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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상화를 읽는 다섯 가지 코드
강 관 식 ; 한성대 회화과 교수
Ⅰ. 서언
조선시대 초상화는 주인공의 사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추모와 향사의 대
상으로 봉안되어 제의적 의미가 중시되었다.1) 그러나 초상화가 그려지던 주
인공의 생존 당시나 사후의 특수한 맥락에서는 정교적이고 수기적이며 실존
적인 성격의 중층적인 의미가 다양하게 작용하며 파생적으로 부가되었다. 이
러한 의미망과 의미층의 다양성과 복합성은 초상화의 도상과 화법에도 직접
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조선시대 초상화는 그 다양성과 복합성을 역사
적인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읽을 때 전체적인 실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상화는 사후 제의적인 공간 속에 봉안된 채
향사의 대상으로 전래되던 맥락에서 미술사적으로 인식되고 연구됨으로써 제
의적 의미와 기능을 중심으로 한 특수한 회화로 이해되며 초상화에 담긴 다
양하고 복합적인 미술사적 의미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그 결과 회화사
적 위상과 의미도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채 다소 제한적으로 평가된 측면
이 적지 않았다. 근래에는 초상화에 담긴 정치적, 사상적, 조형적, 문화적 맥
락 같은 다양한 의미망과 의미층을 파악하려는 작업이 시도되며 초상화의 성
격과 의미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앞으로 많은 사
례 연구를 통해 더욱 정치하게 체계화시켜 나가야 될 것이다.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연구는 성리학적 제
의의 근본적 성격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제의적 맥락에 대한 이해조차 잘
못 파악된 측면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근래 제의적 의미를 넘어 다양한 맥락
에 대한 연구들이 나타나며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지만, 한편으로 이는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이해의 상이 분절되고 파편화됨으로써 다양한 의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와 관계에 대한 문제를 보다 포괄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이해해야 될 필요성
을 제기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사례 연구의
많은 축적 과정을 거쳐야만 해결될 수 있는 무겁고 긴 과제일 것이다. 그러
나 본고는 필자가 그 동안 여러 각도에서 분절적, 파편적으로 논의해왔던 내
용들을 포괄적으로 종합하고 일부 새로운 시각과 자료를 추가하여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총론적 시도의 하나로 기획되었
다.3)
그리하여 우선 조선시대 초상화에 담긴 다양한 의미망과 의미층을 종합적
으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 개념으로서 “제의(祭儀)와 정교(政敎), 수기(修
己), 비망(備忘), 주술(呪術)”의 다섯 가지 코드를 제시하고 그 전형적인 범주
적 유형과 특징을 시론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초보적 시론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초상화를 둘러싼 제의가 고려시대 이래의 불교적 제의에서 조선
시대의 유교적 제의로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과 양상 속에서 형성된 국왕과
사대부 의례의 차이에 따른 어진과 사대부상에 대한 제의 문화의 근본적인
성격 차이를 새롭게 제기해 보겠다. 그리고 초상화가 제작되고 봉안되며 경
험되는 다양한 맥락과 과정 속에서 초상화에 담긴 제의적 의미와 정치적 의
미, 개인적 의미, 사회적 의미들이 함축적으로 생성되며 파생적으로 부가되어
나가는 중층적인 모습과 양상을 전형적인 범주적 유형을 통해 개괄적으로 그
려보겠다.
Ⅱ. 제의(祭儀)
불교를 국시로 삼은 고려시대는 사후 영정을 사찰에 봉안하고 재(齋)를 올
리는 불교적 상장례(喪葬禮)가 널리 행해졌다.4) 그러나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는 상장례에 영정 사용하는 것을 불교적 속례(俗禮)로 이단시하고
혼백(魂帛)과 신주(神主)를 사용하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유교적 상장례를
정례(正禮)로 삼으며 고려 이래의 불교적 관습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했
다. 이러한 현상은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사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5
세기 후반의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 대부터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조선 초중기의 어진과 사대부 초상화는 제의적 맥락에
있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 이강칠, 『조선명인초상대감』, 탐구당, 1972: 이강칠 외, 『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 현암사,2003: 조선미, 『한국초상화연구』, 열화당, 1983: 동, 『초상화 연구』, 문예출판사, 2007:동, 『한국의 초상화』, 돌베개, 2009: 조인수, 「초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미술사학보』 29, 미술사학연구회, 2007.12, pp.115-136.
2) 조인수, 「조선 후반기 어진의 제작과 봉안」, 『다시 보는 우리 초상의 세계: 조선시대 초상화 학술논문집』 , 문화재연구소, 2007, pp.6-32: 심초롱, 「윤증 초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0: 강관식, 주 3의 논문.
3) 강관식, 「조선시대 초상화의 圖像과 心像 - 조선 중후기 선비 초상화의 修己的 의미를 통해서 본 再現的 圖像의 實存的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성찰」, 『미술사학』 15, 한국미술사교육연구회, 2001, pp.7-55: 동, 「털과 눈 - 조선시대 초상화의 祭儀的 命題와 造形的 課題」,『미술사학연구』 248, 한국미술사학회, 2005, pp.95-129: 동, 「조선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 강신항(외), 『頤齋亂藁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pp. 495-675: 동, 「명재 윤증 초상의 제작 과정과 정치적 함의」, 『미술사학보』34, 미술사학연구회, 2010.6, pp.265-300: 동, 「명재 윤증 유상 이모사의 조형적, 제의적,정치적 해석」, 『강좌 미술사』 35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 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2010, pp.181-213: 동, 「진경시대 인물화」, 『간송문화』 81,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11,pp.107-134: Kang Kwanshik, “Literati Portraiture of the Joseon Dynasty”, Journal ofKorean Art & Archaeology, vol.5, 2011, Korean Museum of Korea, pp.25-37.
4) 허흥식, 「불교와 융합된 왕실의 조상숭배」, 『동방학지』 45,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1983, pp.1-58.
조선 초기에는 고려 이래의 불교적 맥락 속에서 어진을 그려 모시는 전통
이 지속되었듯이 왕족과 사대부들도 사찰의 진전이나 묘소 부근의 영당에 초상화를 봉안하고 재를 올리거나 향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말 선초 이래 성
주(星州) 선석사(禪石寺)와 안봉사(安峯寺)의 영당에 봉안되어 온 이조년(李兆
年, 1269-1343)과 이포(李褒, 1287-1373), 이제(李濟, 1365-1398) 같은 성주이
씨 문중의 초상화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초상화는 사찰의 화승이
그려 불교적 도상과 불화적인 화법이 구사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화승(畵僧)
옥준상인(玉峻上人)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상>
(도판 2)에 불교적인 도상과 화법이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6
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종위(申從渭, 1501-1583) 상>과 <김진(金
璡, 1500-1580) 상>, <윤희손(尹喜孫, 1547-1579) 상>의 경우도 필치에 있어
서 불화적인 특징이 강하게 보여 이와 유사한 예로 이해된다.5)
그러나 성리학을 이념적으로 지향한 사림들은 초상화가 유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고례(古禮)도 아니고 정례(正禮)도 아닐 뿐만 아니라 송대의 성리학자들
이 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며 비판했기 때문에 제의적 성격의 초상화를 그
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조선 초중기의 4대 사화(士禍)가 말해주듯,
이 무렵에 공신(功臣)으로 책록되며 공신상을 하사받은 공신들은 대개 성리
학적 명분론에 어긋난 경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림과 대척적인 지점에서 사림에게 위해를 가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시기의 사림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제의적 맥락에서 보면 불교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에 크게 성행하
며 이 시기의 초상화를 주도한 정교적 성격의 공신상은 성리학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큰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
하여 조선 초중기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은 것으로 일컬어지는 점필재(佔
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
4),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 같
은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은 제의적인 성격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이러한 사림들의 부정적인 초상관은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6)
5) 박은순, 「농암 이현보의 영정과 영정개모시 일기」, 『미술사학연구』 242, 243합집호,한국미술사학회, 2004, pp.225-254: 윤진영, 「성주이씨 가문의 초상화」, 『장서각』 22,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pp.139-179: 강관식, 「윤희손 초상」, 문화재청 편, 『한국의 초상화』, 눌와, 2007, pp.250-252.
6) 강관식, 전게 「털과 눈」.
물론 여말선초에 당대의 관습에 따라 그려진 선조와 선학들의 초상화까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도입하고 수용한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같은
초기의 유현들은 조선 성리학의 연원으로 숭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초상화
도 이런 맥락에서 중시되었다. 그러나 사림들은 가능하면 불교적인 제의적
맥락을 벗어나 유교적인 제의적 맥락에서 수용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다.
그리하여 공자(孔子) 상에는 간단히 소채(蔬菜)를 올리는 석채(釋菜)가 허용
되었지만, 일반 사대부상의 경우에는 분향과 첨배만 허용하는 등 가능하면
유교적인 제의적 맥락으로 전환시켜 나가거나 제의적인 맥락보다 수기적인
맥락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 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성리학의 심화
와 저변화에 고심했던 퇴계 이황이 순흥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
에 봉안해 온 공자와 안향의 영정을 평소에는 말아서 궤 속에 넣어 강당의
벽 속에 권봉(捲奉)했다가 첨배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꺼내서 강당에
걸어놓고 분향하며 첨배하도록 했던 것은 이러한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
는 것이라 할 수 있다.7) 퇴계는 초상화에 대한 조두(俎豆) 제향(祭享)을 금지
하여 불교적인 제의적 맥락을 탈피하고 단순히 첨배만 허락함으로써 성리학
적인 수기적 의미를 살려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강릉의 구산서원(丘山書院)에
봉안한 공자 상에 대해 분향과 첨배만 했던 것도 같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는 주자가례가 보편화되어 성리학적인 제의 문화가
기본 교양과 사회 관습으로 정착되자 성리학자들도 초상화에 대한 성리학적
인 제의적 억압을 넘어서서 초상화에 담긴 수기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재
발견하고 재평가하며 초상화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
타나기 시작했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성리학자들도 근본적으로는 퇴계처럼
초상화를 가능한 제향의 대상이 아니라 첨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의식이
강했다. 18세기 초에 백운동서원을 방문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이 원노(院奴)의 안내에 따라 퇴계가 제정했던 규정에 의해 공자와 안향, 주
세붕의 영정을 첨배했던 것은 이러한 의식과 전통이 얼마나 중시되고 있었는
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8) 지금까지는 조선 초기의 불교적 제의 전통 속에
7) 權尙夏,『寒水齋集』,卷四,「答李美叔(秀彥)」. 聞院事不設位版, 行舍菜之禮於影堂處有之, 如龍仁圃隱祠是也. 然則今玆所示, 似有據矣. 但朱子曰, 古禮廟無二主, 有祠版, 又有影, 是有二主矣.蓋慮其精神分散, 不能萃聚於一處故也. 今於新院, 旣立祠宇, 又立影堂, 兩所俱行祭奠, 則無乃有二主之嫌耶. 嘗見江陵丘山書院, 奉先聖眞像, 只行焚香四拜之禮, 而未有俎豆之儀. 順興白雲洞,則以先聖眞簇藏於櫃中, 置諸講堂壁中, 有瞻謁者, 則掛於堂中, 而焚香拜之而已. 此皆退翁所定也.二者擇而行之, 則可免二主之嫌耶. 아울러 주 8의 『星湖僿說』 참조.
8) 李瀷, 『星湖僿說』, 卷十七, 人事門, 「白雲洞」. 余至順興府, 訪白雲洞安文成公書院. (中略)院奴引至講堂, 開夾室, 奉畵像三軸掛壁, 使余四拜于庭下, 一卽先聖眞而群賢侍立, 其兩障是文成愼齋像也. 先聖은 孔子, 文成은 安珦, 愼齋는 周世鵬이다.
서 형성된 어진(御眞)에 대한 의례에 이끌려 사대부 초상화도 대개 제향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인식해 온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왕자(王者)의 예(禮)와 사대부의 예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
실 어진의 경우는 국초의 불교적 맥락과 고례(古禮)의 왕권 중심적인 맥락에
서 형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 성종 5년)와 『경국대전(經國大
典)』(1485, 성종 16년)의 왕실 의례 특성상 제수를 올리고 술잔을 올리는 제
향 의식이 정례로 규정되고 이러한 전통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 되었다.9)
그러나 『주자가례』에는 초상화에 대한 제향 규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초상화의 제의적 의미를 불교적인 것으로 보며 부정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사대부 초상화는 성리학적 제의론을 보다 철저하게 적용하여 가능하
면 제향의 대상이 아니라 첨배의 대상으로 그 성격과 기능을 제한하고자 하
는 의식이 강했다. 그 결과 사대부 초상화는 원칙적으로 육식의 제수를 올리
거나 술잔을 올리는 것이 금기시되고 대개 분향례만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
다. 그리고 삭망의 정기적인 분향은 제의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방충과 살충
의 기능적, 실용적 의미도 매우 컸다. 제향을 행하는 어진을 봉심할 때도 의
향(衣香)과 부용향(芙蓉香)을 피우는 것이 “훈증(薰蒸) 살충(殺蟲)”을 위한 것
임을 강조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을 잘 말해준다.10)
9) 양진조, 「어진 봉안의 공간-眞殿, 그 儀禮에 대하여」, 『新璿源殿』, 국립문화재연구소,2010, pp.174-195.
10)정해득,「화녕전의 건립과 제향」,『조선시대사학보』 59, 조선시대사학회, 2011,pp.143-171.
