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
1965년 강원 정선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 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1998년 제 1회 <고대문학 신예작가상> 수상
·펴낸 시집으로 『단편들』이 있음
네 영혼의 중앙역
키냐르, 키냐르……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저녁마다 너를 만나던 이 지상의 물고기 자리에서
나는 왜 네 심장에 붙박이별이 되고 싶었는지
네 기억의 붉은 피톨마다 은빛 비늘의
지문을 남기고 싶었는지
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외로운 몸짓으로
네 몸을 거슬러 오를 때도
내 영혼은 왜 또 다른 생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
생이 더 이상 생일 수 없는 곳에서,
생이 그토록 생이고만 싶어하는 곳에서
부르지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은밀해서 생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확실한 생이
겨자씨처럼 작은 숨결을 내뿜으며
덜컹거리는 심장의 비밀을 데리고
저녁처럼, 문지방처럼, 음악처럼
네 영혼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푸른 돛배
탁구공 속의 돛배를 보셨나요
순간의 그 꿈꾸는 듯한 속도에 실려 출렁이는
저 푸른 돛배의 계절을 보셨나요 가을이거나
또 다른 가을의 틈새, 간혹 눈 내리는 초겨울
탁구공 같은 우주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흘러가거나 멈추는 것들의 영원,
그 매순간의 황홀하고도 무서운 영원 속에서
수십 장의 나뭇잎들이 몸 뒤척일 때마다
푸른 돛배로 바뀌는 신비를 보았나요
촛불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푸른 돛배
그대 무심히 내뿜는 담배 연기 속의 푸른 돛배
그 푸른 돛배가 황금의 노을로 사라질 때까지
눈감지 못하는 그대 눈동자 속의 푸른 돛배
그대 눈동자 뒷편에서 츨렁이는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가볍고도 아름다운 그 동그란 공기 속에서
가기도 잘도 가는 푸른 돛배 한 척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
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
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나는 음악처럼 떠난다
― 7월,
나는 거의 할 일이 없어, ……灣 바라보다
― 8월,
자, 이제는 해변으로라도 가야 한다
― 혜화灣,
테베에서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발칸 반도의 서쪽 해안을 따라 아르타로 간다. 이 해안선의 어디쯤엔
가, 자다르와 가에타, 툴롱과 말라가가 있을 것이다. 말라가에서 바라보면 지브롤터 해협 건너 오랑이 있
을 것이다. 그러나 오랑에서 계속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세투발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비고와
히혼을 거쳐서 라로셸로 향한다. 라로셸에서 바라보는 비스케이灣의 황혼은 아름답다. 그러나 칼레로 가
는 우리는 비스케이만의 아름다움에 쉽게 눈멀지 않는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
서 해안선을 따라 칼레를 지나 암스테르담과 오르후스와 탈린과 말뫼와 페쳉가와 아르항겔스크를 지나 카
닌 반도로 간다. 카닌 반도는 춥다. 너무 추워서 아름다운 반도, 카닌 반도에서 水晶의 나무들이 산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숲의 나무들과 순결처럼 차가운 계절을 가슴 속에 품고 우리는 해안을 따라 계속해서
간다. 야말과 기단과 턱시를 지나 추코트 반도를 돌아 캄차카 반도에 다다를 무렵, 우리들의 가슴 속에
서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한 사람이 죽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지가와 빌 리가, 이레트와 마가단
을 거쳐 추미칸에서 잘 생긴 어부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투구르를 지나 오랜 산책 끝에 블라디보스토크
에 이르면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청진과 함흥과 원산을 거쳐 대포항에 다다
를 것이다. 대포항에서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서울로, 혜화灣으로 달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리고 혜화灣에서 플라타너스 잎들의 서쪽을 향해 걸으며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테베로 간다.
(그런데 도대체 테베는 어디 있지?) 속으로 묻기도 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
갈 것이다.
