으로 부산 왜관요에서 우리나라 분청사발(粉靑沙鉢)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이덕삼도(二德三島)는 안쪽은 우점문(雨點文) 또는 빗살무늬의 상감기법, 바깥쪽은 덤벙이나 귀얄기법의 두 가지 작업방법으로 만든 이작삼도(二作三島)다완으로 양국(兩國)이라고도 하는데 잔 안쪽에는 인화문(印花文)이 보이고, 바깥쪽에는 귀얄기법으로 전면을 휘둘렀다. 허리 부분에는 선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고, 안쪽바닥에는 인화문이 3단으로 되어 있는 특징 있는 다완이다.
이덕삼도(二德三島)
이덕삼도(二德三島)
그리고 예빈삼도(禮賓三島, 라이힌미시마)는 그릇의 내면이나 외면에 백상감(白象嵌)이나 철채(鐵彩)로 예빈(禮賓), 사선(司膳), 내섬(內贍), 내자사(內資寺), 장흥고(長興庫), 인수부(仁壽府) 등의 글씨를 쓴 다완으로 형태는 평형이 많으며, 유약은 예빈유(禮賓釉)라고 부를 정도로 품질이 좋은 투명유약을 시유(施釉)하였다. 일본에서는 예빈삼도(禮賓三島)를 가장 우위(優位)로 꼽는데 작품수준이 정교(精巧)하기도 하며, 제작(製作) 연대(年代)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일본 사절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이 예빈시에서 접대를 받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일본에 알려졌다고 추정되는데 관청명이나 지방명에 관계없이 문자가 새겨진 분청다완을 모두 예빈삼도(禮賓三島)라고 부르며, 일본에서 유통되는 모방 작품에도 예빈이라는 글자가 들어있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릇의 안팎에 회원문(檜垣紋 : 빗살무늬)이 2~3단으로 띠를 이루어 백상감(白象嵌)되어 있는 조삼도(彫三島, 호리미시마)는 구경(口徑)이 넓고 깊이가 낮은 정형(定形)으로 굽은 대마디굽에 꼭지가 있으며, 안쪽의 차류(茶溜 : 찻물고임자리)에는 국화문(菊花文)이 상감되어 있다. 그릇 전체에 귀얄문이 있고 특히 문양 부분은 진하게 백상감(白象嵌) 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반투명 유약(釉藥)이 굽까지 씌워져 있는데 특히 그릇의 외면 허리 부분에 국화문이 있는 것은 외화조삼도(外花彫三島, 소토하나호리미시마)라고 하여 귀하게 여긴다. 이것은 17세기 초 에도(江戶)시대 초기에 일본의 차인들이 부산요(釜山窯)에 주문하여 제작된 다완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분청사기(粉靑沙器)를 제작한 곳이 없었으며, 일본 차인의 기호(嗜好)에 맞게 제작되었으므로 조선의 분청다완과는 쉽게 구분이 된다.
한편 계룡산삼도(鷄龍山三島)는 조선 초기 충청남도 공주의 계룡산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기벽(器壁)이 비교적 얇고 굽은 작은 편인데 태토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것이 많고, 대담하고 경쾌하게 거친 붓으로 귀얄을 하고 철사(鐵砂)로 당초(唐草紋), 어문(魚紋), 인삼문 등을 주로 그렸다.
[출처] 다완(茶碗 : 찻사발)|작성자 상선약수
(3) 고모가이(熊川)
사발의 몸통 아랫부분인 허리 부분이 약간의 불륨감 있게 부풀어 안정감이 있는 완전한 사발형으로 태토(胎土)는 주로 백토(白土)이나 적토(赤土)도 있으며, 유약의 질감은 부드럽고 균열이 세밀한 편이며, 굽과 굽언저리까지는 시유(施釉)를 하지 않아 흙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구연부(口緣部)의 끝은 외반(外反 : 밖으로 젖혀짐)하고, 속으로 깊고, 크고 높은 굽은 죽절(竹節)로 되어 있으며, 굽 내부는 둥글게 깎여 있다.
고모가이 즉 웅천(熊川)은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鎭海市)로 과거에 왜관(倭館)이 설치되었으며, 그곳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도자기가 항구(港口) 이름 그대로 다완의 이름이 되었다. 조선 초 일본과 교역하던 삼포(三浦) 중의 하나인 제포(薺浦) 바로 옆의 경남 진해시 웅천 지역에서 수출된 다완으로 가마는 웅천 가마터가 아닌 김해(金海), 창원(昌原) 등지의 다른 곳에서 구운 것을 웅천, 제포에서 수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형태는 제사(祭祀) 때 탕(湯)국을 담는 그릇과 흡사(恰似)하여 제기용(祭器用)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推測)하고 있다. 고모가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마고모가이(眞熊川), 오니고모가이(鬼熊川), 히라고모가이(平熊川), 아토고모가이(後熊川), 에고모가이(繪熊川) 등으로 나누어지며, 우리나라에서의 명칭은 없다.
웅천다완(熊川茶碗)은 크게 진웅천(眞熊川)과 귀웅천(鬼熊川)으로 나뉘는데 확연히 나눌 수는 없지만 진웅천은 만든 수법이나 형태가 단정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굽이 높고, 전체적인 느낌이 뛰어난 것에 비해 귀웅천은 굽이 낮고 전체적인 형태도 남성적인 느낌에 자유로우며, 부분적으로 유약이 묻지 않은 곳이 보이는 화간(火間, 히마)이 나타나는 작품이 많다. 그리고 웅천다완은 특히 찻물이 들기 쉬운데 이것을 빗물얼룩이라고 하여 감상(鑑賞)의 대상으로 하며, 작품에 따라서는 유약이 희게 응결(凝結)되어 막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도 있다. 또 웅천다완의 잔 안쪽 바닥에는 경(鏡)이라 부르는 원형으로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이것이 작을수록 좋은 작품으로 본다고 한다.(작은 것에 좋은 다완이 많다는 의미이다.)
한편 평웅천(平熊川)은 철분(鐵分)이 많고 가는 모래가 섞여 있는 태토에 유약은 투명성 백유가 안팎으로 시유되어 있고, 시유할 때 손자국도 있으며, 다소 큰 굽에 형태는 약간 넓게 외반(外反)하고, 유약의 두께에 따라 두꺼운 곳은 크게, 얇은 곳은 미세하게 균열이 나 있다. 그리고 함경도(咸鏡道)라고 불리우는 것은 고모가이 다완 중에서 상품으로 그 중에서도 나중에 다시 굽 내부에 유약(釉藥)을 칠한 것을 아토고모가이라 하고, 매끄러운 느낌의 유약을 칠한 것을 가츠고모가이(滑熊川)라고 하며, 그림이 있는 것을 에고모가이(畵熊川)라고 한다. 또한 함경도의 한국식 발음이 바뀐 하미갼다이(ハミキャンタイ)도 고모가이의 일종이다. 더욱이 하미갼다이에 가까운 유약 위에 금기유(金氣釉, 가나케구스리 : 검은 빛 또는 붉은 빛으로 철수(鐵銹)와 같은 색조의 유약으로 세토 찻통에 이 유약을 칠한 것을 금기춘경(金氣春慶)이라고 한다.)를 칠한 것도 있다.
