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학자 황현산의 번역과 주해로 목도하는
보들레르의 예술적 야망과 비평적 사유의 시적 결합
낭만의 대명사 ‘파리’도 19세기에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괴물과도 같았다. 『파리의 우울』은 근대화의 폭력성을 혐오하면서도 파리의 몰골을 사랑한 보들레르의 혁명적인 산문시 50편이 실린 시집이다. 아름답고도 정직한 수사법을 구사하는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이 번역한 『파리의 우울』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기존의 번역본들과는 차별되는 면밀하고 충실한 주해가 매 시마다 함께한다. 보들레르 문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묻어나는 주해는 수많은 보들레르 연구서를 아우르는 정수이며 독자적으로 아름다운 또 한 편의 산문이다.
이것은 시적인 산문이 아니다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 야심만만한 시절에, 리듬도 각운도 없이 음악적이며, 혼의 서정적 약동에,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의 기적을 꿈꾸어보지 않았겠소?
_「아르센 우세에게」 중에서, 10쪽
1862년 보들레르는 [라 프레스]지의 주간인 아르센 우세에게 산문시 뭉치와 함께 위의 헌사를 보냈다. 『파리의 우울』의 서문 격인 이 글에는 보들레르가 산문시를 쓰게 된 동기와 장르적 성격이 담겨 있다.
1857년 『악의 꽃』을 발표하고 공중도덕과 미풍양속을 문란케 한 죄로 기소된 보들레르는 마주한 불행에 맞서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품고 『악의 꽃』재판에 새로운 힘을 쏟아붓는다. 그 과정에서 “리듬도 각운도 없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친, 어떤 시적인 산문”을 구체화하게 된다. 『파리의 우울』은 시적 선율이나 박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거친 산문시집이다. 전형적인 시와는 달리 은유보다는 환유와 알레고리가 주로 사용됐다. 기승전결을 갖춘 전통적 이야기의 성격도 없다. 옮긴이 황현산 선생은 “산문으로 시를 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문적인 현실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여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평적 정신의 아이러니로부터 시작해 열광과 도취에 이른 예술가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을 여러 차원의 시각을 지닌 예술론으로 승화시켰다. 예술가가 세상에 대처하는 태도, 예술의 주제와 표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술의 오랜 이상과 그 현대적 실천에 대한 고뇌를 담았다.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타락이 뿌리내리는 과정을 고발하고 예술의 악마성을 성찰·기록했다.
『파리의 우울』에는 열광과 도취의 풍경이 비평적 현실의식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곧 현대시의 운명에 대한 보들레르의 예언과도 같다. 베를렌, 랭보, 로트레아몽, 말라르메 등 근대 상징파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도시 인간의 현대적 정서를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아우른『파리의 우울』은 문학 장르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다.
파리의 내밀한 삶 속에 침투한 내밀한 상상력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에서 노래하는 것은 화려한 파리가 아닌 변두리의 은밀한 공간이다. 시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공원의 오솔길이나 외롭고 고독한 방구석 같은 외딴곳, 조용하고 은밀하게 살아 있는 파리의 뒤안길이다. 시인의 문장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을 바라보는 사람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한 자루 촛불로 밝혀진 창보다 더 그윽하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컴컴하고,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태양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장의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것만큼 흥미롭지 않다. 이 어둡거나 밝은 구멍 속에서,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한다.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벌써 주름살이 지고 가난하고, 항상 무엇엔가 엎드려 있는,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는 중년 여인을 본다. 그 얼굴을 가지고, 그 옷을 가지고, 그 몸짓을 가지고, 거의 아무것도 없이, 나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아니 차라리 그녀의 전설을 꾸며내고는, 때때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린다.
_「창문들」 중에서, 102쪽
보들레르는 도시를 묘사하기 위해 병원, 유곽, 연옥, 지옥, 도형장 등 도시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열거한다. 이는 파리를 표현하는 알레고리이다. 나아가 시인은 자신을 이해해줄 존재는 사탄뿐이며, 이 사탄이야말로 거대하고 불길한 장소를 지배하고 통찰할 유일한 정신으로 떠받든다.
