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사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머리의 상처 때문에
붕대를 내내 감고 있어야만 했고 그 꼴을 애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엄살을 피
우며 일주일간 병원 신세를 졌던 것이다. 어머니에겐 계단에서 구른 것이라고 대충 둘러대
니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나는 줄곧 퇴원 후의 일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우선 그 날의 일에 대해
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가 문제였다. 정미선이 두 양아치를 데리고 온 바로 그 날의 일
에 대해서 말이다.
솔직히 그 날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 옛날 고민철에게 혹독히 두들겨 맞았던 것처럼 그
날 역시 놈들에게 호되게 당할 것이라고만 여겼다.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던 것 까진 사실
이었다.
대책 없이 겁에 질려 있던 나를 향해 놈들은 의기양양하게 다가왔고 곧바로 한 녀석의 주먹
이 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던 나는 얼떨
결에 주먹을 피하려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술 취한 노인네처럼 발을 헛디뎠다. 그리곤 몸의
균형을 잃고서 정확히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찍히면서 쓰러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곧
바로 정신을 잃었으며 피를 흘리는 내 모습에 당황한 놈들은 친절하게도 나를 양호실까지
데리고 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그것이 전
부였다. 그 후 나는 병원에서 일 주일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어찌됐건 그
들은 나를 한 대도 때리지 못했고 나 역시 방어하다가 혼자 넘어진 것 뿐 이니 적어도 반
아이들에게 그럴싸한 핑계는 댈 수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 양아치 놈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퇴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 날 해결하지 못한 일을 다시 해결하기 위해서다. 나로서는 바로 이 문제의 해결
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하지만 답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난번 조형주 때처럼 돈이나 물질로서 타협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인가. 오히려
그것이 정답이라면, 그것이 정말로 그들이 바라고 있는 답이라면 일은 쉽게 해결될 수도 있
을 것이다. 적절히 고기를 던져주면서 그들을 회유하는 데에는 이력이 있었다. 하지만 육감
적으로 그것이 답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조형주 사건이 교내에 알려질 대로
알려진 마당에 아무리 생각없이 사는 그들이라 지만 똑같은 수법에 다시한번 걸려들지는 않
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그들은 지난번 조형주 때처
럼 타협안을 보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를 다그칠 생각이었던 것
이다. 반장이라는 허울을 쓰고 첩자노릇이나 일삼았던 데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할 참이었
다. 그것이 나를 더욱 무섭고 혼란스럽게
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그저 어두웠던 지난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인
데 어째서 수반되는 고초들이 이토록이나 많은 것일까. 아니면 아예 영원히 흉측한 번데기
의 몰골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신은 나에게 애초부터 화려한 나비의
날개 짓 따윈 어울리지 않는 감정의 과잉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영원히 탈피
하지 못한 채 컴컴한 어둠 속에서나 살아야 어울린다고. 그것만이 나다운 것이라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끊이지 않고 나의 인생에 날파리들 처럼 들러붙
는 귀찮은 존재들, 고민철이나 조형주. 그런 쓰레기들이 어째서 나와 계속적인 연을 맺으면
서 나를 어둠 속으로만 밀어 넣고 있는가.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의무라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것인가.
한 놈이 사라지면 또 다른 놈이, 그 놈이 사라지면 기다렸다는 듯 더 악독한 놈들이!
이 쪽으로 생각의 물꼬가 터이기 시작하자 난 점점 더 흥분되기 시작했다. 되돌
아보면 놈들은 나를 구더기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정작 구더기같이 더러운 존재는 그들
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조용히 나에게 주어진 길만 걸어가려 했을 뿐이다. 구태여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이 어떻게 걷고 있나 구경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위엔 전혀 관심
도 없었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개인주의인가. 어째서 그것을 함부로 침해하려 하고 깨부수
고 흐트러뜨리려 하는가. 그 돼지 같은 자식들이 대체 무슨 권리로!
이제껏 한 번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분노라는 기관이 나의 몸 구석구석을 타고 꿈틀
거렸다.