실제로 조선 후기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초상화를 봉안한 논
산 유봉영당(酉峯影堂)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중요한 성리학
자들의 초상화를 봉안한 영당의 기록을 보면, 기제(忌祭) 때나 생신 때도 초
상화를 모신 영당에서 특별한 제향을 행한 기록이 없다. 『분향록(焚香錄)』
에는 후손이 아니라 한 두 명의 ‘유사(有司)’가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분향한 기록만 있다.『첨배록(瞻拜錄)』도 대개는 3월 15일과 9월 15일 전후
의 거풍(擧風)하고 포쇄(曝曬)하는 날에 후손과 후학들이 모여 첨배한 기록이
대부분이며, 기타 소과(小科)나 대과(大科)에 합격하거나 집안의 대소사 또는
공무, 여행 등을 계기로 하여 수시로 첨배한 기록이 부정기적으로 추가되어
있다. 이러한 관습은 조선후기 관료들의 초상화를 모신 후손가에서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조선 중후기의 사대부 초상화가 성리학적 제의론의
특수성으로 인해 제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제향의 대상이 아니라 첨배의 대
상으로 제한되고 제의적 의미보다 수기적 의미가 더욱 중시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1)
물론 조선후기에도 일부 문중의 경우, 특히 여말선초 이래 불교적 맥락에서
시작된 영정과 영당 문화가 계속 전승된 가문의 경우나 성리학적 가풍이 그
다지 두드러지지 않은 문중의 경우, 그리고 설사 조선 중기의 성리학적 가학
전통이 강했던 문중이라 하더라도 조선후기에 영정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던
맥락에서 엄격한 성리학적 제의문화가 여말선초 이래의 전통적인 의례 문화
와 습합되어 일부 속례화됨으로써 신주와 영정을 같이 모시거나 영정에도 제
수를 차리고 술잔을 올리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일부에
서 속례로서 행해진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성리학적 제의론에서는 원칙적으
로 초상화에 제수를 올리고 술잔을 올려 제향하는 것은 불교적인 맥락에서
파생된 속례로 보았기 때문에 주자가례를 따른 사대부 제례에서는 가능한 이
를 피하고 삼짇날과 중양절 전후에 거풍하고 포쇄하며 분향 첨배하거나 삭망
과 기타 대소사 때 분향 첨배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Ⅲ. 정교(政敎)
조선 초중기는 초상화를 둘러싼 제의 문화의 성격이 불교적인 맥락에서 성
리학적인 맥락으로 변화되며 제의적 맥락의 초상화가 쇠퇴한 대신 정교적 맥
락의 초상화가 발달하는 이원적 교차 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초상화의 제의
적 맥락과 정교적 맥락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워 양자가 융합된 채 복합
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맥락과 의미의 핵심
적인 성격상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측면도 또한 없지 않았다.
가령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 역성혁명의 핵심 주역이었던 태종(1367-1
422, 재위 1400-1418)은 사후에 원찰이나 진전에 영정을 봉안했던 고려 이래
의 불교적 상장례를 강하게 비판하고 이를 새로운 성리학적 제의 문화로 전
환시켜 나가기 위해 부심했다. 그리하여 원경왕후(1365-1420)와 자신의 초상
화는 원찰이나 진전을 설치하여 봉안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금지하고, 원경
왕후의 사후에도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상왕(上王) 시절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도 없애버리라고 지
시함으로써 성리학적 의례 문화가 형성되는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었
다.1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태종은 적장자가 아니라 왕위 계승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골육상쟁의 왕위 쟁탈전을 통해 패도(覇道)로 즉위해 명분상 왕권
의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부친인 태조 어진을 봉안하는 진전을 전국의
중요 5개 지역에 확대 설치한 뒤 태조 어진을 봉안하는 의례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취약했던 자신의 왕권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13) 따라서
불교적 의례 문화를 극복하고 성리학적 의례 문화를 수립해나가기 위한 정치
적 맥락에서는 불교적 성격이 강한 진전과 어진의 제의적 의미를 부정했던
태종이 오히려 주도적으로 추진한 태조 진전의 전국적인 확대 설치와 태조어
진의 봉안은 제의적 의미보다 정교적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진전이 소실되고 역대 어진이 거의 대부분 망실되자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과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대북(大北) 정권이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은 물론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
손된 선왕들의 어진까지 무리하게 모사하여 봉안하고자 했던 것도 광해군이
명나라와 사림들 사이에서 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공인받지 못하고 있었
던 당시의 사정과 적지 않은 연관성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14) 그런 점에
서 광해군도 태종처럼 어진의 정교성에 주목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광해군 시대에는 초상화의 제의적 의미를 부정한 주
자가례가 더욱 일반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그와 같이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과 영조(1694-1776, 재위 172
4-1776)가 탕평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지
향하며 어진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도 초상화의 정교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숙종과 영조는 태조어진과 세조
어진 같은 선왕의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는 것은 물론, 직접 자신의 어진을
그리게 함으로써 어진의 정교적 맥락과 의미를 더욱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
리하여 숙종은 세조가 생전에 어진을 그린 이후 2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생존
시에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도와 창덕궁에 봉안하게 하는 획기적인 일을
도모했다. 특히 숙종은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이라는 특별한 기구를 설
11) 강관식, 전게 「명재 윤증 유상 이모사의 조형적, 제의적, 정치적 해석」.
12) 강관식, 전게 「털과 눈」.
13) 고려 전기의 살벌한 왕위계승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현종이 불교적 성격이 강한경령전(景靈殿)의 진전 제도를 창설하고 부친인 태조 어진을 봉안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도 조선 전기의 태종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철웅,「고려 경령전의 설치와 운영」,『정신문화연구』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pp.101-127.
14) 조인수, 전게 「조선 후반기 어진의 제작과 봉안」.
치하고 정국의 핵심적인 재상들을 도제조와 제조로 임명하여 국왕과 어진이
국정의 핵심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 이를 직접 주도함으로써 어진의 정
교적 의미와 효과를 더욱 강조하며 극대화했다.15)
왕자 시절 숙종의 어진 도사에 직접 참여하여 이를 자세히 목도했던 영조
는 숙종의 탕평정치를 더욱 확대 발전시키고 어진을 그리는 일도 더욱 발전
시켰다. 그리하여 세조어진과 숙종어진을 다시 모사하여 봉안하는 것은 물론,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자신의 어진을 그리게 함으로써 국왕을 정점으로 한 왕
권정치에 자신의 어진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만약 어진이 단순히 제
의적 의미로만 이해되었다면, 어진을 10년마다 정기적으로 그려 여러 벌의
어진을 제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 초기의 어진은 제의적
맥락의 의미가 컸지만, 조선 후기의 어진은 정교적 맥락의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영조가 20년(1744)에 경덕궁(慶德宮: 慶熙宮)의 경현당(景賢堂)에
자신의 어진을 걸어놓고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은 영조
가 어진에 얼마나 큰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준
다(도판 3).
내가 『대훈(大訓)』을 만드느라 여러 해 동안 고심했는데, 앞날이
또한 어찌 될 지 알 수 없다. 지금 이 초상화를 여러 신하들에게 꺼내서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훗날 이 초상화를 보고
길이 『대훈』을 준수하게 하려는 뜻이다. 『속오례의(續五禮儀)』와
『속대전(續大典)』및 『대훈』이 모두 이루어졌으니, 내가 비록 늙었
지만 나의 일이 다 끝났다.16)
15) 진준현, 「숙종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고문화』 46, 1996, pp.89-119: 동, 「영조 정조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서울대학교 박물관 연보』 6, 1994, pp.19-72: 이성미, 『어진의궤와 미술사-조선국왕 초상화의 제작과 모사』, 소와당, 2012: 강관식, 전게 「털과 눈」.
16) 承政院日記, 第九八一冊, 英祖二十年甲子(1744), 十二月初一日甲辰. 申時, 上御景賢堂. (中略). 上命內侍, 出掛畫像二本, 使諸臣瞻望後, 詢其肖似與否. (中略). 上曰, 予作大訓, 乃積年苦心, 而不知前頭又將如何矣. 今此畫像, 出示諸臣者, 非爲觀瞻也. 欲於日後, 見此畫像, 永遵大訓之意也. 續五禮續大典大訓皆成, 予年雖老, 吾事畢矣. 『대훈』은 당쟁의 화를 일소하고 탕평책을강조한 정치적 선언문이며, 『속오례의』와 『속대전』은 개정판 국조오례의와 경국대전이다.
영조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3대 정치개혁 작업을 마무리 하고 이를 기
념하여 새로 그린 자신의 어진을 신하들에게 보여준 것은 “훗날 이 초상화를
보고 길이 『대훈』을 준수하게 하려는 뜻”이 담겨있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
였다. 이는 단순히 어진에 담긴 정교적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어진(御眞) 정치’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정도이다. 세손(世孫) 시절 영조의 어진 도사에 직접 참여하고 이를 자세히 목도했던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도 영조 사후 규장각(奎章閣)을 창설하여 역대 선왕들의 어필(御筆)과 어제(御製)를 봉안한 성역(聖域)으로 만든 뒤, 측근 신하들을 포진시켜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왕권정치의 산실이자 요람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규장각에서 10년마다 정기적으로 어진을 그리고 이를 다시 규장각에 봉안하게 했던것도 어진에 담긴 정교적 의미에 주목하고 영조의 어진 정치를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17)
어진과 함께 초상화의 정교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
가 공신상(功臣像)이다. 기실 동아시아 초상화의 시원은 제의적 의미가 아니
라 정교적 의미에 있었다. 은(殷) 나라의 무정(武丁: 高宗)이 꿈속에서 보았던
현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가지고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부암(傅巖)에서
일하고 있던 부열(傅說)을 얻어 국가중흥의 대업을 이루었다는 고사는 동아
시아 초상화의 시원을 말해주는 설화로서 초상화의 기원이 제의적 맥락이 아
니라 정교적 맥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18) 초상화의 고전적 전범으로 일컬어
지는 한대의 기린각(麒麟閣) 공신상과 당대의 능연각(凌練閣) 공신상도 초상
화의 유교적 연원과 전통이 정교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초중기에는 성리학적 제의론의 대두로 불교적인 성격의 제의적
초상화가 쇠퇴했지만 무려 수백 점에 달하는 공신상이 그려지며 이 시기의
초상화를 주도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교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성리학적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
운영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 갈등과 정변이 속출하고 일본과 청나라
의 외침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변과 외침의 위난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
고 국가와 왕실을 구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국초의 개국공신 이래 17세기의
중기까지 20여 종, 9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공신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공신들은 유교적 정치 이념에서 가장 중시되고 강조된 충(忠)을 상징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공신임을 증명하는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려 높은 관직과 많
은 재물을 하사하고, 그 표상으로서 공신상(功臣像)을 그려 충절을 장엄하게
시각화하고 길이 기념했다. 특히 한대 기린각과 당대 능연각의 전통을 따라
공신녹권 속에 “전각을 세워 공신상을 그린다(立閣圖形)”거나 “공신상을 그려 후대에 전한다(圖形垂後)”는 구절을 명문화하여 공신상은 정치적으로 더욱
중시되었다.19)
특히 국초의 개국공신(開國功臣, 1392)은 태조 4년(1395)에 도성 안의 경복
궁 밖 서쪽에 해당되는 ‘북부 통명방(通明坊)’에 ‘장생전(長生殿)’이라는 공신
각(功臣閣)을 세우고 공신상을 게시하여 정교적 맥락의 감계적(鑑戒的) 의미
가 더욱 강조되고 부각되었다.20) 다만, 지금까지 장생전은 경복궁 안에 설치
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개국공신 남재(南在, 1351-1419)의 연보(年譜)에서
‘북부 통명방’에 세웠다고 한 기록이나 훗날 장생전을 훼철하고 그 터를 상림
원(上林園)의 ‘원림(園林)’으로 만들었으며 장생전은 ‘관곽(棺槨; 棺材)’을 보관
하는 관서가 되었다는 세종 10년(1428)과 14년(1432)의 기록으로 볼 때,21) 장
17) 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돌베개, 2001.
18) 『書經』, 「說命(上)」:『史記』, 卷三, 「殷本紀(高宗)」.
19) 조선미, 「朝鮮王朝時代의 功臣圖像에 관하여」, 『美術史學硏究』 151, 한국미술사학회, 1981, pp.21-37: 권혁산, 「조선중기 功臣畵像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학위논문, 2008.
