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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마음을 잘 관찰해본다면 늘 조용하고 고요한 것이 하나 있읍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형용할 수도 없는 ,구체적으로 정의하거나 발견할 수 없는 그 무엇인데.
그 고요함은 늘 변함이 없읍니다.
주변과 늘 요란하고 소란하며 서로 상대적인 이끌림으로서 대화체를 구사하거나 쟁론을 지니거나
스스로 혼자 내막으로 어떤 생각에 잠기거나 간에 .. 그 와중에도 그 무엇이라는 넘은 항상 조용하고 고요합니다.
내 마음자리의 아주 고요하고 늘 조용한 그것이 각자의 우리들이라는 생활과 의미등을 항상 변함없이
끌고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용어로서는 "사띠"라 이름합니다.
쉽게 말한다면 마음챙김의 수행과정에서 붙어진 이름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의 기본 용어입니다.
지구세계에서 가장 조용하고 고요함을 지닌분을 굳이 일컫는다라면 사람세계에서는 부처님이신 석가모니 세존이셨읍니다.
그리고 중생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들의 내면에는 항상 조용하고 고요한 것이 주어져 있는데 이를 잘 관찰하고
스스로 고요함으로 마음을 챙길때 각자의 존재처의 정체성과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하셨으며.
이를 목적하여 만 중생들에게 49 년간 경전의 말씀을 하시다가 고요함속으로 열반을 성취하셨읍니다.
그런고로 경전공부를 하게되면 긍극의 지점으로 연결되는 과정중에서도 늘 스스로 자기의 마음이라는 자리가 항상 조용하게 되고, 고요해야 하며, 자연적으로 스스로 고요하게 되는 것이 경전공부입니다.
그렇다면 고요하게 해서 뭐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생노병사를 참답게 받아들이는 당위성이 발견되는 자리이고, 생노병사를 피하고자 , 벗어나고자 하는 잠재의식의
두려움과 공포가 자연하게 소멸하게 되고,그 본질을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생노병사를 부정하지 않으며 긍정한체로 노병사의 3 과정을 완성하게 되어 열반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의 의식은 깨어남이며 고요하고 적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렇게 정의하기 때문에
죽음은 의미가 없는 엄정함에 관찰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라 함은 고요함을 전제했을때 주어질 수 있는 명제입니다.
고요함을 다른말로 굳이 표현한다면 안 움직인다, 부동한다 라고 할 수도 있읍니다.
이를 머문바 없이 머문다 라고 하고 움직인바 없이 움직인다 라고 하는 "정중동"(靜中動) 이라 합니다, 또한
이를 삼매라 하는데 사마띠라고 하지요 세가지 삼계를 논할때 과거 현재 미래 라던가, 어제 오늘 내일이다던과
욕계 색계 무색계 라던가 이를 한꺼번에 압축해서 하나로 머무는 자리를 말하며고요하다, 삼마이라 한다 이렇게
표현 할 수 도 있읍니다. 시간개념과 공간개념의 중도에 대한 통일점을 의미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의미는 엄정하게실행해야 수행자라 이름하지요.
하지만 진화론을 주장하는 어느 철학자의 주장처럼 , 인간은 삶을 위해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었다는 멘트가 있었읍니다. 이는 사실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처럼 여겨지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이라, 이 우선적인 두려움 제거 방법에는 이는 창조론을 비꼬아 활용하는 방버으로 창달됩니다,
이렇게 종교를 비하하는 인간의 최대적 실험정신으로 비젼을 제시하는 것인데, 하지만 실험정신이라는 것은 아직 경험치 못한 어떤 영역의 시도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수단의 방편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시도는
본질관계의 통각을 이미 훼손하는 전제를 지니기 때문에 칼 들고 설치는 것과 같읍니다.