"퇴원했니?"
"응, 이제 막."
민경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그녀는 내가 병원에 있을 때에도 거의 날마다 내게 전화를 걸
어 안부를 묻곤 했었다. 전화상의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뭐해?"
"그냥, 집에서 좀 누워 있다가 답답해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나와봤어."
"다친 데는 괜찮니?"
"응 별거 아니었어."
"아무튼... 고마웠어..."
"또 그 얘기니?"
"그 날, 내 곁에 있어줘서..."
"너도 참~."
일주일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날 나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몸을 움츠리며 뒷걸
음질을 쳤었다. 그 잠깐 사이에 아마도 내가 그녀를 향해 몸을 움츠리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민경은 내가 그렇게 얼떨결에 취한 행동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러한 동작을 취한 것이라는.
그런 그녀만의 이유로 나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근사하고 정의로운 남자가 되어 있었다. 물
론 일리가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로서도 그녀만은 보호해야겠다는 강박증이 무의식
중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한 마음이 추호도 없었더라면 어
쩌면 그 날 나는 앞, 뒤 안 가리고 줄행랑부터 쳤을 게다.
좀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민경은 나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다가온 그
첫사랑을 지켜주고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참 민경아, 너 설마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간거니?"
"......"
"왜 말이 없어? 아직이구나..."
민경은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그리곤 불현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수신이 끊기고 나서도
나는 한참동안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는 지금 혼자 울먹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벌써 일 주일 째 가출 중이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한 그 날 부로 그녀는 집을
나왔던 것이다. 물론 학교도 일 주일 째 무단 결석 중이다. 왜 가출을 했느냐고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지금 그녀 주위에 그녀를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던 유일한 이가 그녀 곁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늘 혼자였던 이가 잠시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떨어져 나가 버리면 원래 혼자였을
때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그것은 이루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어째서 그녀는 그렇게 힘든 고통과 끝없는 싸움을 해야만 하는가!
눈을 감으니 그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그려졌다. 얼굴이 워낙 희미해서 그녀가
지금 울고 있는 것인지 웃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녀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새 밀랍 인형이 되어 있었다. 감정도 움직임도 없는
밀랍인형이 되어서 뻣뻣이 굳어 있었다. 이어서 그녀의 온 몸에 셀 수도 없는 구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좁쌀 크기 만한 그 구멍들은 마침내 그녀의 온 몸에 빽빽하게 찼다.
그리고 그 구멍들 속에선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벌레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꼭
미꾸라지 같이 생긴 그것들은 썩은 악취를 풍기면서 꾸역꾸역 기어 나와 그녀의 발 밑에
떨어졌다. 그것은 참으로 징그러운 광경이었다. 한편 떨어진 벌레들은 서로 뒤엉킨 채
심하게 꿈틀대며 징그러움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기이한 일들이 펼쳐졌다. 벌레들은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는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일제히 방향을 튼 후 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벌레들의 얼굴이
점점 부풀어진다 싶더니 하나같이 내가 아는 얼굴들로 바뀌어 갔다. 그렇다, 바로 그들은
모두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무리들이었다.
그 무리의 선두에 고민철이 있었다. 바로 뒤에는 여드름투성이의 조형주가, 양옆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 정미선과 함께 왔던 그 양아치 두 명이 나를 쏘아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 역겨운 무리들을 보고 있노라니 더 이상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굉장히 화가 났다. 당장에 달려가서 그 더러운 족속들을 마구 짓밟아 버리고
싶었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의 두 손은 곰처럼 단단했고 이제 남은 것은 내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모처럼 만에 찾은 학교는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듯했다. 딱히 뭐라고 말 할
수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을씨년스럽고 음산한 느낌이었다.
조례 때까지 내가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민경은 오늘도 결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조례 후 첫 수업이 시작하기까지는 약 20 분간의
인터벌이 있었다.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잠깐 고개를 돌려 맨 뒷 좌석에 앉아서 희희낙락
거리고 있는 정미선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커다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고 기쁜지 그녀는 웃느라 아주 정신이 없었고, 그 때문에 미처 나의 시선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서 선생님이 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의
오른 손은 열려진 가방 지프 속의 무언가를 계속해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단한 쇠
홍두깨였다.