(4) 하케메(刷毛目)
그릇의 내외(內外) 또는 어느 한 면에 귀얄(붓이나 솔)로 백토(白土)를 빠르게 발라 지토(地土)가 보이는 곳도 있으나 역동감(力動感)과 속도감(速度感)을 느낄 수 있는데 살아 있는 듯 율동감(律動感)이 느껴지는 붓자국의 맛은 소박(素朴)하면서도 추상적(抽象的)인 문양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기형(器形)은 작고 얕은 사발형으로 전은 끝에서 젖혀져 있고, 죽절굽에 굽 내부는 거칠게 깎였으며, 밑꼭지는 중앙부가 작고 높게 돌출되어 있다.
도기(陶器) 장식기법의 일종으로 백화장토(白化粧土)를 하케 즉 귀얄로 한 번에 발라 버린 것으로 덤벙기법은 송(宋)나라나 원(元)나라 때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으나 귀얄기법은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창적(獨創的)인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귀얄기법은 백토의 부족으로 고안된 방법이라는 설이 있는데 남부지방 특유의 풍토(風土)와 자연에서 생겨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법은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성행했으나 이후 박지기법(剝地技法)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분청사기에서는 귀얄문이라고 하며, 귀얄분청이라고 분류한다. 따라서 귀얄분청은 하케메(刷毛目)라기보다는 하케미시마(刷毛三島)라고 하는 것이 옳다. 하케메 다완 중에서 밝은 회색(灰色) 바탕 위에 흰 귀얄 무늬가 있는 것을 대개 무안(務安)지방의 작품이라 하는데 느낌이 차가운 반면에 짙은 회색 바탕에 흰 귀얄무늬의 다완은 김해(金海)가마에서 구워진 것들로 두껍고 색감이 따뜻해 후덕(厚德)한 멋을 풍기기 때문에 차인들이 더 선호한다.
무지하케메(無地刷毛目)는 그릇의 안쪽에는 붓 자국을 짧게 1회로 끝내고 외면은 입술 아래부터 몸통 부분까지 덤벙을 하며, 허리 부분 아래로는 무지(無地) 상태로 두나 안과 밖을 1회 또는 전체를 귀얄한 것도 있다. 고하케메(古刷毛目)는 형태가 윤형(輪形)에 구연부가 외반(外反)되어 있고, 엷은 흑색의 소지에 유약을 두껍게 발라 무거운 듯한 질감을 주며, 굽은 대마디굽이다. 수수빗자루 같은 거친 붓으로 역동감 있게 발라 붓 자국의 문양이 마치 벼이삭처럼 칠해진 이나하케메(稻刷毛目) 외에도 작풍에 따라서 귀얄문 위에 인화문(印花紋)이나 박지문(剝地紋), 철회(鐵繪)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새로운 기법으로 각광(脚光)받았는 계룡산 가마에서 제작된 다갈색 바탕에 흰 귀얄무늬의 다완에 철사(鐵砂)로 무늬를 그려 넣은 계룡산하케메(鷄龍山刷毛目), 긴하케메(筋刷毛目) 등의 종류도 있다. 하케메는 우리나라의 것이 원류(原流)이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가라츠(唐津)의 기바라가마(木原窯) 계열의 제품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5) 가다테(堅手)
조선 전기(前期)에 만들어진 자기질(磁器質) 그릇으로 분청(粉靑)에서 백자(白瓷)로 이행되는 과정인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의 백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초기의 분청과는 달리 고온으로 소성(燒成)하여 흙이나 유색(釉色)이 광택이 나고, 맑은 소리와 함께 견고(堅固)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가다테[견수(堅手)]라는 명칭(名稱)이 붙은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가다테에는 本手, 白手, 遠州堅手, 砂堅手, 御本堅手, 長崎堅手, 大阪堅手, 御藏堅手, 繪堅手, 半使堅手, 雨漏堅手, 金海堅手, 堅手三島 등의 종류가 있다. 가다테의 혼데(本手) 즉, 간단히 가다테라고 부르는 것은 자주색 태토(胎土)에 맑고 옅은 파색(청색)에 약간 회색기가 있으며, 흰 느낌의 유약(釉藥)이 두껍게 칠해져 있다. 유면(釉面)은 차분하고 농염(濃艶)한 맛이 있으며, 작은 실금들이 있으나 굽까지 유약이 칠해져 흙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대표적인 나가사끼가다테(長崎堅手)는 흙이 보인다.
한편 가다테는 다완이 가마에서 잘 소성되었을 때 두들리면 “땡땡”하는 소리가 나고 찻사발의 빛깔과 분위기가 단단해 보여서 ‘땡땡이다완’이라고도 하는데 이와 반대로 손으로 두들겼을 때 “퍽퍽” 하는 소리가 난다고 ‘퍽퍽이다완’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야와라가이데(柔軟手)도 있으나 형태가 땡땡이와 구별하기 어려워 이를 모두 합쳐서 땡땡이다완이라고 한다.
(6) 다마고데(玉子手)
고모가이(熊川)와 유사(類似)한 형태의 덤벙기법 다완으로 그릇의 구연부(口緣部)는 크게 외반(外反)되고, 바깥 측면은 외반된 구연부 아래에서 반전(反轉)하여 무게감이 있는 곡선(曲線)을 이루며, 굽은 죽절(竹節 : 대마디)굽에 굽 안쪽은 고모가이처럼 둥글게 깎여있는 단아(端雅)한 형태의 다완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양이나 다완 내면의 중심부(中心部), 대나무 마디모양의 굽으로 보면 고모가이에 가까우나 깊이가 조금 낮고, 질감(質感)에서 차이(差異)가 있다. 유약의 표면이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미세한 빙열(氷裂)이 있는 다완으로 질감이 마치 계란(鷄卵, 달걀의 일본말은 옥자(玉子, 다마고)이다.) 껍질처럼 담황갈색이어서 이렇게 부른다. 가다테다완(堅手茶碗)이 산화염(酸化焰)으로 구워졌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지만 구연부가 크게 외반(外反)되어 있고, 그릇의 외형(外形)이 전혀 다르다. 부드럽다는 뜻의 야와라카데(柔わらか手)도 이 부류에 속하며, 薄柿, 玉鏡, 玉春, 雪柳 등의 대표작이 있다.
(7) 와리고다이(割高台)
굽을 분할한 다완으로 조선(朝鮮) 초기 국가제례(國家祭禮)에서 사용되던 중용한 제기(祭器)에서 이용되던 굽의 일종으로 넓은 의미로는 굽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굽의 두부(頭部) 부분을 V자로 잘라낸 것을 말한다.
조선 초기에서 16세기 이전에 빚어진 것도 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오리베(織部)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견본(見本)으로 김해(金海)에서 만든 것도 있다. 소지(素地)는 엷은 쥐색으로 자기에 가까운 질감의 흙으로 철분(鐵分)이 함유된 백유(白釉)룰 두텁게 시유하여 당당한 위용을 갖추고 있는데 굽이 크고, 강하며, 투박한 느낌을 주는 이 굽의 형식은 고려다완을 칭할 때도 사용한다.
