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이시랴.
정몽주(鄭夢周 1597~1673 호는 圃隱)
< 감 상 >
이 작품 또한 해동악부와 포은집에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로 한역되어 있다. 지은이 정 몽주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고려말의 국운을 한 몸에 지고
버티던 충신으로, 그의 죽음은 고려의 멸망과 때를
같이 한 절개의 표본이었다.
이 시조의 이해를 위해서는 물론 정 몽주의 생애
에 대한 윤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1360(공민왕 9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
여 예문검열(藝文檢閱) 수찬(修撰)을 거쳐 성균대사
성 대제학을 지내면서 문신으로서는 국가 최고 중추
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겸직으로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
閤門祗侯) 위위시승(衛慰侍丞) 등을 역임하면서 136
3(공민왕 12년)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
족의 토벌에 참가하였고, 1380년(우왕 6년)엔 조전
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 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
에도 참가 하였다.
그는 정치, 군사, 외교에도 밝아 明나라와 일본에
도 다녀왔다. 그러기에 이 성계의 세력이 커져 조준,
정 도전 등이 이 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끝내는 이방원의 문객 조
영규에게 피살되었다.
이와 같은 경력을 지닌 그가 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도리의 신봉자란 점을 감안할 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다시 고쳐 죽어 뼈가 티끌이 되
어 넋이야 있든 없든 간에 임(우왕)을 향한 한 가닥
충성심이야 변할 수 있겠느냐고 방원의 何如歌에 대
답해 준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옮겨 앉게 하려
는 방원의 그늘진 제청을 보기 좋게 거절하는 부동의
결의를 나타낸 시조이다.
세상에서는 이 시조를 태종의 '何如歌'에 짝지어
'丹心歌'라고 부르고 있음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얼른 보면 이 시조는 시조가 지니는 형태를 빌었다
뿐이지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기록한 하나의 소신이자
호흡이며, 또한 결의임을 우리는 쉽사리 알 수 있다.
첫댓글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淸江에 좋이 시즌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포은 의 노모는 이성계의 문병을 가는 아들을 문 밖까지 따라나와 꿈이 몹시 흉하니 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이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