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9. 서른한번째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
신앙고백
찬송 55 하나님의 크신 사랑
기도 조용림 권사,염성섭 장로,이원준 장로,하경숙 권사,
성경말씀 요한복음 1:43~51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간사가 없는 사람은
찬송 276 하나님의 진리 등대
광고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 중요성
서울에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모범, 모델이 되는 교회)
찬송 539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노아의 홍수 시대가 연상됩니다.
온 세상이 물바다입니다.
홍수에 그렇게 아름답던 섬진강 둑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곡성 시가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순창에서는 소 축사가 물에 잠겨 소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코로나19에다 홍수에다 이게 왠 난리입니까?
노아처럼 무릎 꿇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난리 통에도
목사인 저는 너무나 감사했던 주간입니다.
이렇게 허물도 많고 못난 저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분에 넘치도록 사랑하시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제 삶으로 답을 찾아봅니다.
우리 이옥순 권사님이 욕창이 심합니다.
그래서 몇 개월 전에 원대병원 성형외과 진료를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수술받더라도 재발할 것이란 의사 소견 때문에 수술을 보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염 장로님께서 잘 치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재발한 것입니다.
욕창 부위가 산처럼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우리 염 장로님께서 염증 부위 농양을 주사기로 빼내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원대병원 성형외과에 다시 예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보호자께 욕창 부위를 사진파일로 보내드리고
원대병원 예약 안내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보호자께서 감감무소식입니다.
대부분의 보호자께서는 곧바로 전화를 주시는데
이옥순 권사님 아들, 딸, 손자께서는 도대체 전화조차 받지 않는 것입니다.
밤 10시가 되기까지 수차례 아드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겨우 자다가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집사님, 어머님께서 욕창 때문에 원대병원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한참을 설득했더니 겨우 대답을 들었습니다.
퉁명스럽게 낼 아침 요양원으로 갈게요.
그래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맙습니다.
목사인 제 어머니도 아닌데
제가 왜? 이렇게 애가 타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아들과 이옥순 권사님을 제 차에 모시고 원대병원에 갔습니다.
사실 외래 진료는 보호자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비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외래 진료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원대병원 성형외과 의사께서 욕창이 심하시기는 한데
다행히 관리가 잘 된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놀부인 보호자께서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안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텔레토비 우리 진환이가 콧줄로 죽을 먹는데 콧줄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중앙병원에 진료를 의뢰했더니
진료거부를 당했습니다.
너무나 화가 치밀었습니다.
우리 장로님도 의사지만 진료를 할 수 있는데도
엘튜브(콧줄)를 끼우는 일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했습니다.
이게 의사입니까?
다운증후군 진환이 콧줄을 끼우는데 소요시간보다는
차라리 10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편이 훨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료거부 이유입니다.
중앙병원 의사는 배고프면 배터지게 밥을 먹으면서
진환이 밥 먹는 콧줄을 끼워 달라고 하니 거절한 것입니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엘튜브 진료받기 위해서
코앞에 중앙병원 두고
익산 원대병원까지 119구급차로 가야겠습니까?
그러고나서 다운증후군 진환이가 고열에 떨림증상등 응급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우리 염 장로님께서 항생제를 투여해 주어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제가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진환이를 태우고 원대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혈압이 너무 낮아서 쇼크상태였습니다.
또 진환이 가족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목사인 제가 응급실에 쪼그려 앉아서 간병을 하고
입원 수속 각서 쓰고 입원을 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인 제가 왜? 축복을 받는지 아시겠습니까?
누가 뭐라해도 목사인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의료진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문의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전문의사를 400명 더 배출한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문의사들이 다 거리로 뛰어나왔습니다.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의사인지?
돈만 벌려는 장사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염 장로님만 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43절입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절,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청와대 노영민 비서실장이 아파트가 두 채입니다.
그리고 수석들도 다세대 주택자들입니다.