태토나 형태, 유약상태 등이 웅천다완과 유사하며, 허리 부분은 고쇼마루(御所丸)에서 볼 수 있는 구갑문(龜甲紋 : 거북등무늬)이 나타나 있다. 또한 그 절개방식에 따라 굽을 4등분으로 나눈 와리고다이(割高台), 김해다완이나 입학(立鶴)다완 등에서 보이는 기리고다이(切高台 : 자른굽), 십문자(十文字) 등으로 나누어지며, 고려다완 외에 하기야키[추소(萩燒)], 팔대요(八代燒), 살마요(薩摩燒) 등에도 나타난다.
(8) 고혼(御本)
모모야마[도산(桃山)]시대부터 에도[강호(江戸)]시대 초기에 걸쳐 일본에서 보내온 견본 다완 양식을 기본으로 부산의 왜관요(倭館窯)나 부근인 김해에서 만든 다완으로 주로 백토(白土)에 붉은 맛을 띠는 황색의 유약을 바르고 거기에 백유(白釉), 철채(鐵彩), 청화(靑華) 등으로 학(鶴), 매발(梅鉢), 해바라기 등의 문양을 그렸다. 또한 고혼[어본(御本)]의 흙에는 맑은 홍매색(紅梅色) 반점(斑點)이 있어 차인들 사이에서는 차의 녹색을 우려내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감상(鑑賞)의 주안점이 되어 왔으며, 또한 이 반점을 고혼(御本)]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오리베고혼(織部御本)과 엔슈고혼(遠州御本) 등으로 나누어지며, 흙맛에 의해 스나고혼(砂御本)으로 불리는 것도 있다.
고혼다완(御本茶碗) 중 부산(釜山)의 왜관요에서 초기에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다찌츠루(立鶴)다완은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호소카와산자이(細川三濟) 장군의 공을 치하(致賀)하기 위해 서 있는 학을 그려준 그림을 본따서 만든 통형으로 두께가 얇고, 구연부는 살짝 외반(外反)되고, 미세(微細)하면서도 거친 붉은색의 흙으로 비파색 몸체에 여러 곳에 홍반(紅斑 : 모미지)이 있으며, 굽은 세 군데를 도려낸 자른굽(切高台 : 기리고다이)이다. 그리고 앞·뒷면에 못 끝 등으로 그린 머리와 꼬리 및 발은 흑색, 몸통은 백색으로 상감(象嵌)된 엉거주춤한 자세의 학(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고쇼마루 등도 고혼다완의 일종이나 간분[관문(寬文, 1661~1673)]시대부터 죠우쿄우[정향(貞享, 1684~1618)]시대에 걸쳐 대마도(對馬島)에서 파견된 관리(官吏)인 玄悅과 茂三 등이 부산의 왜관요(倭館窯)에서 만든 것을 보통 고혼다완이라고 부르는데 부산요에서 만든 도자기는 조선식과 일본식이 어우러진 이색적(異色的)인 작품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일본인의 취향(趣向)대로 해석(解釋)되고 변질(變質)되었기 때문에 순수(純粹)한 우리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無理)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더욱이 고혼(御本)을 모방한 고쇼마루(御所丸)는 완전한 일본의 형태(形態)와 색상(色相)임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見解)를 내시는 분도 있다.
(9) 긴카이(金海)
부산에 가까운 김해(金海)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고혼(御本)다완의 일종으로 기면(器面)에 ‘김(金)’ 또는 ‘김해(金海)’라는 명문(銘文)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자기질의 태토에 청백색(靑白色) 유약(釉藥)이 칠해져 있으며, 고온에서 구워져 가다테(堅手) 부류에 속한다. 모양은 완형(碗形 : 완나리)이며, 굽은 밖으로 힘차게 벌어진 바찌고다이[발고대(撥高台 : 나팔굽)]가 많고, 와리고다이[할고대(割高台 : 자른 굽)]로 된 것은 귀하게 취급된다.
그릇의 형태는 사발모양으로 모습이 당당하며, 몸통 전체에 고양이가 할퀸 듯한 자국이 있고, 4개의 작은 할(割)굽이 밖으로 열려있다. 몸체에는 그릇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빗살무늬가 네코가키[묘소(猫搔 : 장식기법의 일종으로 그릇의 내외면에 고양이 발톱으로 긁은 것 같은 문양이 있는 것)]로 시문(施紋)되어 있는데 대체로 구연부(口緣部)를 원형(圓形)으로 빚은 후에 적당히 눌러서 복숭아모양(桃形)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주빈형(洲浜形 : 일그러진 모양) 등도 있다. 기벽(器壁)은 얇고, 흙이 보이지 않게 실투백유(失透白釉)를 발랐으나 어렴풋이 붉은 빛이 비치는 것도 있다.
(10) 고쇼마루(御所丸)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가문(家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후루다오리베(古田織部)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조선의 김해에서 구워낸 것으로 모양은 대체로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전혀 없었던 구츠가타[답형(畓形, 답(畓)은 공차기 놀이를 할 때 신던 신발의 이름이라고 한다.)]이다. 몸통이 넓게 퍼져 있는데 몸체에는 띠를 두른 듯이 성형(成形) 자국이 세밀하게 되어 있고, 허리 부분에는 몇 개인가 깎아낸 주걱 자국이 있다. 굽언저리는 구갑문(龜甲文)으로 떼어낸 것이 특징이며, 구연부는 둥글게 말면서 부분적으로는 두꺼운 부분과 얇은 부분이 있게 하여 정취(情趣)가 있다.
굽은 크고 정리가 덜된 듯한 느낌이 드는 무작위적인 것과 5각(五角), 6각(六角), 8각(八角), 9각(九角) 등으로 각굽을 낸 것도 있다. 이 다완은 대담한 물레 성형과 호방한 조작, 무작위적 또는 작위적인 굽깎기, 구연부의 자연적인 빚음으로 역동적인 약동감과 자유분방함이 특징이다. 고쇼마루에는 반자기질(半磁器質)로 무유소성(無釉燒成)하여 자연미가 풍부한 히로무지고쇼마루(白無地御所丸)와 그 위에 철사(鐵砂)를 무작위적으로 칠해 역동적이면서 자유분방함을 느끼게 하는 구로하케(黑刷毛)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디자인을 바탕으로 조선(朝鮮)에서 만든 것을 고혼[어본(御本)]다완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것을 말한다. 고쇼마루(御所丸)는 원래 일본에서 조선과 무역을 위해 사용하던 어용선(御用船)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시마즈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이 다완을 만든 후 고쇼마루에 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進上)함으로서 배 이름을 따서 다완이 명칭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한편 고혼(御本)을 모방(模倣)한 고쇼마루(御所丸)는 완전한 일본의 형태(形態)와 색상(色相)임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다.