"자, 요즘 날씨가 연일 기록적인 찜통더위를 보이며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때일수록 각자 행동거지에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자. 이런 날일수록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나고 또 흥분하는 법이니까. 이제 방학이 몇 일 안 남았으니 그 때까지만 참도록
하자. 자, 다들 침울해 있지만 말고 기운들 내도록~!"
선생님의 근심 어린 조언을 끝으로 조례가 마무리되었다. 나의 두 눈에서 광채가 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등을 보이며 교실을 막 나가자마자 나는 곧바로 가방 속에서
그것을 꺼집어 내었다. 오른 손 가득히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무게 감이 가져다 줄
공포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정미선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이제 곧
자신에게 닥칠 비참한 운명 따윈 상상조차 못한 듯 여전히 행복한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천박한 웃음에는 이제껏 그녀가 조롱하고 멸시해왔던 수많은 이들의 눈물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한 번 웃을 때마다 민경은 피눈물을 쥐어짜야만 했을 테다. 더러운
웃음이었다. 그 더러운 웃음도 교만한 사악함도 이제 끝이다.
추악한 사디스트여, 피의 심판을 받아라!
나의 오른 팔이 정미선의 머리위로 높이 치솟아 오를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주시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표정들은 곧 하나로 뭉쳐지는 듯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을 예감한
이의 지독한 공포였다.
퍽석!
뭔가가 터지는 듯한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고 나의 얼굴로 대량의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온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비명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비명소리들은 마치 지옥의
레퀴엠 같았다.
홍두깨가 무지 단단하긴 단단했던 모양이었다. 단 일격에 정미선의 머리는 으깨어 질대로
으깨어 져 사람도 무엇도 아닌 괴상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홍두깨는 그녀의 머리 정
중앙에까지 깊숙이 박혀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형체도 없이 뭉개져 있었다. 이제 그 얼굴로
두 번 다시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난폭하게 홍두깨를 집어 올린 후 망설임 없이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이미 구경꾼들로
가득해서 번잡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행동은 무척이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그들은 양옆으로 밀착해서 길을 터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을 터주니 마치
그들이 나를 지지해주는 동조자들 같았다. 나는 그들을 대신해서 피의 심판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복도 끝에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예의 그 두 양아치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그들을 향해 차가운 미소를 흘려 보았다. 아마도 그
웃음은 그들에게 전달되어 지면서 무시무시한 악마의 웃음쯤으로 부풀려 졌을 것이다.
나는 뻣뻣하게 얼어있는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그제 서야 그들은 황급히
무언가를 꺼집어 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것은 자그마한 잭나이프였다. 집에서 사과나
깎아 먹기에 딱 좋아 보였으나 그들에겐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결정적인
방패막이라도 되는 마냥 허겁지겁 아무렇게나 휘둘러댔다.
빠가각!
앞 서 있던 놈의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였다. 동료의 머리통이 반쯤 부서져 나가는 광경을
근접체험 해서였을까. 남아 있던 한 녀석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무릎을 꿇어버렸다. 다리에
저절로 힘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하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아 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비겁한 애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나에게 용서를 구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의 홍두깨가 무서워서
구차한 눈물을 흘린들 그가 생각 없이 짓밟고 다녔던 많은 이들의 상처는 조금도 아물지
않을 것이니.
그저 죽음으로서 죄 값을 치루어야만 할 것이다.
꾸쿵!
나의 홍두깨가 마지막 심판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에 나의 귓가엔 환청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의 심판을 열렬히 환호하는 기쁨의 함성이었다.
하지만 그 함성을 끝으로 나는 천천히 몸을 웅크리며 복도에 길게 누워야만 했다. 갑작스레
너무 무리한 탓일까. 육신에서 기가 다 빠져나간 듯했고, 머릿속은 몽롱해지면서 꿈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정말 조금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복도에 길게 누운 채로 그렇게...