그래서 비서실장, 수석들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로 국민들이 허덕거리는데도 정책을 입안하는 위정자들은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다면 어느 누구가
이 정부를 믿겠습니까?
벼룩도 낯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다세대 주택자였는지 모르겠습니다.
44절입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입니다.
그리고 고향이 베새다입니다.
빌립도 베셋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베드로의 거처가 가버나움입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입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9절,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어찌 되었 던 베드로가 가버나움에 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산상수훈 설교를 하셨던 유명한 곳입니다.
베드로는 벳세다에도 가버나움에도 집이 있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항상 당당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집이 두 채이거나 다세대 주택자들은 청와대 수석, 장관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아야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고, 청와대 수석도 되는가 봅니다.
45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 자랑을 했습니다.
나다나엘의 본명은 바돌로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절입니다.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그런데 이 나다나엘은 매우 고지식합니다.
우리 이원준 장로님도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을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 이원준 장로님이 고지식한데가 조금 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후합니다.
여기서 고지식하다는 의미는 좋은 의미입니다.
47절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마음에 간사가 없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거짓도 없습니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똥을 보고 더럽다고 말하는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이면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에게서 나사렛 예수를 소개받고
첫 마디를 듣고 본대로 이렇게 말합니다.
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의 이 말 한마디는
당시 이스라엘 대다수의 생각입니다.
나사렛 땡촌에서 촌놈이 태어났는데
그 촌놈 예수의 아비는 목수 요셉이 아니냐.
그런데 무슨 메시아냐?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이 말하는 예수에 대해서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다나엘의 모습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47절입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렇듯 나다나엘의 성품은 아닌 건,
아닌 것입니다.
앞에서는 그럴싸한 듯 칭찬을 늘어놓고서
뒤에 가서는 허물만 들춰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48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예수 자신에 대해서 깜보듯 말할지라도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전혀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욕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욕하면 똑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나다나엘을 먼저 인정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49절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것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먼저 인정해 주었더니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이것이 인생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5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의 대화법은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면에서 목사인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목사인 저도 내 말만 앞세웁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편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합니다.
그러니 대화가 되겠습니까?
결국, 싸움질입니다.
요즘 우리 유태규 집사님이 미운 짓을 많이 합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외출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은 마시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들께 잔소리가 심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하는 말이 목사님이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렇게 말은 근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일지라도 유태규 집사가 밉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엊그제 간경화에 좋다는 한약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한약을 열두번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유태규 집사에 대한 미움이 싹 가시는 겁니다.
어찌되었던 유태규 집사는 간경화, 치매 환자입니다.
우리가 보호해 주고 이해해 주어야 할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렇게 이해해 주다가 보면
목사인 저처럼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방귀 뀌었다가 칼부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엊그제 부산에서 택시 승객이 방귀를 뀌었다고
택시기사에게 흉기로 열 번씩이나 찔렸습니다.
그러니 방귀도 함부로 뀌지 말고 엉덩이로 오물오물 참아야 합니다.
항상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진환이 진료거부를 당하자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던지 혈압이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참아야하지 않겠습니까?
5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름답습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이런 경지에 오르겠습니까?
언제까지 살아야 이렇게 하늘 문이 열리겠습니까?
천국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내려다보면 사람이 보입니까?
그냥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렇듯 천국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소통하다보면
이웃과 싸울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모두가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누가복음 9장 58절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이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살이가 이렇습니다.
때론 굴이 있는 여우보다도 못한 인생입니다.
때론 공중 나는 새보다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머리 둘 곳도 없이 살지 않았습니까?
지금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수에 집도 떠내려갔습니다.
홍수에 논밭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홍수에 가족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집니까?
코로나19에, 홍수에 눈물이 납니다.
그렇지만 참고 견디고 이겨내야만 합니다.
목사인 저도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회 십자가 밑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나 홀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그래서 목사인 저는 크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산증인입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