(11) 아마모리(雨漏)
다완의 몸체 부분 내외(內外)에 한자(漢字) 그대로 비에 젖은 듯한 얼룩과 같은 반점(斑點)이 있어 마치 천장이나 벽에 빗물이 새어들어 얼룩이 진 것에 비유하여 붙은 이름이며, 반점 색은 대체로 회색이 많으나 자주색의 것도 있다.
아마모리가다테[우적견수(雨漏堅手)]
아마모리는 흔히 일본에서 고모까이다완(熊川茶碗)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완형 다완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이 분청(粉靑)과 같이 반자기질의 것도 있고, 자기질에 가까운 것도 있으며, 아마모리가다테(雨漏堅手)라고도 부르지만 가다테(堅手)에 비해 작고 그릇의 얼룩 문양이 진하게 배여 있다. 철분이 함유된 흑갈색의 태토 위에 백화장토를 덤벙하고 투명성 백유를 시유하는 덤벙다완에 비해 아마모리다완은 흰 태토 위에 불투명의 실투유(失透釉)를 시유한 점이 다르다.
이 우루(雨漏)라는 것은 백자, 청자, 분청사기 모두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지만 반점(斑點)이 생긴 이유는 가마 안에서의 화학적 변화에 의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약간의 연질성 백자나 덤벙분장(粉裝) 다완에서 오랜 기간 차를 마시며 다완을 사용하던 중에 내화성과 흡수성 등의 차이로 미세한 유약(釉藥)의 틈이나 기공(氣孔) 등을 통해 찻물이 배어 나옴에 따라 착색(着色)이 되어 얼룩이 지게된 것이 많아 다완의 역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미도요(美陶窯)의 구성회(具誠會) 씨는 너무 지저분한 것은 추한 느낌이 들 수 있으므로 억지로 고태미(古態美)를 내기 위해 찻물을 지나치게 들이는 행위는 지양(止揚)되어야 한다고 한다.
(12) 운가쿠(雲鶴)
청자(靑瓷)나 분청사기(粉靑沙器) 등에 자주 사용되는 문양(紋樣)으로 고려(高麗) 후기 청자에서 나타나는 도안(圖案)된 국화문(菊花紋)과 조선(朝鮮) 초기 상감분청(象嵌粉靑)에서 나타나는 원문(圓紋)이 원통형(圓筒形)의 청자에 나타나는 것을 운가쿠데(雲鶴手)라고도 부른다. 이 다완이 만들어졌다는 제작시기도 여말선초(麗末鮮初 : 고려(高麗) 말기와 조선(朝鮮) 초기), 14~15세기 초, 16세기 등 여러 주장이 있으며, 가라츠(唐津)나 하기(萩), 팔대도자기(八代陶瓷器) 등에 모사(模寫)한 예가 있다.
그릇의 몸통 상하단(上下段)에 한 줄의 백상감(白象嵌) 띠를 두르고 다시 그 내면(內面)을 2등분하여 하단(下段)에는 두 줄의 원(圓) 안에 상감청자(象嵌靑瓷)에 나타나는 도안화된 한 송이 국화(菊花)를 상감하고, 그 주위로는 조선 초 매병(梅甁)에서 나타나는 약간 어색한 학(鶴) 문양을 구름 없이 흑백상감(黑白象嵌)하였다. 그릇의 상단부는 다시 3등분하여 안에 각기 다른 모습의 연주문(蓮珠紋)을 시문하였다.
(13) 교우겐하카마(狂言袴)
센리큐(千利休)가 가지고 있던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청자(靑瓷) 통형잔(桶形盞)을 견본(見本)으로 부산(釜山)에서 만들어간 운가쿠[운학(雲鶴)]다완의 일종으로 광언사(狂言師 : 능악(能樂, 노우가쿠 : 일본 전통 악극의 일종)의 배우)가 입었던 헐렁한 치마 같은 바지에 도안된 동그란 원의 문양(紋樣)과 닮았다고 해서 고보리엔슈가 붙인 이름이다.
통형이나 반통형의 다완으로 청자와 같이 얇은 회색 태토(胎土)의 몸통에 아래위로 기하문(幾何文) 문양이 있고, 가운데에 국화문(菊花紋)과 같은 문양이 백상감(白象嵌)되어 있으며, 너무 깊고 좁아서 말차용(末茶用) 다완으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하다.
국화문이 4개 또는 3개가 있는 것으로 시대의 차이가 있으며, 센노리큐(千利休)시대에 건너간 것은 아취(雅趣)가 있어 차인들 사이에서 소중(所重)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소구(紹鷗)가 가지고 있던 세 군데에 국화문이 있고, 연대가 오래되어 서명이 없는 대명물(大名物)은 교우겐가쿠라고 불린다. 소구 다음에는 稻葉美濃守正則, 冬木喜平次, 信州上田侯松平伊賀守 등을 거쳐 松浦家로 들어갔다.
(14) 가키노헤따(柿の蔕)
말 그대로 다완을 뒤집어 놓으면 형태나 색상이 꼭지를 딴 감을 닮았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며, 도도야(斗斗屋)의 한 종류로 옛날에는 자주 혼동되었다고 하나 다른 모습의 그릇이다.
태토(胎土)는 철분이 많은 사질토이고, 색상은 감(枾) 색과 비슷하며, 흙의 질감이 잘 나타나 소박하고 두툼해 보이나 들어보면 가볍다. 구연부는 자르다 말거나 흙을 덧붙여 이곳저곳이 갈라지게 하거나 산길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는 산길(山道) 또는 통구(樋口) 형태이며, 허리의 상단부까지 굽칼로 깎아서 흙의 거친 맛을 내어 예리(銳利)하고 강한 느낌이 든다. 굽은 낮은 발(鉢) 형태로 둥글고 낮게 깎고 중앙에 꼭지가 있고, 약한 달팽이굽도 있으며, 유약은 얇아서 무유(無釉)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다완 중에서 유명한 것은 센리큐가 소지하고 있다가 호소가와가 소장하게 된 것, 松平不昧가 가지고 있다가 堀田家가 소장하고 있는 것 그리고 龍田, 脊尾, 大津, 龍川, 京極 등의 서명(署名)이 있는 것 등이 있다.
(15) 고키(吳器, 五器, 御器)
고키(吳器)는 원래 ‘어기(御器)’라고 쓰며, 공양(供養)하는 그릇이란 의미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오기다완이 제사(祭祀) 때 사용하던 목기(木器)와 형태가 비슷한 데서 유래(有來)하였다는 설과 오(吳)나라에서 수입하던 그릇과 모습이 비슷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오(吳)는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오나라를 가리키는데 이상(理想)의 지명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기다완은 오기형(吳器形)이라고 불릴 만큼 높이가 높고, 굽도 높은데 굽의 내부는 둥글게 움푹 파이고 밖으로 벌어져 다완의 앉음새가 안정되고 당당한 품격을 느끼게 하며, 유약의 흘러내림, 손가락자국, 유약이 묻지 않은 부분 등 시유(施釉)와 소성(燒成)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무늬가 나타나 감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태토는 철분 성분을 함유한 내화도가 강한 흙이 섞여 있어 붉은 점이 나타나기도 하며, 유약은 불투명 또는 반투명의 담청색에 감색 및 푸른 기가 어우러져 있다. 제작된 시기는 정호다완이나 분청다완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시대로 무로마치[실정(室町)]시대 후반에 차인들 사이에 큼직한 느낌의 형태와 소박한 유약의 색으로 인기가 높았다.
