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갖가지 질병으로 앓고 있는 모든 이들을 낫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육신의 병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시고 그들을 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는 이 복음 말씀 가운데 유독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오늘 예수님이 제일 먼저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시몬의 장모입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루카 복음사가는 시몬의 장모가 걸린 병이 심한 열에 의한 병이라고 설명합니다. 열병에 시달리는 시몬의 장모. 그녀는 왜 이 열병에 걸리게 되었을까요? 그녀를 낫게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점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낫게 하는 모습을 루카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9)
예수님은 유독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실 때에는, 다른 병자들을 낫게 하시는 것처럼 그들 하나하나를 어루만져 그들의 병을 낫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가 앓고 있는 그 열을 꾸짖었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분명히 전하며 예수님의 꾸짖음에 즉각 그 열이 가시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열을 꾸짖고 그러자 열이 가셨다는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 같은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마도 시몬의 장모가 시달리고 있던 열병이 화병이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귀한 딸을 낚아채듯 데리고 간 일자무식의 사위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모는 화병에 열이 뻗쳤을 것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쫓아가기 위해 처자식도 버리고 유일한 생계의 수단이 배마저 버리고 홀로 떠난 사위가 장모는 너무나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들리는 소문에 사위가 쫓아간 그 스승이라는 작자가 먹보요 술꾼이며 주정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장모는 화병에 몸 져 누운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 소식은 아마도 가장 빨리 베드로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장모가 화병으로 몸 져 누워 있으며, 그로 인해 베드로의 부인마저 쓰러지기 직전이며 지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이에 몸이 달아 급해진 베드로가 아마도 예수님을 붙들고 사정했을 것입니다. 제발 제 장모님의 집에 가서 그녀를 낫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못이기는 듯 베드로의 청을 들어 시몬의 집으로 가 그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장면이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를 만나자마자 그녀가 열병이 아닌 화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그리고 어찌 보면 진짜 병이 나서 쓰러진 게 아니라 사위를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딸을 위한 연극을 하고 있음을 예수님은 바로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녀가 병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 열병을 꾸짖으시고 그러자 그 장모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분의 시중 드는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작자를 믿지 못해 딸을 위해 병에 걸렸다는 시늉까지 했던 장모가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아보고 그 분의 시중을 드는 이 모습, 시몬의 장모가 보이는 이 같은 극적인 변화의 모습은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은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갖가지 질병으로 시달리는 모든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육신의 병 외에도 영혼의 병, 곧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하시고 그들을 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육신과 영혼의 병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모두 낫게 해 주시는 치유자 예수님의 모습, 바로 오늘 복음은 이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에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그들은 그 분을 붙잡고 그들과 언제나 함께 있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복음의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제게 이 말씀이 크게 와 닿습니다. 많은 이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그들로부터 인정과 함께 사랑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을 떠나겠다라고 마음먹는 이 예수님의 모습이 제게는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머물며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이 너무 달콤하게 느껴지는 제게 예수님은 그런 모든 인간적 기쁨을 뒤로하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위해 또 다른 새로운 곳으로 떠나십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그 같이 행동하실 수 있었을까?
오늘 독서의 말씀이 그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오늘 독서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 읽게 되는 코린토 1서 말씀으로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공동체에게 복음 선포자의 역할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오로파, 아폴로파로 갈라져 교회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키며 소동을 일으킨 코린토 교회를 질타하며 복음 선포자는 오직 하느님 그 분의 협력자일 뿐이며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 그 분이심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라지 자라게 하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5-7.9)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 안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의 해답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협력자, 뿌려진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 그 분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뿌려진 씨앗에 물을 주는 보조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위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두고 환호할 때, 다른 고을로 떠나 그곳에서 역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신앙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준적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내가 무슨 일을 해낸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 우리 본당 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우리 단체가 잘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이후 다른 후임자들이 그 자리에 앉게 될 때, 왜 나만큼 하지 못하냐며 비난하고 혹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두고는 질투하고 시기하며 험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든 행동의 이면에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하느님께서 그 모든 일의 주권자라는 생각을 지우고 그 자리에 나를 앉혀놓는 교만한 마음이 깔려져 있습니다. 씨앗을 키우시는 하느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물을 주는 협력자일 뿐인 나를 앞세우는 어리석은 교만이 그 같은 일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오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중심에 누구를 두고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그들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보호 아래 언제나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 모두가 우리 도움 방패이신 하느님을 우리 삶에 가장 윗자리에 모시고 그 분과 함께 언제나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시편 33(32),1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