20) 南在, 『龜亭先生遺稿』, 卷上, 「年譜」. 壬申,本朝太祖大王元年(1392), 八月二十日 己巳. 策純忠奮義同德佐命開國功臣一等第十四人. 上曰, 中樞院學士南在等, 在前朝政亂之時, 注意寡躬,以至今日, 固守不變, 其功可賞, 次賜功臣之號, 其褒賞之典, 令有司擧行. 命功臣都監立碑以紀其功, 建長生殿在北部通明坊, 以圖其形. 錫土田臧獲, 嫡長世襲, 不失其祿. 子孫雖有罪犯, 宥及永世, 載諸信書以賜之. 世乘命功臣以下, 龍飛御天歌註. 祇受賜名. 다만 ‘북부 통명방’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太祖實錄』, 四年(1395) 七月十三日(甲辰). 命營長生殿于闕西, 欲垂功臣圖象, 諸功臣出錢穀有差, 以助其費; 『太宗實錄』, 十一年(1411) 五月四日(甲子). 命修長生殿, 且圖太祖眞及開國功臣影, 遣完城君李之崇, 奉迎平壤太祖眞, 將以摹寫也; 同, 五月十八日(戊寅). 命議政府, 考歷代奉安御容之制以聞. 初, 太祖創長生殿, 蓋倣唐淩烟閣之制也. 上欲奉安太祖聖容于長生殿, 令考舊典.議政府上言曰, 謹按玉海, 有曰, 唐太宗圖功臣無忌等二十四人于凌煙閣. 代宗圖雍王等三十三人于凌煙閣. 德宗圖褚遂良等二十七人于凌烟閣. 宋仁宗修景靈宮, 奉安聖容, 畫勳臣. 高宗圖功臣于景靈之壁, 皇武殿, 太祖及趙普、曹彬, 大定殿, 太宗及薛居正、石熙載等, 其餘眞、仁、英、神, 亦
以君臣共安. 上曰, 奉安御容, 依宋制, 功臣圖畫, 采唐制: 同, 六月七日(丙申). 幸長生殿, 相安太祖眞與開國功臣圖畫之所也. 遂詣仁德殿獻壽, 極歡暮罷; 同, 六月二十五日(甲寅). 改長生殿爲思勳閣. 初, 太祖欲圖功臣之像于長生殿, 又令安御眞, 至是命禮曹稽古制. 禮曹上言, 唯周畫周公抱成王之圖耳. 漢之靈臺、唐之凌烟, 只畫功臣, 未有安御眞者. 上曰, 是國初不考古事, 而徒以功臣賜書有曰, ‘立閣圖形’, 故成此殿也. 且以前朝眞影殿觀之, 則太祖獨入, 而功臣不與焉. 古事旣如此, 我國雖小, 凡所施爲, 必師古昔. 君臣共安, 若無古典, 當毁殿, 而只倣凌烟之制, 以掛功臣之像耳. 議政府稽漢、唐古事, 啓之亦如此, 誠是也. 然太祖之意旣如彼, 而毁殿置閣, 似未便也, 史筆亦可懼也. 若太祖所建, 在乎改與未改之間, 則當存之耳. 卿等更議可否以聞. 星山君李稷曰, 若以義起, 則可存. 不爾, 何嫌於毁哉. 於是, 改殿爲閣, 號曰思勳. 仍敎之曰, 開國功臣不知此義者, 將謂我廢太祖之志, 宜諭之.
21)『세종실록』, 10년(1428) 12월 9일(병술). 상림원(上林園)에서 “서울 안의 과수원으로는 다만 창덕궁 서쪽의 좁은 땅을 쓰고 있어 각종 과목을 널리 재배하지 못하여 국가의 수용에도부족하니, 연희궁(衍禧宮)과 장생전(長生殿), 연화원(蓮花院) 등의 기지(基地)에도 아울러 이를심게 하소서(京中果園, 只用昌德宮西窄地, 故諸種果木, 未得廣植, 國用不足, 請於衍禧宮、長生殿、蓮花院基地, 幷植之)”라고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1, 경도(京都), 「장생전(長生殿)」 항목에서 ‘장생전’은 세종 14년에 창설하고 동원
생전은 경복궁 밖의 인왕산 아래 장의동(藏義洞)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22) 따라서 고려시대의 공신상이 사후
사찰에 봉안된 경우가 많아 불교적인 맥락의 제의적 성격이 강했던 것과 달
리,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상은 유교적인 공신상의 고전적 전범이라 할 수 있
는 한대의 기린각과 당대의 능연각 전통을 보다 충실히 따른 유교적 맥락의
공신상으로서 제의적 성격보다 정교적 성격이 더 크고 핵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장생전의 공신상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잦은 변란과
정변으로 인해 적지 않은 개국공신들이 역적으로 처단되며 또 다른 공신들이
나타나 다시 새로운 공신상을 그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23) 국초에 경황없
이 추진하는 과정에서 태조어진과 공신상을 같이 거는 비례(非禮)를 범했던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축소 개편과 게시 중지 등의 변모를 거듭하다 결국 공
신각 자체가 폐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태종 11년(1411)에 태조어진을 제외한 공신상만 게시하여 장생전을 ‘사훈각(思勳閣)’으로 개칭하고, 태종대 또는세종대에 공신 관련 업무를 담당해 온 공신도감을 충훈사(忠勳司)로 개편한뒤, 세조대에 다시 충훈사를 충훈부(忠勳府, 1466)로 확대 개편하고 관사를북부 광화방(廣化坊)으로 이전 신축하여 공신 관련 업무를 모두 통합 관리했다.
그리고 그 후 연산군 갑자년(1504)에 아예 혁파되었다가 중종 초년에 다
시 중부 관인방(寬仁坊)에 재창건되는 큰 변화를 겪었다. 더구나 국초에 이미
공신상을 게시했던 공신각이 폐지되며 세종 10년(1428) 이전에 공신상을 게
시했던 장생전이 훼철되고 상림원의 원림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세종 14
년(1432)에는 ‘장생전’이 왕실의 관재(棺材)를 보관하는 관서로 바뀌며 공신상
을 게시하거나 보관할 장소가 없게 되자 공신상은 공신들에게 하사해주고 충
(東園)의 비기(秘器), 곧 관곽(棺槨)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세종 14년에는 장생전이 명칭만 남은 채 내용은 전혀 다른 관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22) 남재(南在, 1351-1419)의 『구정선생유고』에서는 장생전이 북부(北部) 통명방(通明坊)에 건립되었다고 하였는데, 현재 통명방의 위치는 정확하게 고증하기 어렵다. 그런데 『태종실록』의 18년(1418) 4월6일(병술)기사에서 하윤(河崙)이 일찍이 “어느 시대인들 공신이 없겠는가?대대로 공신이 있어 수시로 전각을 세운다면, 비록 장의동(藏義洞)의 땅이 가득 차더라도 부족할 것이다(何代無功臣? 代有功臣, 而隨作殿閣, 則雖滿藏義洞地而不足矣)”라고 말했던 것은장생전이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의 장의동 부근에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세종실록』, 3년(1421) 7월 18일(무인) 기사에서 좌의정 박은(朴誾)이 일찍이 “장생전은 국도 서쪽에 있어 종묘와 떨어져 있으니, 그 곳을 4조(四祖)의 전(殿)으로 정하기를 청합니다(長生殿在國之西, 與宗廟隔, 請以爲四祖殿)라고 건의했다고 말한 것도 장생전이 경복궁 밖에 있었음을시사해준다.
23) 『定宗實錄』, 一年(1399) 八月十二日(己酉). 功臣都監進御容及定社功臣影子.
훈부에는 공신들의 제명록(題名錄)만 보관하는 방식으로 제도 자체가 근본적
으로 바뀌었다.24)
그런데 공신각의 폐지와 공신상의 반사(頒賜)는 중앙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교적 의미는 다소 약화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공신상이 전국각지로 확산 봉안되는 결과를 가져오며 공신상의 정교적 감계
기능과 효과가 오히려 공간적으로 더욱 확장되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공신으로 책록되면 국가적 차원에서 4대가 넘어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불천위(不遷位)로 공인되어 정교적 의미가 시간
적으로 영구히 확장되었기 때문에 공간적 확장 효과도 더욱 배가되었다.
이처럼 공신상은 국가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정교적 성격이 핵심
이기 때문에 도상도 관료의 공식적인 정장(正裝)으로서 정치적 권위와 위계
가 잘 드러난 상복(常服) 차림으로 그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리하여 단령(團
領)을 입고 오사모(烏紗帽)를 쓴 뒤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胸背)와 각대(角帶)
를 찬 채 교의자(交椅子)에 단정히 앉아서 두 발을 각답(脚踏)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은 소매 안에 넣어 공수(拱手)함으로써 매우 화려하고 장엄하되 지극히
공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와 같은 복식과 도상은 기본적으로조선 초기의 국가 운영 체제와 문물 정비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명나라의 관복과 초상화 양식을 수용한 뒤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명나라의 관료상이 대개 교의자에 호피나 비단을 걸어 화려하게 장식한 뒤 정면으로 앉아서 양손을 드러낸 채 한
손은 무릎을 짚고 한 손은 품대를 잡아 매우 자유롭고 현시적인 자세를 취하
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조선 초중기의 공신상은 상대적으
로 국왕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유교적 의례성과 정교적 감계성이 매우 강
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신상은 국가적 차원에서 최고 수준의 화원화가에 의해 그려져 정교
적 의미가 더욱 배가되고 조형적 영향력도 그만큼 더 컸기 때문에 정교성이
조형성 안에 깊이 내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 초기 15, 16세기의
공신상은 임진왜란(1592-1598)으로 거의 소실되어 그 실상을 자세히 살피기
24)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 京都 下, 「忠勳府」 所載 權擥(1416-1465) 撰 ‘忠勳府記文’:張維(1587-1638), 『谿谷集』, 卷八, 「忠勳府十九功臣題名版記」: 李頤命(1658-1722), 『疎齋集』, 卷十, 「紀功閣記」. 이 세 가지 기록은 충훈부에 공신상을 게시하고 있거나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장유와 이이명이 충훈부에는 제명록(題名錄)만 존재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전게 권혁산, 「조선중기 功臣畵像에 관한 연구」 참조.
어려운데,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상>과 <오자치(吳自治, 15세기 중후
반) 상>은 조선 초기 공신상의 모습을 전해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신숙주는 문관 3품용의 백한흉배(白鷳胸背)가 달린 녹색 단령을 입어 좌익공
신상(佐翼功臣像)>(1453)으로 추정되고, 오자치는 무관 2품용의 호표흉배(虎
豹胸背)가 달린 아청색(鴉靑色) 단령을 입어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1476)
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두 상은 단령에는 무늬가 없지만 대형 흉배를 직
접 금실로 수놓은 국초의 복제를 보여주어 주목되는데, 목과 치마의 트임 사
이로 단령의 안감은 물론 단령 속에 받쳐 입은 철릭(帖裏)의 자색과 적색, 녹
색 자락을 화려하게 강조하여 관복과 공신상의 정치적 위계와 사회적 존엄성
이 매우 효과적으로 시각화되어 있다. 15세기 후반의 <오자치 상>은 단령의
안감과 철릭에도 문양이 그려져 있어 이러한 효과가 더욱 화려하게 부각되며
강조되어 있다.
이에 비해 17세기 전반의 중기 공신상은 전반적으로 평면적 조형이 강조되
며 양식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바닥 전체에 호화로운 기하학적 문양
의 채전(彩氈)이 깔리고 흉배는 화려한 오색 자수 흉배로 바뀌었으며, 단령과
사모에도 운문(雲紋)이나 화문(花紋)이 묘사되어 초기 공신상보다 더욱 화려
한 장식성이 강조되어 있다. 선무공신상(宣武功臣像)>(1604)으로 그려진 <송
언신(宋言愼, 1542-1612) 상>과 정사공신상(靖社功臣像)>(1624)으로 그려진
<이시방(李時昉, 1594-1660) 상>(도판 4)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
적인 예이다. 채전이 본래 명나라에서는 황제상에만 사용되고 관료상에는 사
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국초의 15세기에는 어진에만 사용되
고 공신상의 경우는 16세기초의 정국공신(靖國功臣, 1506)인 <유순정(柳順汀,
1459-1512) 상>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조선 중기에
성리학이 심화되고 저변화되며 양반 관료제와 신권(臣權)이 더욱 강화됨으로
써 사회적 권위가 점증해갔던 현상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
다.
이처럼 공신상은 정교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정국의 변동에 따라 정치적
부침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과 기사환국(己巳
換局, 1689),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처럼 정국이 반전되거나 범역(犯逆)의
죄를 지어 공신 책록이 삭훈되면 공신상을 회수하여 충훈부나 대궐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각하는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
다.
반면에 충절이 높아 널리 추앙받은 공신들의 초상화는 초상화의 전범으
로 인식되고 후대에도 그 정치적 의미와 예술적 영향이 계속 확대되었다. 가
령 숙종 14년(1688)에 <태조 어진>을 모사할 때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정국
공신 <유순정 상>을 궁중으로 들여오게 하여 군신(君臣)이 함께 열람하고
충절을 기린 뒤, 이를 모사(摹寫)하는 시험을 통해 어진화사(御眞畵師)를 선
발하고 어진화사가 그린 공신상을 후손에게 하사했던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
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조선후기에 어진과 공신상을 그리는 하나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영조와 정조도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이시백(李時白,1581-1660), 이후원(李厚源, 1598-1660), 김석주(金錫冑, 1634-1684) 같은 명신들의 공신상을 들여다가 열람하거나 모사하도록 했으며, 김석주의 후손 김기장(金基長, 1741-1786)의 예에서 보듯 공신상을 가져온 후손에게는 관직을 하사해 주기도 했다.25)
다만, 조선 후기에는 정치적 안정으로 정변이 적고 공신 책록이 드물어 상
대적으로 공신상이 많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 대신 숙종과 영조의 탕평정치
와 왕권정치로 국왕권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왕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갈 정도로 장수하여 기로소의 권위가 커지며 기로상(耆老像)이 발달하고
중시되었다. 숙종 45년(1719)과 영조 20년(1744)에 숙종과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가며 대대적인 행사를 열고 이를 기념한 기록화를 그리며 기로대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던 《기사계첩(耆社契帖)》(도판 5)과 《기사경회첩(耆社
慶會帖)》은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후 조선후기에는
기로소에 들어가면 기로도상을 그려주는 것이 거의 하나의 관례처럼 계승되
었다.
그리고 왕권강화를 통한 왕권정치의 맥락에서 어진 도사가 중시되고
발달하며 어진도사 과정에서 충을 상징하는 공신상과 기로상이 많이 열람되
고 참고 되며 초상화에 담긴 정교적 의미가 매우 부각되었다. 또한 김창집(金
昌集, 1648-1722)과 이정보(李鼎輔, 1693-1766),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예에서 보듯, 정치적 비중이 큰 핵심적인 근신에게는 어진을 그린 주관화사
를 시켜 초상화를 그려주는 특별한 성은을 내렸는데, 이는 공신상과 기로상
보다도 더욱 큰 정교적 의미가 담긴 초상화로 인식되었다. 특히 가장 강력한
왕권정치를 실시한 정조는 천리대학 소장의 《정조어제근신초상첩(正祖御製
近臣肖像帖)》에서 보듯, 핵심적인 근신(近臣)들에게 수없이 많은 초상화를
그려주고 초상화찬(肖像畵贊)까지 지어서 직접 초상화 위에 어필(御筆)로 써
서 내려 초상화의 정교적 의미가 더욱 부각되고 강조되었다.26)
25) Kang Kwanshik, 전게 Literati Portraiture of the Joseon Dynasty.