짜가르고 찌르고 부시고 해서 현미경식 관찰 방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시도하는 것도 어느정도 고요함을 상용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인간의 본질 성품은 알던 모르던간에 잠재적으로 고요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자연하게 고요함을 타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계산할때에도 야들아 좀 조용해보거라 하고 골똘하게 계산을 집중할때에는 고요해야 계산을
할 수 있음도 매 한가지이고, 곰곰히 생각하는 면도 역시 고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음 무엇을 궁리해야 하는 것과 같은 양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항상 자기 내면관찰로서 입각되는것인데 이 존재론에 입각한 맹목적인 진리의 관찰에서는 진화론 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외향지향적인 의지작용에만 편중됨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외부로 집중하여 사고방식을 쫓을때에는 타방의 동적인 의미에만 쫓아 다닐뿐이지 이미 자기 내면의 고용성을
빼앗기를 결과로 부산하게 된다 이 말과 같읍니다.
진화론자들의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과학자들도 보게되면 항상 타방을 분석하고 연구하지 자기 자신의 내면과 존재가치에 대한 본질은 한 페이지
제켜 놓고 시작합니다.
빛의 동척이인 성품에 편중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타방에 나에게 작용하는 것에만 집중 함으로서 자신을 잊어버린다 이 말밖에는 달리 표현 할 수 없는 명제로서 여기세 빠져버렸다 할 수 도 있읍니다, (종교가 들의 주장으로 보게되면...)
사실 진리의 가치라는 것은 어떤 동기부여에 의하여 수단화나 방법론으로 논하면서 그 본질을 목적론에 부합하여 파악하려고 시도하게 되면 창조론에 비하면 이미 맹목적인 명제가 사라진 것이므로 실패한 것입니다.
온존하지 못하고 고요함의 전제로서 시작하지 않기때문에 방향이 변경되어 남의 다리만 긁는것과 같읍니다.
단지 객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번창에 대한 의지만있지 정지개념이나 후퇴개념은 전혀 없으며
이러한 양태는 포기하는 것으로 취사선택적인 발전만 도모하는 상태로 빠져버린다 이 말입니다.
생명현상에서 두 부부가 자식을 4 명을 낳았는데 한 자식이 좀 덜 떨어지고 장애요인이 있다고 포기 할 사람
있으면 나와 보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내 자식아닙니까? 나의 존재론은 자식 4 명을 오롯히 포함하고 함축하여
인생의 삶을 진행해야 합니다. 장애 자식을 포기한다? 이미 부모가 아니며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읍니다.
이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는 취사선택으로 포기 하거나 유기하는 것이 가능한 사상근저의 바탕을 두고
내 일이 아니므로 나와 상관없다는 팽배함이 적용된다면 이게 어떻게 주객의 차원을 함축한 진리의 모티브가
되는가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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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실체인 철학적인 면모에서 이렇게 변증적인 얼굴을 하게끔 과학으로 옮겨서 약육강식의 자연물에
대한 퇴하를 전제하고 버리면서 선택된 문명의 지대한 발전으로 치달아 마치 진리의 단계가 달성 하는 듯이
보여지고 있는 현 상태입니다. 이게 사실 또라이 현상이며 기이현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요함을 의지하지 않는 빛 운동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되 돌아 보건데 참으로 중요한 제원인이 주어져 있읍니다.
세상이 창조되던, 진화하였던, 인연의 관계로 의존하여 출현되었다 한다면
맨 처음부터 무슨 목적 가지고 세상에 나와 돌아당기는 것은 아닌까닭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물인 바위덩어리가 무슨 목적 가지고 바위가 되었는가 이 말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면 자연하게
그냥 바위가 된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우리들의 인식체에서는 존재할 바가 못 된다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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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근원을 논하는 관점에서 철학자들은 생태적인 수단과 방법을 근시안적으로 모색한 것이지
공간과 시간개념의 함축된 의미를 놓친 제 현상일 뿐입니다.
과학계는 구체적 본질을 파악하는 작업은 한페이지 접어놓고 시작한 것이므로 이미 첮 단추 부터 실패한 것입니다.