오기다완은 크게 무로마치 시대에 대덕사에 투숙하였던 조선(朝鮮) 통신사(通信士)들이 기증한 대덕사오기(大德寺吳器), 단풍나무처럼 아름답게 요변(窯變)을 일으킨 홍엽오기(紅葉吳器), 번장(番匠 : 목수(木手)를 가리키는 말임)들이 사용하던 나무그릇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번장오기(番匠吳器), 잔 안쪽 바닥에 송곳으로 도려낸 듯 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있고, 잔의 몸체와 굽 주변에도 송곳으로 끍은 자국이 나 있다고 이름 붙여진 추오기(錐吳器), 비구니(比丘尼)라는 의미로 눈에 띄지 않는 여승과 같이 소박하고 변화가 적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니오기(尼吳器) 등 5개 종류로 나누어져서 오기(五器)라고 쓰기도 하는데 모두 고키자완이라고 하며, 이밖에도 유격(遊擊)장군이 가지고 왔다고 하여 명명된 유격오기(遊擊吳器), 간단한 그림을 그려넣은 회오기(繪吳器), 좌보산오기(佐保山吳器), 형오기(形吳器), 단반오기(端反吳器) 등이 있다.
(16) 도도야(斗斗屋)
어옥(魚屋)이라고도 쓰는데 크게 혼데도도야[본수두두옥(本手斗斗屋)]와 히라도도야[평두두옥(平斗斗屋)]로 구분하나 평다완류가 많고, 종류도 많은 편이며, 와비풍(わび風)의 느낌이 강하다. 도도야라는 이름의 유래는 센노리큐가 생선가게에서 발굴(發掘)했다는 설과 사카에의 도도야(斗斗屋)라는 상호(商號)를 가진 상인이 한 배를 사들였다는 설이 있다.
철분이 많은 적갈색의 태토에 푸른 기를 띤 비파색(枇杷色) 유약을 얇게 발라가마 속 불길에 따른 요변(窯變)으로 비파색과 짙은 푸른색이 마주하는 것과 비파색과 갈색의 불색이 때로는 점점이, 때로는 반점(斑點)처럼 나타나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그릇의 두께는 얇게 빚었으며, 몸체에는 가늘고 선명한 손자국이 있고, 굽은 작으나 잘 정리된 것이 특징이다. 굽언저리와 내부에는 다른 다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인 굽을 깎으면서 까칠까칠하게 일어난 흙날(흙이 칼날처럼 일어나 있는 것으로 이를 지리멘(縮緬)이라고 한다.)이 완전히 핀 버섯의 우산살과 같이 갈라진 속부분과 비슷하여 시이다께고다이[추용고대(椎茸高台)]라고 부르며, 대마디굽과 팽이꼭지가 특징이다.
혼데도도야[본수두두옥(本手斗斗屋)]는 깊이가 깊고 몸통은 오목하게 닫히고, 허리는 둥글고 넓은 형태로 구연부는 살작 외반(外反)되어 행다(行茶)하기에 편리하며, 철분을 함유한 미세한 입자의 태토에 시유(施釉)한 유약은 산화염(酸化焰)에서는 붉은 색, 환원염(還元焰)에서는 푸른색이 나며, 요변(窯變)이 이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히라도도야[평두두옥(平斗斗屋)]는 형태가 혼데도도야[본수두두옥(本手斗斗屋)]보다 낮은 평형으로 얇게 만든 것이 특징이며, 크고 작은 것들이 있다.
(17) 고후끼, 고히끼(粉引, 粉吹, 덤벙)
덤벙은 그릇을 성형한 후 적당히 건조하여 백화장토물에 덤벙 담그거나 그릇에 흘려가면서 입히는데 분무기 등으로 뿌려서 유약을 입히는 경우 분을 뿜어서 칠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고히끼[분취(粉吹)]라고도 한다.
분인(粉引) 다완 명-미요시분인(三好粉引) 구경 15.4cm 높이 8.3cm 개인 소장
배는 불쑥하게 부풀어 있고, 구연부는 외반(外反)되어 있는데 백유(白釉)가 분을 바른 것 같이 보이는 양식으로 철분이 많지 않은 백색토에 내외면을 화장토로 칠하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발랐으며, 산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남도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유추(類推)하였지만 전남 보성, 장흥, 고흥, 순천 등지에서 다량 출토되어 가마터가 막연히 보성 부근이라고 추정(推定)하였으나 최근에는 고흥의 운대리에서 가마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덤벙기법 중에는 손잡이가 있는 국자를 사용하여 분장하는 방법도 있는데 다완의 굽을 손가락으로 붙잡고 굽 안까지 깨끗하게 발라지도록 부어주면 손가락 자국과 받침돌이 닿는 굽자리만이 분장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의 화북(華北) 자주요(磁州窯)에서 전해진 백화장(白花粧) 기법(技法)이라는 설도 있다. 이렇게 국자로 백토를 씌우다 보면 잔 바깥쪽에 백토가 묻지 않는 경우가 있어 길게 삼각형의 무늬인 히마[화간(火間 : 유약이 발라지지 않은 부분으로 붉게 태토가 보이는 부분)]가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 선호한다. 히마(火間)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바가지 등을 사용하여 흘려 시유(施釉)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얇고 상쾌한 맛이 있고 현대적인 세련(洗練)된 기품(氣品)이 있다. 히마(火間)는 대체로 쐐기 형이 많은데 이 부분의 흙 색깔이 대비되어 감상의 포인트가 되고 있으며, 그릇을 잡는 좌우(左右) 손에 따라 쐐기형의 모양도 반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유명한 호조고비키(寶城粉引, 보성덤벙)의 경우 다완을 만들기 위해 재벌구이도 아닌 삼벌구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 이 방법이 고안되고 불과 50여년 동안만 제조되었다. 그후 백자가 보편화되고 더이상 이런 번거로운 방법으로 백자를 흉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제작방법이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잘 만들어진 코히키 다완은 물꽃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현상을 일으키는데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유약 사이의 태토로 물이 스며들면서 아름다운 물방울 무늬가 아주 잠깐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일본에서는 이때문에 명물(名物)로 여겨졌으며, 깔끔하고 유약을 어떻게 담그냐에 따라 유약이 묻지 않은 태토로 독특한 문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현대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
그리고 다완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찻물이 다완의 표면(表面)에 있는 균열(龜裂) 사이로 스며들어 비파색(枇杷色)을 띠면서 얼룩져 무늬를 이루는데 이것을 ‘비가 샌 자국’이라고 하며, 이 또한 감상(鑑賞)의 대상으로 차인들이 선호하는 작풍이다. 비샌 자국이라는 이름은 그릇 표면에 물든 무늬가 마치 천장이나 벽에 비가 샌 자국이 마르면 생기는 얼룩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유약(釉藥)의 성질이 조악(粗惡)하고 태토(胎土)가 물러서 나오는 얼룩으로 작품 자체는 그다지 높은 수준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 고성 및 보성가마에서 제작된 덤벙다완은 물에 적시면 바로 비샌 자국처럼 얼룩이 무늬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빗물 얼룩이라고 한다. 이런 그릇을 오래 사용하면 균열(龜裂) 사이로 찻물이 배어 다갈색으로 물들어가 변화의 묘미를 주는데 얼룩이 생겨 아마모리(雨漏)다완처럼 변하더라도 아마모리다완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한편 다완을 빚어서 굽 부분을 잡고 부드러운 백토 속에서 안팍으로 적시되 허리부분에서 굽 부분까지는 백토를 입히지 않고 투명유를 씌운 다음 구운 것을 반덤벙이라고 한다. 언뜻 보아서는 덤벙으로 보기 쉽지만 백토가 전체적으로 씌워진 것과 허리에서 굽까지 백토가 발라지지 않은 것으로 구별하면 쉽다. 반덤벙다완은 주로 전남지방에서 만들어 졌으며, 특히 조선 초 무안지방에서 제작된 것이 대량 발굴되어 무안덤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日野屋又右衛門이 소지(所持)한 松平不昧의 粉引, 讚岐國 高松의 사람이 소지하였던 野村德七의 粉引, 淺野侯 전래의 粉吹, 三好長慶소지의 三井家의 三好粉吹, 上野精一의 殘雪이라는 새김글이 있는 것 등이 있다.