26) 강관식, 전게 「털과 눈」.
Ⅳ. 수기(修己)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는 성리학자들이 학문적, 정치적 스승으로
큰 영향을 미쳐 성리학자들의 초상화가 매우 중시되었다. 다만 북송대 이래
성리학자들은 상장례(喪葬禮)에서 영정을 사용하는 것은 고례(古禮)에는 없었
던 것이나 후대의 불교적 속례(俗禮)로서 성행한 것이라고 보고 이를 이단시
하며 신주 중심의 유교적 제의로 전환시켜 나가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초중
기의 성리학자들은 사적으로 초상화 그리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많았다.27)
그러나 17세기 중후반경을 경계로 하여 성리학이 토착화되고 신주 중심의 주
자가례가 일반화되자 이러한 의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
히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학계와 정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우암
(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주자(朱子, 1130-1200)가 일찍이 송대 성
리학의 기초를 다진 선현들의 초상화를 첨배하며 수기적 의미를 강조하는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을 짓는 것은 물론 스스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
리게 한 뒤 초상화를 보며 ‘자경(自警)’ 문을 써서 초상화의 수기적(修己的)
의미를 강조했던 것을 본받아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자경’ 문을 써서 초
상화에 담긴 성리학적 수기의 의미를 재인식하며 이를 매우 중시함으로써 이
러한 의식 변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주자학 연구가 심화되고 토착화되어 나가던 맥락에서 이 무렵을 전후
하여 주자가 일찍이 신주와 영정을 함께 봉안하는 제의적 효용성과 세속적
관습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던 현실적 제의론을 새롭게 주목하고 초상화에 담
긴 수기적 의미와 제의적 의미는 물론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붕당론적 맥락
의 정교적 의미까지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의 숙종대 이
후에는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 거의 대부분 초상화를 그리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수기적 성격과 제의적 의미는 물론 정교적 효과가 큰 유학자들의
초상화가 성리학적 의례문화의 하나로 정착되며 크게 성행했다. 그 결과 조
선후기에는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복식 및 미감이 반영되어 수기적 의미가 강
조된 독특한 초상화가 하나의 장르를 이룰 정도로 크게 성행했다.28)
27) 육정임, 「송대 조상제사와 제례의 재구상-계급의 표상에서 종족결집의 수단으로」, 『한국사학보』 27, 고려사학회, 2007, pp.313-349: 강관식, 전게 「털과 눈」.
28) 강관식, 전게 「털과 눈」.
물론 성리학은 수기를 핵심으로 삼기 때문에 초상화에 대한 수기적 태도도 성리학이 수용되던 여말 선초부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가령 고려 말에
정몽주와 함께 절의를 지키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에 의해 장살(杖殺)
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오직 두
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수양하니, 그런대로 마음을 속이지는 않는다 하리라”고
쓴 화상찬은 그러한 모습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29) 그러나 이숭인의 초상화
가 그려지던 여말 선초는 아직 초상화의 존재론적 맥락이 근본적으로 불교적
성격의 제의론적 의미가 컸던 시대이다. 이숭인이 지암(止菴)이라는 영남지방
의 승려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리고, 이숭인의 초상화가 성주의 선석사와 안봉
사의 영당에 봉안되어 승려들이 관리했던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30) 따라서
이는 근본적으로 불교적인 맥락의 제의론을 넘어서며 성리학적 맥락에서 초
상화의 제의적 의미를 부정한 뒤, 다시 성리학적 맥락의 수기적 의미를 통해
성리학적인 맥락의 제의적 억압을 초극하고 초상화를 다시 성리학적인 맥락
에서 재인식하고 재수용한 17세기 성리학자들의 초상화에 담긴 수기적 태도
나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숭인의 시대는 초상화가 기본적으로 제의적 맥락 속에 존재하
는 제향의 대상이었고 제의의 성격도 불교적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퇴계 이
황이 소수서원에 봉안된 안향 영정에 대한 조두(俎豆) 천향(薦享)의 유교적
제향도 금지하고 첨배만 허용했던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핵심적인 제의의 대상이 신주로 바뀜으로써 초상화는 제향의
대상이라기보다도 수기적 맥락에 존재하는 첨배의 대상으로 그 핵심적인 성
격이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상화의 수기적 맥락과 제의적 맥락은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초상화를 둘러싼 제의
적 맥락과 수기적 맥락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불교적인 성격과 유교적인 성격
차이를 상징하는 측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맥락 안에서도 신주
를 중심으로 한 정례(正禮)와 초상화를 중심으로 한 속례(俗禮)의 차이가 존
재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29) 李崇仁, 『陶隱集』, 卷五, 「鄕僧止菴寫余陋眞, 因作讚」. 狀貌卑柔, 婦人之儔. 章句雕刻, 童子之學. 若擬諸達可之卓越, 子虛之縝密, 天民之精敏, 仲臨之俊逸, 可遠之溫雅, 宗之之諧博, 所謂碔砆之與美玉也. 雖然托迹於東國, 喜談於中原. 或擯瘴海之濱, 而無所加慼, 或游岩廊之上, 而無所加欣. 惟其惕然而自修, 庶幾不欺於心君乎.
30) 윤진영, 전게 「성주이씨 가문의 초상화」.
그리하여 성리학자들의 초상화는 대개 심의(深衣)와 복건(幅巾) 차림의 유
복상(儒服像)으로 그려진 뒤 성리학자들이 장수(藏守)하고 강학(講學)하던 영
당(影堂)과 서원(書院) 등에 봉안되어 학문의 스승으로 숭배되며 수기적 의미가 중시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우암 송시열의 사후 그가 은거하고 강학하던 곳에 서원을 세우고 송시열의 심의 복건상을 봉안했던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송시열이 은거하고 강학하던 속리산의 화양서당(華陽書堂)에 그가 평소 사용했던 서책과 기물들을 그대로 보존한 채 초상화를 걸어놓고 생존시 모습처럼 꾸며놓은 뒤 제자와 후학들이마치 생전에 스승을 배알하듯 첨배했던 것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31)
숙종 9년(1683)에 화원 한시각(韓時覺, 1621-?)이 그린 종가 소장의 <송시열
상>과 18세기 후반에 창의적으로 이모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송시열
상>(도판 6)은 이러한 모습의 일단을 잘 전해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
다.
송시열은 『예기(禮記)』와 『주자가례』는 물론 <주자상(朱子像)>의 모습
을 따라 정통 주자성리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교의적(敎義的) 도상(圖
像)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세포(白細布)에 검은 단을 댄 심의를 입고 검
은 복건을 쓴 뒤, 흰색과 검은색이 결합된 대대(大帶)를 매고 양손을 공수(拱
手)한 채 읍하고 서있는 매우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대
적으로 형태를 단순화하고 가능한 채색을 배제한 채 흑백 대비를 강조함으로
써 금욕주의적이고 자성적인 성찰의 수기적 의미를 강조한 성리학적 미감의
독특한 풍격을 강하게 풍겨준다.
특히 18세기 후반에 창의적으로 이모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송시열 상>은
초상화 안에 송시열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반성적 성찰을 다짐하며 ‘스스
로 경계한다’고 쓴 ‘자경(自警)’ 문이 해정하고 단아한 필치로 쓰여 있어 이와
같은 수기적 유현상(儒賢像)의 본질적 특징과 내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 준
다.
사슴의 무리와 더불어
쑥대로 엮은 초가집에 살며,
창은 밝고 인적도 고요한데,
주림을 참으며 책을 보았건만,
네 모습은 초췌하고 네 학문은 공소해
하늘의 명을 저버리고 성인의 말씀을 모독했으니,
진정으로 너는 책벌레에 불과하도다.32)
송시열은 서슬이 퍼럴 정도로 자신을 자책하며 초상화의 수기적 의미를 매
우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송시열의 심의상은 그의 학문을 계승한 후학들
에 의해 수없이 모사되어 전국의 영당과 서원, 사당 등에 봉안되며 학문적,
정치적, 제의적 의미가 더욱 확대되어 나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송시열
상>은 이처럼 18세기 들어 최고의 성리학자로 추앙되고 정조대에는 ‘송자(宋
子)’로 존칭되며 ‘주자(朱子)’의 반열에 까지 오를 정도로 더욱 이상화되고 이
념화되어 나가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초상화 위에 정조가 2년(1778)에
사당의 송시열 상에 바친 ‘치제문(致祭文)’이 장중하고 화려한 예서체로 아름
답게 쓰여 있어 수기적 의미의 외연이 점차 확대되어 나가며 제의적 맥락과
정교적 맥락, 수기적 맥락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나가던 모습을 종합적으로
잘 보여주어 주목된다.
천추(千秋)에 드높은 절개와 의리,
내 평생 존경하고 중히 여겼네.
선왕(先王)들께서도 누차 숭상하셨거늘,
선비들 뉘라서 우러르지 않으랴.
하는 말 모두 이치에 맞아,
거룩한 이학(理學)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나,
경륜(經綸)과 사업(事業)을 다하지 못한 채,
애통하게 그만 말세를 만났네.
서울 안에 사당(祠堂)이 있어,
유상(遺像)이 엄숙하고 드높은데,
선비들 마당에 가득 모였으니,
승지(承旨)를 보내 술 한 잔 올리네.33)
송시열 이후 18세기의 조선후기는 주자성리학 계열의 송시열 학풍을 계승
한 산림학자(山林學者)들이 학계와 정계의 세도(世道)를 주도했기 때문에 성
리학자의 유복상이 하나의 특별한 장르를 이룰 정도로 매우 중시되며 크게
유행했다. 이들은 대개 주자와 송시열이 애호한 심의상을 충실히 계승한 경
우가 많았지만, 사상적 차이에 따른 학파적 분기에 따라 새로운 의관(衣冠)을
착용하기도 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학풍의 변모와 함께 보다 현실적이고
정취적이며 장식적인 취향을 드러내기도 하는 등 다양하고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주며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초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령 송시열의 뛰어난 제자였으나 사상적, 정치적 차이로 스승과 결별한 뒤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의 노론(老論)과 대립했던 명재(明齋) 윤증
(尹拯, 1629-1714)은 실절(失節)과 배사(背師)의 멍에로 인한 심리적 상처와
부담 때문에 심의와 복건의 교의적 도상 대신 사대부의 가장 기본적 의관인
직령(直領; 道袍)과 방건(方巾)을 착용함으로써 수기적 의미를 더욱 금욕주의
적으로 극대화 시킨 차별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윤증과 함께 소론의 영
수로 활약했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심의와 복건을 따랐
지만 『예기』심의 조목에서 강조한 ‘방(方: 모남)’의 의미를 축자적으로 강
조해 주자나 송시열과 달리 옷깃을 완전히 사각형으로 만든 ‘방령(方領)’ 심
의를 착용함으로써 탈주자학(脫朱子學)을 지향한 사상적 차별성을 보여주었
다.
반면에 송시열의 학맥을 계승한 노론 계열의 권상하(權尙夏, 1641-1721)와
한원진(韓元震, 1682-1751), 김원행(金元行, 1702-1772), 김이안(金履安, 1722-1791) 등은 송시열의 심의상과 거의 동일한 도상을 택하되 18세기 중후반으
로 갈수록 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상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윤봉구(尹鳳九, 1683-1768)와 이채(李采, 1745-1820)는 심의와 복건 대신 난삼
(襴衫)이나 정자관(程子冠)을 착용하고 화사한 색채 감각까지 가미해 조선후
기의 다채로운 변화를 더욱 폭넓게 보여주었다.34)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의 고족(高足)이었던 윤봉구가 이와 같은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스스로 경계한다고 쓴 ‘자경(自警)’ 문에서 “너는 머리가 둥글고 발이 모나니,천지의 바른 기(氣)를 얻었고, 너의 삶은 곧으니, 또한 천지가 부여해주었구
나”라고 말했던 것은 그러한 변화 속에 담긴 새로운 시선을 잘 보여준다(도7). 당대의 대표적 유현의 하나로 일컬어졌던 윤봉구의 유복상은 이제 송시열계열의 서인이 집권세력으로 성장하며 세도를 담당했기 때문인 듯, 자신을 긍정적으로 관조하고 성찰함으로써 수기를 도와주고 확인하며 다짐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전환되고, 나아가 그러한 자아 정체성의 상징으로서 다분히권력화되고 제의화되어 가기도 했던 새로운 현실적 맥락의 수기상을 보여준다.35)
31) 宋時烈, 『宋子大全』, 附錄 卷十一, 「年譜十」. 崇禎六十八年乙亥(1695). 湖西諸生, 建書院于華陽. 丙子(1696). 上疏請額, 該曹以先有梅谷,考巖,龍津書院, 而疊設有禁, 難於回啓. 筵臣李畬陳白, 以爲宋某甚愛華陽水石, 築室藏修, 講道其中, 實同朱子之武夷. 旣今爲某設院, 則華陽比他尤重, 宜有特恩. 上敎曰, 雖有疊設之禁, 奉朝賀平日禮遇殊異, 與他儒賢不同. 華陽又非他處之比, 刱設書院, 在所不已, 特命賜額華陽, 遣官致祭. 初建于洞外萬景臺上, 庚寅(1710), 移建于洞中萬東廟之下, 春秋釋菜, 行於皇廟享祀之同日. 院下數武許有先生書齋, 書冊硯匣杖簇璣衡等物
俱在, 始奉眞像于齋中, 後入奉書院. 강관식, 전게 「명재 윤증 초상의 제작 과정과 정치적 함의」 및 「명재 윤증 유상 이모사의 조형적, 제의적, 정치적 해석」.