이 첫단추가 세월가고 너무 길다보니 첮 단추 자리가 안보일때 지금 꿰는 단추는 항상 정확하게
차례대로 꿰는것 처럼 보일뿐입니다. 이거 다시 다 꿴 단추를 다 풀어내야 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요하지 못하여 본질의 알아차림을 기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의 추이로서 합리적인 사상을 돌출시킨 철학은 삶의 목적이 오로지 이원론의 취사선택의
양태로서 과학의 전문성으로 진화하면서 그 과정으로 떠나 속력을 내는데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고요한 측면에서 보게되면 본질추구에서는 후퇴하고 말았던 것이며 이것이 현 주소입니다. 이것을 진리의 본질면에서 사람이 붕 떠있다, 물 속에 중간즈음에 있어 바닥도 모르고 수면위도 모르는
잠정적인 중간지락에서 그 진공처럼 방황하는 것도 된다 이렇게 말 할 수 도 있다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본다면 우리가 분류되어진 여러가지 사상체계에서 작정하고 있는 의도는
세가지를 위의 소개를 포함하여 우리는 목격할 수 가 있읍니다.
창조론이있고
진화론이 있고
연기론(인연론) 세가지가 있읍니다.
창조론은 메세지가 최종적으로 무엇입니까? " 사랑" 입니다. 인류가 추구하는 본질을 제시하는 자리는 그렇다 이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신데. 그분말씀처럼 창조한것이 무신 목적이 있읍니까? 사랑이라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이미 그 것은 본질은 아닌까닭이 될 뿐입니다. 사랑은 맹목적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만이 고요해집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보고 참구하게 되면 (참구는 고요함을 유지해야 참구할 수 있음) "사랑"의 명제를 본질적으로
발견하는 자리가 될때 고요함이 관장하는 빛과 에너지 현상을 볼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빛의 집에서 바깥으로 나와 조금 구도를 멀게 잡고 볼때 빛 (집) 전체를 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이 말씀이십니다.
빛과 에너지가 소란하고 부딧히고 요란하고 서로의 생명운동이 간섭하며 입자 파동의 운동을 하지만
이를 몰빵 다 가두고 일체의 아우라를 지니는 광명체의 정체는 늘 고요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소란한 것도 고요함에 의하여 그 숙명을 지니게 된다 이 말씀과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은 오로지 이 말씀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상태에서도 고요했다는 사실을 아는분은 드뭅니다.
그냥 얼마나 고통시러우셨을까? 이 정도일 뿐입니다. 이미 주) 예수께서는 고통은 고통이 아닌 초월된 분으로서
시간개념을 초월한 딱 몇초도 아닌 순간에 모기한테 딱 물린 그런 수준밖에 아니되는 것입니다.
고요하시기 때문입니다.
"말로서 모습으로서 작용으로서 야훼를 본다하는 것은 이미 삿된 진리가 되느니라"
이 근저에 머무르는 것이 고요함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 예수는 백성들이 알기 쉬운 방법의 모드를
취하신 이미 고요하시고 조용하시며 이로서 요란 소란한 의미를 다 보고 같음을 행해주신것 밖에는 없읍니다.
백성이 자기몸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냥 감동하고 그 절절한 사랑을 체감하는 백성들로서는 그 고요함에 의하여 절절하고 예수의 사랑을
체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삶의 균형자리는 사랑이며 사랑이 본질이라는 사실은
창조론의 맹목적 사랑과 연결되어 고요성을 전달하신 말씀의 내면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차치하고 모든 인류의 생존의 진행과 존재의 의미는 사랑이라는 것에 의하여 생애의 기반을 유지하고 지탱하게 한다는 것이고
이는 사물의 섭리에 대한 O 의 본질에 대한 균형이 사랑이므로 , 결국 본질은 중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고요함의 근원을 확보하는 것이 사랑이 된다 라는 이 명제를 끌어내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 할 수 있읍니다.
이 명제를 끌어내지 못한다 함은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양태로 객관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 하는 것이지
주관적으로는 많은 분들이 이미 이를 성취하고 있음도 포함하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조용하면 주) 예수께서 오십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말입니다 메세지가 이와 비슷하게 "중성" 중간"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 테스 등 유럽철학의 사상)
그런데 진화론은 이미 초장부터 목적론입니다.
진화하는 주체는 어떤 선택적이며 취사해야 하는 과정을 잡아야 함이니 수단과 방법의 총괄적인
의지작용의 분별의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을 논하는데 이 중간이라는 생명현상에 대하여 논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하학적이나 수치로서 크고 작음 옳고 그름 의 이원적 내분이 스스로 일어나서
거기에 속하고 말았읍니다.