그러나 늙은 팔난봉이 늙은 정부(情婦)에 취하듯,
나는 지옥의 매력으로 끊임없이 나를 회춘시키는
그 거대한 창녀에 취하고 싶었다.
무겁게, 어둡게, 감기에 걸려, 네가 아직도
아침의 이불 속에 잠들어 있건, 혹은 순금으로
장식 끈을 단 저녁의 장막 속을 활보하건,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오 치욕의 수도! 창녀들과
강도들아, 종종 이렇게 너희들이 가져다주는 것은,
불경한 속인들이 알지 못하는 쾌락.
_「에필로그」 중에서, 138쪽
시인은 난봉꾼이 되어 ‘파리’라는 늙은 창녀를 매음하려 한다. 보들레르는 도시의 곳곳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혼이 되려 한다. 도형장의 주민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고독한 산책자가 되는 것이기에, 그는 이렇게 삶을, 고통을, 추(醜)의 미(美)를 마주하고 찬미한다. 그것이 시인의 유일한 업보이기에.
세상의 순리를 방해하겠다는 것,
이것이 보들레르의 가장 큰 소망이다. _발터 벤야민
세상의 깊이를 보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고 살지만, 보들레르는 경계에 서서 이면을 직시하는 예술가였기에 “창녀들과 강도들”과 더불어 “생명이 살고, 생명이 꿈꾸고, 생명이 고뇌”하는 저 “어둡거나 밝은 구멍”을 이해하고자 했다. 평화와 안위를 외면하고 ‘시’의 쾌락과 관능을 누린 대가를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한 생활에서도 자신들의 기쁨뿐만 아니라 긍지까지도 찾아낼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한 보들레르는 가난 속에조차 깃들 수 있는 시를 찬양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남과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한 자이며,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느니라.”
나는 지체 없이 내 눈앞의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그의 눈을 들이박았더니, 그게 한순간에 공처럼 부풀었다. 그의 이빨 두 개를 부러뜨리느라고 내 손톱 하나가 깨졌는데, 나는 태생이 연약하고 주먹질 연습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이 늙은이를 당장에 때려눕힐 만큼 내가 충분히 강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지라,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어, 그의 머리를 벽에다 세차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
이 늙어빠진 불한당은 나에게 덤벼들어 내 두 눈을 멍들게 하고, 내 이빨 네 개를 부러뜨리고, 예의 그 나뭇가지로 나를 횟가루가 되도록 후려팼다. 내 막강한 치료술로, 나는 그에게 이렇듯 긍지와 생명을 되돌려준 것이다.
_「가난뱅이들을 때려눕히자!」 중에서, 131~132쪽
“남과 평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평등한 자”라는 인권주의적 격언을 빙자하여 걸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내용을 담은 이 시는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을 모두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황현산 선생은 이를 “인권주의적 격언을 빙자하여 걸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독자들과 저 ‘공공복지 청부업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공갈치기’의 하나”이며,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분노의 해결책이자 시적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이는 반항적인 자아의 내부에 도사린 모멸감에서 웃음을 끌어내어 세계의 숙명에 도전하는 흑색 유머의 일환이다.
보들레르가 흑색 유머의 영감을 “울적하고 서글프고, 무료함에”(「형편없는 유리 장수」) 지친 도시의 아침에서 끌어내고, 학대의 대상을 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흥미롭다. 이는 대도시에서 살도록 저주받은 자의 처지를 또다시 되살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을 목도하는 억압받는 존재의 숙명에 고통받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보들레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세계의 숙명을 볼 수밖에 없었고 그 자체가 자신의 통점이었다. 세계의 숙명에 저항하는 신경증의 폭발에서는 폭력과 무상성과 혼돈이 시적인 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