― 센테멘탈 실업 동맹,
그러나 오랑에서 세투발에 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바다호스를 거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랑에서 삼
년을 살았다. 오랑의 집들 사이로는 거미의 입김 같은 바람이 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알제市로 우리
는 자전거를 타고 한 달간을 달려가기도 했다. 알제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을 아니다. 다만, 지
중해 저 너머를 향한 우리의 그리움이 그곳에 추억을 실어다 나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가숨엔 언제나 푸른 지중해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우리들의 귀에는 바다 갈매기의 울음 소리, 음악처럼
들려왔다. 코코넛 향기처럼 달콤했던 우리들의 청춘 시절, 우리의 청춘은 깃발처럼 나부끼며 그 바닷가
에서 오래, 페스트 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랑에서 세투발에 가기 위하
여 우리가 바다호스를 거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세투발에 갈 일이 없었으며, 더구나 바다 건너 대륙의 바
다호스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슴 속의 내륙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우리
들의 그리움이란 센티멘탈 실업 동맹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랑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기 때
문이다. 맥주와 담배, 센티멘탈 실업 동맹, 그리고 실연과 실업과 실업수당까지도, 심지어는 센티멘탈 실
업 동맹의 파트롱인 시시껄렁한 삶까지도.
말라가에서 계속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세투발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센티멘탈 쟈니, 기타를 치며 노래하네. "워∼워, 난 테베로 갈거야." 센티멜탈 쟈니 밤새도록 별빛
아래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네. "테베에는 어여쁜 아가씨들이 많아, 그 중에서도 제일로 이쁜 아가씨와 워~
달빛 아래서 난 사랑을 할 거야, 워∼워, 난 테베로 갈거야, 난 테베로……"
― 11월,
후박나무, 복숭아나무, 사과나무, 모과나무, 배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목련나무, 은행나무, 벚나무,
라일락, 주목, 향나무, 석류나무, 단풍나무의 가을이 왔다.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자 내 안의 천사가
날아가 버렸다. 라사에 뜨는 아득한 초저녁 별
쇼몽에 대하여 말하다
-석남에게
한 때 나의 꿈은 저 불란서의 뒷골목에나 가서 푸른 눈의 女子와 놀다가 객사하는 것
또 한 때 나의 꿈은 아무도 모르는 고장에 가서 포플라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것
또 다른 한 때 나의 꿈은 야간 열차처럼 덜컹거리는 바람을 타고 노래의 끝까지 가서 술을 마시다 죽는
것 술을 마시며 몽롱한 꿈 속에서만 살 다가 죽는 것 죽어서 하루 종일 바다의 음악이나 듣는 것
1 돌을 찾아서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린 아들과 함께 강가에 갔었네. 딱히 마음 속에 두었던 돌의 얼굴이 있었
던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은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강변을 헤맸네. 귀여운 수달이라도 보았던 걸까, 다섯
살 박이 아이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中秋의 햇살이 부서지는 강변에서 나는 하루 종일 침묵하는
돌들을 만났을 뿐이네. 말을 건네면 저만치 달 아나던 돌들, 네 흐린 눈동자로 날 쳐다보지 마, 속삭이며
네게서 등을 돌 리던 돌들. 등돌린 돌들 일으켜 세우면 돌들은 그들의 껍질 뿐인 몸만을 그곳에 남겨두
고, 영혼은 말을 타고 멀리, 영원으로 달아나 버렸네. 강언 덕 나뭇잎 새로 靑色의 어둠이 오고 초저녁
별들 새초롬히 부르튼 발가락 을 내밀 때, 배고른 귀가길에서 드디어 만난 먹청석 하나. 푸르고 깊은 밤
에 만난 '멍청한 영혼'이라고, 아이와 나는 그 돌을 '멍청석'이라고 불렀지 만 먹청석 하나 껴안고 돌아
오는 저녁은 다 늦은 꿈길처럼 아늑했네.
2 꿈 이야기
그날 밤 나는 고구려 꿈을 꾸었네. 아주 높은 산 위였는데, 그곳엔 광활한 평원이 있었고 그곳을 사람
들은 고구려라 불렀네. 그 고구려의 중심 부분을 사람들은 集安이라 불렀고, 그 아래 산기슭을 集下라고
불렀네. 나 는 集安에서 한 여인을 만났네. 그 여인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 데 그 초대는 은밀하
고도 부드러웠네. 集安 촛불이 타오르던 그녀의 방, 나는 그 방에서 하룻밤의 달콤한 잠에 혼곤히 빠져
들었던 것인데, 새 한 마리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에 깨어나니 아침이었고, 방은 텅비어 있었고 밖
으로 달려나가 사방을 살펴보니, 그곳은, 내가 낮에 주워온 돌 위였네.
3 첫가을
나는 지금 내가 주워온 돌을 보고 있네. 이 돌은 약 삼십 센티미터 정도의 먹청색인데, 돌 한가운데 밝
은 갈색의 'ㅅ'자 모양 무늬가 있네. 그 돌무늬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는 가을을 느끼네. 밝고 넓
은 평원, 그러나 고요하고 아늑한 평원. 그 위로 조용히 날아가는 새, 새 주변엔 온 통 밝은 갈색의 풀
들이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고, 밝고 넓은 평원 그러나 내 마음에 꽉 들어차 오는 조그맣고 아담한 마을.