● 소하쿠(楚白)
소백(素伯)이라고도 쓰며, 고히키(粉引)계의 다완(茶碗)으로 유약의 색이 순백(純白)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加賀 前田侯 전래의 초백(楚白)을 원조(元祖)로 馬越家 소장의 유래(由來)가 같은 양식이며, 그 외에는 없다. 마에다(前田)의 다완은 고히키풍으로 몸체에 초생달 모양의 태토(胎土) 여백이 보이며, 바깥쪽 백유(白釉)의 가운데에 푸른색 유약(釉藥)이 흩어져 있고, 다완의 내외면에 차가 스며든 문양이 아름답다.
(18)이라보(伊羅保)
철분(鐵分)이 많은 사질(沙質)의 거친 태토(胎土)에 유약(釉藥)이 얇게 발려 있는 다완으로 그릇의 표면이 오톨도톨하거나 까칠까칠하여 눌어서 거친 느낌(いらいら, 이라이라)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에도(江戶)시대 초기에 일본 차인(茶人)들의 주문(注文)에 의한 주문형 다완으로 그 모습에 따라 못으로 굽안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파낸 구기보리이라보(釘彫伊羅保), 전체적인 색깔이 황색을 띈 기이라보(黃伊羅保), 유약을 찻사발에 반쪽씩 나누어 시유(施釉)한 편신체이라보(片身替伊羅保), 오이라보(古伊羅保), 천종이라보(千種伊羅保) 등이 있다.
한편 박홍관 씨는 <차인지(茶人誌, 2004. 5)>에 기고(寄稿)한 글에서 이라보다완의 특징과 종류를 언급하면서 이도다완(井戶茶碗)은 자리와 계절, 다른 도구와의 격과 조화가 잘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이른바 차도구의 중심이기 때문에 대단히 권위적(權威的)으로 사용한 예가 많고, 또 그렇게 굳혀 온 전통이 있어서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으나 이라보다완은 이와 반대로 다른 도구와 주변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조화를 잘 이루는 다완이라고 하였다.
① 이라보다완(伊羅保茶碗)의 특징(特徵)
‘이라보’라고 함은 우리나라 도자기 용어로는 녹유(綠釉)에 해당되는데 녹유의 발달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신라시대에는 점토(粘土)를 빚어 그 상태로 구워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기를 만들어 사용해 왔는데 토기(土器)를 굽는 과정에서 나무의 재가 날아가 그릇에 부착되어 유약이 형성된 것이 자연유(自然釉, 綠釉)이며, 불의 상태에 따라 환원염(還元焰) 상태일 때는 녹색을 띠고, 산화염(酸化焰) 상태일 때는 황색을 띤다. 재가 날아가 단단한 유리질의 아름다운 유약이 되는 것을 보고 신라인은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그 재를 이용하여 그릇이나 기와에 시유하여 비로소 녹유도기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다. 그 재유에 장석질의 원료를 첨가하면 청자유(靑瓷釉)가 되는데 도자기 발달사에서 유약의 시초가 녹유(綠釉)인 것이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귀족들은 청자(靑瓷), 서민들은 이라보 계통의 도기(陶器) 사용이 대중을 이루며, 생활 기물과 특히 태(胎) 항아리와 같은 고분의 부장품(副葬品)들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지금은 찾기 어려운 조선시대의 녹유도자기는 서민들의 생활 용기로 많이 생산되어 이용했으리라고 보는데 그 당시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철분이 함유된 흙을 사용하고, 재를 이용한 이라보의 아름다움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이라보다완은 연한 다갈색으로 흙에 좁쌀 크기의 모래가 섞여 있고, 표면에는 가는 물레 자국이 있으며, 그 위에 이라보 유약이 굽까지 씌워져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흙의 까다로운 정제(精製)를 거치지 않고 그저 적합한 흙을 골라 자연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부드러운 점토질과 아주 가는 모래질, 콩알 만한 돌이 섞여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굽을 깎을 때는 현재와 같은 예리(銳利)한 칼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나무나 대나무 등을 이용하여 마무리 작업을 하였고, 이때 태토 속의 작은 돌이 밀려 나오면서 자연스런 홈이 패여 유약이 연하게 발린 부분에는 태토의 질감이 그대로 나타난다.
② 이라보다완(伊羅保茶碗)의 종류(種類)
이라보다완은 여러 가지 모래가 섞여 흙의 자연스러움을 표면으로 그대로 드러내며, 녹색(綠色)의 싱그러운 색상과 황색(黃色)의 따뜻한 조화(調和)와 함께 흙의 자연스러운 속살을 비춰 그릇과 차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차맛을 한층 더 높여준다. 아래에 든 이라보 외에도 주문하는 찻사발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고이라보를 조금 변형시킨 혼떼이라보(本手伊羅保), 찻사발 안에 귀얄을 시문(施紋)한 우찌하케메(內刷毛目), 두모포 왜관(倭館)과 초량 왜관에서 고혼이라보(御本伊羅保) 등이 있다.
㉮ 구기보리이라보(釘彫伊羅保)
굽을 깎은 뒤 굽 안자리를 안에서 밖으로 비교적 굵은 못으로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를 파낸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흙은 적다색으로 작은 좁쌀만한 돌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표면은 상당히 까칠까칠하지만 자연스러우면서도 강한 맛이 난다.
㉯ 기이라보다완(黃伊羅保)
황색(黃色)으로 보이는 색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태토는 붉고 노란빛을 띄며, 산화염(酸化焰)에 가까운 불을 사용하였다. 거친 흙에서 표출된 자연스러운 맛과 대마디굽이 받쳐주는 당당한 모습이 특징이다.