꿈속에서 나는 민경과 함께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나무와 풀들 뿐 이었으며
저 멀리론 작고 아담한 호수도 보였다. 우리는 그 호수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알싸한 풀 내음과 흙 내음이 나의 기분을 유쾌하게 했다. 그 속에서 민경의 손을 잡고 걷는
다는 것은 너무나 근사한 느낌이었다. 민경의 얼굴에는 이제 더 이상 슬픔이나 근심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 계속해서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나는 그녀에게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모든 것은 해결되었으니 이제 돌아오라고.
<7>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호실 같았다. 하지만 양호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벽에 걸린 시계는 정확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 한 시간 가량
이 곳에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이제 막 2교시 수업이 시작되었을 시
간이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으나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고 나는 다시 침대에 비스
듬히 기댄 채 관자놀이를 짓눌러야만 했다. 왠일인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고 혼란스럽기
까지 했다.
문득 창 밖을 바라보니 경찰차 한 대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
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온 것 같았다. 나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저지른 행동이 내게 어떤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다 줄 지라도 후회는 없었다. 일말의 가책
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모든 행동들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은 법이 아닌
이 사회 전체가 올바르게 평가해 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나를 아는 모든
친구들의 머릿속에 나는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
교실 앞에서 나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2교시는 역사 시간이었다. 역사 담당은 담임
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굵직한 목소리가 교실 밖에까지 세어 나왔다. 그는 태조 왕건이 고려
를 건국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놀란 담임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이어서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꼽혔다. 그들의 시선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하지만 나는 주저앉고 선생님
곁으로 다가갔다. 칠판 가득 필기되어 있던 것들을 막 지우려 했던 모양인지 선생님은 한
손에 칠판 지우개를 든 채로 멍하니 내 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선생님, 걱정 끼쳐 드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의 말투에는 예전에 내가 보았던 서부 영화 속의 주인공 같은 당당함과 애잔함이 묻어 있
었다. 그 때였다. 선생님의 손에 쥐어져 있던 분필 지우개가 느닷없이 나의 왼 쪽 뺨을 강타
했다. 매캐한 분필 가루 내음이 나의 코와 입은 물론 눈 속으로까지 스며들었다.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분필 지우개 공격은 연속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나는 선생님으
로부터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얼굴은 물론이고 머
리와 교복 전체가 뽀얀 분필 가루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영웅의 몰골치고는 참으로 한심한
꼴이었다. 꼭 내 모습이 까불다가 선생님한테 정신없이 혼 줄이 난 멍청이 같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째서 선생님이 저토록 나를 증오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최
소한 담임 선생님은 나의 행동을 이해해 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었던 나로선 다소 어리둥절
하기까지 했다. 안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선생님은 나의 귀청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 질렀다.
"이 병신아! 여기가 무슨 애들 놀이터인줄 알아? 니 꿀리는 데로 행동하게?"
아무래도 선생님은 내가 그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서 심판에 대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저토록이나 흥분할만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렇게 판단한 나는 선생님이 최대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했다. 그
러나 잔뜩 흥분해 있던 그는 미처 내가 설명한 틈조차 주지 않았다.
"하여튼 문제라니까.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기
분 내키는 대로 사는 거냐? 어째서 허구 헛날 그 모양이냐, 넌!"
너무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나로선 할 말을 잃어버린 듯 했으나, 더 이상 나를 이상한 쪽
으로만 몰아가는 선생님을 참고보고만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단단히 벼르고 있던 사람처
럼 선생님의 말이 잠깐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쳤다.
"선생님~! 전, 그저 반장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정상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해야만 했
다. 선생님의 다음 말은 가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공포의
시작이자 실체였다.
"뭐가 어째? 이런 미친 녀석을 다 봤나? 니가 무슨 반장이라고 그 딴 헛소리를 지껄이냐?