32) 宋時烈, 『宋子大全』, 卷一百五十, 贊, 書畫像自警. 麋鹿之群, 蓬蓽之廬. 窓明人靜, 忍飢看書.爾形枯臞, 爾學空疏. 帝衷爾負, 聖言爾侮. 宜爾置之, 蠹魚之伍.
33) 御製, 正廟朝. 節義千秋高, 平生我敬重. 烈祖屢褒崇, 士林孰不聳. 橫竪皆當理, 蔚爲理學宗. 不盡經淪業, 吁嗟叔季逢. 洛中祠屋在, 遺像肅淸高. 衿佩盈庭會, 承宣奠一醪, 崇禎紀元後再戊戌三月, 追製於萬機之暇.
34) Kang Kwanshik, 전게 Literati Portraiture of the Joseon Dynasty.
35) 尹鳳九, 屛溪集, 卷四十四, 「書畵像自警」. 爾頭圓足方, 受天地之正氣. 爾之生也直, 亦天地之所畀. 爾戰兢戒懼, 敢或毁或墜. 爾無忘明誠之訓兮, 曾奉規於先師. 爾毋曰吾衰之甚兮, 惟日新而孜孜. 강관식, 전게 「조선시대 초상화의 圖像과 心像」 참조.
Ⅴ. 비망(備忘)
17세기 중후반경 성리학이 보편화되고 토착화되며 조선의 성리학적 풍토에
서 비롯된 초상화에 대한 제의적 억압을 넘어서서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들까지 초상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자, 조선후기에는
초상화에 담긴 수기적 의미와 정교적 의미, 제의적 의미 같은 다양한 맥락의
의미가 주목되며 초상화가 매우 성행했다. 그리하여 국왕과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은 물론 일반 사인 관료들과 묵객, 중인(中人), 기녀(妓女)들에 이
르기까지 초상화가 광범위하게 그려지며 전사회적으로 유행했다. 조선후기에
는 특히 일반 사인 관료들과 묵객들의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이러한 초
상화들은 어진이나 공신상, 유현상(儒賢像)처럼 제의적 의미나 정교적 의미,
수기적 의미같이 특별한 맥락의 특수한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초상화의 보다 근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존
재론적 욕망이 잘 드러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초상
화를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비망(備忘)’적 의미가 잘 드러난 초상화로 범주화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망’적 맥락의 초상화는 주인공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 또는
‘존재했음’에 대한 즉자적(卽自的)이고 대자적(對自的)인 긍정과 확인의 존재
론적 욕망이 반영된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는 ‘부재’와 ‘망각’
에 대한 두려움과 아쉬움에 대한 자의식과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서 ‘비망’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존재론
적 욕망으로서의 비망적 의미는 제의적 맥락이나 정교적 맥락, 수기적 맥락
에서 그려진 어진이나 공신상, 유현상에도 일정 부분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의미는 그 경계를 명확히 나누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특별히 제의적 맥락이나 정교적 맥락, 수기적 맥락과 직접적인 연
관성이 없거나 그러한 맥락이 특별히 강조되지 않고 다소 막연한 존재론적
욕망에서 그려진 일반 사인 관료들의 초상화는 이러한 ‘비망(備忘)’적 의미가
더욱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별도의 유형으로 구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에 대제학을 지낸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이 자신의 초상화를보고 쓴 다음과 같은 글은 이러한 ‘비망’적 초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 그 속에 담긴 실존의식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도판8)
"경술년(영조 6년, 1730) 가을에 동호자(東湖子: 조관빈)가 용산(龍山)에서 우협(牛峽)으로 돌아가 진재해(秦再奚, 1691-1769)를 시켜 그 화상(畫像)을 그리니 꼭 닮았다. 몸이 이미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였거늘 화상은또 무엇 때문에 그렸는가? 더구나 이 일은 덕업(德業)과 충절이 후대에전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거늘, 동호자가 이를 한 것은또한 망령된 짓이 아닌가? 그러나 그 사람이 오히려 의로워 스스로 깨끗하고, 가난하지만 또한 슬퍼하지 않으며, 맑고 파리하며 간소하고 진
솔하여 모습이 그 마음과 같으니, 그 정신을 전하는 화상을 한 폭 그려서 먼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하는 것은 그 마음을 헤아려 이해할 수 있고 그 뜻이 또한 슬퍼할 만하다. 진재해는 역적(逆賊) 목호룡(睦虎龍, 1684-1724)의 화상을 그리지 않은 사람으로 이름이 난 화가이니, 그의 붓을 취한 것은 또한 그 사람을 취하고자 한 뜻이라 할 수 있다. 찬(贊)하여 말한다.
너의 얼굴은 어찌 그리 수척하고,
너의 거동은 어찌 그리 서투냐?
또렷하구나 그 눈이여!
꼿꼿하구나 그 골격이여!
나물 먹고 물 마시니,
산림(山林)의 모습이로다.
붉은 비단옷을 입고 황금 도장(圖章)을 찼으니,
재상(宰相)의 모습이로다.
슬퍼하는 것이 있는 듯한데,
슬픈 것이 무슨 뜻이냐?
조선시대 초상화를 읽는 다섯 가지 코드 157
근심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근심하는 것이 무슨 일이냐?
어진가? 그렇지 아니 한가?
충성스러운가? 그렇지 아니 한가?
먼 훗날 안목 있는 사람은,
이 그림이 칠분(七分: 비슷한 모습)임을 알리라."36)
조관빈은 재상급의 대제학을 지낸 고위 관료였지만 공신도 아니고 성리학
자를 자임한 유학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는 특별히 국가적 차원의
정교적 맥락이나 학파적 차원의 수기적 맥락에서 그려진 초상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스스로 초상화는 “덕업과 충절이 후대에 전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거늘, 스스로 이를 한 것은 망령된 짓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던 것은 그에 대한 자책적 자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는 자신에 대해 “그 사람이 오히려 의로워 스스로 깨끗하고, 가난하지만 또한
슬퍼하지 않으며, 맑고 파리하며 간소하고 진솔하여 그 모습이 그 마음과 같
으니, 그 정신을 전하는 화상을 한 폭 그려서 먼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하는
것은 그 마음을 헤아려 이해할 수 있고 그 뜻이 또한 슬퍼할 만하다”고 하며
자신을 긍정하고 확인하는 존재론적 욕망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
에서 그의 초상화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남겨 먼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비망
적 맥락의 의미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일찍이 성리학적 제의론의 억압으로 어진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가
어진이 아니면 후손들이 선왕의 용안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는 신하들의 간
언을 듣고 생각을 바꾼 뒤, 이왕 그릴 바에는 젊어서 그리는 것이 좋다고 하
며 세종 25년(1443)에 자신은 물론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어진까
지 적극적으로 그려 조선왕조 오백여년 동안 유일하게 생전에 왕후의 초상화
를 그린 것도 유사한 존재론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7) 또
한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 산림(山林) 유현(儒賢)이었던 미호(渼湖) 김원행
(金元行, 1702-1772)이 초상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거절했던 조선 중기의
36) 趙觀彬, 悔軒集, 卷十五, 「畫像自贊幷序」. 庚戌秋, 東湖子將自龍山, 還入牛峽, 使秦再奚, 圖其像惟肖. 身旣欲逃, 像亦何爲. 况此事, 非德業忠節足以傳於後者, 則不可爲也. 而東湖子乃爲之,無亦妄耶. 然其人也, 猶能義以自靖, 窮且不憫, 淸癯簡率, 貌如其心, 則其所以傳神一幅, 圖不朽於百世者, 情可恕, 而意可悲矣. 再奚是不貌賊虎者, 名畫師也, 取其筆, 亦取其人之意云爾. 贊曰, 爾貌何瘦, 爾儀何拙. 瞭然其目, 骯然其骨. 飯蔬飮水, 山野之相. 服緋拖金, 宰相之㨾. 若有所悲, 悲者甚意. 若有所憂, 憂者甚事. 賢耶未耶, 忠乎否乎. 百世具眼, 七分斯圖.
37) 강관식, 전게 「털과 눈」.
선배 성리학자들과 달리 여러 해에 걸쳐 여러 명의 화가를 바꾸어 가며 여러
번 초상화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렇게 하여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랑채인 추수헌(秋水軒)에 걸어 놓고 제자들과 함께
초상화의 선악(善惡)과 호오(好惡)를 평가하고 감식했던 것은 단순한 수기적
맥락과는 다른 존재론적 욕망이 반영된 비망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8)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이 “나는 아들이 없는데
이제 늙어 머지않아 죽을 터이니, 초상화를 한 벌 그려 세상에 남겨놓고 싶
다”고 하며 평소 친구처럼 지내던 지우재(之又齋) 정수영(鄭遂榮, 1743-1831)
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초상화의 비망적 맥락을 잘 보여주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9)
특히 조선후기의 18세기는 조선의 자존적 주체의식 아래 조선의 구체적 현
실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민족적 사실주의 화풍이 크게 대두되고, 청나라와
서양의 외래 화풍까지 수용하여 서양화의 투시법과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활
용함으로써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에는 이러한 회화적 조류 아래 일상적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실
적인 초상화가 발달하고 신분이나 품계는 물론 사상적, 정치적, 심미적 성향
에 따른 다양한 유형의 초상화가 다채롭게 그려졌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는
일반 사인 관료들과 묵객들의 구체적인 생활양식과 실존의식이 생생하게 반
영된 다양한 성격의 비망적 초상화가 실로 수준 높게 그려졌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초상화는 이처럼 18세기에 가장 많이 그려지
며 특히 발달했던 비망적 사인관료상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채제공은 당쟁의 여파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가 정
조의 탕평정치로 정승까지 올랐기 때문에 정치적 성공을 상징하는 관복상을
통해 자아 정체성을 영속화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관복상 - 선려한 적초의(赤綃衣)에 화려한 금관(金冠)을 쓴 뒤 패옥
(佩玉)을 달고 상아홀(象牙笏)을 든 가장 장엄한 대례복(大禮服) 차림의 조복
본(朝服本), 그리고 가장 공식적이고 대표적인 정장인 흑단령(黑團領) 차림의
상복본(常服本), 또한 제일 간편한 일상적 근무복인 홍단령(紅團領) 차림의
시복본(時服本)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매우 자랑스럽게 현시하며 기념했다.
38) 강관식, 전게 「조선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
39) 李森煥, 『少眉山房藏』, 卷六, 「書鄭君房松溪圖」. 吾友鄭君房, 博聞多識, 兼工書畵. 日訪我西湖之上, 余謂之曰, 余無子, 今老且死, 願留眞像一本留世, 子盍圖之. 그러나 정수영은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고 사양하고, 그 대신 이삼환의 상징적 초상으로 송계도(松溪圖)를 그려주었는데, 이 그림은 현재 문중에 소장되어 있으며 정조 12년(1788)의 관서(款書)가 있다.
그가 자신의 세 가지 관복상을 보고 쓴 찬문(贊文)에는 이러한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가령 그가 자신의 조복본 초상화(도판 9)를 보고 “고관(高官)의
띠를 늘어트리고 홀(笏)을 바로잡았으니, 결재한 것이 무슨 계책이었던가? 머
리털은 하얗고 얼굴은 주름졌으니, 이룬 것이 무슨 사업이었던가? 태어나 늙
어 죽을 때까지 태평하니, 나는 즐거운데 그대 또한 즐거운가?”라고 했던 것
은 특히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40) 채제공은 화려하고 존귀한 관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현시하며 이를 비망적으로 기념한 뒤, 영조와 정조
의 성은을 강조하고 관료로서 충심을 다했던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하며 이를
자부하고 있다. 이는 송시열과 권상하 같은 성리학자들이 정승의 고관을 지
냈지만 심의와 복건 차림의 유복상으로 자아 정체성을 형상화하고 자아를 비
판적으로 성찰하는 수기적 의미를 강조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41)
그 결과 채제공 상은 조선후기 관복상의 다양하고 화려한 모습까지 아름답게
보여주어 주목되는데, 서양화풍의 사실적인 투시법과 명암법을 정교하게 구
사하여 현실적인 생동감이 더욱 강하게 전해짐으로써 초상화의 비망적 의미
를 더욱 실감나게 보여준다.
정승을 지낸 채제공의 초상화가 조선후기 문신 관복상을 종합적으로 잘 보
여준다면, 포도대장을 지낸 이창운(李昌運, 1713-1791)의 초상화는 무신(武臣)
관복상을 잘 보여준다.(도판 10) 공신상은 통상 흑단령의 상복 차림으로 그렸
기 때문에 학이나 기러기 같은 날짐승 흉배를 착용한 문관들과 달리 무관들
은 호랑이와 표범, 사자 같은 길짐승 흉배를 달아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그러나 문관 우위의 사회적 분위기로 무관들도 문관용의 운학(雲鶴) 흉배
가 그려진 초상화를 선호하여 법으로 이를 금지할 정도였기 때문에 무관의
집무복인 군복 차림의 초상화는 매우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창운은 포도대장과 어영대장, 총융사 등의 군 요직을 두루 지낸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관 가문 출신답게 무신으로서의 자의식과 자부심이
강했던 듯, 구군복(具軍服)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현시하며
이를 비망적으로 기념하여 영속화했다. 그리하여 좁고 붉은 소매가 달린 아
청색(鴉靑色) 동달이 위에 자주색 전복(戰服)을 입고 공작 깃털과 패영(貝纓;
갓끈)이 달린 전립(戰笠)을 쓴 뒤, 허리에는 남색 전대(戰帶)를 매어 병부(兵
40) 蔡濟恭, 樊巖集, 卷五十八, 「自題寫眞贊」. 我是君耶? 君是我耶? 吾方患吾有吾身, 君胡爲兮復我. 垂紳正笏. 所決者何策? 髮白顔皺. 所成者何業? 生老死太平, 我樂而君亦樂否? 右朝服本.