나는 돌의 이름을 '고구 려의 가을'이라고 붙여보네. 그러자 돌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 속으로도 가 을이
오네. 가슴을 설레게 하던 첫사랑의 밀어처럼 밀려와, 하 아득하게 천년만에 처음인, 가을이 오네. 그러
다 다 늦은 사랑이어서, 서러운 것들 만이 그런 것들만이 떼지어, 아 아득한 돌무늬로 왔네.
4 쇼몽에 대하여 말하다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쇼몽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말하는 게 아니라네. 쇼몽은 아느날
문득 내게로 왔다네. 그것은 아마 내 마음 의 작은 지도 속에서 왔을 것이네. 쇼몽을 찾아, 아득한 옛날
에 나는 떠났 네.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遼)를 금(金)을 홍안령을 음산 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네.* 그대는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나는 언젠가 그곳에 가본적이 있다네(아마 전생에서였을 것이네, 낯설지가 않은 걸
보니).
그대는 쇼몽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쇼몽은 파리에서 차를 타고세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있을 수
도 있고, 그렇제 않을 수도 있다네.
5 白石行
아무르, 아무르,
이제 첫눈이 오리, 덕적도에, 인천에, 은율에, 정선에, 백석에, 쇼몽에,
격렬비열도에, 늦은 가을바람은 햇살을 뱃고동처럼 물고와서는 그래도는
서럽고 맑은 눈동자들에게 한 짐씩 부리고 간다
음악이 있어서 좋았던 것이다
때죽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영상은, 현상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대상의 허무이다 ―롤랑 바르트
―어떤 입맞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구체적인 저녁은 오네 거미줄 위의 오솔길을 따라 저녁은 동그란 시간을 굴렁쇠처
럼 굴리며 쌍둥이 구름을 데불고 흘러가네 그리고 누군가 동그란 입술을 벌려 <나문닙>이라고 말할 때
그 입술 위에 돋아나는 반짝이는 나문닙들은 언덕 위에 멀거니 서서 나부끼는 <나뭇잎>의 허무를 허무네
―구름 저편에 있는 나,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하루 종일 나무를 바라보던 마음이,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처럼, 딱딱한 입술로
중얼거리네, 새들은 날아다니는 저마다의 섬인 거, 그 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물결을, 공기의 물결을
밀어서, 누군가의 생각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 거,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바다, 푸른 바다, 검은,
푸른 바다, 검은, 깊은 푸른 그녀, 어젯밤 누가 그녀를 헤엄쳐 건넜는가, 오늘은 또 누가 그녀 속에서
익사하는가, 추억의 헛간 같은,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호수를 닮은 영혼들, 머리카락 휘날리며 바람 속
을 달려가는 나무들, 물 속의 나무들, 나무들 속을 흐르는 격렬한 침묵들, 오래된 추억 때문에 태양은 더
욱 더 뜨거워져가는데, 바다, 그녀의 정맥 속으론 왜 차가운 구름장들이 흐르는가, 구름의 발바닥들, 잎
사귀의 무릎들, 아니 <나문닙>의 관절들, 그 동그란 발음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나와 나 사이엔 혹은
나와 나 사이엔, 뭐가 있나, 흐르는, 뭉쳐진 구름들, 흩어질 시간들,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거기에서
누가 침묵의 노래를 부르나,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깊은, 아주 먼, 먼 먼, 나
―도대체 이건 뭔가(창 밖엔 자욱히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나는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를 쓰려다가 잠시
보류하고 창 밖 깊은 숲, 시베리아 호랑이에 관한 시를 다시 써보네
―시베리아 호랑이에 관한 시,
지금 창바껜 포구, 비만는 단풍나무들
그 푸른 나문닙 속엔 도대체 뭐가 인나
아무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염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 위의
집들 빠르게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
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
나는 아무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참새구이들이 투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
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
추억이 페달이었네 폐허와
폐허와 폐허와 또 다른 폐허
속에서 푸푸
푸른 현기증이 나도, 페달을 밟으면서
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
아이디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
세월이 갔네 아무데서나
사랑을 했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자작나무 뱀파이어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랫집게에 집혀 짐승처럼 울부짖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 고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어느 맑고 추운 날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사해졌다고
장만옥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