㉰ 오이라보(古伊羅保)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에 지방요에서 생산되었던 힘이 있고 소박한 다완으로 주문(注文) 이라보의 원형(原型)에 해당된다고 한다. 다른 이라보다완보다는 조금 큰 형태로 그릇 내면의 다건자리 부분에 1회의 짧은 백화장토 귀얄문이 있어 내쇄모목이라보(內刷毛目伊羅保)라고도 부르며, 전의 모습은 산길 또는 통구로 모래가 튀어나와 있고, 굽은 대마디굽에 굽 안에는 배꼽이 있다.
㉱ 가타미가와리이라보(片身替伊羅保)
그릇 내면에 반 바퀴 정도의 백화장토 귀얄문이 있는 고이라보의 일종으로 굽은 대마디굽이고, 굽안은 달팽이굽이다. 입술자리를 빚으면서 약간 바깥쪽으로 기울도록 하고 유약을 바르기 전에 귀얄무늬를 붓으로 돌리는데 이것을 편귀얄문이라고 한다. 그 다음 그릇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도(井戶)유약과 이라보유약을 씌워 소성한 것이 특징이며, 두 유약이 겹쳐진 부분은 또다른 질감을 나타내고 있다.
㉲ 치사쿠이라보(千種伊羅保)
재상(宰相)인 천종가(千種家)에서 소지(所持)하였다고 이름이 붙여진 편신체이라보(片身替伊羅保)의 일종으로 철분(鐵分)이 많고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돌트임이 심한 곳도 있으며, 색상은 변화가 풍부하고, 굽 안을 얇고 둥글게 도려낸 것이 특징이다.
㉳ 완나리구기보리이라보(椀形釘彫伊羅保)
구기보리이라보다완의 특징을 가지면서 밥그릇 형태라고 해서 완나리(椀形)라고 하며,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손에 쏙 들어오는 것으로 매우 안정감이 있는 다완으로 일본에서 진품으로 남아있는 것은 5개 미만으로 추정된다.
(19) 덴모쿠(天目)
차를 마시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는데 당(唐)나라 때는 자다법(煮茶法)과 전다법(煎茶法)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송(宋)나라 시대에는 점다법(點茶法)이 유행하였으며, 명(明)나라 때는 포다법(泡茶法)이 유행하게 되어 찻잔의 빛깔도 찻물의 빛깔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 당나라 때는 찻물이 담황색(淡黃色)이어서 청자다완(靑瓷茶碗)이 사용되었으나 송나라 때에는 청자다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지금의 말차보다 훨씬 흰빛이 도는 녹색이어서 송대(宋代)에는 청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명(明)나라 때부터는 찻물이 연두빛이어서 백자(白磁)로 된 찻잔이 사용되었다.
북송(北宋)의 채양(蔡襄)은 <다록(茶錄)>에서 「차의 빛깔이 희기 때문에 검은 잔이 알맞다. 건안(建安)에서 만든 것은 짙은 남색을 띤 검은 빛인데 무늬는 토끼털과 같고, 그 잔은 정묘(精妙)하고 두꺼워서 불에 쬐면 오래도록 뜨거우며, 차가워지지 않으므로 요긴하게 쓰기에 좋다.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은 얇거나 자주 빛깔이어서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청백색 잔은 차 겨루기의 전문가들이 스스로 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元)나라 시대부터 명(明)나라 시대인 14~15세기에 이르면 흑유다완은 급격하게 쇠퇴하여 16세기에 이르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이는 명나라 때부터는 찻물이 연둣빛이어서 백자다완이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8~9세기까지는 중국 월주요(越州窯) 청자(靑瓷)와 형주요(邢州窯) 백자(白瓷)로 만든 다완(茶碗)을 최고로 평가했으나 10세기가 되면서 흑유(黑釉)를 입힌 다완이 서서히 부각되었다. 10세기까지만 해도 흑유자기(黑釉瓷器)는 예술적 가치가 없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보급품 정도의 수준이었으나 11세기가 되면서 흑유다완이 유행의 주역이 되었다. 흑유(黑釉)에서 심오한 차의 미를 발견한 송대의 차인(茶人)들은 당시 최고의 기교(技巧)를 살려 차의 푸르름을 깊게 해주고 유연한 멋을 느끼게 하는 천목다완(天目茶碗)을 만들어내었다. 중국에서는 건잔(建盞), 대피잔(玳皮盞), 흑유완(黑釉碗)이라고 불리나 일본에서만은 이 사발을 천목다완이라고 부른다.
천목다완의 묘미(妙味)는 칠흑(漆黑) 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결정유(結晶釉)에 있는데 천목유(天目釉)는 점성(黏性)이 강하기 때문에 유약(釉藥)이 두텁게 씌워지고 가마 속에서 고열(高熱)을 받으면 기포(氣泡)가 생성되어 터지게 되는데 점성이 강한 특성으로 인해 약간 패인 정도의 포흔(泡痕)으로 남게 된다. 포흔이 생기면 주변에 부유(浮游)하던 산화제2철의 미립자(微粒子)가 포흔을 중심으로 일시에 모여 응집(凝集)되는데 이것이 천목이 지닌 화려한 무늬의 비밀이다.(결정유란 고온의 가마 속에서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 유약 자체가 다면체(多面體)를 형성하여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는 유약을 말한다.)
① 천목다완(天目茶碗)의 유래(由來)
천목(天目)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설(定說)은 없으나 몇 가지 설이 있다. 가마쿠라(鎌倉)시대 이후의 일본 선승(禪僧)들은 송나라로 유학을 갔는데 천목다완은 귀국길의 유학승들이 기념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그들이 사원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하던 다완이었다. 천목산에서 왔다는 의미로 천목다완이라는 명칭이 유래하게 된 것이며, 여기에서 사용된 철을 함유한 흑유(黑釉)를 포괄하여 천목유(天目釉)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목산(天目山)에서 구운 것이어서 천목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으나 이 지역에는 옛날부터 도자기를 굽는 요(窯)가 없어 명확하게 낭설(浪說)로 판명되었다. 천목산 인근에는 복건성의 건요(建窯)가 있고, 송대에는 건잔(建盞)을 생산하여 유명하였으므로 천목산에서 사용한 다완은 건요의 천목다완이었음을 추정(推定)할 수 있다.
원래 천목다완이라는 명칭은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채양이 다완(茶碗)을 다잔(茶盞)이라고 표현하였듯이 건요의 다완을 건잔(建盞), 길주요의 다완은 대피잔(玳皮盞)으로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만은 이 사발을 천목다완이라고 부르며, 일본의 국보(國寶)로 지정된 천목다완이 국제적인 문화재(文化財)로 알려짐에 따라 유럽을 비롯하여 중국에서조차 천목다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문헌에서도 무로마치(室町) 시대에는 건요의 다완은 건잔, 길주요의 다완은 별잔(鼈盞) 또는 능피잔(能皮盞)이라고 하였다. 이 건잔, 별잔, 능피잔과 함께 천목이라고 하는 중국제 다완이 따로 있었는데 이것은 건잔과 천목과는 전혀 다른 다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② 건잔(建盞)과 대피잔(玳皮盞)의 비교(比較)
천목다완(天目茶碗)을 대표하는 작품에는 복건성(福建省) 건요(建窯)에서 제작된 건잔(建盞)과 강서성(江西省) 길주요(吉州窯)의 대피잔(玳皮盞) 두 종류가 있다.