이 작업에는 결코 고요함이 없읍니다, 늘 소란해야 하고 번식의 추이를 보고 , 후퇴함을 버리는
약육강식의 첮 단추를 인류들에게 고자질 한 것인데, 결국은 과학의 실험정신과 목적정신으로
퇴하하여 이 세게를 극단적인 이분법의 양태로 만들었고, 산업자본주의의 전신인 자본계급을
더 한층 심화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진화론은 이상한 특징이 있읍니다.
창조론에 곁방살이 하면서 창조론의 본질을 조금 조금씩 베켜서 진화론에 합리화 시키면서
잡종강세처럼 잡다하게 번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현대문명에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아주 골머리가 아픈 명제로서 탈 바꿈 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 이상한 벌레가 출현했읍니다, 암컷과 수컷이 서로 달라부터 연결되어
나타나는 괴상한 벌레를 말합니다. 이상기온이 되거나 기온이 많이 올라가게되면
출현하는 벌레인데 수명은 한 일주일 걸린다 하였읍니다. 한 일주일 걸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조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이상한 메뚜기가 출현합니다. 그리고 3분지 1 을 멸망시킵니다.
시간과 공간개념 의 함축된 삿띠의 삼위일체의 하나를 늘 멸망시키는 존재로서
O 를 괴롭힌 자 들에게 내리는 고통의 세게를 상징하는 말씀이십니다.
삼위일체 전체를 통각하지 못하는 고요함을 상실한 소란하고 간섭되는 빛 운동을 해소하고자 하는
인과율로서 이 메뚜기들은 왕관을 쓴체 전갈 독을 가지고 출현한다 이 말입니다.
왕관을 무엇인가? 삼위일체의 상징이며 뿔을 상징하는 王 으로서 시간 의 과거 현재 미래 를 함축한
장애를 벗어난 공간계를 압축해서 보는 눈을 (빛) 지녔다 함과 같읍니다.
온 세계의 인류의 생존처인 작물을 다 훼손시킨다 이 말과 같읍니다.
이를 재난이라 합니다.
현재 이상한 벌레가 출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조짐을 말합니다.
진화론자들과 과학계는 모든 세상을 산업화 시키고 자본계급을 출현하게 했읍니다
자본계급의 특징은 무엇인가 극단적인 사고방식으로 흘러가며 승부작용을 하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다다익선이고 많은 재화와 물량을 생산하여 경쟁하는 바운다리를 만들어 놓고
인간위주의 논리에서 약육강식의 사유권편중의 자유의지로서 너거들이 알아서 먹고 살되
돈으로 가치를 분명하게 정하여 경쟁시키는 장치를 세상에 뿌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바로 진화론이고 취사선택으로 약육강식의 모뎀을
자연하게 그렇게 만들어놓고 과학의 전념행위로 산업화에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말함인데
이 근거는 결국 욕망입니다. 탐욕이 근원으로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요즈음 대한민국의 정치이론도 항상 극단적으로 서로간데 적의 수준으로 경계하고
상대를 이겨냄으로서 가능한 정치적 세력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말함인데
점점 팽창되어 극대극임에도 불구하고 더더우기 더 혼란지경으로 고요함을 상실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자본주의 문화는 항상 소비주의가 됩니다.
소비주의는 항상 소비해야 합니다.
무엇을 ? 자연적으로 주어진 자연재 광물재 등을 이용하여 인류의 편린을 가장한 상품화로 치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인류가 돈 맛을 알고 소비문화에 젖어서 빈익빈 부익부 의 편중된 논리를 거의 잠재적으로도
다 인식하고 있기때문에 이 모순된 이치를 (고요함이 전혀 없는 소란지경) 수정하고자 하는 맥락도
보이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득과 손실만 논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내가 이득을 보려면 남이 그 만큼 손해를 보던지 내 상품을 소비해주던지 해야 하는 원리를 말합니다.
죽어나는 것은 자연물입니다. 지하자원을 끌어내어 인간의 편린을 조성하는 문명으로
지고의 선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게 모순이라 이 말입니다.
모든 자연물의 생명현상은 識(식) 이 존재합니다.