41) 강관식, 전게 「조선시대 초상화의 圖像과 心像」.
符)와 패도(佩刀)를 차고 손에는 등채(藤策; 등나무 말채찍)를 들고 있는 최고
지휘관의 성대한 정장 차림을 잘 보여준다. 정조대의 사실적인 화풍으로 화
려하고 장엄한 군복이 더욱 아름답고 생생하게 전해져 비망적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에 반해 관료로서 고위직에 오르며 현달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학자
를 자임할 수 있는 대학자도 아닌 보통의 평범한 사인 관료들은 가장 간편한
평상복 차림의 도포(道袍)를 착용한 야복상(野服像)을 통해 꾸밈없고 진실한
인간적 모습으로 자신을 영속화하고자 했다. 관직은 겨우 하위직의 현감에
불과하나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1760) 같은 당대의 청류(淸流)
묵객(墨客)들과 교유하며 개결한 삶을 살았던 임매(任邁, 1711-1799)의 초상
화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도판 11). 임매는 옥색 도포를 입고 검은 복
건을 쓴 뒤 서안 앞에 앉아 장황(粧潢)이 아름다운 당판(唐板) 서질(書帙)과
권축(卷軸)은 물론 안경까지 늘어놓고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즐기는 문
인 묵객의 일상적이고 정취적인 모습으로 자아 정체성을 영속화했다. 그리고
초상화 안에 스스로 “서툴지만 오만한 듯하고, 좁지만 지조가 있으며, 게으르
고 산만하나 도리어 참모습에 가깝다”42)는 찬문을 써넣어 이러한 모습을 더
욱 강조했다.
군수(郡守)와 도정(都正)을 지내고 서화(書畵)를 즐긴 서직수(徐直修, 1735-
1811)가 사대부의 가장 간소한 평상복인 도포와 동파관을 착용하고 버선발로
돗자리 위에 읍하고 서있는 진솔하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영속화했던
것도 유사한 예라고 할 수 있다(도판 12). 그런데 서직수는 현륭원령(顯隆園
令)을 맡았던 정조 14년(1790)에 정조의 명으로 화성(華城) 용주사(龍珠寺)의
후불탱(後佛幀)을 그릴 때 같이 일했던 인연으로 당대 최고의 궁중화가이자
초상화가인 이명기(李命基, 1756-?)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金弘道, 1745-18
05이후)가 몸을 그린 최고 수준의 초상화를 그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초상
화 안에 “속되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자신의 “정신적 특징을 전혀 표
현하지 못했다”는 불평을 써놓았다.43) 이는 초상화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
더라도 주인공의 은밀하고 다중적인 내면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기도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42) 拙而似乎傲, 褊而抱乎介. 懶散而近乎眞, 問爾是何如人. 蓋所謂世間之陳人也乎. 葆和翁自贊, 玉局主人書.丁酉春, 韓生廷來寫.
43) 李命基畵面, 金弘道畵體, 兩人名於畵者, 而不能畵一片靈臺. 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名山雜記. 槪論其平生, 不俗也貴. 丙辰夏日, 十友軒六十二歲翁自評.
따라서 만약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릴 수 있다면 이러한 간극이 해소되
어 자신의 외적, 내적 정체성이 충실하게 반영된 가장 이상적인 차원의 비망
적 초상화를 그려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자화상이 내면 표현에 주력하고 특
히 이를 잘 표현할 수 있어 최고의 수기적 초상화이자 비망적 초상화로 일컬
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문인화가인 공재(恭齋) 윤
두서(尹斗緖, 1668-1715)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자화상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강세황은 의관(衣冠)이라는 외적 요소에 담긴 사
회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평상복인 도포를 입고 관복용의 오사모(烏
紗帽)를 쓴 매우 기이한 모습의 <자화상>(도판 13)을 그린 뒤, 초상화 안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는 오사모를 쓰고,
몸에는 야복(野服)을 걸쳤으니,
이로써 마음은 산림(山林)에 있되,
이름은 조정(朝廷)에 있음을 보이도다.
가슴에는 이유(二酉; 고대의 유명한 도서관)의 수천 장서(藏書)를 숨기고,
붓으로는 오악(五嶽; 동서남북 및 중앙의 신성한 5개의 큰 산)을 흔들지만,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내 스스로 즐길 뿐이다."44)
강세황은 당화(黨禍)로 인해 평생을 야인(野人)으로 지내며 학문과 예술로
자오(自娛)하다 만년에 이르러서야 탕평정치로 출사하여 재상급의 고위직에
오른 자신의 일생을 매우 ‘연극적인 분장’의 ‘연극적 도상’으로 상징화하며 기
념했다. 그리하여 그는 일반적인 화원출신의 초상화가들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표현하기 어려운 반관(半官) 반야(半野)의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자아
정체성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하며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예술적 자화상을
창조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일생을 매우 효과적으로 기념하며 영속
화했다. 조선시대의 사인관료들은 대개 산수자연을 배경으로 한 오랜 수학
과정을 거쳐 유교적 교양과 지식을 쌓은 뒤 과거를 통해 관직을 얻어 관료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통상 관복상과 야복상을 하나의 세트처럼 같이 그리는
44) 彼何人斯? 鬚眉晧白. 頂烏帽, 披野服. 於以見心山林, 而名朝籍. 胸藏二酉, 筆搖五嶽. 人那得知? 我自爲樂. 翁年七十, 翁號露竹. 其眞自寫, 其贊自作. 歲在玄黓攝提格.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강세황이 형상화한 반관(半官) 반야(半野)의 이중적
자의식은 어떤 면에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일반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이중
적 자의식의 근원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을 매우 상징적으로 영속화시켜준 것
이라고 할 수 있다.45)
Ⅵ. 주술(呪術)
초상화는 시각적 재현의 가상적 모본에 불과하나 주인공처럼 인식되고 소
통된다는 점에서 회화적 재현의 근원적 주술성(呪術性)을 잘 보여준다. 기실
초상화가 제의적 맥락과 정교적 맥락, 수기적 맥락, 비망적 맥락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주술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
서 주술성은 모든 초상화의 근원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초상화의 주술성은 ‘존재’와 ‘부재’ 의식이 특히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제의적
맥락과 비망적 맥락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많다. 가령 ‘부재’를
‘소환’하고자 하는 경우나 ‘부재’를 ‘영생’으로 영속화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역으로 ‘존재’를 ‘부재’로 무화시키고자 하는 경우, 초상화의 주술성은 마술적
인 힘과 능력을 발휘하며 더욱 핵심적인 의미로 부각된다.
이와 같은 초상화의 근원적 주술성은 고대부터 다양한 형태의 초상화를 통
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령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 안악3호분(357)과 덕흥리고분(408)의 묘주 초상은 주인공이 부재하나
가상적 모본의 초상화가 영생하면 주인공도 영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적
인 제의적 주술성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이 죽은
뒤에 친구였던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고(도판14), 조영복(趙榮福, 1672-1728)이 죽은 뒤에 동생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이 초상화를 그려 보내자 온 집안사람들이 통곡했던 것은46) 방금 전에 죽었
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듯한 의식을 불러일으켰던 초상화의 비망적 주술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가 임진왜란의 와중
에 적장 풍신수길(豊臣秀吉, 1536-1598)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활을 쏘아 명중
45) Kang Kwanshik, 전게 Literati Portraiture of the Joseon Dynasty.
46) 南泰膺, 聽竹畵史, 「畵史補錄, 下」. 恭齋與士人沈得經爲石交, 及得經死, 斗緖追作畵像, 無一毫差. 歸其家, 拂掛于壁, 渾舍驚泣, 如孫叔敖復生也; 承政院日記, 第1025冊, 英祖 24年(174
8), 1月24日. 上曰, 日前見趙榮祏所畵其兄榮福畵像, 則可謂絶筆矣. 以手按書案及其佩刀子之狀,尤爲善形容矣. (朴)文秀曰, 曾聞榮祏畵出其兄畵像之後, 其一家人, 皆痛哭云矣.
시킨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던 것은 생명까지 빼앗으며 ‘존재’를 ‘부재’로 무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력적 주술성을 보여준다.47) 그리고 강릉 집경전
(集慶殿)의 화재로 태조 어진이 불타자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가
소복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린 채 3일 동안 곡했던 것은48) 심지어 죽어서 부
재하는 사람까지 다시 죽게 만들어 부재조차 더욱 무화시키는 것 같은 의식
을 불러일으켰던 초상화의 놀라운 마술적 주술성을 보여준다.49)
초상화에 담긴 이와 같은 근원적이고 일반적인 주술성은 특별한 영웅적 인
물의 경우, 또는 특수한 상황 속의 특별한 맥락의 경우, 더욱 신령한 주술적
의미가 부여되며 무격적(巫格的) 차원으로 전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리하여 무속 전통과 결합되어 제액(除厄)과 기복(祈福)의 신통력을 지닌 무신
도(巫神圖)의 일종처럼 발전하여 무속의 신상으로 수용되며 숭배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구국의 영웅이나 원통하게 죽임을 당한 위인의 경우는 국가적
재난이나 사회적 재앙, 개인적 불운이 닥쳤을 때 더욱 그와 같은 양상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상화의 주술성이 이처럼 무격적 의미로까지 발전한 것은 헌강왕(憲康王,
?-886) 때 역병을 물리치는 주술적 이미지로 숭배되었다는 『삼국유사』의
처용상(處容像)에서부터 엿볼 수 있어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50) 그런데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의하
면, 이러한 관습과 전통이 조선 초기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널리 행해져 민속
의 하나로 토착화되었다고 하여 주목된다.51)
47) 崔希亮, 逸翁集, 卷二, 「遺事」. 萬曆二十五年(宣廟三十年)丁酉, 公年三十八歲. 倭寇再猘, 宣廟命畵倭酋秀吉像, 揭而射之, 敎曰, 得中者賞職. 公正中其額, 上大喜, 特除興陽縣監. 秦弘燮, 韓國美術史資料集成(4)(一志社, 1996), 771쪽.
48) 仁祖實錄, 卷二十四, 九年(1631) 三月 辛巳 七日. 江陵集慶殿火, 卽太祖眞殿也. 禮曺啓曰,禮云, 有焚先人之室, 則三日哭. 故曰, 新宮火, 亦三日哭. 註曰, 先人之室, 宗廟也, 神主所入, 故曰新宮. 以此見之, 眞殿與宗廟無異, 影幀與神主一體, 自上似當素服, 率百官三日哭而止, 行慰安祭於宗廟太祖大王神位前, 遣官江陵, 亦設位行慰安祭, 看審失火之處, 然後眞殿參奉及守僕等, 各別議罪. 答曰, 依啓. 且慈殿亦當變服, 更議以啓. 回啓曰, (中略) 慈殿內殿嬪宮, 並進素服素膳,三日而止似當. 上從之.
49) 강관식, 전게 「조선시대 초상화의 도상과 심상」.
50) 김태곤, 『한국의 무신도』, 열화당, 1989.
51) 강관식, 전게 「조선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
세상에서 전하기를, 국초(國初)에 360개의 군읍(郡邑) 제도를 정한 뒤,
각각 그 읍에서 태어난 전대의 위인과 고관들 가운데 백성들에게 큰 덕
을 베푼 사람들을 성황신(城隍神)이라 부르고 정상(幀像: 족자로 만든신상)을 설치하여 제사지내게 하자, 백성들이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거
나 전염병이 번진다고 들리면 무리를 지어 찾아가 복을 빌었다고 한다.
지금도 순창군(淳昌郡)의 성황묘(城隍廟)에는 아직 고려의 평장사(平章
事)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의 상(像)이 있고, 담양부(潭陽府)에는 이
영간(李靈幹, 11세기 중반경)의 상이 있다고 한다.52)
설공검은 순창 출신으로 청렴하고 예(禮)를 좋아하여 명망이 높았고, 이영
간은 담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비술(秘術)에 통달하여 기적(奇蹟)을 많이 행
해 이름이 높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향읍에서 초상화를 그려 숭배하고 영웅
시되며 초상화에 주술적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일종의 무신도처럼 제액과 기
복의 대상으로까지 발전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의 초상화는 현존하지 않아
더 이상 자세한 실상은 알기 어렵다.
그런데 경남 진주 출신의 강민첨(姜民瞻, 963-1021)은 비록 후대의 발전된
양식으로 변형된 모본 형태로나마 초상화가 현대까지 진주의 사당에 전해져
와 그 실상의 일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어 주목된다.(도판 16)53) 특히 정조 1
4년(1790)에 표암 강세황이 이를 중모(重摹)할 때54) 현장을 목도하고 중모기
(重摹記)를 썼던 손자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은 강민첨의 초상화에 주술
적 의미가 부가되며 조선후기까지 숭배되던 내력과 양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
히 알려주어 더욱 주목된다.
예로부터 두 개의 초상이 있었는데, 하나는 진주성 밖에 사당을 짓고
받들어 춘추로 향사할 때 관청에서 제수를 공급했다. 또 하나는 고을 서
쪽 60리에 있는 우방사(牛芳寺)에 모셨는데, 절이 오래되어 무너져 십년
전에 옛 절 앞의 두방암(斗芳庵)으로 옮겨 모셨다. 사방의 인근 고을 사
람들이 대개 홍수나 가뭄, 질병, 기타 소원을 빌 때, 모두 사당 앞에 기
도를 올리면 곧 영험이 있어서 신령의 혜택이 미쳐 아름다운 복이 매우 컸다.