이게 아주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이 자식아 허구 헛날 꼴찌만 도맡아서 하는 녀석이 뭐
가 어쩌고 어째? 반장~? 지나가던 동네 강아지가 다 웃겠다.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는 녀석
이 일주일째 무단 결석을 하질 않나, 시간이 지금 몇 신데 해가 중천에 떠서야 꾸정꾸정 기
어 들어오질 않나. 학교가 뭐 니 마음 내킬 때만 오는 곳이냐? 니가 가고 싶을 때만 자유롭
게 드나드는 곳 이냐구? 이게 진짜로 미친 거냐 아니면 일부러 미친 척 해보는 거냐? 그
딴 병신 짓이나 하고 다니니까 애들한테서 왕따 소리나 듣는 거 아냐 임마! 참, 한심한 놈
이다 너도~."
선생님의 경멸어린 힐책을 듣고 있노라니 내 몸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졌다. 이건 뭐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리라!
선생님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더러 반장이 아니라니. 허구 헛날 꼴
찌만 도맡아서 하는 녀석이라니. 내가 일주일째 무단 결석을 했다니. 게다가 내가 왕따라니!
선생님이야말로 필시 제정신이 아닌 것이리라.
아니면 지금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뭔가가 강하게 나의 뒷통수를 내리쳤다. 그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마치 악몽속을
허우적거리다가 갑작스레 깨어난 것처럼.
"야, 반장 뭐해?"
주위를 둘러보니 그 곳은 우리 반이었고 어느 새 쉬는 시간인지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야, 한병도!"
누군가가 크게 나의 이름을 불렀고 돌아보니 그 곳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엉, 지금 나 불렀니?"
나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야, 너 왜그래? 어디 아파?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장난스레 웃으며 나의 이마를 집어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무척이나 친근감 있
어 보였다.
"물리 선생님이 너 교무실로 좀 오라던데."
"엉? 나... 나를 왜...?"
"그거야 내가 모르지. 아무튼 각 반, 반장들 다 오라고 했어."
"바... 반장...?!"
나는 뭔가에 단단히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심하게 꾸짖던 담임 선생님은
온데간데없고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들의 호의적인 태도는 나로 하여금 극심한 이질감을 느
끼게금 함과 동시에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아이들은 분명히 나를 반장이라 불렀다. 또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 이
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리라.
문득 어떤 생각이 미친 나는 두리번거리며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민경을 찾고 있었다. 이것
이 분명한 현실이라면 아마 그녀가 와 있을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만 했다. 확실히 민경은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여전히 애들로부터 심한 구
타를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구타 무리의 리더는 다름아닌 정미선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미선이라면 내가 이미 깨끗이 처리해 두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버젓이 살아 있으며 또 다시 민경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미선은 민경의 머리채를 칭칭 감아쥐고는 화장실로 끌고 갔다. 민경의 머리카락은 거의 반
정도나 듬성듬성 뽑혀 나가고 없는 상태였다. 처참한 몰골로 끌려가던 그녀가 나를 발견했
다. 그녀의 두 눈에는 원망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
"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적어도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나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뱅뱅 돌 뿐, 밖으로 조금도 세어나질 못했다. 아예 목구멍이
단단히 막혀버린 듯했다. 숨쉬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올려 목
부위를 만져보았다. 무언가가 나의 목을 단단히 죄고 있었다.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니 그곳
엔 두 양아치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들은 비위 상할 정도로 능
글능글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솔직히 너무나 기가 막혀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어째서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서 나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양쪽 팔꿈치에 힘을 실어서 두 녀석의 아랫배를 가격했다. 커헐, 하는 가래 끓는 신음
소리를 내며 두 녀석 모두 쓰러졌다. 녀석들이 쓰러지자 나는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민경
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어느 틈에 민경은 화장실의 변
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 있었다. 비참한 최후였다.