단지 사람만이 의식(意識) 이 존재합니다. 그러한고로 만물의 영장지위를 행사하는 인간들은
意 를 바로세워 의식(義識) 의 거룩함과 엄정함을 확립해야 합니다.
義라 함은 모두가 나와같다는 의미입니다. <羊(양: 같은무리 +我(아)= 義>
모두가 같으므로 O 의 재원을 지닌다 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고요함속에 머물면 이득과 손실이 원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것이 본전이라는 말입니다. O 입니다.
이 세계 모든 공간은 늘 청정하게 O 으로서 아무 일 없게 만드시는 작업을 하고 있읍니다
아무리 벌어보고 이득을 남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밤새도록까지
일을 하며 돈을 벌어보았자, 결국에는 노동가치 정신가치 등으로서 재화용역을 취하는 것이고
이로서 자식 가족 집안이 살림을 꾸려나가며 다 소비하는 과점을 이해해야 하고
그 이후에는 죽으면 다 벌어놓은 재화 재산은 다 놔두고 일신의 몸까지 다 세상에 놔두고
간다 이 말입니다. 이로소 교환법칙의 소통의 원리가 이 소식 이되는 O 된 도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고로 세계는 언제나 우리들의 소유인식 없이 그냥 O 으로 굴러간다 이 말이며
이를 균형론이라 하고 O 의 이야기라 한다 이 말입니다.
고요함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알아챙김을 말 합니다.
공중도덕이라 함은 이를 말합니다 O 으로 균형을 잡는다 이 이야기인데 이는 고요한 근저이므로
질서를 동반하고 O 의 덕을 내재한 진리의 의미로서 상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진것에서 일어나라 하였는바 과학이 저지르고 진화론자가 저지른 문명의 패악점은
스스로 넘어진자가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이를 해결하려면 정신과학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미이고, 중간의 입장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는
사고개념에서 O 을 진중하게 되 돌아보려면 소욕지욕이라 조금의 재화용역을 취하는데
만족하는 이치를 병행해서 세계문명을 한발자욱씩 옮겨야 한다 이 말입니다.
재화용역을 취한다함은 조그맣게 소비하거나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를 주창하면 이미 관성의 법칙으로 내 달리는 자본주의 숨결에 대하여 멈추게 할 수 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재화와 용역의 소비만큼 그 반연하여 다시원상회복을 해야하는 O 된 도리를 이해하는 관점을
함께 반영하여 결코 이득점이 없으며 O .의 본전 확장개념으로 이해하고 모든 물자에 대하여
만족을 할 수 있는 어떤 룰을 정하는 기초이념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계를 불교에서는 삼계를 이름하여 설명하는데 이중에 도솔천이라는 곳이 있읍니다.
이곳 이름은 "지족천"(知足天) 입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하늘공간 이라는 뜻인데
이 지족천이 우리 각자 마음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메시아가 출현합니다.
지금 앞으로 56억7천만년 후에는 미륵부처님이 출현한다 하였는데 그 미래의 미륵부처님이신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지금 대기 하고 있읍니다, 미륵은 바로 무엇인가, 히브리어로 메시아 가 됩니다.
가장 고요한 극치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이 말입니다.
56억7천만년이라 빛 7의 세계로 나누어보게되면 81 의 숫자가 나옵니다.
9천세계를 승하면 81 인데 9 는 변화하는 생명성품의 등비관계로 늘 아무일 없게 하는 O 의 소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자연하게도 중화의 소강절은 81 괘를 만든 것이고, 천부경도 9 궁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만수는 9 입니다. 모든 자연생명성품들은 9 류중생입니다.
불교에서 현존하시 부처님이신 화신불 석가모니 부처님도 도솔천에서 출현하셨읍니다.
주) 예수께서도 삼위일체상으로서 승하여 9 로서 사방을 다스리니 36 의 O 된 도리로서 빛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인과율이라 하는 관계적 의미는 항상 O 으로 모든 우주계를 유지하고자 청정함을 행하십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아무일 없기를 바라는 것을 우리는 빛의 심판에 따라야 한다 하는 것이고, 이는 항상 고요함으로
질서를 유지케 하는 섭리와 섭사가 성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문명과정으로 진행하단다 하여도 항상 O 된 도리를 알고 지니지 않으면 이 세계는 멸망하게
되어있읍니다.