52) 黃胤錫, 『頤齋亂藁』, 卷十五, 英祖四十六年 庚寅(1770), 六月十八日壬辰. 世傳國初, 旣定三百六十郡邑之制, 乃令各其邑産, 前代偉人大官, 有威德於民者, 號爲城隍神, 設幀祀之, 听民水旱疾疫, 群往祈福. 今淳昌郡城隍廟, 尙有麗朝平章事薛公儉像, 潭陽府, 有李靈幹像云. 한국학중앙연구원 간행 탈초본 『頤齋亂藁』, 제3책 p.282.
53) 이현주, 「진주 殷烈祠 소장 殷烈公 姜民瞻 影幀」, 『文物硏究』 12, 동아시아문물연구소, 2007, pp.105-128.
54) 姜彛天, 『重菴稿』, 亨冊, 「始祖殷烈公畵像重摹記」. 晉州宗人必儁甫, 能慨然興慕, 倡謀重摹, 乃以聖上十四年庚戌冬十月, 函奉千里徠京師, 絹素丹靑, 渝剝殆盡, 點劃猶隱隱可尋. 彛天王父, 以八耋耆耈之年, 手自移摹, 視諸舊, 不敢有加殺, 行筆傅彩, 精細鮮縟, 殆過之. 庶叔信, 旁助筆硯之役, 越翌月丁丑, 二幀成, 展奉于中堂, 以文告其事.
공의 공업(功業)은 살아서는 진실로 높았고, 죽어서는 능히 나라의 제
사를 받을 만 하여, 그 땅의 정령(精靈)이 밝게 빛나 백성을 복되게 하
였다. 무릇 공을 전후하여 공적을 세운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홀로
공이 이와 같이 된 것은 필시 후한 덕과 정대한 기운의 소치일 것이다.
애석하도다! 역사의 기록이 누락되고 없어져 사실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공이 가신 지 칠백 칠십년이나 되었지만, 지금까지 정성스럽게
받들어 감히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그 인심에 감복됨이 있었음
을 증거 할 수 있다.
화상이 어느 시대에 이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고하건대 문종
(文宗, 1047-1083)이 처음 왕위에 나아가 공의 얼굴을 공신각(功臣閣)에
그려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함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그림이 그때
시작된 것인가?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다. 영정 두 벌이 근래 점점 더
희미해져 장차 거의 없어져 버릴 정도인데, 기도하며 비는 선비와 아녀
자들이 날마다 문에 가득 차 혹 더럽히거나 불경스럽게 하는 일이 있을
까봐 각처의 후손들이 한결같이 두려워하였다.55)
강민첨은 문과에 급제한 서생 출신이었지만 기개가 강건하고 활쏘기에 능
해 많은 전공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현종 9년(1018)에 거란의 소손녕(蕭遜
寧)이 60만 대군으로 침략했을 때 이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익대공신
(翊戴功臣)에 책록되고 사후 문종 즉위년(1046)에 문종의 특명으로 공신각(功
臣閣)에 공신상을 그려 걸었다. 또한 강민첨의 전공을 기려 그의 고향 진주를
주(州)에서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후손들이 진주의 지리산 밑 우산(牛山)에
사당과 우방사(牛芳寺)라는 절을 세워 영정을 봉안했다. 그리하여 향읍에서
영웅시되고 숭배되며 초상화에 주술적 의미가 부가되어 나갔던 듯하다.
55) 上同. 舊有公遺像二本, 一於本府城外, 建祠宇以奉之, 春秋享祀, 官給需. 一在府西四十里牛芳寺, 寺年久毁廢, 十年前, 移奉於舊寺之前斗芳庵, 四隣郡人, 凡水旱疾疫, 他有祈求, 皆禱於祠下,輒有靈應, 神休所曁, 嘉祉孔皆. 嗚呼. 公之事功, 生固卓矣, 死能血食, 其土精靈, 赫赫以福斯民.夫前後於公, 榮名樹勳者, 史豈無其人, 而公獨如是者, 是必有深厚之德, 正大之氣, 有足以致之者.惜乎. 史榮缺略, 無得以詳之. 雖然, 公之卒爲七百有七十年, 至于今, 敬畏之, 虔奉之, 不敢少弛焉, 則其在乎人心者, 爲可徵焉耳矣. 圖像之成, 未知在於何時, 又按文宗初卽位, 制圖公形功臣閣,以勸後來, 圖其始於是耶. 文獻無可攷也. 二本近將漫漶就滅, 士女之禱祀者日盈門, 或有漫瀆不敬,子孫之散處者, 同情通懼.
특히 강민첨의 초상화는 복두(幞頭)를 쓰고 상아홀(象牙笏)을 들고 있어 11
세기에 그려졌던 고려 전기 공신상의 모습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주
목되는데, 길고 가늘게 뻗은 복두의 날개와 좁고 긴 상아홀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시왕도(十王圖)에 보이는 시왕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주
술적인 인상을 주며 제액과 기복의 의미가 부가되는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비록 강민첨의 공신상이 사후 25년 후에 처음 그려졌기 때문에 성현도(聖賢
圖) 풍으로 다소 이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격의
공신상으로 그려져서 봉안된 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초인적 위인으로
숭앙되며 일종의 무신도처럼 무격적(巫格的)으로 숭배되는 단계까지 나아갔
던 초상화의 주술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의 일부 위인들의 경우에는 실제로 무당이 신당(神堂)
에서 섬기는 무신도의 일종으로 숭배되어 초상화의 주술성이 더욱 극대화되
고 제도화된 모습을 보여주어 주목된다. 이러한 무신도 형태의 위인 초상화
는 비록 주인공의 이름이 있어 누구의 초상화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사(實
寫)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술적인 상징적 이미지로 가상화된 것이기 때문
에 초상화의 범주를 넘어선 측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격의 초상
화가 아니라고 하여 초상화 담론에서 완전히 배제하기 보다는 초상화의 주술
성이 무속과 융합되며 다소 세속적인 형태의 극단적인 유형으로 전개된 것으
로 범주화하여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처럼 조선시대의 무신도로 수용된 실존 인물들의 초상화는 대개
비극적 삶을 살았던 위인들의 초상화가 많아 강민첨의 경우와는 대조적인 유
형을 보여준다. 황윤석은 이처럼 조선후기의 18세기 후반에 서울 관아의 아
전과 하인들이 부군당(府君堂)이라는 사당을 두고 최영(1316-1388) 장군(도판
16) 같은 위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모시며 숭배하던 관습이 있었다고 하며 그
실상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전해주어 주목된다.
일찍이 들으니, 서울의 각 관사에는 모두 부군당이 있어 정상(幀像: 족
자로 된 신상)을 설치하고 아전이나 하인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지
금 실제로 조사해보니, 이 의영고(義盈庫)도 그러하다. 부군당이 의영고
뒤에 있어 작은 담장을 두르고 중문(中門)이 있는데, 아전과 하인들이
말하기를 이는 곧 〈송씨처녀상(宋氏處女像)〉으로서 화상은 두 벌이 있
다고 한다. 사헌부에서 비록 신사(神祠)를 금지했지만 이 한 가지 일은
아직 금하지 않았다. 이는 정부에서부터 그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이와 같지 않은 곳이 없는데, 가령 서울 동부와 남부의 관왕묘(關王
廟) 같은 것도 확실히 하나의 음사(淫祠)가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다. 또
들으니, 성균관의 하인들도 벽송정(碧松亭)의 동쪽 골짜기 안에 역시 부
군당을 설치했는데, 그 정상(幀像)은 곧 최영과 그의 딸 우왕(禑王, 1364
-1398, 재위 1375-1388)의 비(妃)라고 한다.56)
오후에 명륜당에 들어가 계성사(啓聖祠)로 발길을 돌렸다가 벽송정에
올라가 동서(東西)의 반촌(泮村)을 굽어보았다. (중략) 성균관의 양현고
(養賢庫) 서쪽 곁에서 부군당에 있는 고려의 충신 무민공(武愍公) 최영
의 상(像) 2개 -동쪽에 있는 것은 금관(金冠)에 옥패(玉佩)를 차고 조복
(朝服)을 입었으며, 서쪽에 있는 것은 주립(朱笠)에 융복(戎服)을 입고
활을 들었다- 와 그의 딸 폐왕(廢王) 우(禑)의 영비상(寧妃像) -고계(高
髻)에 화관(花冠)을 쓰고 하피(霞帔)를 걸친 채 채선(綵扇)을 들었으며
무민공의 두 상 사이에 있다- 을 보았다.
대개 무민공은 일을 살피는 것이 밝지 않아 망령되이 요동을 공격했
다가 위화도 회군(回軍)의 거사가 일어나는데 이르렀다. 그러나 무민공
이 죽자 고려가 망했으니,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포은(圃隱; 鄭夢周,
1337-1392)과 목은(牧隱; 李穡, 1328-1396) 같은 여러 노숙(老宿)들이 거
의 그를 의지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전공을 쌓은 훈업(勳業)과 청렴
하고 깨끗한 절개는 지금도 도성의 백성들이 사당 부근에서는 하마하고
무덤 위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게 할 정도이다. 송경(松京: 開城)에
서는 400년 동안 지금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반인들 가운데 송경에
서 한양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차마 잊지 못하는 것도 마땅한 일일 것이
다.
아아! 훌륭하다! 우리 조선의 지호(芝湖) 이선(李選, 1632-1692)이
『승국신서(勝國新書)』를 편찬하며 또 무민공과 경렬공(景烈公) 정지
(鄭地, 1347-1391), 원수(元帥) 김종연(金宗衍, ?-1390)을 모두 드러내 밝
혀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곡필(曲筆)에 의해 가려지지 않게 하였
으니, 또한 우리나라 백세(百世)의 개안처(開眼處)이다. 지금 경성(京城)
의 각 관사에는 부군당이 있어 각종 괴이한 것을 받들어 모시며 모두
음사(淫祠)를 이루고 있지만, 오직 이 무민당(武愍堂) 하나는 이러한 것
들과 뒤섞어 같게 볼 수 없다고 하겠다.57)
이처럼 실존 인물들이 조선시대의 부군당과 신당의 무신도로 수용된 것은
무속의 무신 체계가 본래 개방적인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하
여 서울 부근의 관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뒤 민간으로 확산되며 마을 신앙의
형태로 토착화된 부군당에는 근래까지도 최영 장군과 남이(南怡, 1441-1468)
장군,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처럼 비극적 삶을 산 위인들의 초상화
가 무신도의 하나로 모셔지며 향사되었다. 이처럼 충절을 지키다가 비극적으
로 생을 마감한 위인들을 무신도로 그려 모시고 향사하는 관습이 행해졌던
것은 성리학적 세계관이 기본 교양으로 보편화되고 내면화되자 영웅들의 비
극적인 삶이 그들에게 동병상련의 친근감과 일체감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들의 해원(解寃)을 통해 자신의
불행이 해소되는 일종의 감응 의식을 갖고, 또한 영웅적 장군의 초능력을 통
해 수호와 제액, 기복의 염원도 담을 수 있는 양면적 효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58)
그리하여 이러한 무신도들은 대개 일반적인 초상화의 범주나 특성을 넘어
주술성을 극대화시킨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무신도의 범주로 전화된 경우가
많다. 현존하는 최영 장군상이 세화(歲畵)의 장군상이나 관왕묘의 관우(關羽)
상과 유사한 도상적,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결
과 이러한 무신도 계열의 범주에서는 일반 초상화처럼 형사(形似)나 전신(傳
神)의 정확성은 애초의 목적이 아니라 찾아보기 어렵다. 그 대신 대개 장군상
이나 보살상 또는 왕비상, 사녀상 등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지물이나 도상적
특징 가운데 일부를 관념적, 상징적으로 차용하고 과장하여 주술적 의미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56) 黃胤錫, 『頤齋亂藁』, 卷十一, 英祖四十四年 戊子(1768), 七月十五日庚子. 曾聞, 京各司, 皆有府君堂, 設幀像, 吏隷輩祀之. 今驗本庫亦然. 堂在庫後, 圍以小墻, 有中門, 吏輩言, 此乃宋氏處女像. 像有二幀, 憲府雖禁神祠, 而此一事, 未之禁也. 此自政府以下, 莫不皆然, 如東南關王廟, 亦居然成一淫祠, 可駭矣哉. 又聞, 成均館下輩, 就碧松亭東邊谷中, 亦設府君堂, 其幀則崔瑩及其女禑妃云. 한국학중앙연구원 간행 탈초본 『頤齋亂藁』, 제2책 p.165.
57) 黃胤錫, 『頤齋亂藁』, 卷二十六, 正祖二年 戊戌(1778), 九月初九日乙未. 午後, 與仲建, 步入明倫堂, 轉向啓聖祠, 因上碧松亭, 俯瞰東西泮村. 盖客懷無聊, 聯袂登高, 亦以寓南望之情耳. 乃從養賢庫西旁, 觀高麗忠臣崔武愍公瑩二像(其東金冠玉珮朝服, 其西朱笠戎服弓矢), 及其女廢王禑寧妃像(高髻花冠, 霞帔綵扇, 在武愍二像之間)于府君堂中. 盖武愍見事不明, 妄意攻遼, 以致威化回軍之擧. 然武愍死, 而高麗亡矣, 使其不死, 則圃牧諸老, 其庶倚仗矣乎. 况其戰伐之勳, 淸白之節,至今都民下馬於尸旁, 草樹不生於墳上. 宜乎松京四百年, 至今廟食, 而泮人之自松移漢者, 亦不忍或忘. 盛哉. 本朝李芝湖選編勝國新書, 亦以武愍及鄭景烈地, 金元帥宗衍, 一體發揮, 使不爲鄭麟趾曲筆所晦, 亦海東百世開眼處也. 今京城各司, 莫不有府君堂, 所奉各異, 擧成滛祠, 而惟武愍一堂, 不可混視云. 한국학중앙연구원 간행 탈초본 『頤齋亂藁』, 제5책 pp.286-287. 이상 황윤석의 무신도에 관한 자료들은 강관식, 전게 「조선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 참조.