나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민경에게로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물론이고 온 몸에까지 콤파스
같은 걸로 찌른 듯한 작은 구멍들이 빽빽이 나 있었다. 그 상처들마다 피가 연신 세어 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말 그대로 피범벅이었다. 나의 분노가 최고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머리를 들어보니 그 곳엔 정미선과 그 일당들이 야비한 눈빛으로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나는
민경의 시신을 잠시 화장실 바닥에 누인 후 정미선을 향해 다가갔다.
"정미선! 어째서 네 년이 다시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반장으로서 우리 반의 평화를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다. 넌 우리 반의 평화를 깼음은 물론이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민경이
를 잔인하게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다. 너 같은 것은 나에게 맞아 죽어
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의 목소리엔 비장감마저 감돌았으나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그녀는 천박한 웃음을 흘리
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하하하. 미친놈, 니가 무슨 반장이라고 꼴값을 떨고 있냐? 넌 그 흔한 줄반장 한번도 못
했잖아. 나보다도 공부 못하는 놈이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고 있네. 너 지난번 기말고사
때 또 꼴지 했다면서? 너 지금 잠꼬대하는 거냐? 그리고 민경이가 네 애인이라도 됐냐? 니
가 왜 흥분하고 지랄이냐? 하이고, 정말 혼자서 병신 잔치하고 있네 하하핫!"
그녀의 웃음소리는 유리병이 깨어지는 것처럼 요란스러웠고 듣기 거북했다. 그 웃음소리가
점점 더 길어지자 나는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 버렸고 마침내 성난 맹수처럼 그녀에게 돌진
했다.
나는 우선 그녀를 쓰러뜨린 후 입을 찢어버렸다. 입이 찢겨져 나가자 그녀의 웃음은 멈추었
다. 그리고는 무엇에 크게 경악한 사람처럼 동공이 커졌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곤죽이 되도
록 갈겼다.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며 가슴이며 할 것 없이 온 전신을 두들겼다. 뚝, 하고 그
녀의 오른 쪽 어깨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그 소리에 잠시 정신을 가다
듬고 그녀를 살펴보았다. 엉망으로 망가진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으
며 그녀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묘한 불길함이 나의 세포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모여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은 하나같이 표정 없는 얼
굴로 나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이 나의 심기를 더욱 자극시켰다.
"뭘 구경하는 거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도 다 똑같은 놈들이야. 다 뒈져야만 해 이 개자식들
아!"
나는 신경과민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날뛰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심한 욕설과 저주들
을 퍼부으며 그들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덤볐다. 폭발할 듯한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줄 몰
랐으며 오히려 끝도 없이 고조되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
미친 듯이 휘두른 나의 주먹에 그들은 차례차례 망가져 나갔다. 하지만 감각 기관을 아예
상실해 버린 듯한 그 무표정함만은 여전했다.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도 그 얼굴만은 여
전히 나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암담한 공포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들이 정상적인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
자 신기하게도 그때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지독한 분노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었다.
분노의 감정이 걷어지고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다시 바라보니 그들에게선 전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없는 로봇 같았다. 언젠가 보았던 지하실의 밀
랍인형과 흡사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들은 정말로 밀랍인형들 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밀랍인형들이었고 나는 그 어두컴컴한 지하실 한 가운데서 홀
로 분을 식히고 있었던 것이다.
17년간 나를 이루고 있던 육신과 정신의 가닥들이 갈갈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끔찍함이 순
식간에 몰려왔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여 있던 나의 사고 회로들은 한꺼번에 움
직임을 멈추어 버렸고 그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허함의 세계, 그 자
체였다.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본연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친 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공포의
실체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나의 상상이었을까.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을까.
분명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어두웠던 과거들은 이제 어느 정도
청산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인기와 지
지를 얻었고 반장으로까지 선출되었다. 그리고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나 자신으로부터 완전
히 탈피해 활달하고 적극적인 모습만을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이 모든 사실들이
순전히 나의 환상이 만들어낸 인형놀이였을 수는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
적어도 여기까지는 실제 상황들이겠지.
별안간 선생님의 걸걸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뭐가 어째? 이런 미친 녀석을 다 봤나? 니가 무슨 반장이라고 그 딴 헛소리를 지껄이냐?