제도적으로 정신과학혁명을 일으켜야 하고 O 된 근저에 있는 소욕지욕으로 지족할 수 있는 단계까지
우리는 진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앞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섭리와 섭사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지금 주어진 우리들의 나이에서 각가 얼만큼 벌어놓고 장농에 통장에 돈 쌓아놓고 살고 있읍니까?
겨우 집한채? 통장에 수억지닌 사람 보편적으로 흔하겠읍니까?
어림도 없읍니다, 그냥 O 된 근저로 벌었다는 것 다 오바이트 하고 가야 합니다.
나이는 들고 늙어가고 있읍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읍니다.
자본주의 세대는 생각이 고요하지 못하여 늘 짧게 생각만 냅니다.
조금만 안되면 실망하고 절망하며 쉽게 자기 생명도 포기하는 자살률도 높은 페단이 더 팽배해집니다.
무엇인가를 늘 이루려고, 늘 바라고자 하는 욕망은 씰데 없읍니다.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진다 하여도 반대개념이 동시에 빛 쟁이 처럼 쫓아오사 덮치고 있읍니다.
이득이라는 개념, 손해라는 개념의 이치만 없애고 개념정립을 O 혼의 이야기라고 가다듬어도
결론은 똑 같은 것이 됨인데 단지 차별나는 것은 고요함과 고요함이 아님의 차이만 난 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 함도 누구를 향해 무엇을 바라고자 할때는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맹목적으로 좋아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 사랑은 영원해 집니다.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 영원성의 기약지점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어떠한 세상인지 기가 맥힙니다.
사랑의 본질을 벗어나서 돈 때문에 팬티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이 작당입니다.
이 왜곡된 본질은 생명현상의 고요함의 본질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후회하고 그 인과로서 고통을 겪는 갈등을 스스로 만들어 버린다 이 말과 같읍니다.
소비를 한다하여도 서로 나눈다! O 된 개념의 이치근저라도 이해하고 실행하는 정신만 가진다면
자본주의 물결로 아주 건실하게 평화로운 사상체제로 변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고
한 글자 올렸읍니다.
경전을 늘 암송하고 읽으시면 삼매지경에 들어서며 늘 고요하고 평화 하므로 진리의 근저가
와 준다는 사실을 만고의 진리가 되는 것이고 이미 성인들께서 입증해 놓으신 것입니다.
현존하는 정치세력들의 아귀다툼은 다 뒤집히게 되어있읍니다.
본질이 욕망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가기 때문입니다.. O 은그런소식을 주므로서
주) 예수께서는 항상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쟁점은 고요하자 입니다. 시끄러워도 항상 마음은 조용하게 하자.
조용하게 하고자 하면 자기 몸을 관찰해야 하지 외부를 관찰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며
관찰한다 함은 삿띠를 말하는 것이지 그냥 몸을 본다라는 것은 아니며 알아차림입니다.
몸을 알아치라면 身 이고 그냥 몸을 보게되면 色(색) 일 뿐입니다ㅓ.
身과 色 을 다 보게되면 神 을 보고 O 을 본다 할 수 있읍니다. 이 도리를 궁구하게 되면
그 과정속에서도 늘 고요하고 복락과 공중도덕의 본의를 유지하게 된다 이 말과 같읍니다.
그것이 O이기때문입니다,
탐욕은 오취온(五取溫) 이라 신경계통 색 수 상 행 식 인데 이것이 탐이고 욕망의 루투가 됨인데
조용하게 되면 탐욕의 근원 고통인 집착을 멸할 수 있고 계율로 도리를 일으키니 사성제인
고집멸도가 완성되고 이 자리의 정념에 들면 고요함을 유지하고 자연하게 팔정도가 이루어지므로서
항상 깨어나 있게 된다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천하없어도 공간은 늘 O 을 유지하며 절대 무어지지 않읍니다.
이 소식이 우리들으 마음속게 각지 내재되어있읍니다, 이를 고요함을 본다 하는 것입니다.
항상 경전을 읽고 고요한 일상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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