건잔은 철분이 많이 함유된 거친 흙으로 만들어져 두께가 두껍고 흑갈색이나 자갈색을 띠며, 허리 아래 부분이 두껍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열전도율(熱傳導率)을 낮추어 잔에 담은 차의 열이 쉽게 달아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건잔의 형태는 천목형이라는 다완의 전형적인 형태로 입구 쪽으로 갈수록 벌어진 모양이어서 정면에서 보면 입 테두리가 잘룩하여 거북이의 입을 닮았다고 ‘별구(鼈口)’라고도 한다. 바닥이 죄어 있어 굽이 낮고 작으며, 굽 주위에는 유약(釉藥) 덩어리가 흘러 굳어진 것이 보인다. 바닥 부분에는 유약이 씌워져 있지 않아 태토(胎土)가 노출되어 있는데 질감이 거칠고 단단하며, 색은 진한 자갈색을 띤다. 건잔의 화려한 무늬 비결은 유약(釉藥)과 가마에 있는데 유약의 점성(黏性)과 철분의 함유량, 유약의 두께, 유약에 함유되어 있는 산화금속(酸化金屬) 등이 소성(燒成) 상태, 소성 후의 냉각조건에 따라 산화제2철이 결정(結晶)을 이루게 되어 다양한 무늬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건요 유하은채(釉下銀彩) 연화문 다완 - (南宋)
철의 요변 결청체인 은유적(銀油滴)의 은빛을 나타내주는 구성 성분을 문양으로 유도하여 유약아래 나타나도록 한 요변 은채 연화문
한편 강서성 길주요의 대피잔은 황백색의 부드러운 흙으로 만든다. 흑갈색의 유약을 먼저 씌우고 그 위에 규산질(硅酸質)의 황백색유를 다시 입히는데 이 두 개의 유약이 조화된 다완의 표면에 매화(梅花), 용(龍), 문자(文字), 형상(形象) 등의 다양한 문양으로 다채로운 작품을 표현하고 있다. 건요의 천목이 가마 안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개성적인 작풍인데 반해 길주요의 천목은 문양을 이용하여 인공적인 기교로 표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색적인 것은 목엽천목(木葉天目 : 나뭇잎 천목)으로 흑유(黑釉) 위에 한 장의 나뭇잎을 붙여 구운 것이다. 나뭇잎 속의 규산(硅酸) 성분에 의해 무늬가 나타나는데 주요 소재로는 규산 성분이 강하고 잎이 두꺼운 느티나무나 찌르레기와 같은 잎이 적합하다고 한다. 언뜻 보면 쉽게 생각되나 실제로 완성되기에는 절묘한 기술을 요하는 작품이다.
남송(南宋) 전지루화매화문(剪紙漏花梅花紋)흑유다완
다완에 종이를 꽃모양으로 오려붙이고 유약을 바른 후 소성하면 종이가 타면서 그 성분이 흘러나와(漏花) 꽃 모양이 이루어진다.
목엽천목
천목다완은 보통 입주위에 얕은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데 이를 복륜(覆輪)이라고 한다. 복륜은 다완의 입 주변 부분에 유약이 두껍게 씌워지지 않아 흐트러지기 쉬운 것을 감안하여 여기에 금(金), 은(銀), 유약(釉藥) 등으로 테를 둘러 부각(浮刻)시킨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는 금복륜(金覆輪) 다완은 천자(天子)와 장군(將軍), 은복륜(銀覆輪) 다완은 삼공(三公) 이하의 신분층, 평민에게는 복륜(覆輪)을 두르지 않은 다완으로 접대하는 등 접빈객(接賓客)의 신분에 따라 분류하여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③ 천목다완(天目茶碗)의 종류(種類)
천목다완은 형태에 따라 분류하면 구연부(口緣部)가 약간 오무라진 속구형(束口形), 김해사발과 비슷한 모양의 염구형(斂口形), 전이 약간 외반(外反)된 모양의 별구형(鼈口形), 전체적으로 약간 넓게 바라진 창구형(敞口形)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여러 종류가 있어 복잡하게 분류되나 다음의 6가지 종류를 기본으로 한다.
㉮ 요변천목(曜變天目)
별과 같이 아름다운 광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천목다완 중에서 최고급으로 평가되는 다완이며, 형태는 전형적인 천목형이다. 표면에 은백색의 입자(粒子)가 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유적천목(油滴天目)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입자의 크기가 다르고, 불규칙하게 무리를 이루고 있다. 또한 표면에 얇은 피막(皮膜)이 있어 은청색의 광채를 발하고 있는데 이 광채는 은백색의 입자 주위에서 화려하게 빛난다. 이를 홍채(虹彩)라고 하며, 요변천목의 매력을 대표하는 특징이다.
도엽천목(稻葉天目), 수호천목(水戶天目), 용광원천목(龍光院天目) 등 요변의 조건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것은 네 작품에 지나지 않으며, 모두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 중국인이 다완으로 만든 최고봉은 건요(建窯)의 건잔(建盞)이고, 그 건잔의 최고 걸작이 바로 이 도엽건잔(稻葉建盞)이다. 무로마치 시대에 일본에 건너갔으며,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에도시대에 이나바가(稻葉家)에서 소장하여 이 별칭(別稱)이 붙여졌다고 한다.
㉯ 유적천목(油滴天目)
마치 물에 기름이 떠 있는 것 같이 아름다운 무늬가 안팎으로 표면에 흩어져서 나타나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유적은 철분(鐵分)이 고화도에서 포화(飽和), 냉각기(冷却期)를 거치면서 모여든 결정체(結晶體)로 밤하늘의 은하수를 연상시킨다. 중국에서는 적주(滴珠) 또는 자고반(鷓鴣斑)이라고 하는데 자고반은 복건성(福建省)의 자고(鷓鴣)새의 흉부(胸部)에 있는 반점(斑點)과 흡사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화목천목(禾目天目)
점성(黏性)이 적은 유약이 굽 쪽으로 녹아내림에 따라 생긴 줄무늬가 토끼털의 섬세(纖細)한 선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다양한 줄무늬가 있는데 이를 두고 일본에서는 다완의 표면에 벼 이삭과 같은 무늬가 있다고 화목천목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토호잔(兎毫盞)이라고도 한다.
㉱ 지천목(只天目)
유천목(唯天目)이라고도 하며, 건잔(建盞)에서 가장 숫자가 많다.
㉲ 회피천목(灰被天目)
흑유(黑釉)를 씌운 다완 표면에 투명한 목회(木灰) 유약을 아주 얇게 입힌 천목다완이다.
㉳ 대피잔천목(玳皮盞天目)
강서성 길주요(吉州窯)에서 생산된 것으로 황백색의 부드러운 흙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얕은 것이 많고, 두께도 얇다.
첫댓글 훌륭하신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