이게 아주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 이 자식아 허구 헛날 꼴찌만 도맡아서 하는 녀석이 뭐
가 어쩌고 어째? 반장~? 지나가던 동네 강아지가 다 웃겠다."
믿을 수 없다. 내가 꼴찌라니... 운동이라면 몰라도 공부라면 언제나 자신 있었다. 비록 어려
서부터 몸은 허약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만큼은 누구도 못지 않게 잘해오지 않았던가.
그런 나에게 꼴찌라니! 이것 역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내가 반장이었던 것도 공부를 잘했던 것도 모두 사실일 것이다.
"하하하하. 미친놈, 니가 무슨 반장이라고 꼴값을 떨고 있냐? 넌 그 흔한 줄반장 한번도 못
했잖아. 나보다도 공부 못하는 놈이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고 있네. 너 지난번 기말고사
때 또 꼴지 했다면서? 너 지금 잠꼬대하는 거냐?"
내가 기말고사때 꼴찌를 했다고...? 성적표...! 그래, 어딘가에 성적표가 있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나의 책가방을 허겁지겁 열어 보았다. 가방의 맨 밑바닥에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성적표가 나왔다. 그곳엔 지난번 기말고사의 결과가 정확하게 찍혀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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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아아아아~!"
나의 괴성은 텅 빈 지하실 안에서 언제까지고 맴돌며 나의 온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주변 사물들은 빠르게 나의 눈을 스쳐 지나갔으며 갈
기갈기 찢어버린 성적표 조각들은 눈발처럼 어지럽게 날렸다. 삐죽이 열려진 나의 책가방에
선 대마초 잎사귀들이 흘러나와 있었다. 그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의식이 내게 남
아 있지 않음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한 쪽 구석에는 피를 흘리며 죽어간 나의 첫사랑 민경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 민경은 활짝
웃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별거 아니
라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근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소파 주위에 조형주 패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성인 비디
오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돈을 훔쳐서라도 술과 먹을 것을 대접해 주어야만
했다.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나를 괴롭혔던 덩치 큰 녀석들에게 초콜릿을 상납했던 것처럼.
조형주와 그 패거리들은 제 2의 고민철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죄수복
을 입고 있었다. 그래, 저 놈들은 모두 내가 고발해서 철창 속에 처넣었지. 내 옆에는 어느
새 담임 선생님이 다가와 있었고 기특한 듯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딘가에서 나
를 향해 보내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학교 내에서 알아주는 스타
였다.
별안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돌아보니 등뒤에는 정미선과 두 양아치들이 비웃듯이 나
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미선의 한 쪽 손엔 묵직해 보이는 쇠 홍두깨가 쥐어져 있었다. 하지
만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으깨어져 있었다. 허연 뇌수가 다 들여다보
일 정도로 비참한 형상들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웃고 싶어졌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학교내의 평화를 위해서 심판자가 되어 그들을 처단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도, 조형주 패거리들도, 민
경도, 정미선 일당들도, 모두 다. 그렇게 내 손안에서 살아 움직이던 그들은 한 순간에 차디
찬 밀랍인형으로 변모했으나, 그 속에서 나는 그들과 계속 부대끼며 살아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밀랍인형들은 다시 볼품없이 조그마한 장난감들로 변해갔다. 나는 방안
에 처박혀서 그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 장난감들 속에는 나도 있었고 나를 괴
롭히던 나쁜 이들도 있었다. 언제나 팬더곰 인형은 나였고 나쁜 이들은 철모를 쓴 장난감
군인들이었다. 팬더곰은 그 군인들을 차례차례 격파했으며 그 때마다 많은 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나에게 몰려들었다.