58) 홍태한, 「서울 부군당의 실존 인물 숭배 양상」, 『남도민속연구』 17, 2008, 남도민속학회.
Ⅶ. 결어
조선시대 초상화는 주인공의 사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추모와 향사의 대
상으로 봉안되어 제의적 의미가 중시되었지만, 초상화가 그려지고 소통되던
주인공의 생존 당시나 사후의 여러 맥락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개인
적인 성격의 중층적인 의미들이 다양하게 작용하며 파생적으로 부가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초상화는 제의적 의미와 정교적 의미, 수기적 의미, 비망
적 의미, 주술적 의미 같은 다양한 맥락의 중층적인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상장례와 제례에서 영정 사용하는 것을 불교적 속례로 보
며 이단시했기 때문에 조선 초중기에는 고려시대 이래 발달했던 제의적 맥락
의 초상화가 쇠퇴했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불교적 전통 속에서 지속된 어
진은 제향 의식이 국가 의례로 명문화되었지만, 주자가례에서는 영정을 제의
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제의적 의미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
에 성리학자들은 영정을 원칙적으로 제의적 맥락보다 수기적 맥락에서 수용
하는 경향이 많았다.
조선 초중기에 특히 발달한 공신상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교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공신상은 충을 핵심으로 하는 정교적 성격이 강
해 정치적 위계질서와 권위가 잘 드러나는 정장 관복 차림으로 그려지고 전
례성과 정교성이 매우 강조되었으며 조선시대 관복상의 전범으로 인식되었
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국왕 중심의 새로운 정치적 환경 속에서 발달한 어진
은 제의적 의미가 중시되었던 조선 초기의 어진과 달리 제작 과정이나 봉안
과정에 있어서 정교적 의미가 중시되었다.
성리학적 정치질서와 의례문화가 토착화된 조선 중후기에 특히 발달한 유
학자상은 수기적 성격이 강해 주자가례에서 사대부의 기본적인 복장으로 규
정된 심의와 복건 차림의 교의적 도상으로 그려지고 흑백 대비의 질박하고
근엄한 조형이 강조되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자들이 초상화를 널리
수용하자 일반 사인 관료들 사이에서도 자아 존재와 자아 현시를 위한 비망
적 성격의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고관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관복상을
통해 정치적 성공을 현시하고, 일반 문인사대부들은 도포 같은 간소한 평상
복을 통해 꾸밈없고 진솔한 인간적 모습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문인화가들은 깊은 성찰과 높은 조형의식을 통해 미묘하고 다면적인 내적 정
신세계를 뛰어나게 형상화한 개성적이고 예술적인 자화상을 중시했다.
설화적인 영웅들의 초상화는 근원적인 회화적 주술성으로 인해 민간의 무
속 전통과 결합되어 주술적 신통력을 지닌 무신도처럼 숭배되기도 했다. 특
히 조선후기 서울 부근의 관아와 민간에서 성행한 부군당에는 비극적 삶을
마감한 영웅의 초상화가 무신도로 수용되어 봉안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러한
유형의 초상화는 대개 일반적인 초상화의 범주나 특성을 넘어 주술성을 극대
화시킨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무신도의 범주로 전화되며 도상과 기법 등에 있
어서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특징을 공유하는 경향이 많았다.
본 논뭉 취금 초상화 목록.
1. 조중묵(趙重黙) 외, <태조(太祖) 어진(御眞)>, 고종 9년(1872) 이모본(移摹本),
비단 채색, 220×151cm, 전주 경기전(慶基殿) 소장.
2. 전(傳) 옥준상인(玉峻上人),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상>, 전(傳) 중종 31년(1636),비단 채색, 126×105cm, 개인 소장.
3.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합작, <영조(英祖) 어진(御眞)>,고종 광무 4년(1900) 이모본, 비단 채색, 203×83cm, 고궁박물관 소장.
4. 작가 미상, <이시방(李時昉, 1594-1660) 상>, 인조 2년(1624)경, 정사공신상(靖社功臣像),비단채색, 169×93cm, 개인 소장.
5. 김진여(金振汝), 박동보(朴東普), 장득만(張得萬) 외,<김창집(金昌集, 1648-1722) 상>,≪기사(耆社)계첩(栔帖≫,숙종 45년(1720), 비단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 작가 미상,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상>,18세기 후반 이모본 추정, 비단채색, 89.7×67.3cm,국립중앙박물관 소장.
7. 변상벽(卞相璧, ?-1775),<윤봉구(尹鳳九, 1681-1767) 상>,영조 26년(1750), 비단채색, 119.4×90.2cm,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조선시대 초상화를 읽는 다섯 가지 코드 173
8. 작가 미상, <조관빈(趙觀彬, 1691-1757) 상>,19세기 모본 추정, 비단채색, 37×29.1cm,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천리도서관(天理圖書館) 소장.
9. 이명기(李命基, 1756-?),<채제공(蔡濟恭, 1720-1799) 상>(조복본),정조 8년(1784), 비단채색,145×78.5cm, 채규식 소장.
10. 작가 미상, <이창운(李昌運, 1713-1791) 상>,정조 6년(1782), 비단채색, 153×86cm, 개인 소장.
11. 한정래(韓廷來, 18세기 중후반),<임매(任邁, 1711-1799) 상>, 정조 1년(1777),비단채색, 64.8×46.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2. 이명기(李命基, 1756-?),김홍도(金弘道, 1745-1806?) 합작,<서직수(徐直修, 1735-1811) 상>,정조 20년(1796), 비단채색,148.8×7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3.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자화상>,정조 6년(1782), 비단채색, 88.7×51cm,개인 소장(국립중앙박물관 위탁 보관).조선시대 초상화를 읽는 다섯 가지 코드 175
14. 윤두서(尹斗緖), <심득경(沈得經, 1673-1710) 상>, 숙종 36년(1710),비단 채색, 160.3×87.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 작가 미상, <강민첨(姜民瞻, 963-1021) 상>, 조선 후기 18-19세기경 이모본,
비단 채색, 112.4×51.2cm, 경남 진주 은렬사(殷烈祠) 소장.
16. 작가 미상,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상>, 조선 후기,비단 채색, 83×52cm, 목아박물관
국문 초록
조선시대 초상화는 주인공의 사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추모와 향사의 대
상으로 봉안되어 제의적 의미가 중시되었지만, 초상화가 그려지고 소통되던
주인공의 생존 당시나 사후의 여러 맥락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개인
적인 성격의 중층적인 의미들이 다양하게 작용하며 파생적으로 부가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초상화는 제의적 의미와 정교적 의미, 수기적 의미, 비망
적 의미, 주술적 의미 같은 다양한 맥락의 중층적인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상장례와 제례에서 영정 사용하는 것을 불교적 속례로 보
며 이단시했기 때문에 조선 초중기에는 고려시대 이래 발달했던 제의적 맥락
의 초상화가 쇠퇴했다. 그리하여 여말선초의 불교적 전통 속에서 지속된 어
진은 제향 의식이 국가 의례로 명문화되었지만, 주자가례에서는 영정을 제의
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제의적 의미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
에 성리학자들은 영정을 원칙적으로 제의적 맥락보다 수기적 맥락에서 수용
하는 경향이 많았다.
조선 초중기에 특히 발달한 공신상은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교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공신상은 충을 핵심으로 하는 정교적 성격이 강
해 정치적 위계질서와 권위가 잘 드러나는 정장 관복 차림으로 그려지고 전
례성과 정교성이 매우 강조되었으며 조선시대 관복상의 전범으로 인식되었
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국왕 중심의 새로운 정치적 환경 속에서 발달한 어진
은 제의적 의미가 중시되었던 조선 초기의 어진과 달리 제작 과정이나 봉안
과정에 있어서 정교적 의미가 중시되었다.
성리학적 정치질서와 의례문화가 토착화된 조선 중후기에 특히 발달한 유
학자상은 수기적 성격이 강해 주자가례에서 사대부의 기본적인 복장으로 규
정된 심의와 복건 차림의 교의적 도상으로 그려지고 흑백 대비의 질박하고
근엄한 조형이 강조되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자들이 초상화를 널리
수용하자 일반 사인 관료들 사이에서도 자아 존재와 자아 현시를 위한 비망
적 성격의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고관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관복상을
통해 정치적 성공을 현시하고, 일반 문인사대부들은 도포 같은 간소한 평상
복을 통해 꾸밈없고 진솔한 인간적 모습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리고
문인화가들은 깊은 성찰과 높은 조형의식을 통해 미묘하고 다면적인 내적 정
신세계를 뛰어나게 형상화한 개성적이고 예술적인 자화상을 중시했다.
설화적인 영웅들의 초상화는 근원적인 회화적 주술성으로 인해 민간의 무
속 전통과 결합되어 주술적 신통력을 지닌 무신도처럼 숭배되기도 했다. 특
히 조선후기 서울 부근의 관아와 민간에서 성행한 부군당에는 비극적 삶을
마감한 영웅의 초상화가 무신도로 수용되어 봉안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러한
유형의 초상화는 대개 일반적인 초상화의 범주나 특성을 넘어 주술성을 극대
화시킨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무신도의 범주로 전화되며 도상과 기법 등에 있
어서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특징을 공유하는 경향이 많았다.
주제어 Key Words :
조선시대 초상화 Portraits of Joseon Dynasty
다섯 가지 코드 five codes
제의 ritualistic ceremony
정교 politics
수기 self-cultivation
비망 preparation not to forget
주술 incantation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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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Five Codes for the Reading Portraits ofJoseon
Kang, Kwansik/ Professor, Hansung University
In Joseon(朝鮮, 1392-1910), portraits were asked to play a significant rolein terms of ritualistic ceremony as they were enshrined for the descendentsand younger students of the deceased in the portraits in order to have a mediumto cherish their memories and with which to hold ritualistic services.
They, however, were derivatively added under the diverse influences ofmulti-layered meanings of political, social, and personal nature in many differentcontexts during the existence of the models of portraits when theywere painted and communicated or during the years after their passing away. Thus portraits of Joseon contained complex, multi-layered meaningsof various contexts such as politics, self cultivation, aide-memoire usage,and incantation as well as ritualistic service.
Sung-Confucianism of Joseon regarded the use of portrait scrolls during amourning, funeral, and religious ceremony as a mundane Buddhist practiceand heresy, which explains why the portraits in the context of ritualisticceremony, which had developed since Goryeo(高麗, 918-1392), declined inearly and middle Joseon. The use of the portrait of a king, whose traditioncontinued in Buddhist heritage from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wasstipulated as a part of a national ritualistic ceremony. However, the FamilyRites of Zhu Xi(朱子家禮) had a strong trend of denying the significance ofthe portrait scroll as an element of ritualistic ceremony let alone making itcomponent, which is why there was an overwhelming tendency amongSung-Confucianists to embrace the portrait scroll in the context of self cultivationrather than ritualistic ceremony in principle.
Portraits of meritorious retainers, which were developed in particular inearly and middle Joseon, are a good example of portraits' usage in the contextof politics during Joseon. Portraits of meritorious retainers with astrong nature of politics usually depicted the models in an official uniform,which clearly displays the political hierarchical order and authority, put agreat emphasis on the nature of ceremony and sophistication, and served asa standard for official uniforms throughout Joseon. Unlike the portraits ofkings in early Joseon that emphasized their significance in ritualistic ceremony,the portraits of kings that developed in a new king-oriented politicalenvironment in late Joseon placed emphasis on the nature of politics in themaking and enshrinement process.Portraits of Confucian scholars, which developed in particular in middleand late Joseon when the Sung-Confucian political order and ceremony culturewere indigenized, had a strong nature to serve the purpose of selfcultivation. The models were depicted as a doctrinal icon in Shimui(深衣)and Bokgeon(幅巾), which were parts of the basic attire for illustrious officialsin the Family Rites of Zhu Xi, with simple and serious formativenessin black and white contrast highlighted. In late Joseon whenSung-Confucianists embraced portraits on a broad scale, general officialsfrequently had their portraits. Their portraits by nature served in aide-memoireusage as well as self-existence and self-revelation. High-rank officialshad themselves painted in a gorgeous and solemn official uniform to showoff their political success, while common literary and illustrious officials hadthemselves painted in simple everyday clothes like Dopo(道袍) according totheir strong tendency of preferring honest, undecorated, and human aspectsof themselves. Literary painters put much emphasis on distinctive and artisticself-portraits that embodied the mysterious and multi-faceted internalworld of the mind beautifully through profound reflection and high formativesense.The intrinsic incantation nature of portraits combined with the folk shaman tradition had them worshiped like paintings of shaman gods with anoccult power of incantation. Bugundangs(府君堂), in particular, which werein vogue among government offices and civil communities around Seoul inlate Joseon, showed a tendency of portraits of heroes that died a tragicdeath being embraced as paintings of shaman gods and enshrined. That typeof portraits was usually converted into conceptual and symbolic paintings ofshaman gods, which maximized incantation beyond the category and characteristicsof general portraits, and highly tended to share the universal andtypical characteristics in terms of icons and techniques.
- 美術史學報제38집 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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