대마초 잎사귀들을 종이에 싸서 돌돌 말았다. 머리에 칭칭 동여맨 붕대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으나 그런 것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서둘러 잎사귀 끝에 불을 붙인 후 연기를 빨
아들였다. 연기에 취해 곧 나의 몸은 몽롱하게 허물어져 갔다. 빙글빙글 돌던 세상이 더욱
빠르게 돌아갔다. 문득 이런 느낌도 들었다. 지금 나의 몸이 허공 속으로 분해되어 가고 있
다는. 그래서 공기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그래서인지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
다.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중학교 시절 나는 고민철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후
곧바로 소각장에 몸을 던져 비관 자살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날 이후 한 번도 나의
몸에선 바닐라 향 로션 냄새가 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정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일 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홍두깨에 머리를 가격 당한 쪽은 정미선 일당이 아니라 내가 아니었을까. 붕대
를 머리에 칭칭 감고 있다지만 사실 나는 그 때 즉사해 버린 것이 아닐까. 실제로 내가 눈
을 떴을 때 있었던 곳은 양호실이었고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지 않았던가. 그 때 나의 영혼이 창 밖으
로 보이는 병원 응급차를 경찰차로 잘못 본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전일 수도 있겠다. 아주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초콜릿을 상납해야
만 했던 나는 어느 날 초콜릿을 상납하지 못해서 철부지 애들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을 테고
어이없게도 목숨까지 잃었을 수도......!
어찌됐건 상관없다. 현실의 내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테다. 이렇
게 어쩌다 한 번씩 자각할 정도로 하찮은 고민거리 밖에 되지 않으니.
언제나 구박이나 당하는 왕따라 해도 좋고, 집구석이나 지하실 따위에 처박혀서 인형이나
조종하는 몽상가라 해도 좋다. 나에게는 또 다른 근사한 내가 존재하고 있고 죽은 민경이도
몇 번이고 다시 되살릴 수 있으니 구질구질하기만 한 진실이나 거짓의 인식 따윈 내게 조금
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육신이 갈갈이 찢겨져 나가고 한없이 부셔져 버린다고
해도 나는 언제까지나 나만의 팬더곰으로 살아갈 것이니까.
꽁초가 될 때까지 열심히 연기를 빨아들인 나는 그만 녹초가 되어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인형술사가 되어서 나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세계의 나는 상당히 매력 있고 활기찬 존재였다. 지혜롭고 영리했으며 정의롭고 용감하
기까지 했다. 나를 괴롭혔던 덩치 큰 아이들을 수시로 혼내주기도 했으며 항상 마을의 평화
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으며 내 주위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너무나도 화려했고 근사했다. 마치 꿈을 꾸듯.
자, 한병도의 지독한 기억의 혼동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당신은 어쩌면 한병도가 그
랬던 것처럼 머릿속이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
짓인지 분별해 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신들을 위해서 일부러 정확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여느
때 같았으면 모든 의혹이나 궁금증들을 친철하게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한병도가 정말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활달하고 인기 있는 아이로 탈바꿈을 했는지의 여부라든가, 혹
은 그가 정말로 오민경이라는 왕따소녀를 정미선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서. 정말로 여느 때 같았으면 당신들의 머릿속에 혼란스럽게 남아있는 그 모든 의문부호들
을 속 시원히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냥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남겨두고만 싶다. 그 혼란스러움은 당신
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혼탁한 사회문화 속에서 빚어진 것이리라. 때문에 모든 의
문부호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대들이 책임져야 할 몫이요,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솔직히 한병도의 기억 속에서 어느 것이 실제이며 어느 것이 환상인지를 일일이 구분해 낸
다는 것은 대수롭지도 않은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치명적인 기억 혼동 현
상에 시달려야 했다는 그 사실 자체지, 그가 정말로 반장인지 아닌지의 여부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 기억의 칩을 처음부터 다시한번 꼼꼼히 정독해 보길 바란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느낄때까지... 그리고 나서 그대들의 주변을 살펴보아라. 모든 진실은 그 곳에 다 있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인간들의 학원문화에 대한 일그러진 단면은 여기까지다. 이 비극적인
문화를 하루빨리 정상화 시켜놓지 못한다면 그대들은 그대들이 만들어낸 비대해진 문화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